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인 이상 누가 100%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볼 수 있겠냐만, 네가 웃는 이유 같은 걸 알고 싶지도 않고,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면서 정신이 비뚤어졌냐느니 하는 말에 너는 넌지시 물었다. 물론 비뚤어지지 않았단 확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면 대체 누가 티끌만큼의 비틀림 없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이냐. 그건 신이지 인간이 아니잖은가.
목표는 결정됐다. 사실이든 아니든, 뱉어내게 만들든, 억지로 건져올리든, 찢어 꺼내든... 아니지, 만약 소화라도 되는 중이라면 그 장기를 멈춰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상황은 좀 나아졌지만 여전히 여유로운 건 아니었기에 너는 앵커를 뽑아내고 여성의 꼬리, 거대한 꼬리를 피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무의식적인 규칙 정도야 있겠지만 그걸 구분하는 노력은 그다지 쓸모가 없다고 판단했고, 지금까지 네가 그랬던 것처럼 저릿한 감각이 느껴짐과 동시에 그대로 땅을 박차며, 아슬아슬하게 꼬리를 피해 움직였다. 조금 예상치 못한 점이라면 땅이 울려대서 생각했던 것보다는 매끄럽게 동작을 잇지 못했다는 점일까.
"이셔."
말하지 않아도 알 터다, 당신이 너를 부르는 것이 달라졌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이성적인 동시에 야성을 지닌 존재다, 때로는... 판단을 거쳐야 하는 이성보다도 야성이 우위에 설 때가 있으니, 어쩌면 그게 지금이리라. 그게 아니더라도 좋다. 야성이 이끄는 대로 움직여라. 사냥을 나선 한 쌍은 때때로 규칙 없이 행동한다. 아니, 규칙이 하나뿐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야성을 쫓으면 그걸로 족하다, 사냥개의 죽음은 사냥꾼의 잘못이니, 애초 발 맞출 능력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대화 없이 해낼 수 있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 증명할 때가 왔군요."
커다란 만큼 위력적이고 영향을 미치는 범위가 넓다. 그리고 그만큼 드러난 부위도 넓다. 피하는 동작 사이사이, 늘어뜨리고 휘두른 체인이 꽤 여러 번 꼬리를 휘감으려고 했다. 감아낼 수만 있다면 바로, 탁, 하고 부싯돌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그리고 엔진 구동음과 함께 체인은 불의 길이 되어 점점 강하게 진동하기 시작했을 터다. 한 번에 잘라낼 수는 없더라도 천천히, 조금씩 조이다 보면 잘라낼 수 있지 않을까.
묵직한 공격임은 맞지만 활용법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상당한 위력이 있어 보였지만 바닥의 줄기를 쓸어낸다. 자신 또한 잠시 밀려나는 정도다. 허점이 드러나는 걸 보니 무언가 이상하다. 전투는 그렇게 경험이 없는 건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안도가 담긴 미소를 마주하듯 노이즈가 가볍게 일렁인다. "응." 짧은 대답. 나 잘 했구나. 말 잘 듣는 개처럼 잠시 온순해진다. 다시 엄호에 들어가겠다는 듯 손을 하나 들어 올린다.
"인형.."
아깝게 놓친 인형, 보내줄 수 없다며 갈라진 목소리로 웃는 모습을 뒤로 이스마엘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붉은 기운이 서린 동공이 가늘게 흔들리고 다물었던 입은 오늘도 피가 배어 나온다. 다시는 위험해지지 않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돌려주었다며 배를 쓸어보이는 그 모습에 형용할 수 없는 역겨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품이 안전하다는 것을 이스마엘은 동의할 수 없었다. 한때 읽었던 동화가 떠오른다. 못된 늑대가 아기 염소를 집어 삼켰음을 안 어미 염소는 늑대의 배를…….
"언니.."
늑대의 배를.. 아니, 어미 염소의 배를……. 이스마엘은 순간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에 이를 악물었다. 잠깐 휘청이며 자신의 다리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괜히 내어줘서, 아니, 내어줬음에서 자신의 인간성을 알 수 있었으니까 그걸로 됐다. 나는 옳은 사람이다. 이스마엘은 숨을 고르더니 얼굴을 가리던 노이즈를 치웠다. 부름 때문이다. 길고 가늘게 미소 짓는다.
"네에, 잘 알지요."
날뛰어도 좋다 그거죠? 쩌렁쩌렁 울리는 웃음소리를 뒤로 사정없이 꼬리를 내리칠 적, 그대로 염력을 통해 당신을 들어올려 벽에 처박기 위해 시도했다. 꼬리에 휘감긴 체인이 조금 더 강하게 조일 수 있도록.
거친 공격에도 아랑곳않고 달려드는 쥬데카를 마수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꼬리 만을 쓰고 있으니 팔만 휘둘러도 쥬데카는 벽으로 나가떨어졌을 것인데. 마수는 막지 않았다. 그 덕에 체인은 몸뚱이와 가장 인접한 부근까지 휘감을 수 있었고 체인을 따른 불길이 점점 파고들기 시작했다.
"아아악! 아악... 아하하하하!"
마수는 쥬데카의 공격에 괴로워하는 듯 했으나 신음은 이내 희열에 찬 웃음소리로 바뀌었다. 불에 타며 웃었던 것처럼. 몸의 일부가 잘려나가는데도 웃으면서 쥬데카에게 손을 내려칠 듯 들었다. 그러나 이스마엘의 염력이 벽으로 처박는 통에 마수의 팔은 허공을 가르고 몸뚱이는 벽에 부딪혀 바닥으로 쓰러진다.
쿠웅!
묵직한 진동이 실내 크게 울리고 그 반동으로 쥬데카의 체인이 휘감은 꼬리에 푹 파고든다. 마치 썩은 살을 가르듯이. 쓰러진 마수는 바닥을 짚으며 일어나려고 했으나 지탱하던 팔이 뚝 끊어지며 다시 바닥에 처박혔다. 부딪힌 머리에 쩌억 금이 간다. 그렇게 거대한 덩치가 무색하게,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이런, 시간이..."
마수는 여느 괴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몸뚱이의 말단부와 균열이 간 곳부터 조각나 부서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의식은 있는 듯, 눈을 굴리며 특수부대의 동향을 지켜보고 있었다.
비명소리인가 싶었으나 곧 웃음소리로 바뀌어가는 목소리에, 비뚤어져도 심하게 비뚤어진 건 역시 당신 쪽이잖아. 라는 말을 씹어 삼킨다. 굳이 그렇게 신경을 서 가면서 시간을 쓸 필요는 없다. 저 괴물은 아무것도 말해주려고 하지 않았고, 너 역시 그 괴물과 대화하고자 하지 않았다. 이미 대화는 시도했다. 그럼에도 모자란 것이 대화라지만 언제까지나 이야기만 나눌 수는 없잖은가. 당장 눈 앞에 놓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대화는 그 방법 중 하나일 뿐 정답은 아니었다. 때때로 정답인 것을 우리는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으니까.
"......"
너를 노리는 공격이 보이지 않는 힘에 가로막혀 바닥으로 떨어진다. 연이은 충격에 아예 떨어져나가는 팔, 그리고 너무나도 연약하게 변해버린 듯 체인이 파고들어가는 꼬리, 그로부터 점차 제 형체를 잃고 부숴져 가는,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저항이 불가능해 보이는 마수의 위에 올라탄 모양새가 된 너는, 허리춤에서 나이프를 뽑아들었다. 일단은 저 입으로 암시하기를 그리했으니. 마땅히 확인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대로 사라져 버리도록 나둬도 괜찮겠으나...
"지금은 그다지 참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군요."
너는 지금 당장 저 배를 갈라봐야겠다, 뭐라도 봐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나이프가 번쩍인다.
괴로워하던 목소리가 희열에 찬 웃음으로 바뀔 적, 이스마엘은 등골에 돋는 소름을 지울 수 없었다. 오싹하다. 몸의 일부가 잘리고 있음에도 어떻게 저리 웃을 수 있지? 아니, 이해하려 들면 안 된다. 스스로도 저 기분을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생각하지 않았는가, '오싹하다'고. 다행스럽게 벽으로 처박혀 쥬데카를 향한 공격을 막아낼 수는 있었지만 여전히 찜찜하다.
이렇게 쉬울 리가 없는데. 여인은 쉬이 무너지고 부서지기 시작한다. 허무하게 무너져간다. 과거의 영광처럼 헛된 것이 되어간다. 부서지는 여인을 지켜보다 이스마엘은 천천히 염력으로 몸을 띄워 다가갔다. 그리고, 강한 힘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짓누르려 들었다. 쥬데카가 나이프로 배를 쉬이 가를 수 있도록. 다만 쉬이 무너져가는 여인과 달리 성질은 쉬이 죽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본디 아기 염소를 꺼내기 위해.. 잠든 늑대의 배를 갈랐다고 하지요. 마취조차 하지 않고."
이스마엘이 굳이 누를 것도 없이, 마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이런 끝을 예상한 듯이. 투둑투둑. 얼굴을 뒤덮었던 흉측한 비늘이 벗겨지며 잠시 여성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나. 곧 머리의 일부가 뚝 떨어져 바스라지며 그마저도 흉한 모습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무너져가며, 여성은 끝까지 빈정거렸다.
"마취...? 지금 이 몸에 감각 자체가 없어서 애초에 필요도 없는 짓이야. 으흐흐. 보지 않았어? 너희. 내가 그렇게 불타는 걸. 겉피부가 싹 타버렸는데. 감각을 느끼는 신경이 남아 있을 리 없잖아...?"
아하하하... 무너지면서도 여성은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하나 남은 눈으로 쥬데카의 행동을 응시했다.
쥬데카가 나이프로 불룩한 배를 찌르자 굳이 그을 것도 없이 계란 껍질 부서지듯 갈라졌다. 그렇게 벌어진 안쪽은 인간의 기관은 아무것도 없이 그저 둥근 공간이었고 유일하게 들어있던 레레시아와 라라시아가 튀어나와 바닥으로 구른다. 자매는 낯빛이 창백하고 핼쓱해진 것 외에는 외상이 없어보였다. 바닥을 구르는 충격으로 먼저 정신이 든 라라시아가 눈을 뜨고 주변과 상황을 확인했다. 제일 먼저 보였을 쥬데카와 그 다음 이스마엘을 보고서는 뭐라 말 못할 표정을 지었지만.
"너희... 아니다. 일단은, 돌아가자. 끝났으니까. 전부."
더듬더듬 그렇게 말하며 아직 의식불명인 레레시아를 들쳐메려고 하지만 일어서는 것도 힘들어 보인다. 어찌어찌 레레시아를 붙드는 라라시아에게, 그리고 여기까지 온 이들에게, 무너져가는 여성이, 셀리시아가 말했다.
"혁명이니 반란이니, 하나 같이 쓸모 없는 짓거리란다. 너희가 무엇을 하든,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아. 결국은 절망스러운 결만 만이 반복되고, 반복될 뿐이지..."
다른 이들은 그 저주 담긴 말에 무어라 답했을까. 다만 라라시아는, 떨리는 팔로 레레시아를 붙잡고 대꾸했다.
"결국 세상이 똑같은 일을 반복할 거라고 해도. 적어도 내 절망과, 레레의 악몽은 오늘로 끝이야. 어머니. 잘 자요. 영원히 안녕."
여성은 뭔가 더 말을 하려고 했으나 턱이 떨어져 나가며 더는 아무 빈정거림도, 저주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마지막까지 남은 눈으로 이들을 응시하며 지켜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허무하리만치 끝나가는 상황 속에 특수부대의 이어잭이 지지직거리며 울린다. 의무대 쪽에서 연락인가? 싶었으나 곧 들려오는 것은 로벨리아의 목소리. 드론으로 외부를 살핀 결과 바깥의 벽이 서서히 재로 변하여 무너지고 있으며, 그 덕에 통신이 연결되었고, 가까운 곳에 워프 게이트를 열 테니 구출한 주민들과 함께 복귀하라는 내용이었다. 곧 지직대며 목소리가 바뀌더니 유즈가 호들갑스럽게 통신을 전해온다.
- 특수부대! 벽이 무너지고 있어요! 복귀! 복귀에요! 아앗 참 회관으로 와서 애들 인솔하는 거랑 어르신들 이동하는 것 좀 도와주시구요!
요란한 통신 소리 뒤로, 무너져가는 여성의 재 아래 흑백의 무늬를 가진 구슬이 도르륵 굴러떨어져 하나는 이스마엘의 발치에, 하나는 쥬데카의 발치에 멈춰선다. 그렇게 지금까지의 사건이 그저 헤프닝이었던 것처럼 상황은 종결되어 갔다.
부서진 극장의 창문 밖으로 무너지는 벽이 재가 되어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그 사이로 새하얀 눈이 섞여들며, 무엇이 재고, 무엇이 눈인지, 분간도 가늠도 할 수 없는 세상이 그들 돌아가는 길에 펼쳐졌을 것이다.
//마지막! 반응레스 받고 끝내겠습니다 모두 미리 수고하고 고생하셨씁니다아아아~~!!! (그랜절)
이젠 굳이 무언가 더하지 않아도 확연히 거체는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겉을 감싸던 껍질 하나가 무너지니 숨겨두려고 한 것인지 원래의 모습과 유사한 얼굴이 등장했으나 그마저도 무너져 내려, 결국 원래 무엇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흔적으로 화할 것이 뻔했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신경을 좀 더 생산적인 쪽으로 곤두세웠다. 혹여 안에 담긴 존재가 다칠까, 조심스럽게 찔러넣으니 가른다는 감각보다는 깨진다는 감각처럼 그 내부가 드러났다.
두 사람은 무사했다. 다소 핼쓱해지긴 했지만 적어도 외상은 눈에 띄지 않았고 라라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아직 제 한 몸 가누기 힘든 상황인 듯했으나 정신은 어느정도 멀쩡한 것처럼 들려오는 목소리에 대답하는 대신 너는 라라시아를 도와 레레시아를 부축했다, 가능하다면 들쳐업는 것도 괜찮으리라. 그리곤 이제 더 이상 붙잡지 못하는 존재를 붙잡고 늘어지는 듯한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는군요, 아쉽겠습니다, 아니... 아쉽군요, 당신의 말이 틀렸다는 걸 딸들이 증명하는 걸 봐야 하는데."
이미 충분한가? 뭐 어떠냐며 말을 마친 너는 다시 연결된 통신으로 바깥 상황을 전달받았다, 이제 철수뿐이군. 어쨌건 임무는 끝났다. 나가기 전에... 회관부터 들려야 하니 완전히 다 끝난 건 아니지만. 그렇게 돌아가려다, 발치에 닿은 구슬을 발견하고 집어든다, 이건... 이젠 자취를 감춘 그것의 자리를 잠시 돌아보던 너는 이내 시선을 되돌렸다.
움직이지 않는다. 얼굴을 뒤덮던 비늘은 벗겨지더니 무너지기 시작한다. 머리가 뚝 떨어져 바스라지고, 그럼에도 신체의 기능은 작동하는지 입을 벌려 내뱉는 빈정거림이 귓전을 때린다.
침묵. 이스마엘은 그저 지극히 오만하고, 고압적인 시선을 한번 던진 뒤 눈을 감는다. 세심히 부서지는 소리를 뒤로 바닥을 구르는 소리에 다시금 눈 가늘게 뜨자 보인 것은 그리운 얼굴이다. 라라시아가 먼저 정신을 차렸을 적, 이스마엘은 가늘게 뜬 눈으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스럽게도 무사하구나. 그런 의미였다. 한결 누그러진다.
"……."
다만 무너져가는 여성을 보며 이스마엘은 시선을 옮기지도 않았을 테지.
"알아."
이스마엘의 답은 짧았다. 그런 머저리에게 딸을 뺏겼노라 지옥 구렁텅이에서 스스로 생각하길 바라며. 흘끔 시선을 옮긴 이스마엘은 굴러오는 구슬을 보다 염력으로 들어올리더니 눈짓으로 훑다 주머니에 쑤셔박는다. 이어셋을 통한 복귀 명령도 들어왔겠다,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으니 라라시아를 도와 레레시아를 부축할까 했더니만, 막상 쥬데카가 먼저 나선다. 이스마엘은 그 모습을 잠시 쳐다보다 만일 쥬데카가 레레시아를 들쳐업는 것에 성공한다면 라라시아쪽을 도우려 했을 것이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버틸만 하니까요."
쥬데카의 말에 가뿐히 대답하면서도, 창문 밖으로 보이는 광경에 노이즈를 켜 얼굴을 가린다. 이 이야기에서 가해자는 누구고 피해자는 누구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침묵하기로 했다.
엄마 얘기도 극중극이란 설정으로 소름돋게 잘 표현했고.. 과거사에 대한 것도 잘 풀렸고.. 무엇보다 미지의 것에서 오는 공포가 너무 생생해서 참여하는 내내 즐거웠다구..!! 레샤주는 천재 털뭉치야~!!!(뽀다다담) 진행하느라 고생 많았구 즐거운 추억 남겨줘서 정말 고마워..!!🥰🥰🥰
>>30 원래 독백으로 풀려던 설정을 갠이벤으로 만든거라~ 음 잘 즐겨준거 같아서 나도 기쁘다구~ 쥬주 잘 자~ 굿밤~!
