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인간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리를 보이는 것 뿐이야. 지금의 나는 완전히 인간들의 틈에 섞여 살고 있으니까... 그 뜻에 어느정도는 맞춰주는 게 더욱 효율적인 위장이 될 거라고 진작에 판단했어. 그리고 이렇게 마실 거라도 내주지 않으면 자네의 입은 조금도 쉴 생각을 않으니까 말이지."
차를 내주는 건 친절이 아니라 단지 그것뿐. 마치 그렇다고 하는 것처럼 마녀는 말했다. 덕분에 강민은 이 공간에 무단으로 침입하면서도 차나 과자를 얻어 먹을 수 있는 것이지만. 친절인지 불친절인지 아리송한 태도이나 결국은 그만이 이득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가 바깥에 대해서 산책 이야기를 꺼내자 돌부처처럼 딱딱한 자세를 고수하고 있던 마녀가 조금은 움찔거렸다.
"...윽. 그건 절-대 사양이다."
나온 것은 거의 즉답에 가까운 질색이었지만. 읽고 있던 책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그 틈 사이의 눈으로 강민을 바라본다. 푸른 눈썹 사이가 약간이었지만 찌푸려진게 눈에 띈다. 그렇게도 싫은가?
"애초에 마녀란 족속들은 낮과는 거리가 멀어. 음기는 마력을 결집하고, 숙성시키지. 간단히 말하자면 마술을 다루기에는 기본적으로 광입자가 적은 어두운 상태가 최적이라는 거다. 흔히 반인반수가 만월에 반응한다는 설화도 그런 원리에서 비롯 되었다고 봐도 되겠지. 그러니 햇빛따위는... 그래, 이 나와 어울리지 않아."
그 이유란 그런 것으로, 지금 말들이 전부 사실이라면 마녀라거나, 그와 비슷한 사람들은 전부 히키코모리 태생이 아닌지 싶다. 그렇다고는 해도 흡혈귀처럼 햇빛에 노출되면 실시간으로 피부가 타들어 가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그럼 역시 그냥 이 마녀 나부랭이가 히키코모리인 것 뿐이지 않나!
"무슨 유파라고 했던가. 자네의 가문에서 이런 정도의 기본적인 마술학 상식은 가르침 받지 않은 모양이지? 강민군."
그러다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마녀가 그에게 말했다. 그러고보니 그랬지. 마녀는 어느정도 강민의 정체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상태인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자기 반의 학생들에게 일어나는 사정을 하나하나 담임이 알아채지 못하는 것처럼 자세한 건 알지 못한다. 그러니 이런 의문같은 걸 던지고 있는 거겠지만. 어쨌든 마녀는 이런 쪽의 학구열에 더 관심이 많은 여자였다.
" 나는 그렇게까지 수다스러운 사람이 아닌걸. 단지 리즈 반응이 너무 무뚝뚝하니까 그렇지. "
방긋,하고 웃어보이며 그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따뜻한 차의 온기가 손을 타고 온 몸으로 전달되는 느낌이라 몸 주위를 감돌던 냉기가 한결 사그라든 그는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편하게 자세를 취하더니 살짝 눈을 감았다. 좀 서늘하긴 하지만 따뜻한 차를 마셔서 그런가 잠들기 딱 좋은 온도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 네가 인간들 틈에 섞여살고 있으니까 낮에도 활동하고 그래야지. 대부분의 인간들은 낮에 밖을 돌아다니곤 하는걸. "
아예 의자를 돌려앉아서 등받이에 턱을 기댄채로 그녀를 바라보던 강민은 약간은 찌푸려진듯한 그녀의 표정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가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데려갈 생각은 없었지만 본디 현대의 밤은 낮보단 좀 더 지루한 법이니까 말이다. 계속해서 지루한 나날을 보내는 것보단 낮에도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경험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는 강민이었다.
" 혼자 다니는게 걱정이라면 같이 다녀줄테니까. 음 ... 그래, 데이트를 하는거야. "
장난스런 말과 함께 눈웃음을 지어 리젤로테를 바라보던 강민은 그녀의 말에 흐음, 하는 소리와 함께 턱을 매만졌다. 유파에 관한 것은 극비 중의 극비로 웬만한 국가의 수반도 모르는 정보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눈앞의 그녀는 원래라면 유파에서도 경계해야하는 사람이고 그녀 또한 보는 것보단 오랜 세월을 살아온듯하니 그의 고민은 그렇게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 나 말고도 유파에서 후계로 지정해둔 사람은 몇명 더 있지. 그 중에선 너와 비슷한 지식을 배우는 자도 있는 것으로 알지만 ... 친하지도 않을뿐더러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말이지. "
사람을 잘 가리지 않는 그가 정말로 싫어하는지 말하는 내내 웃는 표정이었지만 느껴지는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생각도 하기 싫다는듯 작게 한숨을 내쉰 그는 이내 평소의 분위기로 금방 돌아와선 말했다.
" 나는 기본적으로 무술이라고 불리우는, 그런 쪽으론 지식이 좀 있는 편이지. "
좀 있는 편이 아니라 통달했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말이다.
