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팔찌, 소모형이 아니라 충전형이구나. 적어도 다 써서 보석의 색을 잃을 일은 없다는 말에 레레시아는 그럼 다행이라며 방긋 웃었다. 그의 세븐스를 쓸 수 있다는 것보다 그의 세븐스가 담겨있고 그것이 보인다는게 그녀에게는 훨씬 중요했으니까. 중요하게 생각하는 만큼, 그것이 훗날 허점이 될 지도 모르지만.
"음- 뭐 느낀게 없다면 괴롭히진 않은 걸 거야. 라라도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하니까. 아, 글라키에스가 상대였구나. 네가 진심으로 덤벼도 이긴 적이 없다면, 나중엔 어떻게 되려나. 지금은 마냥 막막하네. 부딪힐 날은 차고 넘치는데."
상황이 어땠길래 그렇게 다쳤을까 싶기도 했는데 글라키에스와 붙었다는 말을 듣자 바로 납득이 간다. 그리고 언젠가 그녀와 특수부대가 상대해야 할 적이란 것도 생각하자 앞날이 막막하게 느껴진다. 앞으로도 더 강해지면 된다지만, 그게 과연 대등할 정도로 강해질까. 시간마저 얼린다는 그 스킬을 마주한다면-
"...무리는 나보다 네가 더 하면서. 흥이다."
가라앉으려는 기분이 머리를 쓸어주는 손길에 다시 사르르 떠오른다. 볼이 살짝 붉어진 것 같기도 하고. 불만인 척 입술을 내밀고 조잘대긴 했지만 그가 상기시켜준 에델바이스의 신조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에 따라 임무보다 자신의 목숨을 우선한다. 임무라면 그럴 수 있지만, 아니라면 어떡할지는.
광장이 가까워짐에 따라 그녀도 매달린 피냐타를 발견했다. 일반적인 것보다 훨씬 커다란게 뭔가 있어보인다. 이곳에서 지낸지 좀 되었지만 저런 건 처음 보는지라 대체 무얼 하려는 걸까 싶다. 여기서 구경하자길래 같이 멈춰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Treat이라며 내밀어주는 사탕을 얼른 받아먹었다. 단단한 사탕이 잇새로 달그락거리며 굴러들어갔다.
"피냐타니까 뭘 할 지는 뻔한 거 같은데. 응?"
아마 저기 모인 애들이 저걸 열어서 사탕을 가져가는 거 아니겠냐며 얘기를 하려다가 가까이 오는 남자아이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스텔을 직접 부르는 걸 보니 아는 아이인가? 아이가 그녀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녀도 아이를 빤히 보았다. 그리고 아이가 예쁜 누나라고 하자 표정은 안 변해도 귀가 쫑긋 하고 움직였다. 옆에서 아스텔이 믿음직하다고 해주니 괜히 새침한 척 굴게 되고.
"내가 너보다 믿음직하면 에델바이스 사람들도 다 그렇겠다. 애한테 별 소릴 다 해. 진짜."
말은 그렇게 해도 좋아서 살랑거리는 꼬리는 숨길 수가 없다. 그녀는 아이를 다시 보고 좀 전에 산 사탕 바구니에서 사탕 한 줌을 꺼내 내밀었다.
"원래는 Trick or Treat 해야 하는데. 이쁘다고 해줬으니까 그냥 줄게. 이번만이야?"
아이가 사탕을 받는다면 주고 사양하면 사탕을 도로 바구니에 넣고서 싱긋 웃으며 아주 살짝 쓰다듬어 주었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슬슬 피냐타를 부술 시간인지 저 앞에서 들뜬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난다. 가까이 온 남자아이에게 너도 가봐야 하는거 아니냐고 말해주고 아스텔을 바라보았다.
"애들이 네 이름도 알고 에델바이스도 알고. 그런 마을이라는 건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까 뭔가 신기하다. 꿈 같아. 새삼."
이 마을에서 이미 2년이나 살았는데도 말이다. 새샘스럽게 이 곳이 얼마나 이상적인지를 깨달았다고 중얼거린 그녀는 고개를 돌려 피냐타가 매달린 곳을 보았다. 아이들은 세븐스도 비능력자도 섞여서 종이 막대로 두꺼운 종이 피냐타를 두드려대고, 팡 터지자 우수수 떨어지는 사탕들을 주우며 다같이 즐거워했다. 정말로 이상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광경을 바라보며 그녀는 웃는 듯 아닌 듯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아주 잠깐.
