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 정의가 존* 공정했냐고. 네 부모는 솔직히 내 알 바 아니고, 오늘 처형하겠다는 애들이 규율을 어겼냐? 말 잘 들어도 그 지*로 널널한 정의네. 그럼 씨* 말 듣고 얌전히 있는 새*가 호구 아니냐."
죽음이 가까운 사람의 외침은 가히 사력에 닿아 있다. 사력死力이고 또 사력肆力이다. 일생의 모든 염원과 한이 담긴 외침이 누군가, 이곳에 선 에델바이스나 멀리서 구경하고 있을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렸을지도 모르나, 적어도 그에게는 전혀 가닿지 못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지. 세상에 사정 있는 사람이 저 뿐인줄 아나? 정의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이 난잡한 짓거리들도 결국은 각자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걸고 서로 죽이는 싸움의 연속에 불과하다.
물길이 휘돌며 높아진다. 일전에도 겪어 본 적 있는 그 기술이다. 물살이 더 거세어지며 압박해오기 전에 상황을 해결해야 했다. 그는 사방을 구르는 물건들의 부서진 잔해를 아무렇게나 쥐고, 레이버의 머리 위 허공을 향해 높이 던졌다. 던져 낸 물건이 상승을 멈추고 추락하기 직전, 그것으로부터 환한 빛이 길쭉하게 퍼져 나온다. 한계까지 억누른 불길이 급격히 팽창하며 터지기 시작했다.
잘못되지 않았다 외치는 레이버를 바라보며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모조 보검에서는 루시아가 레이버의 상태를 말해주며 처리해달라고, 그리고 힘을 보태주는 노래를 전해주었다. 소진되었던 힘이 다시 차오름을 느끼며 그녀는 왼팔을 치켜들었다. 그 팔에 채워진 은빛 팔찌에서 녹색 보석이 반짝이며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미안하다. 레이버."
서서히 불어나오기 시작한 바람은 이내 거센 흐름을 만든다. 흐름의 중심은 레이버. 이미 만신창이가 된 레이버를 더더욱 꼼짝도 못 하게 붙잡아놓는 것이다. 바람이 감도는 속에서 그녀는 두 손으로 새하얀 깃대를 치켜들었다. 붉은 에델바이스가 휘날린다. 앞으로 뛰어나가, 독액으로 공중에 떠오른 후 그녀를 감싼 바람의 추진력을 받아 레이버를 향해 내리쏘아졌다.
"폴링, 에어로!"
날카로운 깃대의 끝이 레이버를- 아니, 레이버가 든 보검을 정확하게 노리고 내리꽂힌다. 전력으로 보검을 부수기 위해.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캡틴은 절대로 레이버의 행각이나 그런 것을 동정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그냥 레이버에겐 레이버 나름의 이런 뒷배경이 있었다 정도를 보여주는 말들이었으니. 그것에 대해서 캡틴은 이렇게 생각해야만 한다. 저렇게 생각해야만 한다..라는 것은 강요하지 않아요!
허나 정말 단순히 얘 나빠요! 되게 나빠요! 이런 악역은 없다고 생각하는 파이기 때문에 그냥 레이버라는 캐릭터가 밟아온 길은 저런 느낌이 있었다..정도를 일부 보여주는 것으로만 생각해주세요!
버틸수 없다고? 그 말은 의식적으로 버틸수 없다는 것? 아니면 생물로써 버틸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이 들었다가 처리해 달라는 말에 결론은 후자로 치우쳐진다. 처리라니. 사람을 상품화 하는것 같아 꺼려지는 말이다. 그런 뜻으로 한 것이 아니라 최대한 빙 꼬아 듣는 이에게 결론 내리게끔 하는 화법이겠다고 생각은 된다만.
정정한다. 꺼려지지 않는다. 이내 짧게 스친 생각에 손가락을 대 보면 급작스레 괜찮아진다. 자신이 왜 이 말이 꺼린지 생각해보고 그게 언제 일어났던 일 때문에 꺼려지는지 생각해 보자면 진정된다.
여전히 이기적이고, 여전히 개인주의인 사람이다. 그는 그녀를 살리고 싶어한다. 죽을 만큼의 죄, 그런 것을 들이밀 만큼 그는 절대적으로 선하지 않다. 이 충동은 어쩔수 없는, 생리적인 죄책감이다. 트라우마는 응수해도 죄책감만큼은 안고 가야 한다. 이것은 그가 이곳에 서 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녀를 향해 직선적으로 뛰어들어가면 동료의 공격에 휘말릴 수도 있고, 그녀가 펼치는 공격에 다칠 수도 있다.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을 사지로 내모는 마음은 꽤나 불쾌하다고 그는 느낀다.
그는 말빨이 안 좋다, 이타적이지 못하니 남이 듣기에 좋은 따듯한 말은 못 한다. 다만 다치거나 아직 휩쓸린것은 한 군데도 없다. 그러니 조금 다쳐도 몇밤 자면 나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원상태로 되돌아오니까, 그것이 변덕스러움이니까. 번뇌에 휩싸이면 아무것도 못 하니, 털고 일어서서 계속 해야만 한다. 무엇을?
답지 않게 주춤거렸다가, 이내 능력을 써서 흐르는 기체 상태의 물감으로 그녀를 감싸 상처 부위를 눌러 지압해 주며 그녀가 편하게 서 있을수 있게 기댈 만큼의 물리력을 써 보려 했다. 배신과 착한 척 사이의 행동을 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니 이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에델바이스보다도 더 중요한 누군가가 있다.
"죽으면 곤란한데."
레이버라는건 아니고. 그렇게 말하는 그는 여전히 인상을 쓴 표정이다. 전투 시작 때와 다름 없을 그 표정. 동정심이라던가, 구원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빛 좋은 말로는 형용할수 없는 개인주의적 사상이 이 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