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모두에게 말할거라면, 이렇게 흘려도 상관은 없을거라 봐. 아님 일부러 흘려보거나."
어차피 모두에게 알릴 거라면 조금 부주의해도 용서가 될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결과는 같으니까. 다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철저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숨겨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드러나더라도 대충 둘러댈 뻔뻔함도 있어야 하고.
"나? 내가 뭘 숨기는 게 있겠어. 그냥 부주의한게 좀 비슷한거지. 이런거 저런거 까먹고 다니고, 흘리고 다니고 뭐 그런거."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한다. 나는 숨기는 것이 없다. 그보단 굳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지만.
"별 것도 아닌 녀석이 별 것도 아닌 삶을 살아오다가, 그런 변변찮은 삶이 지루해져서 그걸 집어던지려 하는 중일 뿐이지."
그렇기에 만사에 부주의하고, 그냥 지 생각하는 대로만 움직이는 단순무식한 녀석이 이 자리에 앉아있는거다. 헝겊 주머니 앞에 두었던 캔을 들고, 찌그러트린 다음에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경쾌한 금속 소리를 내며 가볍게 들어가자, 오예 하고 김빠지는 환호를 하며 그저 장난을 치고만 있다.
"애초에 보통이라는 것을 우리 세븐스들은 어지간하면 모르지 않을까? 25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그 법 이후로 태어난 이들이라면 더더욱 말이야. 태어날 때부터 이게 당연한 시대였으니까."
자신이 태어나던 해에 만들어진 비능력자 보호 법령. 자신이 아는바 그녀는 자신보다 연하였다. 당연히 그녀 역시 법안이 나온 이후에 태어난 사람이고 자연히 그 보통이라는 것을 체험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이 마을에서야 이것저것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는 하나 역시 그조차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아니며 제한된 장소에서의 자유인 셈이었으니까. 아무튼 결론은 그녀도 여행을 하고 싶다는 모양이었다. 이어 아스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자매끼리 같이 가는 거야? 아니면 혼자서 가는 거야? ...어느 쪽이건 운이 좋다면 어딘가에서는 마주칠 수도 있겠네. ...아무튼 그런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딱히 자신은 목숨을 버리거나 하면서 임무를 수행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을 걸지도 모르겠으나 그런 일은 가급적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아스텔은 그녀가 무게를 실고 있는만큼 몸에 조금 더 힘을 주어서 지탱했다. 그러다가 그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면서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나보다는 네가 더 피곤해보이는데. 돌아갈 거면 언제든지 얘기해. 아지트까지는 데려다줄테니까."
다시 하늘을 날아서 가겠지만. 그렇게 말을 하면서 그는 낚시대를 괜히 두 손으로 잡다가 살며시 바늘을 분해했고 낚시대를 땅에 내려놓았다. 이어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다시 제대로 찬 후에 호수를 바라보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이 장소는 딱히 비밀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굳이 많이 퍼뜨리진 말아줘. ...낚시할때 시끄러우면 잘 안 잡히거든."
그건 그거 나름대로 의심을 사기 좋지 않을까. 아니, 레이먼드의 반응을 생각해 보면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지만서도. 어쨌건, 사실을 전부 이야기할 생각이니 이렇게 흘리게 되더라도 큰 문제는 아니지 않겠느냐- 라는 느낌으로 받아들인 너는, 딱히 숨기는 건 없다며 대답하는 그를 보다가 멋쩍게 웃는다.
"하하... 그래도 중요한 건 까먹지 않으셨겠죠, 이건 사실 부주의...라고 하기에는 조금 큰 일일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그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만 적어도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될지도 모르는 것들을 잊거나 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던 너는 이어지는 그의 말에 의아하다는 듯 올려다본다.
"그건... 어째서입니까? 레이먼드 씨."
삶에 의미가 없다고 느낀 건 왜인가, 싶어 묻는 너는 질문을 해놓고서 너무 오지랖인가. 하고 생각해 본다. 이미 늦었지만.
20살 같다는 말에 아무래도 기쁨을 감추긴 힘들었는지 자신도 모르게 픽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서른을 목전에 둔 나이, 어려보인다고 하면 남녀노소 모두 좋아하는 것이 세성의 법칙이다. 그녀는 선우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사회생활 능력, 합격입니다?" 아마데우스는 선우가 키에 대해 말하자 입을 살짝 삐죽였다.
"어렸을땐 이 키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죠. 전봇대다, 기린이다, 팔척귀신이다 등등... 그러는 선우씨도 저랑 비슷해보이는걸 보니 큰 편이신걸요?"
프로필상 아마데우스가 2cm 크지만 밀도(?)만 따지면 선우가 더 건장해보일 것이다. 아마데우스는 신발을 벗느냐는 선우의 물음에 신발을 벗는 대신 슬리퍼를 신는다고 답하며 신발장의 슬리퍼를 건넸다. 음, 이제 장난은 칠만큼 쳤으니까 비밀(?)을 밝혀볼까.
어지간한 세븐스들은 보통이라는 걸 걸 모른다. 아스텔의 말대로였다. 레레시아가 태어났을 땐 이미 지긋지긋한 법령이 만연하는 시기였기에 제대로 밖에서 무언가 해본 적이 없었다. 과거를 생각해보면 언제나 작은 방에 하늘이 보이는 창문 하나가 전부였다. 혼자가 아니었던게 그나마 위안이었지. 그리고 어머니의 존재도.