"...싸움에 정답은 없고 전장을 미리 예상할 순 없지만 절대로 그 녀석이 스페셜스킬을 쓰게 해선 안돼. ...그것이 발동하는 순간, 적어도 누구 하나는 죽게 될 거야. 글라키에스의 스페셜 스킬은... 정말로 모든 것을 얼려버리니까. 공간도, 시간도, 그리고 다른 그 모든 것도."
절대로 과장이 아니라는 듯, 아스텔의 목소리는 정말로 진지했다. 달리 말하자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만큼 그 글라키에스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미안한 듯, 아스텔은 괜히 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아무튼 남자아이가 오고 나서부터 괜히 새침한 목소리를 내자 아스텔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언제나처럼 뭐가 문제냐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직구 화법을 사용했다.
"...사실이잖아.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어. 난 그렇게 느끼니까."
"아. 음. 이 형이 원래 이런 스타일이에요! 아무튼 사탕 고마워요!!"
기분 좋게 웃으면서 남자아이는 사탕을 가득 챙긴 후에 그녀의 말에 따라 다시 피냐타 쪽으로 달려갔다. 신나게 부술 생각인지 잔뜩 모여있는 그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아스텔은 미소를 조용히 지었다. 그녀의 말에 공감하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 아스텔은 레레시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저런 느낌이 당연한 세계가 되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역시 난 너하고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어. ...피가 튀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전장터가 아니라 말이야."
그러기 위해서라도 더욱 죽지 말아야겠다고 말을 하며 아스텔은 가만히 바라보다 자신의 세븐스를 사용하여 사탕들을 바람에 뛰웠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세븐스를 치우면서 말 그대로 사탕으로 이뤄진 비를 아이에게 선사했다. 생각도 못한 볼거리가 재밌는지 아이들은 왁자지껄 웃기 시작했고 아스텔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있잖아. 레레시아. ...너는 어릴 때 어떤 느낌이었어? ...궁금해. 물론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무슨 소리일까요.. 그녀는 당신이 멈춰서자 같이 주변을 둘러봤습니다. 대체 뭐길래 여기까지 와야했던걸까요.
"응?"
바위에 올라가는 모습이. 뭔가 어린 아이가 단상에 서기위해 발판을 설치하는 느낌이라. 그녀는 속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습니다. 당장이라도 쓰담쓰담 해주고 싶지만 그래도 당신이 장난칠 차례였으니 꾹 참는거였죠. 그래서일까요, 퀴즈에 대한 답이 조금 늦어졌습니다.
"ㅈ, 쥬스!"
딱히 퀴즈 대회같은게 아닌데요, 그녀는 답이 늦은걸 의식해 뭐라도 말하고 싶었는지 일단 되는대로 말하고 봤습니다. 뭐 애초에 이걸 맞추라고 물은것도 아닌거 같았으니 상관없겠죠. 그녀는 이어진 공격(?)에 끄앙! 하고 아프지 않았음에도 아픈척을 해주었습니다.
"뭔가 쑥하고 들어가니까 묘하게 더 이상한 기분이네."
아마도 장난감 송곳니를 말하는듯 했습니다. 닿자마자 내려앉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그녀는 당신의 손등이나 입술에 묻은 아마도 물감으로 추정되는 물건을 보고 정리하기 힘들겠네~ 하고 현실적인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강해진다는 이야기에 미소를 지으며 마체테를 붕붕 돌렸습니다.
"그러면 강해졌으니까~ 더 장난쳐도 되겠네~~~??????"
이게 무슨. 그녀는 티슈는 필요없다는듯 그림자로 어깨를 닦아내고는 당당하게 바위에 올라가 있는 당신을 포위하듯 움직였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정말로 농담인듯. 그녀는 딱히 별걸 하지않고 당신의 모자를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렸을 뿐입니다.
무엇이 되었든, 미래에 확신이 없는 건 누구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저 살아가는 것으로도 아득한 것이 현실이니까. 그래도 그게 당장에 침울해질 이유는 되지 않으니. 거듭 쓸어주는 손길에 그녀는 소리 없이 웃어보였다. 괜찮을 거라고 말하듯이.
