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르륵 타오른 감정은 그만큼 금방 식는다. 금방이 얼마나 금방이냐면, 그녀의 애먼 짜증을 다 들은 아스텔이 운을 떼고 잠시 말에 간격을 두었을 쯤이다. 어쩌면 그의 얘기를 듣기 위해 머리가 알아서 식은 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열이 오른 상태로 그의 얘기를 듣고 곡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또렷하게- 똑똑히 알아들었기에 눈 앞이 아찔해질 정도였지.
"아ㄴ..."
대체 그녀의 말 어디가 그의 무엇을 건드렸을까. 들으면서 문득 그 생각이 들었다. 애꿎은 소리를 했다곤 하나 아스텔이라면 눈도 깜짝 안 할 것 같다는 예상이 머릿속 어딘가에 있었는데. 그 예상이 깔끔히 빗나간데다가 의도하지 않았던 과거까지 듣고 말았다. 아마 전부는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그녀가 한 말로 인해 지금 얘기를 듣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약간이나마 격해졌던 레레시아와 달리 아스텔은 줄곧, 처음부터 끝까지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차분한 목소리가 되려 무겁다! 내용이 더해져서 더 무거워! 덕분에 그녀는 점점 멀어지며 말하는 아스텔을 그저 눈으로 쫓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보검이 반짝였다 사라지는 것도. 말을 마친 아스텔이 그대로 가버리려는 것도.
"잠ㄲ-"
레레시아는 무심코 그를 불러세우려다 멈칫했다. 불러서 뭐 하려고. 그렇게 헛다리로 쏘아붙여놓고 이제 와서 무슨 말을 더 하려고? 그렇지만 이대로 보내도 괜찮은건가? 남들에게 별로 하고 싶지 않았을 얘기를 하게 만들었는데? 찰나의 갈팡질팡 사이 누가 등을 툭 떠미는 감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 발 탁 내딛자 다음 발도 내딛어졌고, 멀어지는 아스텔을 불러세우기 위해 목소리가 순간 높아진다.
"자, 잠시만!"
부르는 거에 그치지 않고 빠르게 걸어서 아스텔의 팔을 붙잡아 세우려고 한다. 당황과 미안함과 속이 쓰린 듯함이 뒤섞인 표정을 한 레레시아가 다시금 아스텔의 앞에 섰다. 서자마자 인상을 팍 찡그리긴 했지만. 중얼거리는 말로 보아 아스텔에게 지은 표정은 아닌 듯 했다.
"항상 이 입이 문제지..."
표정에 자책의 기색이 섞인다. 혼잣말은 그 뿐이었다. 그녀는 약간의 뒷걸음을 쳐 거리를 만들더니 곧장 허리를 숙였다. 긴 머리카락이 와르륵 쏟아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허리를 숙인 채 그녀가 말했다.
"미안합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실언을 해 당신의 심기를 건드린 것. 그로 인해 과거를 들추게 한 것. 멋대로 말해놓고 이제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까지.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이제와서 사과랍시고 말을 하는게 그 누구보다도 이기적인 행동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말이- 해야 할 것 같은 말이 그것 뿐이었기에. 그 순간만큼은 진지하게 말하고 조금 후에 숙인 몸을 들었다. 이리 저리 엉망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을 얼굴이 가려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무척이나-
"들은 얘기는 함구할 것이고 이후에는, 어떤 일이든 당신을 성가시게 만들지 않게 주의하겠습니다. 사적으로 얽히는 일도 없도록."
그저 조용히, 그녀의 손이 옷깃을 꾹 잡았다가 놓았다.
"그렇지만, 그러니까... 더는 귀찮게 안 할게. 미안. 아스텔."
단숨에 힘이 빠진 목소리가 그렇게 말을 하고 그녀의 몸이 그의 앞에서 슥 비켜난다. 더는 말이 오가지 않는다면 레레시아도 아스텔도 서로 엇갈려 그 자리를 지나가겠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뭐어, 마리는 전혀 그런 쪽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지만 객관적으로 마리가 마실 수 있는 양을 초과해서 마신 것은 분명했다. 화장실로 갔던 것은 그런 의도는 아니었으나 이내 결국 먹은 것을 게워내고 말았다. 먹은 것은 많이 없었고 거의 술이었지만서도.
비틀비틀 화장실을 나오면서도 마리는 눈이 깜빡깜빡 풀려있다. 다리도 마찬가지로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지 비틀거리다가 이내 중심을 잃고 몸이 기우뚱 했다.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누군가가 마리의 어깨를 잡아 세웠기 때문이었다. 넘어지는 것보다 누구의 손길에 더 놀란 마리는 이내 펑, 하며 여우귀와 꼬리를 드러내고 말았다.
“으응?”
제 몸을 잡아준 사람을 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동료이기에 더 일반 관계들보다 친밀해질 수밖에 없는 이들 중 한 명일 터였다.
“승우—. 폭음의 화시인 여승우.”
왕게임 때의 벌칙을 생각하며 마리는 배시시 웃었다. 지난 번 인사를 했을 때보다 훨씬 풀어져있는 모습이었다.
“누구누구씨가아 행복해야한다고 해서어 좀 마셨어. 승우느은 행복해?”
마리의 여우귀가 한껏 뒤로 접혔다가 이내 물음과 함께 승우의 쪽으로 쫑긋 기울어졌다. 여전히 조금 비틀거리는지 이내 승우의 옷자락을 잡으려했다.
