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이 남아있는 상태의 전 연인과 연애프로그램에 서로 합의하에 참여하였고 거기서 다시 옛 연인과 재결합을 할지, 아니면 새로운 사랑을 찾을지는 여러분들의 자유입니다. 허나 그 결과가 항상 좋을 순 없으며 당신의 캐릭터의 사랑에 대한 미래는 그 누구도 보장해줄 수 없습니다.
#전 연인 선관은 어디까지나 선관일 뿐입니다. 그것을 핑계삼아 편파를 하거나 해선 안됩니다.
#시트에 견제나 이간질이 다 가능하다고 되어있는 캐릭터에 한해서는 그 캐릭터에 대한 견제나 이간질을 시도해도 상관없으나 불가하다고 되어있는 경우는 절대로 하시면 안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캐입이며 오너입으로 오너 견제를 하거나 해선 안됩니다.
#매주 금요일에서 토요일에 자신이 마음에 드는 캐릭터에게 '캐입'으로 비밀 메시지를 보낼 수 있으며 그 비밀 메시지는 그대로 캐릭터에게 전달됩니다. 어디까지나 비밀 메시지이기에 자신이 누군지 직접적으로 쓰면 안됩니다.
#간접적인 호감 전달이나 플러팅 등은 허용이 되나 직접적으로 좋아한다는 고백 등은 특정 기간이 되기 전엔 불가합니다.
#이 스레는 두 달 단기입니다. 또한 프로그램 특성상 주기적으로 계속 시트를 받을 순 없기 때문에 중간에 무통잠을 해버리면 상당히 피해가 커질 수 있습니다.
#캐릭터끼리는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만들어져도 오너들끼린 사이좋게 지내도록 합시다.
#다시 말하지만 라이벌은 어디까지나 캐릭터지. 오너들끼리 견제하거나 편파를 하거나 하지 말도록 합시다.
#여러분들의 캐릭터의 사랑에 대한 미래는 그 누구도 보장할 수 없으며, 그것으로 인해 불평을 한다고 한들 아무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 외의 문의사항이 있거나 한 분들은 얼마든지 물어봐주시고 이 스레는 상황극판의 기본적인 규칙을 따릅니다. 수위가 너무 높아지지 않게 조심합시다. 성행위, 혹은 그에 준하는 묘사나 시도 기타 등등은 절대 불가합니다.
>>13 서로의 방이 마주보는 형태로 있으니까 방으로 향하는 복도에서 마주쳤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둘 중 하나가 다른 이를 보기 위해서 기다렸다는 느낌으로요. 만약 기다린다면 아마 은석이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긴 한데.. 아린이가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 좋다면 그렇게 해도 괜찮아요
여름의 해는 너무 뜨겁다. 밖에 나가기 두려워지는 날씨이지만 아린은 이주변 산책로가 좋아 오후 느즈막한 시간대를 골라 산책을 다녀왔다. 아린은 사실 그렇게 밖을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들어 산책을 즐기게 된 것은 은석의 영향일까?
느즈막하게 나간다고 해도 햇볕은 싫었기 때문에 흰 양산을 썼었다. 머리카락은 방해되지 않게 동그랗게 말아 하나로 올려 묶었다. 얇은 레이스 소재의 흰 민소매 원피스는 더운 여름을 잘 나타내는 것 같았고 눈 색과 비슷한 색의 패디큐어를 한 발은 샌들 속에서 맨발을 드러내고 있었다.
더웠지만 산책은 느긋하고 즐거웠기에 아린은 기분이 썩 좋은 상태였다. 단정하게 묶은 양산을 한 손에 들고 이제 씻고 쉴 생각으로 방으로 향하던 중, 아린은 방 맞은 편에 서 있는 은석을 발견했다.
"아..."
지금껏 마주치지 않은 게 용할 정도였지. 아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땀에 젖어 뺨에 달라붙은 옆머리를 정리하다가 다시금 은석을 봤다.
"안녕."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 뜨며 바라보는 눈동자는 여러 감정이 뒤섞였겠지만 드러내지 않고 삼켜버린다.
지금껏 사정이 있건 어쩔 수 없었건 피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이 자신 쪽이었건, 상대 쪽이었건. 하지만 역시 은석으로서는 계속 피해다니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이 프로그램에 서로 이야기를 하고 협의와 합의를 하고서 참석한 것이었고 방도 마주보는 구도로 배정되었기 때문에 결국 이 프로그램 자체가 아예 전 연인을 모르는 척, 무시하면서 보낼 수는 없는 구도가 아니던가. 사실 그것을 떠나서라도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는 것은 그로서도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은석은 오늘이야말로 아린과 마주보고 얘기를 나눠보려고 했다. 그것이 자신에게 있어서 이득일지 손해일지. 아니면 그녀에게 있어서 이득일지 손해일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그녀와의 관계에서 이득과 손해를 따지고 싶진 않았기에 그저 그는 무작정 복도에 등을 기대고 기다렸다.
발소리가 들렸고 자연히 은석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자신이 기다리고 있던 여성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진실게임을 했을 때 마주했던... 그리고 그 이후는 지금 이 순간까지 마주할 수 없었던 모습이 보이자 그의 마음이 아주 살짝 흔들렸다. 허나 그 감정을 내비추지 않으려고 하며 그는 숨을 약하게 내뱉었다.
"좋은 오후야. 아린 누나."
누나라는 호칭은 사귀건, 사귀지 않건 사용할 수 있는 호칭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굳이 그 호칭을 바꾸지 않았다. 자신 쪽에서 찔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생각을 정리한 후 그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어색함. 그리고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는 막막함. 그 두 감정을 느끼며 그는 다시 숨을 내쉬었다.
"안 바쁘면 우리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우리 한 번은 서로 마주하고 이야기 정도는 나눠봐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싫다면 어쩔 수 없긴 한데."
이 프로그램의 룰. 그것은 상대가 원하지 않으면 강요할 수 없고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녀의 의사를 먼저 물었다.
아린은 은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아린으로서는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진실게임에서 말했듯 은석이 보고싶었고, 잘 지내나 확인하고 싶었고. 그 뿐이었다. 은석을 봤고 또 약 2달간 볼 것이었고, 지금까지로 봐서 자신과 달리 잘 지낸 것 같았기에ㅡ게다가 다른 누군가를 새로 만날 생각도 있는 것 같았다ㅡ 아린으로서는 불쾌하면서도 안심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아린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은석에게 물었다. 사람사이에 있는 워밍업같은 게 없는ㅡ예를 들어 날씨 이야기같은ㅡ 직설적인 화법이었고, 이는 은석에는 불편하면서도 익숙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냥 헤어지고 나서 제대로 마주한 적은 그다지 없잖아. 그러니까 이야기 나누고 싶은 거지. 정 주제가 필요하다면... 그래. 앞으로 어쩌고 싶은지라던가."
프로그램을 먼저 제안한 것은 바로 그녀였다. 그에 대해서 동의를 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고. 물론 자신은 단순히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것보다는 지금의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알고 싶어서. 더 정확히는 자신이 이별을 순순히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아직 납득하지 못하고 있고 그녀와의 거리를 좁히고 싶은 것인지 확인하고 싶은 것에 가까웠지만 그녀는 과연 어떨까. 이리저리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그리고 누나도 나에게 이것저것 말하고 싶은 것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진실게임 때 지은 표정. 아직 기억하거든."
술을 먹긴 했지만 그럼에도 눈에 담고 있던 것은 맞은편 자리에 앉아있던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생생히 떠올리면서 그는 약하게 숨을 내뱉었고 가만히 자신의 방을 바라봤다.
"복도에 서서 이야기하는 것도 좀 애매하네. 방으로 들어올래? 들어와도 뭐 별 거 없지만. 내키지 않으면 안 들어가도 괜찮고."
일단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의사가 중요했다. 다시 한 번 그대로 물어보면서 은석은 아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허나 그 미소는 그다지 밝진 않고, 조금은 쓰린 느낌의 미소였다.
아린은 잠시 바닥을 내려다봤다. 앞으로 어쩌고 싶은지라.... 함께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는 건 헤어지기 전에 끝난 것 아닌가. 은석은 자신이 묻고 싶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글쎄..... 오히려 은석이 자신에게 묻고 싶은 게 많다고 느꼈다. 하지만 아린은 하고싶은 말을 그저 꾹 삼켜버린다.
"응. 아메리카노 한 잔 부탁할게. 아이스로."
그럼에도 같이 이야기하자는 말을 거절하지 못하는 건 역시 미련이 남은 탓일까. 은석이 커피메이커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이 알고 있었다. 복도에 나는 원두나 커피 내음이라거나, 또 은석이 이런 곳에 올 때 가지고 오지 않을 리 없다는 것이라거나. 아린은 달달한 위주의 커피나 음료를 마셨지만 아무래도 이런 곳에서 부탁하기에는 애매하기도 했고 단 것이 당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커피를 맡겨논 것처럼 당당하게 달라고 하는 건 이전의 습관 같은 걸지도 몰랐다.
아린은 은석이 방문을 열면 자연히 그 안으로 들어가 앉으라는 곳에 앉고 은석이 커피를 내린다면 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봤을 것이었다.
달달한 커피가 아니라 쓴 맛이 도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모습이 그에겐 상당히 낯설게 느껴졌다. 그 동안에 그녀의 취향이 바뀐건지, 아니면 지금은 편하게 원래 먹던 것을 먹고 싶지 않은 것인지.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당당하게 원하는 것을 달라고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은 또 반갑게 느껴져서 그는 피식 웃었다. 자신이 아는 아린의 모습이었다.
열린 문으로 들어오면 그녀의 방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벽지와 가구들이 비슷한 구도로 배치되어있는 것이 보였을 것이다. 방을 제작진 쪽에서 준비하는 이상 아무래도 방의 구도나 가구 배치는 비슷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커피를 끓일 때 사용하는 커피 메이커와 커피를 끓일 때 쓰는 원두. 그리고 기타 그의 개인 물건들이 있다는 것 정도일까. 일단 식탁에 앉으라고 이야기를 하며 그는 원두를 내온 후에 아메리카노를 끓이는 것에 집중했다. 이리저리 말을 할 것은 있었지만 지금은 커피 끓이는 것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지금 여기서 말을 하기보단 커피를 내려놓고 식탁에 앉아 마주보고 제대로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니까.
약간의 시간이 흘렀고 그는 커피잔 두 개에 아메리카노를 담고 얼음을 띄웠다. 아무래도 카페에서 만든 것보다는 조금 양이 적었고 맛과 향이 조금 다르겠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다른 음료는 아니었다. 이내 그는 그녀의 자리에 커피잔을 하나 내려놓고 자신은 맞은편 자리로 간 후에 커피잔을 내려놓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이어 그는 그녀를 마주보며 숨을 약하게 내뱉었다.
"여기 아이스 아메리카노. 카페에서 낸 것과는 조금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그건 어느 정도 양해해줬으면 좋겠어. 아무래도 환경도 다르고, 이것저것 도구도 부족하니 말이야. 물론 그래도 맛은 날거야. 누가 끓인건데."
괜히 웃으면서 자부심을 보이는 것이 어쩌면 긴장한 마음을 감추려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실제로 그랬으니 그녀는 눈치챌 수 있었을까. 뒤이어 그는 다시 한 번 숨을 약하게 내뱉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건 묻고 싶었어. 누나는 정말로 내가 잘 지내는지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여길 제안한거야? 아. 이건 탓하는 거 아니야. 그냥... 묻고 싶었어."
물론 진실게임에서 그렇게 답을 하긴 했지만 순전히 그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싶어서 그는 그렇게 질문했다. 그야 너무 리스크가 크지 않은가. 전 연인에게 다른 사람과 만날 수도 있는 연애 프로그램에 참여하자는 말이 쉽게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물론 정말로 단순히 그런 이유일지도 모르지만 역시 확실하게 그녀에게 듣고 싶었다. 물론 답을 해줄지는 알 수 없었지만.
>>39 아마도 그렇겠지! 의도치 않은 작품 제작 과정 공개! >>41 하긴 타이밍이 그랬지ㅋㅋㅋㅋ 맞아 그래서 더 기대가 돼. 나중에 아린이랑도 꼭 만나보고 친해져서 초상화도 그려주고 싶다~ >>43 확실히 일상하면 예상을 넘어선 모습이 많이 보이지 개인적으로 그게 참 즐거워 후후
예술계 에이전시 Moon雪(문설)의 대표 설시현은 그의 회사에서 늦은 시간까지 머무르며 일을 보고 있었다. 영월이 빠져 일이 줄기는 했지만 그의 회사에 소속된 인원을 생각하면 한 명 빠진 건 티도 안 난다. 오히려 잘 짜인 톱니들처럼 맞물리던 일정에 공백이 생겨 그것을 메꾸기 위한 조정이 필요한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 마디 불평 없이, 스스로 모든 인원의 일정을 움직여 두 달 간 비어있을 한 사람 분의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똑똑-
"...들어와."
노트북과 데스크탑을 동시에 놓고 바쁘게 두 화면을 보고 있던 시현의 귀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듣고 제일 먼저 한 건 시간의 확인이다. 오전 1시 15분. 당일 당직인 경비를 제외하면 전원 퇴근했을 시간이었다. 아니, 경비도 보안실에 있을 시간이다. 그러니 이런 시간에 찾아올 인물은 시현의 머릿속에 딱 한 사람 뿐이었다. 예의를 차릴 것 없는 상대였기 때문에 가볍게 들어오라 대꾸하자 끼이... 하는 소리가 나며 묵직한 사무실 문이 열린다.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오는 건 시릴 정도로 검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 고양이를 닮은 얼굴의 여성- 시현과 영월의 중간인 남매, 설류월이었다. 가벼운 평상복 차림의 그녀는 손에 보온병과 작은 통을 들고 들어와 싱긋 웃었다.
"여태 집에 안 왔길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네요. 고생하시는 오라버니를 위해 야참을 좀 챙겨왔답니다. 좋아하시는 커피도-" "소름끼치는 말투는 관두지. 지금은 들을 사람 누구도 없다." "...그래. 사실 나도 좋아서 하는 건 아니니."
사근사근 찾아온 용건을 말하는 류월의 말을 시현이 싹둑 잘랐다. 그러자 류월의 말투가 단숨에 까칠하게 바뀐다. 말투 뿐일까. 부드러이 웃던 얼굴이 스윽 식어 딱딱히 굳는다. 그러나 그 쪽이 진짜인 듯 되려 자연스럽다. 류월은 사무실 내부의 접대용 소파로 다가가 털석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들고 온 건 소파 사이에 놓인 테이블에 올려놓고, 소파 등받이에 기대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대로 숨을 길게 내쉬며 밀크 초콜릿색 눈동자로 모니터 앞을 떠날 줄 모르는 시현을 힐끗였다.
"기껏 왔는데 상대도 안 해줄 셈? 저건 안 먹어도 커피는 마셔. 혼자 있으면 물도 제대로 안 마시잖아." "여기까지만 마무리하고 갈 거다. 보채지 마." "그럼 먼저 말을 하던가." "네가 앞섰을 뿐이야." "퍽이나."
시현과 류월의 대화는 말투와 목소리의 온도로 알 수 있듯 거칠고 차가웠다. 하지만 이들은 대외적으로는 누구보다 우애 깊은 남매들로 평판이 자자했다. 금슬 좋은 기업가 부부의 누구나 부러워 하는 금지옥엽 자식들로서. 그러나 그들의 부모가 쇼윈도 부부인 것처럼- 그들도 뒤로는 서로를 그저 '써먹기 좋은 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대하고 있었다. 그것이 설 씨 집안에서 배운 것이었으니까.
타다닥.
가벼운 키보드 소리를 끝으로 시현이 일어나 접대용 소파로 넘어왔다. 볼 이가 없다보니, 목을 죄는 넥타이를 풀러 단추 두셋을 풀어놓고,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올린 편한 차림이다. 그럼에도 지친 기색 없이 류월과 마주 보는 소파에 앉아 그녀가 가져온 것들을 풀어놓았다. 이탈리안 로스팅의 원두를 재차 진하게 내린 커피를 컵에 따르고 락앤락 통을 열자 호밀빵 샌드위치가 먹음직스럽게 담겨있다. 커피로 목을 축인 시현이 말했다.
"커피, 누가 내렸냐." "내가 했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해줄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렇군. 그럼 이 샌드위치는." "그것도 내가 하지 누가 해? 이상한 거 안 넣었으니까 그냥 좀 먹지?" "확인차 물어본거다. 고맙다. 잘 먹으마." "퍽이나!"
서로 친절을 베풀고 감사 인사를 듣는 것마저 차갑고 서늘하기 그지없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이 역시 우애의 연장선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서로는 잘 알았다. 절대 서로가 그렇지 않다는 걸. 시현은 잘 먹겠다는 말을 끝으로 샌드위치를 먹는데 집중했다. 류월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핸드폰을 꺼내 모 포털 사이트의 메인 뉴스들을 뒤적였다.
한동안 사무실 안엔 시현이 먹는 소리와 류월이 자세를 바꾸는 소리만 들렸다. 와작와작. 부스럭부스럭. 쉬지 않고 제법 큼직한 샌드위치 하나를 다 먹은 시현은 커피를 마시며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를 다시 힐끔거린 류월이 툭 말문을 열었다.
"영월이 연락은 없었어? 나한텐 온 거 없던데." "너한테 없으면 나한테도 없는거지. 그걸 굳이 묻나." "혹시 모르니까 물었다. 꼬일 일 생기면 너한테 연락할 거 아냐." "그건 그렇지. 뭘 신경쓰고 그러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 않나. 게다가 우리 사이에 새삼." "넌 그래도 난 아니거든. 이 냉혈한 새끼야."
류월이 어금니 악 문 소리를 내자 시현의 차가운 시선이 바로 꽂힌다. 남매가 아니라 서로를 철천지 원수 보듯 한다. 짧은 대치 끝에, 시현이 눈을 내리고 류월이 혀를 차며 동시에 분위기가 풀린다. 와작. 시현이 남은 샌드위치를 들어 깨물고 류월은 보온병에 남은 커피를 새 컵에 따라 입가로 가져갔다. 다시금 생겨난 불편한 침묵을 깬 건 시현이었다.
"그거 아냐." "뭘." "영월이 프로그램에 참가할 수 있게 해주는 걸 대가로 거래를 제한했다." "거래? 무슨 거래, 너 설마." "미리 말해두지만, 이 거래는 내가 제안한게 아니야. 영월이 먼저 스스로 들고 왔어." "됐고 무슨 거래인데?"
다시금 흐르기 시작한 흉흉한 분위기 사이로 시현이 일어나 자신의 책상에서 종이 몇 장을 집어온다. 그걸 류월에게 건네주고 다시 소파에 앉았고, 류월은 받자마자 내용을 읽느라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시현이 샌드위치를 다 먹고 통들을 정리하고 컵에 커피를 다시 따를 쯤에서야 류월의 매서운 목소리가 시현을 다그쳤다.
"이 개xx야. 이딴 걸 거래라고? 이게 거래야? 거래냐고, 이 새끼야!" "목소리가 커. 오늘 당직 없는 날 아니다." "어쩌라고!"
하이톤의 고성과 함께 종이 몇 장이 테이블로 던져졌다. 얇은 종이들은 힘을 이기지 못 하고 사방팔방 흩어진다. 종이들을 훑은 시현의 흑색 눈과 그런 시현을 노려보는 류월의 갈색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시선이 맞는 그 지점부터 따가운 냉기가 풀풀 흐르는 듯 하다면 기분 탓일까. 현실일까. 조금 전과 달리 대치를 이어가며 시현의 담담한 목소리가 말한다.
"내가 먼저 말했지. 영월이 직접 가져온 거라고. 두 달 공백에 비하면 과한 내용이지만 본인 의사가 그러하니 받아줬을 뿐이다." "저게 과하다는 말로 끝날 내용이야? 넌 어쩜 그렇게 아버지랑 똑같을 수가 있어. 어? 아무리 배운게 그런 것 뿐이라고 해도, 아버지는 아버지고 너는 너 아니었어? 난 그래도 네가 최소한 그것 만큼은 다를 줄 알았어.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똑같이 행동해? 어떻게 애를 두 번 죽이려고-" "추측 만으로 말하는 건 관두지." "추측? 하! 너 내가 모를 줄 알았지? 너 때문이잖아. 3년 전에, 영월이가 그 지경이 된 건."
3년 전. 류월이 그 시기를 입에 담자 시현의 눈빛도 변했다. 차분하고 이성적이던 검은 눈에 거친 분노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의 반응이 정곡을 찔렸다는 반응이었으니, 류월은 더욱 기세등등하게 말할 뿐이다.
"어머, 너 눈빛 바뀌었다? 왜? 찔려? 넌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인데, 그 결과가 그럴 줄 몰랐어서?" "말 조심해. 설류월." "내가 틀린 말 했어? 너 혼자 찔려놓고 왜 나한테 말조심하래. 그러길래 혓바닥 잘 놀렸어야지. 자업자득 해놓고 화를 낸다니 어이가 없-"
휭- 쨍그랑! 투둑...
커피가 담긴 컵이 벽으로 날아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사무실 안은 조용해진다. 그 컵이 류월의 바로 옆을 스쳐간 탓도 있었다. 인정사정 없이 던져진 컵은 벽에 닿아 동시에 형태를 잃으며 사방으로 파편을 뿌렸다. 그 중 몇몇은 소파가 있는 곳까지 굴러왔다. 점점이 커피 자국을 남기며 널브러진 컵의 잔해를 류월이 돌아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 헛숨과 함께 혀를 찼다. 허, 참!
