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현재 마리는 존* 취한 상태인 것이다. 과연 다음날 마리는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 다시 현재의 상황.
마리는 승우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자 기분이 좋은지 배시시 웃는다. 눈이 접혀 붉은 눈동자가 가려지고 입매가 호선을 긋는다. 이름이 불릴 때마다 대답처럼 귀가 쫑긋쫑긋하다. 옷 아래로 드러난 꼬리기 살랑살랑 흔들렸다.
"해 줄 수 있는 만큼 많ㅡ이ㅡ."
그 표정은 승우가 못마신다고 웃음을 터트리자 잠시 뚱한 표정으로 바뀌었지만 이내 다시금 웃음기 머금은 표정으로 변했다.
승우의 옆에 무릎걸음으로 선 마리는 아무래도 비틀거려서 잘못 어깨를 짚은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원래 손이 가고자 했던 곳은 승우의 머리였다.
"머리이, 쓰다듬어주려고. 착하다ㅡ. 승우는 파랑이네, 머리 길어ㅡ. 나는 빨강이 싫은데, 초록이 좋아."
이어지는 말은 맥락이 없다. 원래 술 취한 사람은 다 그렇지 않던가. 그 말 속에 진심이 있을 수도 있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것일수도 있고. 어쨌든 이번에는 어깨를 짚지 않은 다른 손으로 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할 것이었다. 제지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릿한 손짓이었다.
정정한다. 이 정도면 귀여운 수준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이걸로 끝날 것 같지가 않다. 꿋꿋하게 더 부르라는 말에 그가 입을 떡 벌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마리 양반. 내가 존* 힘내본다. 하…… 마리, 마리야, 마리 양, 마리 학생, 마리 씨…… ."
그렇지만 난감해하면서도 싫다 하지는 않는다는 게 참. 아니, 저렇게 좋아하는데 싫다 하기에도 무엇하지 않나. 그는 남에게 먼저 주도적으로 신경쓰지 않아서 그렇지 자기 자신이 내킬 때는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게 결과적으로는 배려나 양심 비슷한 게 되어버렸으니 우스운 일이다. 그렇게 슬슬 입 아파올 때까지 몇 번쯤 더 부르고 나서는 그도 손을 들었다.
"와, 너도 고집 존* 질기다. 개 꿋꿋해. 씨* 근데 왜 그렇게 계속 불러달라고 하는 건데?"
마지막쯤 가서는 그도 왠지 억울해졌다. 내가 잘못한 거라도 있으면 말이라도 안 하지, 왜 이런 고통을 주나. 따지려고 홱 고개를 돌렸는데, 곧이어 마리가 한 행동에 그 맥도 탁 끊겨버렸다. 그는 결국 조금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얌전히 쓰다듬 받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더 큰 문제가 있었다. ……큰일났다.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마리 얘가 지금 하는 것처럼 정신 못 차린다 싶으면 딱밤이라도 때려주려고 손 든 거였는데. 따지고 보면 지금이 딱 딱밤을 때릴 적기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 쓰다듬는 사람을 때릴 수는 없지 않은가.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딱 이 상황을 두고 하는 것일 테다. 그의 내면에서 연약한 양심이 제 존재감을 피력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가 이러한 스킨십 전반에 약해서 그런 것이기도 했다.
"어, 그래. 너는… 금발? 그거고. *, 빨강은 왜 싫은데."
그래서 다시 결론은 원점으로 돌아온다. 그는 미묘하게 뚱하면서도 풀린 표정으로 주정꾼의 아무말을 받아주고 있다. 사람이 참, 쉽다…….
"어느 날 갑자기 서로 아무것도 없이 맞닥뜨린다면, 네.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지 마음의 준비라는 건 필요하다고 너는 생각했다. 준비를 끝마치더라도 제대로 실행되지 않는 일이 부지기수인데, 준비조차 하지 않은 일이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물론 증오심이나, 그에 준하는 감정을 토대로 막연하게나마 항상 준비되었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이성이 배제되어서야 어디 그게 효과적이겠는가. 본디 인간은 이성을 벗어나서는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본다면 이성을 놓아버린 순간 그건 한 마리 짐승에 지나지 않겠지. 이들은 죽이기 위해 훈련받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전부 죽여버려서야 조화는 뜬구름일 뿐이지, 평화와 조화라는 이상을 그대로 붙잡기에는 이미 두 발을 땅에 딛은 순간부터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 말하고, 필요악이라며 구색을 갖춘다. 이상적 인간은 이상에 다다를 수 없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가 그렇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전체는 언제나 부분의 합 이상이니, 이상적인 인간들이 모인다고 해서 이상의 세계가 펼쳐지지는 않는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겠지, 하물며 그런 존재보다는 불완전한 사람들 투성이인 세상이라면 뭐라고 말을 더할 수 있을까? [vanitas.] "음, 글쎄요... 저도 확신이 없으니까요, 이래서는 제대로 된 논의조차 아니게 됩니다만은."
결국 허점투성이, 너는 멋쩍은 듯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의도가 제대로 실리지 않은 말의 뜻을 찾으려는 것 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의미 없는 일이 어디 있을까. 애초에 보물이 없는데 땅을 파 내려가고, 동굴을 뚫고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의미는 없었다. 그래, 의미 같은 건 없다.
"그러면 안 되죠, 인간은 인간이고 싶을 리가 없잖습니까. 제 앞에 있는 건 인간인 것 같은데요."
무엇인가 바란다는 것은, 결핍과 부재로부터 인한다. 적어도 네 앞에 선 그는 그런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니면 그저 그가 농담하듯 말했기에 마찬가지로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기 위해서였을까. 어쨌거나 그리 이야기하는 네 목소리는 무겁지 않았다. 이미 한 번 그가 비슷한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거부하는 걸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려나. [vanitatum.] "네, 저는 꽤나 잔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을 돌리지 말아라, 손에 묻은 피를 씻어내려 하지 말아라, 눈 앞에 쓰러진 이들의 표정을 기억해라, 네가 딛고 있는 토지에 묻힌 이의 모습을 떠올려라, 마지막 순간까지 지르던 비명을 들어라. 아, 네게는 무뎌질 자격 따위 없다. 무시하는 게 용납될 리가 없다. 선택했다면 책임져야만 한다. 때로는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지지만, 때로는 한없이 무거운. 책임지지 않는다면 뭐가 다른가, 옳고 그른 것을 따질 수는 없다. 구부러지지 않는다면 끝내 꺾이고 말테지만, 그건 꺾인 뒤의 이야기다. 꺾이기 전까지는 그 역시 정의이며, 물과 같이 자유롭게 흐르는 것 역시 정의겠지. 어째서 레지스탕스는 레지스탕스일 뿐인가. 어째서 아직도 체제는 전복되지 않았는가? 압도적인 힘의 차이 때문에? 결집되지 못한 뜻 때문에? 이유따위 찾아낼 수 있을리 없다.
"하하...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되는 대로 말할 때가 가끔 있어서요."
마침내 혁명이 성공했다고 해도, 혁명을 뒷받침하는 요인이 성공의 전부는 아닌 것처럼. [et omnia vanitas.] "유익한 대화네요, 저는 그다지 영양가 있는 이야기를 해드리지는 못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