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제압이란 단어는 이상했다. 무언가 억눌러서 통제할 것이 있어야 제압이라 부를만 할텐데, 아무런 의지가 없는 몸은 허수아비 같았다. 나무로 이루어진 몸이 아니라 부러지진 않으니 다행이리라. 제대로 겨누지도 못하는 총을 네게 겨누었을 때부터 이미 목숨을 내다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니, 네가 달려들었을 때 손에 쥐고 있던 총도 곧 바닥에 떨어지며 소리를 낸다. 장난감 플라스틱 총보다도 위협적이지 못 했는데 그마저도 없는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뚫린 입으로 무슨 소리라도 내는 것이 최선이다.
“제가 배우질 못한게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이 별로였어요. 그 사람도 지금 절 못 죽이고 있거든요.”
_죽음은 겁나지 않았다. 네가 죽이려고 했다면야 이미 몇 번이고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아둔한 이는 왜 떨고 있는가. 이제는 몸으로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키고자 했던 자를 죽여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는 것을 머리로 깨닫은 게 채 이해되기도 전에, 네가 달려들어 제압이라고도 못할 제압을 함으로써 몸으로도 알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널 해쳐야만 함을 겁내는 것이다. 용기도, 배짱도, 자존심도, 아무것도 없었다.
“……전 책임을 져야해요. 선배가 없어진 빈 자리는 그 후배가 메꾸겠죠.”
_그런 시시하고 재미없는 삶을 살기엔 늦었다. 총을 잡았더라도, 사람을 해했더라도, 적어도 당신처럼 되고 싶단 생각만 안 했더라면 늦지 않았을텐데.
“왜요, 못할 것 같아서 겁나요? 멍청한 후배 가르치는 일보다 쉬울걸요.”
_악에 받친 목소리에 끝까지 힘을 싣지 못할 것만 같아서, 절대로 너를 보지 않았더라. 유감이다. 꺾여버린 고개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눈물이 맺히지 않게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몸. 총까지 놓쳐버린 너를 죽이는건 아주 쉬웠다. 쉬울터였다. 자신을 못 죽이고 있다는 너의 말에 반박을 할 수 없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여전히 너를 찍어 누른 손에서 힘을 풀지 않은채로 생각을 시작했다.
"네가 전의를 잃은게 처음부터 보였으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것에 관계없이 일은 확실하게 처리하라 가르친건 자신이었으니. 전부 거짓말이었지만 너를 가르치는 것 만큼은 진심이었다.
"굳이 전부 책임지려 하는 버릇은 너만 피곤해지니 빨리 고치는게 좋아...라고도 이미, 몇 번이나 말했었지."
그런 네게 진심을 써버렸다. 그런가. 그것부터 문제였던것이다. 그 무엇에도 진심을 담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기본적인 것 부터 놓치고 있었으니 지금 널 죽이지 못 하는건 자명한 일이었다. 그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자. 나는 너를 죽이지 못 하게 되어버렸다. 네가 말 한대로 평범하게 사는것 따위는, 자신에게는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못 할것 같아서 겁이 나니까. 이런 자신을 닮으려한 너도 마찬가지일까. 그래도 나만큼 늦지 않았기를 바라고 있기는 한데.
"그래... 그럼, 네 말대로 후배가 멍청하다는걸 감안하면서 말 할게. 저쪽에 있는 철문을 열면 비상계단이 나와. 그 계단을 쭉 내려가면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도망칠 수 있어. 내가 사용하려던 루트니까 장담해."
그리고, 네가 이것이 싫다고 하면 남는 상황은 하나뿐이다. 너와 나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상황. 그런데 나는 이미 진심을 담는 실수도 저질렀고, 그런 주제에 너를 죽이는것도 싫다고 하니 남는건 하나겠지.
_그래, 지금만 해도 굳이 총성을 내지 않고도 조용히 죽일 수 있다. 반항할 기미는 보이지도 않으니 목이라도 조르면 수분 내에 숨이 넘어갈 것이다.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고 누가 그랬던가, 이 자도 그러했다. 비록 너를 죽일 용기는 없으나 진심을 밝힐 용기는 있었다.
“……저는 말할 수 있어요. 선배가 살았으면 좋겠다고.”
_비록 그 시야는 두 눈을 힘주어 감아 여전히도 너를 비추지는 못 했다. 하나 두 눈을 봐야만 진심이 느껴지기에는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물기가, 떨림이 진했다. 누가 들어도 우는 듯한 목소리임을 본인도 느껴 울음을 참기가 버거웠다. 차라리 총에 맞는 것이 덜 고통스러우리라. 칼에 찔리는 것이 덜 고통스러우리라. 해야하는 일도 하지 못 하고 감정에 휘말려 휩쓸려가고만 있다. 그럼에도 그러해도 좋으니 네가 죽길 바라지 않았다.
“무슨 상관이에요, 이제는.”
_걱정인지 가르침인지 모르겠으나 어느쪽이어도 괴로운지라 입술을 물었다. 여기서 헤어지게 된다면 너는 더 이상 선배가 아니고, 네 손에 눌린 이도 더 이상 후배일 수 없다. 선배라는 말을 애써 짓이겨진 소리라도 내는 것은 마지막까지 부여잡고 있는 간절함이었다. 부탁 좀 들어달라며 말했던 요구를, 욕심을 받아달라며. 겁이 나더라도, 어울리지 않더라도, 견뎌낼 수 없더라도 모른체 살아가달라고.
“이게 무슨…!”
_처음이었다. 팔에 힘을 올곧게 싣고 뿌리치려 애썼다. 실수로라도 방아쇠를 당겨버릴까 겁에 질려하는 꼴이 처음 총을 쥐었을 때보다 우스울 지경이었다. 놀라고, 당황하고, 두려워서, 억지로 쌓은 둑이 평화로운 척 잔잔하다 한 번의 파문이 일자 넘쳐 흘러버린다. 기어코 총을 쥐어지게 된 손은, 머리를 겨누게 된 손은 눈에 띄게 떨었다. 네 손에 붙잡혀있더라도 멈추지 못 하는 울림이었다. 이제는 울음 때문인지 겁 때문인지 모를 떨림이다. 이제서야 너를 바라보나 눈물이 시아를 흐려 온전하게 담지는 못한다.
처음부터 이러지 않았을 터다. 너와같이 진심을 밝힐 용기가 있었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것은 그저 비겁한 거짓말 뿐.
"거짓말을 일삼고, 너까지 통째로 전부 배신한데다, 죽이려고 까지 한 인간을 끌어안고 가는건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걸 가르쳐주고 있는거야. 명백한 적을 살릴 이유가 어디에 있지?"
감정론을 전부 배제하고 이론만을 들이채운 말이었다. 자기자신의 감정조차 들어가질 못 한, 그런. 그럼에도 그 말을 굳이 육성으로 내뱉고있는것으로 암시하는것이다.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고. 선배니 후배니 하는것들은 전부, 지금 너를 붙잡고 있는 이 손으로 부숴버렸다고. 그러니까,
"...이제 봐주네. 지금 잘 하고 있으니 그대로 쏴. 그럼 책임지는 행위로도 충분할거야."
_대답을 하지 않았다. 네가 그랬듯이 전하고 싶은 바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소리내지 않아도 전달할 수 있으니, 입을 계속 다문 채로 대답을 거부할 뿐이다. 눈물을 훔칠 생각도 않고 훔치지도 못 하는 이는 눈물이 차올랐다가 떨어지며 뿌옇다가 선명해지는 시야. 그런 시야로 너를 보고 있었다. 죽이고 싶지 않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버렸기 때문에, 죽이고 싶지 않다는 뜻은 네가 죽겠다 마음 먹었다는 것이다. 알 수 밖에 없었다. 너를 닮고 싶어했던 이도 널 죽이지 못 하고 저는 죽을 각오를 했으니 알 수 밖에 없으리라.
