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이 들어가긴 했다. 큰 충격은 주지 못한 것 같지만 적어도 공중에서 내려오게는 만들었기에. 너 역시 바닥에 착지하며 체인을 회수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갑자기 사방에서 찌르는 듯한 감각... 이곳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느낀 강렬한 살기에 네 의지와는 상관없이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허세 같은 게 아니다, 다음 공격에 담긴 살기를 생각하면 여기서 그대로 전투불능이 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감각이었다.
"안 돼, 이건 막을 수 없어, 피해!!"
예의같은 걸 차릴 겨를은 없었다. 그리고 아마 다들 어느 정도는 깨닫고 있었을 터다. 분하지만 저건 허세가 아니라는 걸. 다음 순간 한 명도 살려보낼 수 없다는 각오와 함께, 받아낼 각오를 하라는 말소리... 그리고 강렬한 냉기와 함께 퍼지는 짙은 안개, 시야를 가렸다. 사람이 의지하는 가장 중요한 감각기관은 무엇인가? 눈, 시각에서 숨어버린 글라키에스는 유려한 몸놀림으로 안개를 휘저으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걸 피한다는 건 불가능해. 피할 수 있었다면 그건 거의... 운이라고 볼 수밖에. 그리고 오늘의 너는 전혀 운이 없었다.
"....아?"
분명 목에 검이 닿았어야 하건만. 네 앞에서 피가 튀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푸른 머리카락과 훤칠한 키, 정도려나. 이건 네 피도 아니었고, 네가 느끼게 될 통증도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네 앞에 서서 검과 네 사이를 가로막은 사람의 피였으리라. 누가 봐도 심한 부상을 입은 남성을 보며 너는
"에봇?"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 그가 대답해줄지는 모르겠다, 이미 그는 얼어붙고 있었으니까. 안타깝게도 너에게는 그 얼음을 녹일 힘 같은 건 없었다. 다 알아챘으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뻔해 대신 부상을 입은 그의 모습을 보는 네 호흡이 가빠졌다. 잠깐만. 왜 지금 당신이 내 앞에 있는 거죠? 불행인지 다행인지 숨은 단번에 끊어지지 않았다. 심각한 피해를 입긴 했지만 어떻게든 살아돌아간다면 다시 멀쩡히 돌아다닐 수도 있지 않을까? 게속해서 늘어지는 시간 속에서 네 생각은 엄청난 속도로 질주했다. 다음에 움직인 건 아마 생각하고 행동으로 드러나는 일반적인 순서를 거치지 않았으리라. 네 곁을 스쳐 지나가려고 하는 글라키에스에게 휘두른 체인은 그 다리를 휘감아 무장을 비틀어 벗겨내려는 듯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네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는 헬멧 너머를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아무도 모를 테지만.
공격을 회피한 이들도 분명히 있었다. 츄이는 회피 후, 글라키에스의 목 부분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이내 글라키에스의 움직임을 잠시 정지시킬 수 있었고 쥬데카의 체인이 다리를 붙잡는데 성공했고 그 사이에 마리는 스케이트 파츠를 향해 전격을 날렸다. 그 공격은 제대로 명중했고 글라키에스의 빠른 속도가 드디어 멈췄다. 이내 선우가 폭탄을 집어던졌고 움직임이 느려진 글라키에스에게 제대로 명중했다. 이내 연기가 사라지자 글라키에스의 이마에선 피가 조금 흐르고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그녀에게서 보이는 강한 기운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와 동시였다. 멜피의 스페셜스킬이 발동했다. 그림자로 만들어진 군세는 여왕. 즉 멜피의 명령에 따라 글라키에스의 머리를 노렸고 이내 강한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이를 꽉 악물고 글라키에스는 뒤로 물러섰고 스페셜스킬인만큼 어느 정도의 데미지를 입었는지 피를 입 밖으로 뱉어냈다. 그와 동시에 레이먼드가 스페셜 스킬을 발동했다. 빠른 속도로 질주하던 레이먼드는 그대로 글라키에스를 킥으로 때리는데 성공했다. 그 때문에 글라키에스가 한쪽 무릎을 꿇는 듯 했으나 다시 일어섰다. 이내 그녀는 숨을 약하게 내뱉으면서 피식 웃었다.
"이번 것은 조금 아프네. 확실히 보검의 스페셜 스킬. 하지만 그 외의 공격은 뭐야? ...그래서 어디 뭐라도 하겠어? 너희들도 스페셜 스킬이라도 써보지 그래? 혹시 알아? 모두 사용하면 먹힐지 말이야."