아이구 마리주가 썰로 사람친다 아이구 아야야 (뼈맞음) 근데 그렇게 말하면 레시는 동료들 언급하지. 저번에 레이먼드랑 일상할 때처럼... 네 희생이랍시고 한 짓으로 팀의 사기 떨구지 말고 그렇게 희생하는게 좋으면 과격파로 가라고... 씁 안되겠다 레시 미리 좀 맞자 내 자식이지만 인성이 아주 그냥 (레시 : 꺄아악)
희생하려고 들어온 게 아니라 세상을 바꾸기 위해 들어온 거고, 팀의 사기가 떨어지는 게 아니라 네가 타격받는 게 걱정되는 거 아냐? 동료가 죽는게 무서우면서 여기에 어떻게 있으려고 그러냐면서.... 씁.... 둘이 싸우면 정말 대판 싸우겠는데....(마리 때리기)(에잇)(에잇)
자신을 붙잡는 목소리와 동작에 아스텔의 발이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평소의 조금 멍해보이는 그 얼굴이 그녀를 향했다. 자신을 향해 미안하다고 하는 그 사과말을 들으면서 아스텔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성가시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사적으로 얽히지 않도록 하고,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그 말까지 듣다 아스텔은 다시 입을 열어 이야기했다.
"...내가 무섭거나 혹은 지옥에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혐오스럽다면 그것도 상관없어. 실제로 그 지옥에서 나는 몇이나 죽였고 그로 인해서 무뎌졌으니까. 사람은 피를 보면 기본적으로 동요하고 흔들린다고 하지만 나에겐 또 임무를 하나 수행했구나 정도의 감정밖에 들진 않아. 적을 제거해도. ...어떻게 보면 인간보다는 괴물이지."
허나 자기 자신을 자책하거나 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그저 이게 자신이라는 듯, 그는 그저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잠시 말을 고민하다 그녀의 이름을 넌지시 입에 담았다.
"레레시아 나나리. ...아니. 풀네임은 조금 거리감이 너무 강하다고 에스티아가 얘기한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한다면... 음. 레레시아. 여기선 사과가 나올 필요가 없으니까 사과는 하지 말아줘. ...그저 설명을 하지 않으면 내 입장을 설명할 수 없었고 그걸 입에 담은 것은 내 선택이니까. ...이 세상에 세븐스의 인권은 존재하지 않아. 더욱 심한 일을 당하는 이도 있겠고, 그것은 너, 혹은 다른 동료들도 예외는 아니겠지. ...나도 그저 그런 경우 중 하나일 뿐이야. ...그러니까 동정하지 말고 미안해하지도 마. ...그저 설명에 필요해서 말한 거니까."
눈을 감고 생각을 다시 한 번 정리한 후, 아스텔은 숨을 작게 죽였다. 그러다 그녀가 괜히 갑자기 지나가지 않도록 그녀의 옷 소매를 가볍게 잡으려고 했다. 그 상태에서 그의 눈은 그녀의 눈으로 향하려고 했다. 고개를 돌려사 안 본다면 보지 못했겠지만.
"...귀찮게 하지 않고 사적으로 얽히고 싶지 않다라. ...그게 네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어. ...애초에 나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거니까 남이 하고 싶은 일에 어느 정도 말은 얹더라도 반드시 이렇게 하라고는 하지 않아. 그래서 넌 어쩌고 싶은거지? ...그 미안함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집어치워. 나는 내가 지금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런 일이 있었기에 나는 힘을 얻을 수 있었고, 이 에델바이스의 일원으로서 함께 할 수 있게 된거니까."
그녀가 소매를 잡혀줬다면 이내 그는 여기서 소매를 살며시 놓아줬을 것이다. 그 대신 다시 한 번 말을 이었을 것이다.
"...너는 어쩌고 싶지? 네가 말했던 것을 네 의지로 원한다면 더 말하지 않을게. ...나 역시 타인을 귀찮게 하는 것은 싫으니까."
파드닥 놀라는 모습이 꼭 고양이 같다는 생각은 너무 태평한 거려나. 펑 튀어나온 귀는 고양이가 아니지만 그런 감상이 들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는 배시시 웃어오는 얼굴을 슬쩍 바라보며 판단을 마쳤다. 음, 좀 취했네. 얘가 이런 성격이던가, 하는 의문은 취기 앞에 무용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곱게 취한 편이라 다행이다.
"어, 그래. 뭘 그렇게 부르고 그러냐."
누가 들어도 낯간지러워 할 호칭으로 불렸음에도 그는 실실 웃고만 말 뿐이다. 애초부터 부끄러움이란 개념에 둔감하니 그렇고, 별달리 놀리려 그러는 것도 아닌 듯한데다 취한 사람이 여러 부문에서 얼마나 취약해지는지 알기 때문이다. "와, 냅두면 존* 큰일 나겠는데." 어깨를 붙잡았던 손에 힘이 빠졌으나 아직 놓을 때는 아닌 것 같다. 그는 다시 한 번 마리의 몸을 바로세워주려 위치를 잡고 힘 내보라는 듯 마리의 어깨 뒤쪽을 통통 두드렸다.
"야, *. 다리에 힘줘 봐. 제대로 서고. …아니다, 안 되면 그냥 앉아라. 그게 낫겠네."
마리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나서야 그가 손을 놓았다. 그러고 있으려니 마리가 불쑥 물어왔다.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진 모르겠다 생각하면서도 그는 곧바로 대답해주었다. 그 대답이 꼭 제대로 된 대답이라는 법은 없었지만.
"어어, 일단 씨* 그, 네가 좀 추슬러야 행복해질 것 같다."
별달리 탓하거나 나무라는 투는 아니었을 것이다. 옷자락을 가만히 붙잡힌 채로 멀뚱히 시선을 아래로 향한다. 얌전히 마리가 무얼 하나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