_이런 일을 함에도 여지껏 살아 숨쉬다 못해 지금까지도 숨을 쉬는 건 네 탓이다. 덕이라고 해야할지 때문이라고 해야할지 고민하나 고르지 못 했다. 살아있음에 감사하기에는 타인의 죽음을 쌓아올린 삶이니 얼굴에 철면피를 두르더라도 못할 짓이다. 그런 삶일지라도 계속 숨을 쉰 건 네가 목표가 되어주었고, 스승이 되어주었고, 지금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부를 이름도 없는데 치사하게.”
_이름을 부르니 눈물짓다가도 쓰디쓴 미소를 머금었다. 네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어 가짜 이름이라도 불러보려다 말았다. 대신 너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아니, 총구에 기대는 네 무게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번 저울질을 해본다. 너를 죽인 저가 살아갈 때와, 저가 죽은 네가 살아갈 때. 아무도 죽지 않기를 원하나, 총구에 기대는 모습을 보니 그게 편한 길이라 고르는 것인가 싶어 생각해보는 것이다.
“선배, 한 번만 거짓말하지 않고 말해주세요. …선배는, 정말, 죽고 싶어요?”
_도망치라는게, 죽음으로 도망치라는게 아니었는데 그것이 네 피난처라면 제 마음이 무슨 문제일까. 그저 어디선가 네가 살아있으리라 믿으며 위로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가보다.
_네 뒤만 쫓아 자라왔던 이는 여태 그 길이 거짓이라고 해도 다른 길을 찾지 못했나 보다. 아니면 네가 먼저 걸어갔을 지언정 저가 직접 걸었으니 제 길이라고 우기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니 계속 가던대로 꿋꿋이 걸어가겠노라,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이겠지. 총구와 네 머리가 맞닿지 않자 손목을 꺾어 방향을 틀었다. 허공을 향한 총구는 더 이상 떨리질 않았다. 울음이 멎은 것이 아닌데도 그럼은 역시 모든 떨림은 너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죽이러 와요.”
_그 말이 얼마나 기쁘게 들리는지 당신은 모르겠죠.
“선배가 죽이러 올 때까지 절대 안 죽을테니까, 선배도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저 죽이러 오라고요.”
_멍청하면 용감하다는 말에 한 가지 덧붙일 수 있다면 잘 웃는다는 말이리라. 네 이름을 듣더니만 여전히 눈물로 촉촉하더니만 말갛게 웃지 않는가. 그러고나서는 허공에 불규칙한 총성을 울린다. 없는 시간을 더 줄여버리려는 의도였다. 이 소리를 듣고 찾아올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네가 떠나길 재촉하기 위해서.
>>215 # 고생 많앗어~ 요근래 답레가 기다려질만큼 재밋엇다! 이런상황 개재밋겟다; 하고 가볍게 올린거엿는데 이렇게까지 대유잼이 되다니……. 선배님 존함이 궁금하고 이건 아무도 안물어봣지만? 후배는 어느정도 선배 대신 구른 후에(?) 경치 좋은 어딘가로 아주 멀리 무작정 떠나서 거기 있는 꽃집에 무작정 아르바이트로라도 써달라고 할 계획이라더라. 선배가 못찾게.
>>216 #너 참치도 재밌었다니 다행이다! 고생많았어~ 선배님 이름... 엄청 특이한거일것 같다. 정작 가명은 진짜 평범한거였겠지만. 후배 구르고ㅠ나서 정작 자신이 평범하게 사는구나... 선배는 후배 말 안 듣고 하던 일 계속 하는데 후배가 엮일만한 일이다 싶은건 다 끼어들어서 괜히 기웃댈듯?
>>217 # 재밋없을 수가 잇나요………? 재밋게 이어줘서 고맙다고 108배라도 올려야 쓰겟는데……. 가명조차도 고귀햇을 우리 선배님… 만수무강무병장수하세요 ㅠ 응, 어느 정도 책임 다 진 거 같다 싶으면 이 일에 손을 떼야 선배가 살 거라고 생각햇거든. 다시 만날 때는 누가 죽든 할테니 만날 일 없게 만드려고 그랫대~ 선배님… 그렇게 해서는 우주최강의 선배밖에 되지 못해요……. 그래도 살아쥬셔서 감사합니다 ㅠ
>>219 # 선배 가르침을 받고 자라서 선배님 관해서는 일취월장 했대~ (??) 선배님 알게 모르게 후배한테 물든거 같아서 둘 관계성 넘 존맛이야 ㅠ 앗 근데 우리 일상도 끝나고 햇으니까 계속 여기서 이렇게 얘기하는 건 민폐인가 걱정되갖구 :3 혹시 더 얘기할 거 잇으면 못다말에서 찾아줘~~!
연구원님, (밝고 명랑한 목소리가 맑은 구슬 굴러가듯이 청량하게 울린다. 목소리는 한없이 산뜻한데 보이는 모습은 만신창이다. 유리벽에 찰싹 달라붙어 당신을 바라보는 실험체는 천진난만하게 방글방글 웃는다.) 내가 재밌는 비밀 얘기 해줄게. 나는요, (목소리를 주욱 낮추더니 소곤거린다.) 내 실험이 성공하는 날 죽어버릴 거야. (배싯 웃는 것은 참 아이같았다. 하는 말이 섬뜩하기 그지없었지만.)
>>222 마음가짐이 잘못 되었는걸. 물론 네가 죽지 않길 바라는 노심초사하는 마음에서 말하는 것도 있지만, 기왕이면 나 포함 모두를 죽이겠다는 목표를 가지도록 해. (웃는 당신의 미소를 지켜보다가, 묘한 표정으로 유리벽 너머를 바라본다. 바이탈을 체크하고, 변화를 기록하고, 가끔은 실험체화 회화를 가진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재촉에 한숨을 내쉰다.) 좋아. 그러면 문항이다. 비, 바람, 눈, 번개, 무엇이 좋지?
>>223 왜? 너희는 내가 죽어서, 이 짓을 또 할거야. 나랑 비슷한 조건의 실험체를 찾는 것부터 다시 시작할 거라고. (잠깐 골똘하게 고민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히죽거린다. 다시 당신을 바라보았다.) 이왕이면 걔도 실험이 성공하는 날 죽어버리면 좋겠다. 우릴 가둬둔건지 너흴 가둔건지 헷갈릴거야, 그치. (문항이라는 말을 들으니 유리창에 달라붙어있던 몸을 떼고 바닥에 대자로 뻗어 누워버린다.) 지겨워, 지겨워. 눈이 좋아, 눈. 하늘에서 내리는 거 말고 네 눈.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를 낸다.)
>>224 그건 우리로써 꽤 괴롭겠는걸. 너같은 적합자를 찾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기록 말소를 위한 전초 작업, 은폐, 인력들을 생각하면. (마주보는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면서 볼펜으로 차트를 툭툭 건드린다.) 하지만 우리는 어쨌든, 천천히, 가혹하게, 해내겠지. 우리가 전원 죽지 않는 이상. (한숨을 지으며 대자를 뻗어버린 당신을 내려다본다.) 우린 이미 갇힌 신세야. 협조를 안해준다면, 해줄 때까지 무언갈 하는 수 밖에 없고. ……내 눈이면 충분하겠어? 네게 한 짓이 있는데. (차트에 했던 것처럼, 볼펜으로 제 눈가를 툭툭 두드린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도 내 눈 만큼이나 예쁠걸. 눈에 체크할게. 자, 다음. 모험할 친구는 누가 좋아? 나비, 고양이, 개, 그리고 나.
>>225 협조는 이미 충분하잖아. 마지막의 마지막에 딱 한 번 반항하는거야. (내려다보는 시선을 무시하며 볼멘소리.) 난 너희가 고통받는게 보고 싶은데, 정말, 난 이미 죽어버렸을테니까 직접 못 보는게 아쉽다. 나중에 죽어서 만나게 되면 이야기 들려줘? 내 시체를 어떻게 했는지부터가 시작이야. (대자로 뻗어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세워 앉았다. 기대감이 부풀어올라 설렌다는 듯이 눈을 빛낸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기억 안 나는데, 네 눈은 기억나거든. (내가 보는게 그런 거 말고 뭐가 있겠어? 비아냥대더니 친구라는 말을 듣자마자 헛구역질 시늉을 한다.) 우웩, 그런 낭만적인 단어가 어울린다고 생각해? 너나 나나.