>>31 레이주! 깨문다아악 (와그작)(우물우물)
>>33 미지의 것에서 오는 공포...ㅋㅋㅋㅋㅋㅋ 후후 성공적... 조금만 더 여유롭게 잡았으면 더 많이 보여줬을텐데 그러질 못 해서 아쉽다~ 히히히 (포근포근 털뭉치) 나두 끝까지 참여해줘서 고마워~~ 이제...이제 일상으로 묘한 꽁기함을 푸는 일만 남았...남...ㅋㅋㅋㅋㅋ (옆눈)
일단 끝은 냈고.. 이따 오후나 저녁에 질문이랑 남은 거 털어야지 지금은 피곤타.... (늘어짐)
자캐들의_술버릇 : 내가 이걸 몇 번이나 푸는지 모르겠다.. 조금 무뚝뚝해지는 면도 있고, 자신의 것에 대한 집착이 많이 강해지는데.. 이마저도 확실하게 말하자면 '무뚝뚝하다'는 자기가 마지막까지 선을 그으려 하는 거야. 술을 마시면 자제가 안 되는 걸 알아서 스스로도 초인적인 정신력에 가깝게 버티려 드는 건데 여기서 이제 술 몇잔 더 들어가서 분간조차 못 하게 되는 순간이면...
"그냥.. 가지 마.. 지금은 나랑 같이 있어. 이 이후에도, 앞으로도. 안아줘." "안돼? 그럴 리가 없는데.." "당신이 그렇게 나오니까.. 조금 슬픈 것 같아. 안아주면 안돼..? 아니면 내가 안아도 될까?" "제발. 조금만.. 이러고 있고 싶어. 존재를 확인하고.. 확인받고 싶거든."
"..아.. 내 주변의 사람들은.. 어째서.. 자꾸만 날 비참하게 만들지." "손가락 끝부터 시작해서.. 남김없이 씹어 삼키고 싶게. 평생 곁에 있으면 좋을 텐데."
이런 대환장 상황이 나옵니다... 아버지의 원수에게도 이렇게 나오니까 절대 술 한계치 넘겨서 먹이지 말것..
삑나가면.. 아마 무엇보다 화려하게 미소 지으면서 양 팔을 쭉 벌리지 않을까?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한번에 죽이지도 마십시오.. 당신의 증오를, 모든 감정을 쏟아준다면, 나는 더없이 기쁠 겁니다." 이런 말 하지 않을까 싶고?
그런데 이제 더더더 삑나가면 뭐가 나오나요?
"자, 증오하십시오.. 나에게 모든 시선을 향하십시오. 내가 쓰러지는 모습을 당신만이 봤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쓰러지는 그 순간, 당신의 생각이 오로지 그 순간으로만 한정되고. 그 머리에.. 영원히 내가 고통 속에서 뒤틀다 죽어버리는 순간이, 그때 당신이 느낀 감정이 내리박혔으면 합니다. 그게 내가 바라는 최후입니다."
이스마엘: 222 무언가를 잘 돌보나요? : 스스로 몸 간수도 못 하는 앤데 다른 것을 과연 잘 돌볼까.....???🤔 열심히 시도는 하지만 돌보는 건 영 젬병일 것 같네.
033 휴대폰의 잠금은 어떤식으로? : 지문인식은 강력했다..
168 타인과 싸웠을 때 화해의 방식은? : 갸아악 이걸 지금 주면(쓰러짐)
지금껏 인간관계: 아빠 그리고 제(칩으로만 만나서 대화는 못하고 게임으로 서로 인성만 확인함), 신디 끝... 그래서인지 싸워서 화해~ 라는 개념을 실행해본 적이 없어서.. 화해하는 법 검색해보고 사례 읽어보고 머리 싸매다가 먹을 거리라도 조금씩 사와서 대화 좀 해보려 하지 않을까.. 머뭇거리다가 그러니까.. 그게.. 미안..해요.. 하면서 막(일상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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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엘에게 드리는 오늘의 캐해질문!
1.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믿는지?」 : "굉장히.. 낯부끄러운 질문이군요! 흠, 첫사랑의 범주를 어떻게 넣어야 할까요. 그러니까..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믿습니다." "제 첫사랑은 공교롭게도 아버지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동경과.. 인정.. 그리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헌신하고 싶었지요. 엘렉트라 콤플렉스라고 하던가요, 이걸." "뭐, 심리적 기제라 한들 그런 것도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제외한다고 하면.. 아, 음...... 번복하겠지만..?"
2. 「기념일 선물은 아름다운 것과 실용적인 것 중 어느 쪽?」 : "어느 쪽이라도 좋습니다. 저를 위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값지니까요."
3. 「안정과 도전. 둘 중 하나를 고른다면 어느 쪽?」 : "도전입니다." "안정된 삶을 추구했으나.. 도전이 없다면 안정도 없음을 깨달았기에." "그래, 그래서 이제 건물 자유낙하를 도전하시겠다?" "물론이지." < 로벨리아 이 금쪽이들 좀 봐
>>46 첫 진단부터 스페셜 스킬 쓰는 거 강렬하잖아 ㅋㅋㅋㅋㅋㅋ 삼촌 시말서 쓰냐구.. 그렇지만 그럴만도 하고.. 으악 설렁설렁 피구하게 해주던 체육쌤이 단련 시즌 되면 지옥의 유격 조교가 된다..? 도망쳐~!!!! 희망으로 삼는 거 뭐야 우우.. 지금은..?🥺 특수부대 사람들을 희망으로.. 삼아주세요... 행복해지라구 삼촌...(훌쩍) 대중교통 중간이 없는 것도, 유잼인간일거라 생각하는 거, 밀어서 잠금해제 캐해 너무 시원시원해서 웃기고 레이다움...
아니 마지막 뭐야 갑자기 진지해지는데 이유 듣고 눈물남.. 삼촌...... 미워할 수 없는 삼촌..
>>47 진짜 나빴다 우우~ ㅋㅋㅋㅋㅋㅋㅋ 밥이나 사 < 이거 너무 너무임... 대충 넘기려 들지만 막상 야, 밥 사줄 테니 나와. 하면 또 이게 밥이냐 주는대로 먹어라 하면서 티격태격 하겠지 음 테이스티(?)
셀리시아 개인의 과거에서 한 건 세븐스를 이용해서 사람을 괴상하게 비틀어버리는... 사람으로 꽃을 만들었지. 신체구조로 꽃 모양을 만들었다는 거. 어... 당연히 그렇게 된 사람은 전부 죽었고. 가지고 논 뒤에는 절벽에 던져버리거나 썩게 해서 증거인멸하고. 그런데 이게 시간이 지나면서 피해자가 너무 늘어나니까 애꿎은 마을이 누명을 쓰게 됐고. 인근 도시의 가디언즈 부대가 처형을 나오기 전에 셀리시아는 도망갔지.
도망친 후에는 한동안 얌전히(?) 몸 팔아가며 생활하다가 쌍둥이의 아버지 되는 남자를 만났어. 여기서부터 시트의 설정이랑 다른데. 그러니까 사실은 이 남자가 셀리시아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임신을 알았을 때는 기꺼이 결혼도 생각했대. 그런데 집안이 반대하니까 차츰 미뤄지다가 결국 쌍둥이가 태어났는데. 셀리시아가 애기들한테 세븐스로 손을 댄 걸 보고 혐오를 느껴서 셀리시아와 아이들을 버렸어. 남자는 이 사건으로 결국 세븐스 혐오자가 되어버렸고.
버림받게 된 계기는 그.. 전에도 슬쩍 풀었던 성별떡밥.. 그거랑 외적인 부분 바꾼거인데. 이제는 말할수 있다 성별이 바뀐 쪽은 라라였습니다...! (라라 : 에?) 라라는 남자애로 태어났는데 돌도 지나기 전에 여자애로 바꿔버렸어. 그리고 레시는 원래 흑발이었는데 백발로 바꿨고. 얼굴도 둘 다 셀리시아를 좀 더 닮았는데 차차 자라면서 손을 댔고... 둘의 세븐스가 뭔지 판별된 후에는 본격적으로 둘을 완벽한 페어로 만들려고 했지. 레시는 독에 익숙해지게 꾸준히 독을 먹였고 라라는 회복력이 더 발달하게 계속 부상을 입혔고... 그러면서 계속 말로 가스라이팅을 하고 그 좁은 방 안에만 가둬놓는 걸로 자아를 거의 억눌러서 그야말로 살아있는 인형을 만들었지.
그런데 셀리시아는 원래 파괴 성향이 더 강한 쪽이라서 다 만들어놓은 애들을 부숴보고 싶었단 말이지? 인형은 부수면 끝인데 사람은 어떻게 될지 궁금했단 말야? 그래서 가디언즈에 걸릴 만한 짓을 해서 2년 전 그 사건을 일으켰는데 셀리시아 본인도 부상이 너무 커서 세븐스로 어떻게 연명하는 것 밖에 못 했어. 숨기도 해야 했으니까 돌아간 곳이 고향이자 갠이벤에 나왔던 그 마을이고. 그렇게 버티고 있던 중에 쌍둥이가 할아버지인 블레이크를 찾아 접촉했고 드디어 만나게 됐다~
>>76 음. 결론은 어머님이 생각 이상으로 막 나가는 분이었군요! 역시 수갑을 철컹철컹 채워야.. 꽃 부분이 가장 애매했었는데 사람을 꽃 모양으로 만든거였군요. 사람을 죽이고 그 피로 꽃을 피웠나 이런 생각이 들었었는데. 그 이외에는 대체로 제가 보면서 짐작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것같고...
확실한 것은 카시노프가 엄청나게 탐내던 인물이었을 것 같네요! 와. 다시 한번 개인이벤트 수고했어요!
이 갠이벤 자체가 원래 독백으로 쓰려던 성장 서사를 변형한건데. 쌍둥이의 트라우마는 과거 어머니를 그렇게 잃었던 것도 있지만 에델바이스에 들어와서 제대로 된 바깥 세상을 접하면서 생긴 인식 차이로 인한 것도 있었어.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자신들을 위한 거라며 했던 것들이 사실 보통이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거든 응... 그동안 어머니한테 가졌던 애정이 분노로 비틀려서 애증이 되어버린 것도 있고. 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거나 해보려고 혹시나 있을지 모를 어머니 쪽 친인척을 찾았던 건데 어라 어머니가 살아있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쌍둥이는 무서웠지만 동시에 만나지 않으면 평생 트라우마를 질질 끌면서 살 것 같았어. 그래서 임무에서 복귀 하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떠났던 거야.
>>80 ㅋㅋ셀리시아는 애매한 빌런이 아니라 완벽하게 정신이 나간 빌런이엇다~ 저번에 가디언즈 에유 하면서 좀더 탄탄해졌지!
가디언즈 에유 때 셀리시아가 하던 연구의 중점이 최적의 상태인 육체를 장기간 유지하는 거였는데. 이 설정 자체가 본편에서는 살아있는 생명체를 가지고 노는 것에서 파생된 거였다~ 의외로 카시노프랑은 대척했을지도 몰라? 셀리시아는 살아있는 것 만큼 죽음도 숭고하다고 여겼거든. 그러니 좀비병은 자기 미학을 거스르는 끔찍한 걸로 취급했을거야. 이런 모습도 분량조절실패만 아니었다면 풀 생각이었는데 크....
작게 앓는 소리를 내는 당신을 다시 올려다보니 분명 복합적인 감정이 담긴 표정이 보였다. 일련의 대화 후 건네는 목소리에 너는 글쎄 무슨 말일까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욕심인가? 네가 대답하지 않을 때 찾아올 일이 명확하다면 너에게는 대답하거나, 두루뭉술하게 넘기는 것 말고 대답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도 있지 않겠는가. 물론 당신이 그러길 원한다면 그래도 좋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니 당신이 이야기하듯 여전히 너는 당신의 원한다면 그리해도 좋다며 결정을 넘기고 있는 셈이었다. 그때처럼 지금도, 여전히 치사하게.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욕심 없는 삶을 원하는 것도 어찌 보면 욕심인데, 근본적으로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있나? 물론 그런 의미에서의 욕심쟁이라는 말이 아닌 것 정도는 안다. 그렇기에 긍정했던 것이다, 욕심이 많으니까. 세븐스라면 언제든 삶이 끝장날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일부러 가시밭길에 뛰어들어 사선을 넘나들고 있으면서 목숨이 끊기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뿐만이랴, 애정을 쏟을 상대를 찾아 지금 눈 앞에 두고 있는데, 이게 어딜 봐서 욕심 없는 사람의 모습이란 말이냐. 가벼운 입맞춤 뒤 들려오는 목소리는 조금 더 신중하게 하고 싶은 듯, 정말 키스해도 괜찮은지를 묻고 있었다. 답이야 물론...
"물론이지."
그리고 자연스럽게 마주쳤던 입술은 잠시 한 호흡, 마음을 다잡으려는 듯 떨어졌다가. 이제는 한동안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깊게 마주쳐 왔다. 이미 허락한 만큼,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적어도 당신이 만족할 때까지 맞닿으려고 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라, 결국 다시 둘로 떨어져 마주볼 즈음 너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저 표정 봐. 치사하고, 앙큼하고, 조그마한 욕심쟁이 같으니라고! 더 무슨 말을 붙일까? 욕심은 커져만 가고 도피하고 싶어 하는 마음도 똑같이 커져만 간다. 이스마엘은 그 사실이 자연스럽다는 생각과 더불어, 제법 석연찮다고도 생각했다. 인간은 본디 무언가에 기대고자 한다는 합리화와 더불어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싶은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세상에, 아직도 그래?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다는 사실 자체가 처음인데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데 정말 괜찮을까. 길 잃은 나그네가 되었다고 한들 그게 영원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어딘가에 정착한다 한들 그 대상이 사람이어도 괜찮은 것일까. 그렇지만 지금 골몰하기엔 적당치 않은 주제인 셈 치고 고이 접어두기로 했다. 꼬리를 무는 생각은 끝이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좀 이기적으로 나오지 않으련. 무엇이 두렵니? 다만 누가 욕심이 없을까. 지금 자신도 드러내지 않았는가, 당신의 새까만 눈을 마주하노라면 욕심이 조금 더 선명하게 내비친다. 그 사실에 지레 겁먹어 되묻게 된다. 정말 그래도 괜찮겠느냐고. 다만 당신 또한 괜찮노라 의사를 비쳤기에, 이스마엘은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이후 당신을 온전히 낙원 삼아 경외하며 동시에 숭배했다. 조심스럽게 뺨을 잡았던 손으로 당신의 머리카락을 헤집었고,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조심스레 얽어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둘을 이어주던 입술도, 손가락에 얽혀오던 머리카락도 흐릿하게 멀어져 간다.
"……응."
짧게나마 달뜬 숨을 고르고 난 뒤, 물끄러미 당신을 마주해 본다. 부름에 신실한 종이 응답하듯.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하는, 나른한 기운이 서린 연둣빛 눈은 수많은 일을 겪었으나 여전히 생기를, 그리고 광채를 머금고 있었다. 이내 그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온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들을 수 있어." 조그마한 답을 덧붙이며. 여전히 새까만 눈동자에 자신이 담겼지만,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이젠 제 욕심에 덜컥 겁이 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살아온 시간, 앞으로 남아있으리라 기대할 시간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간이란 것이 항상 절대적이지만은 않은 법이라 입을 맞췄던 것은 찰나의 시간이기도 했고, 동시에 영겁이기도 했다. 확실한 건 끝이 났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영원한 시간은 아니었다는 의미겠지. 어쨌건 너와 당신이 서로 마주보는 시간에 네가 먼저 건넨 짧은 말을 당신은 어떤 말이라도 듣겠다며 준비하고 있는 듯했다. 정말 무슨 말이라도 들을 것 같은 상황에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까지 믿음의 대상이 되어도 좋을까, 혹은 광신일지도 모르는 상황을 살짝 살피듯 당신의 얼굴을 보던 너는 입을 열었다.
"내 의사를 물어본 거, 좋았어요. 그래서 미리 말해주려고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쉽지 않을 때가 있다는 건 알고 있겠죠?"
대화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잃는 것보다 많다. 그 점만은 인정하고 있었으니 앞으로도 계속 대화를 이어나가려고 노력하겠지만 때로는 대화가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보지 못하기도 하고, 대화하기엔 너무나 바쁜 때가 찾아오기도 한다. 아니면 깊어지는 관계 때문에 자연스레 대화 없이도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는 때가 올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마저도 아무런 대화 없이는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말해둬야 했다.
"나는 내가 받고 싶은 것들을 당신에게 줄 거에요, 키스를 받고 싶다면 당신에게 키스하고, 꼭 안기고 싶다면 꼭 안아주고, 자장가가 듣고 싶다면 자장가를 들려주고..."
선물... 같은 경우는 조금 다르긴 했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면 아마 첫 선물은 네가 가장 좋아하는 게 되지 않을까 싶다. 어쨌건... 당신의 얼굴을 보던 눈을 천천히 내리깐다.
"그리고 당신 역시 당신이 원하는 걸, 당신이 받아도 좋은 것들을 내게 보여줬으면 해요."
아앗..아아아앗...ㅋㅋㅋㅋㅋㅋㅋㅋ 하지만 아스텔의 입장에선 전혀 모르는 이야기. (옆눈) 아니. 아무튼 중요한 것은 얼굴을 보이면 아스텔은 바로 알아챈다는 것이 포인트인 것이에요!! 연인의 얼굴도 못 알아보면 쓰나! 아무리 이 녀석이 마트 심부름도 이상하게 하는 녀석이라지만!
당신이 웃음을 내뱉을 적, 이스마엘은 눈부터 시작해서 입가까지 미소가 얼굴에 내려앉았다. 나른하게 그인 연둣빛 호선과 선홍빛 호선이 평소의 쾌활함과는 달리 차분하다. 당신의 말이라면 지금이면 무엇이라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말 잘 듣는 조그마한 개부터 시작해서 신도까지, 그 무엇이라도. 그만큼 당신을 신뢰하고, 그만큼의 선 안에 들였기 때문에.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노라면, 눈 맞춘다 한들 방금까지만 해도 일렁였던 욕심이 말끔히 가라앉아 있다.
