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정도는 아니야.' 아무 생각없이 답변한 것이겠지만, 나에게는 보였다. 내가 방금 했던 질문은 객관적으론 상당히 무례한 종류의 것이다. 그야 그렇지 않은가. 네게 정신적 질환이 있냐고 물어본 것이니까. 거기에 화내지 않고, 어느정도는 그런 경향이 있다는걸 인정한 것만으로도.
그는 심각한 증세를 앓고 있다. 라고 나는 판단한다.
"당연하지. 나 지운의 모토는 어린애 다운 활기참이니까. 너도 알잖아?"
덤덤하게 대답하면서 흘끔, 하고 그를 본다. 그는 침대 머리맡에 놓은 자신의 창을 보고 있었다. 그게 마치 송곳니를 잘 때 마다 손잡힐 위치에 놓는 내 모습 같아서,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지운이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윤시윤이라는 사람이 만들어낸 일종의 함정에 보기 좋게 걸려버린 소년은 불타버린 이성의 도서관 속에서 윤시윤이 누구였는지 기억을 대조하고 있었다. 누구였더라? 의념범죄자를 대리고 다녔던가? 주씨 가문의 아들이었나? 항상 훈련을 하고 있던 검사? 금발의 기사 처럼 보이는 독기 어린 녀석? 누구였지 . .
모르겠다
" 미안 , 노인이라니 못할 말이네.놀려서 미안했어.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다는건 어떤 느낌이야? 그것 참 슬프겠네 "
하나도 알아먹지 못해서 결국 대충 공감하는 흉내를 내보았다 물론 이것 역시 상대방의 입장에선 너무나도 얄팍한 도망으로 보이겠지만
소녀는 맞닿았던 손끝을 떼더니 천천히 내려놓으면서 말한다. 강함은 기본 소양. 협상력, 언변, 불가능하다고 평가될 실적, 교육 능력. 그러나 그뿐이지도 않다...
"네 추측이 맞다면 갈 길이 무척 멀겠구나. 온 인생을 쏟아 부어야만 하겠어. 그러나 특별반에 들어온 이상 관철해 보여야만 하겠지."
주어져서 짊어진 것이 많다. 우액홍화재령신법憂厄訌禍災領身法을 제 몸과 같이 품은 이상 피쟁문避爭門을 재건해야만 할 것이며, 나름대로의 판단으로 특별반에 들어선 이상 그 취지는 언제나 시야 한가운데에 뚜렷이 두어야 한다. 하지만 소녀는 사명에 두려워하고 무게에 이겨내지 못하는 위인이 아니다. 언제나 텅 빈 상태를 유지하며 하얀 껍데기인 채로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짊어지고 있음에도, 가볍다. 자유롭다. 선명히 지워진 흰 눈으로 비상할 각오를 한다. 날개가 없음에도 자신은 필히 날아오를 것이라 믿듯이.
흰 눈동자가 눈꺼풀에 감겼다. 금방 다시 드러났지만, 그 일련의 행위는 헛된 것이었다는 듯이 눈동자는 여전히 흰 상태의 그대로다. 앞머리가 흔들리며 흰 차림의 소녀가 언뜻 시를 읊듯 무게라곤 맺히지 않은 끝맺음을 고한다.
별로 그 부분에 대해서 어설픈 위로를 하진 않기로 했다. 오랜 기간 스스로가 하고 싶은대로 해온 대가란건 존재하는 법이다. 업보란건 고리타분한 도덕적 설교가 아니다. 인과의 원리에 작용하는, 지극히 단순한 법칙이다.
"그러나 거기서 그렇게 말하는 시점에서, 자네는 결국 자네 생각만큼의 악인도 광인도 아니야."
전에 그를 만나서 얘기했을 때 내가 느꼈던건, '스스로를 악인이나 광인이라 여기고 싶은 남자' 였다. 그 말은 즉슨, 본질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악인이나 광인은 되기 위해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가 마음속 깊이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면. 연인을 위하려는 마음도, 하물며 자신이 해온 일에 후회도, 하물며 어렵더라도 바뀌고자 노력 따윈 안한다.