>>226 곧 죽을 사람처럼 구는데, 몸의 60프로가 없어도 살려낼 수 있는 게 여기 의료진들이야. 그러니까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내 권한으로 가능한 거라면 뭐든 가져다줄테니. 옆방은 초콜릿 상자를 달라고 했어. (당신의 설렌다는 눈빛을 질린다는 표정으로 받아낸다.) 보고싶으면 말해. 눈높이는 언제든지 맞춰줄테니. 대신 주지는 못하니까 양해해줘. (당신의 헛구역질하는 시늉에 웃음을 터뜨립니다.) 그럼. 현실에서 하기 힘든 것, 이루기 힘든 것이니까 낭만인 거 아니겠어. 자, 친구가 된 기념으로 질문에 성실히 대답해주겠어? 대답 안하면 정말 나라고 적어버릴테니까.
>>227 내가 언제 죽을진 너희 손에 달렸지. 실험이 성공하는 날 죽을 거라니까. (몸의 60%가 없어도 살려낸다는 말에는 눈을 찌풀거렸다. 죽음조차 내 것이 아닌 처지가 영 고깝다.) 초콜릿? (초콜릿 상자. 제 귀가 먹었나? 싶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이고, 동그랗게 뜬 눈을 얄밉게 깜빡거린다. 그러다 히죽 웃으며 야살스레 눈꼬리를 접는다.) 걔 귀엽다, 그럼 나 옆방 애 만나게 해줘요. 잘생겼어? 예뻐? 나보다 나이는 어리면 좋겠는데. 너희들은 새빠져라 공부에 연구만 하니까 다 늙어빠진 상이라고. (키득거리며 다시 대자로 누워버린다.) 됐거든, 안 봐. 내 눈도 잘 기억 안 나지만 그래도 분명 네 눈보단 예쁠 걸. (친구다 된 기념이라니, 뭐라니. 귀 후비적거린다.) 그러든가. 연구원님, 나랑 친구하고 싶었어요?
- 에구, 또 그 1인실 애기에요? - 네…. 하지 말래도 계속 그래요. - 거기 누가 있다고 그러는지 몰라, 정말.
"이상해. 왜 선생님들은 안 보이지이."
당신을 바라보면서 가물거리는 눈이 동그랗다. 아이 환자복은 옷이 조그말텐데도 그것도 크답시고 둥둥 걷어올린 소맷단들이 벙벙하고, 달려있는 주머니도 조그맣다. 아이는 조그만 주머니에서 이런저런 군것질 거리를 손바닥 위에 꺼내놓는다. 그것들을 볕드는 창문가에 조르륵 줄지어 세워놓고, 비어있는 병실 침대 위로 올라와 앉고 하자니 짧은 다리가 바쁘다. 종종종 걸어와서 폴짝 뛰어 올라 앉으면 아주 작게 풀썩거리는 소리가 난다.
"나 거짓말쟁이 아닌데…."
시들시들, 금새 기운없어 하며 고개를 숙인다.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이 동동 떠있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찬란한 황금빛으로 강렬하게 반짝이는 따스하고 온갖 것에 겹쳐 보이는, 그럼에서도 마치 옛 된 창백한 흰 색의 여인과도 같은 단편으로 흐릿하게 엿보이는 무언가가 부드럽게 그 풍경, 그 장소에서 말했다. 아니, 그것은 소리도 무엇도 아니 였으나 아이에게는 그렇게 인지되는 것이라. 그것은 이것은 정말로 빛인가? 그렇게나 강렬한데 눈부시지도 않다. 이렇게나 따스한데 공기와 사물은 그 온기를 가지지 못한다. 그런 것은 아이에게는 어떠한 의미인가. 그와 상관없이 이 존재는 명백했다.
{너의 진실은 그들에게 진실이 아니야. 빛을 알지 못하기에 진실은 자체로 덧 없으로다}
그것은 아이의 중얼거림에 다시금 그렇게 '말했다' 지금 것 그래 왔듯이 다른 누구에게도, 울림조차 없는 들릴 수 없는 기이한 것이나 아이에게는 익숙할 터인 방식으로...
비틀어진 천좌(天座)의 치세도 오늘로서 막을 내렸다. 나, 개천교(開天敎)의 교주인 홍련마제(紅蓮魔帝) 채유라(蔡流羅)의 일생 최후 업적이었다. 무림의 끝없는 혈육도 이것으로 종지부를 찍고, 암흑과도 같던 지난 날들을 뒤로 보내고 개천교의 이름처럼 하늘을 다시 열어 새롭게 시작하리라.
그렇지만, 새롭게 열린 세상을 보지 못하고 나는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해야 한다. 그것은 나의 업(業)이었다. 그 업은 내가 대업을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필요했지만,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는 잊을 수 없는 치욕이자 복수의 칼날을 갈고 닦을 수 밖에 없었던 비극이었다.
나는 눈 앞의 당신 인생을 비틀어놓은 장본인이었다. 정도(政道)로서는 세상을 바꾸지 못했기에 사도(邪道)로서 본보기가 될 정도를 부숴야만 했다. 미래가 유망하던 한 유파를 내가 세울 마교(魔敎)의 명성을 위해서 파멸시켰으니까. 생존자인 너는 아무것도 모른채로 복수를 위해 그 자리에 있었던 나를 의지해왔다. 내가 그 복수의 대상임을 너는 몰랐다. 내가 그렇게 너를 속였으니까. 모든 것은 정도의 잘못이라고. 잘못되어 비틀어진 천좌와 천좌의 권력에 빌붙어 사는 정도를 꺾어 버리기 위해서 나는 그것을 정도의 짓이라 너를 속였다.
어쩌면 그 때부터 나는 나의 최후를 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최후에 내 업적을 마무리했을때 무대에서 퇴장할 때는 네가 마무리했으면 좋겠다고.
"어렴풋이 알고있지 않았느냐. 네 칼끝이 향해야 할 곳은 저곳이 아니라.."
나는 수많은 피가 묻어 지워지지도 않는 내 오른손의 검을 무너진 옥좌로 향했다가 왼손으로는,
"이곳이 아니더냐."
나를 가리킨다.
"수년간 내가 염원하는 일을 위해 도구로서 일해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지. 이제 그 검으로.."
피가 튀는 전장에서 죽어나가는 이들을 뒤로 하며 병사들은 앞으로 질주했다. 그들의 목적은 이 일대를 다스리는 영주를 치는 것이었다. 반란이라면 반란이었으나 명분은 그들에게 있었다. 이 일대를 다스리고 있는 영주는 그야말로 영지민들의 피를 빨아먹으면서 사는 악독한 이였기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세금을 수탈하고 죄없는 사람들을 끌고 가서 자신의 유흥을 위해서 노예처럼 부렸으며 더 나아가 자신에게 거슬린다는 이유로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일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결국 더 이상 영주에게 시달릴 수 없다고 판단한 이들은 모두 횃불을 들고, 칼을 들고, 창을 들고 공격했다. 영주의 밑에서 일하고 있는 기사나 병사들 중에서도 마음을 돌려 반란군들에게 합세했다. 반란군들은 거침없이 영지를 점령했고 이제 남은 것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영주가 있는 성 뿐이었다.
은색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성문앞에 서 있는 2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사내는 원래 감옥에 있던 이였다. 집안 대대로 영주를 지키면서 살아왔으며 자신 역시 영주를 보필할 생각이었다. 허나 이번 대의 영주의 폭정을 막아보고자 몇 번이나 간청했고 영지민들에게 도움을 몰래 주는 등 나름대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막아보려고 노력한 이였다. 허나 그것이 너무나 거슬린 탓이었을까. 결국 사내는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렇게 삼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영주는 결국 이 사태를 막아보고자 사내를 다시 풀어줬다. 어떻게든 이 사태를 막아보라고 요청하며 막기만 하면 너의 죄를 다 씻어주겠다는 말을 한 것을 떠올리며 사내는 쓴 웃음을 지었다.