"아버지 같은 사람은 안 되겠다고, 입술 터뜨려가며 맹세할 땐 언제고. 이제는 이런 버릇까지 닮아가는구나. 정말 실망이다. 설시현." "...나가." "아 네. 말씀대로 하지요. 설 대표님."
이제는 시현이 이 악 문 소리로 류월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류월은 고분고분하게 일어나 가져온 것들을 다시 챙겨서 사무실을 나갔다.
끼익. 쿵.
굳게 닫히는 문소리 뒤로 홀로 남겨진 시현은 착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헝클었다. 그러던 중 테이블 위를 뒹굴던 종이 한 장에 눈길이 꽂혔고, 거기 적힌 몇 줄의 내용을 읽다가, 이걸 들고 왔던 영월의 모습을 떠올리고 말았다.
'대표님.' '저 여기 나가겠습니다.' '나가서, 이번으로, 매듭 짓겠습니다.'
생기 잃은 눈으로 그를 보며 인형처럼 말하던 영월을 그가 과연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하아-..."
커피로 인해 되려 속이 쓰림을 느끼며 시현은 소파에 늘어졌다. 회한 깊은 한숨을 푹 내쉬어봐도 쓰라림은 더 짙어질 뿐이라. 시현의 밤은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갔다.
아린은 익숙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늘 그랬듯 은석이 머무르는 공간에는 커피향이 감돌았다. 그것은 은석에게서 나는 향과 비슷해서 헤어지고 난 이후에도 종종 생각이 났다. 한동안 카페는 가지 못했다. 커피를 마시면 은석이 생각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카페인 섭취는 에너지 드링크로 해결하곤 했다.
아린과 은석은 때로 본인의 공간을 공유했었다. 아린의 집에도 은석이 온 적도 있었고 은석의 카페에서도 아린은 꽤 많은 시간을 보냈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은석의 방에 들어오는 것은 익숙하면서도 마음이 쓰렸다. 식탁에 앉아 커피를 내리는 뒷모습을 구경하면서 아린은 지금의 이 상황이 못내 그리웠었다고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인정은 쓰고 아파서 어쩔 수 없이 입을 꾹 다물게 된다.
아린은 식탁 의자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대접받았다. 아린은 그 잔을 받아들어 한 입 마셨다.
"응, 맛있네. 고마워."
은석과 헤어진 이후 처음으로 입에 댄 커피의 향은 이전의 그와 같이 그대로였다. 아니 조금 달랐을까. 카페에서와 같지 않은 것은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지만. 왠지 아린은 그가 조금은 자신으로 인해 아팠기를 조금 바라게 되어버린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 생각을 하니 나쁜 사람이 된 것 같다. 자신이 먼저 헤어지자고 했으면서.
아린은 은석이 너무 그대로인 것 같아서 속상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물음에 아린은 조금 입을 앙다물었다가 손 안의 컵을 만지작거렸다가 이내 대답했다.
"왜? 그러면 안 돼?"
아린은 컵 안의 커피만 뚫어져라 내려다보며 답했다. 얼음이 달그락 움직이는 게 보였다. 먼저 헤어지자고 한 사람이 보고싶다는 이유만으로 다시 너를 찾아갈 수 없다. 네가 어떻게 지내는 지 알 수 있는 방법은 헤어진 이상 없었다. 둘 사이에는 함께 아는 지인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있다고 하더라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너랑 시간을 보내면서도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 지 확실히 알 수 없었는데, 헤어진 지금에야 더더욱 모르는 게 당연했다.
아린은 은석의 제일 첫 번째 질문이 제 진의를 다시 묻는다는 것이라는 게 마음이 아렸다. 역시 너는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거겠지. 넌 늘 본심을 숨기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린의 눈이 흔들흔들 흔들리며 조금은 촉촉해졌다. 전 연인 앞에서 네가 보고싶어서 불렀다는 말을 하는 것이 못내 비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분명 은석은 저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여러가지 이득을 생각하고 나왔겠지 생각하니 더더욱 그랬다.
"그렇구나. 누나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누나는 이런 것으로 남을 속이거나 할 사람은 아니니까."
정말로 리스크를 감안하고 이렇게라도 다시 보고 싶어서 자신을 불렀다는 것일까. 어떻게 보면 참 그녀답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쓴 표정을 지었다. 물론 헤어진 이상 예전처럼 보기 힘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방법을 택할 것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진실게임에서도 예상치 못한 답이 나와 당황했었지만. 커피를 머금으며 다시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의 눈빛이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손을 뻗어서 눈가를 훑어주는 것이 좋을까 싶어 반사적으로 팔이 올라갔지만 차마 손이 그곳에 닿진 못했다. 자신이 그곳에 닿을 자격이 있을까 싶어. 헤어지자는 말을 먼저 하게 한 자신의 과오가 다시 한 번 그의 가슴을 쓰리게 만들었다.
"그래도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도 드네. 진실게임때도 얘기했지만 나와의 시간이 누나에게 있어서 기억하기 싫은 것, 시간 낭비로 남은 것은 아닌 것 같으니까."
진실게임에서도 했었던 말과 비슷한 답을 하면서 그는 그녀의 눈을 다시 마주보다 제 오른쪽 주머니에 넣어놓은 하얀색 손수건을 끄집어낸 후에 테이블 아래에 내려놓았다. 마치 커피를 닦을 때 쓰려고 올려둔 것처럼. 물론 그것을 쓸지는 그녀의 자유였지만 아마 안 쓰지 않을까. 그렇게 추측하면서 그는 다시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그렇다면 이제 날 봤으니까 어쩔 생각이야? 누나도 자영업자니까 이 제안의 리스크를 아예 생각하진 않았을 거 아니야. 내가 말한다고 와닿을지는 모르겠지만 누나는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야. 이미 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누나를 다시 이렇게 마주하니까 어쩌면 좋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야."
아마 자신은 물론이고 그녀, 그리고 여기에 참가한 이들 모두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기 힘들지 않을까 싶지만 그럼에도 은석은 그녀에게 물었다. 딱히 그녀의 반응을 보고자 파해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을 본 목적은 이미 달성되었다. 그렇다면 이후는 이제 어쩔 생각인가. 남은 7주 동안 다양한 일이 있을테고 자신이나 그녀나 선택을 해야만 했다. 물론 여기서 답을 내는 것은 힘들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나는 누나를 마음에 들어하는 이가 분명히 나올 거라고 생각해. 누나는 그래도 괜찮아? 단순히 나를 보기 위해서 여기에 왔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 사정까지 생각하고 배려해주진 않을거야. 분명히."
화면의 중심에는 반곱슬 연갈색 머리카락을 한 적당히 수더분한 인상의 남자가 있다. 남자의 뒤로 <XX대학교 모의면접>이라 적힌 현수막이 보인다. 남자의 자세는 뻣뻣해== 긴장한 기색이 없지않지만 그 와중에서도 남자는 보기좋은 미소를 유지하고 있다. 화면에는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선가 엄격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지원자 이름이 어떻게 되죠? - 아, 네. 지원자 정연호입니다. - 우리 회사에 지원한 동기부터 말씀해 보실까요. - 건강하고 사랑받는 아이들의 유년기에 조금이나마 일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 ▶skip
- 연호 학생. 거기까지. 멈춰 봐요. - 네? - 그 대답은 잘못됐어요. - ....네? 왜요? - 너무 어두워요. - ..그치만 이게 진실인데요.. - 그렇게 대답하면 어느 회사에서도 학생을 뽑아주지 않을 거예요. 다른 대답을 준비해 오세요. - ......
동영상에 얼굴을 비추고 있는 남자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쓰디쓴 미소를 지어 보인다.
지난 주에 모두를 호출해서 진실게임을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모두의 핸드폰에 문자가 들어왔습니다. 저번과 큰 내용 차이는 없지만 이번에는 이미지게임을 할 예정이니 모두들 강당으로 와달라는 내용의 메시지였습니다.
기숙사 건물 밖으로 나가 조금만 옆으로 꺾으면 강당 건물이 보였을 것이고 그 안으로 들어서면 정말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함께, 길다란 식탁이 보입니다. 그 위에는 저번처럼 술은 물론이요 가볍게 먹을 음식, 그리고 음료수들도 있습니다. 저번처럼 자리는 전 연인들끼리 마주보는 구도였고 각자의 자리 앞에 자신의 이름이 쓰인 이름표가 붙어있었습니다.
은석은 이번에도 가장 먼저 왔는지 자리에 앉아 여유롭게 들어오는 이들에게 미소를 비추면서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맥주를 딴 것을 보면 먼저 술을 한 잔 먹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이번에는 이미지 게임이 시작되려는 모양입니다. 각자의 자리에 앉아 술이나 안주, 혹은 음료를 마시면서 가볍게 이 분위기를 즐겨보도록 합시다.
물론 중간에 2차 미션 공지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럼 지금부터 이미지 게임을 시작하도록 할게요! 룰은 출석 순서대로 질문을 한 후, 그 질문에 대해서 질문자 포함 모두가 이 사람이 이럴 것 같다를 지목해주시면 된답니다. 단! 모두의 캐입의 캐붕이 없도록 자신의 전 연인은 선택할 수 없어요. 이를테면 저 같은 경우는 아린이를 그 어떤 질문에도 선택할 수 없어요. 이 점 반드시 유의해주세요. 그리고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이는 질문자에게 '진실 게임 질문'을 받는 거예요! 답은 무조건 하셔야 한답니다.
순서는 영월 - 연호 - 소금 - 채린 - 성규 - 은석 순서에요! 그리고 가급적 질문 레스나 답 레스는 짧게 써서 빠른 텀으로 가도록 해봐요. 자. 지금부터 시작이에요! 영월주부터!
마실 것이 널리고 깔렸지만 손이 가지 않는다. 소금은 겹쳐 쥔 양 손에 힘을 주었다가 풀길 반복하고, 그저 생소한 게임을 어떻게든 따라잡으려 머리를 팽팽 돌린다. 저 질문에 어울리는 사람을 찾으면 되는 게... 맞겠지? 데굴데굴 구르던 검은 눈이 반짝이는 금발에 닿는다. 저 길이에 금발이라면... 소금은 천천히 손을 들어 채린을 가리킨다.
엉거주춤 올렸던 손은 뻘쭘하게 내려가고 소금은 조금 부끄러워 졌다. 사실 그는 이런 게임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런 자리도 별로 가져 본 적 없고. 그래서 머리는 뱅뱅 돌고 심장은 자꾸만 떨리는데, 와중에 그래도 한 턴을 무난히 넘겼다고 어깨에 들어간 힘이 조금은 풀린다. 그는 그렇게 더딘 속도로 적응하고 있었다. 술이라. 소금의 시선은 자연스레 영월의 앞에 놓인 병에 꽂힌다.
자신의 앞에 있는 맥주잔에 맥주를 가득 따르며 은석은 연호의 잔에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혔다. 쨍- 아름다운 소리가 나며 은석은 그 맥주를 천천히 마셨다. 고작 한 잔. 이 정도로 취하진 않지만 그래도 분위기에 묻혀버려 질문 기회가 묻히지 않을까 하는 턱도 없고 말도 안되는 계획하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강청은 질문 지문을 곱씹어보다, 성규가 그 지문 뒤에 자신을 그 대상자로 지적했음을 알고 표정 없는 얼굴로 성규를 빤히 쳐다보았다. 안타깝게도 잘못 골랐다. 강청은 짱구는못말려 극장판 어른제국의 역습 짱구아빠의 회상장면도 표정에 한 치의 변화 없이 볼 수 있는 강철심장이다. 문득 강청은 자신이 또 다시 사람들의 한가운데 있음을 떠올렸다. ...그 사실을 떠올리니 기분이 조금 나빠졌다. 강청은 술잔을 기울여 마시고는, 아마 영월은 아니겠지, 하고 무심코 생각하다가 '자신의 전 연인은 지목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는 것을 방금에서야 발견했다. 뭐, 이번 질문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나.
"소금 씨, 아니면 연호 씨 두 분 중에 한 분일 텐데- 아무래도 서비스직이라는 게 자칫 메말라버리기 쉬운 직업이지요. 그러니 소금 씨를 지목하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자신은 계속 울고 있었다. 삼 년 전 그 날부터 계속해서 지금까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울어오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전, 어머니께서 유언을 남기시고 눈을 감는 그 순간부터 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이전, 집의 저축통장도 등기문서도 어머니의 수술비를 위해 조금씩 모아둔 통장까지 생물학적 부친이 죄다 도박비로 날려버린 그 순간부터 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이전인지도 모른다. 그 때부터, 계속 울고 있었다. 이제 눈물도 말라버리고 목소리도 바닥이 나버려서, 울고 있어도 우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 뿐.
그런 삶이다.
강청은 문득 또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아득히 드리운 그늘의 깊이를 느꼈다. 공연히 착잡해서 술을 두어 잔 더 마셨다. 딱히 달라지는 게 있을 리는, 없다만.
그저 나중에 다시금 어머니를 만날 때, "내 몫까지 대신 살아간 삶은 행복했니?" 하고 여쭈어보시거든, 거기에 "네,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사실이, 그것 하나만이 그에게 선명한 두려움이었다.
아뿔싸, 내가 내 무덤을 팠구나. 아니, 기뻐해야 하나? 미안해해야 하나? 옛 애인에게 질문을 하게 된 상황에 대한 당혹스러움과 어쨌든 주목받는 상황이 만들어졌기에 잘만 하면 인지도는 챙길 기회는 잡았다는 생각이 교차해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지금은 방송중. 감정을 드러낼 게 아니라 머리를 굴려야 한다. 눈도장을 찍는 게 중요하다곤 해도, 너무 가혹한 상황은 만들기 싫었다. 성규는 물잔을 끝까지 비우고 헛기침을 한 뒤 입을 열었다.
깜박. 구월은 줄어들지 않는 제 소주잔을 바라본다. 마시든 마시지 않든 누구도 신경쓰지 않으니 입에만 갖다 대는 수준으로 한 모금씩 홀짝일 뿐이다. 그렇게 마셔서 더 맛이없는 건지. 조금 남은 술을 전부 비우고 잔을 바꿔 홀로 맥주를 가득 따른다. 맥주 정도는 괜찮으니까. 아마. 뺨의 붉어진 홍조의 열감이 불편해 괜스레 손등을 가져다 대본다. 다들 잘 마시는 게 신기해.
조용히 술을 마시면서 모두의 동태나 정보에 집중하던 그는 마지막으로 잔에 담겨있는 맥주를 마신 후, 잔을 내려놓았다. 이 이상 더 먹을 수는 있지만 딱 지금이 기분 좋게 술기운이 올라오는 시기였으니 적당히 끊는 것이 제일이었다. 제 추태를 보일 마음도 없었고, 술을 너무 먹어서 내일 숙취로 고생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디까지나 술은 적당히 마셔야 즐겁고 재밌는 법. 그렇기에 그는 말 없이 근처에 있는 두루치기와 계란말이를 접시에 담고 가만히 문답에 집중했다. 참고할 것은 참고해서 나쁠 것은 없었기에.
제 이름이 끉이지 않고 호명될 때마다 소금의 눈에서는 빛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서로 지목을 못 하는 저와 성규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일제히 소금을 부르는 상황에서 비롯된 긴장감이, 그리고 속에서 펄펄 끓는 복잡한 감정들 따위가... 버겁다. 도망가고 싶다. 하지만.
"... ...나, 나는, 나는..."
소원을 하나 빌 수 있다면 무엇을 빌 거냐고 묻는 목소리가 익숙하다. 낮다. 그러므로 편안하다. 그간 일어났던 관계의 변화와 무관하게 가까웠던 사람의 목소리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신경줄은 빠르게 진정되어 소금에게 혀를 굴릴 기회를 부여했고, 그래서 소금은 비로소 고개를 든다.
"옛날로 돌아가서, 그래서... 너한테 했던, 그런, 귀찮고 힘들고... 힘들게 했던 말들... 행동들, 전부 안 하고 싶어."
"...내, 내가 너무 모자라서, 느려서, 너도 힘들었을 때... 더 힘들게 해서, 돌아갈 수 있으면 그렇게 안 하고 싶어. 안 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까..."
더듬더듬 이어나가는 목소리가 떨린다. 방송이니까 딕션도 관리해야지, 그런 생각 따위 할 수도 없다.
"... ...미안하다고 하고 싶어. 사과하고 싶어..."
마지막 말은 개미 기는 소리처럼 작다. 소원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말을 뱉고 소금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역시 아무래도 나는 길을 잘못 든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강청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이제 이런 건 자신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잠깐 자리를 비워서 담배라도 한 대 필까 싶지만, 지금 자리를 비우기도 그렇고. 해서 강청은, 결코 영월과는 상관없을 질문을 머릿속에 가볍게 떠올렸다. 그래, 이거다. 화살표가 엉뚱한 데로 향할 걱정도 없고, 그럭저럭 분위기를 통념적인 기준에서 밝게 만들 수 있는 질문. 계산을 마친 강청은 입을 열었다.
특별한 판단기준은 없다. 그냥 인상이 그렇다. 사람을 감정적으로 이 사람은 저렇겠다 저 사람은 저렇겠다 파악할 만한 감각은 이미 퇴색되어 없어져버린 지 오래지만, 나름대로 사람들 사이에 부대끼며 살면서 모아온 데이터베이스는 건재했다. 고정관념이라고 면박을 준다면 할 말이 없다. 실제로 그 비슷하니까.
돌아온 소금의 대답에, 성규는 그만 마시던 물을 코로 뿜고 말았다. 급히 큰 손으로 얼굴을 가려 우스워진 몰골을 고화질로 녹화당하는 사태는 면했지만, 손수건으로 코 밑을 급히 훔치면서도 성규는 쉬이 동요를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무난하게 넘기겠거니 했는데, 이런 의외성이라니. 다행히도 시간관계에 힘입어 질문 차례가 다른 출연자에게로 돌아갔기에, 성규는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 헛기침을 한 뒤 대답했다.
한명 두명 잔을 내려놓는 사이에 영월은 계속 잔을 들고 있었다. 반 정도 남은 술은 올라오는 기포의 양이 점점 줄고 있다. 그럼에도 덤덤하게 마시며 주변을 흐르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소금의 가녀린 목소리에 영월도 잔을 내려놓았다.
끼익.
조금은 거슬리는 마찰음과 함께 영월이 일어섰다. 그대로 나가려나 싶었으나, 영월은 어깨에 걸치고 있던 가디건을 내리더니 소금의 자리로 가 소금에게 가디건을 덮어주려 한다. 거절하지 않았다면 그걸로 어깨를 감싸주고, 거절했다면 덮어줌 없이 자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놓았던 잔을 들어 한모금 마시고 대답한다.
구월은 입이 짧은 탓에 어릴 때부터 음식이 눈앞에 곱게 차려져 있지 않으면 무언가 먹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종종 거르는 일이 있었다. 생각보다 손이 가는 편으로 본인은 그런 점이 싫었으나 고치려는 자각도 없었다. 구월이 하는 일이라곤 조용히 눈만 꿈뻑거리며 취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뚜렷하게 붙잡는 일 뿐. 시야 속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동작을 흐리게, 흐리게 바라보는데 물결치는 금발 머리가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사르륵 흘러 내리는 걸 멍하니 응시했다. 아까 분명 맥주잔에 투명한 걸 잔뜩 원샷하셨던 것 같은데. 구월은 그것이 물이라 믿고 싶었다. 그녀는 저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무척 고운 얼굴이었는데, 그녀의 직업에 사람들이 쉽게 갖는 편견을 조금도 깨지 않는 미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제게 시선을 맞추어 웃으며 보라색이 가득 담긴 잔을 건네는데 그 순간 심장이 빨리 뛰는 것 같아 부끄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수줍게 잔을 받아들어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느릿하게 여러번 끄덕였다. 너무 상냥하셔. 너무 미인이시고.. 언니 너무 예쁘고... 그런 말을 속으로만 중얼이며 받은 포도 주스를 홀짝인다. 포도 주스는 구월이 제일 좋아하는 음료였다.
"한성규 씨."
다들 하나씩 입을 열 때 구월도 제 타이밍을 재다가 낮은 톤의 목소리로 조곤조곤하게 입을 열고 성규의 시선을 슬며시 피한다.
강청은 정구월을 지목했으므로 질문할 사람을 일부러 노린 게 아니란 걸 알지만, 의식되는 점은 어쩔 수 없었다. 질문 내용이 더욱 의식되는 점은 말할 것도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목이 탔다. 연호는 음료수를 한 잔 더 따랐다. 생각해보면 이 남자, 지금껏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공기로 취한 듯하지만==
음주가무를 좋아할 것 같다는 말. 낯설지 않았기에 구월은 청의 지목에도 인정한다는 듯 느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반대로 댄스곡은 부르지도 못하고 발라드만 부를 줄 안다는 게 흠이었지만. 다행히도 제가 과반수가 되지 않아 안도의 숨을 뱉었다. 조금 긴장했더니 흡연욕이 밀려 들어오지만 자리를 이탈 할 수는 없으니 침착하게 옆머리를 쓸어 넘겼다. 구월은 사실 착석했을 때부터 무슨 질문을 할지 고민했었다. 그리고 그 고민은 끝나지 않고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었고, 끝나지 않은 고민에 제 차례가 돌아왔을 땐 흡연실로 도망치고 싶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부담스럽다기보단 알코올로 인해 느리게 움직이는 톱니바퀴 탓이다. 구월은 포도주스가 담긴 잔을 여전히 손에 쥐고 고민하는 얼굴로 눈을 가늘게 만들다 흐물흐물한 말투로 입을 연다.
