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하느냐면, 아, 이젠 모르겠다. 후회하나? 모른다, 알 수 없다. 천천히 사고하며 곱씹고 되짚어보며 감정을 정리하고 싶지만 당장의 상황은 한치의 느긋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미련을 버린다면, 만약 버렸더라면. 이렇게 서있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혼란스럽다. 한꺼번에 여러 생각이 몰아치고 단어가 각자의 존재를 주장하며 자리를 차지하려 드는데 어떻게 확답을 내겠는가. 단지 고개를 내저을 뿐이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씹어뱉는다. 마침내 뱉은 단어 쓰다. 그럴 수 없는 사람인 걸 어렴풋이 알면서도 그리 묻는 것 같아 속을 옥죈다.
그럴 수 없다. 그렇기에 이용당하는 것인가? 아니, 정 반대일지도. 혹은 둘 다 아닐지도. 우습게도 더 생각할 여력은 없었다. 이스마엘은 그렇게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황을 냉정히 판단하기엔 경험이 부족하고, 그렇다고 본성을 드러내기엔 스스로 잘못됨을 깨닫고 한계점을 지나치게 높인 사람이다. 스무 살. 딱 그 나이의 나이에 맞게, 혹은 그것보다 더 적게 시행착오를 겪어갈 뿐.
"……."
그리고 그 기준은 헬무트로 비롯된다. 인생에서 본보기로 삼을 사람이 단 하나밖에 없고, 이스마엘이 아버지가 죽기 이전까지 직접 마주하며 봐오며 사회성을 배워간 사람이 단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선택할 수 있었던 길, 그중에서 가장 나은 하나의 길. 하나밖에 없던 인생의 배움. 더듬더듬 그 사실을 고하고 나서 과연 그 사람 하나만 있어? 스스로의 속내가 되묻는다. 하나 더 있잖아. 스스로 추악하다 생각이 들 때면 그만큼 사랑하라 가르쳐준 사람. 그렇지만 그 하나 더 남은 사람이 근간에 영향을 미쳤다 할 수 있을까? 네 성격에 잘 맞는 당연한 사실을 알려준 것이라면 모를까.
실토. 목에 느껴지던 유리 조각을 모두 토해내고 말았다. 실재하지 않기에 당연히 보이지 않지만 피가 입에서 흐르는 것 같다. 목 안이 까끌까끌하고 숨 쉬는 것이 괴롭다. 당신에게 끝까지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 같아서. 당신은 당신의 삶이 있는데. 제법 괴롭다. 차라리 내게 욕이라도 했더라면. 침묵 오래가지 못하고 당신이 팔 벌려 안아줄 적 그리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욕이라도 했더라면. 목이라도 조르지. 이스마엘은 어깨 위에 얹었던 손을 조금 더 뻗어 당신의 목을 파묻듯 안는다.
"장담하지 못해도, 차라리 그게 낫다고 하면. 과람한 욕심이야?"
이내 느릿하게 뱉어본다. 과람한 욕심일까, 둘 중 하나는 언젠가 죽는다. 동시에 죽을 수도 있고, 장담할 수 없는 미래는 결코 빛나지 못한다. 숨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거리에서 눈 마주쳤을 적 차마 입으로 뱉지 못하고 속으로 곱씹는다. 잔인한 사람.
"……당신 또한 선택한 거잖아."
당신이 어느 순간이라도 전력을 다했노라 고백했을 적 이스마엘은 팔을 풀어 놓아주며 속내를 다시금, 또 다시금 곱씹는다. 내 감내하고, 당신의 짐을 짊어지고 싶단 욕심이 치미노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고, 그럴 자격이 없음을 알지도 모르고, 밀렸음을 알고 있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확신을 줄 수 없어도 그저 지금은. 눈 다시금 마주쳤을 때 이스마엘은 마침내 한 가지 답을 도출해냈다. 차마 잇새 너머로 씹어뱉을 수 없는 말을 속내로 곱씹고 또 곱씹는다. 아, 씨발. 이 개 같은 새끼. 그럼에도 이 사람에게 화를 내거나 상처 입었다 할 수 없다.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쉬이 답 내리지 못하고 조그맣게 벌린 입 다문다.
헬무트는 어디에 있을까. 육신은 카시노프의 품에, 삶은 과거에, 그의 위대했던 정신과 역사는 자신의 품에. 당신이 바란 답이 이곳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며 눈을 느릿하게 감는다. 긴 시간 동안 보아온 삶은 어디 있는가. 발코니에서 천천히 한 걸음씩 멀어질 때, 이스마엘은 끝내 혀를 움직였다.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지."
본디 공기의 흐름에 섞이며 그 힘을 타고난 그는 바람을 타고 유랑했을 테니.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게 되어버렸으니. 삶에 녹았고, 그 삶을 버렸고, 그 흔적을 다시금 주워가며. 결국 알 깨고 나와 고개 비집어본다. 잔인하다. 잔인하며 이상이라곤 눈 씻고 찾을 수 없는 곳이다.