'더 이상 그 분에게 희망은 없어. 아마도 잡혀서 죽게 되겠지. 아마 여기서 막아선다면 나 역시도 같은 운명을 걷게 되겠지. 허나 집안 대대로 그 일가를 모시고 산 나에게 있어서 다른 길은...'
이미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며 사내는 쓴 웃음소리를 냈다. 이 또한 운명이었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일가가 대대로 수행한 그 임무를 마지막까지 하리라 다짐하며 사내는 반란군들을 맞이했다.
"여기까지 온다고 수고가 많았습니다. 반란군이여. 허나 이 앞은 지나갈 수 없습니다. 굳이 지나가겠다고 한다면 저는 죽이고 지나가십시오. 가능한한 서로 피를 흘리지 않는 쪽이 좋겠지만... 당신들은 돌아가지 않을테니 저는 제 임무를 다하겠습니다. 자. 오십시오."
이어 사내는 두 손에 검을 쥐었다. 마법도 일부 사용할 수 있으며 검술 실력도 제법 좋은 이였기에 어설프게 공격을 하면 오히려 죽을지도 모르는만큼 반란군들은 잠시 멈칫했다. 허나 그 중에서도 용기가 있거나 사내에게 맞설 이는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내는 그 상대를 가만히 바라봤을 것이다. 일단 덤비진 않으며,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상황은 폭정을 일삼은 영주를 몰아내고 죽이기 위해서 반란군이 일어난 상태이고 충언을 했다가 감옥에 갇혔던 사내가 풀려나서 그다지 내키진 않지만 그래도 자신의 가문이 대대로 영주 이가를 지켜왔으니 자신도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일단은) 마지막 관문을 막고 있는 그런 상황이야. 일단은 판타지도 가능하다는 느낌으로 마법도 사용 가능하다는 설정이야! 이 모든 것이 꿈이라던가, 영화 촬영 끝! 처럼 갑자기 뜬금없이 상황을 종결시켜버리는 것만 아니면 어떻게 이어도 괜찮아! 사내를 아는 이도 괜찮고 모르는 이도 괜찮아. 설득을 해도 괜찮고 죽이려고 달려들어도 괜찮아. 사실 파엠 풍화설월 브금 듣다가 갑자기 떠오른 상황이라서 정말로 적대하고 죽이려고 해도 오케이야! 물론 설득하거나 대화를 시도해도 오케이야!
>>234 파죽지세. 반란군은 우뚝 섰다. 나아가자니 태산같은 굳건함이 가로막고 있고, 돌아가자니 국민들의 피에 물든 땅을 밟을 염치가 없다. 고작 20대 초중반의 어린 사내인데, 그 위압감에 병사들은 방어적인 태세를 취해 머무는 것이 고작이였다.
"이게 얼마만인가? 오랜만이오, 내 벗이여."
어느샌가 최전선 앞에 기척을 나타낸 남성이 답을 해 오며 사내 쪽으로 살며시 거리를 좁힌다. 온통 검은색으로 싸맨 것이 그가 암살자임을 과시하는 듯 했다. 얼굴을 가리던 천을 조금 내려 얼굴을 온전히 내비치면 보이는 것은 텅 빈 두 눈이였다. 이 자리에 선 이상 결의가 비쳐질 법 한데, 그 푸른 눈에 비치는 것은 빛조차 반사되지 않은 암울함이였다. 그에 상반되게 잇몸이 드러날 정도로 훤히 웃으며, 단검을 도로 허리춤에 차더니 사내 쪽으로 가벼운 발걸음을 한다. 그걸 보는 반란군은 더욱 경직되었으나, 듣자 하면 돌발행동을 하는 남성의 욕이 섞여있었다.
"동무께서도 알다시피, 난 살인을 즐기오. 다만 지금 그대는 미련하기 짝이 없어 살해가 꺼려지네-" "자고로 살인은, 살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꺽는 묘미로 행하는 것이지. 가축마냥 죽음을 받아드리는 중생은 찢어도 아무런 낙이 없더외다."
그는 사내와 같은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탈옥한 남자였다. 사내가 그와 정녕 친했든, 남보다 못한 사이였든,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 그는 제 아비와 윗혈육을 죄 극악무도하게 살해했으면서도, 투옥 생활 내내 내비친 모습은 평범하고 순박하기 짝이 없는 어린 청년의 모습이였던, 그런 위선적인 인물이라고.
"오랜만에 본 친우에게 이런 부탁으로 눈을 띄우는 것도 참 염치 없다만, 옛 정을 봐서라도 들어 주면 안 되나?"
사내가 별 제지를 하지 않는다면, 코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을 것이다.
"피를 뒤집어쓴 그대의 주군에게 내 여동생의 혈흔까지 스며들었다네. 오라비로서 도리는 다할수 있게, 비켜주면 안 될까."
(대광장의 높디 높은 단상 위, 환호와 꽃다발의 세례를 발밑으로 두고 양팔을 펼치며 연설하는 한 장군, 그러나, 광장 구석에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의 입구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로 아득한 모습이다.) 저기, 보여? 너는 나보다 키가 크잖아.(당신 바로 옆에서 벽에 기댄 채, 처량한 목소리로 묻는다.) 보일 리가 없으려나. 너무 멀어서...... 멀어서 차라리 다행일지도. 다들 시끄럽네. 엄청 기뻐하고들 있어. 바보들, 저 사람이 사실은 어떤 작자인지도 모르면서. (신경질적으로 깨진 바닥재를 차면서)저 광장 안쪽에 있을수록 돈 많은 중심가 사람들이지? 우리같은 부랑아들은 관심도 없는 사람들. (무기력하게 골목 안으로 고개를 돌리고)그래. 이게 현실이겠지. 그날 정말로 우리를 구해줬던, 그 사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감옥에서 썩고 있는지도, 아무도 모르게 암살당했는지도 몰라. (무미건조하던 목소리에 점점 힘이 들어가며)그리고 저 가증스러운 돼지는 모두의 찬사를 받으며 개선하고 있잖아? 우리에게는......(감정이 북받쳤는지, 말이 끊어진다.) 원수나 다름없는 저런 쓰레기가.
(드라마에서 보면 다들 이렇게 피던데. 입에 물고 있던 담배 한 개피에 불을 붙이려는 모습이 어설프다. 얼마나 어설픈지, 라이터로 불을 제대로 켜지도 못 하고 틱틱거리기만 한다. 이내 엄지 끝이 아린지 손을 탈탈 털기까지. 담뱃불조차 제대로 못 붙히는 걸 봐서야 아무래도 담배를 피워봤다고 생각하긴 어렵다. 그러고보면 옷차림새가 교복이었다. 가지런하고 깔끔히 다림질 돼 있다. 단추 하나 푸르고, 타이와 조끼는 온데간데 없고, 셔츠 소매를 둥둥 걷어올린 폼도 어딘가 어색하다. 답답한 듯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에 꼽는데, 그러다 너와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이더니 일순간 흔들렸다.)
>>238 (그것도 하필이면 그 순간 눈을 마주친 인물이, 반듯한 생활과 모난 데 없는 온화한 성격, 완벽한 성적으로 마치 이것이 학생의 가장 바람직한 표본이라는 듯 선생님들의 총애와 학생들의 호감을 함께 사고 있는 범생이 반장이었으니. 그런데, 진짜로 학생의 바람직한 표본이라 할 만한 모범생이라면 결코 발을 들이지 않을 이 으슥한 기계실 뒤편에 마주친 이 반장의 입에는 모범생의 입에 물려있으면 안 될 것이- 네가 물고 있는 것과 색깔 조금 다를 뿐 내용물은 매한가지일 가느다랗고 길다란 막대기가 물려 있었다는 것이다.) (반장도 너와 이렇게 눈을 마주칠 것을 예기치 못했는지 눈을 깜빡이다가, 곧 평소와 다름없는 그 모범생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눈인사를 한 번 건네고는 네게서 시선을 뗀다. 그리곤 주머니를 뒤적거려 뭔가를 꺼내려 한다. 그런데 주머니에 있어야 할 게 없는 모양인지 그는 주머니를 이리 뒤적 저리 뒤적 하다가, 다시 네게로 시선을 돌려오더니 그 반듯하고 온화한 모범생 미소로, 그 미소와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네게 건네어온다.) 너. 괜찮으면 불 좀 빌려줄래.
