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으로 가려졌음에도 시선이 계속해서 머무는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들려온 말은 그저 네 이야기를 잘 듣고 있다는 반응. 이어진 잠시 동안의 침묵을 끝낸 것은 목소리가 아니라 뒤로부터 끌어안는 온기와 어깨, 목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이었다. 그리고 나서야 바로 옆, 가까운 거리에서 당신은 목소리를 냈다. 이젠 괜찮을 거라는 목소리에 너는 말이 없다. 여전히 타오르는 불길을 보면 식은땀이 흐른다. 아무런 행동도 못하고 굳어있을 시기를 지나 불길을 싸움에 적극적으로 사용하기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잠시 뜸을 들이고서야 고맙다고 한 마디 내뱉은 너는 이젠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당신의 아버지는 가디언즈였으므로, 명령에 따라야만 했다. 그 스스로의 도덕성이나 판단은 큰 의미가 없는 자리에서 겪는 갈등이란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어째서 사람은 끝없이 도망칠 길을 찾는가. 피하지 않고 맞서기에는 너무나 연약하기 때문이 아닐까, 부러져 버리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음을 본능으로 알고 있는 걸까, 한 번 부러진 자리는 약하게 남아 또 다시 부러지고 말고 계속해서 반복되다간 결국 부러진 채로 있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을까. 그의 고통은 응보이다. 그리고 네가 지닌 것 역시 응보였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존재가 아닌 이상 갈등에서 오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하물며 제 내면에서 벌어지는 균열을 대체 누가 견디겠는가.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서 타고난 재능이 눈에 띄지 않는 이는 그 자신을 불태워야 한다. 스스로를 지키며 낼 수 있는 빛이 한계가 있다면 파괴를 통한 빛을 내뿜을 수밖에. 그러나 그 결과는 결국 더 이상 타고 남은 것이 없는 잿더미일 뿐, 진정으로 위하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소중히 여겼더라면 계속해서 타오를 수 있는 땔감을 던져넣어 줬을 텐데. 그들에게 너는 그저 한 번 불타오르는 것으로 충분한 존재였고 그것은 그도 마찬가지였을 터다. 그러나 당신은 그렇게 불타오르는 그를 보며 외경을 느꼈으리라, 그리고 꺼져가는 불씨를 보며 애태웠겠지, 그를 계속해서 타오르게 할 방법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당신이 살아온 시간에서 불타오르는 존재는 오직 그 뿐이었고 그가 타오를 수 있었던 건 오직 당신 때문이었으니 그걸 알아채는 것은 너무 늦었으리라.
그렇게 당신이 사랑한다 여겼던 조국은 오히려 당신을 사랑하던 그를 재로 만들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너는 몸을 천천히 돌려 네 어깨에 파묻었던 당신의 얼굴을 양 손으로 가볍게 잡아 올리려고 했다, 피냄새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찰나의 시간, 붉은 삶의 증명이 배어나오는 것을 보던 너는 그것이 흐르도록 두지 않겠다는 듯 가볍게 입맞춤했다.
"그래. 나 양아치인거 이제 알았냐? 사람 보는 눈도 둔해 빠졌구만! 그런 악덕 깡패 앞에서 설치질 말았어야지. 그래, 안그래?"
있는 힘껏 양아치스러운 바이브로 양아치스럽게 말했으나, 뮬 스스로 짜친 기합과 함께 탈출을 위해 둔부의 통증을 감내하는 모습을 보며 내심 결단력에 감탄... 은 하지 않았다. 그것마저 일일히 태클 걸기에는 솔직히 어디까지 태클을 걸어야할지 피곤해지기도 하고 말이다.
"나? 아니. 아직... 그럼 말 나온김에 식사나 할까."
그래도 최소한 밥까지 굶어가며 이런 말도 안되는 훈련을 지속하는 것 보다야 훨씬 건설적인거 같다. 거기다, 스스로 뒷정리를 하는 정도의 예의나 정신은 있는거 같으니 다행인가. 많은 녀석들이 그렇게 하지 않곤 하니까. 걸리면 훈련장 바닥 전체를 칫솔로 닦게 만들어버릴테다.
"...땀 흘리고 운동했으면 샤워 정도는 하고 식사를 하고 싶은데..."
중얼거리면서, 일단 흐른 땀부터 수건으로 닦아내며 저 당나귀인지 토끼인지 사람인지 모를 녀석에게로 걸어갔다.
한번 생긴 몸의 상처는 언젠가 아문다고들 하지만 심리적인 요인은 그렇지 않다. 얕게, 혹은 깊게 각인돼 사소한 일상을, 크게는 인생의 한순간을 좌우하게 된다.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받아들이고 다짐하는 건 순간의 위로뿐이다. 이스마엘은 잘 알고 있다. 과거와 비슷한 순간이 들이닥칠 때 무의식이 튀어나와 그 순간의 감정과, 그 순간의 이후로 말하지 못하고 쌓였던 고통을 쏟아내기 시작하면 더는 손쓸 새도 없게 된다. 지금은 그저, 당신이 그 끔찍한 무의식을 신경 쓰지 않고 순간의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
당신을 품에 안고 단어를 하나씩 뱉어 문장을 만들 때마다, 문장과 연관되는 과거가 한 걸음씩 다가온다. 아버지는 죄를 저질렀고, 동시에 무너져가고 있었다. 저지르면서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충성심을 증명하는 일이 아닌, 일방적인 분노의 표출이라는 사실을. 이스마엘은 아버지의 자그마한 균열이 점차 커지고, 이내 깨진 유리처럼 조각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고, 끝내 쏟아지려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주어진 길을 거부하던 날, 아버지와 저는 크게 충돌했습니다. 한바탕 뒤집어 엎었지요."
