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하게 지내자'라던가 '편하게 지내자'같은건 말이 잘 안나온다. 지금 평화로워도 우리는 지금 목숨을 내놓다시피한것 아닌가. 그런 말 하는것도 상황엔 안 맞겠지. 천천히 생각해보겠다는 당신의 말에 잠시 뜸을 들이곤 묵묵히 서 있다. 요즘들어 만난 애들은 어째 죄다 성씨만 골라 부르네. 하기사, 이건 내가 첫인상을 이상하게 줘서 그런 거겠지. 전에는 그래도 이름에 버라이어티가 있던게, 참 재밌었는데.
"부르고 싶은대로 불러. 또라이라고 부르는 놈도 있는데 뭐."
그것도 명백히 내 잘못이 있지만. 성격 좀 죽이면 그때처럼 이름으로 불리는게 더 많으려나. 그렇게 생각한건 매우 짧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때는 너무 지루했어. 오늘은 되는일이 하나도 없네. 이런 날에 능력을 쓰려면 더 피곤해질 테지. 오늘 훈련은 보류해야겠다. 당신의 뇌리에 무슨 생각이 스쳐지나가고 있는지는 신경도 안 쓰듯, 평온한 그. 아마 지금쯤은 능력의 사용 가능성 생각중일것이다.
"천천히 생각해, 진짜 아무거나 괜찮거든. 그때그때 달리 부르는것도 괜찮아."
뒤늦은 타이밍에 말을 이어붙인다. 혹시나 해서 그런거다, 왜, 당신이 이런 문제 따위에 골머리 썩히면 결국 본인 탓 아닌가. 그런건 자신도 사람인지라 거부감이 든다. 버튼 누르기를 포기하고 에스티아 양이 지금쯤 어디 있을지 상상도를 펼쳐본다. 개발실? 아니면 대장과 함께? 만약 지금쯤 다른걸 하고 있을수도 있지. 그냥 얼굴만 아는 사람인지라, 주어진 정보가 몇 없다. 그냥 내버려 두면 언젠가 고치려나. 그런 생각이 꼬리를 잡던 중, 당신의 목소리에 고개를 살짝 돌려본다. 눈을 가늘게 뜬건 아마 별 실없는 생각 중이었어서 그런 것일테다.
"그래? 아깝네, 돈 날려서. 내가 계속 말 걸어왔으니 말할 타이밍이 없었겠지."
말이 나오기 무섭에 당신이 자판기 쪽으로 달려가는걸 가만 바라본다. 무표정인 얼굴로 눈만 깜박이더니, 이내 자신도 당신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자판기에는 지코가 .dice 1 2. = 1 (1=있다 2=없다)
1= 안 사줘도 된다고 뭐라 하려 했는데, 이미 음료수를 뽑은 상태라면 그냥 받을 것이다. 뭔가 고전 만화에 나오는 양아치가 된 기분이라 조금 거부감이 들지만, 안 받으면 그건 그것대로 무례하지 않은가.
"말리려고 했는데, 늦은겄 같네. 고마워, 잘 마실게."
이게 그렇게 맛없다던게, 과연 소문 값은 할까. 뚜껑을 열고선 한 입 마신다. 괜찮은데? 코코넛 워터 맛이네. 역시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인가. 그런 생각을 한다. 당신을 주시한 결과, 지금 떠나면 자신이 화났다고 오해할 확률이 꽤 높다. 그건 그것대로 귀찮은데. 나중에 같이 임무 나갈수도 있고, 그런건 팀워크가 중요하니. 근데 좀 눕고싶다. 피곤한지, 눈이 조금 가늘어지곤 주위를 둘러본다.
"괜찮으면 어디 앉아서 마실래? 물론 네가 괜찮다면."
굳이 같이 마시자는 소리까진 안 했지만, 말엔 뉘앙스가 있다고 그는 믿는다.
2= 그는 이제 음료수는 별로 마시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그도 그럴게, 벌써 두캔어치 돈을 썻는데 계속 쓰기엔 기분이 좀 찝찝했다. 당신이 아무것도 뽑지 않았다면 당신의 얼굴 앞에 손을 휘적댄다, 됐다는 뜻이다.
"괜찮아. 물 마시면 돼. 너도 가서 일 봐, 자판기는 내가 알아서 말 전해 놓을게."
굳이 막 들어온 신입한테 잡무라던가, 이런 불편한 상황에 방치해 놓을 정도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러면 너무 선을 긋는것 같아보여도, 첫만남에 너무 짜증나게 계속 말 걸면 누구라도 불편할테지. 그가 알 바는 아니다만. 이 부대에 대해서도 드는 생각이 몇 있었지만, 그건 굳이 지금 곱씹긴 싫다.
그래, 이 정도면 좋겠다. 적당한 거리감에, 적당한 친밀감. 이런 걸 친밀감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한 거리감이 곧 적당한 친밀감이겠거니 생각하다가 그가 잠시 뜸을 들이자 뭔가 말을 기다리는 건가? 아니면 할 말이 남았을까? 생각한다. 그 뒤에는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라는 말과 함꼐, 누군가는 또라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에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농담이겠지? 아닌가?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유루 씨."
일단은 무난하게, 성씨로 부르는 걸로 결정했다. 그의 말마따나 천천히 생각하는 게 낫겠지, 어떤 이름이 그의 마음에 들까 생각하는 건 꽤 노력을 들여야 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의미 없는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다면 나쁠 게 없을 테니까. 사람마다 부르는 호칭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건 꽤 특별하게 다가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보다는 지금, 그에게 가져다 줄 음료수가 자판기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게 중요했다. 다행스럽게도 자판기에는 그 음료가 있었다. 자신 쪽으로 걸어오는 상대방, 그는 서둘러 동전을 넣고 그 음료의 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이 자판기는 멀쩡했고, 다음 순간 음료수는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유루 씨."
그렇게 건넨 음료를 그는 고맙다며 받아들었다. 말리려고 했다는 말에는 조금 괜한 행동을 한 걸까 생각했지만 아마 그건 아닐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만약 괜한 짓이었다면 고맙다는 반응은 하지 않았겠지. 자신의 앞에서 곧바로 음료의 뚜껑을 열고 마시는 모습을 올려다본다, 마음에 안 들면 어쩌지,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면서 괜스레 그런 걱정이 생긴다. 음료 때문에 이리저리 움직이게 된 것 때문이었을까. 다행스럽게도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아, 그제야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던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벌써 탄산이 반쯤 빠져 버렸지만, 여전히 시원했기에 괜찮았다.
"아, 네, 괜찮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는 상대방의 모습으로 미루어봤을 때, 음료를 마시면서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려는 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바로 어디론가 가버렸을지도. 그랬기에 그는 상대방이 하는 말이 같이 잠시 음료나 마시지 않겠냐는 말이라고 이해했다. 물론 뒤엣말을 정확히 듣기 전에는 서서 마시는 게 불편해보인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하고 생각하긴 했지만. 문제는 그 다음, 어딘가 찾아서 앉아 음료를 손에 쥐고 마시기 시작한다면 뭘 해야 하나, 무슨 말이라도? 그렇다면 화제를 골라야겠지... 또 복잡해지는 생각을 애써 정리하면서 주변에 앉아서 쉴 만한 자리를 찾는다. 보통 자판기 옆에는 으레 앉을 만한 의자나 기댈 만한 턱이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