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연습했던 전기 공격이 통하는 것 같았다. 머리 무장이 벗겨졌으나 글라키에스는 여유로웠다. 약점… 같은 건 없을까? 생각하는 동시에 스케이트를 타고 질주하는 글라키에스가 공격을 시도했다. 이도류로 날아오는 검격을 가까스로 피하며 마리는 머리카락 끝이 조금 베였다. 잘못하면 목이 날아갈 검격이었다.
마리는 다시금 글라키에스를 향해 전격을 날리기 위해 준비했다. 여러 공격 방법이 있었으나 직접적인 물리력을 가하는 것은 얼어버림으로 인해 효과가 떨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마리의 눈이 글라키에스를 향했다. 그녀가 스케이트를 타듯 움직이는 발, 그 발을 노리며 전격을 날렸다. 발을 다쳐 못움직이게된다면 저 빠른 공격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승리자와 패배자의 차이?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 아닌가. 이기는 자가 모든 것을 얻고 패배자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지금 세븐스들의 처지를 보기만 해도 알 만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승리자는 소위 예쁨받는 세븐스만 뜻하는 것일 테다.
그는 육감도, 아드레날린 세븐스도 없지만, 본적도 없는 세븐스의 기운이 느껴지면 에피네피렌이 더욱이 분출되는 것이 느껴진다. 심장 소리가 가히 경쾌해저가며 그녀의 춤과 같은 검격에 박자를 맞추는듯 했다. 내장이 베일 뻔한 검격은 옷에 묻었던 물감으로 자신에게 미는 힘을 행사해, 인위적으로 상반신이 겨우 칼의 궤도를 빗겨간다. 때문에 벌어진 옆구리에서 피가 나오는 것이 느껴진다. 당장 느껴지는 고통은 없으니, 긴장이 고조된다.
그는 이타적이진 않다. 그저 싸움을 이기려면 얼음이나 지금 이 상황에 특별한 효과도 없는 듯한 자신의 능력보다 더 잘 싸워줄수 있는 사람이 정신을 붙들 정도로만 서 있는게 났다고 생각했다. 지금 심박수를 보아하니, 맞아도 당장은 통증을 못 느낄것 같아 조금 위험한가 싶어도 그의 목표는 오직 승리 뿐.
제일 가까이 있던 누군가가 검격에 맞기 직전, 뛰어들어서 대신 맞아준다. 오른손에 페인트가 응고되던걸 보면 아마 가드를 하려다가 한 박자 늦은 것일 테다.
공격이 들어가긴 했다. 큰 충격은 주지 못한 것 같지만 적어도 공중에서 내려오게는 만들었기에. 너 역시 바닥에 착지하며 체인을 회수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갑자기 사방에서 찌르는 듯한 감각... 이곳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느낀 강렬한 살기에 네 의지와는 상관없이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허세 같은 게 아니다, 다음 공격에 담긴 살기를 생각하면 여기서 그대로 전투불능이 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감각이었다.
"안 돼, 이건 막을 수 없어, 피해!!"
예의같은 걸 차릴 겨를은 없었다. 그리고 아마 다들 어느 정도는 깨닫고 있었을 터다. 분하지만 저건 허세가 아니라는 걸. 다음 순간 한 명도 살려보낼 수 없다는 각오와 함께, 받아낼 각오를 하라는 말소리... 그리고 강렬한 냉기와 함께 퍼지는 짙은 안개, 시야를 가렸다. 사람이 의지하는 가장 중요한 감각기관은 무엇인가? 눈, 시각에서 숨어버린 글라키에스는 유려한 몸놀림으로 안개를 휘저으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걸 피한다는 건 불가능해. 피할 수 있었다면 그건 거의... 운이라고 볼 수밖에. 그리고 오늘의 너는 전혀 운이 없었다.
"흐읍...!"
냉기가 순식간에 코앞까지 쇄도했다. 적어도 너는 분명히 그녀가 네 앞까지 다가오는 것도, 검을 휘두르는 것도, 그 검이 어디를 노리는지도 알 수 있었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모든 걸 해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대로 검은 네 목을 노렸다. 극에 치달은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움직였던 때문일까, 너는 검을 손으로 막아내려고 하고 있었다. 당연히 불가능한 일, 무장 덕에 팔이 통째로 베이거나, 그대로 몸이 동강나는 것은 막았지만 아마 팔을 쓰려면 기절할 각오를 해야만 할 터였다. 게다가...
