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마을이나 도시였으면 세븐스가 당당하게 할로윈을 즐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즐길려고 하면 즐길 수는 있겠지만 그에 대한 허가나 기타 눈치나 그런 것들을 다 챙겨야만 했으니까. 허나 에델바이스가 거점으로 삼고 있는 이 마을은 달랐다. 마을 내에서는 벌써부터 할로윈 행사를 하는 곳도 있었고 할로윈 분장을 하면서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로벨리아는 에델바이스 멤버들에게도 임무가 없는한, 할로윈을 마음껏 즐겨도 좋다고 허락했다.
평소라면 임무를 나가있었을 아스텔이었으나 임무가 없었기에 그 역시 나름대로 할로윈 분위기를 즐기려고 했다. 옷가게에서 구한 검은색 망토. 그리고 하얀색 와이셔츠에 그리고 검은색 정장 바지. 딱 뱀파이어 코스튬의 정석이었다. 물론 정말 제대로 하려고 하면 이빨도 구해야겠지만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할 마음은 없었기에, 일단은 구색을 맞추고자 하는 것이었기에 아스텔은 그 정도로 분장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밤중에 자신의 세븐스를 이용해서 날아다니면 전승에 나오는 뱀파이어와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자신의 방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며 맵시를 확인했다.
그와는 별개로 임무가 없으면 자신을 우선해달라는 약속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오늘은 임무가 없고 그보다 다른 선약도 없었다. 그렇다면 제 연인과 시간을 보내도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아스텔은 방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방 배치도를 확인한 후, 레레시아의 방으로 향했다. 이어 그녀의 개인방 앞에 선 후,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방을 노크했다.
"...레레시아. 안에 있어?"
없다면 없는대로 단말기를 통해 연락을 청해볼 생각이었다. 그녀라고 해서 항상 방에만 있으란 법은 없지 않겠는가.
커피의 광기로부터 시작된 이야기가 어쩌다 이리도 멀리 오게 되었을까? 이들이 평범한 카페 사이코패스였던 때가 그리워진다…….
"그래, 씨-*. 존* 다 죽이고 대가리도 전부 빠개놓고 와라."
이스마엘의 열렬한 호응은 그의 열의까지 고양시켜버렸다. 본인은 알까? 이 발언으로 인해 슬럼의 평화가 한 차례 술렁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는 화답하듯 저 역시 양손으로 비속한 손짓을 만들어 마주 보여주었다. 만면에 아주 흐뭇한 미소가 서려 있다. 서로 마주보며 나란히 손가락을 올리고 있는 괴악한 상황에 제발 아무나 끼어들어줬으면 좋겠다. 누군가 이 끔찍한 짓거리를 멈추어 줬으면… 사장님, 얘들 공공장소에서 욕하니까 쫓아내 주세요…….
"보검 그 씨**들?"
그러고 보니 그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제 언변을 아는 데다 싸울 때엔 말보다 행동에 더욱 집중하는지라 지금까지는 아가리를 나불대지 않았었지만…… 이스마엘이 그의 입담을 배워서 대신 야부리를 털어준다면? 여러모로 통쾌한 광경이 벌어지리라! 이스마엘은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학생이니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마음에 안 들던 보검 세븐스들의 면상과 그들과 함께했던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하나둘 스쳐간다……. 이 새* 욕 배웠다 짱이지… 이 야부리를 봐, 대박임. 열정적인 교수 정도의 마음으로 임하던 그의 심정이, 이제는 아예 후대에 문화유산을 전수하는 마음가짐 비슷한 것으로 바뀌고 말았다.
"씨* 그 미* 새*들 당연히 좋아 죽지. 그 개**들도 인생 존* 고단하게 살았는데 인사 받고 안 좋아하면 그게 * 사람이겠냐?"
기어이 수업에 미친 교수가 급발진 풀악셀을 밟았다. 게다가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그는 아첨에도 약했다. 가뜩이나 갈대 같은 심지가 칭찬에 이리저리 흔들거리더니 결국은 폭소가 터졌다.
"하, *. 내가 어지간해선 또라이 소리 안 하려고 했는데 **, 넌 미* 새* 이상이다. 존* *천재 또라이 새*. 네가 최고다."
이 세상에서 세븐스로 태어남은 많은 제약을 갖고 살아간다는 의미와 같았다. 기초적인 생활조차 숨 막히는 틀 속에서만 살아야 하는데. 할로윈 같은 행사를 어디 마음 편하게 즐겨볼 수 있었을까. 그러다보니 자연히 그런 것에 관심이 멀어지고 주변에서 소란스레 굴더라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보지 않으면 원하지 않게 되니까.
그러나 이 마을에 온 뒤로는 더이상 눈치 보며 지내지 않았다. 에델바이스의 거점이 있는 만큼 마을 사람들도 세븐스이며 세븐스에 호의적인 사람들이었으니까. 생활과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외면하던 것에도 조금씩 눈이 가게 되는 법. 그 변화가 눈에 띄게 드러난 쪽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라라시아였다.