아스텔을 알아보고 온 아이에게 그녀가 더 믿음직하다느니 그런 소리를 하길래 별 소릴 한댔더니, 눈 하나 깜짝 않고 저런 말 하는 저 얼굴을 보라. 꼬리와 귀를 동시에 바짝 세운 그녀는 뭐라고 반박대는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뭐 정말로 아무 말도 안 한 건 아니고 그렇게 종알대긴 했다.
"진짜 못 하는 말이 없어. 좋으니까 밉지도 않고. 참 나."
궁시렁대는 레레시아와 뻔뻔한 아스텔을 두고 사탕을 챙긴 아이는 피냐타를 향해 뛰어갔다. 아이가 또래들 사이에 합류하고 곧 피냐타가 열렸다. 그 광경을 보며 그녀가 중얼거리자, 그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언젠가 저런 것이 당연한 세계에서 그녀와 살고 싶다고. 듣기에 낯부끄러운 말이었지만 그녀도 크게 공감하는 말이기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당장 누구와 어떻게 싸울지 고민하는게 아니라, 그냥 오늘 저녁엔 뭐 먹을까, 자기 전까진 뭘 할까, 자고 일어나면 어딜 가고 뭘 하고- 그런 태평한 고민이나 하고 싶어. 이렇게 너랑 손 꼭 잡고 말야."
그러기 위해선 세상을 바꿔야 하고 더욱이 죽지 않아야 하겠지만. 너무나 꿈 같은 얘기라 쓴 웃음을 짓다가 아스텔이 세븐스로 사탕을 띄우고 떨어뜨려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풀어진 표정으로 바뀌었다. 사탕 하나까지도 꼼꼼히 주워 못 가진 아이에게는 나눠주기도 하는 모습들을 바라보다가 그가 꺼낸 물음에 으음. 작게 소리내었다.
"어릴 때라. 별로 숨길 건 없으니까 뭐. 음. 아무래도 저렇지는 못 했지. 나도 세븐스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엄청 아이다웠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어. 나는, 나랑 라라는 어머니가 만들어 준 둥지 안에서만 지냈거든."
어릴 적. 가장 오래된 기억은 일곱 내지는 여덟살 무렵으로 그 때는 이미 집이라는 둥지에 적응한 상태였다. 낡고 허름한 단칸방 안에서 어머니의 나가면 안 돼, 라는 말 한 마디로 늘 라라시아하고만 함께였었다. 가끔 집 밖으로 아이들 소리가 들렸지만, 어째서인지 나가 놀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외출은 거의 못 하고 또래들이랑 놀아본 적도 없는데 딱히 그러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어. 가끔 아팠던 것도 있고. 지금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폐쇄적이었어. 아무 일도 없이 자랐으면 지금의 나는 상상도 못 할 걸."
어쩌면 자진해서 가디언즈에 들어갔을 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이 광장을 보는게 아니라 저 먼 어딘가를 보듯 공허하다. 텅 빈 눈에는 그리움조차 없었다. 잠시 그대로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그냥 그랬어. 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손을 잡고 뛰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레레시아의 어릴적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스텔은 또 한 가지 알게 된 것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둥지. 즉 자신들만의 낙원에서 시간을 보냈고 오직 서로가 서로의 전부인 상황. 그 모습을 아스텔은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렸다. 자진해서 가디언즈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스텔은 말 없이 앞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만큼 네 속에 있는 세계는 그게 전부였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야말로 가족이 있었기에 살아갈 수 있었던 삶이라는 느낌이야."
라라시아가 그녀에게 가지는 감정의 근원을 어느 정도 알겠다는 듯이 그는 잠시 라라시아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더욱 꼬옥 잡은 후에 그녀를 바라보면서 다시 말을 조용히 이어나갔다.