"본인의.. 이상형과 제일 가까운 사람."
구월은 시시한 이야기를 싫어했다. 모두가 상냥해서 그런지 질문의 난이도가 진라면 순한맛이었으므로 슬쩍 매운맛으로 바꿔치기 해보는 것이고. 게다가 전 연인은 지목 할 수도 없다. 뱉은 질문과는 다르게 맹한 얼굴로 주변인들의 눈치를 이리저리 피하다 손을 바꿔 맥주를 입에 머금어 삼킨 뒤 작은 목소리로 우선 지목한다.
"저는 성규 씨."
구월은 그을린 피부를 좋아했다. 제 피부는 마냥 흰 탓에 건강보다는 약해보이는 이미지가 강한데 반해 구릿빛은 건강해 보이고, 운동을 좋아할 것 같은 점이 남자다워 멋있으니까. 성격적으로는 아직 많은 사람들과 말을 나눠보지 못해 어렵다.
뭐지. 왜 갑자기 난이도가 확 올라갔지. 아니. 그 와중에 이걸 지금 전 연인도 있는 이곳에서 털어놓으라고? 대폭풍이 일어나는거 아닌가. 이거. 순간적으로 엄청 고민에 고민을 하며 은석은 평소와는 다르게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앞에 있는 아린을 잠시 바라보던 은석은 침을 삼켰고 가만히 눈길을 돌렸다.
"...뭐, 솔직히 아직 다 아는 것은 아니어서... 뭐라고 하기가 힘들긴 하지만."
이내 그는 꿀꺽 침을 삼키면서 조금 말을 고민하다가 더 이상 안 마시려던 맥주를 천천히 따르면서 숨을 약하게 내뱉었다.
"내 전 연인의 제안을 수락해서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이유는 새로운 시작이나 재시작 같은 게 아니에요. 내 전 연인이 내게 무언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고, 그것을 들어주고... 못다한 이별을 끝마치러 여기에 참가한 겁니다. 그런데, 내 전 연인은 터무니없는 겁쟁이라, 마무리할 용기나 의욕마저 잃어버린 모양입니다."
"내 주제에, 무언가 새로운 시작을 하거나 재시작을 하거나 하는 팔자좋은 이야기가 그렇게 쉽게 굴러떨어질 거란 안이한 생각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내가 바라지 않습니다. 기존의 목표가 망가졌으니, 이제 제 목표는 쓸데없이 감정 쓰는 싸움 따위 하지 않고 여기를 떠나는 것. 나는 '싸움'을 싫어하는 성격이니까요. '투쟁' 같은 것을 인생의 한 가치로 추구하기에 나는 너무 지쳤거든요... 한 번의 '싸움'에 승리하기는 쉽지만, 다음 '싸움'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지요. 내게 있어서 타인과 싸운다는 것은, 여타 다른 행동들과 마찬가지로 한없이 허무한 낭비라는 겁니다. 그러니 내 목표는 평온하고 고요하게 여기를 떠나, 제 삶을 이 프로그램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유지하는 것... 그거면 족합니다."
가디건을 덮은 소금의 인사에 영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대로 돌아와 이 의미 없는 게임을 이어가다가, 구월이라는 여성의 질문에 뒷목부터 척추 끝까지 식는 기분이 들었다. 영월의 시선은 손에 든 술잔에 향해 있었지만 그렇다고 결코 평온하진 않았다.
다 녹은 얼음이 자그락대는 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단숨에- 그러나 천천히 잔을 비웠다. 남은 얼음까지 머금어 아그작 씹어 삼킨다. 빈 잔은 딱 소리나게 테이블로 돌려놓고 두 손을 겹쳐 깍지를 끼운다. 그제야 천천히 들리는 시선이 영구동토의 얼음조각 같은 빛을 띄고 구월을 본다.
"저는 정구월 씨로 하겠습니다. 당신처럼 하고자 하는 말을 하는 '솔직함'이 제 이상형이기 때문에."
강청의 눈이 정구월에게로 돌아갔다. 그 순간, 마치 얼어붙은 동상을 보듯 멍하니 풀려있던 강청의 푸르스름한 눈의 초점이 마치 새파랗게 갈린 얼음송곳마냥 날카롭게 잡혔다. 마치 정구월이 방금 자신의 얼굴에 찬물이라도 한 잔 대차게 끼얹은 듯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뿐. 구월이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거나, 혹은 잠깐 눈을 깜빡였다거나 하면 여지없이 놓쳤을 잠깐에 불과했다. 강청의 눈은 다시 동태처럼 스르르 가라앉았다.
전애인, 동성 안 돼요. 해사하게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덧붙혀주곤 따가운 시선들을 피해 고개를 돌려 맥주를 마신다. 다들 웅성웅성 하는 게 미움을 많이 받으려나. 개의치 않지만 이렇게까지 동요를 살 줄은 몰랐다. 구월은 꿋꿋한 인물이었으므로 술기운에 눈두덩이를 문지른다.
2차 미션은 1차 미션의 역으로 돌아왔다. 게다가, 제 차례가 앞순서였다. 이에 당황스러움을 숨길 수 없었다. 연호는, 그러나, 이제 채린과의 연애에 관한 모든 게 끝났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이것을 확실히 받아들이는 데에는 새로운 사람만한 게 없단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반드시 이성적인 의미 뿐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새로운 이를 알아가다 보면 자연히 나머지는 흐려질 수도 있겠지==
[이소금 씨를 지목할게요]
연호의 목적이란 채린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 불가능하다면, 그녀와 다른 좋은 남자가 만나길 바랐다. 채린에게도 다른 이를 만날 기회를 주어야 했다. 전 연인이 아닌 다른 이를 선택하면서 연호는 채린의 시선을 기어이 피했다.
이 상황이 거짓말 같다. 거짓말. 완전 거짓말. 말도 안 돼. 심리전의 롤러코스터를 끊임 없이 온몸으로 경험한 소금의 안색은 극히 창백했다. 구월의 목소리에 스르르 들린 얼굴은 해사하게 웃는 구월과 정반대로 반 울상이다. 그러나 대처할 방법은 있었다. 바로 전, 영월의 모범 답안...
"구ㅇ... 월 씨... 안... 되나요... 네에..."
...은 안 되는군. 철통방어다.
"그, 그럼 성규 씨요."
그나마 상대가 마지막으로 질문을 수정해 주는 아량을 베풀어 주었기에 소금이 그 자리에서 바로 증발하는 상황만큼은 예방될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이야. 다행이고 말고. 다행일까?
이거야 원. 자신이 2번이란다. 2번. 그럼 어떻게 한다. 잠시 고민을 하며 남은 이를 바라봤다. 구월, 영월, 아린, 채린. 4명이었던가. 그래도 차라리 속은 편해졌다. 방금 전 자신이 답을 했던 것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자신은 뭘 선택하면 좋을까. 아주 잠시 고민에 고민을 하던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럼 전 채린 씨를 선택해볼게요."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자신이 이상형에 가깝다고 하니까. 정말로 그 정도의 가벼운 마음이었다. 물론 아린이 눈에 밟히긴 했지만 이곳은 연애 프로그램. 다양한 이를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면 자신의 마음이 더더욱 확고해지지 않을까. 그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조용히 선택을 마쳤다.
>>460 그 선율주가 1차 미션을 아예 하지 않으셨고 오늘도 전혀 오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대로 잠수하게 될 때를 대비한 거기도 하고.. 또 펑크를 내면 곤란하니 그에 대한 대비책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아요. 조금 냉정할지도 모르지만 캡틴으로서는 아무래도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성규가 영월을 지목할 때, 안에서 뭔가가 탁 풀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고 강청은 생각했다. 그는 이내 머릿속에서 울리는 잡음을 쫓아내기 위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한 소망에 연연할 생각 따위는 없다. 그래, 너 역시도 아직도 마음속에서 죽이지 못한 나를 죽일 기회를 필요로 하지 않겠나. 그 과정이라고 생각하자.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데에 서로의 손을 빌릴 필요는 없는 것이니까.
그렇군요. 그렇다면 일단 월요일 하루만 기다려보는 쪽으로 가고... 그때도 선율주가 안 오면 그때 아린주가 편하신대로 다시 선택하시는 쪽으로 할게요. 아린주의 경우는 1차 미션도 펑크당해버린 상황이기 때문에... 괜히 더 신경 쓰여서. 일단은 이 문제는 이렇게 정리하도록 할게요. 그럼 다시 이미지게임으로 가서! 아린이의 질문 스타트!
이미지 게임은 간단한 질문들을 지나 구월의 질문으로 순간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았다. 그것은 아린도 마찬가지였다. 은석의 질문에 대한 답이 궁금하면서도 그 답을 들었을 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은석을 지목한 답변에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데이트 결정은 그 분위기를 타 좀더 긴장감 있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이미지 게임은 계속 진행되었다.
그리고 아린이 질문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문제는 아린도 홀짝홀짝 과일 맛 칵테일을 계속 마시고 있었고 술에 조금 취해 있었으며 평소의 뻔뻔하고 직설적인 성향과 또 제 속마음을 잘 이야기하지 않는 은석에게 한 방 먹이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섞여 구월의 질문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질문을 꺼냈다.
"키스를 가장 잘 할 것 같은 이성이요."
이성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괜히 이 질문에 빠져나갈 사람을 막기 위함도 있었다. 아린은 왠지 구월이 왜 그런 질문을 했는 지 알 것 같았다. 술김이기 때문인지 시시한 질문은 재미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린은 자신의 선택도 이어 이야기했다.
"저는 강청 씨요."
아마 딱히 이유는 없을 것이었다. 그 사람이 키스를 잘 하는 지 못 하는 지 어떻게 알겠는가. 전 애인이 아니고서야 말이다.
이 누나가 아무래도 술에 취한 것 같은데 괜찮은가. 그렇게 생각하며 은석은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굳이 말하면 경계나 그런 것이 아니라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칵테일 계속 마시는 것 같던데 이거 괜찮은거야? 취한거 아니지? 홀딱 취한 거 아니지? 그런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이다가 그는 숨을 약하게 내뱉었다. 일단 답을 해야만 했다. 제 연인을 못 고른다는 것이 이렇게 쓰릴 수가 있나.
일단 여성진들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그는 구월 쪽을 잠시 바라봤지만 고개를 저었다. 저번에 데이트할 때 보니까 은근히 부끄럼 많이 타던데. 아닌 것 같아. 그럼 남은 이는 영월, 채린, 소금인데. 좀처럼 고르기 힘든 상황 속에서 그는 그나마 조금 더 나을 것 같은 이를 살며시 골랐다.
"채린 씨..일 것 같은데. 그나마."
당연히 이유는 없었다. 영월은 뭔가 아예 그런 쪽은 상상조차 안 가는 느낌이 있었고 소금은 바로 당황하면서 부끄럼을 타다가 도망칠 것 같아서. 구월과는 다르게 부끄러움을 타다가 도망칠 것 같아서.
아린의 강수에 성규는 머리를 굴렸다. 키스를 잘할 것 같은 사람이라. 어떻게 할까? 키스에 대한 개인적인 호오를 떠나서, 지금 이 질문까지 영월 씨를 지목한다면 너무 노골적인 느낌이 되어버리는데. 생각, 생각을 해보자. 성규는 물을 마시며 조금 뜸을 들인다음 입을 열었다.
컵에 물을 따르고 있었던 구월은 질문을 듣자마자 왈칵. 놀란 탓에 물을 컵에 조준을 실패하여 그만 물을 책상에 조금 흘려 버렸다. 당황해서 휴지를 잔뜩 뽑아 주변을 슥슥 닦고 술 기운에 여전히 붉은 얼굴로 다급하게 찬물을 들이킨다. 이미지 게임에 단골 질문인 거 같긴 한데, 막상 전 애인들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스킨십을 대답하려니 곤란하다. 제가 질문했을 때 모두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집중하는 구월의 눈이 가늘어진다. 동성의 이름을 부를 뻔 했으나 생각해보니 이성을 지목하랬던가. 그러면 더 어렵다.
"그럼 저도 강청 씨.."
요리도 잘 하시고 하니 인기가 많았을 것 같아서. 단순한 이유였다. 구월이 손을 꼼지락 거린다.
소금이 핸드폰이었다면 지금쯤 전력이 부족해 충전이 시급하다는 알림이 뜨고 있었을 것이다. 순수한 기력은 5퍼센트도 채 안 남았고, 빈약한 몸에 비상 전력 따위 있을 리 없고, 정신력으로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하지만 술은 먹고 싶지 않다. 소금은 그가 술을 잘못 마시고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스트레스의 기간도 농도도 종류도 달랐지만, 그렇다고 마냥 평온한 상황도 아닌 만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 잡기 어렵기도 하니까. 만에 하나 여기에서 그와 유사한 꼴을 보인다면...
"흑..."
어렴풋하게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가혹해요! 라는 눈빛으로 아린을 바라보는 소금이었으나, 딱히 적의를 담지는 않았다. 그의 시선이 아린의 손에 들린 칵테일 잔으로 향한다. 저 사람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다 술이 문제지.
아린은 마시던 칵테일에서 입을 떼면서 조금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원래 애매하고 모호한 질문에는 처음 지목된 사람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으니.... 조금 장난이 심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린이 조금 취해있거나. 물론 칵테일은 도수가 낮았지만 아린은 술에 약했다. 그리고 분위기에 휩쓸려 그런 질문을 한 것이었고.
"어.... 질문은, 가장 최근에 눈물을 보였던 때가 언제인지,로 할게요."
미안함과는 별개로 조금 세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질문을 해버린다. 왠지 분위기 자체가 삭막해서 눈물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태어났을 때 빼고 안 울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소금이 뾰족하게 내세운 뒤끝이 콱 하고 와박히는 감각에, 강청의 얼굴에 그만 희미한 웃음이 떠오르고 만다. 반사적으로 입꼬리가, 이 각도와 이 방향으로 이만큼 움직이면 미소처럼 보인다, 하고 누적되어 있던 데이터베이스를 따라 약간 움직인 것이다. 지당하다. 그렇게 굴었으니 그렇게 대접받는 셈이지.
"이해합니다."
소금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나서, 강청은 아린의 말에 시선을 돌렸다.
"짓궂은 관점이네요."
그리고 방금 무의식적으로 얼굴에 떠오른 움직임의 기억을 쫓아, 아린에게 다시 한 번 기계적으로 사교용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그의 얼굴은 다시 얼음을 조각해놓은 그 냉랭하기 그지없는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가장 최근... 눈물을 보였다면 눈꺼풀 밖으로 눈물이 흘러나갈 정도로 말이죠?"
강청의 냉랭한 얼굴이, 제법 분명한 고민의 기색을 띈다.
"잘 기억나지 않아 곤란합니다만. 아마 삼사 년쯤 전이 아니었을까요. 그때 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으니 말이죠."
여러 가지 일이 무엇이었는지 다 말하기엔 곤란하다. 어쨌건 질문이 물어본 것은 이유가 아니라 일시이기도 하고.
한바퀴를 뱅 돌아서 온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그러면 뭘 하면 좋을까. 일단 그는 술에 취하진 않았으나 술기운은 있었다. 뭔가 지금 분위기를 보니 계속 좀 강한 질문들이 나오는 것 같은데. 이 분위기를 자신도 이어나가야하는가. 아니면... 잠시 고민을 하며 그는 컵에 담긴 물을 마시면서 일단 목을 축였고 결론을 내린 후 컵을 내려놓았다.
"뭐, 마지막이고 이 분위기를 그냥 이어갈게요. 질문에는 별 의미가 없다는 거 다들 아시죠?"
싱긋 웃으면서 그는 두 손으로 깍지를 낀 후, 높게 올렸다가 다시 팔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훅 무언가를 말로 던졌다.
"지금 여기서 당장 24시간 동안 정말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카메라로 촬영도 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정말로 프라이버시 방이 있고 거기를 누군가와 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가야만 한다면... 당연히 이성하고만 갈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 누구랑 가실건가요? 전 이성 다 신경쓰지 말고... 내가 정말로 완벽한 솔로라고 가정했을 때."
최대한 편하게 고를 수 있도록, 하지만 절대 쉬운 답은 나올 수 없도록 조절을 한 후, 그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둘만의 비밀이겠죠? ...저는 소금 씨려나."
별 의미는 없었다. 그냥 화가니까 혹시나 제 카페에 달 수 있는 그림을 비밀리에 의뢰하고 제공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프라이버시 공간 내에서 조용히 의뢰를 받으면 노출될 일도 없을테고 깜짝 선물로 직원들에게도 보여줄 수 있지 않겠는가.
허나 그런 속내를 감추고 괜히 의미심장한 미소를 싱글벙글 짓는 것은 나름의 짓궂음. 혹은 모두의 상황을 보기 위함이었다. 뭐, 애초에 딱 뭐라고 규정한 것은 아니잖아? 그리 생각하며 그는 일부러 이유는 이야기하지 않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진작 자리를 일어나지 않은 건 돌아갈 기운을 위해 남은 차례 동안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점점 질문의 농도는 강해지고, 대답의 폭은 넓다 못해 망망대해를 떠돈다. 아마도 마지막일 차례에 영월은 결국 한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꾹 깨문 입 안 살이 빠득 하며 너덜하게 터졌다. 겉보기엔 술기운에 머리 아파 하는 것처럼 보였을까. 이미 터진 입 안을 더 짓이겨대다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한다.
"...최은석 씨요."
아까와 같은 대답. 성의 없다고 비난받아도 마땅한 언동이었으나 차라리 그래주길 바랐다. 이 자리를 뜰 수만 있다면.
아린은 은석의 질문과 답에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형도 소금 씨이고, 또 같이 있고 싶다는 이도 소금 씨를 선택한다는 건 아무래도 자신에게 보란 듯이 걸어오는 공격같은 무언가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건 아린이 술김에 은석에게 한 방 먹이고 싶다는 생각으로 높은 수위의 질문을 했기 때문에 반대로 그렇게 은석도 그런 의미로 그런 질문을 했다고 생각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야 이성적인 상황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아린은 술을 마신 상태였다.
"저는 강청 씨요."
아린은 은석의 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이번에는 강청의 쪽을 바라봤다. 무언가 의도가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 안에는 그저 호승심이 있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강청을 선택한 이유는 딱히 말하지 않았다.
구월은 청의 기나긴 말들에도 눈만 깜박이며 물을 조금조금 홀짝였다. 그는 정말로 궁금해 보였다. 구월은 구태여 말을 붙이지 않았다.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니까, 하루동안 카메라 없는 조용한 방 안에서 단 둘이 보내야 한다는 거지. 구월의 눈이 여러 번 깜빡인다. 누구와도 안 친한데. 굳이 가야할까. 구월이 고민하는 얼굴로 생각에 잠긴다. 잘 모르겠다.
"꼭 고르는 거니까. 청 씨."
부탁을 하게 될 테니 죄송한 생각이지만 어쨌든 청 씨의 요리를 먹을 수 있어서 좋은 기회일 것 같고. 그는 고요한 사람이니 시끄럽지 않게 함께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명작 영화나 돌려보면서 시간을 떼우거나.. 뭐 이것저것 차분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구월은 팔을 손으로 쓸어내리다 슬 마무리가 되는 분위기면 담배갑을 챙겨 들고 자리를 잠깐이라도 뜨고 싶었다. 풀린 눈이 불편해.
술을 마시지 않아도 미치기 딱 좋은 날이다. 가벼운 감상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간다. 소금의 표정은... 굳이 애써 묘사하지 않아도 모두가 짐작하는 그대로다. 아니. 사실 조금 더 굳었다. 울먹일 힘마저도 사라진 것이다. 극단적인 저전력 모드로 들어간 그는 손바닥을 파고들던 손가락의 힘마저 풀었다. 피부에는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글쎄.
"저는... 강청 씨요."
자꾸 같은 사람만 골라서 무시할 수 없는 무게의 죄책감이 느껴지긴 하는데, 할 수 없다. 그래도 동전으로 이어진 연이니까요. 이 정도는 이해해 주리라 믿어요. 제가 이 첩첩산중에 달리 누굴 선택하겠어요... 그런 말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낼 힘이 없다는 게 정확할까.
강청은 은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영월을 바라보았다. 이내 다른 참가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려 바라본다.
24시간, 조용한 방. 과거나 미래를 따지지 않고 오로지 지금의 감정으로만 판단하자면, 24시간 동안 서로에게 간섭없이 마치 디오게네스 클럽의 회원이라도 된 마냥 보내줄 수 있는 사람. 이야기를 나눠도 편안하고, 같이 있는 것이 좋다-를 넘어서 자연스러운 사람.
지금 이 시점에서 대답할 수 있는 것은 한 명밖에 없는데 그 이름을 꺼내지 못한다. 문득 강청은, 실로 오랜만에,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상기의 글은 모두 상호 소통간에 있어서는 무의미한, 무대 뒤에서 흘러가는 단어의 나열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주스를 죽 들이킨 강청은 입을 떼려다 만다. 도저히 입을 뗄 수가 없다. 자신은 누군가에게 있어 미움의 대상이 되기 딱 좋은 인상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더 생각했다.
