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뭔 심보일까. 그 자신은 둔감해서 제 심리조차 알지 못해 질색하고 만 반응이었지만 사실은 간단한 이유다. 우선은 그냥. 말한 그대로 유루의 깜찍했던 시절을 상상하려니 괴리감이 들어서고, 조금 더 깊게 파고들자면…… 어차피 세븐스로 난 이상 누구나 저마다의 불행을 달고 살았을 텐데, 그런 복잡한 사연은 듣고 싶지 않아서다. 제아무리 둔감한 그라 해도 사람으로 난 이상 기본적인 공감 능력은 갖추었다. 어쩌면 분위기 애매해질 거고, 어쩌면 저 역시 울적해질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아직이다. 그런 생각을 대충 '그런 거 있다'라며 뭉뚱그리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상하게 방심하고 있던 그의 귓가에 안 들으려던 이야기가 꽂혀버렸다.
"*, 진짜 상상 안 가긴 한다."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다는 걸까. 방금까지 질색하던 것과는 딴판으로 그렇구만, 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고 끝이다. 잘 흐르다 그새에 또 시비조로 들리는 말을 받고서도 그는 눈썹 까딱거리며 싱긋 웃기만 할 뿐이다.
"어. 안 맞고 안 털릴 거다, 개*아."
저놈 변덕 부리는 게 하루이틀이어야 짜증이라도 나지. 감정선은 몰라도 그는 유루의 태도에 제대로 적응한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지만 여승우도 참 한결같은 사람이다. 어떤 점에서 그러냐면, 딴에는 양심이 있어서 잘 넘어가니 쉬운 남자라는 사실? 들은만큼 저도 불라는 소리에 순순히 대답한 것을 보면 확실히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뭐… 비슷한데. 어리고, 아는 거 없고, 순진하고, ……사람 좋아했어."
마지막 말로 가서는 조금 뜸을 들이다, 눈이 가늘어지며 미간이 좁혀든다. 불쾌한 감정이 들어서라기보단 정확히 표현할 어휘를 찾느라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결국 풀어낸 말도 본래 표하고자 했던 말을 완벽하게 담아내진 못했지만 그에 대한 첨언은 없었다.
"뭐, 씨* 뒤통수 쳐서 나 죽이기라도 하게? 그런 것만 아니면 구라쯤이야. 일일이 의심하고 살기 귀찮다. 존* 호구 새*가 팔자에 맞나 보지."
별달리 재미있는 소리도 아닌데 킬킬거리다 만다. 이런 사소한 일에는 속아줘도 별 상관 없다. 말 그대로 배신이라 부를 만큼 큰일만 아니라면 그냥 속고 말지. 조금 전까지 속아서 열받았다는 듯 성 내던 것도 그냥 장난이었다 이 말이다.
"하, 넌 씨* 욕 입에 붙이지 마라. 이게… *,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진짜 입에 붙은 거거든. 아, 개 꼴받는데. 야, 너도 존* 말 더럽게 해. 씨* 거리라고. 빨리."
지금 이 장소가 제 방이라는 것만 빼면 딱 곳곳에서 출몰하는 진상들이 하는 짓과 전혀 다를 게 없는 헛소리다. 헛소리에만 그치지 않고 그는 유루가 제 근처를 지날 적에 손을 들어 쿡쿡 옆구리를 찔러대려 하며 귀찮게 굴었다. 뭐, 말이라도 예쁘게 해서 친구 만들라는 소리인가. 물론 비교하자니 묘하게 자존심 상하긴 했지만 굳이 친한 사람을 노력해가면서까지 더 늘리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른 사람한테 그다지 기대하고 싶지도 않고, 아는 사람 딱 하나 있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뭐든지 나은데 그래야 할 필요가 있나. 삶에 필사적이지 않고, 변하고자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태도가 그저 안일하다. 만족의 기준치가 낮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본인이 얄망스러운 짓이나 하고 빈둥거리면 적당히 하다 그만두겠지 싶었는데, 어쩐 일인지 유루는 기본적인 정돈까지 다 끝내주었다. "오, 고맙다. 진짜로." 처음에는 집안일하던 방 주인 훼방이나 놓던 불청객이었는데, 이제는 어째 행실이 역전되어 있다. 그는 순순히 감사를 표했고, 그 마음도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유루가 발짓을 하자 휙 굴러 피해버리고선, 그도 몸 돌려 마주 발길질을 한다. 이건 뭐, 숨 쉬듯이 이러는데 질리지도 않나. 쓸데없이 자존심 강한 두 바보들의 대결이 이런 걸 말하는 걸 테다…….
금방이라도 왜? 라는 물음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어리둥절한 아스텔을 보며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눈매를 휘었다. 그리고 그가 거절할지 받아들일지 아니면 먼저 왜인지를 물을지- 여러가지 가능성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으니 하나가 잡혔다. 군말없이 받아들이기인가.
