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따라 유독 피곤했던 아침 시간이 지나갔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잠깐 잤던 것이 도움이 되어서일까, 오전 수업 내내 꾸벅꾸벅 졸것만 같았던 몸은 용케도 모든 수업을 다 들을 수 있었다. 그래도 조금 더 수업을 들었다간 버티지 못할 것 같을때에 점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진다.
" 용케도 안졸았네. "
그가 수업 시간 내내 피곤해하던걸 보던 친구가 점심시간에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 필기는 다 했지만 수업은 반쯤 흘려들었으니 그게 수업을 들은건가 싶긴 하지만, 강민은 일단 점심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양치질까지 다 끝낸 그는 교실을 나와서 계단을 오른다.
' 끼익 '
모든게 잘 관리되고 있는 엘부르즈지만 옥상으로 통하는 철제 문에서 나는 소리만큼은 어쩔 수 없나보다.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오지 못하는 옥상이라 딱 이 맘때만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그래도 옥상을 꾸며놓은지라 적당히 앉아서 쉴만한 벤치가 군데군데 있고, 강민은 그 중 하나에 기대듯이 앉아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쿠라카미 한테이는 방탕아입니다. 수업은 거의 듣지 않았고 그나마도 조는 경우가 대부분. 그나마도 특기생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주변에서도 쉬쉬하는 것 뿐 반향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 그녀는 자주 논란에 휩쌓이고는 했습니다. 적어도 교실에 있으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그런식이면 학교는 왜 다니는 이야기까지. 그녀는 그 자리에서 긍정할 뿐 세걸음 지나면 그런 사람들을 없는것으로 치부했습니다.
교내는 너무 소란스럽습니다. 신경써야할 것이 많습니다. 인간관계부터 학업태도나 성적들. 이 학교 학생의 대부분이 공부에 매진하기 때문인지 다른 곳보다 더 한 느낌도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인파로부터 숨어있을 곳이 필요했습니다. 교내가 넓다고 한들 결국은 학교라 완전히 사용되지 않는 장소를 찾는 것은 어려웠지만 다행히 그녀에게는 시간이 있었고 얼마 가지 않아 최적의 장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교내 옥상 정원으로 향하는 계단통의 위. 정원으로 들어오는 사람도 그다지 눈길을 두지는 않는 이 곳 말고는 있을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요. 그곳은 그녀에게 있어선 최고의 휴식공간이었습니다. 때때로 지금처럼 좋은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말이에요.
"이런 꽃놀이 하기 좋은 따뜻한 날씨에, 그렇게 피곤해보이는 얼굴로 뭘하고 있는거야?"
한테이는 그를 보자마자 곧장 정원을 향해 뛰어내리지는 않았습니다. 구태여 힘을 쓰는것은 그녀기준에서의 피곤한 일에 해당하기 때문일까요. 그녀는 조금은 짖궂은 얼굴로 그가 앉은 벤치를 향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사실 그가 옥상을 올라가기 전부터 그곳을 먼저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항상 구설수가 남아있다고 하던가. 하지만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강민에겐 딱히 신경 쓸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옥상을 올라가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함도 있었으니까.
" 안녕, 테이. "
쿠라카미 한테이, 그녀는 항상 가죽자켓을 입고 있었는데 이유를 물어도 알려주진 않는다. 또한 일월정의 관리를 하고 있어서 학교 뿐만이 아니라 일월정에서도 자주 마주치곤 한다. 어릴적 우연히 만나서 구해준 이후 이곳 엘부르즈에서 다시 만나게 된 그녀는 이렇게 마주치면 먼저 인사를 걸어오곤 했다.
" 아침에 약한거 알고 있잖아. 단지 오늘은 평소보다 좀 더 피곤하네. "
벚꽃이 예쁘다던 미츠키의 말이 생각난다. 꽃놀이라 ... 벚꽃이 흐드러지면 꽃놀이도 가곤 하니까 말이다. 생각해보니 강민은 작년도 재작년도 꽃놀이는 가지 않았다. 딱히 싫어서는 아니고 기회가 닿지 않았다고 해야할까. 벤치에 앉아서 그녀를 바라보던 강민은 비어있는 옆자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 거기 있기보단 여기로 오는게 어때? "
마침 옥상은 그와 그녀뿐이었다. 누군가 본다면 또 하나의 구설수가 생기겠지만 그럴 일은 없는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햇빛을 등졌습니다. 잠시간의 정적. 그녀는 스스로도 이게 맞는건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내 생각하는것이 귀찮다는 것 처럼 뛰어내려 당신의 곁으로 왔습니다. 제법 높이가 있었지만 뛰어내리는 한테이는 마치 일상적인 일이라는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오늘부터 새학기였지. 긴장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멋대로 납득이라도 한듯 고개를 끄덕거립니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소녀는 방금 보다도 즐거워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녀는 거리감을 재는 것이 서툴러서 점점 가까워지는 것은 아마 착각이 아닐것입니다.