"그럼 이제 그 세계에 에델바이스의 다른 이들도, 그리고 나와 에스티아, 대장도 추가해줬으면 좋겠는데. ...둥지 밖에 나온 너를 받아주는 세계의 일부로 말이야. ...이미 그러고 있을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하며 그는 바구니에서 사탕을 하나 꺼낸 후에 자신의 입에 쏘옥 집어넣었다. 힘을 줘서 오도독, 오도독 씹어먹으면서 아스텔은 눈을 잠시 감았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고아원의 모습이었다. 자유로운 손으로 자신의 목 뒤에 심어진 7 모양의 문양을 손으로 살살 쓸던 그는 다시 손을 아래로 내렸다.
"...지금도 붙임성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과거의 나는 지금보다 더더욱 그랬어. ...사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다지 잘 나지 않지만 말이야. ...일단 우리 부모님은 날 버렸고 세븐스들을 일단 수용은 해둔다는 느낌의 고아원에 있었어. ...그러다가 너도 본 바로 그 시설에 돈으로 팔려갔었고. ...그 이후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지. ...그런데 그때의 경험이 있기에 지금의 싸울 수 있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아이러니해. 더 나아가 너를 만날 수 있었기도 했고."
그나마 어린 시절에 있어서 좋은 점을 하나 찾자면 그 정도 뿐이었다. 물론 이것도 어떻게 어떻게 묶고 엮어서 낸 방향일 뿐이었지만. 이어 눈을 잠시 감고 있던 아스텔은 바람을 일으켜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솔솔 쓸어내렸다.
"...운 좋게 그곳에서 대장의 도움으로 빠져나오고... 아무도 믿을 수 없어서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고 지낸 적도 있었지.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가끔은 잠에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깨기도 하고. ...아마 평생 가겠지. 이건. ...있잖아. 레레시아. ...너와 내 어린 시절은 빈말로도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남은 80년은 행복해지자고 하면... 그럴 수 있다라고 한다면 내 말을 믿을 수 있겠어?"
인생의 1/5은 빈말로도 행복할 수 없었다. 허나 남은 4/5는 어떨까.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녀는 어떻게 답을 할까. 그렇게 생각하며 아스텔은 그녀를 살며시 내려다봤다.
자진해서 가디언즈에 들어갔을 지도. 그 말을 하며 떠올리는 것은 어머니의 얼굴이다. 늘 하얗고, 아름답고, 웃음이 사라지지 않던 푸른 눈의 어머니. 그저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엔 짙은 그늘의 이면이 있었다. 아니. 어둠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겠지."
그럼에도 그 가족이 있었기에 살아갈 수 있었던 건 맞다. 그녀는 작게 중얼거리며 손을 마주 꼬옥 잡았다. 그리고 조용히 옆에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너도 에델바이스도 이 마을도. 이미 다 내 세계의 일부야."
그렇게 말하며 듣다가 오도독 사탕 씹는 소리엔 작게 키득였다.
아스텔의 어린 시절을 들으며 마냥 앞을 바라보고 있으니, 부서진 피냐타를 중심으로 미리 설치한 듯한 조명들이 반짝반짝 켜지고 이번엔 악기를 든 어른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고서 연주를 한다. 잔잔하지만 유쾌한 음색이 광장에 퍼지기 시작하고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서서 구경을 하거나 음악을 즐긴다. 음악보다 그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인 그녀이기에 조금 멀게 느껴졌지만.
"원래 인생이란게 그런 거 아니겠어. 부조리만 가득한 것 같으면서도 살고자 하면 꼭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줘서 어떻게든 버티게 만들더라."
정말 모순적이지. 쓰게 중얼거린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아스텔을 바라보았다. 공허히 비었던 금빛 눈동자에 아스텔의 모습이 담긴다. 그 뒤로는 마을의 모습이. 머릿속에는 에델바이스와 동료들이.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얀 얼굴이 예쁘게 눈을 접어 웃음지었다. 잡은 손은 더욱 꼭 잡고, 빈 손은 들어올려 아스텔의 얼굴을 감싸려 하며 그녀가 말했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스스로를 괴롭히겠지. 어쩌면 평생일 지도 몰라. 하지만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고, 미래는 미래야. 한 때 아무도 믿을 수 없었던 사람과 한 때 모든 것을 망가뜨려 사라지고 싶었던 사람이 이렇게나 변해서 연인이 되었어. 그 당사자가 하는 말을 믿지 않는게 더 어려울 거 같은데?"