"……알고 있지요."
삶은 길되 짧다. 주어진 시간 동안 말하지 못할 수도, 전부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누구나 후자였으면 좋겠다 바랄 테다. 다만 어느 날은 대화가 충분한 소득을 얻지 못할 수도 있고, 여의치 않은 상황이 생겨 대화의 단절이 생길 수도 있다. 잘 알고 있는 일이다. 아무리 사회와 단절된 삶을 산 이스마엘이라 할지언정 모를 리가 없었다. 얌전히 당신의 말을 듣다 보면, 당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어림짐작이 가나 쉬이 입을 떼지 않고 경청했다.
"……."
당신이 눈을 내리깔았을 적, 발언권이 들어온다. 덜컥 들어온 당신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방금 전까지 입을 맞춰놓고 이젠 그 현실이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과분함은 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들어오기 마련이었기에. 이스마엘은 차마 지나치게 과분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자신이 이런 걸 받아도 되는 걸까? 조건이 있지만 따지고 보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애정과, 미래를? 언젠가 꿈꾸던 과거는 바라고 또 바라며 하루를 지새웠겠지만, 이미 체념하고 기대하지 않은지 오래된 일이었다. 그런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다가오는 당신의 말이 순간 잘 와닿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단어를 뱉어본다.이후 꺼낼 말을 한참 속으로 곱씹었는지 위아래 붙어있던 입술이 떨어지는 속도가 느리다.
"당신에 대한 욕심이 제법 많아서.. 그러니.. 내가 원하고, 받아도 되는 범위가 너무 많고도 넓은데……."
당신이 감당할 수 있을까? 당신이 받아 가는 것보다 내가 얻는 것이 더 많을 텐데. 그래도 괜찮은 걸까. 차마 어떤 말을 붙여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 괜히 입을 다물게 된다. 그리고 눈을 내리깐 당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생각을 고쳐보기로 했다. 조금은 이기적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당신이 이렇게 얘기했다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고, 당신 또한 고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이스마엘은 결국 살포시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네 말이 조금은 갑작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말이라고 해서 대답까지 갑작스러울 필요는 없었으니 당신은 그에 맞게, 즉답 대신 고민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많은 부분이 더 마음에 들었다. 누구라도 마움 속에 욕심을 품기 마련이고, 때때로 그 욕심이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는, 혹은 자신의 위치와 삶을 잃어버리게 만들지도 모르는 욕심. 그래도 당신은 바로 대답한 게 아니라 고민하고 있었다, 이게 옳고 그른가를 떠나서라도, 너에게 정말 그렇게 해도 좋을까 고민하는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당신이 너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간신히 입 밖으로 내는 말은 여전히 망설임을 담고 있는 듯 조곤조곤했고, 서두르지 않았다. 원하는 것이 많다. 그만큼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많다. 아직 뒤엣말이 이어지지 않았지만 이정도로도 충분했다. 네가 받아들일 의사만 있다면 끝나는 일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이 미소 지으며 다행이라고 말하자 너 역시 미소지었다.
"물론입니다, 이셔."
아, 한 가지 더.
"싫은 건 싫다고 말해줘야 해요, 결국 말이지만... 하나 둘씩 쌓일 거고, 그만큼 우린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으니까요. 알겠죠?"
당신의 모든 것을 좋아해요, 같은 말도 좋지만... 이런 당신이라면 더 행복할 거 같아요. 라고 말해주면 된다고 덧붙인 너는, 이제 할 말은 끝났다는 듯 당신의 손을 붙잡았다.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 뭔가 하고 싶은 말 있어요? 아니면, 흠... 좀 피곤하지는 않아요?
"그러고 보니 슬슬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군. 그럴 땐 역시 선물이지." "해볼까. 선물 교환."
차가운 겨울바람을 쐬고 있던 로벨리아는 싱긋 웃었고 이내 아스텔과 에스티아를 불러서 뭔가를 지시했다. 둘 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 둘은 각각 어떤 준비에 몰입했다.
그리고 정확하게 2일 뒤. 아지트 내부에 선물을 집어넣을 수 있는 커다란 통이 하나 벽에 걸려있는 것을 모두는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쓰여있었다.
[슬슬 크리스마스라는 거 알고 있지? 그래서 김에 선물교환식을 해보려고 한다.] [선물에 이름을 써서 넣으면 선물을 넣은 이들 한정으로 내가 적당하게 랜덤으로 교환해서 나눠주도록 하마.] [참고로 누가 뭘 받을진 모르고 나도 선물이 뭔진 모르니까 자신이 뭘 받을지는 운에 맡기도록.] [참고로 이상한 쓰레기 같은 것을 선물이라고 넣었다는 것이 발각되면 내가 책임지고 처단할테니 하지 마라.]
아무래도 이 통에 선물을 넣으면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받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거나 넣으면 그건 그것대로 로벨리아가 가만히 있지 않을 모양이었다.
선물을 넣을지 말지는 자신의 자유지만 그래도 넣는 것이 좋지 않을까.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자. 수요일! 이번주는 스토리 진행은 없고 대신 크리스마스용 짧은 이벤트에요! 지금부터 25일 0시까지 웹박수에 [크리스마스 선물] 이라는 머릿말을 달고 캐릭터 이름과 넣은 선물을 작성해서 웹박수로 보내주세요.
한 사람당 오직 한 개만 넣을 수 있고 넣는 이들 한정해서 랜덤으로 들어온 선물을 교환으로 로벨리아가 보내준답니다!!
글라키에스의 입장에선 질투라기보다는 뭔데 저 패배자에게? 이런 느낌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요. 딱히 글라키에스가 아스텔이나 에스티아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에. 꽁냥꽁냥을 하면 다른 의미로 짜증난다. 얼려버릴까..정도로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지네요!
어떻게 답하면 좋을지 여러 번 곱씹어 본다. 당신은 이따금, 짧고 편협적이게 살아온 인생임에도 과분함은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사람이다. 지금도 이렇게 차분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서로에 대해 더 알아가는 방향을 긍정적으로 이끌고자 하는 사람이지 않은가! 이스마엘은 욕심에 대해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소중한 사람인 만큼 좋은 단어를 고르고 모아 당신에게 좋은 답으로 내어 주고 싶은데, 마땅히 떠오르는 답이 없다. 대신 뱉는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하다가, 욕심도 좋은 답이 아닐까 살며시 고양이 발톱 꺼내듯 내어 보인다.
"응, 알았어요."
욕심에 대한 확답을 듣고 자그마한 덧붙임을 듣다 보면 어느새 고분고분 따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수줍게 되어버린다. 사실 이스마엘에게 있어 싫은 것은 없지만, 당신은 그게 아닐지도 모르니까. 경청할 수밖에 없고 실천할 것이다.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가족이라 해도 불가능한 일인데 피 하나 이어지지 않은 존재가 어떻게 감히 이해라는 말을 쉬이 꺼낼 수 있을까? 천천히,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해가며 맞춰가고 알아가는 수밖에.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온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이스마엘은 손이 잡혔을 적,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꼬물거렸다.
"……내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당신의 그런 점이…… 나는 정말 좋아."
수줍은 듯, 새로운 대화의 방식을 깨달아 기쁘고 한 걸음 나아갔음에 의미를 얻은 듯. 입술이 보드랍고 희미하게 올라간다. 얌전히 다물린 입술이 온전한 호선을 긋지 못한 까닭은 감사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눈을 도르르 굴리다 시선을 조심스럽게 맞추는 모습이 조금 어색하다. 피곤하지 않냐는 질문 때문이다. 스스로도 눈 밑의 푸르스름한 기운을 지울 수는 없었다는 걸 아는 걸까.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말 끝을 흐려버렸다. 피곤하다고 한들 깊게 잠들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당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눈이 느릿하게 감겼다 뜨였다. "리오는?" 뭔가 바라는 것이 있는 어린 강아지처럼 조그맣게 물어보며.
물론 천장만 보이지는 않았다. 라라시아가 눈 땡글하게 뜨고서 옆에 있었다. 그냥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속옷 바람으로 누워서 생글생글 웃는 얼굴은 얄밉기 그지없었다. 뭐하냐니까 신체검사라며 낯짝 두꺼운 소리를 하길래 흐느적 대는 팔로 베개를 들어 그 얼굴을 한 대 내리쳤다. 퍽! 둔탁한 타격음 뒤에 악 소리 대신 히히 개구진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재차 얄미워져서 더 치려고 베개를 들었는데. 뻔뻔하게도 손을 들어 막는 라라시아였다.
"스톱, 스톱! 맞을 때 맞더라도 변명은 하게 해줘!" "뭐. 할 말이 있어 지금?" "당연히 있지. 이거 보라고. 이거."
라라시아가 이거라며 가리킨 건 그녀의 옆구리였다. 왼쪽 옆구리. 도자기처럼 희고 잘록한 옆구리에는 여태 본 적 없는 검은 문양이 있었다. 크게 피어난 장미와 가시 덩쿨. 잎사귀 몇 장. 마치 옆구리를 뚫고 피어난 것처럼 그려진 문양을 보고 언제 했냐고 물으려고 하자 그보다 앞서 라라시아가 말했다.
"이거 내가 한 거 아니야. 그리고 너도 있어." "뭐? 어디? 앗 진짜네?!"
너도. 라길래 황급히 몸을 일으켜 옆구리를 보았다. 오른쪽에 있었다. 좌우가 바뀌었을 뿐인 똑같은 문양이. 그러나 그 문양이 있는 자리는 분명.
"...설마, '조정'된 거야?" "그렇겠지. 옛날부터 우리한테 흠집 나는 거 치가 떨리게 싫어하는 사람이었잖아. 손에 넣은 김에 또 건드렸겠지. 그것 만도 아냐."
대조적으로 차분한 라라시아가 머리카락을 들어보였다. 분명 눈에 띄게 짧던 머리카락이 같은 길이로 길게 자라 있었다. 같은 문양과 같은 길이가 된 머리카락.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가 말없이 더듬더듬 몸을 움직여 마주보았다.
서로를 마주 보는 것 만으로 알 수 있었다. 지난 2년. 사소한 생활 차이로 조금 달라졌었던 서로가 거울에 비친 것처럼 똑같아졌다. 이젠 정말 눈동자만이 서로를 구분하는 유일한 차이가 되어있었다. 잠깐이지만 옛날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서로를 서로에게 얽어매어놓으려는 듯한 '그 사람'의 '조정'. 그러나 이제 겉을 똑같이 만든다고 해서, 서로에게 얽매이지 않으리란 건 서로가 제일 잘 알았다.
"뭐. 마지막이니까. 헛짓거리만 안 해놨으면 상관없어." "그 점은 이미 검사 끝났으니까 걱정 말아. 아. 그런데." "어. 뭐?" "그거는. 그대로니까." "상관없어. 잃은 날 포기했어."
잃었던 것에 대해선 진작 기대도 뭣도 버렸다고 말하며 다시 드러누웠다. 자연스럽게 옆에 누워 팔베개를 하려는 라라시아를 딱밤으로 물리치고. 잠들어있던 사이의 일들을 물었다. 이마를 문지르며 엎드려 누운 라라시아가 하나하나 얘기를 시작했다.
그 날 마을에 왔던 이들은 특수부대와 의무실 인원으로 꾸려진 의무대 한 팀이었다. 사전에 준비해서 전달된대로 백신도 잘 챙겨서 왔었단다. 덕분에 아이들을 모두 무사히 구했고. 남아있던 주민들도 같이 넘어왔다고.
다른 주민이나 아이들은 로벨리아의 판단에 따라 다른 마을로 가거나 했지만. 블레이크는 이 마을로 왔다. 따로 부탁한 건 아니고 그의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당장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고 있으니 얼마간이라도 가까이 있는게 좋지 않겠느냐고 했단다. 불편하다면 다른 곳으로 떠나겠다고 하길래 괜찮으니 마음 편한 곳에 있으라고 라라시아가 말해뒀다고 한다. 그리고 조만간 만나러 가자길래 소리없이 시선을 피했다.
조만간 보긴 보겠지만. 조금 더 나중의 조만간이 되겠지.
아무튼 그 날 구조를 도와주고 그 사람과 끝까지 대치를 한 사람 중에 이스마엘과 쥬데카도 있다고 했다. 그 사람을 무너뜨리고 껍질 뿐인 태내에 갇혔던 걸 꺼내주기까지 한 두 사람에겐 그에 걸맞는 설명과 대화를 해주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당장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주박으로부터 풀려났다곤 하나. 그렇다고 결점이 사라진 건 아니기에.
"그걸로 끝?" "끝이지 그럼. 뭐가 더 있겠어?" "으음. 그러게." "그치. 지나간 일은 더 없지만. 앞으로 해야 할 일들만 남았어." "...천천히 하자. 천천히." "또 미룬다. 또. 너 그러다 나중에 후회 왕창 한다?" "아 어쩌라고."
대화 끝에 투덜대며 엎드려 베개를 감싸안는다.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깊숙히 묻고 앞으로를 생각해보았다. 만나야 할 사람. 해야 할 이야기. 그리고 계속해서 해나가야 할 것. 여러 책임 앞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두려움이었다. 어스름히 떠오르는 불안함을 가라앉히고 그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까. 결심보다 크게 부푸는 불안에 선뜻 마음이 앞서지 않아 결국 조금 나중이라며 미룬다. 이것만큼은 어쩔 수 없는 결점이었다.
"야. 그러고 있지 말고 일어나. 기운 쌩쌩한 거 같으니까. 안 입어본 옷이나 입어봐." "옷? 너 그새 뭘 또 만들었어?" "잔말 말고 얼른!" "하... 그래. 차라리 그게 낫다."
대조적인 결점 탓인가. 아무런 고민도 없는 얼굴로 있던 라라시아가 휘릭 침대에서 일어나 옷장을 열어제끼는 걸 보고 미적미적 따라 일어났다. 지금은 어울려주는게 그나마 가벼울까. 한동안 안 입어줬던 옷들을 한아름 들고 오는 걸 보고 깊은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지만. 그래. 그나마 낫지. 그렇게 주섬주섬 옷을 입어보고 재잘대는 라라시아에게 대꾸도 해주고 하며 다시 돌아온 일상을 새삼스레 느꼈다.
"맞다. 나 이번에는 너 안 도와준다?" "무슨 의미야?" "너 뭐 할지 뻔한데. 그럼 나한테 물어보러 올 거 아냐. 누구든 오면 오는대로 도와줄 거라고." "아. 뭐... 마음대로 해." "어어. 앗 잠깐만 그거 이 귀랑 같이 입어야 해!" "아니 이런 건 또 언제 만들었어 에라이!" "야!"
그 대화라는 것이 '일상'을 말하는 것 같은데 만약 그렇다면 선우주가 먼저 일상을 구하기도 했고 먼저 구한 이를 스루하고 새로운 이와 일상을 돌리는 것은 조금 애매한 느낌이 아닐까 싶네요. 물론 두 캐릭터가 친밀한 관계라는 것은 알긴 하고 일상으로 처리해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긴 한데.. 이런 자잘한 것이 AT라던가 그렇게 작용을 하게 되니 이 부분은 조금 주의해주시길 바랄게요.
앗.. 일상.. 돌리고 싶지만 선우주도 구하는 것 같구, 쥬주랑 일상도 돌리고 있었구.. 무엇보다.. 사실 내가.. 우웃.. 우...🥺 오늘... 하루종일 밖에 있었던지라 기력이 많이 없어서 지금 당장은 어려울 듯싶어... 오늘부터 버닝인데 버닝은 무슨 노트북 펼치기도 힘들어서 침대에 누운 노답체력이라..😔 제안해줘서 고맙구 울 언니 빨리 만나구 싶은 마음 이해하지..?🥺
>>401 그렇다면 한복도 아마 잘 입지 않을까요? 물론 입는 방법이 완전 같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나름 비슷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ㅋㅋㅋㅋㅋㅋ 아닛. 아스텔을 저렇게 설명하는 거예요?! 잘 생겼다는 수식어는 항상 들어가는군요. 레레시아도 예쁘니까 쌤쌤이에요! 아무튼 약속을 어떻게든 저렇게 보충하려는 것을 보면 레레시아는 역시 상냥한 이가 맞아요. 아닌 척 하지만 상냥해요! 정말로! 우와. 그 와중에 안 자른 홀케이크라. 좋아. 이건 기억해야한다! 정말로!
알겠다는 대답, 그리고 네 손에 닿으니 꼬물거리는 손가락에 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대화가 이어지고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큰 부딪힘이 없다는 건 꽤 기분이 괜찮았다. 생각이 다른 것을 기본이라고 생각해보면, 지금 이 상황은 기본을 넘어선 좋은 상황일 테니까. 더군다나 네가 말하고, 행동한 점들이 정말 좋다고 말해주기까지 했으니,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이셔 덕분이죠,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도,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던 것도 전부 다."
당신을 마주치지 않았다면, 당신과 그 장소에 가지 않았다면, 그 곳에서 쏟았던 감정을 보지 못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때까지 멀쩡하게 있지 못했다면. 애초에 당신이 없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 너는 네 과거를 잠시 돌아보며, 다시 한 번 과거를 부정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러한 과거를 거쳐오지 않았다면 하나부터 열까지 지금의 너와는 달랐겠지, 쌓아 온 시간은 너무나 섬세해서 한 조각만 비틀리더라도 지금의 너는 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에요, 음..."