"류아린 씨, 가 아닐까요."
워커홀릭이라고 했던가. 서로가 서로 할 일을 하며 디오게네스 클럽 회원처럼 보낸다-고 하면 류아린이 가장 좋은 상대일 거라 어림짐작하는 것이다. 어림짐작밖에는 할 수가 없는 현실이 서글프다. 여기에 디오게네스 클럽 회원은 자신뿐이라, 다른 사람들과 별로 제대로 만나보지 못하고 게임 자리에서 만나본 게 전부이니.
가만히 숫자를 세며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청이가 되었다고 하니 그는 거기에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청을 바라봤다. 그럼 무슨 질문을 해볼까. 어떤 질문을 해볼까.
"카페에서 가볍게 낼 수 있는 요리를 하나 추천해준다면 어떤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상대는 요리사. 그렇다면 이쪽으로 자신의 이득을 끌어낸다. 어차피 누가 되더라도 결국 이런 식의 별 의미없는 질문만이 나왔을 것이다. 애초에 그냥 반응이나 보자고 한 질문이었지. 큰 의미를 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작게 쿡쿡 웃으면서 그는 다른 이들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져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하지만 괜찮지 않은가. 어차피 자신들은 가볍게 대화하고 친목하자고 나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합리하를 하면서 그는 그 속을 집어삼킨 후, 가만히 청을 바라봤다.
성규는 은석의 사과에 여상한 투로 대답하며 빈 잔에 물을 따랐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예기치 못한 여러 상황들 덕에 권장 음수량을 다 채운 것 같았다. 아아, 돈 벌기 정말 눈물나게 힘드네. 인지도 벌기가 좀 더 정확하려나. 방금 따라낸 냉수를 시원하게 들이키며, 성규는 청의 대답을 기다리며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무엇을 암시하는 것이지? 강청은 눈을 깜빡였다. 2연속으로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라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프로그램 초반이고, 여성진들이 방금 자신과 한 사고와 똑같은 사고를 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었으며, 24시간 동안 아무 일도 없이 조용히 보낼 수 있는 상대로 자신이 최적이라는 결론에 금방 도달할 수 있었다. 당황은 잠깐으로 끝났다. 이어지는 은석의 질문에, 강청은 흐음, 하고 숨을 골랐다.
"제가 에피타이저나 디저트 파트였다면 정확한 솔루션을 드릴 수 있었을 텐데, 프로틴 파트라 안타깝습니다."
사업에 올릴 음식은 그저 제철이라거나 이 편이 가게에 어울린다거나 맛이 있다거나 하는 물렁한 이유만으로 선정해서는 안 된다. 재료의 취급 및 손질이 복잡한가, 요리법이 카페에서도 부담없이 시행할 수 있는 수준인가, 푸드 코스트는 어떻게 되는가, 고객들이 이 카페에서 지출할 수 있는 코스트와 음식의 예상되는 코스트가 얼마나 일치하는가도 모두 고려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아는 재료 중에 코스트가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 되거나, 조리가 쉬운 요리류를 강청은 머릿속에서 최대한 빨리 뒤적여보았고...
"수란을 곁들인 샐러드나 연어 부리또를 고려해보시죠. 여름 달걀은 빨리빨리 다루어야 하지만 맛이 좋으니까요."
소금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닌 게 아니라 '못' 했다. 그 대신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영월에게 향한다. 깨끗한 물 한 잔과 반짝이는 포장지에 싸인 동그란 초콜릿 하나를 들고, 그의 어깨에 줄곧 걸쳐져 있던 영월의 가디건을 벗는다. 그리고 영월이 거절하지 않았다면 그의 어깨에 그가 해 주었던 것처럼 가디건을 살포시 내려놓았을 것이다. 거절했다면 되도록 깔끔히 정리해 내밀기만 했을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론 물과 초콜릿을 바로 앞 테이블에 놓아두며 고맙습니다,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입만 뻐끔뻐끔. 감사를 표한다.
이후 소금은 제 자리로 돌아왔다. 눈 앞이 흐린 건 체력 부족 탓인지, 맺혔다 삼켰다를 반복한 눈물의 부작용 탓인지.
아린은 은석이 별 반응이 없자 조금 흥이 식은 듯 옅은 숨을 내쉬며 다른 쪽을 바라봤다. 술을 많이 마시긴 한 모양이었다. 이게 다 은석 때문이라며 아린은 속으로 웅얼거렸다. 홀짝홀짝 마신 도수 낮은 칵테일에 아린의 뺨은 발갛게 올라와 있을 것이고 아마 이 자리가 파하면 비틀비틀 걸어 방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아린의 뒤를 따르는 카메라맨이 조금 아린을 걱정할 정도일까. 그래도 방까지는 잘 돌아가겠지만서도.
아린은 잠시 눈을 깜빡이며 감정을 삼키고자 노력했고, 이내 눈물을 떨구지는 않았다. 차가운 아메리카노가 감정을 식히는데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눈을 깜빡이니 이내 약한 한숨과 함께 조금 감정을 다스릴 수 있었다.
"과연 다행일까?"
아린은 은석의 말에 조금 한숨처럼 웃었다. 그 웃음은 작고 미약하고 불면 날아갈 것 같이 연약한 것이었다. 차라리 다시 보기 싫을 정도로 지독하게 싸우고 헤어졌다면 그랬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은석은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그렇게 말하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늘 좋게 좋게 이야기하는 것이 은석의 버릇 같은 것이니까. 하지만 아린은 아니었다.
"...어쩔 생각이냐니. 그 말은 내 제안을 들었을 때 했어야지. 너는 마냥 보고싶다는 이유로 이 프로그램에 나올 애는 아니니까, 분명 이득을 생각하고 왔을 거잖아."
아린은 은석을 바라봤다가 이내 제 잔을 내려다봤다. 아메리카노는 반절이 사라져 있었다. 다시 한 모금을 마신다. 맛있었지만 썼다, 향긋했지만 아렸다.
"배려라는 게 뭔데? ...은석아, 네가 착각하는 게 하나 있는 것 같아."
아린이 눈을 깜빡였다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씁쓸하기도 하고 어처구니 없다는 느낌 같기도 했다.
"나를 마음에 들어하는 이가 나오는 것에 내가 왜 괜찮냐는 말을 들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어떤 배려를 받아야 하는 지도 모르겠어. 네 말은 마치 내가 아직 너를 좋아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잖아."
웃음은 흐려져 사라졌다. 아린은 아메리카노를 다 마시고 컵을 내려놨다. 얼음만 남아 짤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린은 차마 은석의 쪽을 바라보며 말을 하지는 못했다.
"내가 오히려 물어야 될 것 같은데. 누가 나를 마음에 들어한다고 해도 너는 괜찮아? ...괜찮으니까 이 프로그램에 나왔겠지만. 괜찮으니 그렇게 이야기를 했을 거고. 나는, 널 많이 사랑했고 또 이 프로그램에 나올 정도로 네가 보고싶었지만, 그 뿐이야. 네가 변하거나 내가 변하지 않는 한 우리는 다시 이어지더라도 똑같은 결말을 반복할 뿐이니까."
아린은 은석의 대답을 들지 않고 말을 이었다. 괜찮다는 말이든 괜찮지 않다는 말이든 듣고 싶지 않았고 굳이 은석의 속내를 빼내어 듣고 싶지 않았다. 사귀던 그 순간에는 항상 은석의 속내에 귀를 기울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별이라는 건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프로그램 내에서 보이는 은석의 말과 행동들에-방금의 것들 또한 포함해서- 은근히 가슴 속이 따끔따끔 아파와서, 아린은 그것을 미련이라고 정의했다.
아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더 물어보고 싶은 게 남았어?"
아린은 눈을 깜빡이며 은석을 바라봤다. 더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면 지금이라면 다 말해주겠다는 뜻이었다. 아린은 늘 거짓말에는 서투니 언제든 묻는다고 해도 진실을 말하거나 입을 다물겠지만. 당연한 것은 아린이 은석과 나눈 대화로 너는 여전하구나, 하고 깨달았을 뿐이고, 그래서 마음이 아팠고,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힘을 많이 들였다.
질문도 대답도 이 지긋지긋한 시간도 끝났다. 영월은 곧장 일어나려고 했으나 가까이 오는 인기척에 잠시 늦추었다. 소금이 다가와 가디건을 걸쳐주려 하기에 영월은 가만히 있었다. 들릴락말락한 말에도 고개만 끄덕였다. 소금이 자리로 돌아간 후, 의자가 덜컹이든 말든 일어났다.
"수고하셨습니다."
말을 한 직후 손등으로 입가를 막듯 가리고, 돌아서려다 멈칫하며 소금이 놓아둔 초콜릿을 챙겼다. 그리고 저번과 달리 빠르고 단호한 걸음으로 강당을 빠져나간다.
강당을 나와 손을 떼고 보니 손등이 붉었다. 꿀꺽 삼킨 침은 술맛보다 비린 맛이 강했다. 영월은 앞을 보고 계속 걸었다.
흐름이야 어쨌든, 영월의 앞날은 둘 중 하나였다. 그 프로그램의 결과는 몰라도 그것만은 이미 정해진 미래였다.
은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때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그런 것은 생각도 하지 않으며 은석은 조용히 커피를 머금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여기서 입을 다물어버리는 것은 매우 간단했으나 그럼에도 지금은 입을 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누나의 말대로야. 나는 여기서 나름대로의 이득을 끌어내기 위해서 나왔어. 아무리 못해도 내 카페에 대해서 홍보를 할 수도 있는 거고,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득이니까. 그리고 지금 말대로라면 누나 역시 마찬가지잖아. 물론 그것을 탓하진 않아. 왜 나에게만 그러냐는 말도 하지 않아. 난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
정말로 순수하게 만나고 싶다라는 마음 하나만으로 이곳에 올 순 없었다. 그에 대한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뭔가 다른 생각이 있어서 온 것이겠지. 그게 맞을지 틀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 생각하며 은석은 작게 숨을 내뱉으며 미소를 지었다.
"안 괜찮아. 누가 도와달라고 해도 협조도 안 할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여기서 누나에게 내가 잘할테니까 다시 합치자라는 말도 하고 싶지 않아. 누나의 말대로 우리가 지금 다시 합쳐진다고 한들 같은 결말을 반복할테니까. 내가 잘하겠다. 내가 고치겠다. 이런 말을 무책임하게 내뱉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아. 누나도 나도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기에 누나도 나를 보고 싶었던 거고, 나 역시도 그 제안을 끊지 못하고 이렇게 나온 거기도 하고."
차라리 어느 한 쪽이 심각하게 틀렸다면, 정말로 심하게 잘못했다면 고치겠다는 말이 나올 수 있으나 자신이나 그녀나 대체 잘못한 것이 뭐고 틀린 것이 뭐란 말인가. 톱니바퀴가 삐그덕거리다가 빠진 정도라고 은석은 생각했다. 물론 그녀는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르지.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이미 들었어. 누나가 이곳에 있으면서 힘들지 않다면, 단순히 나를 만나겠다고 나와서 그것 때문에 이곳의 환경이 스트레스가 아니라면 내가 더 할 말은 없어. 나 역시도 나름 각오를 하고 여기에 나온거고... 지금의 내 마음을 확고하게 할 생각이니까. 그러지 않으면 정말 아무 것도 못할 것 같고 일에만 몰두해서 더욱 많은 것을 잃을 것만 같거든."
그녀가 말을 했듯이 이번에는 자신이 할 차례였다. 그렇게 말을 내뱉으며 그는 잠시 말을 끊은 후에 그는 다시 숨을 내뱉고 말을 이었다.
"누나는 누나의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하겠다고 생각할게. 나 역시도 그럴 거야. 그리고 설사 누나를 잊을 수 없고 포기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거야. 과거에 사귄 사람의 정에 기댈 생각도 없고 다른 사람과 똑같이 공평하게 시작할거야. 추억을 이야기하지도 않을거고 희망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것에 기댈 생각도 없어. ...누나의 말대로 그것을 보고 운 좋게 합쳐진다고 해도 결국 누나는 또 힘들어할테고, 우리는 또 멀어질테니까."
언성을 높이는 것도 아니며 그냥 조용히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자리. 단지 그 뿐이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은 그것이 고작. 이곳에 나온 이유로 자신을 만나고 싶었다를 말할 때부터 이곳이 그녀에게 스트레스가 되지 않을까 그저 그것이 걱정될 뿐이었다. 어쨌든 이곳은 연애 프로그램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고 하니 차라리 다행이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눈을 감았다.
"이 이야기는 이걸로 끝내고 더는 하지 않을게. 누나 쪽에서는 더 할 말이 있을까. 아니. 할 말이 있다면 누나는 더 했겠지. 그러니까 이 말만 전할게."
이어 그는 조용히 숨을 크게 내뱉은 후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가서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이상 다가가지 않으며 딱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그냥 어찌 되었던 누나가 행복했으면 싶어. 난 누나와 헤어졌고 잘 안 맞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누나를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아니니까. 단지 그 말만 전하고 싶어."
(다른 쪽보다 이쪽이 더욱 더 살벌한 분위기인데..) (은석이가 이런 놈이라서 아린이에게 그저 미안할 뿐이고..) (대체 넌 어떻게 아린이와 사귄거니. 이놈아..) (하지만 이런 관계..흔하게 볼 수 없어서 너무 맛있다. 전 연인이라고 해도 결국엔 그냥 말만 그거고 사이좋은 이들만 잔뜩 봐서 이런 것은 또 신선해서 맛있다.) (너 이런 캡틴으로 괜찮은거냐..)
>>584 본인의 적폐해석에 따르면 구월이는 능청스럽고 느긋하면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철저하게 관철하는 그런 이미지가 있는 터라 강청이 난색을 표해도 이게 진짜 불가피한 사정이 있어서 곤란하다고 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본인 직장을 데이트 장소로 생각하지를 못해서 그런 것이라는 걸 눈치로 알아채서 계속 웃는 얼굴로 유리궁정에 데려다 달라고 고집부릴 것만 같은 이미지가 있습니다
바다는 거리가 좀 있다고는 했지만 차를 타고 가면 된다고 하고, 강청에게도 차가 있으니 괜찮을 것 같기도 해
>>593 청주 똑똑해 똑똑이스티커 받아야겠다 정확하게 짚었네 구월이가 같이 데려가 줄 때 까지 떼 쓸 거라는 거 알고 oO(기어코 이걸 데려가고 있네..) 라는 생각으로 청이가 차에 태우지 않을까 싶다 ㅋㅋㅋ 직장은 아무리 좋은 곳이라 해도 직장이긴 해 정말 동감.. 그래도 가면 청이의 머싯는 모먼트를 볼 수 있지 않나🤔
>>우유에 시리얼<<< ㅋㅋㅋㅋㅋ 절대 안되지 구월이 성격상 그건 자기 밥이라고 안 줄 거라면서 미음인지 죽인지 만들 거 같긴 한데 우선 넘기고
도착했는데 막 비내려서 같이 우산 쓰고 바다 데이트도 재밌을 거 같고(구월이 우산 씌워줘도 우산 밖으로 튀어 나갈 거 같음) 좀 더 활동적인 건 유리궁정도 재밌을 거 같다
>>594 오... 정주행해봐야지. (성규는 1회 시청?) 뭐 얘 선에서 인지도 상승으로 이용한다고 해도 오늘같은 미니게임같은 거에서 적당히 스크류바스러운 상황 만들기에 가담하기 정도일 것 같긴 해ㅋㅋㅋ 데이트 미션은 사실상 팀플이니까 서로 재밌게 노는 걸 목적으로 성의껏 준비할 거같고?
아린은 은석이 일어서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훅 올라간 높이에 은석을 벙벙한 표정으로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눈만 깜빡였다. 누군가 자신을 마음에 든다고 한다면 괜찮지 않을 거라고, 다시금 자신을 잊을 수 없고 포기할 수 없다면 다시 시작하겠다는 그 말에 아린은 조금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들은 게 맞나 하는 느낌이었다. 은석을 만나왔지만 이렇게 직설적으로 제 속내를 드러낸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고.
한 발짝 다가온 은석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더 큰 것 같았다. 아마도 착각이겠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아린은 한숨과 함께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 도대체 왜 지금에야. 차라리 프로그램에 나가자고 제안했을 때, 그 때 이렇게 이야기해주지 그랬어. 그랬다면 나는 지금과 달랐을 텐데. 그리고,
"이제야 정말로 이별인 거구나."
아린은 은석의 눈을 피해 바닥을 바라봤다.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울지는 않았다. 그래도 속은 후련했다. 하고 싶은 말을 했고 듣고 싶은 말을 들었으니까. 헤어지자고 말을 꺼냈음에도 아린은 은석이 어떤 생각을 할지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진실게임에서 제일 처음 은석에게 물었던 것이었다. 다시금 자신이 연락했을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하지만 오늘 이 말을 통해서 아린은 이제야 그것에 대해서 조금 마음을 놓아버리고 훌훌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2달 간의 시간은 남아있고 만약 은석에게 다시금 마음이 가게 된다면 다시 시작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아린은 다시금 은석을 올려다봤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약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래도,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나도, 네가 행복하길 바라. 네가 행복할 수 있는 선택에 내 마음을 고려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게 나를 좋아하는 것이든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든 말이야. 나도 그럴테니까. 이 프로그램은 그런 프로그램이니까."
아린은 작게 웃었다. 쓴 웃음도 아픈 미소도 아니었다. 후련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인사 따위는 하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겨 은석의 방을 나설 것이었다. 마음속의 미련이라는 감정은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 감정이 마음속에 스며들어 사라질지 새로운 싹을 틔울지는 누구도 모를 일일 것이다.
>>596 아무래도 레스토랑에 손님 자격으로 방문한 거니까 어지간해서는 구월과 계속 있으려고 할 텐데 구월의 리퀘스트가 있거나 혹은 레스토랑에 맡겨놓고 온 후임이 너무 깝깝하거나 하면 본인이 요리복 입고 와서 구월이한테 내줄 거 자신이 구워서 내놓거나 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다 구월주가 편하거나 재밌다고 느껴지는 쪽으로 골라주면 되는데 어느 한 쪽을 못 고르겠다면 유리궁정 가즈아아아
>>606 이건 귀하네요 유리궁정 데이트로 갈까 그럼? 나 구월이가 부러워서 참을 수 없어 청이의 요리사복 차림을 볼 수도 있다니 (게다가 그 모습이 방청됨 우와~~) ㅋㅋㅋㅋ여담이지만 방송에 둘이 유리궁정 데이트 장면 나가면 방송 끝나고 유리궁정 예약 미어 터지겠다 이거 일석이조 맞죠
그러면 청이가 나가는 거 구월이가 붙잡고 같이 유리궁정으로 가는 시나리오로 할까? :3 이렇게 되면 청주가 선레를 써주는 편이 진행이 빠를 거 같은데 괜찮을까? 언제든 편할 때 선레 써두면 내가 내일 일하면서 틈틈히 답레 달게! 구월주도 퇴근하면 대부분 약속이나 데이트가 있어서 늦은 시간 아니면 동접이 애매할 것 같아 미리 미안해🥲훌쩍 월오프 너무 부럽다
어떻게 방으로 돌아왔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소금은 무더운 공기와 창 밖 매미의 요란한 울음소리 속에서 눈을 떴다. 전날 저녁 강당으로 향할 때 꺼 뒀던 냉방기를 돌아와서 다시 켜지 않고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던 모양이다. 당연히 몰골은 엉망으로 헝클어졌고. 무더운 방에는 미술 도구들과 펼쳐진 수채화 팔레트, 오일 파스텔, 스케치북 따위가 자유분방하게 늘어져 있다. 그나마 문제의 유화 작품을 마무리해서 치워 놨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아마 지금쯤 깨어나지도 못하고 물감 냄새에 숨이 막혀 질식했으리라. 다행이다. 음, 아니지. 이게 과연 다행일까? 잠에 취했던 머리가 점차 맑아지는 대로 전날의 추태가 속속들이 떠오르는데. 전날의 호수 다이빙에 대한 진지한 고찰에 이어 차라리 물감 냄새 속 질식이 나았을까, 하는 극단적인 고민이 떠오르고 만다.
뭐. 그렇다 해도 실행까지 가지 못할 걸 카메라도 알고 스태프도 알고 본인도 안다. 모든 건 의미 없는 망상에 그쳤다. 됐고, 일단 씻어야지.
깨끗하게 씻자 영 떨어지지 않던 열기도 서서히 가라앉는 것 같다. 하지만 살아있는 인간의 매일이 으레 그렇듯 난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래, 배가 고팠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제 그 난장판에서 소금은 감히 무엇도 입에 넣을 생각을 하지 못했고, 기억은 흐리지만 아마 저녁도 대충에, 점심은... 그만 생각하자. 머릿속에서 지난 흐름을 굴려 봐야 자기 생활 관리도 못 하는 모자란 사람인 걸 곱씹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한다. 당장 뭐라도 사러 나가야겠어. 하얗고 얇은 박스티에 짧은 반바지 그리고 뒤꿈치가 구겨진 컨버스를 맨발에 꿰어 신은 소금은 지갑만 들고 방을 나섰다. 맴도는 샴푸 향기는 헨젤의 빵가루처럼 족적을 그린다. 그래봤자 머잖아서 공기의 흐름에 쪼아 먹혀 사라지겠지만.