각자의 극에 치달았던 사람들이 변하고 변해 이렇게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그 말을 믿을 근거는 충분할 것이다.
"행복해지자. 아스텔. 너랑 나랑 둘이서. 언젠가 꼭 세상에 평화가 오도록 해서, 가장 양지 바른 곳에 둘 만의 둥지를 짓자."
뭐 나는 어머니처럼은 못 하겠지만.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짝 돌렸다. 하얀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얼굴이 또 슬슬 붉어지고 있었다.
그녀도 변했고 자신도 변했다는 말에 아스텔은 공감했다. 그리고 어디 자신 둘 뿐이랴. 에델바이스 내에서 조금씩 변화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자신이 아는 이 중에서는 에스티아도 있지 않던가. 막 그 시설에서 빠져나왔던 시기의 에스티아를 떠올리면서 아스텔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것인지, 아니면 시체인지 알 수 없는 그 모습을 떠올리면 정말로 자신들은 지옥에서 빠져나왔구나라는 것을 그는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로벨리아에 대한 고마움과 은혜를 반드시 갚아야만 한다는 사명감이 다시 또 떠오르기도 하고.
아무튼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그는 그녀를 눈에 담으면서 슬그머니 제 망토 속으로 쏘옥 끌어당겼다. 순순히 끌려왔다면 그 상태에서 아마 뒤에서 백허그로 안으면서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의 뒷머리카락에 살며시 얼굴을 묻었을 것이다. 끌려오지 않았다면 그냥 손만 꼬옥 잡았겠지만.
"...네 어머니가 어떻게 했는지 정확하게 알진 못하고, 네 어머니처럼 못할지도 모르지만 상관없어. ...내가 본 것은 에델바이스에서의 네 모습이고 그것만으로 충분해. ...다른 이의 기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좋아하는 것은 너지. 네 어머니가 아니잖아."
네 어머니처럼 될 필요는 없어. 그렇게 말을 하면서 그는 다시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려고 했다. 양지 바른 곳에 둘만의 둥지를 짓자. 그 말의 의미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또 여기서 한 마디를 더 하면 왜 또 그렇게 말을 하냐고 불평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굳이 또 눈치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평소의 스타일인지. 결국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네가 내 뱀파이어가 되어준다면 얼마든지."
장난스럽게, 하지만 의미는 살짝 담아서. 괜히 그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하면서 스스로도 이번 것은 조금 부끄러웠는지 그는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은근슬쩍 주제를 바꿨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그 복장. 부끄럽거나 하진 않아? 역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지금이라던가 말이야."
어라 그랬어? 나는 반대로 생각했었는데?! ㅋㅋㅋㅋ 딱 봐도 아스텔은 로벨리아 바라기일거 같아서 (연애적으로든 상하관계로든) 그냥 좀 투닥대는 또래친구 사이나 되면 감지덕지겠지~ 했는데. 아 시트나 초기 일상 등등은 SL로 보이게끔 손을 쓴 것도 있긴 해~ 그런데 너무 빨리 이것저것 풀려서 일케됐지 응~ 허허 참 어장은 역시 뛰어봐야 아는 것~~
아스텔이 당기는데 어떻게 그녀가 가만히 있을까. 순순히 망토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백허그에 한 번. 머리카락에 닿는 숨결에 또 한 번. 심장이 크게 떨렸다. 간질간질해서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가만히 안겨서 그녀를 안은 팔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그가 말했다. 그녀의 어머니처럼 될 필요는 없다고.
그야 그렇겠지만, 아니, 지금은 저렇게 말해주는 것으로 기쁘니까 상관없다. 다시 마주보기 전 그녀는 작게 중얼거린다.
"그래. 네가 나를 좋아하는 거면 됐지."
그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사실 외의 무엇이 문제일까. 마주 본 그녀는 두 볼이 발그레하게 붉었지만 부끄러워하기보다 설레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반짝반짝 빛으로 가득찬 금빛 눈이 아스텔만을 오롯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가 기어코 한 마디를 보태자, 이번엔 후훗. 웃음을 터뜨리며 똑같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뱀파이어 말고 고양이는 싫어? 평생 예뻐해달라고 보챌 자신 있는데."