쉴 틈도 없이 공격을 몰아치는 글라키에스의 기세에 이미 부상을 입은 그녀가 바로 대응하기는 어려웠다. 그럴 바에는 이후를 도모하는게 낫지 않을까. 이런 소모전은 길어질수록 이쪽이 불리하다. 그렇다면. 그럴 바에는.
그녀는 너덜하던 망토에 독액을 들이부어 크게 펼쳤다. 이걸로 그녀를 막는다면 부상을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곳에 쓰기로 한다. 크게 펄럭인 망토는 그녀가 아니라 위기에 빠진 대원-승우에게 뻗쳤다. 그녀의 무장으로 공격을 대신 받아내느라 그나마 성했던 몸뚱이마저 베이고 찢기게 되었지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다. 그 때에 비하면 덜 아프니까. 그리고 공격을 막아주는 김에 승우에게 말을 전한다.
"야, 큭. 잘 들어. 이따가 후퇴각이 보이면 내가 스킬을 쓸 테니, 거기에 네 스킬을 쓰던지 세븐스를 최대치로 끌어올려서 폭발을 일으켜. 잘 터지는 독으로 만들테니까. 제대로 해."
헛짓거리하면 끝나고 걷어차버린다! 이를 악문 말이 끝나면 주저앉아서 격하게 기침이라도 했겠지. 피를 줄줄 흘리면서.
주위의 모든 게 얼어붙는듯한 냉기에, 눈으로도 채 쫓기 힘들 정도의 검무. 이건 확실히 위험하다. 하지만 이대로 어떤 피해도 주지 못하고, 발버둥 없이 끝나기는... 조금 그렇겠지.
자세를 잡자, 보검무장의 장갑 곳곳에서 엔진이라도 가동하는 듯한 소음이 울려퍼진다. 장갑 여기저기의 발광체도 붉은 빛으로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폭발할것만 같이 보였다.
"풀 스로틀로 가 볼까."
터질것만 같이 소음은 높아지고, 신체의 혈관이 불거지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일 지경이다. 금방이라도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은 불안정함의 한가운데에서, 레이먼드의 몸은 혹한의 추위 한가운데 뜨거운 증기만을 남기고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곧, 지면의 얼음이 깨져나가며 뭔가가 글라키에스의 뒤를 쫓는다.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우아한 모습과는 대비되는, 가로막는 모든 것을 깨트리며 달리는 우악스러운 질주. 결국 그 속도로 인해 잠깐 글라키에스의 옆에 멈춘 것 처럼 되었을 때. 한 마디를 남기고서 추월하기 시작한다.
"같이 한 바탕 달려 보자고."
이를 악문다. 실핏줄이 터진 눈은 충혈되어 붉다. 금방이라도 심장이, 근육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 파열될것만 같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달리면 달릴수록 망가져가지만 그래서 더욱 멈출 수가 없다. 허용치를 넘길것만 같은 아드레날린이 뇌를 잠식한다. 속도가 높아지고 위험도 심해진다. 그래서 멈추지 못한다.
- 붙잡는 모든 것을 떨쳐내고 - 스스로를 불태울 위험에 기꺼이 뛰어들어 - 이름조차 사라져 찰나에 남길 것은 오직
- 한 줄기 붉은 선혈 뿐이니 -
스페셜 스킬을 사용하자,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저 붉은 한 줄기 선으로만 보일 속도로 바닥, 벽, 심지어는 천장조차 가리지 않고 브레이크 없이 폭주한다. 빠르게 질주하며 칼을 휘두르는 글라키에스의 뒤를 따르다가, 추월하여 반대편 벽에 다시 발을 딛고 점프한다.
이후, 몇 번 더 붉은 한 줄기 잔상만을 벽에 튕긴 뒤 천장에서부터 대각선으로, 글라키에스의 가슴팍을 향해 킥을 하며 떨어져내린다.
"젠장. 이래서 안 쓰려고 했는데."
착지하고 각부 장갑판이 열리고 급히 냉각을 시작하자, 손을 들어 다시금 흐르는 피를 닦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