소금에게 마트란 장소는 자주 들릴 일 없는 곳이었다. 혼자 장을 볼 일도 별로 없고, 웬만하면 냉장고는 집안일을 봐 주는 분이 채워놓아 주시고, 기분 전환 삼아 부모님께서 나들이를 가자 하시면 가끔 눈도장이나 찍는 정도. 말인즉, 소금은 흐름에 익숙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무엇부터 사야 빼놓지 않고 계획대로 모든 걸 담을 수 있는지 같은, 한정된 공간 안에서 가장 효율적인 동선이 입력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마트 안에서 필요한 물건을 찾는 건 표지판을 따라 어름더듬, 미로 찾기나 다름 없는 지루한 미션의 수행이었다. 비로소 찾아낸 200ml 우유 묶음을 집어들며 소금은 생각했다. 아... 시리얼이나 사서 가야지. 식사다운 걸 먹겠다는 얄팍한 결심은 체력과 정신력의 장벽 앞에 금세 무너지고 만다.
고로, 소금은 머잖아 시리얼 코너에 도착하는데 그곳에서 곧바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눈높이가 한참 높고 어딘가 서늘하게 생긴, 지난밤의 해프닝으로 인해 조금 무섭고 조금은 유치한 앙금이 생긴 사람. 강 청. 눈이 마주쳤다.
"아. 그러니까, 청...씨, ... ...잘 주무셨나요?"
소금은 불시에 일어난 아이컨택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못 됐다. 결국 대단히 어색한 인사가 건네지면, 동시에 어제의 기분이 다시금 뭉글거리며 튀어 오르려는 걸 느낄 수 있다.
강혁은 결국 성을 냈다.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운 혓바닥도 만족시킨 '삼색 소스를 발라 구운 양갈비 스테이크'를 완성해낸 요리사는, 어느 날부터인가 시리얼이나 칼로리바에 영양제 등의 성의없는 음식으로 식사를 일관하기 시작했다.
"내가 먹는 것에 한해서는, 뱃속에 집어넣으면 거기서 거기잖아. 시리얼이나 스테이크나."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 것을 먹고자 어떤 희생도 불사하는 미식의 세계에 발을 디딘 요리사로서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말이 강청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의 형이기도 하지만 긍지높은 요리사이기도 한 강혁에게는 용납하기 힘든 말이었다. 그와 동시에, 스스로의 식사를 소홀히 하는 동생에게서 몇 차례고 들은 말이기도 했다. 강혁은 한숨을 푹 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강청의 응답은 냉랭한 반항에 지나지 않았다.
"그게 요리사 입에서 나올 소리냐?" "요리사 입에서 나올 소리냐니. 왜. 내가 시리얼 말아처먹는다고 손님한테도 시리얼 내놓던?" "이게 그 문제가 아니잖아, 이 자식아..."
어젯밤에 느지막하게 은은히 떠올린, 부아가 치민다는 감각. 잊어버리고 있던 감각이 새삼스레 깨어남에 따라, 그 감각이 죽어있던 동안 본인에게 생겼던 '부아가 치미는 일'로 취급될 만한 일들이 줄줄이 기억난다. 강청은 얼굴에 물을 끼얹는다. 어젯밤의 냄새가 비눗물에 삼켜져 지워져내려간다. 몸을 씻는 것만으로 술 냄새니 체취니 하는 것들은 가볍게 떨어져나갔다. 그러나 어젯밤의 기억은 떨어져나가지 않는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욕실에서 나와서 머리를 빗으며 말리고, 로션을 바르고 하는 귀찮은 푸닥거리들을 마치고 나서, 아침밥을 먹기 위해 시리얼 상자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게 비어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예기치 않은 아이컨택이기는 소금만큼이나 강청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서늘하고 푸르른 눈이 의외라는 듯 깜빡인다. 그야말로 어색하기 짝이 없는 침묵이 초 단위로 흐르고 나서 힘겹게 꺼내진 아침 인사에, 강청 역시도 대답한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렇지만 별난 점 하나는, 어젯밤에 강청이 물 마시듯 들이킨 술의 양이 아무리 봐도 소금이 마셨던 것보다 더 많을 것 같은데도 지금 강청의 모습은 어젯밤에 아무 일 없이 평온한 밤을 맞이해 깊이 잠든 사람의 그것과 별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술이 센 걸까, 자기관리가 철두철미한 걸까.
그 인사 하나만 딱 건네고, 강청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어서 시리얼 곽을 쏙 집어들었다. 생각해보면, 소금은 프로그램 시작 전에 참가자들에게 나누어진 프로필을 통해 그가 유명한 레스토랑의 중책을 맡고 있는 셰프라는 정보를 접해본 바 있었다. 그래서 유명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요리사는 무엇을 먹을까, 하고 내다보면 기가 막히게도 소금과 똑같이 우유 묶음 하나 달랑 들어있는 게 전부다. 소금의 장바구니와 다른 것이라곤 우유가 1리터짜리 2개들이 묶음이라는 차이점밖에 없지 않은가.
여기서 소소한 문제가 있다면, 방금 강청이 집어든 집어넣은 것은 초코맛이라던가 견과류나 그래놀라를 넣었다던가 하는 게 아닌 옥수수로 튀긴 콘플레이크만 들어 있는 기본형 시리얼이었는데, 강청이 장바구니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그게 이 마트에 남아있는 기본형 시리얼의 마지막 재고로 보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만일 소금이 먹고 싶은 게 기본형 시리얼이라고 하면 이 인간에게서 그걸 받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쿠앤크 맛의 고리형 시리얼이라거나 초콜릿맛 시리얼이라거나 그래놀라라거나 하는 것은 많이 있으니, 그런 것들을 먹고 싶었다 한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겠지만.
미술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첫 번째 덕목은 관찰력이다. 그 재능을 일정 이상 손에 쥐고 태어나는 것부터가 예술인으로서 시작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고, 그런 면에서 소금은 남보다 한참 더 앞에 그려진 스타트 라인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타고나길 꼼꼼한, 그리고 독특한 시점의 관찰력. 천재 혹은 미치광이의 시각이라고 이름 붙여지는 것. 거의 평생에 걸쳐 진행했던 예술 학교 교육으로 어렵사리 가공한, 정밀함과 끈기가 포함된 눈의 재능. 그 눈이, 지금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눈에서부터 손목까지로. 이어서 장바구니까지 떨어진다. 손목에 언뜻 엿보이는 화상 자국을 보니 그의 직업이 새삼 상기된다. 셰프, 그것도 아주 유명한 레스토랑의 중책을 맡고 있다는 셰프. 머릿속에 캡쳐 이미지 처럼 저장되어 있는 그의 프로필을 한 차례 헤집고 나니 화상의 출처가 그럭저럭 예상이 되었다. 요리를 하다가 다친 거겠지.
그런데, 이게 뭐람? 의아함은 딱 2가지 포인트에서 발생했다. 하나. 물 마시듯 술을 들이켰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적어도 겉으로는 그래 보이는) 깨끗한 안색. 뭐, 그건 술이 센 사람일 수 있으니 그렇다 치자. 문제는 두번째다.
"... ...다른 건 안 드세요?"
소금은 원래 남의 식사에 이러쿵 저러쿵 어깃장을 놓는 편은 아니었다. 아주 친밀한 사람이 걱정되게 굴 정도라면 모를까, 하물며 성장기의 어린아이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 식사 하나쯤 마음대로 하면 어떻단 말인가. 사실 이 무심함은 본인의 무계획적인 식습관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즉 은근한 자기 변호. 다 컸으니 이렇게 먹어도 죽지 않아요... 같은.
그런데 이건 좀 말이 다르지 않나? 소금은 다소 아연한 눈빛으로 심심하고 무난한 콘플레이크 시리얼의 포장을 바라보았다.
"괜한 참견, 인 건 아는데... 어제 술... 많이 드셨잖아요. 바로 시리얼 같은 걸 먹으면... 속에 나쁘지... 않을까요?"
물론 안 좋아져도 죽지는 않겠고 한계까지 반 굶다가 온 소금도 실상 별다를 것 없었지만, 뭐랄까. 그래도 이건...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내가 잘 몰라서 이러나. 여기까지 생각이 닿는 동안 이미 본인의 식사는 안중에 없고.
미니게임이 파하고, 성규는 바로 잠자리에 드는 대신, 데이트 코스를 물색했다. 월영과 연애적으로 잘 해보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비슷한 직종을 가졌으니 대화가 통할 가능성이 높다는 기대 반, 그를 지목하면 방송이 나갈 때 긴장감있는(또는 자극적인) 전개를 통해 인지도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적인 심리 반으로 그를 데이트 상대로 선택했다지만, 함께 행동하게 된 이상 성의껏 대하고 싶었다. 그 결과, 성규는 기숙사 주변에 마련된 코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둘러본 결과 방송용으로 마련된 곳인 만큼 시설이 괜찮았거니와, 제대로 대화를 나누어본 적도 없는데 유니크한 코스를 고르겠다고 멀리 나가는 것은 되려 부담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또한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었지만, 그의 선택은 모험이 아닌 안전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성규는 하늘색 반팔 셔츠와 회색 슬렉스 차림으로, 약속시간보다 10분쯤 이른 시간에 약속장소인 기숙사 인근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유니크하려다 부담스러우느니, 차라리 안전하려다 무난한 게 낫겠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지만, 상대의 마음에 들 지 말 지는 또 다른 문제였기에, 어쩔 수 없이 좀은 긴장이 되었다. 그래도 적당한 긴장은 무대에 설 때에도 도움이 되었기에, 그는 초조함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만 마음을 다스리며, 영월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 날 밤. 영월은 기적처럼 숙취는 겪지 않았지만 대신 제대로 잠들 수 없었다. 밤새 불 꺼진 방의 이부자리를 뒤척이며 오지 않는 잠을 채근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서였나. 미미하게 울렁이는 속 때문이었나. 자신의 이상조차 확실시 못 하는 덜덜어진 인간이었다. 설영월이라는 사람은.
아주 늦은 새벽녘에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모로 누우니 거짓말처럼 눈커풀이 무거워져 그나마 한숨은 잤다. 덕분에 지난주처럼 아예 못 나가는 추태는 반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미리 맞춰둔 알람에 일어나 침낭 삼았던 이불을 침대로 되돌려놓고, 씻고 나와서 간편식 하나를 뜯었다. 말린 과일과 견과류와 다크 초콜릿 몇 알이 고작인 그것을 느릿느릿 먹고 영양제도 몇개 챙긴다. 그러는 사이 얼추 마른 머리를 제대로 말리고 외출복- 하얀 오프숄더 상의에 연하늘색 주름치마를 입고, 거울 앞에 앉는다. 희멀건 안색은 그럭저럭 화장으로 감출 수 있었지만.
새카맣게 죽은 눈 만은 답이 없었다.
하얀 리본으로 늘 하는 반묶음 머리를 하고나서도 거울 속 자신과 눈싸움이라도 하듯 한참을 거울 앞에 앉아있다가 일어선다. 간단한 소지품을 챙긴 하얀 가방을 메고 하얀 여름용 샌들을 신고 방을 나간다.
그녀가 약속 장소인 카페에 도착한 건 약속 시간의 5분 전이었다. 일부러 일찍 도착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보다 먼저 와 있는 성규를 보고 시간 낭비는 아니었나 생각한다. 자박자박. 샌들 특유의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성규가 앉은 자리로 다가간 그녀는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사무적이고 딱딱한 말투가 고저 없는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잘 꾸민 도자기 인형 같은 얼굴에서 말이다.
조금 기다리고 있자니, 저만치서 화사하게 차려입은 갈색 머리의 여성이 걸어오는 것이 성규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가 일일 데이트 상대인 설영월이라는 것을 어렵잖게 알아챘기에, 성규는 미리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있다가, 월영의 인사에 마주 고개를 숙인 뒤 화답했다.
"안녕하세요, 월영 씨. 저야말로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들어 상대를 마주보고, 성규는 직감했다. 멀리서 만나자고 하지 않은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군. 어지간한 말술이 아니고서야 세병이나 술을 비웠으면 컨디션이 썩 좋으시지는 않겠지. 그는 옆 의자에서 무언가를 집어들어서는 영월에게 건넸다.
"아, 그리고 이건... 약소하지만 선물입니다."
약속장소로 오기 전 미리 들렀던 꽃집에서 사두었던, 노란 프리지아를 중심으로 흰색 안개꽃을 장식하고, 연하늘색 종이와 흰 리본으로 포장한 미니 꽃다발이었다. 비록 이런 저런 걸 고려해서 가까운 곳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곤 하나, 나름대로 성의는 다하고 싶었다. 이를 상대가 좋아할 지는 미지수였지만.
"좋아하시는 색을 아직 몰라 꽃말을 고려해서 골라봤습니다만... 마음에 드시면 좋겠군요."
제 손과 엇비슷한 사이즈의 꽃다발을 두 손으로 내민채, 괜히 사족을 덧붙이며 성규는 좀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미션. 다른 말로 난제. ...라는 말을 육성으로 뱉으면 비약이 과하다 못해 무례하다는 말을 듣기 딱 좋고 때에 따라서는 악마의 편집이 마음 놓고 개입할 만 한 건수가 되겠지만, 소금에게 있어서 말 한 번 제대로 섞어본 적 없는 사람과 진행하는 비즈니스 외의 사교 활동은 감히 시도하기 전부터 수십 번의 심호흡을 거쳐야 하는 종류의 것이기에 이 이상으로 적합한 비유도 없었다. 파트너의 문제는 아니다. 달리 누구와 매칭되든 마찬가지였을 상황. 그래도 잘 해내야 한다. 해내고 싶다. 프로그램의 중심 주제인 연애나 사랑, 뭐 그런 걸 떠나서 소금은 사적인 인간 관계의 이모저모를 가까이 두고 배우고 싶었다. 물론 단지 이것만이 참가 이유도 아니고 그런 걸 하고자 여기를 선택한 건 걸음마도 하기 전에 뛰려고 하는 짓이나 다름없단 걸 이제는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이 따갑다. 소금은 마음을 신중히 가다듬으며 회색 셋업 수트와 로퍼를 꺼냈다. 소매는 길지만 얇은 소재로 된 자켓과 짧은 기장의 바지는 무더위 속에서도 크게 거슬리지 않을 것 같고, 양쪽 귀 윗쪽에 가지런히 꽂혀 머리카락을 고정시킨 은빛 보석 핀은 그런대로 단정해 보인다. 그래도 지난날 저질렀던 그의 꼴사나운 행동을 웃음으로 격려해 준 정연호가 파트너라는 게 첫 번째, 쉽게 장소를 떠올리지 못하는 소금에게 제시해 준 게 하필 미술관과 카페였다는 점이 두 번째, 마침 직전 마무리된 작품이 내걸리는 단체 전시회의 참여자로서 받아둔 동행 1인 분의 입장권이 있었다는 점이 세 번째 행운이다. 개인전도 아닌 단체전. 그저 주최자인 업계 지인의 '부디 자리를 빛내 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받아 올린 것이기에 그림에 들인 노력과 애정은 둘째치고 직접 가 볼 필요성 까지는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신기한 우연의 일치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소금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무거운 숨을 머금었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조금 덜 바보 같이 굴 수 있지 않을까. 작은 소망을 품고 까만 로퍼 안에 발을 넣는다.
약속 장소는 주차장으로, 소금의 차가 눈에 띄니 그 앞에서 보자고 이미 연락을 넣어 둔 참이었다. 연호가 약속 장소에 다다랐다면 빨간 지프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소금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키가 훌쩍하니 큰 성규를 마주하자 자연스럽게 고개가 위를 향한다. 검은 눈에 비친 성규의 모습은 아마도 그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꾸몄을거란 인상이었다. 아무 감정도 없지만, 자리는 자리이니 예를 갖췄다, 라는 정도. 그녀는 그와 인사를 주고받은 뒤 잠시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이런 사적인 자리는 거진 3년 만이라 뭘 해야 할지 바로 감이 서지 않는 탓이었다.
그래도 길게 그럴 건 없었다. 성규가 미리 준비한 꽃다발을 내민 덕이다. 마치 오늘 옷차림에 맞춘 듯한 포장에 샛노란 프리지아가 싱그럽다. 꽃말을 고려하여 골랐다기에 노란 프리지아의 꽃말이 무언가 생각해보지만, 알 리가 없다. 그녀는 다만 살짝 눈을 내리깔며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꽃말은 나중에 찾아볼게요. 저는 미처 생각지 못 해 빈 손이라 죄송합니다."
예를 갖춘 형식적인 말투는 아름다운 꽃다발을 받으면서도 변함이 없다. 두 손으로 받아든 꽃다발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일단 손에 들고 다닐까, 하며 한 손으로 갈무리를 하고 성규를 보았다.
"식사는 하셨나요? 때가 괜찮으시다면 근처의 적당한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면 어떨까요. 저는 특별히 가리는 음식은 없으니 한성규 씨 기호에 맞춘 곳으로 가셔도 무방합니다."
아니면 그가 계획한 대로 이동을 하여도 된다며, 그녀는 성규의 계획에 발을 맞출 것을 표했다. 식사부터 하자 권했으나 약속 장소를 이곳으로 지정한 이가 그였으니 다른 일정도 잡아두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반박자 늦게 든 탓이었다.
빈손이라 미안하다는 말에 성규는 살짝 손사래를 치고 대답했다. 지목한 입장이라 함은, 원하는 상대와 데이트를 하게 된 입장을 뜻했다. 물론 이제 처음 단 둘이서 대면한 참이니 데이트라 해도 시간을 보내며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감을 잡아보는 정도겠지만, 이런 저런 조건을 생각했을 때, 처음으로 단둘이 만날 상대로 영월이 적합하다고 여겼기에 그를 지목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아, 그러시죠. 저도 식사는 아직입니다. 가리는 음식이 없으시다면, 일식은 어떠십니까?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일식집이 있더군요."
가리는 게 없다고 들었지만, 일식이 선호도가 낮을 수도 있으니 확인차 물으며, 성규는 가면서 이야기하자는 듯 손짓하고는 문을 열어 잡아두고 영월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과연 그녀가 그에게 괘념치 않아도 될까. 성규가 어떤 의도나 생각을 가지고 영월을 지목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것도 맞춰줄 수 없을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죄송하단 말로는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 단순히 빈 손으로 나온 것 이상의 실례를 끼치게 되는 것이니. 그래서 그녀는 굳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들며 다시금 그에 대한 실례를 표했다. 그가 알아들었을지는 모르더라도.
"일식, 말인가요? 예. 괜찮습니다. 가시죠."
괜찮다는 대답은 그저 겉치레다. 앞서 가리는게 없다고 했으니 성규가 무슨 음식점을 댔더라도 그녀는 방금과 같은 대답을 했을 것이다. 그녀에게 식사란 몸을 움직이기 위한 열량 섭취에 지나지 않았으며, 외부에서의 식사는 상대방과의 원활한 교류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래도 입이 짧은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일식이라면 덜할테니 수단 치고는 나쁘지 않았을까.
대답을 하고 그녀는 성규가 열어준 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왔다. 쨍한 햇빛에 미간을 찡그리는 대신 잠깐 눈을 감아 햇빛에 시야를 길들인다. 뒤에서 성규가 나와 걸어오는 동안이면 충분했다. 계절과 달리 차게 가라앉은 눈이 성규를 돌아보고, 그가 안내를 하려 하면 군말없이 그 뒤를 따라간다.
키 차이 탓에 보폭의 차이가 있으니 걸음을 맞춰달라던가, 그런 류의 말도 없이 조용히 걸음을 옮겼겠지. 한 손에 작은 꽃다발을 들고.
>>655 어.... 굳센건 모르겠지만 기가 센 건 맞지 응....ㅋㅋㅋㅋㅋㅋ 나도 아린이를 모르겠다~ 나도 이렇게 될지는 몰랐고....? 나야말로 은석이같이 멋있고 참한 애가 아린이와....? (은석이 무릎 털어주기) 아린이도 답답하고 요령없고 그래서 문제가 많은 아이니까 응...
밖으로 나오니, 정오는 지났는데도 햇살이 매섭게 내리꽂힌다. 양산이나 모자라도 하나 들고나올 걸 그랬나. 안 그래도 새카만 머리카락이 금방 달궈지는 걸 느끼며 잠시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성규는 영월이 별다른 요청을 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영월의 보폭에 맞춰 걷는다. 침묵이 이어졌다. 뭐라도 말을 꺼내 볼까. 아니다, 땡볕도 땡볕이고, 매미 소리도 시끄러우니, 대화를 한다해도 힘만 뺄 거다. 에어컨 빵빵한 실내에서 식사하면서 이야기하는 게 낫지. 기숙사 일대로부터 가장 가까운 식당인 일식집을 고른 덕인지 어색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성규는 저만치 보이는 일식집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깁니다."
성규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앞서가 문을 열고 영월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테이블이 여럿 들어선 일식집 안은 깔끔했고, 한산해서인지 틀어놓은 음악이 잔잔하게 들렸다. 영월이 들어오면 직원이 안내하는 자리로 가서는, 그가 앉을 자리의 의자를 미리 빼둔 뒤, 영월이 앉는 것을 보고 자신도 자리에 앉았을 것이다. 성규는 영월과 자신의 앞에 냅킨을 한 장씩 놓고 그 위에 수저를 놓은 뒤, 컵에 냉수를 따라 영월의 앞에 놓아둔 뒤 자신의 컵에 물을 따랐다. 그러고는 직원이 가져다준 메뉴판을 영월에게 밀어주며 물었다.