확실히 데미지는 들어갔으나 그럼에도 글라키에스의 여력은 충분해보였다. 이내 그녀는 기합을 넣었다. 부서졌던 무장이 원상복구 되었다. 그것은 필시 보검의 무장 복구 기능이었다. 모두가 다 가지고 있는 바로 그 기능. 물론 어디까지나 복구되는 것은 무장뿐이긴 했지만. 아무튼 여전히 여유롭다는 듯, 글라키에스는 모두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것은 공격을 방어해줌으로서 얼굴을 빼면 얼어붙어있는 유루와 레레시아 역시 포함되어있었다.
"버스트는 처음 봤지? ...이건 말이야. 이 보검을 사용하는 자의 세븐스를 한단계 더욱 증폭시켜주는 힘이야. 계속 쓸 수는 없지만 일시적으로 보검 사용자의 전투 능력을 일시적으로 더욱 올려주지. 그리고 나는...지금 또 버스트를 쓸 수 있어. ...과연 사용하고 나면 너희들 중 몇이나 설 수 있을까? ...운 좋게 피한 패배자 제군들은 이번에도 피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너희들 중 모두가 생존할 수 있긴 할까? 다음 공격이 날아가면?"
"말했지? 한 명도 살아나갈 수 없다고 말이야. 그래. 난 확실히 최강은 아니야. ...그럼 그 최강이 아닌 이에게..목숨을 잃을지도 모르고 밀리고 있는 너희들은 뭘까? 벌레 나부랭이야? 그건 그렇고 아까부터 허세부리는 너. ...정말 전형적이라서 재미가 없어. 그렇게 말을 하는 이들은 수도 없이 봤어. 그리고 그 최후도 비슷했지. ...말은 여기까지 할까. 너희들 따위에게 스페셜 스킬을 쓰는 것은 너무 아까우니 사용하진 않겠지만 그걸로 충분해."
이내 그녀의 검이 모두를 향했다. 허나 그 순간이었다.
-왜 그렇게 싸우려고 하는 거야? -무섭지 않아? 힘의 차이는 확연하게 다른데 어째서 싸우려고 하는거야? -이번 싸움은 이기지 못해. 그건 스스로도 알 수 있을거야. -...그런데 어째서 이 싸움을, 세계와 싸움을 하려는거야? 이런 이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해? -너는... 왜 싸워?
그 목소리가 나는 곳은 틀림없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보검에서였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들리는 목소리. 그건 여성의 목소리였다.
머리가 아파온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없는 공세. 그럼에도 상대를 쓰러트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번 목적을 잊은것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상대를 쓰러트리지 않고 도망갈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들을 포기하는것도 문제지만 저 녀석한테 등을 보이고 무사할거란 시뮬레이션이 돌아가지 않는다.
"아직 잔뜩 남았거든 내건!!"
군세가 2/3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러나 내 스킬은 단발성이 아니다. 거기다 이쪽은 부상자가 둘, 다시 한번 더 공격당하면 다른 이들이 막아주는 방법밖에 없고 그것은 악순환이 된다. 부상자가 늘어날수록 승산은 그야말로 최악으로 떨어지는데..
"일점..!!"
이렇게 된 이상 선수라도 쳐야.. 라고 생각하려는 찰나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환청? 은 아닌듯했고. 목소리를 따라가자 놀랍게도 들고있는 보검이라는것을 알 수 있었다.
"............."
왜 싸우냐........ 그녀에게 있어서 그것은 상당히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야 그녀는 싸우는 목적이 딱히 정해져있지 않거든요. 에델바이스에 있는것도 혼자서는 외롭다는 이유일 뿐이고, 그녀는 복수를 하고싶은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빠른 속도를 멈추게 했을 뿐 약점 까지는 아니었던 걸까. 사실 약점이라는 것이 따로 있을까 싶기는 했지만서도. 같은 팀원끼리 꽤나 공세를 퍼부었다고 생각했음에도 글라키에스를 무찌를 정도의 힘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마리는 이 앞의 적을 무찌를 생각을 끊임없이 이어서 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글라키에스의 말은 마리에게 전혀 닿지 않는다. 생각하고 또 생각할 뿐이다.
그러던 중 마리에게 닿는 목소리가 있었다. 왜 싸우냐는 그 목소리. 마리는 그것이 자신의 보검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눈이 휘둥그래진 채 마리는 저에게 힘을 주는 그 존재에 귀를 기울였다.