응-? 장난스러우면서도 얄밉게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그렇게 즐거워하다가 그가 말머리를 돌리자 눈을 한 번 크게 깜빡였다. 그러고보니 나오면 부끄러울 거 같았는데 의외로 괜찮다. 그녀는 시선을 내려 그녀의 차림을 다시금 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담요나 호박머리를 한 아이들은 많고, 간간히 뿔이나 날개를 단 사람들도 지나다니고 있어서 그녀만 유별나보이지도 않다.
"아니. 전혀?"
그러니 안 부끄럽다는 의미로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고 꾸물꾸물 그의 품을 빠져나온다. 앞으로 한 발 휙 내딛자 그녀의 머리카락이 일제히 일어났다가 포르르 내려앉는다. 그에게서 두어걸음 떨어져 마주보고 선 레레시아는 한 손으로 옷자락을 잡고 나머지 손은 위를 향해 들어올리고, 한 발만으로 서서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깔끔한 턴 이후엔 착 하고 발맞춰 서서 그럴 듯한 발레 포즈를 잡기도 하고. 저멀리 광장의 음색과 어울리는 몸짓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눈길을 주거나 하지만 전혀 부끄럽지 않다. 원래는 시선도 관심도 전부 무겁고 부담스러웠는데. 지금은 웃는 얼굴로 아스텔을 보며 이것 봐라 하듯 움직이는게 즐겁기만 하다. 간간히 살랑이는 꼬리가 잡아보란 듯 보였을 지도 모르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뒷짐을 진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랑- 로로랑 같이 있으니까 기분 좋기만 한데- 로로는 어때?"
지금 즐거워? 처음으로 그를 그냥 이름 아닌 애칭으로 불러보고,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뒤로 하얀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린다. 무언가 기대하듯이.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는 듯 몸을 부르르 떤다. 그 직후 벌어진 네 장난을 그녀가 적극적으로 받아주자 너는 흠흠, 하고 꽤 괜찮았다고 생각하며 헛기침을 했다. 이상한 기분이라는 말에는 살짝 고갤 기울이며 입을 연다. 하나도 안 아프니까, 음.
"듣기론 흡혈을 당하는 입장에선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다는 말도 있다고 하네요, 마취 같은 걸 하는 건지... 음, 먹잇감이 발버둥치면 힘드니까 아마 똑똑한 흡혈귀라면 그렇게 하겠죠."
그러니까 저는 똑똑한 강시에요~ 라며 덧붙인다. 음,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장난을 주고받다 보니 조금 들뜨는 것 같기도 하고. 아까보다 기분이 좀 나아진 너는 강해졌으니 좀 더 장난쳐도 되겠냐며 마체테를 돌리는 그녀의 모습에 흠칫 놀랐다. 다만 아까와는 좀 다르게 살짝 뒤로 한 발을 빼곤... 쉽게 당해주지는 않겠다는 듯한 결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사탕은 필요 없다, 그 말씀이시죠? 좋아요. 지금 고지는 제가 차지했습니다!"
고지라고 해 봤자 바위 하나고, 거기에 올라가야 멜피랑 눈높이가 맞았으니 엄밀히 따지자면 고지는 아니었다... 아마 멜피가 능력까지 쓰며 붙잡거나 한다면 도망칠 수는 없었을 터지만 아마 그 이상의 장난은 할 생각이 없었는지 네게 다가오던 그녀는 네 모자를 톡톡 건드리며 확인해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응? 하고 장난은 없는 건가 생각한 너는 혹시 머리에 뭔가 올려둔 건 아니려나 싶어 조심스럽게 모자를 벗었다.
"어? 사탕이 왜 여기에... 아, 설마 아까 들어간 건가요?"
달빛을 받아 색색으로 반짝이는 사탕을 보던 너는 그럼 한참 전부터 들어있었던 건가 하고 멜피를 보며 살짝 뚱한 표정을 지었다.
"주셨으면 말씀을 하셔야죠, 이래서는 받아놓고 장난을 친 사람이 돼버렸잖습니까."
으, 이것도 결국은 규칙 위반인가...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이렇게 된거 맛이나 보자는 생각으로 사탕 하나를 입 안에 넣었다. 음, 맛있다. 그리곤 네 바구니에 손을 집어넣어 한 줌 사탕을 꺼내쥐고는 멜피에게 내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