"영월 씨 먼저 고르시겠습니까?"
메뉴판에는 스시와 사시미 외에도 우동과 덮밥 등 다양한 메뉴가 있었다. 나는 연어덮밥으로 할까나. 영월에게 줄 꽃다발을 사러 가던 중 밖에 배치된 메뉴판을 보며 미리 골라둔 메뉴를 떠올리던 성규는 잠자코 영월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번 미션엔 다소 강제적인 데가 있다== 고, 연호는 결론을 내렸다. 지목한 상대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함께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연호는 이 프로그램의 룰-상대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은 금기-의 취지에 동의했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었지만 이 미션은 대놓고 룰에 반할지 모르는 부분이 있는 것만 같다. 길게 서술했지만 결국, 지목된 소금에게는 지목한 연호가 가져야 하는 일정 부분 이상의 책임이 있다는 얘기다. 채린에게 다른 이를 만나볼 기회를 주려는 것도 맞지만 그렇다고 소금을 대충 시간 때우면 끝인 상대로 취급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정연호는 또 그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고 소금을 지목한 것이었으니==
기왕이면 상대가 궁금한 곳이나 가고싶은 곳이길 바랐는데 별달리 없다고 하니 둘을 제시했다. 화가였으니 미술관이고-마침 연호는 전시물 등을 관람하길 즐겨했다- 무난하게 카페였다. 그중 미술관이 선택된 건 우연의 일치로, 소금은 입장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왔다. 역시 다르다. 일반인과 미술관에 가는 것과 화가와 함께 가는 건.
사실 나가기 직전까지 연호는 일반적으로 우울감이라 불릴 감정에 깊숙이 머리를 묻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기분인지 특별히 자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감정에 이름을 굳이 붙이는 행위는 당장 쓸모없는 행위요, 시간낭비였다. 중요한 것은 우울한지 어떤지가 아니라 우울해도 미소지으며 할 일을 제대로 끝낼 수 있는가였고, 거기에 연호는 자신이 있었으므로. 시계를 보기 전까지 정연호는 채린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했으나, 오히려 채린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는 소용없는 반발심리때문에 오히려 채린을 생각하고 있었다. 은석과 채린은 지금 만나고 있을까, 은석이 그녀의 마음에 들까, 그 반대는 어떨까, 앞으로 다른 남자들과 만나게 되면 채린은 어디로 나아갈까. 만일 그들을 모두 만나보고서도 마음에 아무런 파동이 없다면 그땐-감히- 재회를 바라도 괜찮은 걸까. 그때 눈앞에 분홍빛이 드리워져서 무엇인가 하니 염색한 지 얼마 되지않은 제 머리칼이었더라. 그런 생각들에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워져 있었으므로 시계를 본 시각이 생각보다 늦었을지도 모르겠다. 연호는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더랬다. 너무 포멀하지도 캐주얼하지도 않게, 티셔츠를 받쳐입고 코트처럼 보이도록 겉에 걸친 여름용 하프기장 와이셔츠의 깔끔한 소라색이 머리색과 잘 어울렸다.
빨간 지프 앞에서 연호는 단정한 차림의 소금을 만났다. 기다렸다는 듯 피어오르는 웃음== 작열하는 태양빛이 그 말간 미소에 반사되어 사방에 밝은 빛을 내뿜는 것 같다. 소금이 먼저 자리하고 있었단 걸 알자마자,
"소금 씨, 여기예요. 혹시 제가 조금 늦었나요?"
휴대폰 시계를 들여다보는 연호== 늦은 시간은 아니었는데, 어쩌면 조금 더 일찍 나와야 했던 모양이다.
"오래 기다린 건 아니죠? 아녔음 좋겠는데."
살짝 미안한 듯한 모습으로 미소의 톤이 바뀐다.
"오늘, 깔끔하고 예쁘게 입으셨네요. 저도 신경쓴다고 쓰고 나왔는데.... 어떻게, 전시회에 초대받을 만한지 잘 모르겠네요. 일반 관람객으로 구경간 적은 많아도 화가 분과 동행한 적은 처음이라서요."
옷차림엔, 그다지 자신이 없다. 연애를 할 때마다 상대의 취향에 맞춰 오던 연호였다. 옷에 있어 자신의 기호는 희박하다.
"그나저나 말씀하신대로 차가 정말 눈에 띄어요. 화려하고 예뻐요. 특별히 빨간 색으로 한 이유가 있다던가? ... 아, 그리고 차 앞에서 보자고 했길래 묻는 건데 본인이 운전할 생각 한 건 아니죠."
연호는 덧붙이고 나서 차 키를 들어 소금의 차 옆에 미리 주차해뒀던 제 차에 문이 열리는 소리를 나게 하며 작게 웃었다. 소금이 타려 했다면 편안히 탑승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었으리라.
물론, 강청은 명실공히 휴가 중이었다. 사유는 당연히 화살표의 행방 출연. 그래서 적어도 두 달 동안, 강청은 유리 궁정을- 자신의 삶을 뒤로 하고 떠나있을 수 있게 되었다.
강청의 삶. 집과 직장. 물론 진정한 의미로의 집이라고 일컬어주기에는 너무도 휑한, 자고 머무르는 시설에 불과한 텅텅 빈 원룸과 숨막힐 정도로 복잡하고 화려하며 꽉 짜여 있는 직장은 어느 것도 한 사람의 삶을 이루기에 적절한 요소가 아니었다. 하나는 지나치게 결핍되었고 하나는 지나치게 과잉되었다. 미니멀리즘과 맥시멀리즘으로 이루어져 있는 균형을 잃어버린 삶이라는 것은 제정신으로 살 만한 것이 못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뒤로 하고 떠나온 것이 결코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침전한 채로 굳어져버렸기에, 그 굳어진 모양의 틀이 아니라면 결국 그와 같이 메말라버린 사람도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는 법이다. 집의 경우에는, 그가 화살표의 행방에 출연하면서 머물게 된 기숙사가 그의 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딱히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그 화려한 볼륨만큼이나 그의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유리 궁정이라는 존재가 삶의 궤도에서 일시적으로나마 없어진 것은 분명한 영향을 끼쳤다. 원래 유리 궁정의 복잡하고 화려하며 힘겨운 일상에서 스스로를 잊어버렸어야 할 시간이 차가운 방 안에서 우울증 환자처럼 틀어박혀 있는 시간으로 대체되어버린 것이다. 원래라면 이 시간은 방 밖으로 나와서 다른 프로그램 참가자들과 소통하고 교류하며 보냈어야 할 시간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강청에게는 그런 재주도 없었으며 그를 방 밖으로 끌어내어 줄 마땅한 사람도 없었다.
강청이 강혁의 부탁을 듣고 선뜻 알았노라고 대답한 것은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프로그램 진행에 방해되지 않도록 주말에 오라는 강혁의 말을, 이 프로그램의 주요 일정은 주말에 진행된다는 말로 논파하면서.
그 부탁이라는 것은, 화살표의 행방이 진행되는 프로그램 행사장이 위치한 ○○시 인근의 유명한 지역 특산물과 제철 축-수산물들을 알아보고 견본을 조금 가져와달라는 것이었다. 슬슬 F/W시즌을 준비할 시기가 되기도 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8월이 지나고 9월이 오면 바로 가을이다.
강청은 아이스팩이 가득 들어찬 상자 몇 개를 거뜬히 들어다가 트렁크에 올려놓았다. 아직 시간은 아침. 지금 출발하면 레스토랑이 한산한 오전 시간대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이것이 일정에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치진 않을 테니, 어제 받았던 미션에 대한 내용은 갔다오고 나서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어제 그렇게 미션을 마치고 헤어진 후로 미션 파트너인 정구월에게 뭐라 변변한 연락도 못 했다. 오늘 오후 4시경에 데이트 미션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의논을 하기로 약속을 잡을 요량을 하고, 그는 핸드폰을 꺼내어들었다. 기획사 측에서 나누어준 이 핸드폰에는 참가자들의 연락처가 다 들어있다고 했었던 것 같다.
그는 모르고 있었다. 이 순간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정구월과의 접촉이 이루어질 것이리라고는.
관찰력이 첫 번째 덕목인 직업은 많지 않지만, 첫 번째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요구되는 직업은 많다. 요리사는 그 중에서 그 비중이 높은 직군에 속한다. 가장 먼저 식재료에 문제가 있는지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좋은 식재료를 골라내는 안목, 요리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불길의 세기가 알맞은지 얼마나 조리되었는지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 그것을 넘어서서 고급스러운 단계로 넘어가면 이런 맛을 내려면 어떤 식재료를 골라야 하는지, 어떤 향신료와 식재료를 조합해야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예술가와는 달리 후각과 미각과 촉각, 때로는 청각까지 동원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 판단력에 미술가보다는 시각의 비중이 떨어진다는 말이지만, 그래도 그 정도 안목으로도 소금의 장바구니에 담겨있는 게 자신과 마찬가지로 우유 묶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아볼 수 있다. 바구니에 우유를 담고 마주친 곳이 하물며 시리얼 코너 앞이어서야, 서로 선택한 아침 식사 메뉴가 동일하다는 것을 알아채기는 어렵지 않다. 전날 마신 술의 영향을 자신보다 소금이 훨씬 더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는 것도 당연히.
"제게 한해서는, 뱃속에 뭘 집어넣어 봐야 거기서 거기니까요."
아무리 범위를 자기 자신으로 단축했다지만, 유수의 레스토랑에서 근무하는 요리사가 입에 올리기에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말이 나왔다.
"술이 워낙에 센 편이기도 하고요."
강청의 시선이 소금의 장바구니로 옮겨갔다가, 소금의 얼굴로 다시 돌아온다. 숙취에 시달리는 얼굴... 얼마 전 저런 얼굴을 또 봤었는데. 그 얼굴의 주인이 구체적으로 떠오르기 전에 강청은 화제를 옮겼다.
평소보다 신경 써서 걷고 있다곤 하나 그녀의 걸음은 보통 사람들에 비해서 좁고 느린게 기본이었다. 그런 보폭에 맞추는 번거로운 요청을 하지 않았지만, 성규는 맞춰주었다. 그만큼 햇볕을 쬐는 시간이 늘어 덥고 뜨거웠을텐데.
가는 동안 그녀가 말을 하지 않아서인지 달리 할 말이 없어서인지 대화는 없었다. 그녀로서는 그 편이 나았다. 정면의 약간 아래에 시선을 고정하고 아무런 생각 없이 걸을 수 있었다. 조금 걷다보니 저기라고 지칭하는 말이 들려 그 쪽을 본다. 오는 길에 스쳤던가, 싶은 일식집이 성규가 가리키는 방향에 있었다. 일식집에 가까워져 들어갈 때도 성규가 문을 잡아준 덕에 그녀는 편히 들어갔다. 그리고 자리에 앉는 것도. 식기를 놓는 것도.
"그렇게까지 해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줄곧 조용하던 그녀가 불쑥 꺼낸 말은 그랬다. 그의 매너는 한없이 훌륭했지만 그녀가 받기에는 과분한 것이었다. 의도에 부응하지 못 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말을 하고, 성규가 내민 메뉴판을 두 손으로 받아 펼쳤다. 식욕은 없지만 그래도 먹을 수 있을 만한 것을 찾아 훑어본 뒤 닫아서 성규에게 도로 내민다.
"연어덮밥으로 할게요."
자극 없는 맛에 적절히 밥도 먹을 수 있으니 가장 알맞은 메뉴라 생각한 픽이었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 직원을 부르고 바로 주문을 넣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런 것까지 성규가 해줄 필요 없다는 듯이.
조금은 길었던 침묵끝에 영월이 불쑥 꺼낸 말에 성규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불편하셨나? 사과를 먼저 해야 할 지, 의중을 물어볼 지 고민하다, 성규는 후자를 택하는 김에, 불편했던 게 맞다면 시정할 의사가 있음을 알리기로 마음 먹고, 담백한 투로 대답했다.
"불편하셨나요? 그러셨다면 앞으론 조심하겠습니다."
내가 예의를 차리고자 행한 행동이라도, 당사자에겐 불편이 되는 일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럴 때 가장 좋은 처신이란 상대의 생각을 물어보고 가급적 상대가 바라는 대로 시정하는 것이라고 성규는 생각했다. 애초에 예의란 것은 상대가 자신을 대하기 편하도록 노력하고자 차리는 것이니까. 메뉴판을 받아든 영월이 고른 메뉴가 생각 외로 자신과 일치하자, 성규는 여상한 투로 대답했다.
"저도 여기 연어덮밥이 궁금하더라고요. 사이드나 음료수는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십니까?"
미니우동이나 냉모밀도 있네. 음료수는... 무난하군. 탄산류나 주스, 아니면 주류. 설마 어제 서너병을 비우시고도 또 술을 자시진 않겠지. 에이, 설마.
강 청의 오늘 풀 해시는 자캐가_평생_이고가야_하는_것은 "이 정도일까요." 강청은 열에 벌겋게 익은 두 손을 들어보였다. 붉게 익은 피부와 말라붙다시피 갈라진 근육, 두드러진 핏줄. 드문드문 뒤덮인 화상자국까지. 사람의 손이라기엔 흉측하다.
자캐의_전애인_유형 ((전애인 연애 스레에서 이걸 물어본다고)) "...수수한 옷을 선호하지만 꾸밀 때는 꾸밀 줄 아는 사람, 이성적이고 조용히 냉정한 사람, 그렇지만 어느 순간에는 어깨의 짐을 잠깐 내려놓고 늘어져, 내 곁에서 잠깐의 휴식을 보내던 사람, 나 같은 인간에게 자신의 곁을 내어줄 줄 알았던 사람... 그렇지만 이제는, 떠나고 없는... 참, 잔인한 걸 물어보십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해사한 미소가 몹시 밝다. 시선을 조금 밑으로 내리면 셔츠의 푸른 빛이 태양을 마주 본 것처럼 자극 받은 눈을 진정시킨다. 분홍색 머리카락과 푸른 옷감의 조합은 전통적으로 훌륭한 색감임은 물론이고 연호의 이미지에 잘 어울렸다. 화창한 여름의 생기.
"...아, 아뇨! 맞춰 오셨어요. 제가 조금, 일찍 나온 것 같아요."
그뿐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소금은 연호를 몰랐다. 당연하게도, 오늘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보는 날이기 때문이다. 소금이 현재 구축한 이미지는 전날의 친절과 당장의 웃음, 파스텔톤 색감, 그리고 또다시 섬세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니. 하지만 그게 뭐 어떤가. 어떻다고 하면 또 어떤가. 당신의 속이 어떻고 얼굴과 달리 먹구름인지 아니면 정말 속마저 온전히 맑음인지 알 길이 없기에 소금은 전날처럼 서글서글한 모습만을 보고, 그저 긴장을 누그러뜨린다.
"저는... 연호 씨 의상,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분위기가 엄숙한 전시회도 아니고... 전시 주제와도 어울릴 것, 같아요. 아, 참. 팜플렛... 다시 드릴게요."
매끄럽게 복장에 대한 칭찬을 건네는 연호와 달리 소금의 칭찬은 다소 어설프다. 하지만 없는 말은 아니다. 그는 빈말을 잘 하지 못했고, 그러므로 연호의 의상에 대한 감상은 오로지 진심 뿐이었다. 자켓 주머니에서 전시회장 까지의 약도와 위치가 동봉된 팜플렛을 꺼낸 소금은 연호에게 그것을 건넸다. Waterblossom 이라고 적힌 팜플렛의 표지에는 파도에 쓸려나가는 목련을 유화로 실감나게 표현한 그림이 인쇄되어 있다.
"주제가, 물과 꽃이거든요."
즉 물은 푸른 셔츠고 꽃은 머리색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당신과 어울린다고. 그런 부가적인 설명까지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지만.
"그리고, 네. 빨간 색은 강렬하니까, 도로에서 시비 붙는 거... 예방,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물론 예쁘기도 하고요... 차에 한해서는 모노톤 보다 원색을 좋아해요. 세단보다는 SUV 쪽이 좋고요. 시야가 높은 게 운행이 편해서..."
거기까지 물어본 건 아니었을 텐데 느닷없는 청산유수다. 관심 분야가 화두에 오르자 반가움에 휩쓸려 문득 입을 주체하지 못한 소금은 자동차의 외형에 대한 개인의 취향이나 선택 이유를 마구 쏟아내고, 한 박자 늦게 아차, 말꼬리를 흐린다.
의아한 성규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잔잔히 침잠하여 아무런 빛도 담겨 있지 않았다. 방금 꺼낸 말의 불만조차 없는 눈동자는 인형의 그것보다 무기질적이다. 그녀는 성규의 대답에서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어쨌는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시선을 돌렸다. 무릎 위 내려놓은 가방과 꽃다발 위로.
새카만 눈에 노란 프리지아색은 어떻게 담겼을까. 시야에 들긴 했을까.
메뉴판을 넘겨주고 기다릴, 것도 없었다. 이미 정했었는지 바로 말하길래 그럴 거면 뭘 먼저 고르겠느냐 물었는가 싶다. 아니, 주문하는데 긴 시간이 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그녀는 사이드의 유무를 묻는 말에 담담히 대답했다.
"아뇨. 식사면 충분해요."
덮밥도 다 못 먹을게 뻔한데 사이드나 음료나 있어봤자다. 게다가 아무리 그녀라도 이런 자리에서 술은 안 마신다. 그런 자리- 어쩔 수 없이 다수의 사람과 어울려야 할 때,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버틸 수 없으니 마시는 거다. 비단 이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바깥에서도.
그녀는 앞서 부른 직원에게 연어덮밥 둘을 주문하고 성규는 더 추가할 것이 있는지 시선을 주었다. 있다면 그것을 추가하고, 없으면 없는대로 주문을 마무리하고 직원은 잠시 기다려 달란 말을 남긴 후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주변 소음이 자잘하게 섞여드는 침묵이었겠지.
이게 무슨 소리지. 소금의 눈동자가 잘게 떨린다. 뭐 그럴 수 있지. 하는 마음과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는 마음이 교차하다 이윽고 후자가 압도적 승리를 차지한다.
"뱃속, 에 들어가면 똑같다는 건, 동의하지만... 청 씨는 요리사라고 알고 있었는데요. 아니, 꼭 요리사가 매 끼니 요리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하지만..."
이 미묘함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리고 소금은 왜 이렇게까지 이 사람의 아침 식사 메뉴 변경을 위해 설득의 시도를 아끼지 않는가. 그 이유는 본인도 몰랐다. 아니 확신할 수 없다. 언제나 이유가 명확한 언어와 형태로 정립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굳이 표현하자면 안색이 멀쩡하고 말씨도 어제와 같이 또박또박 함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불안하다, 는 게 맞을까. 불안하다 혹은 위태롭다. 바스라질 것 같다. 무신경하다? 스스로에게. 왜?
"그래도 건강은 건강할 때, 나중에 무너지지 않게... 미리 챙기는 게... 좋지 않을까요?"
뜬구름 잡듯 감상을 굴리던 소금은 작은 반박을 건넨다. 음, 스스로도 단 1퍼센트의 설득력 조차 느끼지 못하겠다. 당신은 오죽할까. 네, 제가 말하면 설득력이 없겠죠. 알아요. 그래도 무슨 뜻으로 하는 말 인지는 알 텐데 그냥 들어 줬으면 좋겠다. 기대 없는 희망일 뿐이지만.
"저, 저는 술도 안 마셨어요."
그리고 이건 정말이다. 소금은 지난 밤 수많은 외부 자극과 정면으로 대결하느라 술은 고사하고 과자 하나 물 한 잔도 입에 대지 못했다. 그러나 저런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안색이 평소보다 나쁘긴 한 모양인데, 왜일까. 사실 짐작 가는 이유가 많기도 해서 소금은 조금 억울해졌다. 쉴새없이 올라가는 질문 강도에도 이 악물고 맨정신으로 버텼는데 돌아오는 건 분위기와 공기로 인한 취기와 바닥을 드러낸 체력 그리고 가짜 주제에 몸에는 착실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숙취다.
"진짜로..."
거짓말쟁이로 낙인 찍히는 거 아닐까. 조그마한 목소리가 어색하게 공기 중에서 유영한다.
"그, 그럼... 제가 시리얼 아닌 다른 걸 사서 절반 나눠 드릴 테니까, 청 씨도 그 시리얼 절반 쯤 나눠주실 수 있을까요? 그, 저도 좋아해서요, 그 시리얼. 그런데 지금은 하나밖에 없으니까... 나눠서 먹으면 청 씨도 좀 더 골고루 드실 수 있고... 그러면 좋지 않을까요."