"가끔은 수업은 제끼고 놀러다닌다던가 하는 것도 괜찮지 않아? 그런 상태라면 오히려 더 머리에 안들어올텐데."
한테이의 말에 강민은 마주 미소지으며 얘기했다. 그리곤 정말로 그녀의 옆에 갈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돈하다가, 이내 가볍게 자신의 옆에 다가온 한테이를 보고선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처음엔 저렇게 뛰어내리는 모습에 놀라기도 했지만 이젠 일상이라는듯 그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 1학년도 아니고 새학기에 긴장을 하진 않는다구. "
애초에 한 학년에 학생도 별로 없는 엘부르즈라서 대부분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라 반이 바뀐다고 한들 거리감을 느낀다거나하는건 그의 입장에선 힘들었다. 거기에 다른 사람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것도 그의 장점이었으니 더더욱.
" 그러고 싶지만 우리 부모님은 엄하시니까. "
라곤 말해도 실제론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일반적인 학생처럼 지내고 있을 뿐이었다. 수업을 듣지 않고 자리에 없다면 관심이 끌릴테니까. 유파에서는 그 어떤 경우라도 주목 받으면 안된다고 그를 가르쳤기에 그도 많은 관심은 부담스러웠다.
" 하지만 조금 피곤하니 아무것도 안하고 자고싶긴하네. "
한테이가 조금 가깝게 다가와있는듯하자 강민은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살짝 기대려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듯 작게 하품을 하면서.
시기상의 문제일거라고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접어두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때의 일에 대해서 그가 받은 관심은 그와는 거리가 있는 곳에서 이루어진거니까요. 구태여 더 나아갈 필요는 없다는 것 처럼 말끝을 흐린 그녀는 자신의 허벅지 위에 누운 그와 눈을 맞추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부끄러움에 얼굴이 터져버릴 것 같았지만 그녀는 꿋꿋하게 아무렇지 않은듯 입술을 깨물고 있었습니다.
"잠정도는 편하게 자게 하고싶다는 거야. 그래도 음, 대담해졌네."
서로의 말이 줄어들고 운동장에서 들리는 다른 학생들의 소리와 묘한 바람소리만이 흘러갈때쯤 그녀는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처음엔 당황하는 그의 얼굴을 보고 즐길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실제로 해버린다면 어떻게 할지에 대한 생각은 해두지 않았으니까요. 우선은 이 자리를 벗어날 화제전환이 필요했습니다.
"그러고보니 꽃놀이라면 기숙사 뒤쪽에도 벚꽃이 하나 있었지. 확실히 거기라면 아는 사람도 적고 편하게 놀 수 있을거야."
물론 그것이 쉬운일은 아니었습니다. 오랜만에 돌아가는 연애뇌는 오버클럭해서 말을 제멋대로 해석하기 마련이니까요. 거절당하는 것을 전제로 했던일이 현실로 일어난다던가 하는 것. 그녀는 경험하지 못한 감각이었습니다.
