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져도 되냐고? 이스마엘은 눈을 둥글게 떴다. 사람에게 귀엽다는 형용사는 칭찬이지만, 갖고 싶을 정도라는 말은 어떤 뜻인 걸까? 이스마엘은 어떤 뜻을 담고 있는지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갖고 싶어도 자신은 파는 물건이 아니라는 듯. 이스마엘은 레레시아가 자신을 갖는 상상을 해보려 무진 노력했으나 결과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봉제인형이 된 자신을 떠올려보긴 했지만 그렇게 된다면 레레시아는 사람을 인형으로 만드는 마녀가 된다. 이스마엘은 생각을 고이 접어두기로 했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한차례의 이야기를 꺼내고 머뭇거린다. 당신의 반응 때문이다. 아직 많은 얘기를 꺼내기엔 이스마엘 스스로가 석연치 못한 점이 많았다. 누군가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살아라, 이스마엘. 너의 낙원은 여기에 없으니 도망쳐라. 예, 도망쳤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에 대해 얘기할 수 없어 두 번 도망치는 것 같습니다. 꾹 삼킨 과거를 뒤로 더듬더듬 입을 벌린다. "슬럼에는 인신매매 업자가 많았습니다. 살고 싶어서.." 뭔가 변명이라도 하는 것 같을 때, 손이 올라온다. 이스마엘은 손을 향해 시선을 둥글게 올린다. 머리카락에 와닿는 손길에 가만히 머리를 기울인다.
"……그랬습니다."
결국 또 같은 말을 해버린다. 진부한 삶에서 달리 꺼낼 말이 없는 것 같았다. 꾹 다물린 입술과 달리 당신은 진부한 삶을 인정해 주는 것 같다. 스스로 걸어온 길에 아무리 오점이 있더라도 자신이 걷고, 걸을 길. 이스마엘은 잠깐 머뭇거렸다. 이스마엘이 생각하는 이상향에 도달하는 방법인데 왜 이런 반응을 보였던 걸까. 글쎄, 모르겠다. 이스마엘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아직 많이 미숙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했을 때 두려움을 안았을 수도 있다. 볼을 잡혔을 때 물끄러미 쳐다보던 시선이 다시금 둥글게 뜨인다. "어아.." 하고 흐려진 대답을 하는 걸로 잠시간의 마음을 다잡는다. 바짝 안겨버리니 고민도, 한 순간 자신이 가진 원초적인 공포를 곱씹는 것도 쑥 들어가 버린다.
"물어보는 것, 말입니까..?"
갑작스럽게 주어진 기회. 당신의 태도는 괜찮지만 이스마엘은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말하기엔 당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성큼 알아버리면 서로 무안함만 남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한 스푼, 그렇다고 이 팔을 놓아주실 수는 없느냐 물어볼까 하면 기회 보다는 선 긋기에 가깝고, 라라시아에 대해 얘기해봐도 되는 걸까. 이스마엘이 눈을 도르르 굴린다. 최대한 둥글려 물어보고자 함이다.
"라라와…… 싸웠습니까?"
당신과 라라시아는 둘이자 하나인 것 같았는데, 막상 여기엔 라라시아가 없었으니까. 개인 행동이라 해도 궁금했다. 당신이 라라시아와 왜 가까이 있지 않고 평소와는 좀 다른 모습을 보이는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면 이해하는 데로, 아니면 아닌 대로, 어떤 반응과 대답을 보여줄까 지켜보니. 이스마엘의 고개가 가로로 도리질을 쳤다. 고개를 젓기 전에 눈이 동그래진 건 놀랐다기보다 이해를 못 한 것이겠지. 그녀는 피식 숨을 내쉬었다. 뭔가를 해보려면 갈 길이 엄청나게 멀겠구나 싶었으니. 이 화두는 잠시 넣어두기로 했다. 이후 다시 꺼낼 일이 없더라도.
이스마엘이 겨우 추려서 꺼낸 얘기를 듣고 했던 생각은 역시나 보여준 모습과 그 얘기 사이의 부족함, 괴리감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저 살기 위해 익혔다기엔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이 너무 완벽해서 부자연스럽다. 그것을 가르쳐 준, 길러준 이가 있을 것인데. 그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철자 하나도 꺼내지 않았다. 거짓말이란 어려운 것이다. 하나를 감추기 위해서 열가지 백가지 거짓을 덮어야 할 때가 있어서다. 과연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위장일까. 거칠게 들추는 대신 지금 들은 것을 일단 수용하기로 한다. 더듬더듬 얘기을 덧붙이려는 이스마엘을 쓰다듬어주고, 지금은 그걸로 되었다고 다독였다.
"누구든 살고 싶으면 무엇이라도 하게 되는 법이지."
