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레시아의 어릴적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스텔은 또 한 가지 알게 된 것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둥지. 즉 자신들만의 낙원에서 시간을 보냈고 오직 서로가 서로의 전부인 상황. 그 모습을 아스텔은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렸다. 자진해서 가디언즈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스텔은 말 없이 앞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만큼 네 속에 있는 세계는 그게 전부였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야말로 가족이 있었기에 살아갈 수 있었던 삶이라는 느낌이야."
라라시아가 그녀에게 가지는 감정의 근원을 어느 정도 알겠다는 듯이 그는 잠시 라라시아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더욱 꼬옥 잡은 후에 그녀를 바라보면서 다시 말을 조용히 이어나갔다.
"그럼 이제 그 세계에 에델바이스의 다른 이들도, 그리고 나와 에스티아, 대장도 추가해줬으면 좋겠는데. ...둥지 밖에 나온 너를 받아주는 세계의 일부로 말이야. ...이미 그러고 있을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하며 그는 바구니에서 사탕을 하나 꺼낸 후에 자신의 입에 쏘옥 집어넣었다. 힘을 줘서 오도독, 오도독 씹어먹으면서 아스텔은 눈을 잠시 감았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고아원의 모습이었다. 자유로운 손으로 자신의 목 뒤에 심어진 7 모양의 문양을 손으로 살살 쓸던 그는 다시 손을 아래로 내렸다.
"...지금도 붙임성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과거의 나는 지금보다 더더욱 그랬어. ...사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다지 잘 나지 않지만 말이야. ...일단 우리 부모님은 날 버렸고 세븐스들을 일단 수용은 해둔다는 느낌의 고아원에 있었어. ...그러다가 너도 본 바로 그 시설에 돈으로 팔려갔었고. ...그 이후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지. ...그런데 그때의 경험이 있기에 지금의 싸울 수 있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아이러니해. 더 나아가 너를 만날 수 있었기도 했고."
그나마 어린 시절에 있어서 좋은 점을 하나 찾자면 그 정도 뿐이었다. 물론 이것도 어떻게 어떻게 묶고 엮어서 낸 방향일 뿐이었지만. 이어 눈을 잠시 감고 있던 아스텔은 바람을 일으켜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솔솔 쓸어내렸다.
"...운 좋게 그곳에서 대장의 도움으로 빠져나오고... 아무도 믿을 수 없어서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고 지낸 적도 있었지.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가끔은 잠에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깨기도 하고. ...아마 평생 가겠지. 이건. ...있잖아. 레레시아. ...너와 내 어린 시절은 빈말로도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남은 80년은 행복해지자고 하면... 그럴 수 있다라고 한다면 내 말을 믿을 수 있겠어?"
인생의 1/5은 빈말로도 행복할 수 없었다. 허나 남은 4/5는 어떨까.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녀는 어떻게 답을 할까. 그렇게 생각하며 아스텔은 그녀를 살며시 내려다봤다.
자진해서 가디언즈에 들어갔을 지도. 그 말을 하며 떠올리는 것은 어머니의 얼굴이다. 늘 하얗고, 아름답고, 웃음이 사라지지 않던 푸른 눈의 어머니. 그저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엔 짙은 그늘의 이면이 있었다. 아니. 어둠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겠지."
그럼에도 그 가족이 있었기에 살아갈 수 있었던 건 맞다. 그녀는 작게 중얼거리며 손을 마주 꼬옥 잡았다. 그리고 조용히 옆에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너도 에델바이스도 이 마을도. 이미 다 내 세계의 일부야."
그렇게 말하며 듣다가 오도독 사탕 씹는 소리엔 작게 키득였다.
아스텔의 어린 시절을 들으며 마냥 앞을 바라보고 있으니, 부서진 피냐타를 중심으로 미리 설치한 듯한 조명들이 반짝반짝 켜지고 이번엔 악기를 든 어른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고서 연주를 한다. 잔잔하지만 유쾌한 음색이 광장에 퍼지기 시작하고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서서 구경을 하거나 음악을 즐긴다. 음악보다 그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인 그녀이기에 조금 멀게 느껴졌지만.
"원래 인생이란게 그런 거 아니겠어. 부조리만 가득한 것 같으면서도 살고자 하면 꼭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줘서 어떻게든 버티게 만들더라."
