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인가. 나름대로 애썼다. 기왕이면 4강까진 올라갈 수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저격수가 일 대 일로 싸운다는 상황으로 이 정도면 노력한 축이라고는 생각한다. 덕분에 역성혁명은 한 단계 나아갔다. 거기에 생각지도 못하게 스승님이 있냐고 물어보는 사람과의 만남까지. 어울리지도 않는 곳에서 노력한 보람은 차고 넘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뭐 그런 느낌으로 드물게도 들뜨게 지내다보면 기숙사를 빗방울이 강타한다. 바깥을 창문으로 내보내면 날은 화창할텐데, 여기만 비가 오는군. 보나마나 마도쟁이들 짓이겠지 싶어서 덤덤히 의념의 흐름을 쫓아 걷는다. 멀리 가지 않아서 익숙한 얼굴. 마침 최근 나를 꺾었던 녀석이 명상하듯 앉아있는걸 발견할 수 있었다.
마도쟁이들은 복잡한걸 말하기를 즐겨한다는게 나의 인상이다. 편견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건 나는 상대의 목례에 마주 고개를 끄덕여 가볍게 받아주곤, 냉장고로 가서 성인인 누군가를 위해 비치되어 있을 맥주 한캔을 딴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경쾌하게 탄산이 터지고, 한모금 꼴깍 하고 목으로 넘겼다.
"내게 이긴 녀석이 하는 말이니까 설득력이 있는데. 뭐, 환경을 이용하는 것이 승률을 높여준다는건 정론이네만."
나 같은 경우는 환경을 특출나게 변경한다거나 그런 것은 어렵다만. 마도 사용자라면 그런 쪽을 열심히 고려할 가치는 있을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너무 복잡한 얘기로 가봤자 공감하긴 어려움으로 나는 그에게도 맥주 한잔 권하기로 했다.
잔을 가볍게 내밀어서 부딫히곤 한잔 더 마신다. 비가 오는 날엔 역시 이런 한잔이지. ....물론 눈 앞의 상대가 인공적으로 내리게 하는 비라곤 해도 말이다.
"나보다 높은 곳 까지 올라갔으니까. 어느 의미론 이겼다고 할 수 있겠지? 결국 서로 같은 녀석에게 깨져버렸단건 분한 요소지만."
씁, 하고 입맛을 다신다. 모니터 헤드를 가진 마도사 샤를은 진 류, 나, 빈센트를 연달아 꺾으며 이번 대련 대회에서 실질 특별반의 최대 장애물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 그가 결국 결승에서는 이주일에게 졌단건 또 여러모로 복잡하다만. 기왕 거기까지 갔다면 우승이라도 할 것이지....
"이명이란 남들이 자네를 부르는 호칭이니까. 뭐 실력있는 녀석이 노골적으로 자칭하며 어필하면 모르겠다만 보통은 그런거 아니겠나. 그래도, 기억하기에 꽤 괜찮은 이름이었을텐데?"
"괴물 같은 녀석이었던 사실이지. 뭐, 나 같은 녀석도 어찌 8강까지 들어갔으니까. 애초에 대진표를 보아하니 상위권에 특별반이 적지 않더군. 우리가 약하진 않아. 협동해서 못이기진 않는다고 보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특별반은 최고라고는 말 못해도 나름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본 전력비로는 점령전이라는 단체전에선 충분히 두각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가지 우려되는건......
"....여태 내가 봐온 특별반이란 조직이 그 '협동' 이란게 능숙하게 될만큼 유대감이 있는 집단이 아니란걸 제외한다면 말이야. 한준혁이도 괴팍한 성격이고. 반장도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네만, 대화에 능숙해보이진 않더군."
괴짜들이 가득한 집단인 것은 어쩔 수 없다쳐도, 친근하게 인원들을 묶으려는 분위기는 현재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지휘관인 한준혁이나 반장, 둘 중 한명이 그런걸 어느정도 유도해주는 편이 좋다고는 생각한다만. 어쨌거나 제대로된 신뢰관계가 구축되지 않은 지금 집단전으로 우리가 얼마나 잘할 수 있을지는 솔직하게 말해선 회의적임에 가깝다.
빈센트는 특별반에서 있던 일을 생각해보았다. 빈센트가 특히 겉도는 감이 있었고, 특별반 내에서도 자신이 무조건 해야 할 일, 의무로 규정된 일만 했을 뿐 특별히 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빈센트 자신이 잘못한 것이 맞았지만, 그래도 빈센트 자신이 기여한 것이건 아니건 문제는 문제였고, 문제는 해결해야 했다. 빈센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시윤의 말에 공감한다.
"준혁 씨의 경우는 성격이 꽤 괜찮아졌습니다. 제가 익숙해졌을 뿐인 것도 있을 수 있지만요. 어쨌든, 그건 문제가 맞습니다. 저도 옛날에 준혁 씨의 지휘에 따를 때는, 믿었다기보다는 지휘실패로 일이 틀어졌을 때 변명할 거리를 전혀 주지 않으려고 지휘를 철저하게 따른 적도 있었으니까요. 지금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태식 씨의 경우는 이것저것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좀 더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삐걱거리는 부분을 다 제거하기에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니까요."
빈센트는 그렇게 말하고, 피암마라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인다.
"...익숙해지려 노력해봐야겠군요. 나중에는 제 이명도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가보고 싶습니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