그 자는 소년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올라가는 손을 보고 소년이 황급히 푸른 창을 쥐었으나 가볍게 내려앉은 손에 떨리는 몸을 진정 시키고 그 자를 올려다 보았다 여전히 이목구비는 흐트러져 있어서 쉽게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이명으로 망가질 것 같은 귀에 들어오는 목소리 조차 물속에서 듣는 소리마냥 웅웅 거리며 흐트러졌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말해야할게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기엔 충분했다
" ... "
침묵
잠깐 동안 침묵하며 기다리단 소년은 그 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미안했습니다 "
이유는 모르겠다 소년이 그와 여러 방향으로 대립한 것에 대한 사과인지 그를 그저 여명 이후 특별반의 휘광을 얻고 싶어하는 소인배로 오해한 것에 대해서인지 멋대로 그를 자신의 명령에 따라야하는 존재로 인지하는 무례한 짓에 대한 사과인지
빈센트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경험을 하면서도 미소를 유지했다. 하유하란 어떤 사람인가? 빈센트가 알기로는 빈센트의 (문자 그대로) '킬링' 조크에 숨은 본뜻을 100% 이해하고 빵 터진(다행히도 이건 문자 그대로가 아니다) 몇 안 되는 사람이고, 빈센트가 대책없이 열고 대책없이 들어간 게이트에 친구따라 강남 간다는 심정으로 따라가서 위험했던 사람 아닌가.
"사람 가까운 곳에 우정도 싹트고 사랑도 싹트죠."
부디 그 사랑 잘 되길 바랍니다, 빈센트는 손가락을 튕겨 하트 모양의 불꽃을 만들며 축하해준다. 방금 생각했던 건, 빈센트가 아까 스스로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냥 나만 알고 있으면 그만이다. //17
역시나 그녀는 발이 넓은가보다. 잘 안다는 빈센트에게 나는, 이후에도 잘 부탁한다고 서글서글 얘기하면서 웃었다. 이러한 발언이 '연인' 보다는 '아버지' 에 같다고 오토나시에게 한번 지적 받기는 했으나. 가장 자연스럽게 먼저 튀어나오는건 이러한 종류의 발언인걸 어쩌랴. 내 성격이려니 생각하기로 했다.
"우린 사람이니까. 지내다보면 정이 든단거지."
우정과 사랑이라는건, 별로 그렇게 계산기를 딱딱 두드려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함께 지내다보면 어느샌가 슬그머니 자리잡는 것이지.
빈센트는 그렇게 말하면서, 두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시윤과 유하라... 듣기만 해보면 시윤이 유하의 장난스런 행동을 요놈 하고 제지하면서도 지켜볼 것 같았다. 그 역시 유하의 일면이라 생각하며. 어쩌면, 빈센트가 알던 유하의 일면이 지금까지 남아있다면, 그것까지 받아들이는 걸까...?
"네. 물론이죠. 이전에는 잘 지냈고, 지금도 잘 지내고, 앞으로도 잘 지낼 겁니다."
빈센트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 자리에 앉아있다가는 웬지 유하에 대한 안 좋은 소리 내지는 나와선 안되는 소리가 나올 것 같아 나중을 기약하기로 한다.
"어쨌든... 전 '변하러' 가봐야 할 것 같군요."
유하가 변하건 숨기건, 시윤이 알고 받아들이건 모르고 살건, 그건 그 둘이 선택하고 나아갈 일이지 이 관계에서 잘 해봐야 같이 아는 사람인 빈센트가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으니.. 19 막레 가능할까요?