"에- 레레 왜 그러는데에. 딱 한 번, 한번마안-" "아 한 번이고 뭐고 싫다니까. 아 저리 가. 좀!"
밖에선 할로윈이다 뭐다 떠들썩한 와중에 레레시아의 개인실도 떠들썩했다. 라라시아가 손수 만든 옷과 소품을 들고 와서 한 번만 입어달라고 투정을 부리고 있어서다. 딱히 그럴 생각이 없던 레레시아는 당연히 싫다고 거절하고, 그런다고 포기할 라라시아가 아니니 계속 들러붙으며 조르고.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투닥대고 있으니 바깥 못지 않게 시끌시끌 했다.
"하안 버언마안- 따악 한 번만-" "아, 피곤해 진짜... 딱 한 번이면 돼? 입고 바로 벗는다?" "헤! 응! 입고 사진 한 장만 찍으면!" "사진은 또 뭐, 아 몰라. 알았으니까 옷 줘."
결국은 조르기에 진 레레시아가 방 안에서만 입어주겠다며 옷을 받아들었다. 레레시아의 방엔 방의 3분의 1을 나누는 지점에 두터운 커튼이 있었다. 그걸 치고 뒤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으면 되었다. 입기 전에 붙여야 한다며 고양이 귀와 꼬리 소품을 주었을 땐 그냥 입지 말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최근 라라시아에게 소홀했던 것도 생각나 결국은 그대로 입어주기로 했다. 그렇게 부스럭거리며 옷을 갈아입는 사이 아스텔이 문 밖에 찾아온 것이었다.
"흐응?"
커튼으로 인해 레레시아는 못 들은 그 목소리를 라라시아는 들었기에, 처음엔 그냥 없는 척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커튼을 한 번, 문을 한 번, 그렇게 번갈아 보고 히죽- 웃는 얼굴이 범상치 않다. 이미 달고 있던 하얀 꼬리가 흥미롭게 흔들거린다. 라라시아는 살금살금 문으로 다가가 최대한 조용히 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검지를 입술에 올려 조용히 하란 신호를 보내고 빨리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안 들어온다면 아마 팔을 잡아서라도 안으로 들였을 것이다. 연신 조용히 하란 표시를 해가며 히죽히죽 웃고 있는 라라시아의 뒤쪽으로, 검은 커튼이 살랑거리더니 라라시아처럼 차려입은 레레시아가 나온다.
"라라, 이거 이렇게 입는 거 맞-"
검은 프릴이 살랑살랑한 고딕풍 원피스, 머리엔 하얀 고양이 귀, 허리엔 하얀 고양이 꼬리, 등에는 작은 박쥐 날개. 목에는 끊어진 사슬이 달린 족쇄까지 달아 고양이 악마이면서 사역마 같은 느낌도 나지 않았을까. 옷에 맞춰 레이스 무늬 스타킹에 레이스 장갑까지 완벽하게 갖춘 레레시아는 차마 하던 말을 하지 못 하고 굳었다. 놀란 눈을 깜빡거리며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는 반응 뿐이었다. 그리고 옆에서 라라시아가 웃음을 참느라 부들부들 떨고 있었겠지...
문이 열리자 아스텔은 가만히 열린 문 너머를 바라봤다. 당연히 레레시아겠거니 생각했으나 눈동자 색과 머리 길이가 달랐다. 그리고 풍기는 분위기도. 아. 라라시아 쪽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스텔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 와중에 그녀가 하고 있는 코스츔도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쪽도 즐기는구나 싶어 그는 입을 열려고 했다. 허나 조용히 하라는 신호와 함께 들어오라는 신호가 떨어지자 아스텔은 응?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일단 입을 다물고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그러는 와중, 검은 커튼이 살랑거리고 안에 있는 이가 나오자 아스텔은 순간적으로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할로윈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고양이 악마 같은 느낌의 옷을 입은 레레시아가 거기에 있었다. 라라시아와 같은 복장으로 보아 쌍둥이가 똑같은 컨셉으로 입은 것은 알겠지만 분위기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아스텔은 느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등장은 레레시아에게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며 상당히 당황하고 놀랐다는 것을 그는 짐작할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아스텔 역시 몸이 살짝 굳었지만 빠르게 몸을 뒤로 돌렸다
"...미, 미안. ...오늘은 임무 없어서 찾아왔는데, 조금.. 타이밍이 안 좋았던 모양이네."
일단은 나가는 것이 좋을까? 나가 있는 것이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스텔은 자신이 하고 있는 망토를 살짝 손으로 정리하더니 그 상태로 마치 고장난 것처럼 같은 방향의 팔과 다리를 천천히 삐그덕거리는 느낌으로 움직였다. 그러다 잠시 발걸음을 멈췄던 아스텔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 옷. ...평소에는 보지 못한 느낌이라서 신선하고... 예쁜 옷이라고 생각해."
이상한 거 아니야.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아스텔은 다시 삐그덕거리는 움직임으로 밖으로 천천히 향했다. 문을 닫거나 막지 않았으면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가 바로 앞의 벽에 가볍게 머리를 콩하고 부딪쳤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도 당황했던 것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