어릴적에는 여느 아이들이 그런것처럼 강민 또한 관심을 끌려고 노력했던적이 있다. 그렇기에 한테이가 말하는 예전이라는 것은 어릴적에 둘이서 만났을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허벅지에 누운채로 한테이를 응시하던 강민은 잠시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 이 상태로 잠들면 네가 불편할테니까. 그래도 조금은 이러고 있어도 괜찮지? "
대담해졌을까? 아무렇지도 않다는듯한 그의 표정은 이런 상황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누워있는게 조금은 신경 쓰는 것 같았지만.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그녀가 먼저 꺼낸 화두에 강민은 눈을 뜨고서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 꽃놀이를 즐기기엔 좀 작은게 아닌가 싶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려나. "
막 수많은 사람들이 어울려서 놀 것은 아니니까,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봄바람은 시원하게 불어와서 그의 앞머리를 흐트려놓는다. 강민은 바람이 좋은지 앞머리 정돈은 할 생각도 없이 가만히 누워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고마워. "
앞머리를 대충 훑어내리면서 얘기한 그는 여기에 처음 앉았을때처럼 벤치에 등을 깊게 묻으며 앉았다. 어쩐지 작년, 재작년보다 훨씬 여유를 부리는 느낌이다.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아직 머리도 제대로 크지 않은 아이들이 누군가를 쫓아다니는 데에는 이골이 날 정도였던 경호원들을 따돌리고 거의 하루 종일을 도망쳤던 건 괴물을 연구하던 사람들의 눈에는 흥미롭게 보일 수 밖에 없었겠지요. 그녀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깊은 숨을 들이켰습니다. 조금은 진정이 된 걸까요 평소와 비슷한 모습이 된 그녀는 신경 안써도 된다는 것처럼 고개를 저었습니다.
“해주고 싶어서 하는 건데 뭘.”
몸을 일으키는 그를 따라 그녀는 허벅지 위에 펼쳐 둔 손수건을 접어 넣었습니다.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행위였지만 그녀는 내심 오늘은 조금 많이 나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입가로 새어나오는 미소를 숨길 수 없었습니다. 이전이었다면 이런 건 생각도 안 했을 텐데. 소녀는 아직도 그와의 첫만남이 퍽 운명적인 모양입니다.
“공원도 나쁘지는 않지만 거기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그녀는 우리끼리 하는 건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며 바보같이 웃었습니다. 어릴 때의 기억이 아직 온전히 남아버려서, 그녀는 아직까지도 사람이 많은 곳을 꺼려했습니다. 소란에 얽히는 것이 귀찮았고 거기에 따라오는 여러 이야기들이 귀찮았습니다.
“우리 사이에 뭘.”
답답할 정도로 짧은 단어였습니다. 그녀가 아는 그는 조금 변해 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싫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었습니다. 사람으로서의 삶은 여전히 서투르고, 아는 사이도 그다지 없는 만큼 세월이 흐르면서 바뀌어가는 것이 애틋하게 느껴지는 듯 합니다.
“으이이이이잇.”
찌뿌둥해진 몸을 풀어내니 그녀의 입에서는 이상한 목소리가 새어나왔습니다. 오전 중 계속 돌바닥 위에서 자고 있던 거니 어쩌면 몸이 뻐끈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얼굴에서 힘이 빠졌네. 보기 좋아.”
그녀는 그를 향해서 고개를 돌리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습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이곳에서 만나기 전에 그녀 안에 새겨진 그에 대한 인상은 어딘가 조급해 보였으니까요. 아마 당시의 상황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지금이 훨씬 괜찮아 보이는 건 사실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관심을 끌지 않으며, 동시에 영향을 끼친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해야할까, 사실 애덤 스미스가 유파의 존재를 어렴풋이 깨달았다던 사실은 세상 사람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가 어떤 집단에 속해있는지 한테이도 알지 못하기에 그는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할 뿐이다.
" 그런 곳도 나름 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테이 말대로 사람이 너무 많은 곳은 좀 그러니까. "
사실 한테이도 그렇고 강민 또한 외모는 어디에 가던 상당히 주목 받을만한 것이라 유파의 가르침을 위해선 사람들이 많은 곳은 당연히 피해야했다. 그래서 이따금 열리는 축제도 아주 가끔씩 가는 신세였다.
" 덕분에 편하게 쉬었으니까. "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푸는 한테이를 보며 그는 재밌는지 웃음소리를 내어버린다. 그러고선 자신도 가볍게 몸을 돌려가며 몸을 풀어주는데, 곳곳에서 우드득하는 소리가 난다. 아무리 그래도 벤치에 그렇게 누워있는건 좋지 않으니까 말이다.
" 오후에도 옥상에 있을꺼야? 오후엔 교실에 들어가는게 어때? "
오전 내내 그녀가 여기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에 그는 오후엔 교실로 그녀를 데려가려고 했다. 물론 강제상은 없지만 그래도 여기보단 교실이 더 낫지 않은가하는게 그의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