스스로가 누구인가를 성찰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사실 소년은 알고싶어하지 않았다.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알아서 돌아가는 것 보다, 지금 이렇게 있는게 어쩌면 훨씬 좋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자는 소년에게 자신이 누구고 소년이 누구였는지 천천히 파악하고 나서 말해도 늦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소년은 여전히 자신이 누구였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 응 "
그래도 또 폐를 끼칠까봐 마음에도 없는 소릴 뱉은 소년은 얌전히 고갤 끄덕이며 창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블라인드는 내려가 있었다.
" 헌터 "
헌터, 물론 그만둬도 괜찮을 것 같았다 소년에게 다른 길은 많으니까, 헌터는 가장 괴롭고 아픈 손가락이며 마음이 아린 부분이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사람의 얼굴을 못알아보고 머릿속은 혼란스러운 와중에 헌터를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이성적인 대답은 '가능할리가 있겠냐. 쉬기나 해라.' 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기로 했다. 힘 없는 말속에서 느껴진 의지가, 지금의 그에겐 실낱같은 희망일지도 모르니까. 그런걸 내 손으로 부정할 필요는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그럼 일종의 선배로서 하나 조언해주마."
다만 이렇게 망가진 꼴로는 역시 무리다. 나는 그가 복귀하고 싶다면 필수적인걸 알려주기로 했다.
" '이전의 너' 로 돌아가는건 이제 불가능하겠지. 왜냐면 나도, 결국 근본적으로 변해버린 것을 되돌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순수한 물에 매우 진한 잉크를 타서 마구 뒤섞으면. 더 이상, 기존의 색으로 되돌아갈 순 없다. 전생의 기억을 다량으로 받아버린 나는. 결국 그 이전의 나와 완전히 같아지는 것은, 불가능 하다. 아마 눈 앞의 그도 그럴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갈 순 없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애매할테고. 친구였던 자들도, 가족이었던 자들도. 모두 남처럼 느껴지겠지."
나는 아직도 부모와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고, 변화도 하지 않았던 그들을. 어디선간 '남' 처럼 거리감을 느껴버리는 나 자신이 한심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그래도, 나는 지금의 '나' 를 시간이 걸려 인식했다. 과거와는 다르지만, '나'는 '나' 답게 안정을 찾았다.
"그건 어쩔 수 없다. 그럼, 바뀌었다면 바뀐 지금의 상황 속에서 다시 적응해라. 네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관계를 맺는지."
헌터란 목숨을 걸고, 길드란 서로의 목숨을 맡기는 것.
돌아오고 싶다면 정립해야 한다. '변해버린 것' 이라면 괜찮지만, '망가진 것' 이라면 받을 수 없다. 바뀌어버린 스스로를 파악하고, 그 상태에서의 인간관계를 쌓을 준비를 마쳐야만 한다.
조언 시간의 낙차에 표류한 사람들이 선후배라고 불릴 정도로 낭만스러운 존재 였던가 소년은 망할 게이트 덕분에 정신병을 호소하고 있다 사람의 얼굴 조차 제대로 식별이 불가능하고 자신이 누구였는지는 더욱이 기억하지 못한다 가족마저도 가족이었던건가? 라는 식으로 히끄무리하게 흩어진 기억들 속에서 소년은 자신이 그들이 부르던 현준혁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차라리 게이트에 있는 몬스터가 현준혁을 먹어치우고 그 모습을 복제하다가 뇌를 덜먹어서 기억이 흐트러진다면 이런 존재가 아닐까?
망가져있고 지쳐있다
지금 당장도 가끔씩 빌어먹을 광신도들의 헛소리가 떠오르는데 이런 상황에서 조차 헌터가 되고 싶다면 이전의 소년은 도대체 얼마나 멍청했던건가
소년은 한쪽 만 남은 눈을 쓸며 마른세수를 하더니 그 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 고마워 "
소년은 그 자의 말을 곱씹었다 이대로 새로운 나로서 변화되어 살아간다면 이전의 자신이 저지른 모든 민폐에 대해서 피해갈수 있는 면죄부가 되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