너를 보는 눈이 느릿하게 감겼다 뜨이며 묻는 말에, 망설임 없이 마찬가지로 피로가 있다며 대답한 너는 당신을 쳐다보다가 계속 앉아 있던 침대로 눈을 돌렸다가 다시 당신의 눈을 마주보고 나서, 네 입가를 한번 매만지는가 싶더니 말을 이었다.
"눈 좀 붙일까요? 얼른 누워요."
머리를 대고 누우면 결국 잠들게 되어 있다. 침대 위의 이불을 가볍게 탁탁, 두드리며 얼른 누워서 자라는 듯 손짓한다. 만약 당신이 선뜻 이불 아래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안 그러면 오늘 잠깐 정도는 내가 써도 괜찮겠죠? 침대. 나도 좀 피곤하거든요."
그대로 이불 속에 들어가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들어가면서 "아, 언제든 원하면 내 침대 써도 괜찮아요, 이셔." 라며 덧붙였을지도.
엘리나의 보검이 박살나고 조금의 시간이 더 흘렀다. 가디언즈의 간부 클래스 세븐스 4명. 정확히는 플래나와 엘리나, 그리고 레이버가 빠져있는 네 명이 한 곳에 모여있었다. 가장 상석에 앉아있는 것은 은색 머리 사내의 모습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가장 서열이 높은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상석에 앉고 싶었던 것인지. 아무튼 그 사내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혼돈을 불러일으키고 파멸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들개 놈들의 송곳니가 그렇게 날카로울 줄이야. 이렇게 된 이상 플래나가 지시한 계획을 실행에 옮겨 모든 것을 정화할 수밖에 없겠어."
"알고 있어. 그래서 이전부터 주변을 싹 돌면서 정리를 하고 있어. 꽤 성과가 좋아. 숨어지내던 패배자 녀석들도 꽤 많이 잡아냈고 처형했거든. 핫. 아주 쥐새끼들처럼 숨어서 말이야."
"하지만 정작 붉은 저항의 에델바이스는 잡아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켈켈켈."
글라키에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시노프는 일부러 웃음소리를 내면서 껄껄 웃기 시작했다. 그 발언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글라키에스는 혀를 작게 찼지만 딱히 반박을 하거나 하진 않았다. 정작 그렇게 행동을 취해도 붉은 저항의 에델바이스의 아지트는 찾아내지 못했으니까. 한편 갈색 머리 사내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손을 살짝 들고 발언했다.
"애초에 그 녀석들이 근방에 있긴 한 거야? 아예 완전 멀리 떨어진 구석에 있어도 이상할 거 없잖아. 테러리스트들인데."
"크크큭. 신과 계약하여 선택받았다고는 하나 지적 능력만큼은 가호를 받지 못했구나. 나중에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빌려보도록. 그렇게 비싸지 않게 아카식 레코드를..."
"네. 네. 서점에서 책을 읽고 말고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뭐가 문제인건데? 방금 내 발언이."
"그 패배자들을 아예 보지 못한 것은 아니야. 얼마전에 주변을 탐색할 때 아스텔과 에스티아와 접촉했었어. 그 둘 밖에 없긴 했지만 말이지."
"즉, 그 들개놈들은 불안함에 빠져 나타났다는 이야기. 우리와 계약한 신의 가호를 두려워한 나머지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는 이야기. 허나 필시 그 방향은 아닐터. 타락한 어둠이 정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불나방이 되어 빛에 뛰어드는 들개들이 송곳니를 들이민 이상 포기할리 없지. 즉 파괴의 화신이 깃들어있는 땅은 그 방향이 아니라 다른 방향. 그것도 여기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
이어 은빛 머리 사내는 손가락으로 탁 신호를 줬고 그의 손끝에서 빛이 발산되었고 그 빛들은 이내 홀로그램처럼 그들이 앉아있는 자리 위에 3D 영상처럼 지도를 띄웠다. 지도에는 두 가지 포인트가 찍혀있었다. 하나는 에델바이스의 아지트가 있는 방향, 그리고 또 하나는 아지트보다 훨씬 더 남쪽 포인트였다.
"크큭. 내 피가 끓고 있는 방향은 이 두 곳 중 하나. 우선 남쪽 지대를 먼저 수색하고 남은 한 포인트를 수색하면 반드시 둘 중 한 곳에서 들개들이 나올터. 어둠은 사라지고 빛이 모든 것을 정화하리니 그 이후에 남아있는 것은 이 세상을 진정으로 수호하는 수호자. 이번에야말로 이 땅에서 어둠을 걸러내서 피를 먹고 자라려고 하는 꽃을 없애버릴 때."
"내가 계속 가겠어. 그 패배자들은 내 손으로 얼려버리지 않으면 기분이 풀리지 않아."
"가능하겠나? 크큭. 이 몸도 도와줄 수 있는데."
"흥. 너 같은 어린 녀석의 힘이 없더라도 내 손으로 충분히 말살할 수 있어. 두고 보기나 해. 이번에는 저번처럼 대충 하지 않을 거니까."
글라키에스는 강한 자신감을 보이면서 자신의 빵모자를 꾹 눌러썼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작전은 자신이 나가려는 듯이. 그리고 가디언즈 내부에선 아무런 이의도 없었다.
이스마엘은 당신의 미소를 물끄러미 마주하다 시선을 괜히 피했다. 아직은 이렇게 서로에 대해 대화하고 의견을 주고받는 것도, 대답하는 것도 많이 어색하고 부끄럽지만 서로 의견을 주고받을 때마다 이렇게 수줍게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익숙해지겠지. 무엇보다 나쁘지 않다. 간질간질하니 살짝 벅차듯 수줍은 느낌만 참으면 오히려 좋았다. 손가락을 괜히 꼬물거리다, 다시금 당신의 눈을 마주하려는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내 덕분이라니, 부끄러운걸요." 조그맣게 답하며 긴 속눈썹을 온전히 내리 깐다. 풍성한 속눈썹이 아래로 깔려 눈동자를 살그머니 가린다.
"나는 당신 덕분에 오히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데."
서로 여기까지 왔노라, 당신 덕분이다 주고받으면 끝이 없을 테지, 적어도 서로 구원받았노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까? 그랬으면 좋을 텐데. 이스마엘은 손가락을 다시금 꼼질거린다. 따뜻한 온기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말을 걸어주지 않았더라면, 그때 붙잡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같을까. 아니겠지. 어쩌면 그 이전에 진작 모든 걸 내려놓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부정한다 해도 당신은 이스마엘에게 있어 구원자였다.
이내 겨우내 눈을 들어 당신을 마주했을 적, 당신 또한 피로가 있다 대답한다. 이스마엘은 침대로 향하는 당신의 새카만 눈길을 가만히 쳐다보고, 눈을 붙이는 건 어떠냐는 제안에 조심스럽게 눈을 휘었다. 긍정도, 부정의 의미도 아니었다. 그저 당신의 말에 정말 눈을 붙여도 되는 것인지, 잠깐 고민이 들었던 듯싶다. 심리적으로 풀려있다 한들 무의식 깊은 기저에 깔린 불안은 쉬이 가시지 않는지 잠든다 해도 괜찮을지 의문이다.
"ㅇ, 응?"
이불을 두드리는 손길도 잠시, 당신이 이불로 쏙 들어가 버릴 적 이스마엘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졌다는 투항의 표시다. 이 얄밉고 잔인한 사람. 구원자가 아니라 꼬리가 오동통한 여우라고 해도 믿겠다. 몸을 움직여 당신의 곁에 누울 적, 손을 뻗어 당신의 뺨을 가볍게 쓸어주려 하더니 작게 속삭였다.
"그거, 내가 불시에 찾아올지도 모르는데……. 각오하고 말하는 거 맞지."
이내 조금 더 욕심을 내볼까 싶어 몸을 꾸물꾸물 움직여 당신에게 품기듯 안아보려 했다. 평소라면 키 차이 때문에 어렵겠지만 지금은 누워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잠깐 단어를 곱씹다 뱉어본다. "당신도 원하면 언제든 안아도 되는데." 하고. 품 속에서 눈을 살포시 들더니, 사근사근 단어를 뱉고 보드랍게 웃어 보였다.
"시기가 크리스마스이긴 하지만 뭐 어때?" "송년회를 하도록 하자. 한 해 고생 많았고 내년에는 꼭 세븐스들의 권리를 되찾도록 하자."
때는 크리스마스 이브. 물론 아직 제대로 해결된 것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가디언즈의 간부 클래스 중 두 명의 보검을 박살냈으며 그만큼 가디언즈에게 타격을 준 것도 사실이고 그 활동들이 알려지면서 조금씩 세븐스들의 움직임이 바뀌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가디언즈가 붉은 저항의 에델바이스를 노리고 있고 지금 상황이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긴 하나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항상 경계만 하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로벨리아는 지금 시기에 맞춰 송년회를 하기로 결심했다.
맛있는 음식. 따뜻한 공간. 푹 쉴 수 있는 시간. 그리고 술.
기타 등등. 사비를 털어 만든 자리인만큼 즐길만큼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 언제 목숨을 걸고 싸우러 갈지 알 수 없었기에.
/오늘부터 12월 31일 0시까지 송년회를 주제로 일상을 자유롭게 돌릴 수 있어요. 다 같이 잡담을 떨면서 얘기나눠도 좋고 섭섭한 거 있으면 얘기 나눠도 좋고 술 먹고 춤춰도 되고..아무튼 자유롭게 놀아주세요!!
"그러니까 석양을 보고 감탄하라는 연기를 해달라는건가? 힘들지 않군. 뭔가 더 무서운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했다만. 아스텔. 빨리 하고 끝내도록 하지." "아. 네."
쥬데카의 명령이 끝난 것을 확인하고 로벨리아는 자신이 뽑은 숫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주변 사람들의 숫자를 바라보다 아스텔을 지목했다. 어차피 아스텔도 걸린 이 중 하나였으니까. 이어 로벨리아는 잠시 주변을 바라보다 창문을 가만히 바라봤다. 하얀 눈이 내리는 그 하늘을 바라보면서 아스텔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리고 어깨동무를 했다.
제 번호가 불리자 로벨리아는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메이드복이라니. 자신이 메이드복이라니. 원래 살던 집에서 사용인들이 그런 옷을 입고 일하는 것을 본 적은 있지만 자신이?! 고용주의 입장이었던 자신이?! 하지만 이것은 왕게임. 방금 전에 명령에 특별히 의미를 두지 말라고 한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던가.
이를 작게 악물던 로벨리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메이드복을 받아들고 그녀는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방 밖으로 나섰다. 이대로 도주해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으나 그런 짓을 했다간 이후에 멤버들이 자신의 명령을 따를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부끄러움을 참고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그녀는 잠시 후 메이드복을 입고 들어왔다.
"빠, 빤히 보지 마라. 안 어울리는 거 아니까. ...애, 애초에 이런 것은 나보다 우리 우주최강 큐티뷰티한 에스티아가..."
"안 입을거야."
이내 돌아오는 것은 에스티아의 딱 끊어서 거절하는 목소리였다.
/흑흑. 픽크루 이미지...를 찾기 힘들어서. 흉터라던가 분위기라던가 많이 다르지만 그냥 대충 이런 분위기는 흐른다는 것으로만..
비록 하극상이긴 하나 만족스럽던 로벨리아의 메이드복도, 레레시아와 라라시아의 파격적인 바니걸도 즐겁게 지켜보았지만 그 값을 치를 때가 되었던 모양이다. 이스마엘은 레레시아와 라라시아의 무시무시한 의상과 화면 너머로 보여주는 춤동작을 한번, 그리고 자신의 번호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니까.. 이건 언니들의.. 복수인가? 내가 그간.. 싸가지 없게 살아온 과오가 마침내.. 폭발하고 만건가? 정말..? 쫑긋하고 폭신하고 살랑살랑하며... 끝내 복실복실이 어울릴 것만 같은 꼬리를 보더니.. 이내 옷을 챙겨 입기 위해 탈의실로 향했다.
"저기, 그러니까.. 이게 맞는 겁니까?"
환복하고 돌아왔을 적, 노이즈의 면적이 줄어들어 얼굴만 간신히 가리는 모양새가 됐다. 귀에 쫑긋 선 여우 귀, 허리춤에서 살랑이는 여우꼬리.. 그리고 사이버-우마..아니 키츠네무?스메... 꼬리를 살랑대며 제자리까지 걸어가고 나서야 시키는 대로 춤을 출 수야 있다지만..
"저.. 정말.. 맞는.. 겁니까...?"
정말.. 정말 맞는 거야..? 거의 울상에 가까운 기계음을 뒤로 골반의 움직임에 따라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가 허벅지 밑을 툭툭 스칠 때마다 이스마엘은 해탈에 가까운 감정에 시달리고 말았다.. 춤을 마치고 자리에 앉을 때까지...............
레레시아보다는 라라시아가, 그리고 레레시아를 대상으로 많이 준비하는 것 같긴 했는데 왜 남성용 옷까지 있을까, 옷을 멍하니 쳐다보던 너는 네 번호를 확인했다. 그러니까, 저 옷을 입어야 하고... 옷을 입고 춤까지 춰야 한다? 너는 일단은 규칙이었기 때문에, 도망칠 방법도 없었고... 어차피 할 거라면 즐기라고 했었지, 즐기...지는 못하겠다.
"그럼 잠시 옷을 좀... 갈아입을게요."
내부가 따뜻해서 다행이다, 보온과는 전혀 관계없는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 너는 돌아왔다. 가터벨트라는 게 확실히 있어야 하는 옷차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가터벨트 없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말려 내려갈 거 같은 니삭스를 내려다보았다. 뭐 어때. 이미 입었다, 돌이킬 수 없다!
"춤...은 잘 못 추는데, 반려하는 건 없겠죠?"
왕이라지만 이정도로 명령은 끝난 거겠지, 작게 심호흡한 너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할 거라면 열심히 해 보자. 춤 자체가 몸이 뻣뻣하면 태가 안 나는 법이라, 다행히 너는 꽤 유연한 편이었고, 하기로 한 건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으니. 가볍게 양 옆으로 흔들리는 골반을 따라 부드럽게 흔들리는 꼬리는 꽤나 폭신했더랬다.
"...네, 여기까지만. 그럼..."
결국 전부 다 끝나고 나서, 무대인사하듯 몸을 굽혀 가볍게 인사를 마친 너는 자리로 돌아갔다. 얼굴을 두어 번 문지르곤 꼬리에 집중한다. 음 복슬복슬해. 안정을 취하자...
자신의 번호가 불리자 에스티아는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왜 여기서 내 번호? 전력으로 애교? 그것도 대충하면 허락을 하지 않는다니. 에스티아는 잠시 로벨리아를 바라봤다. 하지만 로벨리아는 봐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하긴 자신의 언니인 로벨리아가 이런 것을 봐줄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에스티아는 깔끔하게 그 부분은 포기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해야 할 것은 전력으로 애교를 부리는 것이었다. 3번은 레레시아. 이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난 후에 레레시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레레시아~"
다정한 목소리가 레레시아에게 향했다. 이내 그녀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내보였다. 물론 평소에도 잘 웃는 에스티아였지만 이런 웃음을 보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을까? 이내 그녀는 오른쪽 눈을 살며시 감아 윙크했다. 그리고 오른손을 살며시 올려 자신의 입가를 막으면서 자신보다 키가 큰 그녀를 살며시 올려다보는 각도로 자세를 잡은 후 시선을 살며시 올렸다.
"레레시아하고 나하고 2살 차이밖에 안 나잖아. 그래도 여성진들 중에서는 나하고 나이가 그래도 가까운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딱히 그녀의 손을 잡거나 하는 일 없이 에스티아는 살며시 미소를 짓다가 해맑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얼굴을 앞으로 살며시 밀면서 목소리를 귀엽게 깔았다.
"그러니까~ 우리~ 나이도 비슷하고 같은 여자끼린데에. 친하게 지내자. 응? 우리 친구 하면 안될까? 안돼?"
말을 마치면서 에스티아는 아주 살짝 목소리를 아래로 깔면서 불안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게 진정으로 불안해하는 것인지, 아니면 연기인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확실한 것은 적어도 표정 하나만큼은 정말로 리얼하다는 것이었다. 목소리마저도.
기껏 애교를 부리고 나니까 또 당첨이 된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작업 멘트라는데. 그것도 상대는 선우였다. 친하냐라고 하면 조금 애매한 느낌이지만 그렇다고 싫은 상대는 아니었다. 일단 명령이니까 따라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에스티아는 선우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실례할게. 라는 말과 함께 선우의 무릎 위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무릎에 그를 앉히기에는 조금 애매한 감이 있었으니까. 떨어지지 않게 조심조심하면서 에스티아는 그의 두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리면서 조금만 참아달라고 속삭였다.
이어 그녀는 잠시 숨을 내뱉다가 두 눈을 곱게 감아 달을 그리면서 선우를 마주했다. 이어 선우의 귓가에 살며시 속삭였다.
"...있잖아. 이거 다 끝나면 술 먹으면서 얘기나 나눌래? 응?"
다른 이들은 모르게 우리 둘만의 이야기. 괜찮지 않아? 후훗. 속삭이는 목소리를 내면서 이어 에스티아는 살며시 눈을 뜬 후에 그를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작업멘트라... 상대는 에스티아다. 온갖 다양한 도구들을 만들어주는 만능 도라에몽인 그녀에게 작업멘트라니.. 어중간한 작업멘트로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명령이니 따라야한다. 머리속으로 온갖 웃긴 작업 멘트를 생각했다.
물을 뿌리고는 꽃인줄 알았다고 할까? 도둑이라고 몰면서 내 마음을 훔쳐갔다고 말할까? 타는 냄새 난다고 말하며 널 향한 내 마음이 불타오른다라고 말할까?
