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나의 보검이 박살나고 조금의 시간이 더 흘렀다. 가디언즈의 간부 클래스 세븐스 4명. 정확히는 플래나와 엘리나, 그리고 레이버가 빠져있는 네 명이 한 곳에 모여있었다. 가장 상석에 앉아있는 것은 은색 머리 사내의 모습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가장 서열이 높은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상석에 앉고 싶었던 것인지. 아무튼 그 사내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혼돈을 불러일으키고 파멸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들개 놈들의 송곳니가 그렇게 날카로울 줄이야. 이렇게 된 이상 플래나가 지시한 계획을 실행에 옮겨 모든 것을 정화할 수밖에 없겠어."
"알고 있어. 그래서 이전부터 주변을 싹 돌면서 정리를 하고 있어. 꽤 성과가 좋아. 숨어지내던 패배자 녀석들도 꽤 많이 잡아냈고 처형했거든. 핫. 아주 쥐새끼들처럼 숨어서 말이야."
"하지만 정작 붉은 저항의 에델바이스는 잡아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켈켈켈."
글라키에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시노프는 일부러 웃음소리를 내면서 껄껄 웃기 시작했다. 그 발언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글라키에스는 혀를 작게 찼지만 딱히 반박을 하거나 하진 않았다. 정작 그렇게 행동을 취해도 붉은 저항의 에델바이스의 아지트는 찾아내지 못했으니까. 한편 갈색 머리 사내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손을 살짝 들고 발언했다.
"애초에 그 녀석들이 근방에 있긴 한 거야? 아예 완전 멀리 떨어진 구석에 있어도 이상할 거 없잖아. 테러리스트들인데."
"크크큭. 신과 계약하여 선택받았다고는 하나 지적 능력만큼은 가호를 받지 못했구나. 나중에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빌려보도록. 그렇게 비싸지 않게 아카식 레코드를..."
"네. 네. 서점에서 책을 읽고 말고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뭐가 문제인건데? 방금 내 발언이."
"그 패배자들을 아예 보지 못한 것은 아니야. 얼마전에 주변을 탐색할 때 아스텔과 에스티아와 접촉했었어. 그 둘 밖에 없긴 했지만 말이지."
"즉, 그 들개놈들은 불안함에 빠져 나타났다는 이야기. 우리와 계약한 신의 가호를 두려워한 나머지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는 이야기. 허나 필시 그 방향은 아닐터. 타락한 어둠이 정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불나방이 되어 빛에 뛰어드는 들개들이 송곳니를 들이민 이상 포기할리 없지. 즉 파괴의 화신이 깃들어있는 땅은 그 방향이 아니라 다른 방향. 그것도 여기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
이어 은빛 머리 사내는 손가락으로 탁 신호를 줬고 그의 손끝에서 빛이 발산되었고 그 빛들은 이내 홀로그램처럼 그들이 앉아있는 자리 위에 3D 영상처럼 지도를 띄웠다. 지도에는 두 가지 포인트가 찍혀있었다. 하나는 에델바이스의 아지트가 있는 방향, 그리고 또 하나는 아지트보다 훨씬 더 남쪽 포인트였다.
"크큭. 내 피가 끓고 있는 방향은 이 두 곳 중 하나. 우선 남쪽 지대를 먼저 수색하고 남은 한 포인트를 수색하면 반드시 둘 중 한 곳에서 들개들이 나올터. 어둠은 사라지고 빛이 모든 것을 정화하리니 그 이후에 남아있는 것은 이 세상을 진정으로 수호하는 수호자. 이번에야말로 이 땅에서 어둠을 걸러내서 피를 먹고 자라려고 하는 꽃을 없애버릴 때."
"내가 계속 가겠어. 그 패배자들은 내 손으로 얼려버리지 않으면 기분이 풀리지 않아."
"가능하겠나? 크큭. 이 몸도 도와줄 수 있는데."
"흥. 너 같은 어린 녀석의 힘이 없더라도 내 손으로 충분히 말살할 수 있어. 두고 보기나 해. 이번에는 저번처럼 대충 하지 않을 거니까."
글라키에스는 강한 자신감을 보이면서 자신의 빵모자를 꾹 눌러썼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작전은 자신이 나가려는 듯이. 그리고 가디언즈 내부에선 아무런 이의도 없었다.
