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새학기라는 말도 쓰기 힘들 정도로 시간이 지나서 여름이 슬슬 다가오고 있다. 밤의 기온은 선선하지만 한낮의 기온은 이제 덥다고 느껴질 정도로 햇빛도 강렬해지고 있었고 그에 맞춰서 학생들도 팔과 다리 등의 맨살을 조금씩 드러내고 다니고 있다. 그것은 강민도 예외는 아니라 셔츠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인채 평소엔 잘 오지 않는 부실이 모여있는 건물 안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멈춰선 곳은 오컬트 연구부라고 적힌 부실의 문 앞이었다.
" 리즈 안녕~ "
분명 자신이 속해있는 부실도 아닌데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버린 그는 익숙하게 리젤로테를 찾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부실 내부는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놓여있는 의자 중에 하나를 잡아 앉은 그는 부실에 있던 리젤로테에게 시선을 향하며 말했다.
" 또 갑자기 찾아왔다고 잔소리 잔뜩 할 생각이야? "
그가 이렇게 오컬트 연구부실에 갑자기 오는 것은 한두번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가서는 부실에 있는 리젤로테와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그는 그럴 생각이 만땅이었기에 장난스런 미소를 가득 지은채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가만히 있으니 문이 덜컥하고 열린다. 아니, 버티고 서야 할 문이 자동으로 열리다니 그런 일은 자동문도 아닌 이상에야 있을 리가 없을텐데... 그래도 혹시 '마술'이라는게 있다면 또 모르는 일이다. 마침 이 부실의 간판도 '오컬트연구부'라는 굉장히 수상스런 이름을 하고 있지 않나. 그 내부도 광원이라고는 촛대 정도에 의지해 한 없이 어두컴컴하고 쨍한 날에 어울리지 않게 서늘하다. 이 학교에 만약 동굴이라는 곳이 있다면 그건 분명 이 부실을 뜻하는 것일테지. 하지만 그것이 마술같은 일은 결코 아님을, 방의 주인은 일찍이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아. 자네인가."
그곳의 부장은 방 곳곳에 도사린 어둠 속에서 숨을 털어내는 소리를 하며 불청객을 맞는다. 마녀의 얼굴이 이제는 물리다 못해 거진 변화도 없는 얼굴이다. 남의 부실을 노크도 없이 덜컥 열어버리는 이 사려가 부족한 남자 아이는, 학생 '유강민'은― 이 수상쩍은 부실을 한 번 찾아낸 뒤로는 몇 번이나 질리지도 않고 계속해서 찾아오는 불청객이었다. 이 때의 남자 아이들은 남아도는 체력을 주체하지 못해 바깥에서 어떤 바보 짓이라도 사서 할 터인데. 할 일이 그렇게나 없는 건가? 그나저나 여전히 이쪽을 '리즈'라고 부르고 있다. 이름을 알려줬더니 멋대로 그렇게 불러오는 것이다. 하기사 마녀 본인도 풀네임을 온전히 부르는 건 시간낭비라는 입장이다. 그렇기에 이름을 어떻게 부르건 그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나 저렇게 친한듯이 리즈라고 줄여 불러오는 건 역시 조금은 거슬리는 일인 것이다.
"아니, 그건 그만두기로 했다. 그야 자네는 음향 왜곡의 마도구라도 쓰는 것처럼 내 말을 듣지 않으니까 말이야. 입이 아파졌어. 벽에 대고 이야기 하는 것 만큼 체력의 낭비가 되는 것도 없겠지."
퍽 자비없고 냉정한 말씨다. 이런 정도의 말끔한 독설을 상대불문하고 시원시원하게 뱉어내는 건, 이 학원에는 이 작고 교만스러운 마녀 정도 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방 안은 실제로 시원했다! 요즘의 날은 점점 더워지고 있지만 아직 개인 부실에 에어컨을 허락해 줄 만큼의 기온은 만족되지 않아 애매한 더위와 불만이 학생들을 덮쳐오는 시기인 것이다. 이런 일을 마술같다고 해야하는 거겠지. 그야 강민도 알고 있을테지만 실제로 그녀는 기온을 조작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서늘하다 못해 조금은 춥다고까지 느끼는 건지 걷어 붙인 교복 위에 어두운 케이프를 두르고 있었으니. 망토라. 여고생이라면 보통은 담요 아닌가?
