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함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때가 있다. 오히려 물리적인 존재가 아닐 때가 더 많은 단어다. 이스마엘은 그 사실을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동료로 하여금 깨달았다. 차라리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깨달았다면 더 나았을까. 아니, 그랬더라면 아예 초반부터 무너져 들을 수 없었겠지. 이스마엘은 자신이 갈기갈기 찢어진다고 생각했다. 발코니의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나버리지 않은 탓은 서서히 균열이 일어나기 때문이요, 그렇게 떨어지며 비워지는 자신의 조각이 하나하나 느껴지기 때문이다. 끝내 포효했을 때, 이스마엘이 잠깐의 정적을 가진 탓은 비어버린 부분 너머로 가장 중요한 부분마저 깨져가고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언젠가의 대화가 어지럽게 떠오른다. 저는 인간이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아, 차라리 순응했더라면, 내 인생을 부정하지 않았다면. 이상향에 갈 수 있노라는 헛된 망상 따위 품지 않았더라면. 기실 알고 있었다. 눈치가 없는 것 같이 행동했지만 실은 가장 밑바닥에서 모든 걸 봐왔다. 이 세상이 갱생하지 못할 정도로 아름답지 못함도, 상처를 받은 사람과 상처를 드러내고도 당당한 사람으로만 존재하는 것도. 전부 알고 있다. 선을 행하면 위선이라 칭하고 악을 행하면 뻔뻔하다 평하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 모든 위험을 끌어안는단 망상을 품지 않았더라면.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이 차별을 이겨낼 수 있다면, 하고 생각했던 순간 느꼈던 위화감을 조금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순응……."
머리 위에 닿는 온기에 이스마엘은 덮어가린 손 너머로 눈을 홉뜬다. 눈물에 일렁이던 눈동자가 녹아내렸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차라리 잘난 주인공이 되어, 구원자를 자처해서 막아줬더라면, 그러지 말라고 했더라면, 울부짖으며 괴로워하는 한이 있더라도 끄집어냈더라면. 그랬더라면 그 순간을 붙잡으면서라도 어떻게든 기어보려 노력은 했을 텐데. 우습게도 세상은 그런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걸 알려주듯 당신은 매정하다. 어깨를 토닥일 적, 이스마엘이 헛웃음처럼 뱉은 순응이라는 단어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지 알기나 했을까. 발코니로 향하듯 파편 밟는 소리가 들린다. 그 뒤로.
"쥬데카."
이스마엘이 손을 떼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단 하나, 달빛에 비친 것이 있다. 연두색의 눈이다. 이 상황 속에서도 전혀 생기를 잃지 않은 눈동자가, 하나의 네온사인처럼 달빛을 받아 홀로 발광하는 그 기괴한 춘유록빛이 사람을 사람답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영원불멸한 것은 없어…… 다만 영원불멸한 순간은 기억에 남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목을 가져가면 잘 대해줄 것이라는 말에 빗대면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손의 떨림이 멎었다. 눈물이 달빛에 반사되어 흐르고 있었다.
"육체가 전부인 존재? 아니,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정신이, 그의 삶이 있었습니다. 육체가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멈춰버린 순간의 기억이 나를 살아가게 하지요. 최후의 순간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괴롭고도 숭고하지요. 단지 언젠가 누군가는 살아있다는 이유 하나로 모든 죄를 사함받고 가족의 품에 돌아갈 수 있는데, 내 자신은 결국 그때 그 시간에 멈춘 과거를, 그때 제정된 죄를 사함받지 못하고 평생 품어야만 하는 그 순간이 오는 것이 싫을 뿐입니다.. 그 사실 때문에 내가 얼마나 역한 사람인지 깨달을 수 있으니."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왼쪽 손목에 질끈 묶인, 진갈색으로 물든 손수건에 다시금 붉은색이 번져갔다. 수잔나 엥엘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야망이 불타오르는 사람이었고, 그녀의 남편 에르베르토 엥엘은 세븐스 투기장의 오너 가란과 협업하며 비윤리적인 실험을 강행하는 사람이었다. 이스마엘이 속삭였다. "당신 또한 마찬가지야. 결국 내가 역한 사람임을 깨닫게 만드니." 바람은 모든 걸 알고 있다. 바람이 이끄는 대로, 안으로. 이 안으로, 한없이 안으로.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한 채, 현실을 붙잡기 위해, 마침내 그 끔찍한 현실을 사랑하기 위해.
"당신의 말은 전부 틀렸어. 본디 박제는.. 목이 없으면 가치는 사라지기 마련이니까.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맞이해? 그렇게 되면 내가 변했음도, 시간이 흘렀음도 실감할 수 있잖아. 차라리 말 없는 박제가 낫지. 평생 내 곁에 남아 그때의 추억만 반복하는 영원불멸한 것이."