"아- 괜찮아- 대련도 아니고오 요란하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아."
처음부터 모른다고 했어도 가벼운 스텝만으로 가능한 걸 알려주던가 그럼 됐다며 또 흐지부지 해버릴 것이었기에. 기본이나마 할 줄 한다면 알려주는 번거로움이 없어져서 고마울 따름이다. 레레시아는 그림자에서 나와 내민 손을 잡은 아스텔과 그의 손을 보았다. 내민 건 그녀가 먼저였지만 그가 잡은 대로 잠시 그대로 있었다. 마침 아스텔이 말을 덧붙였기에 그 텀은 그리 이상하지 않았겠지.
"기본이라면 왈츠려나아. 충분해 충분- 서로 발 안 밟을 정도면- 파트너로서는 최고인 거랬어-"
그러니 발만 밟지 말라는 건지. 의미가 있는 듯 없는 듯한 말을 하곤 아스텔과 마주보고 서서 자세를 잡는다. 먼저 잡은 손을 옆으로 뻗고, 적당히 간격을 두고, 남은 팔을 올리려다가 멈칫하며 대답한다.
"흐응. 아스텔은- 매사 관심 없어보이면서어 은근-히 호기심 충만 하구나아? 그래 뭐- 나는 이미 말 했어- 모르는게 약일 때도 있다구우."
니히히. 이질적인 웃음 소리를 흘리고 남은 팔을 올렸다. 처음엔 익숙한 듯 아스텔의 등 뒤로 올렸다가 앗, 하며 위치를 바꿔 아스텔의 어깨 근처로 올린다. 그녀가 하려던 포즈는 남성역이었기에.
"너어는 라라가 아닌데에. 버릇이 이래서 무섭네- 에- 아니면 내가 리드할까아?"
우스개소리 같지만 아스텔이 빈말로라도 그래, 라던가 편할대로, 라고 한다면 정말로 레레시아의 손과 팔이 아스텔의 허리와 등을 받치며 리드하는 쪽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건 아니건, 곧 자세를 다잡곤 같은 발을 내딛는 걸로 한밤중의 기묘한 춤사위가 시작되었겠지.
물론 그다지 쓴 일은 없었다. 애초에 자신 같은 세븐스가 사교 댄스를 배운다고 한들, 대체 어떤 잠입 임무에서 쓸 수 있다는 것인지. 그래도 로벨리아가 가르쳐준 것이니까 어딘가에는 쓸 데가 있지 않을까. 딱 그 정도로 생각하며 아스텔은 제대로 자세를 잡았다. 그러는 와중 레레시아의 말에 아스텔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평소 톤, 즉 무심한 목소리를 내면서 그 말에 대답했다.
"...네가 가디언즈의 스파이라는 것이 아니면 딱히 무슨 말이 나와도 크게 당황할 생각은 없어. ...자랑은 아니지만, 그런 부분에선 피차 마찬가지라는 말도 있으니까. ...이를테면 내 경우도 마찬가지고."
모르는 것이 약. 그것에 대해서 아스텔은 어느 정도 동의했다. 세상에는 몰라서 나은 것도 많았다. 이를테면 자신, 그리고 에스티아, 더 나아가 로벨리아의 이야기까지. 물론 딱히 숨길 것은 아닐지도 모르나, 적어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만큼은 다른 이에게 말하는 것에 저항감이 있었다. 딱히 아픈 과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로벨리아가 만든 제 0 특수부대원들과의 신뢰 관계가 흔들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에. 물론 대부분 혼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니 크게 상관은 없을지도 모르나 로벨리아에 대한 신뢰가 깨지는 것은 싫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일이지만 세상사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었다.
"...여성 역은 어떻게 하는지 몰라. 그러니까 리드는 내가."
말을 마치면서 그는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며 살며시 스탭을 밟았다. 그녀의 허리와 등을 받치면서 조심스럽게 스탭을 밟음과 동시에 그녀의 발을 밟지 않고 정말로 메뉴얼대로 이어나갔다. 기교는 없으며 정말 딱 표준어치의 정도. 좋게 말하면 흐트러짐이 없으나 나쁘게 말하면 조금은 지루할 수도 있는 춤. 허나 그 스탭을 그대로 유지하며 그는 살며시 턴을 넣어주기도 하며 마지막까지 그녀의 몸을 지탱해주면서 천천히 춤을 마쳤을 것이다. 하늘에 떠 있는 달빛을 조명 삼아. 한번씩 들려오는 바람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춤을 마무리지으며 아스텔은 살며시 그녀를 놓아주었고 침묵을 지키다가 살며시 시선을 옆으로 회피하면서 이야기했다.
"...역시 어색해. ...그래도 이해해줘. 말했다시피 나는 싸우는 것 외에는 그다지 잘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