션이 자세를 다잡는 모습에 다시금 살펴보니 지팡이가 있다. 제를 탈출시킬 적 총에 맞아서 의족을 쓴다고 하는데. 그냥 부상이라면 모를까 의족은 어쩔 도리가 없다. 션을 보는 자매의 시선이 잠시 측은해진다. 아주 잠시간만.
"형태가 어떻든. 제제 군에게도 생각해주는 누군가가 있었네."
곧 시선이 바뀌고 라라시아는 그리 중얼거리며 제의 볼을 토닥였을 것이다.
그 뒤 안식과 연구소 등에 대해 설명을 듣는데. 중간에 제가 끼어들었다. 제가 안식의 사형인이었노라고. 그 말에 자매는 각자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그렇구나. 정도로 가벼운 반응이었다. 말은 없지만 라라시아는 여전히 제를 감싸주고 레레시아는 손을 뻗어 아까처럼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고만 했다.
안식과 가란. 연구소와 엥엘 부부. 이 인물들을 중점으로 퍼진 대략적인 구도를 듣고서 이해하는데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잠깐으로는 안 되서 이래저래 많이 넘겼지만. 중요한 건 다 파악했다.
"내용 참 많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하고. 아주 그냥 뒤에서 별천지 일들을 다 했구만. 사형장에 연구에, 무기 개발에 약 개발에. 세상은 넓고 미X놈은 많다더니. 딱 그 짝이다. 어." "우리도 그런 사람 밑에서 자랐는데. 뭘 새삼스럽게 그래?" "하... 그러게 말이다. 인간 참 잔인하고. 끔찍해." "그렇기에 사랑스럽고. 애절하지."
자매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과거엔 수많은 목숨을 꽃 꺾듯 꺾고. 훗날엔 자매를 인형으로 만들고 직접 던져버린 사람. 그 사람에게 애정받았고 증오가 심겨졌다. 인간을 향한 애증을 갖게 해준 사람. 어쩐지 가란이 어머니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어우 씨. 골 아퍼."
생각이 많아져 이마를 두드린 레레시아는 한숨을 푹 내쉬고 션을 보았다. 어쨌거나 환대니 뭐니 했으니 어떡할지 정해야겠지.
"데이터가 많아졌다는 건 그만큼 뿌린대로 거뒀다는 의미겠지? 하. 귀찮고 짜증나네. 왜 나이 처먹을 대로 처먹은 인간들이 애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지. 잡으면 관절 갯수대로 분해를 시켜줄까. 아 몰라. 아무튼 아까 보스가 환대하라느니 어쩌니 했지? 우리가 뭘 하려는 건지 모르는 건 아닐 거고. 가면 조력은 해주겠다는 거야? 에르베르토인지 뭔지 때려잡고 다 깽판 치는 거?" "우리 동생도 데려와야지." "아 그건 당연하고. 야. 대답."
1. 안식은 세븐스를 누군가의 쾌락을 위해 극한으로 짜내 써먹는 미친 곳이고, 그곳을 경영하는 플랜과 재정을 담당하는 오너는 가란이며 에르베르토는 공동 오너로 세븐스를 짜먹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2. 그런 에르베르토는 아내와 함께 가디언즈를 위한 기술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아내는..
"생방송 토크쇼에서 레지스탕스 단체의 저격으로 사망했습니다."
수잔나 엥엘, 즉사. 이스마엘의 킬 보드에서 볼 수 있던 내용임을 레레시아는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3. 아내가 죽어도 이 기술을 이어가고자 했고,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세븐스 인자로 된 무기와 약물, sogno다. 4. 이 약물이 최근 완벽하게 개량되었고 보급만이 남았다. 5. 문제는 현재 안식의 공동 경영자인 두 사람이 대립각을 세웠고, 그 이유는 제의 탈출을 기점으로, 정확히는 헬무트의 죽음을 이후로 가란의 사상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이는 이스마엘의 페이시 클라우드에서 확언까지 들었다. 6. 가란의 목적은 이 약물을 막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건 추정입니다.
많고, 복잡하고, 짜증이 치미는 일입니다. 내 뒷골! 혈압약은 어딨지? 여기 있습니다.. 제는 머뭇대다 쓰다듬던 손에 머리를 살짝 비빕니다. 그리고 또 혈압이 오릅니다.. 션의 발언 때문에요.
"……그 애가, 에르베르토 님의…."