이스마엘은 당신의 미소를 물끄러미 마주하다 시선을 괜히 피했다. 아직은 이렇게 서로에 대해 대화하고 의견을 주고받는 것도, 대답하는 것도 많이 어색하고 부끄럽지만 서로 의견을 주고받을 때마다 이렇게 수줍게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익숙해지겠지. 무엇보다 나쁘지 않다. 간질간질하니 살짝 벅차듯 수줍은 느낌만 참으면 오히려 좋았다. 손가락을 괜히 꼬물거리다, 다시금 당신의 눈을 마주하려는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내 덕분이라니, 부끄러운걸요." 조그맣게 답하며 긴 속눈썹을 온전히 내리 깐다. 풍성한 속눈썹이 아래로 깔려 눈동자를 살그머니 가린다.
"나는 당신 덕분에 오히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데."
서로 여기까지 왔노라, 당신 덕분이다 주고받으면 끝이 없을 테지, 적어도 서로 구원받았노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까? 그랬으면 좋을 텐데. 이스마엘은 손가락을 다시금 꼼질거린다. 따뜻한 온기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말을 걸어주지 않았더라면, 그때 붙잡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같을까. 아니겠지. 어쩌면 그 이전에 진작 모든 걸 내려놓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부정한다 해도 당신은 이스마엘에게 있어 구원자였다.
이내 겨우내 눈을 들어 당신을 마주했을 적, 당신 또한 피로가 있다 대답한다. 이스마엘은 침대로 향하는 당신의 새카만 눈길을 가만히 쳐다보고, 눈을 붙이는 건 어떠냐는 제안에 조심스럽게 눈을 휘었다. 긍정도, 부정의 의미도 아니었다. 그저 당신의 말에 정말 눈을 붙여도 되는 것인지, 잠깐 고민이 들었던 듯싶다. 심리적으로 풀려있다 한들 무의식 깊은 기저에 깔린 불안은 쉬이 가시지 않는지 잠든다 해도 괜찮을지 의문이다.
"ㅇ, 응?"
이불을 두드리는 손길도 잠시, 당신이 이불로 쏙 들어가 버릴 적 이스마엘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졌다는 투항의 표시다. 이 얄밉고 잔인한 사람. 구원자가 아니라 꼬리가 오동통한 여우라고 해도 믿겠다. 몸을 움직여 당신의 곁에 누울 적, 손을 뻗어 당신의 뺨을 가볍게 쓸어주려 하더니 작게 속삭였다.
"그거, 내가 불시에 찾아올지도 모르는데……. 각오하고 말하는 거 맞지."
이내 조금 더 욕심을 내볼까 싶어 몸을 꾸물꾸물 움직여 당신에게 품기듯 안아보려 했다. 평소라면 키 차이 때문에 어렵겠지만 지금은 누워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잠깐 단어를 곱씹다 뱉어본다. "당신도 원하면 언제든 안아도 되는데." 하고. 품 속에서 눈을 살포시 들더니, 사근사근 단어를 뱉고 보드랍게 웃어 보였다.
"시기가 크리스마스이긴 하지만 뭐 어때?" "송년회를 하도록 하자. 한 해 고생 많았고 내년에는 꼭 세븐스들의 권리를 되찾도록 하자."
때는 크리스마스 이브. 물론 아직 제대로 해결된 것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가디언즈의 간부 클래스 중 두 명의 보검을 박살냈으며 그만큼 가디언즈에게 타격을 준 것도 사실이고 그 활동들이 알려지면서 조금씩 세븐스들의 움직임이 바뀌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가디언즈가 붉은 저항의 에델바이스를 노리고 있고 지금 상황이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긴 하나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항상 경계만 하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로벨리아는 지금 시기에 맞춰 송년회를 하기로 결심했다.
맛있는 음식. 따뜻한 공간. 푹 쉴 수 있는 시간. 그리고 술.
기타 등등. 사비를 털어 만든 자리인만큼 즐길만큼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 언제 목숨을 걸고 싸우러 갈지 알 수 없었기에.
/오늘부터 12월 31일 0시까지 송년회를 주제로 일상을 자유롭게 돌릴 수 있어요. 다 같이 잡담을 떨면서 얘기나눠도 좋고 섭섭한 거 있으면 얘기 나눠도 좋고 술 먹고 춤춰도 되고..아무튼 자유롭게 놀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