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붙잡는 목소리와 동작에 아스텔의 발이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평소의 조금 멍해보이는 그 얼굴이 그녀를 향했다. 자신을 향해 미안하다고 하는 그 사과말을 들으면서 아스텔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성가시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사적으로 얽히지 않도록 하고,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그 말까지 듣다 아스텔은 다시 입을 열어 이야기했다.
"...내가 무섭거나 혹은 지옥에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혐오스럽다면 그것도 상관없어. 실제로 그 지옥에서 나는 몇이나 죽였고 그로 인해서 무뎌졌으니까. 사람은 피를 보면 기본적으로 동요하고 흔들린다고 하지만 나에겐 또 임무를 하나 수행했구나 정도의 감정밖에 들진 않아. 적을 제거해도. ...어떻게 보면 인간보다는 괴물이지."
허나 자기 자신을 자책하거나 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그저 이게 자신이라는 듯, 그는 그저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잠시 말을 고민하다 그녀의 이름을 넌지시 입에 담았다.
"레레시아 나나리. ...아니. 풀네임은 조금 거리감이 너무 강하다고 에스티아가 얘기한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한다면... 음. 레레시아. 여기선 사과가 나올 필요가 없으니까 사과는 하지 말아줘. ...그저 설명을 하지 않으면 내 입장을 설명할 수 없었고 그걸 입에 담은 것은 내 선택이니까. ...이 세상에 세븐스의 인권은 존재하지 않아. 더욱 심한 일을 당하는 이도 있겠고, 그것은 너, 혹은 다른 동료들도 예외는 아니겠지. ...나도 그저 그런 경우 중 하나일 뿐이야. ...그러니까 동정하지 말고 미안해하지도 마. ...그저 설명에 필요해서 말한 거니까."
눈을 감고 생각을 다시 한 번 정리한 후, 아스텔은 숨을 작게 죽였다. 그러다 그녀가 괜히 갑자기 지나가지 않도록 그녀의 옷 소매를 가볍게 잡으려고 했다. 그 상태에서 그의 눈은 그녀의 눈으로 향하려고 했다. 고개를 돌려사 안 본다면 보지 못했겠지만.
"...귀찮게 하지 않고 사적으로 얽히고 싶지 않다라. ...그게 네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어. ...애초에 나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거니까 남이 하고 싶은 일에 어느 정도 말은 얹더라도 반드시 이렇게 하라고는 하지 않아. 그래서 넌 어쩌고 싶은거지? ...그 미안함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집어치워. 나는 내가 지금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런 일이 있었기에 나는 힘을 얻을 수 있었고, 이 에델바이스의 일원으로서 함께 할 수 있게 된거니까."
그녀가 소매를 잡혀줬다면 이내 그는 여기서 소매를 살며시 놓아줬을 것이다. 그 대신 다시 한 번 말을 이었을 것이다.
"...너는 어쩌고 싶지? 네가 말했던 것을 네 의지로 원한다면 더 말하지 않을게. ...나 역시 타인을 귀찮게 하는 것은 싫으니까."
파드닥 놀라는 모습이 꼭 고양이 같다는 생각은 너무 태평한 거려나. 펑 튀어나온 귀는 고양이가 아니지만 그런 감상이 들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는 배시시 웃어오는 얼굴을 슬쩍 바라보며 판단을 마쳤다. 음, 좀 취했네. 얘가 이런 성격이던가, 하는 의문은 취기 앞에 무용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곱게 취한 편이라 다행이다.
"어, 그래. 뭘 그렇게 부르고 그러냐."
누가 들어도 낯간지러워 할 호칭으로 불렸음에도 그는 실실 웃고만 말 뿐이다. 애초부터 부끄러움이란 개념에 둔감하니 그렇고, 별달리 놀리려 그러는 것도 아닌 듯한데다 취한 사람이 여러 부문에서 얼마나 취약해지는지 알기 때문이다. "와, 냅두면 존* 큰일 나겠는데." 어깨를 붙잡았던 손에 힘이 빠졌으나 아직 놓을 때는 아닌 것 같다. 그는 다시 한 번 마리의 몸을 바로세워주려 위치를 잡고 힘 내보라는 듯 마리의 어깨 뒤쪽을 통통 두드렸다.
"야, *. 다리에 힘줘 봐. 제대로 서고. …아니다, 안 되면 그냥 앉아라. 그게 낫겠네."