이런저런 상황과 대사를 고민하는 사이 에스티아가 먼저 시작을 하려는 지 선우에게 다가왔다. 그는 먼저 에스티아가 먼저 대사를 시작하려고 하자 나름 긴장했는 지 물만 들이켰다. 그리고 어느새 자신의 코앞에 나가온 에스티아가 자신의 무릎위에 앉자 얼굴이 새빨게졌다. 아무리 명령이고 각오한 상황이라도 누군가가 자신 무릎 위에 올라와있다는 것이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어..좋아?"
이제는 자신의 차례였다.
숨을 가다듬고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당황하게 만들었으니 복수를 해야 직성에 풀릴듯 싶었다.
왕 다음은 또 미션이냐. 레레시아는 연이은 지목에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이번 차례의 왕인 선우를 보았다. 노려본 건 아니고. 너 뒷감당은 되겠냐는 눈빛일까. 한 번 슥 보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에스티아 때는 간단하게 할 걸 그랬나. 생각해봐야 무슨 소용이겠냐만은.
따라오려는 라라시아를 가만 있으라 막아놓고 혼자 쥬데카에게 다가간다. 마주보고 서서 잠시 바라보다가 한 손으로 스윽 쥬데카의 턱을 들어올려 시선을 맞추게 하고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좁힌다. 그 다음은 멘트.
"사랑스러운 쥬. 사실 내가 널 넘어뜨렸을 때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어. 그 날부터 네 그 무기력한 모습이 매일 눈에 아른거려서 참을 수가 없어... 이제 네 검고 깊은 눈에 나만 비쳤으면 좋겠고. 네 긴 머리칼을 만지는게 나뿐이었으면 해. 지금 뿐만 아니라 내 일생. 네게 바칠테니. 내 연인이 되어줘."
애교를 부리라곤 했지만 역시 그건 좀- 이란 말이다.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며 나머지 손으로 슬쩍 쥬데카의 손을 잡아, 아니, 잡는 것으로 그치곤 반응하라는 듯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분명 넌 간단한 걸 주문했던 것 같은데 어째 감당하기 조금 어려운 일들만 받게 되는 것 같다. 결국 치킨 게임으로 흘러가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레레시아가 미션을 수행하려고 했다. 마주보고 서니 당연히 올라가는 시선, 그리고 안 그래도 올릴 생각이었다는 듯 턱이들어올려지니 어쩔 수 없이 마른침을 삼키게 된다.
"......"
온갖 미사여구가 얹어진 고백멘트를 듣고 나서 잠시지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고민했다. 물론 거절을 해야 했고, 그것도 최대한 시원하게... 너는 먼저 붙잡혔던 손을 가볍게 떨치고, 네 턱에 닿아있던 손 역시 붙잡아 내린 뒤 뗐다.
"그건 어렵겠는걸요, 이미 임자 있는 몸이라."
가볍게 눈웃음지어주곤 바로 몸을 돌렸다. 아, 하나 더 해주면 완벽하지 않을까.
"유감이지만, 내 취향도 아니라서."
그렇게 몇 걸음 걸어보면, 이 정도면 되지 않았냐는 듯 시선을 돌려 레레시아를 보곤 살짝 고개를 숙인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닌 거 같고...
>>803 개인실 가서 마시자는 말이 나온다면 아스텔은 아마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일 것 같네요.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기도 하고 둘이서 있고 싶은 것은 아스텔 역시 마찬가지니 말이에요. 그리고 김에 레레시아 주려고 짜놓은 보라색 목도리도 선물로 줄테고요. 레레시아에게 주려고 이전부터 꽤 고심하고 고심해서 짠 선물이라고 하네요.
정말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 레레시아는 레레시아대로 이런저런 일이 있었고 아스텔은 아스텔대로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 어느 쪽도 목숨이 위험했었고 어떻게든 살아남아 바로 이곳에 있었다. 왕게임이 끝나고 조용히 맥주를 홀짝이면서 잔을 비우던 아스텔은 비스킷 쿠키를 안주 삼아 입에 집어넣었다. 떠들썩하고 시끌벅적한 것이 한동안은 이런 분위기가 계속 될 거라고 생각하나 딱히 나쁘지 않았다. 이런 휴식 시간이라도 있어야 레지스탕스 생활도 계속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또 언제 갑자기 위험한 상황이 벌어져서 출동할지 알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은 특히나 더.
아무튼 아스텔은 조용히 술을 조금 더 홀짝이다가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저편에 있는 레레시아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라라시아가 막을지도 모르나 오늘 하루 정도는 그렇게 막아도 별 소용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크리스마스지 않은가. 원래 이런 날엔 소중한 사람과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 배웠기에 더더욱. 적어도 오늘 하루 정도는 양보를 받으리라. 아스텔은 그렇게 생각했다.
"...시아."
그녀의 애칭을 조용히 부르면서 아스텔은 레레시아를 가만히 주시했다. 그리고 잠시 말을 고민하던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살며시 제안했다.
"괜찮다면 같이 술이라도 할래? ...너하고 마시고 싶어. ...그러니까 크리스마스이기도 하고, 송년회이기도 하니까. ...밖은 추워서 나가기 조금 애매할 것 같고."
왕게임이 끝나고 레레시아는 바니걸에서 산타걸로 옷차림이 바뀌어있었다. 끝나자마자 라라시아가 끌고 나와 갈아입으라며 들이댄 탓이다. 이미 지쳐 있던 레레시아는 군말 없이 갈아입었고. 라라시아가 옆에서 머리에 뭘 달아주든 뭘 하든 가만히 있다가 다시 송년회장으로 돌아와서 술잔을 기울였다.
느긋한 페이스지만 독한 술을 병째로 비워가며 라라시아의 주정 아닌 주정을 받아주고 있었는데.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자 아스텔과 눈이 마주친 듯 싶다. 눈이 마주친게 기분 탓인가 싶었지만 아스텔이 다가오는 걸 보자 기분 탓이 아니었구나 싶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레레시아도 잔을 내려놓고 기다리니 어느새 서로의 목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참 오랜만에 듣는 애칭에 고개만 살짝 기울였다가. 같이 마시자는 제안에 대답을 하려던 찰나였다.
네가 이불로 들어가는 건 아무래도 예상하지 못했는지(예상하는 게 이상할지도) 조금 당황한 듯 소리를 내던 당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표정을 보고 있자면 부정의 표시라기보다는 네 행동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표현에 가까우리라. 금새 네 옆에 눕는 것만 해도 네 생각이 옳았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음, 물론이지, 언제든 찾아와도 괜찮아."
아, 그러면 매일 방을 깨끗하게 청소해 놔야겠는데, 그런 농담을 덧붙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잠시 뜸을 들였던 것이 무색하게, 너를 품는 듯... 아니, 오히려 네가 당신을 품는 듯, 너를 안아오자 너 역시 당신을 마주 안는다. 누워 있기에 당신은 몸을 움츠리지 않아도 되었고, 너 역시 발끝으로 서지 않아도 되는 그런 상황이 된 것은 당신이 '"언제든 안아도 되는데."' 라며 말하는 것과 거의 동시였다.
"다음부턴 좀 더 빨리 말해줘야겠는걸요, 이미 안아버렸잖아."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선, 품에 안긴 당신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럼 이제 좀 잘까요, 자... 얼른 눈 감고."
애초 목적하곤 조금 달라졌지만 결국 당신이 조금이나마 안정을 찾기 바랐기에 이렇게라도 해주고 싶었다. 무언가 품에 안는 것은 안정감을 느끼게 해준다고들 하지. 그리고 그건... 어느 정도는 너도 마찬가지였다.
"...딱히 따로 빠지겠다고 한 적은 없는데. 그리고 시아가 아니면 안되는데. 난 시아와 술을 먹기 위해서 온 거니까."
자신은 어디까지나 술을 먹자고 했지. 따로 나가자고 이야기를 하진 않았기에 아스텔은 묵묵하게 그렇게 대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신이 방금 언제 밖으로 따로 빠지자고 이야기를 했던가. 다 같이 놀자고 이야기를 하는 라라시아를 바라보며 아스텔은 잠시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쨌건 자신은 가족이니까 자신이 우선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일까. 여러모로 곤란한 쌍둥이 동생이라고 생각하며 아스텔은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자리를 뜨려고 하는 것 같은데. ...질투하는거야?"
악의는 없었다. 정말로 악의는 없었다. 그냥 자신이 그렇게 느낀 것을 입에 담았을 뿐. 언제나처럼의 말을 돌리지 않는 아스텔의 직구 화법이었다. 허나 자신은 별 상관없다는 듯, 이내 아스텔은 바로 그 자리에 자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앉았다. 뒤이어 라라시아를 바라보면서 아스텔은 이야기했다.
"...사실 뭐라고 해도 선택은 시아가 하면 되지 않을까? 나야 둘이서 따로 마셔도 좋고, 여기서 단체로 마셔도 좋아. 중요한 것은 시아가 같이 자리에 있냐 없냐야."
자신이 요구하는 것을 이내 아스텔은 확고하게 이야기했다. 결론적으로는 레레시아가 동석하는 것. 그 조건이 지켜진다면 라라시아가 앉건 다른 이가 있건 자신은 별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내 아스텔은 가만히 라라시아와 레레시아. 두 쌍둥이를 바라봤다. 어쩔꺼냐는 무언의 질문을 담으며 그는 가만히 답을 기다렸따.
레레시아가 아니면 안 된다는 아스텔의 말에도 라라시아는 코웃음을 치며 가려고 했다. 그러나 직후의 말이 그 걸음을 우뚝 멈춰세웠다. 한발짝 나간 걸음을 멈춰선 라라시아가 돌아섰다. 빠져나가려던 레레시아도 윽. 하는 얼굴로 아스텔을 돌아보았다. 마주보고 아스텔의 말을 끝까지 들은 뒤. 라라시아가 웃는 얼굴에 가시 돋힌 목소리로 대꾸했다.
"끽해야 몇개월 가깝게 지낸 너를 질투할 리가 없잖아? 라고 하고 싶지만. 그래. 질투지. 뭣도 모르는게 이제와서 채가려고 하니까." "라라. 말이 심하잖, 으앗."
까칠하게 쏘아붙인 라라시아는 항의하는 레레시아를 아스텔 쪽으로 툭 밀어버리고 휙 돌아섰다. 그렇게 둘이 놀고 싶으면 어디 눈에 안 띄는 곳에나 가버리라며. 살짝 휘청인 레레시아가 야! 불러보지만 라라시아의 도도한 뒷모습은 회장 안 다른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어 가버리고. 그 자리엔 그녀와 그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쉰 레레시아는 잠시 볼을 긁적이다가. 느릿느릿 돌아서 아스텔을 보았다.
"그... 미안. 전에도 말했지만. 쟤가 널 좀 안 좋아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가 겨우 꺼낸 말은 그거였다. 어쩐지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서. 그 일이 있은 후 처음으로 제대로 보는 거였으니까. 조금은 미묘한 기분이 들어 또 얼마간을 머뭇거리다가 겨우 다른 말을 꺼냈다.
"아까 술 마시자는 거. 어... 개인실 안 갈래?"
말을 꺼내놓고 아차 싶었는지 그게 그러니까 라며 횡설수설한다.
"마시, 는 건 좋은데 사실 계속 라라 상대 해주느라 피곤해서. 여기보단 개인실이 편하게 있을 수도 있고. 그러... 그런 거니까. 그냥."
자신을 향한 공격적인 어투. 그리고 레레시아의 사과. 그 두 가지를 들으면서 아스텔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뭣도 모르는게라. 이내 아스텔은 피식 웃을 나름이었다. 이런저런 떠오르는 말은 많았으나 굳이 아스텔은 하지 않았다. 딱히 그 관련으로 티격태격할 생각도 없었으며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으니까. 허나 틀리지 않다고 해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 또한 없었다. 반대로 그녀는 뭘 얼마나 알겠는가. 결국 그 이상 말해봐야 시궁창 싸움이 될 뿐이라고 생각하며 아스텔은 살며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괜찮아. 깊게 받아들일 생각은 없으니까. ...비난이야 살면서 죽도록 들었기 때문에 딱히 아프지도 않고 화가 나는 것도 아니야."
심술이야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아스텔은 태연하게 방금 그 사실을 넘겼다. 허나 한동안은 자신에게 이러쿵저러쿵 말을 많이 하는 것은 각오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아스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작전에 지장만 없으면 상관없는 일이긴 했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어디 그렇게 쉽게 돌아가겠는가. 경우에 따라서는 로벨리아의 도움을 조금 받는 것도 고려를 해야겠다고 아스텔은 생각했다.
아무튼 개인실을 이야기를 하는 레레시아의 말에 아스텔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면 여기서 그냥 조용히 마시는 것도 괜찮지 않은가. 라고 생각을 하나 라라시아의 상대를 해주는 것이 피곤하다는 그 말에 아스텔은 어쩌면 라라시아에게서 지금은 떨어져있고 싶다고 말을 하는 것 같아 이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긴 한데. 그렇다면 내 방으로 올래? ...그게 아무래도 너에게도 나을 것 같은데. 네 개인실로 가면 라라시아가 또 올지도 모르니까."
이어 아스텔은 살며시 고개를 돌린 후에 근처에 있는 술병을 몇 개 챙겼다. 맥주, 와인. 그리고 다른 술들. 다 마실 생각은 없고 마실 정도만 마실 생각이었다. 이내 잔 두 개. 그리고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안주거리까지. 그렇게 확실하게 챙기며 아스텔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뭣도 모른다던 라라시아의 말이 비단 아스텔에게만 해당되는게 아닌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그 문제로 몇 명이나 부딪혔다. 그리고 그녀도 아스텔에 대해 그가 말해준 것 외엔 아는게 없었다. 어느 쪽도 당당할 것 없는데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면 되었을까. 그건 아닌 것 같아서. 괜찮다는 그에게 다시금 말했다.
"그래도... 미안."
다시금 중얼거린 레레시아가 머뭇거리며 개인실에 가지 않겠느냐 물었다. 이것저것 이유와 함께. 그가 별로라고 하면 그녀도 자리에 앉을 생각이었다. 피곤하지만 라라시아가 금방 돌아오진 않을 것 같기도 했고. 천천히라면 괜찮겠지. 아스텔이 침묵을 지키는 동안 그녀는 주변에 뭐가 남았는지 보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술도 안주도 적당히 남아있으니 한 잔 정도는 더 할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게 있는데 아스텔이 그러자는 대답을 했다. 상관없으니 그의 방으로 오겠냐며.
"안 올 것 같긴 한데. 그래."
라라시아의 성격상 적어도 오늘은 오지 않겠지만. 그의 초대를 굳이 그녀의 방으로 바꿀 이유도 없으니까. 아스텔이 술과 잔, 안주를 챙기고 가자고 하자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나섰다. 회장을 나갈 쯤 힐끗 돌아보자 저멀리 라라시아도 돌아보고 혀를 쏙 내밀었다.
개인실로 향하는 복도를 걷으면서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발끝으로 시선을 내리고 있던 레레시아가 문득 멈춰섰다. 왜 그러나 돌아보면 레레시아가 시선을 옆으로 굴리며 말한다.
"저기. 먼저 가 있을래? 잠깐 내 방에 들렀다가 갈게. 옷도 갈아입고."
바니걸보다는 덜 화려한 차림이었지만 평소에 비하면 요란하긴 했으니 말이다. 하얀 털장식이 달린 붉은 원피스를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슬쩍 웃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이 좋으면 이대로 가겠지만?"
아스텔이 어떤 대답을 하든 그녀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리고 금방 다녀오겠다고 돌아서 그녀의 개인실이 있는 쪽으로 종종 걸어갔겠지.
아스텔의 입장에선 지금 레레시아의 옷도 크게 상관이 없었다. 예쁘고 귀엽고 잘 어울렸으니까. 허나 멈춰서서 시선을 옆으로 굴리는 모습을 봤을 때 적어도 레레시아가 지금의 옷차림에 대해서는 조금 곤란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잠시 생각을 하던 아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가서 자리 준비해놓을게. 나는 나대로 준비해둬야 할 것이 있기도 하고."
뭔지는 비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아스텔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이내 천천히 와도 된다고 이야기를 하며 자신은 자신 나름대로 자신의 개인실로 향했다. 비밀번호를 입력한 후, 안으로 들어선 후 아스텔은 방 한가운데에 테이블을 깔았고 그 위에 술과 안주를 조심스럽게 세팅하듯이 내려놓았다. 특별히 볼 것이 없고 말 그대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가구들 위주로 놓여있는 제 방이 꽤나 쓸쓸한 느낌이 아닌가 생각을 했으나 이제 와서 벽지를 바꾸거나 방을 꾸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내 아스텔은 자신이 쓰는 책상 위에 올려둔 붉은 포장지로 포장한 상자를 손으로 집었고 자신이 쓰는 침대 아래에 살며시 숨겼다. 그것은 오늘 레레시아에게 주기 위해서 그가 며칠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맞춰서 다행이야. 정말로."
쉴 때는 쉬지만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많이 이런저런 임무에 투입되는만큼 마냥 편하게 뭔가를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상당히 촉박했으나 그럼에도 어떻게든 한 것에 아스텔은 괜히 뿌듯함을 느끼면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허나 그 표정은 이내 살며시 불안함으로 바뀌었다. 이 선물을 좋아해줄까? 싫어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불안함과 초조함이 커져가는 탓이었다. 원래는 좀 더 화려하고 멋진 것을 준비하는 것이 맞을까 싶었으나 아직은 조금 부담스럽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기에 다른 방향으로 선물을 준비한 것은 좋았으나 막상 주려고 하니 좋아해줄까? 하는 불안함이 커져오고 있었다.
