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의 모든 게 얼어붙는듯한 냉기에, 눈으로도 채 쫓기 힘들 정도의 검무. 이건 확실히 위험하다. 하지만 이대로 어떤 피해도 주지 못하고, 발버둥 없이 끝나기는... 조금 그렇겠지.
자세를 잡자, 보검무장의 장갑 곳곳에서 엔진이라도 가동하는 듯한 소음이 울려퍼진다. 장갑 여기저기의 발광체도 붉은 빛으로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폭발할것만 같이 보였다.
"풀 스로틀로 가 볼까."
터질것만 같이 소음은 높아지고, 신체의 혈관이 불거지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일 지경이다. 금방이라도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은 불안정함의 한가운데에서, 레이먼드의 몸은 혹한의 추위 한가운데 뜨거운 증기만을 남기고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곧, 지면의 얼음이 깨져나가며 뭔가가 글라키에스의 뒤를 쫓는다.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우아한 모습과는 대비되는, 가로막는 모든 것을 깨트리며 달리는 우악스러운 질주. 결국 그 속도로 인해 잠깐 글라키에스의 옆에 멈춘 것 처럼 되었을 때. 한 마디를 남기고서 추월하기 시작한다.
"같이 한 바탕 달려 보자고."
이를 악문다. 실핏줄이 터진 눈은 충혈되어 붉다. 금방이라도 심장이, 근육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 파열될것만 같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달리면 달릴수록 망가져가지만 그래서 더욱 멈출 수가 없다. 허용치를 넘길것만 같은 아드레날린이 뇌를 잠식한다. 속도가 높아지고 위험도 심해진다. 그래서 멈추지 못한다.
- 붙잡는 모든 것을 떨쳐내고 - 스스로를 불태울 위험에 기꺼이 뛰어들어 - 이름조차 사라져 찰나에 남길 것은 오직
- 한 줄기 붉은 선혈 뿐이니 -
스페셜 스킬을 사용하자,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저 붉은 한 줄기 선으로만 보일 속도로 바닥, 벽, 심지어는 천장조차 가리지 않고 브레이크 없이 폭주한다. 빠르게 질주하며 칼을 휘두르는 글라키에스의 뒤를 따르다가, 추월하여 반대편 벽에 다시 발을 딛고 점프한다.
이후, 몇 번 더 붉은 한 줄기 잔상만을 벽에 튕긴 뒤 천장에서부터 대각선으로, 글라키에스의 가슴팍을 향해 킥을 하며 떨어져내린다.
"젠장. 이래서 안 쓰려고 했는데."
착지하고 각부 장갑판이 열리고 급히 냉각을 시작하자, 손을 들어 다시금 흐르는 피를 닦아낸다.
공격이 들어가긴 했다. 큰 충격은 주지 못한 것 같지만 적어도 공중에서 내려오게는 만들었기에. 너 역시 바닥에 착지하며 체인을 회수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갑자기 사방에서 찌르는 듯한 감각... 이곳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느낀 강렬한 살기에 네 의지와는 상관없이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허세 같은 게 아니다, 다음 공격에 담긴 살기를 생각하면 여기서 그대로 전투불능이 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감각이었다.
"안 돼, 이건 막을 수 없어, 피해!!"
예의같은 걸 차릴 겨를은 없었다. 그리고 아마 다들 어느 정도는 깨닫고 있었을 터다. 분하지만 저건 허세가 아니라는 걸. 다음 순간 한 명도 살려보낼 수 없다는 각오와 함께, 받아낼 각오를 하라는 말소리... 그리고 강렬한 냉기와 함께 퍼지는 짙은 안개, 시야를 가렸다. 사람이 의지하는 가장 중요한 감각기관은 무엇인가? 눈, 시각에서 숨어버린 글라키에스는 유려한 몸놀림으로 안개를 휘저으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걸 피한다는 건 불가능해. 피할 수 있었다면 그건 거의... 운이라고 볼 수밖에. 그리고 오늘의 너는 전혀 운이 없었다.
"....아?"
분명 목에 검이 닿았어야 하건만. 네 앞에서 피가 튀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푸른 머리카락과 훤칠한 키, 정도려나. 이건 네 피도 아니었고, 네가 느끼게 될 통증도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네 앞에 서서 검과 네 사이를 가로막은 사람의 피였으리라. 누가 봐도 심한 부상을 입은 남성을 보며 너는
"에봇?"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 그가 대답해줄지는 모르겠다, 이미 그는 얼어붙고 있었으니까. 안타깝게도 너에게는 그 얼음을 녹일 힘 같은 건 없었다. 다 알아챘으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뻔해 대신 부상을 입은 그의 모습을 보는 네 호흡이 가빠졌다. 잠깐만. 왜 지금 당신이 내 앞에 있는 거죠? 불행인지 다행인지 숨은 단번에 끊어지지 않았다. 심각한 피해를 입긴 했지만 어떻게든 살아돌아간다면 다시 멀쩡히 돌아다닐 수도 있지 않을까? 게속해서 늘어지는 시간 속에서 네 생각은 엄청난 속도로 질주했다. 다음에 움직인 건 아마 생각하고 행동으로 드러나는 일반적인 순서를 거치지 않았으리라. 네 곁을 스쳐 지나가려고 하는 글라키에스에게 휘두른 체인은 그 다리를 휘감아 무장을 비틀어 벗겨내려는 듯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네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는 헬멧 너머를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아무도 모를 테지만.