살고 싶으면. 양날 달린 검이 그녀의 명치에도 스르륵 파고드는 것 같다. 실체 없는 감각을 무시하려 괜히 이스마엘을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 너도 물어보라며 기회를 주어, 다시금 고민하는 그 모습을 보며 그녀의 머릿속을 환기시킨다. 도르륵 굴러가는 눈은 무얼 생각하나. 과연 무엇을 물어볼까. 기대는 없지만 흥미는 지닌 채 기다리자 겨우 질문 하나가 조심스럽게 나왔다. 아. 그 질문 참 귀엽기도 하지.
"싸웠느냐라."
레레시아가 그의 질문을 곱씹어 중얼거렸다. 표정은 그 질문을 예상 못 한 듯 하면서도 그럴 수도 있다는 듯 모호하다. 사실 예상 질문은 생각한게 없긴 한데. 그나저나 싸웠냐니. 그녀가 지금 혼자 있으니 싸워서 그런 줄 알았던 걸까? 뭐, 일단은 대답부터 해줘야겠다. 레레시아는 아무 내색도 없이 어깨를 작게 으쓱였다.
"아니. 나랑 라라는 싸우질 않아서. 않는다기보다 못 하지. 한 쪽이 계속 도망가버리면 싸우고 자시고 아무것도 안 돼. 그러니 딱히 싸워서 혼자 다니는 건 아니야. 결과적으로는 라라 때문이긴 하지만."
그 대답에 거짓은 없었지만 설명은 충분치 않았다. 일부러인가. 그게 전부라서인가. 어쩌면 이스마엘이 조심스러워한 만큼 적당한 대답을 내놓은 걸지도 모르나, 아까부터의 행동을 보면 그런 배려를 해줄 사람인가 싶기도 하다. 무엇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지는 이스마엘의 몫이니. 그녀는 빤히 바라보며 되물었다.
"조금 더 물어볼래? 아니면 다른 거?"
악몽 안 꾸는 자장가로 재워준다던지? 틈을 노려 불쑥 내뱉은 말은 과연 어떤 파문을 일으켰을까. 태연한 그녀는 웃는 듯이 숨을 흘리고, 그의 등을 자잘하게 토닥였다.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를 독려하듯이.
적어도 모든 것이 진실이었다. 숨기는 것은 있기 때문에 어색하더라도 이스마엘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정했다. 이곳은 슬럼보다 몇 배는 좋다. 전염병이 돌아 폐쇄됐다는, 사람이 누워있던 모포가 썩어 형용할 수 없는 냄새가 진동하는 폐가에서 잠들 필요도 없고, 그마저도 쫓겨나 길바닥에서 잠들 필요도 없다. 두 사람이 앉아있는데도 소리 없이 푸근한 침대와 이불은 고사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비누를 쓸 수 있고, 온도도 쾌적하게 유지된다. 무엇보다 살아남고자 발악하지 않아도 됐다.
불현듯 윌리를 죽기 직전까지 때렸던 날이 떠올랐다. 코 뼈가 부러지고 눈 부근 뼈가 골절됐는지 한쪽 눈을 뜨지 못하던 윌리를 내버려 두고 돌아갔을 때, 이스마엘은 자신이 슬럼의 치안을 유지한답시고 살아남고자 했음을 깨달았다. 그런 과거를 생각하며 당신을 잠깐 바라본다. 누군가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능숙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참 상냥한 사람이고, 또 세븐스다. 아마 당신에게도 비슷한 과거가 있지 않은 걸까 생각해 본다. 살고 싶으면 무엇이라도 하게 된다는 말은 쉽게 나오지 않는 문장이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만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바짝 끌어당길 적 이스마엘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생각을 위해 한 곳으로 도르륵 굴러간다. 라라시아에 대한 얘기를 꺼낼 적엔 눈을 들어 당신을 마주했지만, 여전히 눈 깊은 곳은 무언가 더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라도 불편한 발언이었나? 그런 걱정을 한 번 담는다. 이스마엘은 모호한 표정에 작게 벌렸던 입을 다문다. 어깨를 으쓱이는 당신의 모습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다시금 하려던 말을 고치고 입을 벙긋거렸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잘 풀리길 바라겠습니다."
싸우지 못한다니, 생각보다 더 깊은 사정이 있는 건 아닐까, 남의 가정사에 너무 깊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아직 모르는 것이 한가득이지만 어딘가 찜찜한 문장이 있음은 안다. 설명이 부족함도 당연히 안다. 그렇지만 이스마엘은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상투적인 위로와 함께 받아들이기로 하며 머뭇거리더니, 갈 곳을 잃었던 손을 들어 어색하게 등을 토닥이려 했다. 위로하는 것 같다.
"……예?"
이스마엘의 손도 거기까지다. 멈춘 손이 다시금 갈 길을 잃어버린다. 불쑥 내뱉은 말에 당황한 것이 얼굴에 그대로 그려진다. 웃는 듯 숨을 흘리며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이스마엘은 잠깐 자신이 아이 취급을 받는 것 같다 생각했지만, 불쾌함보다는 놀라움이 앞섰다. 그러니까, 자장가? 고대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운율을 성인이 되어서도 듣는다는 행위 자체는 흥미롭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듣기에는 부끄러운 것을 안다. 그 정도 눈치는 있다! 이스마엘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고개를 푹 숙였다.
