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기는 걸로 뭔가 도움이 된다면 모를까 싶지만 뒤늦게 밝혀졌을 때 충격을 생각해 보면 쉽게 결정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더군다나 이미 밝히기로 결심한 만큼 마음의 준비만이 남았을 뿐. 어째서 삶의 끝을 기다리는 듯 살아가는가... 네 질문에 레이면드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다가 짧은 말만을 내뱉었다. 너무 부주의해서.
"...그렇군요."
생각한 바를 전부 입 밖으로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 그는 말을 고르고 골랐으리라고 생각하면서 너는 더 물어봐도 좋을까 고민했다. 궁금하긴 하지만 물어본다고 해서 그가 대답해줄지 알 수 없었고. 이 역시 나름의 대답이었으니 충분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니 고민이 더해질 수밖에 없다.
"부주의함이 때때로 일을 그르친다는 건 알지만... 그럼 삶에 의미를 두지 않는 건 주의 깊은 선택인가요? 부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다치지 않아 다행이지만 하마터면 전투로 이어질 수도 있었으니. 자신도 그렇다는 언급에서 괜히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시선을 아래로 깔자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니 이스마엘의 눈동자가 갈 방향을 잃어버린다. 시선을 굴려도 따라오니 대체,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이스마엘은 당신의 품 안에 있었고, 조금만 시선을 내려도 새하얀 머리카락에 감긴 얼굴이, 더 내리면 자신을 감싸 안은 팔이 보였다. 다시금 눈을 슬쩍 굴리자 금색 눈을 마주쳤다. 연두색 눈동자가 좌우로 슥슥 구르더니 결국 자신의 입술을 앙다물고 작게 헛기침을 했다. 사회는 고사하고 교우관계는 일절 없었다 보니 장난에 대처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반응을 생각하면 좋은 꿈은 아니었을 테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세븐스라면 누구나 꿀 수도 있는 꿈이고, 이스마엘도 겪은 일이다. 문득 자신의 베개 밑에 숨긴 것이 총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럼 내부에서 잠결에 실수로 격발해 상처를 입었던 날을 떠올리자 등골이 오싹했다. 입으로 담기도 끔찍하다. 더 이쪽 주제로 넘어가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납작한 은색 판을 손으로 쥔 것이 하나의 실수였는지 당신은 손을 바라보다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눈을 마주치기 힘든지 연두색 눈동자는 자꾸만 갈 길을 잃고 헤맨다.
"초콜릿, 말입니까?" 이스마엘의 서두와 함께 당신의 턱짓을 향해 시선을 던져본다. 협탁 위에 놓인 초콜릿 상자가 보인다. 아마 모든 일의 원흉은 저 무시무시할 정도로 맛있어 보이고 달리 보면 얄궂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포장을 한 초콜릿 때문인 것 같다. "아." 짧은 감탄사. 문도 열려있었다는 사실이 명확해지고, 방 안을 구경했단 말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손대봐야 이스마엘이 가진 비밀을 몇 가지 아는 일뿐이다. 편지를 읽는다면 조금 달라졌겠지만. 잠깐 입을 벙긋거리다 대답을 다시 정할 것인지 뜸을 들인다.
"……물어보셔도 괜찮습니다. 나가서 상관하지 말라고 하셔도, 동료지 않습니까."
영원한 비밀은 없다. 영원한 것은 없다, 영원함은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함구한다는 맹약이 있다 한들. 그럼에도 이스마엘은 사람을 제법 좋아하고 신뢰하기에 이런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고, 한발 물러설 수도 있었다. 이 상황에서 거절이라는 선택지를 가지기엔 스스로가 궁지에 몰렸다 생각이 든 것이 한몫을 하기도 했다. 이스마엘은 시선을 느릿하게 굴리다 눈을 마주쳐 본다. 동글동글한 금색 눈동자. 이제 보니, 쾌활한 말투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레시보다 라라 같은 느낌인데.. 쌍둥이는 닮는다는 말이 있으니 그런 건가, 그렇다기엔……. 아니다, 잠이 덜 깼을 수도 있다. 이스마엘은 굳이 묻지 않고 입술을 꾹 닫으며 질문을 기다리기로 했다.
네 말에 긍정해 주면서 미소지는 그를 보니 때때로(사실은 자주) 이해하기 어렵지만서도 그것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의외로 좋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네 얼굴을 유심히 볼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네가 미소를 띄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으리라.
"으음, 네."
특히 주고 싶은 사람들만 추리라는 말에, 손가락을 꼽으며 줄 만한 사람을 생각해 본다. 으음... 역시 전부 줄 수는 없으니 함께 임무에 나서는 사람들에게 주는 걸로 할까. 대충 추려보면 10명 가까이 되는 것 같긴 한데, 그 중에서도 또 추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너는 유루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유루 씨, 아니... 예전에 이름은 원하는 대로 불러달라고 하셨었죠. 에봇이라고 불러도 괜찮을까요?"
갑작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지난 번 대화에서 생각해보겠다고 했었고 그러니까 개연성은 문제없다. 그렇게까지 생각하면서 꺼낸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유루에게 의견을 묻던 너는 만약 유루가 그걸로 괜찮다고 이야기한다면 아마 계속 그렇게 부를 터다.
"유루 씨는(만약 에봇이라고 부르는 걸 OK했다면 에봇 씨가 되겠다) 특별히 주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뭔가 다른 사람에게 줄 거라면 더 만들겠다. 라는 식의 말이 오갔으니 애초부터 나눠줄 생각이었을까 싶어 묻는 모양이다. 물론 그 직후에 들려온 말에는 조금 멋쩍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졸아드는 사과를 쳐다보았다.
"...누구나 부러워 할 만한 힘과 지위를 손에 쥐고 있으면서 마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구는 사람을 보았으니까요."
아마 제가 여기에 서 있지 않았다면 저 역시 그랬겠죠. 네, 실제로도 거의 그랬고요. 라고 덧붙이다가 유루가 다시 블러디 레드에서의 일을 꺼내자 미안한 듯 자신의 뺨을 매만졌다.
"...네, 무모한 행동이었죠,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겠지만... 뭐든 장담할 수는 없으니까요. 앞으로 그럴 일은 없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만 그렇죠,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렇지만 역시 그런 일로 신경쓰이게 되면 문제가 되니까, 찢기지 않는 걸 목표로 하겠다고 덧붙이면서 조금 부드럽게 상황을 넘겨버렸다. 어차피 그가 심각하게 말을 내뱉는 듯한 분위기가 아니기도 하고.
"네, 맡겨만 주세요."
그리곤 그가 말한 대로 밀대와 파이지, 그리고 쿠키 커터도 함께 꺼내 와서 파이의 기반이 될 파이지를 밀대로 적당히 밀어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