공격을 회피한 이들도 분명히 있었다. 츄이는 회피 후, 글라키에스의 목 부분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이내 글라키에스의 움직임을 잠시 정지시킬 수 있었고 쥬데카의 체인이 다리를 붙잡는데 성공했고 그 사이에 마리는 스케이트 파츠를 향해 전격을 날렸다. 그 공격은 제대로 명중했고 글라키에스의 빠른 속도가 드디어 멈췄다. 이내 선우가 폭탄을 집어던졌고 움직임이 느려진 글라키에스에게 제대로 명중했다. 이내 연기가 사라지자 글라키에스의 이마에선 피가 조금 흐르고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그녀에게서 보이는 강한 기운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와 동시였다. 멜피의 스페셜스킬이 발동했다. 그림자로 만들어진 군세는 여왕. 즉 멜피의 명령에 따라 글라키에스의 머리를 노렸고 이내 강한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이를 꽉 악물고 글라키에스는 뒤로 물러섰고 스페셜스킬인만큼 어느 정도의 데미지를 입었는지 피를 입 밖으로 뱉어냈다. 그와 동시에 레이먼드가 스페셜 스킬을 발동했다. 빠른 속도로 질주하던 레이먼드는 그대로 글라키에스를 킥으로 때리는데 성공했다. 그 때문에 글라키에스가 한쪽 무릎을 꿇는 듯 했으나 다시 일어섰다. 이내 그녀는 숨을 약하게 내뱉으면서 피식 웃었다.
"이번 것은 조금 아프네. 확실히 보검의 스페셜 스킬. 하지만 그 외의 공격은 뭐야? ...그래서 어디 뭐라도 하겠어? 너희들도 스페셜 스킬이라도 써보지 그래? 혹시 알아? 모두 사용하면 먹힐지 말이야."
확실히 데미지는 들어갔으나 그럼에도 글라키에스의 여력은 충분해보였다. 이내 그녀는 기합을 넣었다. 부서졌던 무장이 원상복구 되었다. 그것은 필시 보검의 무장 복구 기능이었다. 모두가 다 가지고 있는 바로 그 기능. 물론 어디까지나 복구되는 것은 무장뿐이긴 했지만. 아무튼 여전히 여유롭다는 듯, 글라키에스는 모두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것은 공격을 방어해줌으로서 얼굴을 빼면 얼어붙어있는 유루와 레레시아 역시 포함되어있었다.
"버스트는 처음 봤지? ...이건 말이야. 이 보검을 사용하는 자의 세븐스를 한단계 더욱 증폭시켜주는 힘이야. 계속 쓸 수는 없지만 일시적으로 보검 사용자의 전투 능력을 일시적으로 더욱 올려주지. 그리고 나는...지금 또 버스트를 쓸 수 있어. ...과연 사용하고 나면 너희들 중 몇이나 설 수 있을까? ...운 좋게 피한 패배자 제군들은 이번에도 피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너희들 중 모두가 생존할 수 있긴 할까? 다음 공격이 날아가면?"
"말했지? 한 명도 살아나갈 수 없다고 말이야. 그래. 난 확실히 최강은 아니야. ...그럼 그 최강이 아닌 이에게..목숨을 잃을지도 모르고 밀리고 있는 너희들은 뭘까? 벌레 나부랭이야? 그건 그렇고 아까부터 허세부리는 너. ...정말 전형적이라서 재미가 없어. 그렇게 말을 하는 이들은 수도 없이 봤어. 그리고 그 최후도 비슷했지. ...말은 여기까지 할까. 너희들 따위에게 스페셜 스킬을 쓰는 것은 너무 아까우니 사용하진 않겠지만 그걸로 충분해."
이내 그녀의 검이 모두를 향했다. 허나 그 순간이었다.
-왜 그렇게 싸우려고 하는 거야? -무섭지 않아? 힘의 차이는 확연하게 다른데 어째서 싸우려고 하는거야? -이번 싸움은 이기지 못해. 그건 스스로도 알 수 있을거야. -...그런데 어째서 이 싸움을, 세계와 싸움을 하려는거야? 이런 이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해? -너는... 왜 싸워?
그 목소리가 나는 곳은 틀림없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보검에서였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들리는 목소리. 그건 여성의 목소리였다.
머리가 아파온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없는 공세. 그럼에도 상대를 쓰러트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번 목적을 잊은것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상대를 쓰러트리지 않고 도망갈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들을 포기하는것도 문제지만 저 녀석한테 등을 보이고 무사할거란 시뮬레이션이 돌아가지 않는다.
"아직 잔뜩 남았거든 내건!!"
군세가 2/3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러나 내 스킬은 단발성이 아니다. 거기다 이쪽은 부상자가 둘, 다시 한번 더 공격당하면 다른 이들이 막아주는 방법밖에 없고 그것은 악순환이 된다. 부상자가 늘어날수록 승산은 그야말로 최악으로 떨어지는데..
"일점..!!"
이렇게 된 이상 선수라도 쳐야.. 라고 생각하려는 찰나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환청? 은 아닌듯했고. 목소리를 따라가자 놀랍게도 들고있는 보검이라는것을 알 수 있었다.
"............."
왜 싸우냐........ 그녀에게 있어서 그것은 상당히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야 그녀는 싸우는 목적이 딱히 정해져있지 않거든요. 에델바이스에 있는것도 혼자서는 외롭다는 이유일 뿐이고, 그녀는 복수를 하고싶은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