정말 모순적이지. 쓰게 중얼거린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아스텔을 바라보았다. 공허히 비었던 금빛 눈동자에 아스텔의 모습이 담긴다. 그 뒤로는 마을의 모습이. 머릿속에는 에델바이스와 동료들이.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얀 얼굴이 예쁘게 눈을 접어 웃음지었다. 잡은 손은 더욱 꼭 잡고, 빈 손은 들어올려 아스텔의 얼굴을 감싸려 하며 그녀가 말했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스스로를 괴롭히겠지. 어쩌면 평생일 지도 몰라. 하지만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고, 미래는 미래야. 한 때 아무도 믿을 수 없었던 사람과 한 때 모든 것을 망가뜨려 사라지고 싶었던 사람이 이렇게나 변해서 연인이 되었어. 그 당사자가 하는 말을 믿지 않는게 더 어려울 거 같은데?"
각자의 극에 치달았던 사람들이 변하고 변해 이렇게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그 말을 믿을 근거는 충분할 것이다.
"행복해지자. 아스텔. 너랑 나랑 둘이서. 언젠가 꼭 세상에 평화가 오도록 해서, 가장 양지 바른 곳에 둘 만의 둥지를 짓자."
뭐 나는 어머니처럼은 못 하겠지만.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짝 돌렸다. 하얀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얼굴이 또 슬슬 붉어지고 있었다.
그녀도 변했고 자신도 변했다는 말에 아스텔은 공감했다. 그리고 어디 자신 둘 뿐이랴. 에델바이스 내에서 조금씩 변화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자신이 아는 이 중에서는 에스티아도 있지 않던가. 막 그 시설에서 빠져나왔던 시기의 에스티아를 떠올리면서 아스텔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것인지, 아니면 시체인지 알 수 없는 그 모습을 떠올리면 정말로 자신들은 지옥에서 빠져나왔구나라는 것을 그는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로벨리아에 대한 고마움과 은혜를 반드시 갚아야만 한다는 사명감이 다시 또 떠오르기도 하고.
아무튼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그는 그녀를 눈에 담으면서 슬그머니 제 망토 속으로 쏘옥 끌어당겼다. 순순히 끌려왔다면 그 상태에서 아마 뒤에서 백허그로 안으면서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의 뒷머리카락에 살며시 얼굴을 묻었을 것이다. 끌려오지 않았다면 그냥 손만 꼬옥 잡았겠지만.
"...네 어머니가 어떻게 했는지 정확하게 알진 못하고, 네 어머니처럼 못할지도 모르지만 상관없어. ...내가 본 것은 에델바이스에서의 네 모습이고 그것만으로 충분해. ...다른 이의 기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좋아하는 것은 너지. 네 어머니가 아니잖아."
네 어머니처럼 될 필요는 없어. 그렇게 말을 하면서 그는 다시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려고 했다. 양지 바른 곳에 둘만의 둥지를 짓자. 그 말의 의미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또 여기서 한 마디를 더 하면 왜 또 그렇게 말을 하냐고 불평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굳이 또 눈치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평소의 스타일인지. 결국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네가 내 뱀파이어가 되어준다면 얼마든지."
장난스럽게, 하지만 의미는 살짝 담아서. 괜히 그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하면서 스스로도 이번 것은 조금 부끄러웠는지 그는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은근슬쩍 주제를 바꿨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그 복장. 부끄럽거나 하진 않아? 역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지금이라던가 말이야."
어라 그랬어? 나는 반대로 생각했었는데?! ㅋㅋㅋㅋ 딱 봐도 아스텔은 로벨리아 바라기일거 같아서 (연애적으로든 상하관계로든) 그냥 좀 투닥대는 또래친구 사이나 되면 감지덕지겠지~ 했는데. 아 시트나 초기 일상 등등은 SL로 보이게끔 손을 쓴 것도 있긴 해~ 그런데 너무 빨리 이것저것 풀려서 일케됐지 응~ 허허 참 어장은 역시 뛰어봐야 아는 것~~
아스텔이 당기는데 어떻게 그녀가 가만히 있을까. 순순히 망토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백허그에 한 번. 머리카락에 닿는 숨결에 또 한 번. 심장이 크게 떨렸다. 간질간질해서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가만히 안겨서 그녀를 안은 팔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그가 말했다. 그녀의 어머니처럼 될 필요는 없다고.
그야 그렇겠지만, 아니, 지금은 저렇게 말해주는 것으로 기쁘니까 상관없다. 다시 마주보기 전 그녀는 작게 중얼거린다.
"그래. 네가 나를 좋아하는 거면 됐지."