부연 설명이 길고 장황하다. 되도 않는 설득을 계속하느라 머리에는 다시 열이 오르고, 소금은 필연적으로 지난밤 느꼈던 기분들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다. 타버리는 게 나을 만큼 홧홧했던 감각이라던가... 그걸 순간 잊게 할 정도로 성의 없었던 지목이라던가.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 소금은 괜히 눈 앞의 이 남자가 다시금 얄미워졌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무엇도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양이 적은가보네. 아니면 식사 자체를 그렇게 즐기지 않는 타입인가? 성규는 영월의 대답에 더 권하지 않고서, 그가 직원을 부르고 연어덮밥 2인분을 주문한 뒤 시선을 건네자, 성규는 미니 냉모밀 한 그릇을 추가한 뒤 직원을 보냈다. 먹보 기믹이 붙을 지도 모르겠다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 노동력은 밥심에서 나온다고. 직원이 떠나고, 또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억지로 대화를 꺼내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만 조금 고민되는군. 나도 사회성은 그렇게 풍부한 편은 아니라고. 냉수를 들이키자니 이미지 게임 때가 생각났다. 그 때도 지금처럼 눈에 생기는 없어보이긴 했지만, 지금보다는 조금은 솔직해보이셨던 것 같은데. 무슨 못 쓴 로맨스소설 속 능글남주캐릭터처럼 굴 생각은 없었지만, 이대로 침묵만 흐르다 시간을 보내긴 퍽 아까웠기에, 성규는 승부수를 띄우기로 했다.
"식사가 나올 때까지 좀 걸릴 듯 한데, 진실게임 한번 어떠십니까? 소원 내기로요."
아, 그러고보니 1차 미니게임이 진실게임이랬었던가? 그것도 그렇고, 지난번 이미지게임 때 그렇게 유쾌해보이진 않으셨는데, 진실게임도 그리 좋아하지는 않으시으려나. 성규는 뒤늦게 떠오른 정보에 머쓱한 얼굴로 덧붙였다.
"시간 때우기는 솔직히 핑계였고, 영월 씨께 궁금한 점이 있었던 게 가장 큰 계기입니다만, 혹여 내키지 않으시다면 다른 이야기를 해도 좋습니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소금의 목소리를 별 군말 없이 조용히 경청한 강청의 대답은 그러했다. 자상하시네요-하고, 심리테스트 결과지 위에 인쇄되어 나오는 활자만큼이나 무미건조한 대답이 강청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런 종류의 자상함은 상대를 가려가며 발휘하시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그런 감정은 상대에게서 되돌아오는 긍정적 반응을 연료로 삼는데, 상대가 그런 긍정적 반응을 주지 않으면 그 스스로를 연료로 써버리니까요."
문득, 무감정한 얼굴 뒤로 회한이 비치는 것도 같았다. 회한이 비치는 그 짧은 잠깐의 순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의 의미가 다르게 비쳐왔다. 삭막하게 말라붙은 삶을 살아온 나는 당신이 건네어준 호의에 응답할 수 있는 여력이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진작에 모두 다 주어버리고, 이제는 남은 게 없네요. 그러나 감정의 빈털털이답게, 일순간 내비친 유약한 자존감은 몸이 일구어낸 자존심의 무표정한 가면 뒤로 스르르 사라졌다. 강청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이렇게 합시다. 괜찮은 아침식사를 대접해드리죠. 그 이후로 서로 식사는 알아서 하는 걸로."
소금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던 푸르스름한 눈이 잠깐 소금의 시선을 피했다. 그가 좀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소금 씨에게는 신경쓰이는 일도 있고 하니까요."
어젯밤의 그 동전이 신경쓰인 건 소금만이 아닌 모양이다. 그게 잘못된 일이라는 건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알고 있으니까. 스스로가 잘못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판단을 그런 부적합한 기준으로밖에 내릴 수 없었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정말이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건 성대한 감정적 자폭이었다고 강청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미지 게임이 끝이 나고 어느 정도 상황 정리가 되었다. 구월을 시작으로 이어지는 강도 높은 질문은 은석의 마지막, 조금은 짓궂을 수도 있으며 심술궂을 수도 있으나 그에게 있어선 전체적으로 상황을 볼 수 있는 질문으로 끝을 맺었다. 대부분 돌아가는 것 같았으나 은석은 딱히 그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딱히 일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오늘은 맥주를 이 정도로만 마셔야겠다고 다짐했으나 그 다짐이 무색하게 그의 잔엔 황금색 맥주가 출렁였다. 이내의 그의 귓가에 꿀꺽하는 소리와 출렁이는 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
술에 취해서 돌아가는 이도 있겠고 그냥 돌아가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강당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드륵 날때마다 그의 눈동자만이 아주 살짝 이동해서 그 방향을 살폈다. 허나 그는 여전히 일어서지 않았다. 아니. 적어도 지금은 딱히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물론 그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이미지 게임을 하면서 그가 느낀 것이 있다면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직은 본 게임의 궤도에 오르지 못한 이들이 많지 않을까하는 점이었다. 그의 생각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자신들은 이곳에 잡담을 하고 수다를 떨고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었다. 솔직한 생각으로는 그는 이 프로그램이 끝났을 때 모두가 웃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 멤버 그대로 다시 모두 모이는 일 또한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결국 이 프로그램은 일부러 참가자들끼리 작건 크건,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구도로 되어있었고, 일부러 전 연인과 함께 참여하게 함으로서 그 사이에 갈등을 유도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첫번째 미션도 그렇고 두번째 미션도 그렇지 않은가. 전 연인을 택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나 전 연인을 택하지 않는 이가 있을 수도 있었고, 자신이 먼저 생각했던 이를 앞의 누군가가 먼저 데려가는 일도 있을 수 있었다. 메시지 내용대로 이곳에서의 사랑은 절대로 공평하지 않으며 누군가가 이득을 보면 누군가가 손해를 보는 철저한 제로섬 게임이었다.
'...하지만 이 구도가 언제까지나 계속 되진 않을테고.'
그의 머리가 마치 컴퓨터가 돌아가듯 빠르게 회전했다. 이번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필시 말이 나올 수밖에 없을터였다.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라면 필시 말이 나올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반대로 제 전 연인인 아린 관련으로 말이 나올 수도 있었다. 물론 여기에 오기 전에 자신과 그녀는 이미 그 관련으로 이야기를 나눴고 자신은 그녀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긴 했으나 이곳의 대부분은 자신의 생각을 알 리가 없었다. 애초에 자신은 그 어떤 말도 제대로 한 적이 없으니까. 아니. 아주 간접적으로 몇 번 표현한 적은 있지만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이는 얼마나 될런지. 또 다시 그의 잔에 맥주가 가볍게 출렁였다. 거품이 컵 천장을 뚫고 바닥으로 흐를듯 말듯 솟아올랐으나 이내 그 거품은 천천히 꺼지며 가라앉았다.
'아마 슬슬 뭔가가 시작되겠고...'
꿀꺽. 꿀꺽. 그의 목젖이 가볍게 웨이브 치듯 천천히 움직였다. 어쨌든 이번에는 전 연인과 만나는 이는 단 한 조도 없었다. 첫번째 주에서는 전 연인과 만나서 시간을 보내는 조도 있긴 했으나 이번에는 그런 것이 단 하나도 없었으니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 속에서 결국 리드를 하는 것은 누가 먼저 움직이느냐에 따라 갈릴 것이기에.
'그렇다면 관망은 나도 이 정도로만 할까. 슬슬 움직여야지.'
슬슬 이 게임에 본격적으로 마음을 먹고 참여하겠다고 그는 다짐했다. 적당히 상황을 살피고 반응을 보는 것은 이 정도로 충분했으니까. 딱히 분쟁이나 말썽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으나 양보할 생각 또한 없었다. 당연하나 제 연인인 아린과 어떻게 어떻게 하는 것에 대해서도 협조할 마음 따윈 한 조각도 없었다. 자신에게 도움을 받을 작자라면 애초에 자신이 도와준다고 해도 잘 해낼 리가 없을테니까. 그와 동시에 자신 역시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었고.
'뭐, 어느 쪽이건 최소한의 이득은 가져가볼까. 여기까지 와서 아무 것도 못하고 가는 것은 손해 중의 손해니까.'
적당히 하거나 착한 이로 남을 생각 따윈 없었다. 자신이 아린에게 했던 말에는 거짓이 없었고 그것이 그가 여기로 나온 이유였기에. 정리한 생각을 맥주에 담아 그는 천천히 마셨다. 바로 방에 들어가는 일 없이 아마 조금 더 늦게. 그리고 조용히 혼자서.
한성규: 301 30대가 되어 변한것은 or 변할 것은 필모그래피가 더 늘어있고 조금 더 사회성이 생겨있을지도? 281 형제관계 애틋하지는 않지만 으르렁대지도 않는 담백한 사이의 동생이 한명 235 글과 그림 중 더 재능있는 쪽은? 그나마 글? 잘한다 수준은 아니지만 문장을 지어내야 할때 그럭저럭 가능한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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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무도회에 간다면 어떤 가면을?" 한성규: 아 마침 가면무도회라는 오페라도 있는데 말이죠(습관적 아는 척) 흠... 베네치아 가면 중에 고양이같이 생긴 가면이 어떨까 싶군요. 별 이유는 없고 그냥 고양이를 좋아합니다. 털 때문에 못 기르지만요. (슬픔)
"강제로 너의 하루가 다방면으로 전세계에 중계된다면?" 한성규: 흠, 글쎄요. 인간극장같은 걸까요? 나쁘지 않겠네요. 365일 내내 그런다면 좀 곤란하겠습니다만, 지금처럼 기간을 정해서 한다면?
"네가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추파를 던진다면?" 한성규: 말을 걸 기회를 찾고, 인사를 주고받게 되었다면 더 친해지고, 친구나 그에 준하는 친밀한 관계가 되고 제가 어느날 고백해도 결론이 어떤 것이든 안전감이 위협받지 않는 관계가 되었을 때 고백할 겁니다. 그 전까지는 예의와 선을 잘 지키는 게 중요하겠죠.
>>725 으앗. 그냥 어떻게 해야 우리 카페 번성할까 정도나 생각하는 잡생각꾼일 뿐이에요! 아마두!
>>726 그야말로 무난한 형제 관계로군요. 음. 그리고 성규는 글을 더 잘 한다..(끄적끄적) 그 와중에 고양이 가면이라. 그거 진짜 화려한 것은 엄청 화려하던데! 물론 가면은 다 다른 법이지만요! 어어. 그리고 아마도 지금이 바로 그 프로그램이 아닐까하고? 그리고 고백에 대해서는 상당히 천천히 가는군요.
그가 덮밥에 미니 냉모밀을 추가하든 단품 메뉴를 추가하든 그녀는 특별히 다른 생각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먹는 양이 다르다. 그게 당연한데, 그 점을 꼬집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런 사람들의 경험은 그녀로 하여금 더욱 겸상을 멀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후문.
직원이 자리를 비우고 어색하고도 무거운 침묵만이 테이블 위로 흘렀다. 그녀에게 침묵은 익숙하고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불편함은 전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말이든 꺼내서 대화를 튼다는 선택지는 생각도 않았다. 필요하면, 원한다면 상대가 먼저 말을 꺼내겠지. 아니라면 이대로 식사를 하면 될 것이다. 그 생각이 깔린 침묵의 끝은 성규가 말을 꺼냄으로써 깨졌다.
"게임인가요."
또, 라는 말이 붙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차가웠다. 그녀의 반응은. 일순간 성규를 보는 시선 또한 그랬다. 어쩌면 게임 만이 아니라 소원권 따위를 운운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부분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사무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 시점에서, 저는 한성규 씨에게 바라는 것이 없고 궁금한 것도 없습니다. 동등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게임은 성립되지 않죠. 하여 궁금한 것이 있으시다면 기탄없이 물으시길 바랍니다. 다소의 가감은 있겠으나, 가능한 한 대답해드리겠습니다."
궁금한게 있다면 다른 이야기를 한다 한들 물 흐르듯 궁금한 쪽으로 대화를 틀어가는게 사람이다. 그럴 바엔, 그냥 궁금한 걸 물으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그녀는 물 한모금을 마셨다.
역시 좀 얄미울지도 모르겠다. 충동적으로 솟아오른 감상 덕에 장바구니를 쥔 손가락으로 힘이 들어간다. 일대일로 대화하면 긴장이 덜할까 싶었는데 웬걸, 긴장은 둘째치고 자꾸만 마음 한 구석이 옹졸해진다. 건조한 반응이 미묘하게 신경을 긁는다. 하지만 서서히 좁아진 속을 이기지 못하고 분출하려는 까탈을 채 흘리기도 전에 소금의 눈은 무책임한 혓바닥보다 빨리 강청의 얼굴 뒤로 스쳐 지나간 것을 목격한다. 극히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것만으로도 소금이 강청에게 가졌던 흐릿한 감상은 뚜렷한 확신이 된다.
"그랬던 적이 있으셨나요?"
날숨에 붙어 툭. 의문이 던져진다. 스스로 의도하지 않은 말에 소금은 몇 초의 침묵을 지키고, 느리게 난색을 보였다.
"... ...아녜요, 무심코... 죄송해요, 대답 안 해주셔도 돼요."
이랬는데, 이러고 앉아 있는데 이 사람은 지난밤 일이 신경 쓰인다고 아침 식사를 대접하겠단다. 신경이 쓰인다고.
"그, 그건..."
너무 부려먹는 것 같지 않나? 소금은 복잡한 감상에 몇 번이나 입을 뻐끔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참 상냥하면서도 칼 같은 거절이다. 결국 이 푸석한 식사를 지속할 생각인 게 아닌가. 까만 눈이 상대의 푸른 눈을 곁눈질 한다. 그런 걸 보여줘서 솔티하게 굴 수도 없게 됐는데 속은 아직 시끄럽다.
"만들어 주시는, 걸로... 먹을게요. 리조또 좋아해요."
그런 대답만 내놓았더니 가슴팍이 퍽 답답하다. 소금은 예전부터 할 말을 오래 참는 걸 잘 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미움도 많이 받았고, 득보다는 독이 된 적이 더 많았다. 그러나 막대한 손해의 역사를 써 내려간 전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금은 다시 입을 열고야 만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리고, 아까 하신 말, 이요. 저는... 동의하지 않아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마른 땅이, 다시 원상복구 되려면 많은 물을 필요로 하잖아요. 한 컵의 물을 붓는다고 해서 곧바로 변화하지는... 않겠지만, 매일 자주 공급해주면... 언젠가는 긍정적인 변화를 보여주지 않을까요. 그럼... 그걸로 된 일 아닐까요. 모든 노력에 즉각적인 반응이 돌아와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청 씨가 그러셔야 한다는 말은 아니에요. 절대로. 그냥... 제 생각이에요. 전 그러고 싶거든요."
어이쿠, 역시 게임은 별로 안 좋아하셨나보군. 추측컨데 1차 미니게임도 그다지 즐거운 추억은 아니셨나보다. 지금 분위기는 흡사 정구월 씨의 질문이 나왔을 때나 가장 많이 지목받으셨을 때랑 비슷하네. 방송으로 나간다면 헛다리 짚은 참가자 몇호 뭐 그런 느낌이겠군. 아차 싶기는 했지만, 그 정도였다. 성규는 여유를 찾기 위해 찬물을 한모금 넘긴 뒤 대답했다.
"그러셨군요, 여쭐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짢게 했다면 죄송하다는 말 대신 성규는 정중히 감사를 표하고 질문을 골랐다. 상황을 모면하겠다고 실없는 질문을 던지는 건 좋은 수가 아니겠고, 너무 내밀하지도 악편 각이지도 않은 질문으로 하고 싶은데. 아하, 그렇지. 모름지기 중요하면서 어려운 건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거다. 사람의 호오는 다양하니 보편적인 상식은 한계가 있지. 그럴 땐 직접 물어보는 게 제일 좋다. 일일히 물어보는 걸 싫어할 수도 있으니 이것도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다만.
"또 미션으로 데이트가 나올 지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앞으로 미션으로 데이트가 나왔을 때 데이트 상대가 이런 건 좀 안 했으면 좋겠다, 이런 걸 하면 불편하다 싶은 게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749 헉 아 맞네 그렇겠네! 성악가니까... 이렇게 또 새로운 지식을 알아간다... 키울 수 없으니 대신 고양이 영상 같은 걸 많이 보려나? 흠 소금이의 30대라... 갤러리 차렸을 것 같기도 하고 늦게나마 학교에 갔을 수도 있고 어쩌면 지금처럼 살 수도 있을 것 같네~ 그래도 5년이면 아마 지금보다는 여러모로 안정적인 사람이 되겠지!
>>757 사실 장난성이고..ㅋㅋㅋㅋㅋ 은석이가 챙기고자 하는 이득은 사실 별 건 없고 그냥 지켜보기만 하다가 손가락 빠는 손해는 보지 말자. 뭐 그런 거랍니다. 자영업을 하다보니 아무래도 그런 쪽으로 자신도 모르게 계산을 하게 되고 손해를 보는 것은 싫다고 하네요. 아마도!
그랬던 적이 있으셨나요?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순간, 눈안개에 잠긴 가로등마냥 흐리멍덩하게 흩어져 있던 강청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간 얼음송곳처럼 선명하게 초점이 잡혔다. 그의 눈동자는 한 치 흔들림도 없이 소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질책? 책망? 분노? 아니...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놀랐다. 놀랐다는 말을 붙이는 것이 적합하겠다, 지금 이 순간을 정확히 일컫고자 한다면. 리조또 좋아해요, 하는 동의의 말에 소금의 코끝쯤으로 떨어지려던 시선은 이어지는 소금의 말에 다시 소금의 눈으로 향했다. 그는, 꽤 묵묵히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는 스타일인 모양이다. 대답은 소금의 말이 끝난 지 2~3초쯤이 지나고 나서야 나왔다.
"자상하다고 했었나요? 정정하죠. 맹랑하시네요."
문득 강청은 기시감을 느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얼굴 근육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로 표정을 짓는 법을 잊어버리기 이전에 겪어왔던 경험들이 본능적으로 그의 얼굴을 움직이게 했다. 다음 번의 말이 나올 때, 그 주인이 의식하지 못한 채로 강청의 입꼬리는 보일락말락, 흐릿한 미소 같은 것을 짓고 있었다. 그냥 미소일까, 아니면 조소일까. 조소라고 한다면 누구를 향한 조소일까.
"부어야 되는 물의 양을 고려하면 수지가 지독하게 맞지 않는 사업일 텐데요."
물을 부어서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우크라이나나 나일 삼각주에서 찾아볼 수 있는 비옥한 흑토 정도다. 사막에 물 한 컵씩을 부어서 무엇이 달라지랴. 물 한 컵 정도로 변화를 기대하려면 지질학적인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누군가가 자원해서 그런 일을 하려고 든다면, 강청은 말리고 싶었다. 굳이 이 고통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지 않다. 그게 그런 일을 자원해서 하려고 드는 사람이면 더욱. 옅은 웃음기는 금방 휘발되어 사라지고, 강청은 원래대로의 무심한 무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뭐, 지금은 아침부터 해결하죠. 알러지가 있어 못 먹거나, 특별히 싫어하는 재료가 있나요?"
만약 성규가 불필요한 사과 따위를 먼저 입에 담았다면, 그나마 주어진 기회마저 사라졌을 것이다. 단지 말 좀 그리 했다고 그렇게 구는게 다소 억지스러운 건 그녀도 자각한다. 알고는 있지만, 그 이상의 배려를 베풀 상대인가? 지금 테이블을 두고 마주한 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녀는 가차없이 거두었겠지. 그리 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예."
짧게 대꾸한 그녀는 무릎에 올린 손을 보이지 않게 겹치고 서로 깍지를 끼웠다. 안정감을 찾기 위해 맞잡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녀에게는 스스로 족쇄를 채운 것처럼 보였다. 당장 일어나 이곳이고 프로그램이고 전부- 던져버리지 않게. 꾸욱. 약하게 힘을 주어 잡고 있으니 성규로부터 질문이 들어왔다. 슥- 그녀가 고개를 들어 성규를 똑바로 주시했다.
"그것은, 저 개인의 의견을 물으시는 겁니까. 아니면 여성진으로써의 의견을 물으시는 겁니까."
대답에 앞서 나온 말은 그저 확인을 위한 절차라는 어투다. 사회였다면 당연히 전자였겠지만 이곳은 프로그램의 안이고 이 자리 역시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확인은 확실히 해서 나쁠 것이 없으나, 둘 다 대답해서 손해볼 것도 없었다. 그녀는 작게 어깨를 으쓱이고 말을 잇는다.
"다른 여성진과는 교류가 없어 아는 바가 없습니다만. 제 개인적인 의견은 '현 시점에선 말할 것이 없다' 입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 대해 미리부터 무엇이 싫고 무엇이 좋은가 말하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하며, 같은 행동 같은 말일지라도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받아들임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명확하진 않으나 그것이 제 대답입니다."
누군가 준비해 놓은 대본을 읽는 것처럼 딱딱하고 형식적이다. 제법 긴 말에 한번 숨을 가다듬은 그녀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이 대답이면 만족했는지, 더 물을 것이 있는지, 거뭇한 눈동자가 성규에게 묻는다.
기본적으로 서늘했지만 두려울 정도는 아니었던 푸른 눈동자가 갑작스레 날카롭게 변하자 소금은 어쩔 도리 없이 놀라고 만다. 화가 났나. 한번 더 말할까. 죄송하다고. 간이 작다는 말을 의인화 한 것 같은 사람인 만큼, 소금은 이번에도 어쩔 도리 없이 긴장하고야 만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그 와중에 몸은 살짝 굳어서 눈을 피할 수 없는데, 그래서 그저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시린 눈 뒤에 숨은 것이 분노가 아니라는 걸 머잖아 깨닫게 된다. 게다가 질책이라기엔 부족하고 책망이라기엔 미묘하다. 뭐지. 소심한 호기심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있으니 애쓰지 않아도 곧 알게 된다. 아, 놀랐구나. 그런데 이게 놀랄 소리인가. 실례되는 말이라면 화가 날 지언정 놀라울 건 없지 않은가. 뭐가 놀랍지. 질문한 것 자체가?