"...차라리 가디언즈와 싸울 때가 더 편할지도 모르겠어. 이거."
괜히 그런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아스텔은 노크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기다렸다. 아마 노크 소리가 들리면 단번에 자리에서 일어서서 문을 열고 레레시아를 맞이했을 것이다.
12월도 어느덧 중후반에 이르렀다. 작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얼어붙을 것처럼 추웠건만, 올해는 그렇지만도 않다. 작년이나 올해나 추위가 무슨 상관인가 싶다. 어차피 살아오며 한 번도 30분 이상, 저 바깥사람들처럼 추위에 떨며 기다려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바라는 모든 일을 이루어냈으니! 가란은 따뜻한 카페에 앉아 유리창 너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밤의 거리는 카페 앞에 엄중하게 배치된 경호인력을 제외하면 제각기 활기찬 얼굴로 도시를 활보하고 있었다. 아마 전부 비능력자거나, 휴가를 받은 가디언즈겠지.
가란은 스틱으로 커피를 휘저었다. 카페 안이 따뜻했는지 얼음이 둥둥 뜬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나온 지 5분도 채 되지 못해 컵 겉면에 송골송골 이슬이 맺혀 떨어지고 있었다. 아마 그 광경을 에르베르토가 봤으면 높은 비명을 지르고 토끼처럼 오들오들 떨더니, 로사리오를 꺼내들며 악마를 쫓는 손동작을 해댔겠지만 어쩌겠는가? 그는 에르베르토처럼 커피에 대한 철학을 따지기 보다, 맛있으면 그만인 사람이었다. 애초에 에르베르토가 고리타분한 것이다! MZ 세대니 뭐니 하는 젊은이들의 신문물은 잘 받아들이면서 커피 하나는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에르베르토의 심정도 제법 이해할 만도 싶다. 가란은 시선을 옮겨 눈앞의 밀크티를 쳐다봤다. 자신의 수행비서와 단둘이 할 얘기가 있어 카페 하나를 통째로 빌린 참인데, 벌써 각설탕이 셋… 넷… 일곱… 여덟…….
"그러다 탑을 쌓겠구나." "아, 그, 그게……. 죄송합니다, 보스."
가란은 잔을 들어 커피를 쭉 들이키며 남성을 훑었다. 각설탕을 집어 든 채 굳어버린 검은 머리카락의 남성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시선을 둘 곳을 찾아 두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다리를 하나 잃게 했다지만 사과하고 새 사이보그 의족으로 교체해 준 지가 언젠데, 언제까지 저렇게 절절매며 살기만 할까. 저런 것을 후계자로 둘 생각을 했다니……. 가란은 커피가 들어있는 플라스틱 잔을 내려놓으며 나긋하게 입을 벌렸다.
"내가 아니라 나이가 채 들기도 전에 골골대며 앓을 네 몸에 사과해야지. 난 네 건강이 걱정되어 하는 말이었단다." "아, 고향에서 먹던 버릇이라.. 죄송합니다." "죄송하단 말도 그만 하렴. 그래서.. 고향이 어디였더라?" "난징입니다." "얘, 담백하게 먹는 지역 사람이 그게 버릇이라고? 지나가던 개가 웃겠단다. 나는 안휘 사람인 줄 알았건만 말이다." "외람되지만 그것도 옛말입니다, 보스." "아무렴 내가 마흔 넘었으니 너랑은 세대 차이가 많이 나지."
가란의 여유로운 목소리에 남성은 작게 앓았다. 가란은 앓는 소리를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턱을 괬다. "그래서 꼰대의 말벗이라 생각하고 이렇게 대화하자고 한 거야. 자네가 내게 해준 얘기가 있으니 그에 따른 대가는 치러야 하지 않겠어?" 느릿느릿 뱉는 목소리 뒤로 남성은 티스푼을 들어 각설탕이 가득 들어차 녹지 않을 지경인 밀크티를 휘젓기 시작했다.
"어떤 대화를 바라십니까……?" "글쎄.. 가령, 황제에 대해서?" "또 그 얘기인가요……." "이번엔 조금 다르단다. 내가 지금껏 네게 탈주를 명분 삼아 그 빌어먹을 꿈 얘기는 많이 뜯어왔지만……. 이번엔 내가 얘기할 차례거든."
남성은 티스푼을 젓던 손을 멈췄다. 불현듯 과거의 기억이 그를 붙잡아 끌어내렸기 때문이다. 그는 불과 몇 개월 전, 제를 탈출시켰다. 에델바이스와 접선하고, 완벽하던 쇼를 망쳤다. 그리고 현장에서 가란이 쏜 총에 의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총알은 잔인하게도 그의 한쪽 다리를 박살 냈고, 그는 살아남게 됐다. 배신은 죽음뿐이라는 안식의 규율대로 지금껏 봐온 다른 조직원들의 최후처럼 모진 고문과 죽음이 기다릴 줄 알았건만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더욱 가혹했다.
"저런, 안색이 좋지 않구나. 내가 얘기하는 게 그렇게 싫니?" "아뇨, 아닙니다."
결론만 말하자면 가란은 그가 죽지 못하게 막았다. 이 나라에서 제일가는 사이보그 업체에게 의뢰를 맡겨 그의 다리에 새 삶을 불어넣어 주었고, 그가 벌인 사건은 반역이 아니라 정신계 세븐스의 조종 때문이었다며 죄를 뒤집어 씌워 무마시키기도 했다. 내부의 의심은 한참이고 비어있던 수행비서 자리에 앉혀버리는 강수를 둘 정도였다. 그리고 그에게 요구한 것은 대체 어떻게 황제를 구워삶았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은혜보다 배신에 대한 두려움이 더 앞서게 되어 그때마다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런 두려운 존재가 이젠 듣던 것을 멈추겠다니! 어떤 말이 나올지 벌써부터 두렵다. 그가 제에게 바라던 것을 말할 때마다 가란이 착잡하고 복잡한 표정을 짓던 걸 봤기 때문이다. 가란은 눈웃음을 지었다. 식은땀을 흘리는 그를 보며 손을 뻗어 손등을 두어 번 두드려 주자, 그는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밀크티를 황급히 마셨다. 티스푼도 치우지 못하고 녹지 못한 설탕마저 입가에 범벅이 될 정도로 칠칠치 못했지만 가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는 폐하께서 새장 속에 있는 것이 안타까웠노라 얘기했지, 아가."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계기가, 외부와의 단절 때문이었니?" "…예." "이해한단다. 대다수의 연구원이 그리 생각하지.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팔렸더라면, 이 장소를 빠져나갔더라면.. 하지만 나는 좀 달랐단다. 폐하는 그곳에 가두고 세상을 모르게 하는 편이 나았노라 생각했지. 나는 단절이 폐하에게 더 득이 될거라 생각했으니."
가란은 손등을 두드려주던 손을 거두듯 하며 검지와 중지를 세우더니, 마치 사람이 다리를 움직이듯 손등을 세우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생각해 보렴, 폐하와 같은 세븐스는 대단히 매력적이기 마련이지! 바깥의 세븐스는 모두 주눅이 들어 순응하거나, 울부짖으며 절망하는데.. 폐하는 마치 맹수처럼 야생성이 살아있고, 날카롭지 않더니. 폐하는 안식에서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우월한 존재였고, 우월하게 살아가도록 키웠으니 당연한 법이지! 본디 그런 귀한 맹수라는 것은, 이미 한 사람이 길들인 시점부터 많은 사람이 똑같이 자신도 손 뻗어 길들여보고자 하는 것이니 어찌 그 욕심 뒤룩뒤룩하게 찐 늙은이들이 탐내지 않을까."
가란은 움직이던 손가락으로 각설탕을 집었다. 가란의 눈이 가늘어졌을 때, 남성은 애써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집어 올린 각설탕을 깨물던 가란은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나 같지는 않지. 그 오만불손한 그 태도를 곧이곧대로 받아줬겠느냔 뜻이란다. 더군다나 우리의 황제라 한들… 그들에게 세븐스는 세븐스. 누군가는 손 뻗어 가지고자 했던 용도가 절대 생각하던 것과 같지 않단다. 그들은 그 육체를 바라고, 세븐스를 바라며, 정신을 무너뜨리고 끝내 갖고자 하기에. 그래서 내보내고 싶지 않았단다. 차라리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한이 있어도 무너지는 꼴은 못 보겠다 생각했으니." "…하지만, 세븐스와의 충돌로 하여금 폐하께서 고민하셨으니.." "내 말에서 무언가 느낀 점이 있지 않니, 자유로이 말해보련." "……저희의 시선이었습니다." "영특하구나. 그래, 우리는 세븐스를 몰라. 그들이 어떤 삶을 살든 너 또한 동정으로 시작했고, 나 또한 유흥으로 시작했던 일이다. 이해가 아닌 오만이지! 그래서 나는 뒤틀린 시각으로 폐하를 생각했던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 내가 책임지는 수밖에 없지 않겠니? 달리 변명하지 않으마. 그 시선의 뒤틀림을 내 인정할 테니."
가란이 다시금 각설탕 하나를 집어 씹자, 잇새로 박살난 설탕 가루가 테이블 위로 후두둑 흩어졌다. "다만 내 하나 물어보자꾸나. 무대의 배역을 무대 밖 현실로 빼내면 어떻게 될 것 같니? 그래, 장르는.. 대체 역사물 속의 인물로 치자꾸나." 남성은 이 질문이 제를 뜻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잔을 두 손으로 고이 쥔 남성이 머뭇거리다 답했다.
"……적응하지 못할 겁니다. 현실과 과거는 다르니까요." "그래, 네 말이 옳단다.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는데, 무대의 배역은 그 세계관을 살아가니. 내게 있어 폐하는 그런 존재였단다. 무대에서 평생을 살아온 배우. 그렇기에 무대밖에 설 곳이 없는 존재. 그래, 이건 나의 잘못이지. 부정할 생각은 없어. 네게도 책임을 물을 이유도 없지. 너는 날 몰랐고, 나는 네 생각을 몰랐으니."
가란이 느긋하게 입가를 툭툭 털더니 얼음이 녹은 커피를 쭉 들이켰다.
"그렇지만 동정심을 느끼고 무작정 행동하는 것은, 때로는 큰 기만이 되기도 한단다. 동정심을 보여 돕는다는 건, 네가 그 존재가 너와 같은 취급을 받고 자랄 거란 확신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 "나는 폐하가 죽더라도 스스로를 황제라고 생각하길 바랐단다. 지금쯤이면 스스로를 혁명을 위해 온몸을 불태울 하나의 도구로, 죄책감에 몸부림치는 하나의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 사실이 참 안타깝단다. 내가 온전히 책임을 지지 못하는 것 같잖니."
너무 사악했나? 가란이 깔깔 웃는 모습에 남성은 시선을 내려 찻잔에 담긴 밀크티에 비친 자신을 물끄러미 마주했다. "……아니오." 떨어지는 입이 느렸다. 가란이 웃는 모습 뒤로 눈빛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헬리의 아이도 그래. 내가 그때 놓아줘서 온전히 책임질 수 없잖아……." "그렇지만 그건 아이의 선택이었으니까, 죄책감을 가지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죄책감? 아가, 아가.. 넌 내가 그리도 착한 사람으로 보이니?"
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상이 어지럽다 느꼈다. 인간이 아닌 줄만 알았던 자신의 보스가 인간적인 면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만큼 끔찍한 일이 어디 있을까. 인간성이라곤 단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존재가 알고 보니 무엇보다 인간을 위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세상이 뒤집히기 마련이었다. 자신의 보스가, 그 가란이─
"감히 내가 누군가에게 용서 받는 삶을 살면.. 더없이 비참하잖니. 안 그래?" 에르베르토는 종이컵에 든 에스프레소를 단숨에 들이켰다. 쌉싸름하고 향긋한 원두 본연의 향과 미처 녹지 않은 황설탕의 단맛이 혀를 맴돌았다. 새빨갛고 석류알 같은 눈망을로 발밑을 내려다보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까, 천사 같은 미소가 얼굴에 가득 퍼졌다.
"어머, 드디어 겨울이 오려나 보네……."
겨울엔 유달리 꿈을 많이 꾼다고들 하지요. 어서 가란에게 얘기해 주러 가야겠다. 노래하듯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뒤로 그가 살랑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저 오동통한 꼬리를 가진 여우를 어쩌면 좋을까? 이젠 불안정하게 정착한 예민함과 악몽 때문이 아니라, 당신 때문에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을까 걱정이 됐다. 그렇지만 그마저도 금세 백기를 들고 말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여기서 더 엎어도 아무도 모를 테니까. 옆에 누워 속삭였을 적, 이스마엘은 농담 섞인 대답에 환히 미소 지었다.
"그러면 청소 잘 하게끔 앞으로 자주 찾아가야지."
매일 귀찮은 할 일을 만들어줘야겠다. 마찬가지로 농담을 던지며 당신의 품에 안겨본다. 온기 가득한 품은 조그맣지만 든든했다. 이스마엘은 당신의 품에 안긴 채 눈을 느릿하게 휘었다. 언제든 안아도 된다고 했지만 이렇게 빨리 안을 줄은 몰랐다는 듯.
"음─ 내가 늦은 게 아니라 당신이 욕심이 많은 건 아니고?"
작게 마주 웃으며 품에 파고들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대본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의 주체는 달라졌지만, 그 온기만큼은 익숙하다. 따뜻함이 느껴지고, 안정감이 같이 밀려든다. 이렇게 누군가의 체온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기대본 적이 얼마 만이더라? 이젠 영영 겪을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와닿던 손길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아직은 잠들기 싫은데." 괜히 툴툴대던 이스마엘은 당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듯 속눈썹을 살포시 들어 올리다, 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리오도 잘 자."
그래, 당신을 믿고 잠드는 게 낫겠지. 이길 수 없는 사람이다. 차라리 받아들이는 것이 나을지도 상황을 당신이 바꾸고 싶은 대로 따르고 발버둥 쳐 빠져나오려는 이유는 아마 이스마엘이 당신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깊은 안정감에 내리깔린 눈이 천천히, 무겁게 감기기 시작했다. 상실감도, 고통도 잠시간 내려둘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이상향도 지금 당장 생각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저, 지금은 이 순간을 즐기고 싶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지금만큼은 신뢰하고자 했다.
"……."
당신의 품에서 잠시 느릿하게, 지금 당장 잠들고 싶지 않다는 듯 뺨을 기대고 있던 몸이 어느덧 미세하게, 그리고 규칙적으로 들썩인다. 시선을 내려 확인해 보면, 속눈썹이 촘촘하게 내리감긴 눈과 평온한 표정이 얼굴을 덮고 있을 테지. 에델바이스에 온 이후 잠들 때마다 지었던 고통이나 비탄, 혹은 눈물로 얼룩진 표정이 아니라.
잠시 개인실에 다녀오겠다는 레레시아의 말에 그도 나름 준비할게 있다며 뭔지는 비밀이란다. 준비라니까 청소는 아닌 거 같은데. 어쨌거나 그녀가 다녀오는 동안 아스텔도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건 아닐 거 같다. 천천히 다녀와도 된다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얼른 돌아섰다. 유난히 조용한 복도에 잰걸음 소리가 타닥타닥 울린다.
중간에 새지 않고 곧장 개인실로 돌아온 레레시아는 제법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환복도 그렇지만 거울을 보니 얼굴도 꼴이 말이 아니어서 말이다. 부리나케 세수를 하고. 옷장을 열어 적당한 평상복을 꺼내어 입는다. 넥라인이 약간 깊은 검정 반소매 티셔츠를 냉큼 걸치고 통 넓은 면바지와 헐렁한 반바지 중에 뭘로 할까 잠깐 고민하다 검은 반바지에 얼른 다리를 꿴다. 다리가 썰렁하지만 역시 이쪽이 편하니까. 평상시라면 이대로 있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서랍에서 하얀 양말도 꺼내 신고 겉옷으로 짙은 붉은색 오버핏 후드집업을 걸친다. 마무리는 솔 많은 브러쉬로 머리를 빗고 한 줄 헐겁게 땋아 늘어뜨린다. 음. 나쁘지 않아. 옷장에 붙은 거울에 모습 한 번 비춰보고 다시 나가려다가 아차차 하며 방 안 쪽 책상에 간다.
"이거 가지러 와놓고 깜빡할 뻔 했네."
책상에 딸린 서랍 중 가장 아래칸을 열자 긴 사각형의 아담한 함이 나온다. 테두리가 둥글고 겉이 보드라운 자색 벨벳으로 감싸인 함을 들어 잠시 바라본다. 가져갈까. 말까. 막상 때가 오니 드는 고민에 주저하던 그녀는 이내 눈을 꾹 감고 함을 후드집업의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그리고 뒤로 돌아 개인실을 나갔다. 적막한 복도에 서두르는 걸음소리 소란하다.
아스텔의 개인실에 처음 온 것도 아니지만 어쩐지 오늘은 기분이 다르다. 오늘은 특히 이 뒤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일까. 그녀는 문 앞에 다다라서도 잠깐 고민했다. 그에게 미안하지만. 컨디션을 핑계로 이 만남을 피하고 싶다는 기분이 불쑥 솟구쳤다. 누구라도 톡 건드리면 바로 돌아서 도망칠 수 있을 만큼. 순식간에 턱 끝까지 차오르는 불안이었지만 그 불안의 수위와 비슷한 정도로 아스텔과 함께 있고 싶다는 기분도 들었다. 서로 비슷하던 천칭의 기울기는 미묘한 차이로 후자에 기울었다. 그렇게 고민을 끝낸 레레시아가 손을 들어 아스텔의 개인실 문을 노크하고. 문이 열리면 후드집업의 주머니에 손을 꽂고서 조금은 어색하게 웃었을 것이다.
