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방의 일부는 독에 녹고, 여기저기 치이고 던져지는 엘리나였지만 비명이나 신음 하나 나오지 않는 걸 보고 독하다고 중얼거린다. 아니면 저것이 그 칩의 효과이거나.
"그것 참 충실한 사냥개가 따로 없군."
그러니 더더욱 부수고 싶다. 이 자리에서 숨통을 끊고 시체마저 다신 못 쓰게 만들고 싶다.
그녀는 엘리나가 빈틈을 보이는 사이 다시 공격을 가하기 위해 창을 들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꽂히는 외침에 두 눈이 부릅뜨였다. 단번에 핏발이 터져 붉게 물들어가는 눈이 마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마리 그린우드."
서슬 퍼런 목소리가 낮고 섬뜩하게 깔린다.
"아는 거라곤 X도 없는 주제에 되는대로 떠들지 마. 동료고 나발이고 전부 때려치기 전에."
그 뒤에 이어진 말은 엘리나의 비명에 묻혔다. 그녀는 절호의 타이밍을 놓쳤다고 생각하며 창을 잠시 거두고 왼팔을 들어올렸다. 손목에 걸린 팔찌로부터 바람이 새어나오며 엘리나의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구속하려고 한다. 그리고 뒤에서는 그녀가 한껏 생성한 독액으로 거대한 창을 구현화하여, 창 위에 걸어앉아 바람을 타고 날아올랐다.
- 절망의 나락으로부터 올라와 - 한 깊은 원망 이제 성취하리니 - 그 앞 막는 자야말로 어리석으리
"폴링- 에어로."
통상이었다면 드는 것도 불가능했을 거대한 창이 수직으로 솟구쳤다가 공중에서 궤도를 틀어 엘리나를 향해 바로 내리꽂힌다. 노리는 곳은 무장과 무장 사이. 숨이 오가는 그곳. 목이다.
집요하게 코일을 노리는 공격에 엘리나는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적잖은 피해를 입혔지만 그 중에서도 머리에 입힌 피해가 극적이었는지... 아니면 그동안 마리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건넨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엘리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몸을 비틀거렸다. 단순히 두통인가? 아니면... 이라고 생각할 즈음, 그녀의 무장에 감도는 검은 빛과 함께 들려오는 루시아의 목소리에 너는 마른침을 삼켰다. 루시아와 동일한... 설마?
"이게, 설마...?"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 분명히 그건 루시아였다. 그러나 조금... 아니 많이 다른, 너와 동료들에게 보였던 그런 따스한 모습이 아닌 광기 어린 모습의 루시아를 보며 너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치 너에게 다시 한 번 싸울 힘을 줬던 것처럼, 저 루시아는 지금 엘리나에게 적을 섬멸할 힘을 주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솟구치는 검, 휘둘러지는 궤적. 공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파열음, 너는 망설일 틈도 없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 궤적이 노리는 것은 단 한 명 뿐이었으니까.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지만 바로 땅을 짚는 손목의 무장이 땅과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그대로 용수철처럼,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으며 달려간 너는
"뭐 하는 거야, 마리!!"
그렇게 소리치면서 손을 뻗는다. 손에 그녀의 어깨가 닿는다면 아마 있는 힘껏 잡아당기지 않았을까, 분명 공격은 이 피뢰침을 향하고 있을 터... 또 다른 피뢰침으로 흩뜨리는 것도 시도해 볼 만 했지만 지금은 그런 행동을 할 만큼 네게 여유는 없었다. 안 된다. 여기서 또 한 발 늦을 수는 없잖아. 그런 말이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 너는 이를 악물고 마리를 감싸려고 했다.
"버스트!!!"