" 뭐 이런 어려운 얘기는 하지말고 다른 얘기나 하는게 좋겠네. 그럼 리즈는 평소에도 이렇게 있는거야? 쉬는 날에도? "
적어도 쉬는 날엔 쇼핑을 한다던가 하는 취미 생활이라도 있지 않을까해서 물어보는 강민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자네의 말이 맞아. 인간이라면 물론 태양의 요람을 활보해야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학생을 연기하고 있어. 학생에게 업이란 '공부'다. 세상의 일엔 관심끄고 학원에 틀어박혀 학업에 매진하는 시늉을 하기만 하면 되는 편리한 신분이지. 그래, 다음엔 일본이 아닌 옆의 이웃나라에 가볼까 해. 그곳의 학생들은 저녁 10시가 되도록 공부하고 학원에 나와서까지도 다음 날의 예습을 한다는 모양인데. 정말이지 멋진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아?"
이때의 마녀는 살짝 웃었다. 입꼬리만 조금 올라간 옅은 미소. 냉랭 일색인 그 마녀가 다른 얼굴을 보인다는 건 희귀한 일이지만... 역시 그건 좋은 의도의 웃음은 아니었다. 상쾌한 맛보다는 비릿함이 더욱 진한. 눈 앞의 강민을 놀리는 듯도한, 이야기 속의 옆나라의 학생들을 비웃는듯도 한, 그런 얼굴이었다. 도무지 보통의 여자 고교생이 할 수 있는 얼굴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 내가 걱정이라고? 그리고 데이트...? 자네와 내가 말인가? ...흐응."
마녀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그 고개를 기울인다. 각각, 고개를 기울인 것은 데이트의 얘기가 나왔을 때, 눈을 가늘게 뜬 것은 강민의 집 안 사정을 말하고 있을 때로 나뉜다. 그런데 웬걸, 장난스러운 말투였다고는 해도 마녀의 기분이 그렇게 나빠보이지 않아보이는 눈치다. 오히려 분위기가 달라진 강민을... 탐색한다고 해야할까? 하루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책만 들여다보고 있는 마녀가 남에게 이렇게까지 시선을 보내는 것은 꽤 드문 경우다. 강민이 평소처럼 돌아오자, 똑같이 돌아온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지만.
"그건 이미 알고 있어. 그야 알고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네에게는 평범한 사람과는 다르게 보통은 닫혀 있는 혈에서도 기가 막힘 없이 흐르고 있거든. 나처럼 기의 흐름에 예민한 사람들은 금새 그걸 알아챌 수 있지. 만약의 이야기다만 유강민군, 자네가 그 사실을 숨기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좀 더 긴장하고 걷는 편이 좋아. 그래서야 나같은 존재에게는 금방 들켜버릴 테니까."
마치 선생님이라도 된 듯한 말투로 말하고 있다. 【괴리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녀가 말하는 그 괴리성이란 일상 속에 숨어든 비일상에 살고 있는 것들. 그 자체가 자아내고 있는 현실과의 괴리감을 일컫는 것이었다. 그것은 여기있는 마녀도 마찬가지이며 강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괴리감을 갖는 사정도, 그것을 흘리는 방식도 저마다 제각각. 일상 속에 살고있는 평범한 사람은 그런게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렇기에 마녀는 아무 탈 없이 인간들의 사이에 숨어들 수 있는 것이지만... 이렇게 강민과 마주친 것처럼, 또 다른 일상 밖의 존재에 대해 주의하라고 언질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괜한 잔소리를 하길 좋아하는 걸지도... 그런 그녀가 강민의 질문에 오히려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대답했다.
"그래. 보다시피 특별할 거라곤 전혀 없어. 자네가 지금 보는 이 풍경이, 꾸밈없는 나의 평범한 일상이야. 요즈음엔 인터넷이라는게 참 잘 되어있더군. 필요한 게 있다면 밖에 나가지 않고도 구매할 수 있어서 시간도 비용도 절약이 가능해. 게다가 마침 이 학원의 기숙사는 훌륭하게도 료칸을 바탕으로 설계되어 있으니까 말이야. 멀리 나갈 필요 없이 온천도 할 수 있고 명상도 즐길 수 있지. 여러모로 편리한 곳이야. 되도록이면 이곳에는 오래 있고싶어."
역시 히키코모리인가... 밖에 나가지 않는다는 소리를 이렇게나 당당하게 늘어 수 있는 것도 그녀뿐인지도. 자신을 바깥으로 내보내고 싶어하는 강민의 의도를 먼저 읽고서는 부러 그런식으로 뻔뻔스럽게 얘기하는 것 뿐인지도 모르지지만 말이다. 사람과의 만남은 모르겠지만, 사람을 물먹이는 건 어째선지 참으로 좋아하는 마녀다. ...아하, 그렇기에 '마귀 마'자를 쓰는 여자인 것인가. 그런 건가. 아무튼 그랬던 마녀가 지금 강민에게 흘끗거리며 시선을 주었다. 구불거리고 길게 늘어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묻는다.