아니라고 해주면 안 돼요?
"친딸, 이라서요."
이셔주 나와 봐요. 나 이런 막장 서사 싫어해! 죄송합니다 전 좋아해요...
"그, 그게.. 조력을 해주실 것 같습니다."
독액에 겁을 먹었는지 잠시 자세가 비틀댑니다. 그런 모습을 보던 제가 라라시아의 품에 더 폭 안기려 들더니, 꼬리의 끝을 탁탁 땅에 내리쳤지요. 그것도 잠시.
근처의 골목에서 용 한 마리가 승천하자, 션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이를 악물었습니다.
"카스트로가 이미 이 근처에 있었군요."
다른 대원들이 모이는 사이, 션은 눈을 감았습니다. 심호흡. 진정. 성격 더러운 거 티 내지 말자.. 하지만 저새끼들이 먼저! 후우..
"그, 그러니까.. 서두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가 제일 중요한 것을 빼먹었군요?
"……조만간에 데뷔가 예정되어 있기에. 그러니까, 이스마엘 씨가 손에 피를 묻히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잠깐, 뭐?" "집행인으로 추대하겠다고요." "누구 발상이지?" "뒤진 아내 못 잊는 늙은이요."
자칭 슬럼의 레지스탕스들인지, 개가면을 쓰는 컬트 단체인지, 아니면 극단의 배우거나, 광인들의 모임인지. 아니면 제가 속삭이러 온 뱀인 것인지. 허스키의 말을 듣고서 신디는 약간 피곤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마치 무언가 고민하거나 생각하는 듯. 허스키를 내려다보다가는 확신하지 못하는 투로 대꾸한다.
"... 노력은 해보죠."
속삭이듯 말하는 것이 영 가증스럽게 느껴질까. 빌어먹을 개머리 꼬마 같으니라고. 목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욕을 속으로 하고서 들려오는 벌 나는 소리에 고개를 든다. 드론과 함께 선 비숑을 관찰하듯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인다. 퉁명스럽게 답한다.
>>425 >>426 치료라는 말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릅니다. 살아있다고 믿었으니 울부짖는 것이 더 절망적으로 들릴 텐데도. 세븐스를 제압했지만, 이미 약에 찌들대로 찌들었는지 히익- 힉- 하는 기묘한 숨소리를 뒤로 손목에 채워진 수갑과 함께 나동그라집니다. 이쪽 상황은 일단락 되었지만.
소녀는요? 비참하고 *같은 현실에 꺽꺽대며 울고, 안아줄 때도 고통스럽게 악을 지릅니다. 레이먼드가 달랠 적에는 울다가도 몸을 퍼덕거리며 어떻게든 자세를 유지하고자 하니.
이 얼마나 끔찍합니까. 노예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대체.. 어떻게 만든 걸까요?
"죄송해요, 울지, 울지 않을, 으윽, 울지 않을게요. 잘못했, 잘못했어요!!! 잘, 잘 해왔어요, 잘 해왔어요……."
벌벌 떨기 시작합니다. 머리에 손을 얹고 쓸어주는 것을 자주 해줬는지, 아예 몸이 뻣뻣히 굳어버립니다. 눈물이 줄줄 흐르다가도 다시금 망가진 정신 속으로 들어오는 회유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미 텅 비어버린 상태라 그 말입니다.
"저, 저, 정말요. 할게요. 할게요.. 안내할게요. 안내-" "안 돼요."
고운 새가 지저귀는 듯한 목소리를 뒤로, 소녀의 목이 뒤틀립니다.
우드득.
입이 있어야 할 곳에 이마가 있고, 이마가 있어야 할 곳에 입술이 있는 기괴한 상황을 뒤로 소녀가 늘어집니다.
"미안해요."
목소리가 들린 곳에서는, 단정하고 검은 원피스, 마치 장례식 복장과도 같은 옷차림을 한 사람이 서있습니다. 새하얀 머리카락은 넘실대고, 귀는 소의 것이며, 머리에는 뿔이 돋고, 꼬리는 원피스 밑자락에서 살랑대는 것이. 그 부분만 제를 똑 닮은 모양새였지요.
"생명은 모두 귀하지만, 배신자에겐 아니니까요."
그런데 이 목을 뒤틀어버린 능력이. 염력이었지요?
"반갑습니다, 레지스탕스 여러분."
