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안에 들린 구리빛의 병을 이리저리 살피며 오솔길을 걷는다 병 목을 잡고 흔들어서 안쪽의 액체를 출령여도보고, 높게 들어 잎사귀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빛에 비춰도 본다 도적의 소굴에 들이닥쳐 산적들을 베어넘기고서 곧 도착할 제국 수도에서 쓸 돈이라도 모아볼 겸 소굴을 뒤져봤지만 설마 있던 거라고는 상자에 꽉꽉 들어찬 고약한 럼주였다니 어차피 목이 마른 건 자신이 아니라 이 치마와리였으니 아무래도 좋았지만, 도적이 한 푼도 가지고 있지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빈 손으로 나오기는 뭐하여 적당히 손에 짚히는 아무런 병이나 들고 나온 것이 지금의 행태가 되겠다 낙엽이 발에 채여 바스락댄다면 코우의 걸음에 술병이 찰랑였다 그리고 마침 검고 붉은 산발을 한 그 여자가 마침 큰 나무를 지나기 시작했으니, 이리나의 귀에도 그 소리가 닿았을지도
여자는 굉장히 직감적인 편이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말보다는 행동이었으며 일단 베어도 되는 것이라고 판단되면 칼이 먼저 나간다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같았다 이번에도 비명소리에 몸이 먼저 움직인 것은 그런 연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무에서 무언가가 떨어진다는 정보만을 받아들인 그 즉시, 몸이 먼저 반응하여 눈으로 쫓고 팔을 뻗는다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도 모른채 하늘에서 내려 온 백은 머리의 사람
'천사?'
일리는 없고 당연히 나무에서 미끌어져 떨어진 사람이겠지요 연유는 모르겠지만 경황상 먼저 올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눈을 뜬 이리나가 처음 내뱉은 한 마디는 멍청한 아... 소리였다. 눈을 뜨자 사람을 죽인 것 같은 여자의 품에 들려 있었고, 이제 저 여자가 (다른 이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리나를 찢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저 여자는, 이리나를 찢지도 않았고, 하다못해 들어서 바닥에 메다꽂지도 않았다. 그저 차분히 내려주었을 뿐이다.
"그... 음..."
이리나는 혹시 저 사람이 다른 의도가 있나 의심했다. 좀 광전사 스타일인가?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죽어보자 그런건가? 아니면 그냥 선의인가? 단순한 건가? 이리나는 그렇게 생각하다, 조심해야지라는 말에 슬쩍 코우를 본다. 조금... 맹해보였다. 딱히 나쁜 일을 저질렀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딱 평범한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이리나는 실례였다고 생각하면서, 감사를 표한다.
이리나는 꺄아, 라고 말하는 상대를 보고 혈향이 문제일뿐이지, 그녀 역시도 마음속에 여자의 무언가가 있음을 알아챘다. 동시에 살면서 아가씨라고 불린 적인 몇번 없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묻었다. 그건 좀 실례다. 이리나는 웃으면서 올라간 이유를 말했다. 간단했다. 숲 속은 가만히 앉아서 쉬기에는 너무 위험하니까.
"아무래도 나무 위로 올라가 있는 게 안전하니까요. 가다가 멧돼지 같은 위험한 야생동물을 만날 수도 있고, 재수 더 없으면 고블린떼를 마주할수도 있잖아요. 그럴 때 나무에 올라가있으면 시간은 조금 더 벌 수 있죠."
곤란했던 거 아니야? 라는 말에 이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뭘 원하는 걸까. 이제 구경은 다 했으니 죽이겠다는 건가? 이리나는 뒤로 물러날까 생각했지만 공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럴 때가 싫다.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이리나의 목숨이 결정되는 상황. 이리나는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후우... 하고 숨을 들이쉬더니 조리있게 상황을 설명한다.
"네. 살의를 가지고 저를 죽이려 드는 적들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코우 씨처럼 칼을 잘 쓰는 분이면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이리나의 말을 들은 여자가 돌연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말한다 그리고서는 불쑥 상대의 앞으로 한 걸음에 다가와
"이리나는 덜렁이네."
백은같은 그 머리에 손을 올리고서 쓰다듬어 주려한다
"곤란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받아주려면 어쩔 수 없었는 걸."
여자는 조용히 소근거렸다 이리나의 말과 촛점이 전혀 맞지 않고 있었다 이리나가 자신의 목숨과 저울질하며 열심히 변명처럼 말하고 있는 순간, 그 여자는 말도 없이 너무 접근했었던 일만을 보며 말하고 있었다 자신의 모습과 언동이 얼마나 상대에게 위협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서 그렇지만 코우 자신은 그 사실을 전혀 의식조차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리나는 말을 잃고, 코우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받아들인다. 몸이 부르르 떨렸지만 어떻게든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다. 초점을 잃고 진동하는 눈동자, 쿵쿵 뛰어서 조용하다면 다 들릴 심장, 온 몸을 적시는 식은땀. 이리나는 한참을 고민하고, 한참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 수록 이상한 게 생각났다. 집에 두고 온 가족이라던지, 잡혀간 동생이라던지, 날 가는 걸 잊은 화살촉이라던지.
이리나는 고민하다가, 어차피 죽을 거, 상대방이 엉뚱한 개그에 웃는 사람일 가능성에 걸고 말한다.
이리나의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가 튀어나오고, 그 물음표는 얼굴에 흐를 지경이 되었다. 이리나는 코우와 술병을 번갈아본다. 혹시 내가 죽어서 이상한 상태에 빠졌나, 아니면 현실을 부정하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공포에 빠졌나 싶어서다. 하지만 술은 술이었고, 코우는 코우였고, 이리나는 이리나였다. 술병에 묻은 혈흔 역시 혈흔인 것이 문제였짐나.
"..."
이리나는 조심스레 럼주를 받고, 뚜껑을 따서 냄새를 맡아본다. 지독한 냄새, 너무 지독한 나머지, 맡기만 해도 기억이 사라지는 냄새! 이리나의 눈이 커졌다. 저도 모르게 럼주를 빠르게 받은 이리나는, 코우를 보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