그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사실 외의 무엇이 문제일까. 마주 본 그녀는 두 볼이 발그레하게 붉었지만 부끄러워하기보다 설레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반짝반짝 빛으로 가득찬 금빛 눈이 아스텔만을 오롯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가 기어코 한 마디를 보태자, 이번엔 후훗. 웃음을 터뜨리며 똑같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뱀파이어 말고 고양이는 싫어? 평생 예뻐해달라고 보챌 자신 있는데."
응-? 장난스러우면서도 얄밉게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그렇게 즐거워하다가 그가 말머리를 돌리자 눈을 한 번 크게 깜빡였다. 그러고보니 나오면 부끄러울 거 같았는데 의외로 괜찮다. 그녀는 시선을 내려 그녀의 차림을 다시금 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담요나 호박머리를 한 아이들은 많고, 간간히 뿔이나 날개를 단 사람들도 지나다니고 있어서 그녀만 유별나보이지도 않다.
"아니. 전혀?"
그러니 안 부끄럽다는 의미로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고 꾸물꾸물 그의 품을 빠져나온다. 앞으로 한 발 휙 내딛자 그녀의 머리카락이 일제히 일어났다가 포르르 내려앉는다. 그에게서 두어걸음 떨어져 마주보고 선 레레시아는 한 손으로 옷자락을 잡고 나머지 손은 위를 향해 들어올리고, 한 발만으로 서서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깔끔한 턴 이후엔 착 하고 발맞춰 서서 그럴 듯한 발레 포즈를 잡기도 하고. 저멀리 광장의 음색과 어울리는 몸짓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눈길을 주거나 하지만 전혀 부끄럽지 않다. 원래는 시선도 관심도 전부 무겁고 부담스러웠는데. 지금은 웃는 얼굴로 아스텔을 보며 이것 봐라 하듯 움직이는게 즐겁기만 하다. 간간히 살랑이는 꼬리가 잡아보란 듯 보였을 지도 모르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뒷짐을 진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랑- 로로랑 같이 있으니까 기분 좋기만 한데- 로로는 어때?"
지금 즐거워? 처음으로 그를 그냥 이름 아닌 애칭으로 불러보고,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뒤로 하얀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린다. 무언가 기대하듯이.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는 듯 몸을 부르르 떤다. 그 직후 벌어진 네 장난을 그녀가 적극적으로 받아주자 너는 흠흠, 하고 꽤 괜찮았다고 생각하며 헛기침을 했다. 이상한 기분이라는 말에는 살짝 고갤 기울이며 입을 연다. 하나도 안 아프니까, 음.
"듣기론 흡혈을 당하는 입장에선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다는 말도 있다고 하네요, 마취 같은 걸 하는 건지... 음, 먹잇감이 발버둥치면 힘드니까 아마 똑똑한 흡혈귀라면 그렇게 하겠죠."
그러니까 저는 똑똑한 강시에요~ 라며 덧붙인다. 음,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장난을 주고받다 보니 조금 들뜨는 것 같기도 하고. 아까보다 기분이 좀 나아진 너는 강해졌으니 좀 더 장난쳐도 되겠냐며 마체테를 돌리는 그녀의 모습에 흠칫 놀랐다. 다만 아까와는 좀 다르게 살짝 뒤로 한 발을 빼곤... 쉽게 당해주지는 않겠다는 듯한 결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사탕은 필요 없다, 그 말씀이시죠? 좋아요. 지금 고지는 제가 차지했습니다!"
고지라고 해 봤자 바위 하나고, 거기에 올라가야 멜피랑 눈높이가 맞았으니 엄밀히 따지자면 고지는 아니었다... 아마 멜피가 능력까지 쓰며 붙잡거나 한다면 도망칠 수는 없었을 터지만 아마 그 이상의 장난은 할 생각이 없었는지 네게 다가오던 그녀는 네 모자를 톡톡 건드리며 확인해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응? 하고 장난은 없는 건가 생각한 너는 혹시 머리에 뭔가 올려둔 건 아니려나 싶어 조심스럽게 모자를 벗었다.
"어? 사탕이 왜 여기에... 아, 설마 아까 들어간 건가요?"
달빛을 받아 색색으로 반짝이는 사탕을 보던 너는 그럼 한참 전부터 들어있었던 건가 하고 멜피를 보며 살짝 뚱한 표정을 지었다.
"주셨으면 말씀을 하셔야죠, 이래서는 받아놓고 장난을 친 사람이 돼버렸잖습니까."
으, 이것도 결국은 규칙 위반인가...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이렇게 된거 맛이나 보자는 생각으로 사탕 하나를 입 안에 넣었다. 음, 맛있다. 그리곤 네 바구니에 손을 집어넣어 한 줌 사탕을 꺼내쥐고는 멜피에게 내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