"흥... 좋을대로 말하기는. 지금의 나는 심심해 할 여유따윈 없다고 몇 번이나 알아듣게 말했을텐데. 역시 자네는 새겨듣는 버릇이라곤 조금도 없는 모양이야. 다시 말하지만 이 공간에서 심심함을 느끼고 있는 건 오로지 유강민 군, 자네뿐인 거다."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냉소 일색의 말을 쏟아내던 마녀가 손가락을 서로 마주쳐 비틀자 '타악' 소리가 어둑한 방 안에 울렸다. 그리고 일어난 것은 또 한 번의 마술.
"언제나처럼 이 차라도 마셔버리고, 적당히 사라지도록."
울리는 소리에 마치 잠들어있다 깨어난 것 처럼, 한 켠에 놓여있던 티컵이 강민의 앞에 놓여지고 그 안을 주전자가 저절로 떠올라 빈 잔을 채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라져주기를 바라는 거라면 이런 차도 굳이 줄 필요 없을텐데. 마녀라는 건 어쩌면 역설적인 면모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 마녀 사냥의 취지가 그러했던 것 처럼.
오늘도 어김없이 친절하지 않은 리젤로테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강민은 여전히 여유로운 웃음을 지은채로 의자에 앉아있었다. 이 학교에 있는 그 어떤 공간보다 어두운 느낌이 강한 이곳은 바깥의 기온과는 다르게 서늘했다. 그러니 팔꿈치까지 말려올라가있던 셔츠의 소매도 어느새 풀려내려와 드러냈던 팔뚝을 다시 가려주고 있었다.
" 벽에 대고 얘기하는 느낌이라니, 나는 그렇게 딱딱한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
그녀가 무슨 뜻으로 얘기하는지 뻔히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른척 조금은 서운한 표정을 지어보인 그는 그녀가 두르고 있는 케이프를 바라보았다. 망토라니, 여고생의 감성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도 잘 알고 있었지만 리젤로테가 평범한 여고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엔 말투가 좀 요상한 유학생인줄 알았지만 그녀가 보여주는 어떤 미지의 힘은 그녀에 대한 그의 시선을 바꾸었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 그런가, 그럼 내가 심심하니까 리즈보고 어울려달라고 하는 수 밖에 없겠네. "
리젤로테가 강민쪽으로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는 것 같았지만 강민은 예전에도 그랬기에 너무나도 익숙하다는듯이 그녀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다. 마녀, 라고는 그녀의 입에서 들어본 적은 없지만 나잇대에 어울리지 않는 케이프를 고집한다던지 없던 자리에서 갑자기 무언가 생겨나는 일, 이를테면
" 여기는 좀 서늘하니까 따뜻한 차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러니 저러니 해도 리즈는 친절하네. "
그녀가 손가락을 튀기자 허공에서 따라주는 따뜻한 차 같은 일을 보면 강민은 그녀가 마법사 혹은 마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말의 속임수냐고 물어본다면 어떤 것을 보더라도 행위 자체는 따라할 수 있는 강민이 따라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을땐 속임수는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 오컬트 연구부에 무언가 장치가 되어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일개 부실에 그렇게까지 해둘 이유를 그는 알지 못했다.
" 오늘은 날씨가 좋더라. 안에 있는 것도 좋지만 바깥에 나가서 햇빛이라도 좀 보는게 건강에도 좋을 것 같은데. 같이 나가지 않을래? "
그녀가 따라준 따뜻한 차를 홀짝이면서 그는 웃어보였다. 엘부르즈 최고의 독설가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이 마녀 여학생에게서 이렇게 마이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그의 대단한 능력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