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답변이 돌아오는 것 같다. 서로 지목하는 것도 재밌는 일이었지 않은가. 이스마엘은 한차례의 폭풍이 지나가 잔잔하던 질문 사이에서 잠깐 자세를 굳혔다. 엔이 답할 적 쳐다보던 시선에 기쁘다는 듯 웃는 이모티콘으로 보답하던 노이즈가 이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저번에 패륜을 저질렀다고 답한 주제에 아버지를 떠올린다니. 합해 들으면 끔찍한 소리였다.
"제가 벌인 일이 죄송스럽기 그지없기 때문입니다."
죄책감 비스무리한 것이 있다면 다른 의미로 끔찍한 소리지만.
"이제 남은 건 아스텔 씨 뿐이군요."
이스마엘은 잠깐 질문을 고르듯 뜸을 들인다. 그 짧은 시간에 쥬데카가 자리를 떠나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는 기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스마엘의 노이즈 속이 어떤지 꿰뚫었을 지도 모르니까. 저번에도 피를 흘리던 걸 어렴풋이 눈치챘으니. 눈시울이 시큰댄다. 애써 올린 입가 뒤로 자상하던 얼굴이 떠오른 탓이다.
"만일 여기 사람 중에서 연애를 한다면 누구와 하고 싶습니까? 음.. 이유도 말씀해주십시오. 깊게 받아들이진 마시고 말입니다."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를 것 같다는 그 말에 아스텔은 침묵을 지켰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아스텔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었다. 자신의 부모님은 이미 자신이 철 들었을 무렵에는 없었고 자신을 버렸으니까. 이유는 모르겠으나 아마 자신이 세븐스라는 것 때문이겠거니 생각만 할 뿐이었다. 세븐스 아이들이 버려지는거야 그렇게 보기 힘든 일도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여기 사람들 중에서 연애를 한다면이라는 물음이 나오자 아스텔은 가만히 눈을 쫓아 지금 이 자리에 남아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일단 나는 이성애자에 해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자는 제외하도록 하고... 너도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겠으니까 일단은 보류할게."
그렇다면 확실하게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존재. 그런 이들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그는 눈을 감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여기 사람이라는 것이 지금 이 자리의 사람이라고 가정한다면 간단한 소거법으로 봤을 때 에스티아는 가족 같은 존재야. ...가족과 연애는 하지 않아. ...멜피는 분위기상 거론할 수 없다고 생각해. 그럼 남은 것은 레레시아와 엔이겠지만 엔은 동생 같은 느낌이 강하다고 생각해. 연애감정...보다는 그냥 뭔가 챙겨주고 싶은 동생이란 느낌이기도 하고... 프라이버시적인 이유로 연애보다는 세계를 알게 해주고 싶어. ...그렇다면 간단한 소거법으로 남아있는 이는 레레시아가 되니까 레레시아가 되겠지."
이어 그는 컵에 담겨있는 음료수를 천천히 머금은 후에 다시 잔을 내려놓았다.
"...뭐, 단순히 소거법만은 아니고, 그냥 나름 대하기 편하다는 느낌도 있지만 말이야. ...그런 이유라도 좋다면 그런 것으로 해 줘."
스스로 듣기에 과분한 말이 있다면 그건 그 어느 것도 아닌 쌍둥이 간의 관계성에 대한 것이라고, 줄곧, 생각날 때마다 그렇게 여겨왔다. 아니. 여겼다기보다 그게 현실이었다. 레레시아 나나리와 라라시아 나나리의 관계성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친밀하고 다정한 자매로 보일지언정. 딱 한 발만 더 들여도 그 속은 훤히 보인다. 돌이킬 수 없이 무너진 쌍둥이의 연결점이.