"보통이라는 거. 해본 건 없어도, 들은 건 많은데. 들은 것도 해볼 수 있을까 모르겠다."
조금 멍하게 중얼거리고 호수인지 그 너머인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곧 아스텔의 목소리가 들리자 도로록 굴러와 그를 보았지만.
"간다면 혼자일 거야. 흐. 운이 좋으면이라. 당장에만 해도 나중에 있을 운까지 다 끌어다가 살아남는데 써야 할 판인데."
그녀도 허투로 목숨을 내던지거나 할 건 아니지만, 당장 최근의 임무만 생각해도 나중의 운 같은 건 사치스러운 가정이다. 살아남을려면 나중이고 뭐고 매번 운과 요행을 다 끌어다 써야 할 거라며 생각만으로도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작게 가로젓는다. 그렇게 쓰고도 달리 쓸 수 있는 운이 남는다면, 나중이 아니라-
"안 피곤해- 그냥 좀 느긋한거지. 그보다 너는 낚시 더 안 하게? 내가 방해였나?"
낚시대를 내려놓길래 그녀가 방해여서 더 안 하는가 싶어 물어본다. 방해였다면 먼저 말을 그렇게 했을 거 같지만. 허리의 검을 갈무리하는 걸 보고 괜히 자켓의 허리 부근을 쓸어내려본다. 작게 잘그락대는 허리장식 너머로 가볍게 눌리는 느낌이 장갑 너머로 희미하게 스쳐간다.
"어어. 어차피 기지에서 대화하는 사람도 거의 없어."
호수의 위치를 많이 퍼뜨리지 말란 말에 알겠다며 대답을 하고. 팔로 감싼 무릎을 좀 더 가까이 당긴다. 그대로 조용히 호수를 바라보다가 툭 하니 말을 꺼낸다.
"저기. 아스텔."
너는- 이라고 운을 떼는데 그 순간 낮은 바람이 불어온다. 레레시아는 말을 멈추고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아스텔을 휘감지 않게 고개를 돌리고 한 손으로 모아 붙잡았다. 잠시 동안, 주변 나무들로부터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려퍼진다. 호수의 수면에도 물결이 슬그머니 일었다가 서서히 사라져간다. 겨우 잠잠해지자 다시 앞을 향해 고개를 돌린 레레시아가 그렇게 말했다.
"방금 바람 때문에 무슨 말 하려고 했는지 까먹었어. 뭐 별거 아니었겠지."
머리만 산발이 됐네. 작게 중얼거리며 손으로 빗질을 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애초에 낚시하러 나온 게 아니야. 그냥 나온 김에 던져본거지. ...정말로 낚시를 할 것 같으면 아이스박스도 하나 들고 나왔을걸."
방해가 아니라는 의미로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냥 호수에 나왔으니까 별 생각없이 가지고 온 거지. 딱히 물고기를 잡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 뿐이라고 선을 그어버리면서 이야기를 하는 그 목소리는 일부러 지어내는 것도 아니었고 지금 이 상황을 귀찮게 여기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튼 굳이 알려주지 않겠다는 의미의 말을 듣자 아스텔은 안심했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물론 다른 이들에게 이 장소가 비밀인 것은 아니었으나 낚시를 하러 나왔을 때 너무 많은 사람이 나와서 시끌벅적하게 떠들면 물고기가 도망치기 때문에 여러모로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하늘을 날아서 다른 장소를 찾으면 그만이지만, 가능하면 그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아스텔의 눈동자가 잠시 레레시아를 향했다. 바람 소리가 조용히 울리는 것을 바라보며 아스텔은 살며시 손을 옆으로 가볍게 휘둘렀다. 바람의 방향을 살짝 조절한 것이었다. 너무 강하게 지나치지 않게. 하지만 적당한 시원함을 유지하게. 이내 돌리는 그녀의 말에 그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을 하다 짧게 한마디를 남겼다.
"...싱겁긴."
하긴 그녀의 말대로 바람 조금 불었다가 말을 하려다가 만 것이라면 중요한 것은 아니겠고, 설사 중요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것은 아무리 그래도 그녀가 일부러 끊은 것이었다. 그 정도 눈치는 없는 것이 아니었으나 그는 굳이 입을 열어 말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렇다면 생각나면 얘기해줘. 굳이 내 이름을 부를 정도였다면, 나에게 뭔가를 말하고 싶었거나 묻고 싶었거나 둘 중 하나겠지."
물론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 답을 할지, 하지 않을지는 알 수 없었다. 일단 들어봐야 알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다 그는 한가지 사실은 공감을 표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모든 운을 다 쏟아부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수준인긴 하지. ...너도 느껴봤을테지? 진짜 보검의 힘이라는 것을 말이야. ...못 이길 정도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압승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야. ...아마 저들도 이제 본격적으로 우릴 경계시하게 되겠지."
상대가 그런 아픈 추억을 가지고 있고 선우는 그걸 건드렸다. 그러니 정중하게 사과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의문이 들었다. 남자 키 182는 물론 큰 키다. 그러나 이상한만큼의 큰 키는 아니다. 모델이나 운동 선수 중에서 이정도 키는 평균이거나 그보다 아래니까.
"저는 평균 키에요."
175cm니 한 뼘 정도 작은 키다.
다행히 신발 신고 들어가는 집은 아닌 것 같았다. 아마데가 건네 준 슬리퍼를 신고 집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