>>239 (머리라도 한 대 맞고 세상이 빙글뱅글 도는게 아니라면야 상상도 못할 일이다. 입에 물고 있던 건 엄지와 검지로 잡아 빼냈다. 지금 내 손에 있는 거랑 반장 입에 있는 거랑 똑같이 생겼는데? 흔들렸던 눈동자는 이어 깜빡거리기 시작한다. 왜 담배를 피려고 했더라, 쌩양아치 꼴통새끼라는 소리가 지겨워서였다. 담배같은 거 피워본 적도 없고, 술도 마신 적 없다. 교복은 수선한게 더 나아보이고, 검은 머리카락은 지겹고, 피어싱은 반짝거리고, 공부를 드럽게 못하고, 입 좀 험할 뿐인데. 운동 좀 한다고 너무한 거 아냐? 다 대가리 총, 아니 활 맞아봐야 해. 듣는 소리들이 지겨워서 욱해버린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반장을 보면 아무래도 경험이 있어 보였다. 정보의 과부하.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의 연속으로 눈인사짓에도, 불 빌려달라는 말에도 잠시 대꾸 하나 없었다.) …너 담배 피냐? 개어이없네. (불이라면 분명 라이터. 손바닥 위에 올려진 라이터와 담배 한 개피를 바라보다 손을 꾹 쥐었다. 욱하기야 했지만 찬물 샤워라도 한 듯한 일에 번쩍 정신 차리고보니 역시 이건 아무래도 아닌 짓 같았다.) 니 빌려줄 불 없어. (머리카락 헤집듯 굴더니 네게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비장하기도 하지. 입에 물려있는 담배를 빼앗을 생각이었다. 피할지 막을지는 모르지만 그럴 깜냥으로 다가가 손을 뻗는다.)
>>240 응, 피지? (대답이 태연하다. 태연해도 너무 태연하다. 너 스프라○트 마시냐? 하는 말에 응, 마시지? 하고 대답하는 수준으로 태연하다. 마치 자신이 흡연하는 게 아주 당연한 일이라는 태도다. 네가 굳은 표정으로 저벅저벅 다가올 때도 반장은 한결같이 태연했고, 네 서슬에 반장은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쉽사리 담뱃개비를 빼앗겨주었다. 그제서야 눈이 조금 커진다. 이 상황이 신기한 모양이다. 객관적으로 봐도 퍽 신기한 상황이긴 했다. 모범생의 흡연을 저지하는 양아치라니. 매정하게 톡 쏴붙이는 말에, 반장을 눈을 깜빡이더니 또 연하게 웃는다.) 범생이랑은 맞담하기 싫은가 봐? (정확히는, 모범생의 흡연을 양아치가 저지하는 이 상황 자체가 신기한 게 아니라- 저번에 담배 피는 모습을 학생부장님께 걸렸을 때, 불호령은커녕 너 뭐 고민 있냐? 하고 어른스러운 걱정 가득 담긴 어조로 자신을 배려해준 학생부장님의 모습이 기억나서였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우등생에 대한 자상하기 그지없는 배려일까, 아니면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현대의 권문세가라 할 수 있는 집안의 도련님께 제공하는 관대한 특혜일까- 어느 쪽이든, 학교 풍기의 최일선에 선 책임자조차 자신에게 그렇게 너그러운데, 자신을 턱 막아세우는 동급생의 모습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그것도, 방금 똑같은 짓을 하려던 처지인데도 말이다.) 뭐 상관없어... 그러면 그거 돌려줄래? 다른 데서 피던가 할게.
>>241 (빼앗은 담배까지 손에 두 개비가 쥐어진다. 이걸 어쩌면 좋은지 모르겠다. 쓰레기통에 버리면 되는 건지, 그래도 돈 주고 산 걸텐데 버려도 되는 건가 싶은 고민이다. 일단은 교복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내가 피려던 거랑 라이터는 코치쌤 걸 쌔벼온건데, 입에 이미 물었으니 버릴 수 밖에 없고…. 코치쌤이야 친한 사이라 별 생각 없다만 반장이랑은 같은 반이란 것 빼고 접점이 없다. 과언이 아니라 다른 세상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연이 없었다. 그러던 중 들려오는 단어. 맞담.) 하, 야. 나 담배 안 피거든? 꼬라지 이러면 다 담배필 줄 아는 건 공부 좀 한단 놈도 똑같네.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모습을 들켰으니 담배 핀다고 생각할 것도 같긴 하다. 하지만 억울했다. 불 안 붙였다고! 못 붙였다고! 손가락 아리다고!) 폐 썩어 뒤지는게 장래희망인가…. (혼잣말이라기엔 듣든 말든 상관없단 듯 궁시렁거렸다. 궁시렁거리는 걸 듣고 반장이 무슨 반응을 보이든간, 이 꼬인 상황을 어떻게 하는지가 문제였다. 학생부장 선생님뿐만 아니라 모든 선생님이 다 같은 반응일테니까. 자신이 담배를 폈다고 하면 드디어 걸렸냐고 쥐 잡듯 잡을 것이고, 반장도 담배를 핀다고 말해보았자 반장이 담배를 피겠냐고 할게 빤해보였다. 한마디로 나 뭣됐는데?) 닌 뺏어간 거 돌려주는 사람 봤냐?
>>242 그렇지만 너 담배 피려고 하고 있었잖아? (반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말인즉슨 정론이다. 행색이 양아치같건 말건, 오늘 담배 피는 게 처음이건 아니건, 담배를 피려고 시도하던 순간에 반장과 마주쳤다는 것은 사실이니. 그러다 그는 네 손에 들려있는 라이터를 보곤 킥킥 웃었다.) 첫 시도인 건 믿어줄게. (하고 웃던 반장은, 네 투덜거리는 소리에 웃는 소리를 거두고 평소의 그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얼굴에 걸었다. 결국 겉모습 보고 떠드는 건 너도 피차일반인 것 같으니 말이다. 당연하다. 겉모습이라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서 필연적으로 가장 처음 접하게 되는, 그 사람의 표면이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돌려줄래. 나한텐 그게 타이레놀 같은 거라서.
>>243 아, 안 피잖아. 눈 장식이야? (담배를 핀 적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해야 하나 머리를 벅벅 헤집는다. 그러고나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대충 고갯짓으로 탈탈 털어 손으로 빗어봤자 결이 상할 만큼 상한 탈색모이자 염색모는 부스스했다.) 어, 그래. 참 고마워 돌아가시겠다. (이미 뭣된 건 똑같은데 담배 돌려주나 안 돌려주나 똑같지 않나. 돌려주길 바라는 반장을 빤 쳐다보다 샐쭉 웃는다. 교복 주머니에 담배와 라이터 말고도 무언가 들어있었다. 작고 긴 막대 모양의 불량식품. 아ㅍ로!) 야, 자. 내가 특별히 빌려준다. (분홍, 노랑, 연두, 하늘. 색도 참 유치한 불량식품이다. 분홍색을 집어 입에 물고 네게는 노랑색을 건넸다. 이런 거 먹다가 들키면 혼나는 것도, 담배 피다 걸려서 혼나는 것도 매한가지다. 코치쌤 너무 팍팍하다고.) 이것도 맞담이라고 대충 쳐.