"좀 걸렸지? 미안. 머리에 손이 많이 가서."
어색한 미소만큼 어색한 변명 같은 말을 늘어놓으며 한쪽 어깨 앞으로 늘어뜨린 땋은 머리를 만지작거린다. 하얀 머리다발을 살살 만지다가 조심스레 들어가도 돼? 하고 묻고. 들어갈 적에도 답지 않게 한박자 머뭇거린 후에야 실례할게. 작게 중얼거리며 들어갔겠지.
문이 열리고 보이는 레레시아의 모습을 아스텔은 조용히 바라보다가 미소를 다시 한 번 조용히 띄웠다. 머리에 손이 많이 갔다는 그 말에 절로 시선이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향했고 늘어뜨린 머리카락에 잠시 멈췄다. 들어와도 되냐는 그 말에 이내 아스텔은 고개를 끄덕였고 들어오라는 의사를 보였다. 이내 그녀가 들어온 후, 그는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그렇게 오래 걸린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보다 머리까지 새로 한 거야? 수고했어. ...예쁘네. 오늘도."
차분한 목소리를 내며 아스텔은 앞장서서 자신의 방 안으로 그녀를 들였다. 이전에 한 번 왔었을 때와 그의 방은 큰 차이가 없었다. 방 한 쪽에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가 하나 있었고 전등에서 불이 반짝반짝이는 것을 제외하면. 그 크리스마스 트리를 잠시 바라보던 아스텔은 앉으라는 듯 손님용 방석을 꺼내서 그녀가 앉을 자리에 조심스럽게 놓아두고 자신은 그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송년회도 송년회지만 크리스마스잖아? ...그래서 일단 매년 분위기는 만들고 있어. ...대장의 지시도 있고 말이야. 아무튼 크리스마스니까 이 말은 해둬야겠지. 메리 크리스마스. 레레시아."
가볍게 크리스마스 인사를 하며 아스텔은 팔을 뻗어 침대 아래에 넣어둔 상자를 살며시 끄집어낸 후에 그녀에게 내밀었다. 붉은 포장지로 둘러쌓여있는 선물 박스는 구겨짐없이 깔끔하게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영어 문장이 쓰여있는 카드를 동봉한 그 박스를 아스텔은 레레시아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이건 크리스마스 선물. ...교환선물도 교환선물이지만 이건 따로 주려고 준비해둔거야. ...마음에 들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너 주려고 준비한거니까 줄게."
아마 포장지를 뜯어서 내용물을 확인했다면 그 안에는 꽤나 능숙하게 뜬 보라색 수제 목도리가 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은색 실로 레레시아 나나리라는 단어를 확실하게 박아둔 것을 보면 절대 어딘가에서 파는 물건은 아니었다. 아스텔이 직접 뜬 수제 목도리가 그 안에 들어있긴 했으나 포장지를 뜯지 않고 일단 남겨놓았다면 그것을 확인하는 것은 꽤 이후의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음. 그게..(시선회피) 로벨리아는 꽃의 이름에서 따온 것은 아니고 제가 보던 책의 등장인물중 '로벨리'라는 인물이 있어서 거기서 따온 이름이랍니다. 로벨리보다는 로벨리아가 좀 더 우아하고 높은 분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아를 붙여서 로벨리아를 만들었고 와. 이름 예쁘다. 좋다. 좋다. 귀품 나네! 라고 생각하고 지었는데 차후에 로벨리아라는 꽃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네. 그렇게 되었습니다. (시선회피22)
아하! 이름의 다른 모티브가 된 캐릭터가 있었군요! 사실 저도 로벨리아라는 꽃을 최근에 알게 되었는데 꽃말이 무시무시한지라... 혹시 캡틴이 노린것인가 싶었습니다. 그리고 캡틴의 의도대로 되었다! 사실 로벨리아 이름을 처음 봤을때 굉장히 예쁘다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지금도요!
문턱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간다. 등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 들릴 때. 그녀는 조용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전에도 온 적 있는 아스텔의 방은 익숙함보다는 새삼스런 낯섦이 느껴졌다. 사실 이런 낯섦이 여기가 처음은 아니지만. 막상 와보니 그래 여기도 이렇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복귀한 후로 드는 어중간한 감각이 심술인지 의도인지 이제는 알 수 없다. 레레시아는 망연히 바닥 어딘가를 보다가 아스텔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선을 들어 그에게 향했다. 그리고 살짝 웃으려 했다.
"그렇게 보여서 다행이네. 응. 고마워."
평소처럼 말하면서도 원래 이랬었나 하는 의구심이 스물스물 명치 안쪽을 기어다닌다. 표정은? 행동은? 아. 문 밖에서의 불안함이 이것이었구나. 겉으로는 태연한 척 내색하지 않으며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하나 들리는 건 토막나고 중간이 빠진 말조각 뿐. 흐리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잡으려 하다가 눈을 깜빡이니 어느새 그가 내어준 방석 위에 앉아있어서 언제 앉았지 싶다. 앉은 자리를 보고있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니 방 한켠에 작은 트리가 보인다. 반짝반짝. 점멸하는 전구빛을 멍하니 보던 그녀는 바스락대는 선물상자가 앞에 보이고서야 흠칫 정신을 차린 듯 했다.
"어... 어? 언제 이런 걸 준비했대. 으응 .너도 메리 크리스마스."
앞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상황상 크리스마스 선물이겠거니 싶어 얼른 선물상자를 받아든다. 손에서 손으로 넘겨받을 적. 후드집업 주머니에 들은 함이 생각났지만 역시나 선뜻 꺼낼 수가 없다. 선물상자를 무릎에 놓고 잠시 가만히 있던 레레시아는 곧 웃는 표정을 지으며 포장지에 손을 얹었다. 뭐가 들었을까나. 기대가 섞인 듯한 말을 하며 붉은 포장지를 벗기고 상자를 열어 안에 들어있던 목도리를 꺼냈다.
"목도리...? 와아. 어디서 산 거..."
보라색 털실로 짠 목도리는 잘 만들어진 물건이라 언뜻 어딘가에서 사온 건가 싶었다. 완전히 꺼내어서 이리저리 만져보며 어디서 산 거냐고 물으려는데. 말을 하는 도중에 은실로 박은 그녀의 이름을 보고 손도 말도 멈췄다. 그 이름 말곤 어디에도 어떤 표식도 붙어있지 않은 목도리. 이런 물건에 익숙한 그녀이기에 출처는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렇지만 하필. 아니. 아니다. 그녀는 손 끝으로 목도리에 수놓인 이름을 슥 만져보고 조심히 들어서 목에 둘렀다. 목과 얼굴 일부가 감싸이도록 폭 두르고 또 잠시간 만져보고서야 아스텔을 향해 웃어보였다.
"정말 좋은 목도리네. 그리고 정말로 마음에 들어. 정말로... 고마워. 아스텔."
고맙다고 말은 했지만 여전한 불안함이 표정에 드러날까 싶어 괜히 목도리에 얼굴을 푹 묻어본다. 괜찮을 거라고 자기암시를 몇 번 걸고서야 아무렇지 않은 척 목도리를 풀어 다시 상자에 집어넣었다. 상자를 닫아 옆으로 밀어두고서도 주머니에 든 걸 꺼내지 못한 그녀는 마냥 웃는 얼굴로 테이블에 차려진 술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묘하게 어색함이 녹아내린 것 같다고 아스텔은 생각했다. 들어오면서 바닥을 바라보는 모습, 그리고 묘하게 정신이 다른 곳으로 팔린 것 같은 느낌. 그 많은 것을 느끼면서, 특히나 메리 크리스마스를 이야기하지만 살짝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 그 모든 것이 마치 모래알을 씹는 것처럼 그의 마음 속에 살짝 걸렸다.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과연 그것을 자신에게 말을 할지. 그 많은 것들을 떠올리면서 아스텔은 언제부터 이랬던가. 라는 생각에 잠시 빠졌다.
"마음에 든다면 다행이야. ...겨울이 춥다는데 따뜻하게 사용하길 바랄게."
건배를 제안하는 레레시아의 말에 이내 아스텔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면서 자신의 잔을 들어 그녀가 따라주는 것을 조용히 받았다. 뒤이어 그는 맥주병을 잡으면서 그녀의 잔에 맥주를 따라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잠시 또 입을 다물고 뭔가를 생각하던 아스텔은 레레시아를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무슨 고민거리나 걱정거리. 혹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기분 탓인진 모르겠지만 뭔가 정신이 조금 다른 곳으로 팔려있는 것 같아서."
몇 번의 생각을 하긴 했지만 결국 아스텔은 정면승부를 던지기로 했다. 어쨌건 물어보고 싶은 것을 물어본다고 해서 잘못은 아니며 답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자신도 더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허나 그 모든 것은 일단 물어봐야만 시작이 되는 법이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면 결국 아무 것도 시작을 못하는 법 아니겠는가.
"...라라시아 때문에 그래?"
일단 아스텔이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라라시아라는 존재였다. 어찌되었건 조금 불편함이 남아있을 수도 있으니까. 허나 아니라고 한다면? 적어도 자신은 더 추론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내 그렇게 말을 마치며 아스텔은 살며시 잔을 들어올린 후, 그녀를 향해 내밀었다. 가볍게 짠- 을 권유하는 모습이었다.
블래키... 깜찍하지요! 그 아담한 크기를 가졌는데 악타입이라니... 거기다 여우를 닮았다니! 그리고 검은 몸에 붉은 눈이라니!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포켓몬이다! 갑자기 급발진을 했군요... 그치만 원래는 독타입으로 기획된 포켓몬이니만큼 레시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독타입 포켓몬 트레이너 레시도 운명이 점지해준 수준으로 멋있다!
자캐가_외로움을_표현하는_방식은 : 외로움..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는 편이지~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왜냐면 익숙하니까... 하는 타입이라 꾸욱 누르고 있다가 어느 날 펑 터지고 혼자 앓으니까.. 그렇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아무말 없이 꾸욱 안고 안 떨어지기... 그냥 잠깐만 이러고 있으면 안 됩니까..? 하고 한 10초 뒤에 노이즈 위로 충전 완료 표시 뿅 떠오름...
자캐에게_의미없는_질문은 : "페이스 재머가 불편하지는 않아?" "이상향은 이상향이지 현실이 되는 게 아니지 않아?" "오늘은 커피 안 마셨어?" < 이거 되게 의미없음
자캐별로_웃기지_널_부순_사람은_바로_나인데_를_말해보자 : "우습지 않습니까.. 당신은 명석하니 잘 알고 있겠지요."
이스마엘은 당신을 내려다본다. 어둠에 가려져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연두빛이 감도는 시선은 어둠 속에서도 네온사인처럼 홀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904 저렇게 외로움을 참는 사람이 많긴 하지요. 정말로. 하지만 이젠 외로워하지 말기! 동료가 많으니까요! ㅋㅋㅋㅋㅋㅋ 오늘은 커피 안 마셨어? 라니. 하긴 확실히 그다지 의미는 없는 질문이기도 하네요! 음. 그리고 상당히 깔끔하군요. 손톱 발톱이. 물론 위생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큰 것 같지만요! 아앗...ㅋㅋㅋㅋㅋ 보검에 리본이라니! 하긴..예뻐지기는 하겠네요! 어떤 의미로는 말이에요!
들려오는 말에 간단히 답을 하며 그의 잔에 맥주를 따라주었다. 그 다음엔 병을 넘겨주어 그녀의 잔에도 술을 받았다. 거품이 스르르 올라오는 맥주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따르는게 멈추자 잔을 앞으로 가져온다. 일단은 마시다보면 괜찮아지겠지. 왕게임에 참가할 때도 그랬으니까. 아스텔이 위화감을 느끼기 전에 좀더 그럴 듯 하게 굴고 싶었지만. 이미 위화감은 만연해 있었나 보다.
"아. 음. 좀 그런게 있기는 해..."
아스텔답게 정면으로 해오는 질문에 그녀는 이번엔 선명히 쓴 웃음을 지었다. 하긴. 잠깐도 아니었는데 못 느낄 리가 없겠지. 얘기를 해야 할까. 그러면 어디서부터 해야 할까. 거품이 톡톡 터지는 술잔을 마냥 내려다보던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라시아 때문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얘기하기에 앞서 술잔을 들어올렸다. 먼저 건배하자고 한 건 그녀였으니.
"...새해를 위해."
그냥 잔을 부딪히기는 아닌 것 같아 적당히 생각나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그가 내민 잔과 그녀의 잔을 부딪힌다. 맑고도 묵직한 소리가 울리면 잔을 도로 가져와 입술에 댄다. 쌉쌀한 맥주거품에 입술을 적시다가 조금씩 기울여 잔을 채운 술을 마셨다. 천천히. 잔이 완전히 빌 때까지. 차가운 술에 속이 조금 시렸지만 뭐 괜찮을까. 테이블 끄트머리에 빈 잔을 내려놓은 그녀는 무릎을 올려 두 팔로 감싸안았다. 품에 안은 다리에 상체를 기대 살짝 웅크리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저번에 나 외출 나갔다가 일이... 있었잖아. 이것저것. 그 이후로 좀. 감각이 이상해져서 말야. 분명 알고 있는 건데 낯설다던가. 내가 알던게 아닌 것 같다던가."
혼자 있을 때는 괜찮다가도 밖에서 누군가와 섞이면 더 크게 느낀다는 말을 하며 몸을 조금 더 웅크린다.
"라라랑 같이 있을 때는 오히려 괜찮아. 귀찮긴 하지만. 닿아있기만 해도 진정제 같은 효과를 주니까. 그러니까 괜찮겠지 싶다가도. 떨어져있으면 문득 치솟아올라. 지금 네 눈에 비치는 내가. 네가 알던 내 모습이 맞나. 제대로 그렇게 보이고 있나. 그런 불안이."
그... 뭔가를 더 말하려는 듯 입술을 열었던 레레시아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여 무릎에 기대었다가. 살짝 들고서 겨우 들릴 만치 작게 중얼거렸다.
"그 불안이. 내 감정도 제대로 된게 맞나 하는 의심까지 들게 해서 그래. 어쩐지. 그 이전이 신기루 같고 꿈 같고 그래서."
그런 기분이 드는게 비단 아스텔에게만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아스텔도 포함이었으니까. 어렵사리 말을 마치곤 맥주병을 집어든다. 스스로 잔에 술을 채워 또 단번에 반을 마셔버리고서 다발로 묶은 머리카락을 쥐어 만지작거린다. 시선도 머리카락에 향하고서.
그녀가 잔을 부딪치자 그 역시 그녀의 잔에 제 잔을 부딪쳤다. 쨍- 맑고 경쾌한 소리가 주변에 울렸다. 이어 아스텔은 술을 한 입에 담으며 꿀꺽 삼켰다. 맥주라서 그런지 묘하게 맛이 좋다고 생각하며 들려오는 말에 아스텔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감각이 이상해졌다는 말. 자신의 눈에 비치는 그녀의 모습이 자신이 평소에 알던 그녀의 모습이 맞나라는 느낌. 말 그대로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기에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 같고 이전의 자신이 자신이 맞는가 싶어 고민하는 것일까. 아니. 정확히는 고민보다는 자신을 다르게 보지 않을까. 그런 불안함이 아닐까. 아스텔은 그렇게 판단했다.
"...사람은 살면서 이런저런 일을 겪고, 거기서 변해가기 마련이야. 적어도 내 눈에는 그런 거라고 생각해. 지금의 너도."
외출 나가서 벌어진 일. 자신은 가디언즈의 움직임. 정확히는 글라키에스의 섬멸부대의 움직임을 쫓고 추적하다보니 그 자리에 없었지만 그래도 보고나 그런 것으로 대충 들은 것은 있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정확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변화가 있었는진 알 길이 없었다. 결국 당사자가 아니며, 그 자리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라라시아가 자신에게 말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조금의 쓴 표정을 짓다가 아스텔은 이내 말을 이었다.
"...너도 나에게 말한 거기도 하잖아. 이거. ...그렇게 따지자면 나도 어릴 때와는 달라. 설사 지금 네가 조금 바뀌었다고 해도, 변했다고 해도 아무 것도 이상하지 않아. 그렇게 성장하고 바뀌어가고 그 과정 속에서 또 앞으로 나아가는 거니까. ...무엇보다..."
말을 잠시 끊으면서 아스텔은 자신의 잔에 스스로 술을 따른 후, 또 다시 한 입에 꿀꺽 삼켰다. 입 안에 녹아내리는 약간의 쓴 맛과 시원한 맛. 그리고 특유의 향. 그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꿀꺽 삼키면서 아스텔은 레레시아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설사 내가 알던 네가 아니게 되었다고 해도 상관없어. 내 연인이고, 앞으로도 소중한 존재야. 그것으로 충분해. 적어도 나에겐. ...그래도 역시 불안해?"
분명하게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말이 조금 서투르긴 했으나 그래도 언제나처럼의 정면으로 부딪치는 이야기였다. 이어 아스텔은 살며시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고 있는 손을 제 손으로 살며시 갑싸쥐려고 했다. 물론 그녀가 거부하지 않을 때지만.
"...그 이전이 신기루 같고 꿈 같다고 한다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도 좋다고 생각해. ...레레시아. 날 좋아해? ...나는 좋아해. 그렇기에 이 시간을 다른 이에게 양보하기 싫었고 같이 술을 먹자고 권했어. ...너는? 의무감 때문에 여기에 있는거야? ...과거의 감정은 아무래도 좋아. 지금은 어때? ...지금은 그것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감정에 제대로 되고 잘못 되고 그런 것은 없어. 지금 그냥 그렇게 느끼는게 감정인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미안해. 대장이나 에스티아라면 좀 더 쉽게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르겠는데 난 이런 것은 조금 서툴러서."