네가 그녀를 감싸는 순간, 너는 그렇게 소리친다. 견뎌낼 수 있을 거야, 두 번은 안 된다! 빠득, 하고 이를 앙다무는 소리가 들리고 무장은 증기를 내뿜는 소리를 내며 네 몸에서 떨어져 나와 펼쳐진다. 전방위를 모두 막아낼 수 있을까? 안 된다면? 그녀의 무장에 박힌 피뢰침을 붙잡는다. 제발 빠져라...! 네가 막아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는 그런 불안감에 손이 떨린다. 감싸긴 했지만 그런 틈을 파고들면 어쩌지? 차라리 네게도 박힌 두 개의 피뢰침이 작동했으면 좋겠다고 소리 없는 외침을 삼킨 너는 시선만을 힘겹게 돌려 네가 막으려 든 검격을 바라보았다.
에일린을 엘리나로 조종하기 위해 설치된 장치는 하나가 아니었나? 불길한 검은 기운이 일렁이더니 나타난 것은…… 이곳의 루시아는 '루시아'의 세븐스로 구현된 존재. 달리 말하면 저편에서도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저 루시아는 그런 존재인 듯했다.
그는 자신이 엘리나를 동정하지는 않는다 생각했다. 사랑했던 사람을 운운했던 것 역시 그것이 엘리나의 주의를 흩어놓기에 좋은 수단이었기에 택한 것이다. 츠쿠시는 오래 전부터 무정을 체득해왔기에 혹 완벽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엘리나를 처리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혼란을 주고자 스스로 꺼낸 말로 인해 저 자신의 미련을 돌아보게 된다. 엇갈린 운명은 하나로 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기가 쏘아지며 마리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간다. 그는 그저 뛰어들어 엘레나의 검에 제 검을 단번에 꽂아넣으려 했다.
그제야 어깨를 한번 본다. 피가 여전히 흐르고 있었음에도 팔을 어떻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회색 피가 묻어나온다. 세상은 여전히 색이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리의 일갈은 레레시아를 향했지만 머리 한 구석에서 네게 말하는 것도 있다며 속삭이는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갈피를 잡기 어렵고 혼란스러웠다. 늘 하고 살았던 생각과 감정이 격해져 그래서는 안 되는데도 억지로 쥐어짜는 듯한 생각이 공존한다. 예, 당신 말이 맞습니다. 레지스탕스 동료지 않습니까. 가족이 기다리고 있으니, 아직 살아있으니 희망은 있습니다.
"아, 레지스탕스 출신은 원하지 않았음에도 가족이 기다리니 꼭 데려다주고, 가디언즈는 원해서 여기 있는 거다?"
이스마엘은 한마디를 던지고 머리를 쓸어넘겼다. "미안합니다, 순간 감정이 격해졌습니다." 짧은 문장을 뒤로 이스마엘은 계속해서 속을 식혀보려 무진 노력했다. 머리가 차갑다. 냉각장치 때문인 것 같다. 차가워서 두통이 일고 살이 에는 것 같다. 그럼에도 속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어쩌면 마그마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나는 차가워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아니라면.. 쥐어짜는 듯한 생각을 막을 수 없었다.
그도 원해서 저기 있는 게 아닐 텐데. 그는 의지를 잃지도 않았는데. 이스마엘은 자신을 품에 안아주던 그 따뜻하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늘어지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던 순간을, 결국 그 시체를 두고 도망쳐야만 했던 순간을 기억해냈다. 한때 생각만 하면 눈물이 흐르던 것이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무뎌짐을 경계함은 이런 연유다. 세상을 바꾸려 했던 동료였으며 가족이 기다렸다지만. 이스마엘은 더는 납득할 여유가 없었다.
"Ms. 그린우드, 저 또한 무례한 말을 했으니 언사를 신경써달라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무조건 비호하지 마십시오. 에일린을 데려간 이후 제정신으로 돌아와 눈물겨운 상봉을 할 것 같냔 말입니다. 만일 저 모습 그대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면? 상냥했다가 세븐스라며 죽이려 드는 등,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누이를 보고도 기뻐할 것 같습니까? 가끔은 남겨지는 사람들을 생각하십시오. 단지 그것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스마엘은 그 말을 이후로 깍듯하게 "다시금 사죄드립니다." 하고 사과의 뜻을 전하며 루시아와 엘리나, 아니, 에일린을 번갈아 쳐다봤다. 손에 쥔 보검이 나이프가 되어 갈라졌다. 그리고 주변의 잔해가 둥실거리며 떠올랐다.
