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의 첫날은 어제보다 추웠다. 분명 새학기에 긴장하는 학생들의 심상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겠지. 이세계의 기억은 주술적인 사고를 미츠키에게 주입시켰으며 그것을 의식하지는 못했다. 20년이면 사람이 바뀔만한 시간이 아니던가. 새학기. 벌써 2학년이기도 하고, 미츠키 입장에서 평화로운 일상이 벌써 1년 넘게 지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런 관계로, 가볍게 춘추복에 가디건만 입고 왔음에도 그닥 추위를 느끼지는 못했다. 에초에 더위와 추위 쯤은 인간이 버티지 못하는 수준마저도 쾌적하게 지낼수 있으니 더더욱 그렇지.
누구보다 빠르게 교실에 올 생각이었지만 선객이 있던 모양이다. 유강민. 히가시요츠야나기 미츠키가 좋아하는 남자. 우연일지 운명일지 모르겠을 상황에 작게 미소를 짓고는 그의 자리로 살랑살랑 걸어가 앞자리에 앉아 말을 걸었다.
저번주까지 기숙사와 학교 사이를 잇는 이 길은 한산하기 그지 없어서 피곤한 눈을 반쯤 감은채 부활동을 하러가는 몇몇만 보였지만 오늘은 모두 같은 교복을 입은채 학교로 향하는 학생들의 인파로 북적이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 섞여서 피곤해보이는 표정을 지은채 걸어가고 있는 강민 또한 새학기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겠다.
평소엔 기숙사에서 살지만 방학을 맞아서 집에서 보내던 그에게 간만에 아침 등교란 조금은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몸에 들인 습관이란 무서운 법이라 정해진 기상시간에 정확하게 일어난 강민이 학교에 도착했을땐 아직까지 교실은 한산하기 그지 없었다.
" 좋은 아침이야 미츠키. "
히가시요츠야나기 미츠키, 파란색의 눈동자가 인상적인 여학생으로 축구부 활동이 끝나고 창고 정리를 도와주면서 친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 사이에 작은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그 이후에 좀 더 친해진 느낌이라 강민은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처음 맞이하는 새학기도 아니고 설레지는 않아. 근데 조금 피곤하네. "
어릴때부터 아침 잠이 많아서 깨어나는걸 힘들어했고 그걸 고치는 것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지금 와서는 늦게 일어난다는건 그의 입장에서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아침의 피곤함만큼은 여전히 유효했다.
자신과 이야기하던 중에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보고 강민은 마주 웃으며 물었다. 그러다 미츠키가 목캔디를 건네주자 고맙다며 인사하고선 입에 털어넣는다. 시원한 느낌이 목을 타고 코까지 올라와 졸음을 잠시 내쫓아주는 느낌이다.
" 원래 아침에 약해서 말이야. 못일어나는건 아니지만 일어날때마다 힘들긴 하지. "
체질이라 그런가 습관을 바꾸어도 남아있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본인이 적응해야만 했다. 그래서 시간이 좀 더 지난다면 수월하게 적응할 수 있을꺼라고 믿고 있는 그였다.
" 나도 미츠키 말고는 친한 사람 별로 없으니까. 친한 사람들이 같은 반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해. "
사실 학교 생활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라서 강민에게 친한 친구를 꼽아보라고 해봤자 한 손으로 꼽을 수준이었다. 물론 두루두루 아는 사람은 많지만 정말 친하다고 느끼는 친구들은 생각보다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도 한편으론 미츠키와 같은 반이라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그녀의 말에 강민도 창 밖을 내다본다. 생각해보니 정말 벚꽃이 피는 시기라 이번에도 해리가 벚꽃 구경이라면서 자신을 끌고갈거란 생각에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온다. 아직도 자신을 한국에서 유학온 학생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더더욱 미소가 짙어진다.
" 일어나는건 제때 일어나니까 지각은 안하지. "
유파의 가르침은 엄격해서 그런 사소한 것들도 엄중히 질책받곤 했기에 그가 늦잠을 자는 일이라곤 정말 몸이 아프거나, 혹은 기절했거나(...) 둘 중 하나의 일이다. 자신의 책상에 엎드리는 미츠키를 바라보면서 그는 말했다.
" 해리도 같은 반이니까 ... 친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일단 두명뿐이네. "
별거 아닌 말인데 기쁘다니, 행복의 역치가 낮은게 아닐까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입에 있던 목캔디를 씹어삼켰다. 사탕을 먹다보면 어느새 씹어서 넘기는게 그의 습관이었다. 그리고 졸음을 내쫓아주던 목캔디가 사라지자 한걸음 물러나있던 졸음은 다시 원래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서서히 찾아가고 있었다.
" 역시 아침은 별로야 ... 수업이 오후부터 시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
이루어질리 없는 쓸데없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면서 강민은 입을 가리고 크게 하품했다. 평소라면 이런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텐데, 오늘은 유독 더 피곤해보이는 모습이었다.
어릴때는 정말로 부모님이라고 생각했지만 철이 들때쯤 자신의 친부모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그였다. 그래도 자신을 키워준대다 아예 정을 붙이지 않고 산 것도 아니기에 지금에서의 관계는 조금 애매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지어지는 쓴웃음을 금세 어그러뜨리고 자연스런 미소로 바꾼 그는 찔러오는 검지가 코에 닿자 그것을 잡으며 얘기했다.
" 그런 것보단 그냥 아침에 잠을 좀 더 자고싶은거라니까. "
이걸 입에 넣는척해? 하며 고민하다가 얌전히 손을 내려놓고선 미츠키가 엎드려있던 책상에 반대로 자신이 엎드려버린다. 은은한 온기가 남아있어 좀 더 잠이 쏟아지는 느낌이다. 하품과도 비슷한 한숨이 작게 내쉬어지고 조금씩 눈이 감기려는걸 억지로 막아본다.
" 이렇게 무방비한 삶은 마지막이니까 ... "
잠과 현실 그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으면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입 밖으로 내뱉는 사람도 있다. 공교롭게도 강민은 자신의 생각을 웅얼거리듯이 얘기했지만, 그것을 얘기했다는 자각이 없이 다시 한번 하품만 크게 할 뿐이었다.
히가시요츠야나기 미츠키는 유강민의 입가에 드리운 쓴웃음을 빠르게 읽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은 저마다 다른 짐이 있는 법이니 쉽게 짐작하려 들지는 않았다.
"주말에 푹 자둬, 주말에."
손가락이 갑자기 잡힌 것에는 놀랐다. 하지만 홍조를 띄거나 엣 하고 귀여운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담담하게 오늘 기숙사에 들어가 생각할 거리를 늘렸을 뿐이었다. 어떤게 조금 더 흔들렸냐고 하면 엎드렸던 책상에 바로 상체를 묻은 편이지만. 마지막으로 빨았던 가디건의 섬유유연제가 무슨 향이었더라. 보통 사람은 이 짧은 순간에 남은 냄새를 맡지는 못할테니 무의미한 고민이었나. 책상 밑으로 유강민이 잡았던 검지를 다른 손으로 감아쥐며 시덥지않은 소리를 했다.
"....?"
방금 말은 무슨 의미냐고 당장 묻고 싶었지만... 자는 사람을 깨워서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것도 아니고, 그럴만한 시간도 아니니까 미츠키는 이 이야기 또한 나중으로 미루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오는 시간이다.
"짧은 시간이겠지만 잘 자 유우군."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미츠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자는 사람을 향한 배려로 그 과정에서는 의자 끄는 소리도, 걷는 발소리도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