"이제, 내가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이스마엘은 가만히 당신을 쳐다본다. 여전히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이지만 당신을 탓하지 않는다. 당신은 당연히 해야만 했던 일을 했다는 듯.
"당신은, 내게 미련이 있어?"
달빛 환하다. 방을 뒤덮었던 어둠 희미하게 지워낸다. 나는 법 깨닫지 못한 새에게 있어 안락한 둥지는 결국 폐허에 불과했음을. 머리 맞대어 한날한시 잠든다 한들 꾸는 꿈은 다르며 잠꼬대로 뱉는 억양 다르기에 확답 얻어보고자 했다. 담담한 얼굴 뒤로 질문 뱉었을 적, 희미하게 미소 스쳤던 듯싶다.
U.P.G 지정 구역 외, 도시 외곽 슬럼가 레이먼드 나이벨 상사를 포함한 타격 팀 투입 목표 : 미허가된 세븐스 및 빈민에 대한 가디언즈의 무력 행사 진압 에델바이스 결성 이전. 4년 전. 차량의 낮은 엔진음이 새벽 공기를 자르며 도시 외곽을 가로질렀다. 검은 차량은 내부가 보이지 않고, 그저 몇 명의 사람을 수송하는 용도로 보였다. 겉으로 봐선 노동자들을 수용하고 있는 차량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빈민들에게 있어 그것이 삶의 방식일 수 밖에 없었다. 마치 가축처럼 옮겨져, 쓰러지기 직전까지 노동력을 착취당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주어지는건 삶을 더 낫게 만들어줄 무언가라기엔 너무나 부족하여, 그저 그 목숨을 부지하는것만 해도 감지덕지인 수준이었다.
차라리 그것만이면 그들에겐 충분했겠지만, 현실은 그들에게 더할나위없이 잔인했다.
차량의 헤드라이트에 점점 판자 등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이 반사될 때 쯤, 바퀴가 도로를 긁는 소리가 멈추고 차량도 그 자리에서 진동했다. 탑차가 열리고 대여섯 명의 사람이 내렸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차량에서 내려, 주위를 경계했다. 차량에서 내린 이들 모두 소총과 방탄복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들 중 한명이 손을 들어 수신호를 하자, 각자 자신의 자리를 잡고 전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총성이 들렸다. 아우성이 들리고, 비명소리가 뒤를 이었다.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어떤 범죄가 일어나도 누구도 보호해주지 않았다. 이러한 곳에 사는 주민들에게 '보호'를 제공하는 이들조차, 위협이 되기는 매한가지였다. 내일이 불확실하며, 오늘조차도 빼앗길 수 있는 삶. 그것이 이 근방의 삶이다.
목숨을 구걸하는 이들, 쓰러진 이를 안고 오열하는 이들. 자신의 목숨이라도 구하려 숨고, 도망치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아무런 망설임 없이 무기를 휘두르는 자들의 눈에는, 자신들이 피워올린 불길이 번들거렸다. 질서라는 알량한 명분으로 무어라 죄인이라 말하기도 힘든 이들에게 행하는 일방적인 폭력만이 주위를 채웠다.
허나 그곳에 있는 모두,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은 꿈에서도 알지 못했다.
다른 곳에서 갑작스러운 총성이 들리고, 추격자들 중 하나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곧 이어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허름한 건물 위, 어두운 골목 뒤, 판자집의 문틈 등에서 다시금 총성이 울렸다. 누군가가 가디언즈를 매복했다. 그것도 암시장에서나 볼 수 있는 구닥다리 총기가 아니었다.
한 세대 이전이긴 해도 명백히 총구화염으로 인해 조금씩 보이는 윤곽은 이전 군 제식 사양 소총들이다. 그것이 현재의 유일한 군사기구에게, 마치 자신들의 자리를 다시 내놓으라는 듯 불길을 뿜었다.
갑작스런 기습에 그들도 응사하는 한편, 가디언즈 병력 모두를 포위하여 슬럼가의 지형 어디에서든 총격이 날아왔다. 수수께끼의 병력들은 가디언즈의 세븐스라고 하더라도, 능숙한 솜씨로 화력을 집중해 무력화시키고 다음 타겟을 노렸다.
한 번에 하나씩. 마치 여러 자루의 총을 하나의 생물이 다루기라도 하는 듯 유기적으로 연계된 총격에, U.P.G가 자랑하는 세븐스의 군대도 결국 6.5mm짜리 납덩어리에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어졌다. 그들도 결국 피를 흘렸다.
한 차례의 혼란이 지나간 슬럼의 한 가운데에, 그 정체불명의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총격전에서 살아남은 빈민들은 그것이 또 다른 위협이겠거니, 희망을 놓았다. 이전 군의 계급장과 견장을 단 한 인물이 불길 틈을 뚫고 그들 앞에 모습을 보였다. 군데군데 해지고, 제대로 된 갑옷도 아닌 구형 방탄재질을 잘라내 얼기설기 위장색 옷에 꿰매어 놓은 차림. 몇 해는 묵었는지, 아니면 고물더미에서 주워왔는지 모를 방탄복에 그마저도 낡은 노끈을 메었다.