나는 기르는 개를 안다. 기르는 개는 나를 모르는 듯싶다. 그러니 나에게로 오라. 네 목줄이 누구의 손에 있는지 기억하라.
『전탄발사 - 이데아』
보검을 향한 공격을 뒤로, 이스마엘은 계속해서 머리를 쓸어넘겼다. 피범벅인 손이 부들부들 떨려오며 마스크와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헤집는다. 저건 말도 할 수 있고, 살아있는 것 같으니 돌아갈 수 있는데 나는 죽은 시체를 다시 안아야 하잖아. 불공평하다. 불공평하다, 불공평해. 아니야, 불공평하지 않아.혁명 이후에 전부 똑같이 만들면 돼. 밑바닥은 위로, 위는 밑바닥으로. 그것 또한 이상적이니.
마리가 피하지 못하고 있자 쥬데카는 자신의 버스트를 써서 방어를 시도했다. 스파크 칼리버는 이내 팅겨자나가는 듯 했으나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이어 레이먼드가 가속한 상태로 검기를 스쳐 지나갔고 검기는 그 피뢰침에 반응해서 레이먼드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 순간 선우의 스페셜 스킬이 발동했고 스파크 칼리버를 꿀꺽 삼켰다. 어떻게든 이 공격은 받아친 모양이었다.
한편 레레시아는 스페셜 스킬을 사용했고 그대로 엘리나의 목을 노렸다. 그리고 츠쿠시는 엘레나의 보검에 제 검을 꽂아넣었다. 뒤이어 이스마엘의 스페셜 스킬이 발동했고 보검을 향해 공격을 시도했다. 허나 놀랍게도 보검은 박살나지 않았다. 레레시아의 스페셜 스킬도 데미지를 주긴 했으나 보검은 깨지지 않고 이내 엘리나는 단번에 팟하는 느낌으로 번개의 궤적을 그리면서 거리를 두었다.
"...카시노프님의 귀환 명령 수신." "...미션 실패."
이내 그녀는 고개를 돌린 후에 단번에 팟 하는 소리를 내면서 구멍 속으로 뛰어들어 사라졌다. 한편, 그와 동시에 건물이 더욱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꽤 지난 상태였고 언제 폭발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사태였다. 점점 그 흔들림은 커져만 갔고, 이내 여기저기에서 폭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스텔의 통신이 들려왔다.
-제 0 특수부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후퇴해. -폭발이 일어나고 있어. 자폭장치가 발동된 것 같은데... 시간이 많지 않아. -다만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아. 다른 곳으로 도망칠 곳을 확보해야하는데. 일단 나는 나대로 찾아보도록 할테니까 너희들도 탈출 루트를 찾아내.
이내 아스텔의 통신이 끊어졌다. 아무래도 그는 그대로 빠르게 여기저기로 찾아다니려는 것 같았다. 그와는 별개로 엘리베이터는 더 이상 쓸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어디로 탈출을 해야만 할까? 빨리 그 루트를 찾아내야만 했다.
격전이 오가는 도중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만 같다. 엘리나는 결국 후퇴했다. 그 짧은 새에 자폭의 제한시간이 끝나서인지, 엘리나의 상태가 전투를 지속하기엔 이상이 있어 후퇴한 것인지는 단정하지 못하겠다. 일차적인 생존의 문제가 지나니 이제는 폭발이 그 뒤를 기다리게 되었다. 언제 터질지 모를 급박한 상황이지만 그는 침정만은 잃지 않았다. 팀원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살피다 츠쿠시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수술실 방향에 어디론가 통하는 지하 도로가 있었습니다. 그 끝을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만, 그곳은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