하지만 캐내지 않는 진실이, 사실이, 양지로 드러나는 일은 없다. 오늘도 쌍둥이의 현재는 밖으로 드러나는 일 없이 아득한 저 너머로 멀어진다. 이스마엘의 끄덕임 한 번에, 그녀가 가타부타 말없이 받아들임에 명명백백한 현실은 빛을 흐린다. 보려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그 위로 슬그머니 덮어씌운 대체제가 화려할수록 시선도 신경도 분산된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반복되는 그 표현이 그것에 해당할지는 그녀만이 알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래. 우흐. 사람이구나. 응. 그렇지. 후후후..."
넌 사실 사람이 아니라 보호종이 아니냐고 반 농담으로 한 말에 사람인 것 같다는 그 대답이 또 귀엽고 귀여워, 레레시아는 재차 터지려는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아. 옆구리만 아니었어도 더 헤프게 웃었을 텐데. 이렇게나 귀엽고, 순진한 사람은 이 시기에 만나보기 어려우니. 감흥을 보태어 더 웃고 싶은 것을 참아야만 함이 약간 아쉽다. 그러나 아쉬움이 곧 약간의 당황함으로 바뀌게 될 줄이야.
그녀가 그 질문을 꺼낸 건 그다지 짖궂은 의도는 아니었다. 한 8할 정도는 확인의 의미였으니까 말이다. 그게 그렇게나 이스마엘을 황망하게 만들 줄 알았으면, 그녀는 묻지 않았을까? 그건 또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거의 확인삼아 꺼낸 물음에 이스마엘의 행동이 굳고, 무너지듯 어깨로 기대오는 것을 얼결에 받아주었다. 토닥토닥. 자그마한 등을 안고 토닥여주다가 희미한 중얼거림에 레레시아의 눈동자가 소리없이 커진다. 파르르 떨리는 눈매에 미안함과 약간의 환희가 섞인다. 그것을 들킬새라 얼른 눈을 꾹 감고, 이스마엘이 편히 기댈수 있게 받쳐주며 토닥이려 한다. 그 와중에 가까이 날아온 초콜릿 상자를 슬쩍 받아 옆에 조용히 내려놓으면서.
"어, 음, 미안. 대강 알고는 있었는데. 확실히 하는 건 지금이 아니면 힘들 것 같아서. 미안해. 언니가 잘못했어. 응."
언니가 미안해. 그 말 또한 다정한 손길만큼이나 익숙하게 나온다. 그녀는 한순간 스스로에게 쓴웃음을 흘리고 싶었으나 그게 이스마엘에게 어떻게 보일지 몰라 참았다. 꾹 참고 등을 토닥이고 머리칼을 조심스레 쓰다듬어주려 한다. 그다지 크진 않지만, 나름대로 포근한 품으로 이스마엘을 안아주었다. 그렇게 이스마엘의 혼란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싶을 즈음 지나가듯이 말을 꺼내본다.
"좀, 진정됐어? 원하는 만큼 그대로 있어도 되니까. 괜찮아."
그 목소리는 이스마엘이 듣기에도 확연히 조심스러움이 담긴 목소리였을 것이다. 등을 가볍게 토닥이는 것도 한없이 조심스러운 손길이었겠지. 얼마 후에나 다시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을까? 그건 모르지만, 파삭. 비닐 뜯기는 소리와 함께 초콜릿 특유의 단 향이 화악 풍기는 건 현실이었다.
"진정했으면 초콜릿 먹자. 무슨 맛 줄까? 달콤한 거, 쌉쌀한 거, 상큼한 거, 아, 이건 술.. 위스키가 들어갔다네. 긴장 푸는데는 도움이 될려나. 미안. 아직 잘 몰라서. 네가 골라 봐. 뭘로 줄까?"
지금은 이스마엘의 진정이 우선이라는 듯, 레레시아는 다른 말이나 행동 없이 이스마엘의 안정에 심혈을 기울이는 듯 했다. 달콤한 향내 풍기는 초콜릿 상자를 둘 사이에 열어놓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