마리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나서야 그가 손을 놓았다. 그러고 있으려니 마리가 불쑥 물어왔다.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진 모르겠다 생각하면서도 그는 곧바로 대답해주었다. 그 대답이 꼭 제대로 된 대답이라는 법은 없었지만.
"어어, 일단 씨* 그, 네가 좀 추슬러야 행복해질 것 같다."
별달리 탓하거나 나무라는 투는 아니었을 것이다. 옷자락을 가만히 붙잡힌 채로 멀뚱히 시선을 아래로 향한다. 얌전히 마리가 무얼 하나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흠... 자동필터형이라면 알아서 말 바꿔주는 거니까 불편할 것도 없고 정작 본인은 오 언어순화 개쩌네~이러고 땡입니다 딱히 싫어하지 않음... 앗 물론 유루랑은 말 안 하고 싶어질듯(유루미안) 나쁜 말은 아예 못 말하게 되는 쪽이라면 방송편집 당한 것처럼 문장 4개 중 1개밖에 안 나오는 수준이지 않을까... 간단한 긍정, 부정, 단어 몇 개 정도 빼고는 안 돼서 완전 열받음...
대수롭지 않게 한 말에 나온 반응이 사뭇 꿋꿋하고 장하다. 그것이 우스워 자연히 웃게 되었는데, 엇비슷하게나마 정말로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준 셈이다. 뭐, 기분도 꽤 괜찮고 어차피 밖으로 갈 생각이기도 했고. 혼자 보냈다가 큰일 나는 것도 싫으니 그는 마리가 이끄는대로 순순히 따라가주었다. 사실 그런 이유는 모두 제쳐두고서, 저런 얼굴로 바라보면 그의 미묘한 양심도 꿈틀대며 일할 수밖에.
"씨, …멀리는 안 된다."
습관처럼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다 만 것도 그래서다. 걷는 걸음이 그리 빠르지 않다. 보폭의 차이와 불안정한 걸음걸이를 고려한 것이다. 그렇게 복도를 지나고 문을 열어 밖으로 나선다. 계절이 가을에 가까워짐에 따라 들이닥치는 밤바람이 여름날에 비하면 제법 차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쌓인 열기를 서서히 식혀갔다. 멀리 가는 건 안 된다 했던 말처럼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이번에는 가까이에 있는 벤치로 마리를 이끌었다. 멀리 가면 돌아올 때 번거로우니까.
그리고 그는 벤치 앞에 서서 공연히 제 머리를 긁적였다. 여기까지 온 건 좋은데, 그는 지금 조금쯤 난감한 기분에 직면해 있었다. 웃는 마리를 보고 있으려니 종종 어린애나 동물들을 보고 느낀 것과 비슷한 기분이 든다. 싫다거나 귀찮은 건 아닌데. 으음, 그거다. 왠지 모르게 보들보들하고 미묘한 감각. 그러니까 귀여운 데가 있다…? 아하, 그거구만. 지난번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인가? 결국 어렵지 않게 제 기분을 정의하고 나니 개운해졌다. 그렇다면 가릴 것 없지. 덩달아 기분 좋아지기도 했고, 바깥 바람 시원하니 좋다. 그는 벤치에 털썩 기대앉아서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킬킬거리며 흔드는대로 얌전히 흔들려주었다. 주정에 당하면서도 표정이 나쁘지 않으니 다행이다. 그야 본인은 맨정신으로도 이것보다 더한 짓 할 수 있고…… 비슷하게 제정신 아닌 놈이랑도 노는데 이 정도는 귀엽게만 보인다.
"아, 알겠어. 마리, 마리, 마-리, 마리, 마리 씨. ……몇 번이나 불러야 해?"
맥없이 앞뒤로 왔다갔다 하다 쭉 미끄러져 내려와 등받이에 머리를 툭 기댄다. 그러다 얼마나 마셨는지 이야기를 듣고는 큰 소리 내며 웃었다.
"으하학. 존* 못 마셔.
얘도 참 술 못 마시네. 그러는 저도 만만찮게 형편없는 간기능의 소유자라 할 말은 없지만서도. 마리만큼 마셨더라면 그도 엇비슷하게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을 거다. 그는 마리가 하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다, 한쪽 손을 들어 마리의 얼굴 앞으로 가져다대었다. 무슨 의미로 한 행동인지는 아직 파악하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