>>244 (사람에게 있어 겉모습은 가장 먼저 마주치는 언덕이다. 언덕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는 일단 언덕을 넘어가봐야 안다. 그러나 일단 조금 올라서 넘어보면, 안 보이던 게 보인다. 네가 건네주는 아폴로에서 반장은 생소한 것을 보았는지, 눈을 깜빡인다. 가면같은 미소 너머로, 호기심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응? (일단 내미는 것을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먹어본 적 없는 간식이다- 어떻게 먹는지는 안다. 누군가 먹는 것을 본 적은 있으니까. 다만 이렇게 손에 쥐어보는 게 처음이라. 살아가는 데 있어 쓰잘데기없는 것은 모두 쳐낼 것을 학습받은 삶인 탓에, 이런 것을 손에 대볼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마침내 견디다 못해 그런 쓰잘데기없는 것들에 손을 뻗치려 했을 때, 가장 먼저 닿은 게 담배였다는 것은 불행한 우연이다-. 반장은 조금 어색한 손짓으로 아ㅍ로를 꼼지락대다 입에 물고 안의 내용물을 깨물어서 이빨로 짜내 본다. 알기 쉬운 포도당 덩어리가 혀끝으로 떨어진다. 니코틴의 각성 효과에야 비할 수 없겠다만, 일단 달짝지근한 게 혀끝에 닿으니 기분은 한결 나아진다.) 응, 괜찮네. (반장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조금 편안해진다.)
>>245 (분홍색을 입에 물고 있다가 하늘색도 입에 문다. 물려있는 끝 부분만 이로 짜내 조금 먹었고 안 먹고 있었다. 왜 그러는가 하면 금방 그 이유가 밝혀진다. 그러니까, 담배는 검지랑 중지로 잡았지? 아ㅍ로 두개를 담배 개비라도 되는 듯 손가락 사이에 끼더니 후- 입바람 소리 낸다. 담배 피는 시늉 하고는 널 바라보며 또 얄궂게 웃는다.) 내가 이겼다? 난 두개, 넌 하나. (담배를 동시에 두 개피 피는 것도, 불량식품을 동시에 두 개 먹는 것도 그다지 이겼다 졌다 따질만한 건 아니다. 그렇지만 장난치는 기분은 유쾌하다고 웃는 모양이 개구지기도 하고 해맑기도 했다. 장난질이 끝나면 웃음도 금방 끝나고, 손에 들린 아폴로 봉지를 빤 쳐다본다. 걸리면 분명 뒤지게 혼나는데, 쓰읍.) 너 가져라. (네게 내밀고는 잠시 시야를 멀리도 던진다. 짬 처리하는게 아니라는 핑계를 고민 중이었다.) 뇌물. (피지도 않은 담배를 굳이 선생님들한테 이르지 말란 건가보다.)
보라빛 자색 머리카락을 지난 사내는 달을 가득 담고 있는 호수가 보이는 바위 위에 앉아 그 호수를 바라봤다. 이토록 아름답고 예쁜 풍경을 과연 이후에도 볼 수 있을지에 대해 사내는 확신을 할 수 없었다. 뭐가 어찌되었건 내일은 결전의 날이었다. 내일 아침 해가 뜨고서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마법사 동료의 전송 마법을 이용하여 자신과 동료들은 이 세계에 전쟁의 불씨를 피운 세력들의 본거지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거기서 살아남을지, 죽을지는 알 수 없었다. 인간, 엘프, 드워프, 마족 등등. 처음에는 으르렁거리기 바빴으나 어느 순간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동료가 되어 지금 이 순간까지 함께 하지 않았는가.
사내는 원래 그저 한 작은 왕국에서 기사로서 일하고 있던 이였다. 허나 그 왕국은 지금 이 지도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 세계를 어두컴컴한 파멸의 어둠 속으로 밀어넣으려고 하는 '그 세력'의 암약으로 많은 이들이 제물이 되어 사라졌으나 사내는 겨우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자신의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에 동료. 그리고 더 나아가 왕족들까지. 정말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고 제물이 되어 소멸했으며 살아남은 이는 극소수였다. 그 날 이후 복수하겠다는 생각으로 계속 그들의 존재를 쫓았다. 그들을 쫓는 것이 자신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복수를 할 수 있다면 뭐든지 이용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그들을 쫓는 다른 이들과 함께 행동했고 지금 이 순간에 온 것이었다. 다양한 종족이 있었고 그 종족의 차이로 이런저런 트러블이 있었으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지금은 누구보다 믿음직한 이들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반드시...'
그들은 강하고 무슨 짓을 할 지 알 수 없었다. 과연 동료들 중에 몇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아마 죽을 확률이 더 크지 않을까? 하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최대한 제 가슴 속에서 날카롭게 날을 세운 송곳니를 그들의 목덜미에 꽂아넣으리라. 그렇게 사내는 다짐했다.
부스럭. 생각을 다잡으며 호수를 바라보는 와중 풀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적? 동료? 허나 살기는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동료인가? 어느 쪽이건 확인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내는 입을 열었다.
"누구야? 이 시간에 잠 안 자고 호수까지 나온 이는? 나처럼 마지막 풍경이 될 수도 있는 이 풍경 보려고 나온 인가?"
괜히 그렇게 장난스럽게 말을 하면서 사내는 뒤를 확인하려고 했다.
#모든 싸움의 결전을 앞둔 밤에 제 삶의 마지막 풍경이 될지도 모르는 호수를 바라보는 와중에 발소리가 들려서 뒤를 돌아보는 상황이야!
#그냥 지나가던 길이라는 식으로 말해서 상황이 바로 끝나는 그런 상황만 아니면 좋겠어!
#온 이가 누구라도 상관없어. 동료도 괜찮고 결전을 앞두고 있다고 해서 응원이나 말이라도 할까 싶어서 찾아온 이도 괜찮고 하다 못해 이간질이나 타락을 목적으로 온 적이라는 이도 상관없어. 다만 살기가 없다는 상황으로 썼으니 막 살기 풍기면서 죽이려고 왔다..같은 상황만 아니면 좋겠다 정도?
>>247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풀숲을 해치고 나타난 것은, 곰처럼 둥글고 우람한 체구를 가진 중년인이었다. 솥뚜껑처럼 큰 손으로 후드를 벗자, 싹싹한 미소를 한가득 머금은 사람좋은 인상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이고, 기감도 좋으셔라. 일부러 살금살금 오고 있었는데 다 눈치채시고. 역시! 용사님이십니다~."
넉살 좋게 웃으며 사내를 추켜세우던 그는, 끙차, 하고 앓는 소리와 함께 매고 있던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물건이 한가득 들어있는지, 미어터질 듯 빵빵한 배낭은 내려놓는 소리도 퍽 육중했다. 무거운 가방 탓인지 구부정했던 허리를 펴고, 기지개를 켠 중년인은 가방을 열고 물건들을 하나 둘 씩 꺼내 보이며 입을 열었다. 한두 번 읊어본 게 아닌 듯한 장사멘트가 청산유수처럼 술술 쏟아져나왔다.
"자자, 내일이면 결전이시죠? 마침 여기 기깔나는 포션들이 있는데요, 빨간 포션, 파란 포션만 있는 게 아니라 상태 이상 종류별로 요긴한 포션에, 피가 멎고 마나도 소량 회복해주는 보라색 포션까지! 위험한 전투일수록 보급은 단단히 해두는 게 상책 아니겠습니까. 없으면 챙기고, 있어도 더 쟁여두고! 포션 한 병에 목숨이 오락가락할 수도 있습니다요, 나리~"
과장된 태도로 겁을 주듯 말하다가도 능청맞게 웃어 보인 상인은, 이내 큼직한 양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더욱 사근사근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 물론 가격을 들으시면 고민이 되실 수도 있습니다요. 근데 아시다시피 여까지 오기가 많이 빡세잖습니까. 마물도 심심찮게 나오고 말이지요. 제 목숨값 좀 보탠 가격이니 너그러이 양해해 주십사... 응원하는 의미에서 샘플도 넉넉ㅡ히 드리겠습니다요, 헷헷헷."
>>248 사내는 눈앞의 중년인을 바라보며 일단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말 그대로 포션을 팔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일까. 물론 저 설명만 들으면 저 포션들은 확실히 탐나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마음대로 돈을 써도 되느냐는 또 별개의 이야기였다. 개인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당연히 저 포션들을 구입했겠으나 지금은 개인이 아니라 동료가 있었고 여정을 위한 금액은 공동의 것이었으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물론 자신이 개인적으로 쓰기 위한 돈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저 말을 들어보면 가격이 꽤 비싼 모양이었으니까.
"장사하신다고 수고가 많으시네요. 여기까지 오신다고 말이에요."