"...그보다도, 질문의 저의를 모르겠어. 자네는 혹시 이 나와 데이트가 하고 싶은 거야?"
그허어억 이 시간에 집에 들어오다니 실화냐아아...... 마녀씨는 일부러 다가오는 할로윈 시즌에 맞춰서 그런 컨셉을 잡아 낸 캐릭터인데 그래서 뭘 해야할지 모르겠네...?! ㅋㅋㅋㅋㅋㅋ 그리고 메신저도 좋은 생각~~~! 이라고 생각하지만 테이주는 어떠려나? 라인은 대충 서로 교환했다는 설정으로 좋지 않나 싶어~~
" 확실히 학생의 본분은 공부이지만 말이지, 학교는 공부를 가르치는 곳이기도 하지만 학생들에게 사회적인 능력을 기르게 하는 곳이기도 하거든. 그러니까 리즈가 여기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이 학교의 본분을 반만 수행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거야. "
그녀가 옆나라 이야기를 하자 강민도 길게 말을 늘어놓으며 얘기했다. 사실 옆나라라고 한다면 그와 무관하지는 않은데 이름부터 한국식 이름이지 않은가. 물론 상당히 어릴적부터 유파에서 길러져왔고 일본에서 살아왔기에 그는 외모와 이름만 한국인일뿐 완전 일본인이나 다름 없었지만.
" 의외로 리즈 같은 사람들은 별로 없는걸. 아니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 이 세계의 절대 다수는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일반인이니까 말이야. "
그리고 그 절대 다수에 나는 포함이 안되고 말이지. 이어지려는 말을 속으로 삼켜낸 그는 잠깐 쓴웃음을 지었지만 빠르게 옅은 미소로 바뀌었다. 물론 미사키도 그렇고 리즈도 그렇고 엘부르즈에는 특별한 학생들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녀의 조심하란 말이 틀리진 않지만 ... 그 극소수의 사람들 중에서 그에게 적대감을 가질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금 마음을 놓고 사는 것도 있었다.
" 맘만 먹으면 바깥에 나가지 않아도 괜찮은 세상이긴 하지만 말이야 ... 가끔은 상쾌한 공기를 맡으면서 생각없이 걸어다니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거든. "
강민의 말에도 리젤로테는 나갈 생각이 없어보였기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 이상 말해봤자 서로의 의견은 평행선만 달릴 것이 뻔했기에 설득은 그만두려고 했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에 그는 잠깐 멈칫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가깝게 다가가서 다시 앉고선 작게 속삭였다.
" 리즈는 어때? 리즈만 좋다면 나는 괜찮은데, 데이트. "
장난스런 표정이 가득했지만 어쩐지 싱글벙글한 웃음이 조금은 기대를 품고 있는듯 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어디까지나 리즈를 밖으로 데려갈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한 것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생각들이 안일하다고 나는 말하고 있는 거야. 비일상에 사는 자가 일상이 있는 쪽을 바라봐도 의미 없어. '그림의 떡'이라는 말을 알고 있으려나? 자네가 말하는 평범한 삶이, 우리에게는 마치 그것과 같지. 실체인 것 같아 뻗어보면 가짜이고, 선뜻 배푼 믿음에 멋대로 배신 당하고는 해. 비일상에 산다는 건 그런 거야 강민군. 가령 지금의 내가 학생을 연기하고 있어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말이지. 그러니 학생의 본분 따위같은 것도 사실은 전부 의미 없다는 이야기... ...잠, 거리 가깝잖아...! 그렇게 불쑥 다가오지 말아주겠어?"
책장을 넘기며 기세양양하게 말하는 마녀도 멋대로 자리를 바꿔 가깝게 앉아오면 별 수 없다. 페이지에 고정시켰던 눈이 강민에게로 향하고, 뒤로 내뺀 얼굴에는 당황하는 빛이 감돈다. 또, 한껏 찌푸린 눈썹에 모진 목소리... 그리고 갑작스러운 어프로치에 놀란 걸까? 조금이었지만 붉게 상기된 얼굴. 무섭다 무서워.
"흥... 사람이 말하는 중인데 바보같은 얼굴이나 하고 있기는...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떨어져. 자네 때문에 책이 안 읽힌단 말이야... 정말."
그러더니 손에 들려있던 두꺼운 책으로 강민의 얼굴을 자신의 거리에서 밀어내려고 한다. 꾹꾹 눌러서 밀어낸다. 평소의 실없는 장난같은 거라고 생각했건만,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웃는 얼굴을 모질게 내칠 수는 없었던 건지. 체념한 듯 말하는 마녀는 '하아' 한숨 쉬고는 말한다.
"...좋아. 어울려줄게, 데이트. 한 낮에 바깥에 나가는 것 따위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 걸."
마침내 승낙이 떨어졌다! 한껏 부풀어 있던 강민의 기대가 닿았던 것일까? 하지만 안심은 아직 이르다고 말하는 것처럼, 천천히 펴올린 손가락 한쪽을 곧 강민의 입가에 닿게 하고서는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