왜 싸우냐는 그 말.
“이길 수 있어. 끝까지 부딪히고 부딪히는 건 죽을 지언정 지는 건 아니니까. 나는 내 신념이 옳다고 생각하니까. 그 신념을 위해 이길 때까지 부딪히는 걸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
마리는 작은 미소를 띄웠다.
“세븐스와 비세븐스 구분 없이 서로 함께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그런 세계를 만드는 것이 마리의 꿈이고, 목표이고, 신념이었다. 절대 굽힐 수 없는, 절대 설득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유품이었다.
계속되는 화기의 반동과 폭발로 전신이 웅웅거렸다. 동료들 중 일부는 얼어붙었고 피하고 도망치느라 전신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아직까지 그녀의 공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피하는 것에 급급했다.
"넌 아직 내 머리털 하나 건드리지 못했거든?"
보검을 사용하는 자의 세븐스를 증폭시켜주는 버스트, 글라키에스는 한번 더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 선언했다. 그녀 말이 맞다. 지금까진 어떻게든 피했다 하더라도 더 이상 공격이 나아든다면 이길 수 있을 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숨을 쉴때마다 얼음조각들이 기도와 폐에 박히는 것만 같았다. 놈의 공격을 피하느라 숨이 거칠어져 고통은 더욱 극심했다.
"뭐야? 자기 객관화가 아주 잘되는 친구였잖아? 그럼 네 최후도 알고 있겠네?"
이제 산탄총의 총알도 얼마 남지 않고 폭탄도 거의 다 떨어졌다. 총알과 폭탄이 다 떨어지면 남은 것은 화살이나 투석같은 옛 무기일 뿐이다. 서열 3위는 역시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넌 얼굴은 예쁜데 성격이 너무 전형적이어서 재미가 없어. 미안해 자기, 우린 여기까진가봐"
다시한번 글라키에스의 목을 향해 폭탄을 던지며 산탄총을 난사했다.
-왜 그렇게 싸우려고 하는 거야? [복수, 그것뿐이야]
-무섭지 않아? 힘의 차이는 확연하게 다른데 어째서 싸우려고 하는거야? [말했잖아. 복수라고.]
-이번 싸움은 이기지 못해. 그건 스스로도 알 수 있을거야. [난 지금까지 한번도 이길 수 있는 싸움을 한 적이 없어]
-...그런데 어째서 이 싸움을, 세계와 싸움을 하려는거야? 이런 이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해? [왜냐고? 이 빌어먹을 세계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모두 파괴했으니까. 싸워서 이기느냐가 아니야. 복수하지 않으면 이 망할 세상에 한방 먹이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 싸우는 거야.]
차갑다. 그녀의 몸은 바닥을 짚고 엎어진 그대로 얼어붙었다. 방금 공격은 위력 뿐만 아니라 맞은 상대의 움직임을 봉할 수도 있었나보다.
아아. 이건, 억지로 움직이면 어딘가 부서지거나 부러질 것 같다. 그렇다면 이대로 다시 공격을 맞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머릿속으로 와일드 팽의 사진이 떠오른다. 눈 앞에서 산산히 부서진 사람이 떠오른다. 겨우 눈을 깜빡이고 숨을 쉬는게 고작인 상태로는 다음을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녀도 그렇게 되는 걸까. 그렇게 부서져서, 돌아가지 못 하는.
흐릿해지는 시야가 어떤 목소리로 인해 확 밝아졌다.
"뭐...?"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울린다. 뭐지. 환청? 아니. 그녀를 두르고 있는 모조 보검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소리다. 이길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왜 싸우느냐고 물어온다. 지금 당장을 나아가서 세계와의 무모한 싸움을 왜 하려느냐고 묻는다. 그녀는 눈을 뜬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왜. 왜냐고? 왜?
"..그야 무섭지. 단체로 덤벼도 저 한 명을 못 이겨. 이거 어떻게 무섭지 않겠어. 그렇지만,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어. 물러서면 안 되는 목표가 있어."
추워서 턱이 떨리지만 턱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내뱉는다.
"세상에 이기기 위해서가 아냐. 잃어버리고 빼앗긴 것을 되찾아, 내일을, 미래를 살기 위해서 싸우는 거야. 나는 살아야 하고, 살고 싶으니까!"
그러기 위한 힘이 너무나도 절실했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나 무력하고 가혹해, 다시금 깨문 입술에서 피가 방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