"아- 그, 그러니까, 음, 어, 초, 초콜릿, 먹을까요."
겨우 빠져나가는 탈출구는 초콜릿이다. 이스마엘의 눈이 다시금 바삐 구른다. 어색한 웃음이 가늘다. "Schokolade ist köstlich! ch meine……." 당황했는지 공용어도 깜빡하고 모국어로 중얼거리다 입을 합 다물었다.
살고자 하면 무엇이든 하게 된다. 그건 세븐스든 비능력자든 하물며 인간이 아닌 것도 그렇다. 자신의 생존을 위한 본능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생에 위협을 받으면 깨닫는다. 단지 세븐스는, 그 위협에 직접적이자 강하게 반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이 있기 때문에, 본능으로 하여금 스스로도 몰랐던 위력을 터뜨릴 수도 있었다. 쉽게 말해 폭주였다. 그 날. 그녀의 눈에 강하게 새겨진 참상의 원인은.
이스마엘은 물었다. 라라와 싸웠냐고. 그녀는 대답했다. 아니. 싸울 수 없다고. 그 말 그대로, 쌍둥이는 서로를 상대로 싸울 수 없다. 일종의 고착 상태이다. 그것도 한 쪽이 일방적으로 회피하고 도망가며 대립 자체를 무산시키는 매우 불쾌한 상황이었으나. 이스마엘에게 대답하는 레레시아에게선 그런 기색이 일절 없었다. 최근 어때? 뭐 그럭저럭. 정도의 안부인사 나누듯이 보통이다. 태연스레 말을 하고, 입을 벙긋이던 이스마엘이 위로의 말을 건네자 금빛 눈이 약간 접힌다. 다시금 평이한 목소리가 그런 말을 했다.
"괜찮아. 이미 끝났거든."
이미 끝났기에, 풀릴 것도 더 엉킬 것도 없다. 지금만큼은 그녀의 말에 의미가 명확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쌍둥이는 고착하고 있는 걸까. 그것만큼은 묻지 않는 이상 말해주지 않을 것 같다.
이스마엘의 토닥임에 눈만 힐끗 뒤를 한 번 보고, 다시 그에게 시선을 향한 그녀가 그 말을 꺼내자, 방 안에 재차 놀란 목소리가 울렸다. 물론 이번에도 이스마엘의 것이다. 놀란 목소리 만큼이나 표정도 놀라고, 또다시 갈 곳을 잃은 눈동자가 사방을 헤매인다. 결국은 고개를 숙인 이스마엘이 택한 건- 더듬더듬 꺼낸 말은 초콜릿이었다. 초콜릿 먹을까요, 도 모자랐는지 그녀는 모르는 언어로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무는 모습에 토닥이는 손길 멈춘 건 오래요 나아가 그녀의 입꼬리까지 실룩거린다. 그리고 끝내는.
"하하! 하하하하.... 뭔데. 뭔데 대체. 흐흐... 귀여워 미치겠네. 흐하.."
누가 허파를 바늘로 찌른 것마냥 웃었다. 어찌나 호쾌하게 웃는지 이스마엘에게까지 떨림이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아흑, 같은 아픈 소리가 섞이며 웃음이 잦아든다. 잠깐 웃었을 뿐인데 벌써 배가 땡긴 걸까. 그래도 웃음의 여운을 히익거리며 잘 넘긴 후에, 웃음기 남은 얼굴로 이스마엘을 바라보았다.
"귀엽다. 정말- 싫으면 싫다고 해도 되는데 왜 그 말 하나를 그렇게 어려워할까. 어? 그 말 한 번 한 걸로 미움 받는게 싫어서 그럴까나? 안 그러는데. 아. 귀여워... 진짜 갖고 싶다. 너 같은 사람은 정말, 아, 어떡하냐 진짜."
솔직히 말해 봐. 너 사실 사람 아니고 무슨무슨 보호종이지? 연신 하는 말에 웃음기는 있지만 표정은 웃는 걸 좀 참는 느낌이다. 웃음기 속 살짝 찡그린 눈썹은 아픔을 참는 듯 보였으니. 그리 한바탕 소란을 떨고,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레레시아는 협탁을 가리켰다.
"그래. 네가 먹자는데 먹어야지. 좀 가져와줄래? 세븐스 이럴 때 쓰는 거야."
이스마엘의 세븐스가 물체를 다루는 무언가라는 건 전투 때 확인했었으니. 지금 이 상태로 먹자며 가져와달라 부탁한다. 그대로 들어줘도 될 거고 그걸 빌미로 무릎 위에서 벗어나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기 이전에 그녀가 그런 말을 해서,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고보니까 말인데. 너- 남자야, 여자야?"
여태 안고 있어놓고 그걸 굳이 말로써 묻는 건, 아니,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아직 남아있을 웃는 표정이나 슬그머니 감싼 팔에 힘을 주는 것이 의도 중 얼마는 일부러 한 말임이 틀림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