더는 소속되고 싶지 않습니다. 되묻던 소리가 생생하다. 지금 네게 주어진 길을 거스르겠단 뜻이냐. 답하기가 무섭게 뺨에 불덩이처럼 내려앉던 감각과 고개가 돌아가다 못해 넘어지던 순간,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반항하듯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치던 목소리가 귀를 울리는 것 같다. 아니, 울렸다. 다툼은 눈물과 감정 폭발로 끝나고 대화는 단절됐다.
"그 당시 아버지는 의무감과 부성애 사이에서 고민했던 듯싶습니다. 그리고 결심하셨는지, 저를 불러 담담하게 말씀하시더군요."
나의 삶은 이러하였다, 바깥은 이러하다, 이것은 내가 오늘 죽인 세븐스에게서 가져온 전리품이다. 잘못된 것을 알고 있으나 나는 겁이 많아 거스를 수 없다, 이렇게나 모순적인 사람이다. 나와 달리 너는 아직 가능성이 많다. 어떤 길을 걸을 것인지, 떠날 것인지 정하라…. 떨리는 손에 쥐여진 피 묻은 머리카락과 한때 살아가던 생명이 소중하게 품었을, 누구의 것인지 모를 가족사진과 아버지의 비참하게 웃는 표정을 보고 마침내 조국을 온전히 저버릴 수 있었다.
"이후 뒤에서 레지스탕스를 지원하시다 꼬리를 밟혀……. 제 품에서 돌아가셨지만."
실존적인 아픔을 겪고 그걸 이겨낸 사람만이 성숙해지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지만, 세븐스로 태어난 우리에게 주어진 아픔은 가혹했다. 이야기를 끝맺으며 숨이 끊기던 순간이 떠올라 입술을 다시금 짓씹는다. 피가 다시금 배어 나온다. 한때 맹렬하던 것이 돌이켜 보면 이리도 끔찍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당신이 움직이기 편하게 고개를 조금 떼었을 적, 닿는 손길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찰나였다. 입술에 닿는 느낌에 천천히 동공이 좁아졌다.
"……이렇게 되면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잖습니까."
자그맣게 벌어진 제 입술을 뒤로 당신이 뺨을 쓰다듬을 적, 눈을 살포시 내리 깐다. 연두색 눈동자가 도르르 구르다가, 잠시 눈꺼풀 너머로 사라지더니 다시 뜨여 당신을 향했다. 침묵은 길지 않다.
"…모르겠습니다. 이상향을 바라고는 있지만, 현실은 온전히 다가갈 수 없으니까. 그리고 이젠, 정녕 나의 의지로 가고자 하는 이상향인지도 의문이 듭니다."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의 손에 뺨을 비비듯 하며 느릿하게 입을 뗀다.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기엔 지쳤다고.
U.P.G 본부가 그리 멀지 않은 언덕 위. 아스텔과 에스티아는 그곳에 몸을 숨기고 가디언즈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정확히는 글라키에스가 이끌고 있는 '섬멸부대'의 움직임이었다.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최근 가디언즈의 섬멸부대는 U.P.G 근처부터 시작해서 산이나 언덕, 숲을 싹 쓸어가면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희생당한 세븐스들도 많았으며 근처에 숨어있다가 그대로 얼음동상이 되어서 산산조각난 레지스탕스 부대도 있었다.
당연하지만 그 움직임은 로벨리아에게도 전해졌고 로벨리아는 아스텔과 에스티아에게 정찰을 명했다. 가장 생존확률이 높은 두 사람에게 그 움직임이 정말이고 어떻게 위협이 될지를 파악시키고자 함이었다. 레레시아가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은 이미 둘도 알고 있었고 아스텔은 그 때문에 조금 마음이 심란한 상태였지만 애써 티내지 않기 위해서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애써 표정을 관리하면서 얼굴에 힘을 주기도 하면서. 이내 숨을 약하게 내뱉으면서 아스텔은 계속해서 가디언즈의 움직임을 살폈다.
"저대로 계속 수색범위를 늘린다면 우리 쪽도 위험하겠어."
"...그러게."
"괜찮아? 아스텔? 여러모로 복잡해보여서..."
"괜찮아. ...임무에 사적인 감정은 실지 않아."
물론 심란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자신이 맡은 임무는 자신이 맡은 임무대로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붉은 저항의 에델바이스에 협력하고 있는 이들, 그리고 대원들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최대한 흔들리지 않도록 아스텔은 숨을 약하게 죽이면서 병사들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당장 위험이 찾아오거나 하진 않겠지만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아스텔은 물론이요. 에스티아도 그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이러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 방향을 바꿔서 붉은 저항의 에델바이스의 거점이 있는 곳으로 공격해올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저대로 원의 범위를 넓힌다고 한다면 아직은 시간이 있겠지만 그렇게 오래 버티진 못 해."
"...일단 우리들기 공격하는 것은 안돼. 멋대로 공격했다가 오히려 일이 더 꼬일 수도 있어."
"알고 있어! 일단 언니에게 보고를 한 후에 대책을 생각해봐야겠어."
경우에 따라서는 거점을 옮겨야 하는 것도 고려해야할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그게 그렇게 쉽게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새로운 거점을 다시 찾는데만 해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기기나 시설을 통째로 옮기는 것도 힘든 일이니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지금 이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는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하며 아스텔과 에스티아는 일단 감시를 계속했다. 아직은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바로 눈앞까지 찾아오고 있는 위협을 어떻게 대처해야할지를 고민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