공손히 인사를 한 그것은, 새빨간 눈동자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카스트로 오메가. 안식의 임시 집행인이자 배신자를 처리하는 일을 맡고 있어요. 응당 행했어야 하는 섭리였으니 너무 괘념치는 마세요."
당신들이 공격하려던 찰나- 뒤에서, 무언가 날아오릅니다. 검은 용..!! 그리고 앞을 돌아보는 순간..
"어라.. 벌써 일을 끝마친 걸까요. 우리 누나가 그럴 리가 없는데.."
역시 직무 유기겠죠.. 라며 저.. 저.. 원피스를 입고 누나라 발언하는 못된 녀석의 몸이 뒤틀리더니.. 마찬가지로 검은 용이 되어 당신들을 내려다 봅니다.
"어쩔 수가 없어요. 나는 응당 해야 할 일을 끝마쳤으니. 그러니.. 안식에서 기다릴게요. 그때는 우리, 사형 당하도록 해요. 아, 화내면.. 기쁠 것 같아요. 그깟 것 죽었다고 화를 낸다니.. 미욱한 것의 발버둥은 늘 즐겁잖아요."
에르베르토의 아내. 수잔나 엥엘의 사망 정보는 킬보드에서 봤었다. 자세한 내막을 알고 다시 생각해보니-
"그 야랄을 하고 총 한 발에 죽었으면 호상이지. 호상. 아픈 것도 모르고 훅 갔을 거 아냐? 하. 그렇게 쉽게 죽이면 안 됐는데."
아깝다. 레레시아의 목소리가 무심하고 무신경하게 말을 내뱉었다. 지은 죄의 무게가 얼마인데 그걸 그렇게 쉽게 보내줘 버리냐고.
아무튼 이어지는 얘기로 추정해본 바. 가란 역시 그 무게를 내려놓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지금의 사태를 어떻게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뭐 만나서 들으면 되나. 손에 머리를 부비는 제를 평온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레레시아가 돌연 미간을 구기며 혀를 찼다. 션의 말 때문이다.
"하여튼 이 인간이고 저 인간이고 지 X끼 못 굴려서 안달인 인간들만 사나."
애꿎은 션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내며 제를 쓰다듬는 손길은 다정한 이 모순이란! 션이 고개를 들자 자매도 고개를 들어 날아가는 용을 보았다. 검은 용. 검은 비늘. 저것들이 그 애에게 붙어 혓바닥을 놀렸다 이거지. 결단코 그 입과 성대 만은 흔적도 남겨놓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 다짐은 이스마엘을 집행인으로 올릴 예정이란 말에 더욱 굳건해진다.
"그런 건 먼저 얘기해야지. 눈치 X나 없네. 확 그냥."
레레시아의 추임새를 따라 독액이 뱀마냥 빠르게 움직이며 션을 위협한다. 쯧! 다시 혀를 찬 레레시아가 무전을 열어 모두에게 전파한다.
"아아. 특수부대. 여기 친절하게도 안내와 조력을 해주실 분을 찾았다. 후딱 모여서 X 같은 안식인지 뭔지 깽판 치고 빼앗긴 거 되찾아오자고."
생각나는 대로 내뱉는 말들이 통신으로 모두에게 전해지던 중. 라라시아는 제를 한껏 감싸안으며 말했다.
"제제 군. 이제 와서 돌아가래도 안 갈 거지? 그럼 하나만 약속해. 무슨 일이 있어도 나한테서 떨어지지 마. 그리고 함께 갈 사람들을 믿어. 꼭 지키고 데리고 돌아갈게. 너도 이스마엘도 같은 에델바이스고. 음. 어쩌면 곧 가족이 될 지도 모르는 사이니까?"
기분 나쁜 허스키 보다 리더인 비숑은 정상인지라. 그의 태도에 조금은 의심을 풀어낸다. 사용자 그레인저는 당신의 본명인 건지. 당신을 물끄러미 건너다 보다, 드론이 띄우는 홀로그램 영상을 집중하여 본다. 제압되는 네 모습에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쥔다. 이 분노를 잊지 말아야 해. 그대로 돌려주어야 하니까. 영상이 끝나면 신디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두통이 어린 듯 제 관자놀이를 짚는다. 정보원이 그랬던 것은 이 때문이구나. 네가 아닌 다른 이가 부르는 제 별명은 왜 이렇게 어색하게 들려오는 건지. 신디는 이어지는 사과에 고개를 떨구며 바닥만 내려다보다 들며 비숑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