허나 마냥 마음을 놓은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방심하면 위험한 시기가 아니겠는가. 바로 내일이 모든 것이 끝날지, 혹은 자신이 죽을지 알 수 없는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그 갈림길에 발을 들이밀지도 못했는데 무슨 일이 벌어지면 그 자체만으로도 모든 것이 꼬일 수밖에 없었다. 혹시 아는가. 저 상대가 그 작자들에게 매수당한 존재일지. 포션이라고 말을 하나 치명적인 독이 들어있을 수도 있었다.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으나 사람 속마음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보급품은 제가 일방적으로 구입할 순 없거든요. 제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것이라면 몇 개 정도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말에 따르면 가격이 제법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용사는 아니니까 그 호칭은 가급적... 딱히 사명감이나 정의감으로 여기까지 온 것도 아니고."
다른 이들이라면 모를까. 자신에겐 너무나 과분한 호칭이었다. 정의를 위해서, 이 세상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복수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한때는 동료들까지 도구로 이용하려고 했던 자신이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지금도 조금은 그런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허나 그런 마음은 일단 지금은 접어두기로 하며 그는 숨을 내뱉으며 저 호수에 떠 있는 달처럼 사르륵 물에 녹이려고 했다. 이어 그는 고개를 끄덕인 후 중년인에게 물었다.
"얼마나 되죠? 일단 가격을 좀 들어볼게요. 그보다.. 여기까진 또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도 궁금한데."
>>249 "우리 똥강아지들 안 굶길라면 마수밭이고 뭐고 건너야지요. 돈 없는 게 마수보다 무섭습니다요."
상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넉살 좋게 주워섬기면서도, 서글서글한 눈웃음 너머로 용사의 낯빛을 살폈다. 제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는 있지만 어딘지 경계심이 느껴지는 듯했다. 거 참, 젊은 양반이 속고만 살았나. 주머니가 가벼워지면 민간인이라도 죽을 각오 정도는 해야 입에 풀칠할까 말까인데. 뭐, 샘플 한 병 정도는 먹어드려야겠구먼, 에잉. 넉넉하게 챙겨왔기에 망정이지. 그런 궁리를 하는 사이, 사내의 말이 이어졌다. 보급을 논하기는 어렵지만 개인적으로 몇 병 구매할 의사는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어딘가. 서비스 넉넉히 얹어드리고 보급을 관리하는 양반을 소개받아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사내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용사라는 호칭이 그리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 그러십니까? 용사님이 싫으시면 뭐 총각이라 불러드릴깝쇼? 아니면 젊은이?"
거 까다로운 양반일세,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서글서글한 영업용 미소를 한가득 지어 보인 채 넉살 좋게 대꾸하던 상인은, 사내가 가격을 묻는가 하더니 이내 의심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투로 여기까진 또 어떻게 알고 찾아왔느냐고 묻자 좀은 과장된 투로 섭섭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볼멘소리를 냈다.
"아이고야, 이 대륙에 여러분들 행선지 모르는 작자 있으면 간첩이우다. 간첩 거 속고만 사셨나. 아유, 됐습니다요. 자, 보십쇼."
먹고살기 힘들구먼, 참말로. 상인은 작은 칼로 제 손을 얕게 그었다. 보란 듯이 펼쳐 보인 솥뚜껑만 한 손에 그인 얕은 상처에서는 금세 피가 배어 나왔다. 안 아픈 것은 아니었는지, 아야야, 하고 엄살만은 아닌 듯한 앓는 소리를 내며 빨간색 포션이 담긴 조그마한 샘플 병을 따고 쭉 들이켜자, 그의 손바닥에 난 상처가 천천히 아물어갔다. 오만상을 찡그리고, 상인은 다 아문 손으로 입가를 닦아낸 뒤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맛은 없습니다. 약이니까요. 그래도 보시다시피 부작용도 없고 효과도 확실합니다요. 이건 샘플이고, 빨간 포션, 파란 포션은 단품으로는 이 정도 양에, 한 병당 3골드에 드리고 있습니다요. 보라색 포션은 5골드, 상태 이상 포션은 4골드." 가방에서 포션 병을 하나씩 꺼내 보이던 상인은, 이내 가방 안에서 큼직한 상자를 꺼냈다. "이게 원래 추천해드리려던 상품인데, 빨간 포션, 파란 포션, 보라 포션 다섯 개씩에, 독, 마비, 동상, 화상, 환각에 뭐, 석화, 수면, 감전... 뭐 그런 각종 상태 이상에 쓰는 포션 세트까지, 다 해서 87골드인데, 오늘만 특별히! 할인해서 80골드에 드리고 있습니다요. 물론 이렇게만 드리는 건 또 섭하니께,"
상인은 가방을 뒤적이더니, 제 엄지손가락만한 주머니를 상자 위에 얹었다.
"그리고 이게 최근에 나온 따끈따끈한 신제품인데, 포션 맛을 못 견디시는 분들을 위해 개발한 환약이외다. 이것도 씹으면 더럽게 쓰우만, 안 씹고 넘겨도 아까 포션 못지않게 효과가 즉각적이지요. 포션 세트 사주시면은 서비스도 서비스지만 건승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큰맘 먹고 빨간 거 세알 챙겨드리리다. 어떠십니까요?"
타인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모든 것이 끝나기 전엔 경계를 풀 수 없다는 것은 그의 방침이었다. 어쩌면 한순간에 왕국이 사라져버린, 더 정확히는 친구도, 동료도, 가족도 모두 재물이 되어 사라져버린 그때의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남아있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사내 역시 미소를 유지했다. 아마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나기 전까진 이런 자세를 아예 없앨 순 없으리라 생각하며 그는 상인의 행동에 집중했다. 제 손에 상처를 내니 붉은색 피가 방울을 맺어 드러났다. 그러다 포션을 먹더니 그 상처가 회복되는 것에 상당히 효능이 좋은 포션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장사 수완이 좋으시네요. 보통 이런 상인은 보기 힘든데."
순수하게 그렇게 생각하며, 절대로 비꼬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순수하게 감탄하듯 이야기하며 사내는 제 주머니를 생각했다. 80골드라고 한다면 그렇게 나쁜 금액은 아니었다. 저 상인이 먹은 샘플 이외에는 모두 거짓 포션이라고 하더라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독이 있다면 제 동료 중 하나가 바로 간파할 것이고 효능이 안 좋은데 효능이 좋다고 사기를 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조차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돈이야 다시 모으면 되는 일이고 효능이 안 좋은 포션도 쓸모는 있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여기선 일단 속는 셈 치고 구입하는 것이 좋겠거니 생각하며 그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렇다면 사도록 하죠. 어차피 내일 있을 싸움에선 많은 격전이 예상되니까 포션은 있어서 나쁠 것이 없으니까요."
80골드. 주머니에서 커다란 10골드를 8개 꺼낸 후에 그는 상인에게 내밀었다.
"여기까지 온다고 고생 많았는데 바로 돌아가진 마시고 근처에 있는 여관이라도 잡아서 쉬세요. 아니. 이미 그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손바닥은 깨끗이 아물었어도 채 가시지 않은 얼얼한 느낌에 버릇처럼 후후 불 뻔 했으나, 상인은 엄살을 피우는 대신 가볍게 털어내고는 히죽 웃어 보였다. 이내 사내가 의혹을 거두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곤 칭찬을 건네자, 상인은 껄껄 웃으며 가벼운 투로 대답했다.
"우리 강아지들 맥이고 입히려니 이래 됐지요. 아이고, 나쁜놈들 잡아서 가난도 잡히면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뭐, 어쩌겠습니까요, 열심히 만들고 파는 수밖에요!"
진담과 너스레를 섞어 주워섬기며 웃으려니, 사내가 구매 의사를 밝히며 10골드짜리 금화 여덟 닢을 꺼내 내밀어왔다. 상인은 지금까지 지어 보인 미소 중에 가장 환한 미소를 지으며 넙죽 대금을 받아 들고는 주머니에 넣은 뒤, 포션 세트가 든 상자에 환약 주머니를 넣어서는 사내에게 건넸다.