처음부터 말하기엔 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기에. 뭉뚱그려 지금만을 말로써 꺼낸 것은 역시 부족했다. 그렇다고 전부를 꺼내면 감당은 되었을까. 이미 지나간 일은 모르는 일이다.
입을 다문 레레시아는 줄곧 아래를 보았다. 아스텔이 말을 하는 동안. 시선이 느껴져도 발치의 어딘가를 응시하며 손에 감기는 머리카락을 쥐기만 했다. 그래도 아까보단 말이 제대로 들렸다. 사람은 살면서 변해간다며. 그녀가 그가 알고 있던 그녀가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그럼에도 소중한 연인이라고. 평소라면 없던 불안이 해소될 말이 지금은 왜 그저 스쳐가는 말처럼 들릴까. 아니라는 건 알지만 동시에 그 생각이 맞냐며 자문하게 된다.
"...나는..."
아스텔이 그녀의 손을 잡았을 적. 손을 피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가 손을 감싸쥐자 맞잡는 대신 주먹을 쥐어 손등과 손가락 마디가 희게 질린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난. 그러니까. 어물어물 소리가 나오다가 끊긴다. 꺼림칙한 고요함이 느릿하게 흐르고. 잡히지 않은 손으로 옷소매를 움켜쥔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일순 터지듯이 말했다.
"나는. 아스텔이 좋아. 하지만 이건 '내'가 느끼는 감정이 맞는거야? 과거가 아무래도 좋은 거라면 지금은 어째서 중요한 건데? 그래. 맞아. 감정에 구분은 없어. 하지만 내가 내 감정을 받아들이지 못 하면. 그건 어떻게 해야 하는데. 그냥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여야 해? 그냥 지금 느껴지는 거니까 그렇게 느끼면 돼?!"
그녀의 톤 높은 목소리가 철판 찢어지듯 찢겼다. 뿌득. 악문 잇새로 이 갈리는 소리가 작게 나오고. 레레시아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막힌 목소리가 손 너머로 흘렀다.
"지금 느끼는 감정이 중요한 거라면 나는 더 혼란스러워. 네가 좋지만 그걸 느끼는게 내가 맞는건지 몰라서 무서워. 그렇게 느끼는게 두려울수록 감각은 더 어그러져서... 감정과 감각이 뒤섞여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해. 그냥 받아들이면 돼? 그냥 그런 거라고... 납득하면 되냐고..."
으흐윽... 얼굴을 가린 그녀는 억누른 흐느낌과 함께 고개를 완전히 숙이고 웅크려버렸다. 이미 충분히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운데. 횡설수설 꺼내놓고나니 재차 북받치는 감정은 이유 모를 서글픔이었다. 이러려고 온게 아닌데. 이러려고 마주한게 아닌데.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눈물도 울음도 쉬이 그치지 않는다. 아. 최악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막아지지 않는 눈물을 손으로 가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레레시아의 말에 아스텔은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결국엔 자신이 그 감정을 받아들일 수 없고 감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그것에 대해서 자신은 뭐라고 답을 해야할까? 애석하게도 아스텔은 그 어떤 답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왜 중요하냐고? 적어도 아스텔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런 답을 한다고 한들 과연 눈앞의 그녀가 납득을 할 수 있을진 알 수 없었다. 흐느끼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아스텔은 자리에서 일어선 후에 방 책상에 놓여있는 티슈를 몇 장 뽑아서 그녀에게 다가갔고 그녀의 옆에 앉아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주려고 했다. 레레시아가 거부했다면 또 모르겠지만.
"...나는 대장에게 구출받은 후, 살아가기 위해서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배우고 익혔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심리적인 부분이나 그런 것은 잘 몰라. 배운 적이 없고 나는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고,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뭐든지 행했던 옛날의 나와 지금의 나의 차이 또한 그저 살면서 변한 것이고 그렇게 변해간 것이라고 인지하고 있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경우고 타인이 내 기준과 같다고 할 순 없겠지. 역시."
말을 들어보면 마치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자신이 있고 지금이 아닌 이전의 것들은 모두 또 다른 자신이지. 자신의 자신이 아니라고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지금 이 상황을 조금 더 침착하게 파악하기 위해 아스텔은 애써 최대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무것도 모른다.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마 자신이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때 그 장소에서 무슨 일이 정말로, 아무도 모르는 뭔가가 벌어진 것은 사실인 것 같지만 정말 그것만일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네 속에는 아무것도 없어. ...오로지 너밖에 존재하지 않아. 만약 내가 모를 뿐, 어떤 세븐스 능력자가 세븐스 능력을 네 속에 남겨둔 거라면...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제거할거고, 네가 네가 맞는지 모르겠다고 한다면 내가 몇 번이고 이야기할게. 너는 너야. 레레시아 나나리."
어쩌면 정말로 다른 것은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인식하는 방향이 달라진 것이 아닐까. 어떤 계기가 되었건 많은 것을 다르게 보게 되었고, 다르게 느끼게 되었고 그것이 큰 차이와 혼란을 가져온 것이 아닐까. 이런 것이 심리적인 요인에 있던가. 그런 복잡한 생각들을 했으나 역시 아스텔로서는 알 수 없는 분야였다. 차라리 싸우고 죽이는 분야라면 무슨 말이라도 더 하겠지만. 역시 이런 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익숙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아스텔은 쓴 표정을 잠시 지었다.
"...굳이 내 생각을 좀 더 이야기하자면... 그래. ...나는 솔직히 말해서 행복해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아니. 그럴 자격이 과연 있을까. 라고 생각을 해. ...어찌되었건 살기 위해서 아무런 죄도 없는 또래들을 그렇게나 죽였고 그 이후에도 명령이라는 이름 아래에 세븐스를 죽인 것도 적지 않아. ...마음으로는 행복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감각적으로는 정말 그래도 될까? 라고 결국 생각을 해버리고 말지."
그다지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정확히는 행복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처음이 아니었을까. 아스텔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뒤이어 잠시 숨을 끊었던 그는 조용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런 것처럼 너도 뭔가 가슴 속에 뭉친 것이 있는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하게 돼.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었지. 네 동생은. 그렇다면 알려줘. ...정답이 아니어도 좋아. 네가 지금 원하는 것. 생각하는 것. 논리적이지 않아도 되고, 주절주절거리는 걸로도 좋아. 그냥 생각하는 것. 생각나는 것. 말해야 할 것. 그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해보자. 술도 많으니까. ...두렵다면 두렵다고 이야기해도 좋고, 내가 이렇게 있는 것이 불편하면 그렇게 얘기해도 좋아. ...결과적으로 네가 나를 멀리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편해진다면 나는 그것도 받아들일 생각이니까. ...그게 내가 생각하는 좋아함이야. ...네가 조금이나마 편해질 수 있다면 그걸로 좋아."
/는 답레를 쓰면서 느낀 거지만 캐릭터와 오너의 간극에서 나온 무언가...라는 느낌을 너무나 크게 받아버린 캡틴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갱신하는 거예요!! 아무튼 로벨리아나 에스티아라면 뭔가 좀 더 전문적으로 이것저것 얘기하겠지만 아스텔은 머리가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라서 무리였다고 합니다. (털썩) 답레를 남기고 이어 저는 식사를 좀 하고 올게요!
검은 비가 내리던 그 밤 이후로. 누군가의 앞에서 이렇게 울어본 적은 없었다. 아니. 이런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는게 맞을 것이다. 억누른 끝에 새어나오는 것이 아닌. 그저 감정을 흘려보내듯 우는 건. 실은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기도 했다.
당혹스럽게 울고 있던 레레시아의 옆에 아스텔이 왔을 때. 그녀는 흠칫 떨긴 했지만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울음이 남아 훌쩍이면서도 그의 손길이 눈물을 닦도록 해주었고 티슈를 받아가 직접 남은 흔적을 닦았다. 그렇게 드러난 얼굴은 그리 오래도 아니었는데 볼과 눈가가 붉게 물들어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가리듯 고개를 옆으로 조금 돌리고 그만큼 더 잘 들리는 아스텔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가 해주는 긴 긴 얘기를. 중간부터는 또 머리카락을 쥐고 만지작거리면서. 줄곧 바닥 어딘가를 보며 듣다가 네가 나를 멀리한다고 해도- 그 부근이 들렸을 때는 보이지 않게 입술을 물었다. 입술은 보이지 않았어도 머리카락을 쥔 손에 힘이 꾹 들어갔으니 반응했다는 것을 들켰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아스텔의 말이 끝난 뒤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잠시 조용히 있다가 마시다 만 맥주잔을 가져와 천천히 잔을 비웠다. 깔깔하게 가라앉은 목을 맥주로 따끔히 씻어내고 더듬더듬 입을 움직였다.
"...이전에 외출에서. 나. 아니 우리는 어머니를 만났어. 우리를 만들고 망가뜨린 그 사람을."
그렇게 운을 떼고 잠깐 입을 닫는다. 여전히 떨리는 손 때문인지 아니면 그럴 것이 필요해서였는지. 그녀는 팔로 스스로를 감싸고 손에 닿는 옷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리고 호흡 한 번 느릿하게 하고서 다시 말을 이어갔다.
"우린 버림받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평범하게 자라지도 못 했어. 어머니란 사람이 하는 말만 들어야 했고. 그 사람이 우리에게 하는 걸 그냥 받아들이기만 했어. 그 때는 어머니와 그곳이 우리의 전부였으니까. 그런데 그 사람한테 우리는 처음부터 잘 만들어진 인형이었어. 탄생부터 전부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얘기를 하는 내내 그녀의 손은 힘을 너무 주어서 새하얗게 질려갔다.
"당시에는 몰랐지. 어머니가 말해주고 보여주는 것 말고는 몰랐으니까. 하지만 어떤 사고를 계기로 우리는 세상에 나왔고. 에델바이스에 와서 바깥을 접하면서 그 사람이 우리에게 무얼 했는지 하나하나 알아버렸어. 그 때에도 괴리감이 엄청났지. 줄곧 살아온 세상이 뒤집히는 감각이었어. 실제로 그랬지만. 그런데 우리를 그렇게 만든 사람은 이미 세상에 없잖아.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놓고. 무책임하게 사라져버린 그 사람에게 증오인지 분노인지 서운함인지 모를 기분을 느껴도. 이미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며 나름 적응해가고 있었는데."
하. 일순 그녀의 미간이 일그러지며 한숨인지 헛웃음인지 모를 소리가 튀어나왔다. 미간을 찡그린 채로 얘기는 이어졌다.
"그런데 살아있었어. 그 사람. 죽어가면서도 끈질기게 살아있었대. 우리를 이렇게 만든 그 사람이. 주변을 돌아볼 틈 같은 건 없었어. 그 때가 아니면 다신 기회가 없을 거 같았어. 만나서 무슨 말을 듣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던 건지. 그렇게 찾아간 그 사람은 죽어가는 몰골로 모든 걸 얘기해줬지. 우리를 만든 것부터 어째서 그런 사고가 일어났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자신의 손으로 빚은 우리를 그 사람은 단지 부수면 어떨까 하는 기분으로 내던졌어. 그 때가 2년 전이야. 에델바이스로 들어오게 된 계기가 된 그 사건이 실은 그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사건이었대. 그래. 뭐 그것까지는 예상했으니까. 그러려니 할 수 있었는데."
그 날. 그렇게 급하게 가지 않았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작게 중얼거리는 말은 후회로 물들어있었다.
"그 사람은 단지 우리에게 그 잔인한 사실을 얘기해주려고 살아있던게 아니었어. 우리를 다시 보기 위해 살아있던 거였지. 자신이 내던진 인형이 어떤 꼴로 살아는 있을지 보려고. 그리고 어쩌면 나나 라라의 몸에 그 사람의 일부를 심어서 삶을 연장하려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특수부대가 와준 덕에 그런 일은 없었어.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죽었거든. 그 사람."
그걸로 끝일 줄 알았지.
"그리고... 그 전까지 나와 라라를 옥죄던 그 사람을 향한 무언가도 그렇게 사라졌어. 그런데 그게 작지 않았나 봐. 그저 누르고 감추며 살아온 것이 사라지니까 그 자리에 너무 큰 빈 자리만이 남은 거야. 시시때때로 나를 괴롭히는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사라지고 나니까 그 동안 내가 해온 것들마저 진심으로 한 노력이 맞았나 하는 의심이 들더라. 단지 그 감정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주변을 이용한 건 아닐지. 에델바이스의 목적에 동참하는 것부터 그동안의 관계. 감정. 시간 전부가... 그저 이용한 거 아니냐고. 이제 와서 똑같이 굴어도 되느냐고. 내 자신이 가증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어. 그런데... 그런데 더 역겨운 건 말야. 그럼에도 전과 같길 내 자신이 바란다는 거야. 진심이 아니었으면 어떠냐고. 그런게 뭐가 중요하느냐고... 돌아온 이후로 줄곧. 나를 부정하지도 못 하고 긍정하지도 못 했어. 혼자면 괜찮았지만 누군가와 마주하면 이 괴리감이 더욱 커져서. 실은 널 마주하는 것도 이걸 정리한 후였으면 했는데. 멍청하게 그네가 같이 있고 싶다던 그 말이 기뻐서..."
미안해. 쓸데없이 이런 시간 보내게 해서. 씁쓸한 중얼거림을 끝으로 그녀의 말은 끝났다. 팔로 몸을 감싼 채 그녀는 더 웅크릴 것도 없는 몸을 웅크렸다.
이어지는 말은 자신이 없던 시간. 정확히는 글라키에스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던 순간, 에스티아가 죽을 뻔 했을 때 어떻게든 구출하고 추격을 막고 그야말로 목숨을 걸던 일전이 있었던 그 순간의 일이었다. 레레시아의 과거, 그리고 지금 그녀가 왜 이런 말들을 하는지. 그런 말들을 가만히 들으며 아스텔은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점점 몸을 웅크리고 있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새하얗게 질려가는 그 손을 가만히 바라보며 아스텔은 눈을 잠시 감고 후우. 소리를 냈다. 이어 그는 입을 열어 레레시아를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실례할게. 나중에 멋대로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화를 내도 상관없고 허락없이 함부로 이러지 마라는 말을 해도 상관없어. 지금은 내 멋대로 할게."
이내 아스텔은 레레시아의 뒤로 이동했고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내 몸을 웅크리고 있는 레레시아의 몸을 아스텔은 백허그로 안으려고 하며, 그녀가 만약 품에 들어왔으면 그대로 꽈악 끌어안으려고 했을 것이다. 빠져나가기 힘들도록.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린 시절부터 싸우는 것과 죽이는 것을 집중적으로 한 이였다. 팔 근육이나 근력은 누구에게도 쉽게 지지 않았을 것이다. 괴력을 사용하는 세븐스가 아닌한.
"그 말이 기뻤고 정리가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랑 있다는 것이야말로 네가 주변을 이용한 사실이 아닌거야. ...정말로 주변을 이용한 이라면, 그게 무의식적이건 의식적이건 어쨌든 이용한 이라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해. ...잘못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그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수많은 피를 손과 검에 묻힌 내가 대표적이야. ...나는 머리로는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이상 특별히 뭔가를 느끼지 않아. 에스티아는 지금도 그때의 일로 괴로워하기도 하고 힘들어하지만... 나는 가끔 그때의 일을 꿈으로 꾸고 화들짝 놀라서 깨기도 하지만 그건 죄책감 때문이 아니야. ...그 지옥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깜짝 놀라서 깨는거지. ...이용한다는 것은 그런거야.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스스로가 역겹지도 않아. 물론 많은 이에게 다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거야. ...적어도 난 그래."
다시 한 번 그의 마음 속에 이런 자신이 정말로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아마 자신이 죽여버린 그때의 그 아이들은 필시 지금도 저승에서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테고 자신은 죽으면 지옥에 떨어지겠지. 가디언즈와 함께. 그런 생각을 하나 굳이 그런 발상은 더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하며 아스텔은 레레시아에게 말을 이었다.
"...아주 당연한 것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닐까. 그만큼 너에게는 그게 정말로 컸다는 것이니까. 뻔뻔해져도 괜찮아.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누가 너를 부정하고 손가락질 해도 나는 네 편이야. 그러니까 나를 믿고 뻔뻔해져도 괜찮아. 네가 전과 같길 바란다면 그래도 괜찮아.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없다면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나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뻔뻔해져. ...널 가질 대가라고 친다면 그것도 그렇게 무겁지 않아."
이렇게 이렇게 해야만 한다. 그런 말은 스스로가 할 자격이 없었다. 자신이 올바르게 살았냐고 누군가가 물으면 아스텔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답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은 죽으면 지옥 불구덩이에 떨어지리라. 그렇게 아스텔은 확신했다. 그렇다고 해서 죄책감에 시달려서 살 생각도 없었다.
"너는 스스로를 나쁘게 생각할지도 모르나 내 눈에는 너는 너무나도 착하고 자상해. ...그렇기에 그런 고민도 괴로움도 자괴감도 느끼는거야. ...누군가를 이용하는 이는 그런 생각조차도 할 수 없어. 너는 이용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버틸 수 있었던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차라리 그 어머니라는 존재보다 나를 더 생각해봐.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해보자. ...그러면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앞을 바라볼 수 있을거야.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런 길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난. ...그리고 고마워. 그런 말들을 해줘서."
급하게 갈 것 없이 천천히,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면 될 일이라고 이야기를 하며 아스텔은 말을 마쳤다. 어떻게 받아들일진 이제 그녀의 자유였다. 적어도 아스텔은 강요할 생각은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