눈을 깜빡이자 기이한 시선이 어둠에 묻혀 사라졌다 다시 드러난다. 방 전체를 집어삼킨 어둠이 이스마엘의 몸인 것처럼. 주변이 미세하게 진동한다. 달빛을 받은 유리조각이 덜걱거리다 공중 위로 떠올랐다. 시선이 당신에 고정된 채, 이스마엘이 비틀대며 일어섰다. "어디 가?" 천천히 한 걸음, 두 걸음. 위태롭게 걸어가려 했다. 유리조각 또한 이스마엘을 따라온다. 이윽고 당신의 바로 뒤로 서, 천천히 팔을 뻗으려 했다. 양손으로, 양 팔로 당신을 붙잡기 위해.
술만 나왔어도 그냥 술병 집어던지면서 가지 말라고 두 번은 잃고싶지 않다고 악이라도 질렀을 텐데...
하필이면 명함이 나왔지..?
"헬리, 나는 세븐스도, 비능력자도, U.P.G도 다 싫어하지만 이 일을 하는 이유가 하나 있어. 당신도 알다시피 내 삶이 즐거워서지. 그리고 네 딸에게서 가능성을 봤어. 네 딸은 환경이 준비됐더라면 폐하보다 더 훌륭한 집행인이 됐을 테고, 가디언즈에 들어갔더라면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을 테지. 워낙에 쉽게 물들 수 있는 아이니까."
이내 가란은 품에서 명함을 꺼내더니 술병 밑에 끼워두었다.
"그래서 나는 가능성을 믿어보려 해. 그 아이가 일을 끝마치고 돌아와서 나의 뒤를 이을 제안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새 삶을 살아갈지. 나는 감이 좋은 편이라서.. 네 딸이 이곳에 돌아올 것이라 믿고 있거든. 어리석은 반동분자가 살아 돌아오는 건 드물겠지만 어째 그런 느낌이 있거든. 만약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내가 양녀로 거둬서 키울 테니까. 아, 내 자식은 어쩌고? 글쎄."
이 부분에 나왔듯이... 지금 대가리에 나사 아예 빠진 상태라 뺨 때려도 좋습니다.........
발코니에 서 바라보던 것은 사람이 아니라 텅 빈 하늘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오는 목소리는 네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직접적으로 부르지 않았던 이름. 적어도 지금까지의 대화에서 언급된 적 없는 네 이름에 너는 고갤 천천히 돌렸다. 달빛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듯 새까맣게 변해 버린 방 안에서 단 두 개의 눈만이 번쩍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빛을 내지 못하고 칙칙할 뿐인 네 눈과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암시하는 빛깔의 보석이 지금 널 향하고 있었다.
영원불멸한 것이란 없지만. 그 순간만큼은 기억에 남는다. 그 기억 역시 영원불멸하지 않다지만 무슨 상관인가. 삶의 끝이 곧 영원의 끝이고, 삶의 지속이 곧 영원인 것을.
"......"
너는 대답하지 않는다. 흐르는 눈물로는 울음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다. 어둠 속을 가르는 빛은 달빛을 받아 흩뿌리는 저 눈물. 애초부터 너는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거다. 제 수준 따위 생각하지 않고 달려드니 이런 일이 생기는 거다. 해결할 자신도 뭣도 없으면서 저지른 결과를 이렇게 치루는 것일 터다. 그런데. 꼭 해결해야만 하는 거였나? 하나부터 열까지, 진즉에 포기한 채 최소한의 도리라도 지키기 위해 발악해 온 너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에게 대체 네가 뭘 해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너는 뭐든지 했어야만 했다. 아니, 그래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터다.
미세한 진동이었지만 네가 느끼지 못할 리 없다. 지진도 뭣도 아니다.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흔드는 걸 느낀 너는 어쩐지 조금 무거워지는 듯한 눈꺼풀에 순응하여 눈을 지그시 감았다. 천천히 눈을 뜰 때마다 들려오는 발소리는 가깝고, 진동은 커지고 있다. 대기를 가르고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바람에 의해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제가 어딜 가겠습니까. 당신의 인도 없이 대체 어디를."
붙잡으려는 움직임을 모를 리 없다. 너는 잠시 바라보았던 눈의 광채를 기억하며 고갤 돌렸다. 다시 보이는 건 텅 빈 하늘. 밝은 달. 광기는 달에서 온다던가. 달이 원래 저렇게 밝았었나? 저렇게 컸었나? 착각을 일으키는 듯한 하늘의 달에 너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잡힌다. 도망칠 방도 같은 건 없다. 이미 늦었으니까. 네 손이 상처입은 당신의 손목을 붙잡으려고 했다.
"또 피가 나잖아."
잡았다면 그대로 잡아당겼을 테지만. 어쨌든 당신은 아마 너를 붙잡을 수 있었을 터다. 너도 당신을 붙잡을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