"아이고야, 시원시원하셔라! 사 주셔서 감사합니다요. 재고는 이게 전부라 날이 밝는대로 돌아가봐야 합니다만 끝나실 때쯤 신제품까지 재고 꽉-꽉 채워서 또 오겠습니다. 그 때도 많이 사주십셔! 건승을 빌겠습니다요~"
상인은 금새 홀쭉해진 가방을 한 팔에 대충 매고는 90도로 허리를 숙여보인 뒤, 뒤 돌아서 휘적휘적 걸어갔다. 한껏 흥에 겨운 콧노래소리가 조용히 울려퍼지다, 이내 사내의 뒷모습과 함께 멀어져갔다.
뭍에서 난 것들은 하늘을 향해 위로 자란다. 그렇다고 모두 하늘을 동경하지는 않을텐데 이 아이는 유달리 그것이 심했다. 눈이 부신 푸름을 눈에 담겠다고, 학교에서 도망쳐나왔다. 뜀박질로 모잘라서 자전거를 굴리기 위해 발을 세차게 굴렸다. 평일의 대낮은 의외로 한적하다. 모두가 회사에, 학교에, 어딘가에 있는 자신의 자리에서 할 일을 하고 있다. 돌아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 속도를 내기 좋았다. 바람도, 여름이 다가온답시고 나날이 물씬 짙어져만 가는 녹음도 달가웠다. 풍경 구경에 혼이 빠져 점점 가까워지는 당신을 보지 못 했는가보다. 아이 판단에 브레이크로는 부족하겠고 방향도 꺾어야겠다 싶었다. 급하게 잡은 브레이크와 갑작스런 방향 꺾기, 큰 소리가 나는 건 응당 당연한 일이었는데 꽤 뒤늦게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안 넘어지겠다고 버텨보려한 것인데 자전거거도 아이도 나란히 바닥행이다. 그래도 넘어짐을 미뤄보겠다고 난리친 덕에 다침은 덜 하겠다.
약간은 맥 빠진 비명소리가 바로 뒤를 이었어. 볼품없는 아저씨는 바로 엉덩방아를 찧었지. 이 아저씨는 말이야, 평범한 회사원이었어. 업무에, 야근에, 사무실에서 나타나는 온갖 인간 군상극에 결국 못 견디고 뛰쳐나와버렸지만 말이야. 나올 때까지는 당당하게 걸어나왔는데, 막상 나오고보니 불안감이 가슴을 지배했지. 어쩌면 그래서일거야- 자꾸 핸드폰을 쳐다보며 이어폰으로 노래를 크게 듣고 주변을 의식하지 못했던 건. 그래서 이쪽도 건너편에서 다가오는 아이를 눈치채지 못했던 거지. 그는 당황한 듯 서둘러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한번 보았다가(아직 약정이 한참 남았는데! 하지만 다행이 손이 좀 까지긴 해도 핸드폰은 지켜낼 수 있었어.), 바로 넘어진 아이에게 다가갔어. 엉거주춤, 주저앉은 상태에서 허겁지겁 일어나 다가가는 모양새가 아주 좋진 않았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마저도 저를 바라보며 묻는 것에 멈칫하고 말았지.
"학생 ㄱ..아니, 나야 괜찮은데-"
다시 다가가며, 아이를 훑어봤어. 아까 넘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던데...자전거를 타면 어디 하나 까지기 쉬운데...하면서 말이야.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혼돈을 만드는 신이 나타났고 그 신을 따르는 이들이 나타났다. 세상을 야금야금 먹어치우며 모든 것을 지워없애려고 하며 아무런 질서도 없는, 그야말로 약육강식과 다를바 없는 지옥같은 세상을 만들려는 그 움직임에 맞서 신은 이 모든 혼란을 끊어 없앨 수 있는 '용사'를 이 세상에 내려보냈다.
고아 출신으로서 열심히 공부하여 어떻게든 대학에 진학한 사내는 어느날처럼 강의가 끝나고 아르바이트를 가기 전, 자취방에 들리기 위해 길을 걷다가 신호를 위반하고 가속하는 차에 치일뻔 했었다. 원래대로라면 죽었어야 했으나 차에 부딪치기 직전, 신은 그 사내를 불러들였고 용사로서의 사명을 부여했다. 이어 신은 어느 한 제국에 계시를 내렸고 마법사들은 신의 계시에 따라 사내를 이 땅에 소환했다. 처음엔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서 그저 혼란만 느끼던 사내였으나 제국 사람들의 도움으로 이 세상에 적응했고 이 세상에 어떤 위험이 닥쳤는지 파악했고 조금 오래 고민을 하던 끝에 이 세상을 위해서 검을 들고 싸우기로 마음 먹었다.
물론 그 여정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간에 크게 동료들과 싸우는 일도 있었고, 목숨을 잃을 뻔한 순간도 수차례 있었다. 허나 최종적으로 사내는 동료들과 함께 힘을 합쳐 신을 봉인하는데 성공했고 이 세상에 평화를 가지고 왔다. 물론 그것은 용사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 모두가 함께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사명을 마치고 사내에게 주어진 것은 두 개의 선택지였다.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 땅에서 새롭게 살아갈 것인가. 사내는 자연히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곳에 오고서 삼 년. 동료들과 정도 많이 들었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참이었다. 허나 그런 자신을 결국 이세계에서 온 이라는 이유로 싫어하는 귀족들도 제법 있었다. 견제를 하는 이들도 있었으며 왜 빨리 돌아가지 않냐고 눈치를 주는 이들도 많았다. 그나마 제국 자체에서 무슨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사내는 나무에 기댄채 고개를 들어 하늘에 떠있는 달을 조용히 바라봤다. 너무 오래 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슬슬 결단을 내려야 했으나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에 대해서 고민에 고민을 하며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한번씩 팔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정리하는 것이 딱 고민하고 있을때의 버릇 그 자체였다.
조용히 들려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사내는 고개를 내려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봤다.
/정말 말 그대로 맥커터짓.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어요. 당신에겐 볼일 없어요) 이런 것만 아니면 어떤 상황으로 와도 괜찮아. 굳이 이런 상황이었으면 좋겠다...라고 한다면 사내에게 볼일이 있어서 오는 이였으면 좋겠다 정도? 그래야 서로서로 핑퐁이 가능할 것 같아서! 로맨스건 그냥 동료끼리의 추억 그리기 이야기건 다른 소소한 이야기건 그건 정말로 어느 쪽이라도 괜찮아!
식을 마치고 나니 피로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언제였던가. 한때는 결혼이 두 사람의 사랑에 의해 맺어진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어떤 결혼은 축하보단 안타까운 시선을 받는다. 제겐 이 결혼이 그랬다.
제국 북부의 겨울은 아주 혹독하고 춥다고 했다. 제가 살던 왕국은 사시사철 온화한 날씨였다. 국토가 작으니 어딜 가도 비슷비슷한 날씨였다. 잎사귀가 둥근 나무, 서늘하지도 따갑지더 않은 햇볕, 바람에 섞여드는 달큰한 꽃향기…. 그런 것들을 사랑했다. 돌이켜보니 그렇다. 이곳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아, 그보다 앞서 물어야 하는 것이 있다. …이곳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혼자인 방은 적막하다. 대공비의 방이라고 했다. 방은 따뜻하지만 아늑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따금 나무타는 소리와 바람에 창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주 가까이서 들리는데 물 밖에서 들리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물 속에 있는 사람이고. 살아남으세요. 가능하다면 행복하게 살아요. 누가 했던 말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을 하던 절박한 목소리는 아직도 귓가를 맴도는 것 같다. 덕분에 숨은 붙어있지만 이걸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그래도 되는지도 모르겠다.
고해성사 같은 생각은 짧은 노크에 끊어지고, 침묵을 긍정이라 생각한 듯 천천히 문이 열린다. 허공 어드메를 쳐다보던 눈이 느리게 움직였다. 마주치는 눈.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 망국의 공주와 제국의 북부대공이 정략결혼함.. 로판배경 적폐 설정입니다 ^^.. 삶의 의지 다 잃은 공주가 oO(언젠가는 죽인다..)는 생각과 함께 삶의 의지 되찾은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