총은 그나마 멀쩡해보였을수도 있으나, 어느정도 관련된 지식이 있다면 총몸 부품이나 조준경 따위가 순 제각각임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꼴을 한 병력이라고 하기에도 차마 부끄러울 일련의 인물들이 나타나, 쓰러진 이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들은 이들의 임무를 했을 뿐이었다. 다 망가진 총을 이런저런 부품으로 대충 때워도. 방탄판이 없어 장갑차 자재를 잘라 넣어도, 이들은 기꺼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을 했다. 그런 임무가 없으면 당연히 죽는 것 처럼, 이들은 가디언즈에 피로써 대항했다.
병력의 팀장으로 보이는 인물의 선글라스에 슬럼 한가운데 일어난 불길이 비춰졌다. 그리고 선글라스 너머에 있는 붉은 눈동자도, 그 불에 맞불이라도 놓듯 붉게 타오르며 슬럼가를 비췄다.
그는 당연한 일을 한다는 것 처럼, 허리춤에서 응급 도구를 꺼내 쓰러진 이들에게 다가갔다.
네 목을 파묻는 듯 안는 당신의 움직임을 피하지 않는다. 이미 바짝 붙어있어서 벗어나려면 밀쳐내야만 했거니와, 애초에 피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들려오는 말은 장담하지 못하더라도 바라면 안 되느냐는 듯하다. 그럴 리 없잖냐고 대답하기 전 이어지는 목소리는 서로 마주본 상태에서 네게 들렸다. 네 선택을 이야기하던 당신은 팔을 풀고 시선을 마주한다. 눈에 담긴 것은 여전히 복잡하다. 수없이 많은 생각이 떠오르지만 어느 것 하나 확신할 수는 없어서, 너는 입을 꾹 다물었다. 멈출 수 있었던 때는 계속해서 찾아왔지만 넌 그러길 거부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뒤로 물러서며 당신이 내뱉은 말에 너는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당연히 알고 있겠지. 네가 원하는 답을 하려고 고심한 건 아님을 알았다. 아마 원래부터 알고 있었을 터다.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이 다를 뿐이지.
이제는 네가 대답을 할 차례였다. 그동안의 질문에서 벗어난... 드디어 깨달은 듯, 질문으로 받는 걸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에 너는 눈을 맞춘다. 여전히 맑은 눈 앞이기 때문이었을까. 온갖 혼탁함의 끝. 맑은 것인지 아니면 그 무엇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섞여버린 건지 알 수 없는 네 눈과의 대비가 선명하다. 오히려 네 쪽이 투명하고 당신 쪽이 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반짝이는 당신과는 달리 네 눈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당신은 내게 미련이 있어?
대답해라. 당신은 너처럼 다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대답해야만 한다는 걸 알았으므로 너는 살짝 고갤 숙인다. 미련이 없다는 것으로 모든 것이 깔끔하게 끝날 수 있고. 무엇에도 얽메이지 않는 길을 찾아나설 수 있게 된다면... 당신이 경멸과 증오의 감정으로 미련을 끊어낼 수 있게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있어."
그럴 리 없잖아. 너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수 번의 질답에서 제대로 된 대답 따위 한 번 하지 않던 네가 처음으로, 제대로 한 대답이 거짓말이라는 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너는 희미하게나마 스치듯 네 시선을 통해 지나갔던 미소를 보았다고 믿었다. 이미 발코니에서 벗어나 모든 방향에서 너를 에워싸던 바람은 없다. 단 한 방향으로 향하는 바람만이 있을 뿐. 그 바람은 깨진 창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와, 너와 당신을 휘감으려고 했다. 바깥이라면 능히 해낼 수 있었을 터인 그 바람은 지금 온전히 당신에게 닿을 수가 없다. 네가 지금 당신 앞에 서 있었으니까. 당신이 너를 밀쳐내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바람이 온전히 당신에게 닿는 일은 없을 터다. 대신 안 그래도 긴 머리카락에 바람에 흔들려 널 간질이는 일 정도는 있겠지만.
처음 네가 발코니로 나가기 위해 움직였을 때와 반대로, 지금은 네 얼굴이 달빛을 등져 그림자졌다. 오히려 당신의 얼굴은 달빛을 받아 뚜렷하게 이목구비를 드러내고 있었으니.
"미련이 없을 리 없잖아."
너는 항상 미련을 품고 살았다. 지난 날을 붙잡고 혹여 흐려지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스스로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되새긴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당신이 미련을 버리는 걸 원하지 않았다. 미련을 가지게 한 일 조차도. 버리고 싶어 발버둥치는 그 미련조차도 전부 당신인 것을. 너는 캄캄한 그림자 속에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고, 울지 않았으면 좋겠고,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걸 알 수가 없어서, 굳이 할 필요 없는 일인지 아닌지도 구별하지 못해서 하나도 원하는 대로 해주질 못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