모르겠다. 어쨌거나 견디기 어려운 침묵은 지속되었고 소금은 이 상황이 주는 압박감에 슬슬 제 목을 감싸 쥐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호흡이 꺼끌하게 오르내리는 감각이 지독하다. 기분이 나빴다면 차라리 욕이라도 해 줬으면. 그냥, 아무 말이라도 했으면. 이게 더 무섭다고요... 그런 소원을 들어주듯 강청의 답변은 늦게나마 돌아온다. 안타깝게도, 기대와는 달리 청이 말을 한다고 해서 소금의 두려움이 덜어지지는 않았지만.
"수, 수지, 를, 생각하고 하는 일은 아니니까요! 그냥 그러고 싶어서, 하는 일에 보장된 댓가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데도 이토록 한 마디도 지지 않는 건 순전히 당신의 표정을 포착한 탓이다. 미소인지 조소인지 모를 웃음은 어질어질한 소금의 머릿속에 총알처럼 날아와 박혔고, 생소했기에 강렬한 미소의 존재감은 소금의 신경을 확실히 자극했다. 주로 거슬리는 방향으로.
"...알러지는 없고, 해산물은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한바탕 쏟아내고 기어 들어가듯 내놓은 답변은 살짝 가라앉아 있다. 기가 죽어 보여도 생각에 변화는 없다. 일말의 가망도 없어 보이는 모래의 바다 조차 충분한 비가 내리면 꽃이 만발하기도 하는데 시도조차 해 보지 않으면 무슨 기준으로 행동의 무용함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
"...? 설영 씨 개인께 드린 질문입니다. 성별로 일반화할 수 있는 주제라고 생각되지는 않는군요."
여성진...이 왜 나오지? 단순화하자면 상대가 꺼리는 것에 대해 물어본건데? 순수하게 어리둥절했지만 성규는 곧장 대답했다. 그건 그거고, 하마터면 여성들 전체의 의견을 개인에게 묻는 몰골이 될 뻔 했군. 이건 짚어주셔서 감사하네. 이어 답변이 이어졌다. 음, 내 질문이 모호했나? 생각했던 답변하고는 좀 다른데. 그러나 구체화하여 다시 질문하자니, 역지사지로 생각해봤을 때 답할 말이 모호한 것도 사실이었다. 같은 말이라도 발화자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 어느정도 일리 있는 말이었고.
"그렇군요. 질문이 다소 모호했음에도 성의껏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사람의 의견으로 전체를 판단할 수 없건만, 그렇게 해석될 뻔한 게 퍽 억울하긴 했지만, 그 감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실제로 개인의 호오를 가지고 특정 인구계층의 특징으로 일반화하는 사람이 세상에 없지는 않았고, 항상 논리정연하게 말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오해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래도 방송인 만큼 가급적 똑바로 말해야지. 성규는 월영의 눈을 곧게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질문이 아닌 청에 가깝습니다만, 이후 제가 달갑잖은 화제를 꺼내거든 편히 거절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방금의 질문을 드린 것도, 남은 시간동안, 그리고 앞으로 설영 씨와 대화를 나눌 때 설영 씨께서 반감을 느끼실 만한 화제는 가급적 피하고 싶어서니까요."
요는, 거북한 화제를 하나하나 대기 어렵거든 달갑잖은 화제가 나왔을 때 언질이라도 달라는 요청이었다. 어떻게든 정리하고 나니 좀은 난감해졌다. 역시 괜히 진실게임같은 이야기를 꺼냈나.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요청은 그 누구에게든 언제가 됐든 꺼내게 됐을 테니까 과정이었다고 생각하지 뭐. 때마침 식사가 나왔다. 방송각이고 자시고, 배가 고프다. 먹을 거 앞에 두고 맥락상 건질게 없는 어설픈 방송용 질문같은 건 하고 싶지도 않고.
"...? 영월 씨 개인께 드린 질문입니다. 성별로 일반화할 수 있는 주제라고 생각되지는 않는군요."
여성진...이 왜 나오지? 단순화하자면 상대가 꺼리는 것에 대해 물어본건데? 순수하게 어리둥절했지만 성규는 곧장 대답했다. 그건 그거고, 하마터면 여성들 전체의 의견을 개인에게 묻는 몰골이 될 뻔 했군. 이건 짚어주셔서 감사하네. 이어 답변이 이어졌다. 음, 내 질문이 모호했나? 생각했던 답변하고는 좀 다른데. 그러나 구체화하여 다시 질문하자니, 역지사지로 생각해봤을 때 답할 말이 모호한 것도 사실이었다. 같은 말이라도 발화자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 어느정도 일리 있는 말이었고.
"그렇군요. 질문이 다소 모호했음에도 성의껏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사람의 의견으로 전체를 판단할 수 없건만, 그렇게 해석될 뻔한 게 퍽 억울하긴 했지만, 그 감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실제로 개인의 호오를 가지고 특정 인구계층의 특징으로 일반화하는 사람이 세상에 없지는 않았고, 항상 논리정연하게 말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오해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래도 방송인 만큼 가급적 똑바로 말해야지. 성규는 월영의 눈을 곧게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질문이 아닌 청에 가깝습니다만, 이후 제가 달갑잖은 화제를 꺼내거든 편히 거절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방금의 질문을 드린 것도, 남은 시간동안, 그리고 앞으로 월영 씨와 대화를 나눌 때 월영 씨께서 반감을 느끼실 만한 화제는 가급적 피하고 싶어서니까요."
요는, 거북한 화제를 하나하나 대기 어렵거든 달갑잖은 화제가 나왔을 때 언질이라도 달라는 요청이었다. 어떻게든 정리하고 나니 좀은 난감해졌다. 역시 괜히 진실게임같은 이야기를 꺼냈나.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요청은 그 누구에게든 언제가 됐든 꺼내게 됐을 테니까 과정이었다고 생각하지 뭐. 때마침 식사가 나왔다. 방송각이고 자시고, 배가 고프다. 먹을 거 앞에 두고 맥락상 건질게 없는 어설픈 방송용 질문같은 건 하고 싶지도 않고.
그녀가 의무적으로 행한 확인절차에 답한 성규의 말에 무색한 대답이었겠으나, 그는 그것에 대해 납득한 듯이 감사를 말해왔다. 반박이 없는 점은 편했다. 반박에 맞받아칠 생각이 없는 건 아니나 그런 불필요한 절차를 거치는 수고는 매우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자리를 생각해 말을 고르기는 하겠으나, 필시 이 자리를 편집해야 할 정도의 대우를 했을 것은 분명하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이 한성규라는 사람은 상당히 신중하고 진중한 사람으로 보였다. 아슬아슬하게 지뢰를 피해가고 있으니.
뒤이어 성규는 말했다. 혹시나 그가 불편한 주제를 꺼낸다면 편히 거절해달라고. 그러는 이유는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교류가 있다면 반감을 줄이고 싶어서라고 했다. 앞으로- 남은 시간. 한달하고도 2주 남짓한 시간. 그 동안 마주치지 않을 리는 없으나, 그렇다고 그녀가 그의 청을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이유가 없다면 할 대답은 하나 뿐이다.
"다른 분들은 모르겠으나, 저를 상대로는 그런 배려를 해주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 이곳은 사회가 아닌 프로그램의 내부이고, 참가자 간 교류가 주 컨텐츠인 프로그램에서 단순히 반감이 든다 하여 대답을 가리는 사치는 부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반감이 든다면 그에 맞춰 대답의 수위를 조절하면 됩니다. 불필요한 배려야말로 가장 불쾌합니다."
불필요한 배려. 불필요한. 그럴 이유가 없는. 그럴 필요도 없는 배려. 할 이유가 없는데도 베푸는 배려는 정말이지......
그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두 손을 서로 으스러뜨릴 듯 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무릎 위가 부들거려 내려다보니 손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물들어 떨리고 있었다. 천천히 힘을 풀고 손을 떼어내자 파르르 떨려서, 음식이 나왔는데도 그녀는 잠시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예. 식기 전에 드시죠."
그렇다고 성규까지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 먼저 먹으라는 의미로 대답을 하고 느릿느릿 손을 움직였다. 아직 혈색이 돌아오진 않았지만 움직이는데 무리는 없는 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그릇 속 연어덮밥을 슬며시 찌른다. 간장에 잘 절여진 연어와 양념 묻은 밥은 취향에 따라 정말 맛있어 보였지만, 그녀에겐 넘어야 할 산에 불과했다. 아니, 시련일까.
영월의 대답을 들으며 드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1도 이해를 못하겠다. 악감정보다는 순수한 몰이해에 가까웠다. 그 다음으로는 고민이 되었다. 괜한 언쟁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았다. 수저나 물을 놓는 문제야 영월에게는 하지 않으면 그만이고, 싫을 땐 말해달라는 것도 강요할 수 없는 문제라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영월이 불쾌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그가 원하는대로, 그는 불필요한 배려라고 말하고, 자신에게는 좀 더 편히 사람을 대하기 위한 처세를 영월에게만 예외를 두어 교정한다면, 그거야말로 배려가 아닌가? 그러나 밥상을 앞에 두고 언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체하기 좋은 조건이긴 했지만, 더욱 체할 가능성을 높이고 싶지는 않았다. 성규는 감정을 싣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제 편의를 위한 요청이었으니 더 권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영월 씨를 예외로 두어 영월 씨께만 다르게 행동할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어떻게 행동하든 불필요한 배려를 해드리게 된다면 제가 마음이 편한 쪽으로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시든 영월 씨의 몫일 테고요."
진실의 입을 여는 건 가급적 삼가고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몰라, 배 째라지. 그런 심정으로 성규는 말을 마치고 잔잔히 미소지어보인 뒤 주의를 그릇 안으로 옮겼다. 기대했던 연어 덮밥에서 무슨 맛이 나는지 파악하기엔 노력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자신의 소화능력을 믿고 열심히 식사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성규의 말을 들으며 자신이 모순적인 발언을 했음을 인지했다. 아무리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들, 그녀가 타인간 교류에 능숙치 못함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라는 걸 실수로 하여금 새롭게 깨달은 순간이었다. 절로 한숨이 나오려는 입술을 보이지 않게 물어 닫고, 성규의 의견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번 실수는 온전히 그녀의 실수였으므로 반박할 여지도 반론할 자격도 없었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깔끔하면 참 좋을 것을.
"예."
첨언할 부분은 있었으나 일단 지금 할 말은 아니라고 판단해,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시선을 주홍빛 연어살이 담긴 그릇 안으로 떨어뜨렸다. 숟가락으로 눌러도 뭉개지지 않고 적당한 탄력감이 느껴지는 연어살은 고소한 참기름과 간장 특유의 향이 절로 군침 돌게 하는 비주얼이었다. 분명 요리장이 수고를 들여 손질하고 담아냈다는게 느껴지는 한 그릇이었다. 주방의 수고를 생각하면 그릇을 깔끔히 비우는 것이 예의겠으나, 그녀의 손은 한없이 느리게 움직여 반스푼씩 겨우 입으로 가져간다. 씹기는 또 얼마나 한참을 씹던지. 그 결과 성규가 그릇을 비우거나 식사를 마칠 무렵엔 절반이나 남긴 채 숟가락을 내려놓는 그녀가 있었다.
원래부터 많이 담겨 있던 것도 아닌 덮밥을 반이나, 깔끔히 잘라낸 것처럼 딱 반을 먹고 손을 놓은 그녀는 잔에 남은 물로 입가심을 했다. 그리고 테이블에 비치된 냅킨을 뽑아 조용히 입가를 정리하고 성규의 식사가 끝나길 기다리거나- 말을 기다렸을 것이다.
구월의 가느다란 두 팔이 주욱. 하늘을 가리키고 신장되는 근육에 곧이어 신음하는 소리가 조그맣다. 흔적이 드문 텅 빈 공간. 누군가를 배려해 제일 구석 바깥 쪽에 마련되어 있는 흡연실. 카메라의 사각지대에 있다는 점이 아늑하다. 입에 물고 있던 탓에 조금 눅눅해진 연초의 재를 손끝으로 툭툭 털어낸다. 이른 아침인데도 크고 작은 소음이 들려오는 공간이 어색하다. 드문드문 마주치는 스태프들과 눈인사를 하며 나른하게 뜬 눈으로 연기를 뱉는다. 구월은 잠에 드는 일을 무척 좋아했지만 깊이 잠드는 일 만큼은 할 줄 몰랐다. 선생님은 불안 때문이랬다. 그런 비겁한 게 어딨겠냐만은. 희뿌연 연기가 울렁거린다. 저는 추운 게 아닐까요. 온기가 모자란 것 같아요. 머리를 쓸어 넘겨주고, 상냥한 손짓으로 등을 도닥여주며 곤히 잠들길 지켜봐주는 온도를 잃어버렸는데요. 꿈에서 꾸준히 깨어나다보면 어느순간 진절머리가 나기 마련이다. 지겨워, 지겨워. 몽땅해진 꽁초의 끝을 검지로 탁탁 털어내 불씨를 죽여낸다.
방송 출연이니 만큼 구월은 당연하게 어디서나 깔끔한 차림세였다. 화장과 코디를 진작에 끝마쳐놓고 니코틴을 보충한 그녀는 간단하게 브런치나 해먹을 생각이었다. 버터와 토스트. 아침을 그리 챙겨 먹진 않지만 분량을 위해선 어려운 일도 아니다. 혼자 먹는 밥은 맛이 없으니 그 마저도 몇입 먹다 금방 물려 버리겠지만. 해이해진 마음으로 쨍한 볕을 가로질러 정문으로 느적거렸다. 오늘 구월은 비교적 얌전했다. 검정의 크롭 나시에 통이 넓고 헐렁한 챠콜 색의 카고팬츠 차림. 흔한 조던1 쉐도우. 샌들을 신을까 했지만 발에 모래가 들어오는 게 싫었다. 주차장을 지나서, 짐이 무거워 보이는 청을 지나치고. 느릿했던 구월의 두 발이 나란히 선다.
"강."
그는 스마트폰을 확인 하느라 그녀를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게 인지상정. 죽인 소리로 살금살금 다가가 폰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스마트폰 위로 얼굴만 불쑥 내밀어 그를 부른다. 기울어진 고개를 따라 어깨에서 구월의 머리가 속절없이 흘러 내렸다. 그녀의 얼굴은 호기심에서 곧 나른한 웃음을 짓는다.
"―청 씨, 어디로 도망가요?"
악의없는 말투, 무례한 등장. 구월이 숙인 허리에 맞춰 옥색의 조약돌 목걸이가 그녀의 복장뼈에 툭툭 부딪힌다. 청은 어째선가 그 어느때보다 자연스러워 보였고, 홀가분해 보였으며 이대로 영원 사라져도 이상할 것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정말 그런거라면 구월도 함께 흩어지고 싶었다. 그는 담길 수 없는 모래처럼 보였으니까.
"옆자리는 비었어요?"
조수석. 천연덕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구월에게서 어렴풋한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청의 대답을 듣기 전까지 새초롬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구월은 그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눈을 부드럽게 휘어 웃었을 것이다. 우리 데이트 있잖아요.
그랬던 적이 있으셨나요? 하는 질문. 강청의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소금에게는 부당한 반응일지 모르겠지만, 방금 그 짧은 질문으로 소금은 말 그대로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물며 평생을 안고 가게 될지도 모를 깊게 움푹 패인 고름투성이 상처인데 그 무심한 한 마디가 그야말로 소금에 절인 작살처럼 그 상처를 꿰뚫고 들어온 것이다. 경악 어린 날카로운 눈빛으로 끝난 게 다행이었다. 강청이 조금만 덜 무뎠더라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거나 고통에 찬 고함을 질러도 무방했을 고통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소금과 서로 감정의 벽을 충분히 내릴 만한 친근감이 있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소금이 먼저 실례를 무릅쓰고 상세한 질문을 건네어온 것도 아니고, 거의 초면이나 다름없는 이에게 미주알고주알 자기 사정이며 과거사를 털어놓는 것도 자칫하면 유흥가 골목의 만취한 늙은이만큼이나 꼴사나운 꼴이 되는 것이 십상이다. 그래서 강청이 할 수 있는 대답은 맹랑하시네요, 하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어중간한 회피일 뿐이었다. 원래 드라마라는 게 이렇지 않은가. 서로의 사정을 모르는 무심한 사람들이 서로 눈먼 말을 나누며 서로의 상처를 손대중도 못하고 쑤시는, 장님끼리 벌이는 칼싸움으로 시작하는 법이다.
"그러고 싶어서라..."
강청은 소금의 말을 되뇌어봤다. 묘하게 당돌한, 저항하듯 하는 말이 거슬렸다. 그러고 싶어서. 강청에게는 정말로 무서운 말이다. 강청의 가슴속에 조금씩 움이 트며 만들어지고 있었던 숲을 단 한순간에 얼어붙은 황무지로 만들어버린 말이 그 한 마디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싶어서. 같이 있고 싶어서 다가온 이는 일순간 예고도 없이 그 모든 것을 끊어버렸다. 작은 숲은 대멸종을 맞이했다. 그런데 정작 지금 소금에게 아침 식사를 대접해주려고 드는 자신도 정확히 그 '그러고 싶어서'라는 알량한 구실에 기대고 있지 않은가. 강청의 얼굴에 다시 보일락말락한 웃음이 어렸다. 아까의 웃음과 똑같았으나, 두 번째로 목격한 그것은 조소라기보단 허탈한 헛웃음에 더욱 가깝다는 사실을 소금은 발견할 수 있었다. 웃는 얼굴로 그는 말했다.
"호기심이나 동정심만으론 소용없는 일도 있습니다."
모든 땅은 여행자보다 거주민을 바란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누군가가 머물기에 너무도 가혹한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강청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가벼운 마음으로 시도했다가 어설픈 삽자국을 남기고 손발에 동상을 입은 채로 떠나가지 말고 안전히 지나가기를 그는 바라는 것이다. 표면에 낀 서리를 녹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은 방금처럼 금방 휘발되어 사라졌다.
"돼지고기 버섯 리조또가 좋겠네요."
봄 시즌 스테디셀러였다. 강청의 담당은 아니었지만, 만들라고 하면 완벽히 만들 수 있다. 강청은 다른 코너로 소금을 이끌었다. 그는 장바구니에 작은 쌀봉지 하나와 느타리버섯, 양송이버섯을 한 팩씩, 양파 한 알과 다진 마늘을 작은 봉지로 담았을 것이다. 이후로도 별 말을 하지 않는다면 돼지고기 목등심과 올리브유, 버터, 파마산 치즈와 후추까지...
인사의 형식을 부숴버린 파격적인 인사에는 당연히 태클이 그 답사로 돌아왔다. 강청은 주머니에서 꺼내다 만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푹 쑤셔넣고, 구월의 홀가분하니 가벼운 차림새를 돌아보고는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도망길이 아니라 안타깝게 됐군요."
그도 그럴 게, 어딘가 한 곳에 자리잡기에 너무도 가벼운 발걸음을 하고 있는 구월의 모습은 마치 어딘가 도망이라는 이름을 붙여줄 수 있을 만큼 자유롭고 낭만적인 여행을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강청은 말주변이나 글솜씨 같은 언어적 교양이 남들보다 특별히 뛰어나거나 한 부분이 없어서, 구월의 그런 모습을 뭔가 딱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이 막연히 그렇게 느낀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마침 잘 만났다. 핸드폰으로 연락하려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데에 생각이 닿아서, 강청은 입을 떼려 했다. 그렇지만 그가 뭔가 말을 하는 것보다, 구월이 먼저 말을 꺼내는 게 빨랐다.
어디 가는 줄이나 알고 그럽니까? 라는 대답이 머릿속에서부터 혀까지 내려왔다가, 강청은 문득 입을 닫았다. 고양이한테 홀리기라도 한 걸까, 문득 도망이라는 그 말이 머릿속에서 꽤 그럴싸하게 들렸던 탓이다. 목적지를 알면 그건 도망이 아니라 후퇴가 된다. 그래서 어디 가는 줄이나 알고 그럽니까, 저는 지금 일하러 가는 겁니다, 제가 일하는 직장에 갑니다, 유리 궁정으로요... 하는 구접스러운 말 따위는 다 제쳐놓고, 강청은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목적지? 그런 건 물어볼 때 알려줘도 늦지 않다. 비상등이 깜빡 하더니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일단 언제까지나 기다려줄 순 없기도 하기 때문에 선율주는 목요일 0시까지만 기다리도록 할게요. 만약 그때까지 그 어떤 소식도 없다면 저는 상황상 시트를 내릴 수밖에 없고 무통보 잠수로 처리해서 상판 룰에 의거. 차후 다른 스레에서 모습을 보이게 될 때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는 점을 남겨놓을게요.
처음에 시트스레에 썼다시피 일단은 페어의 면도 있다보니 무작정 말 없이 사라지게 되면 조금 곤란할 수 있으며 미션의 파트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잠수를 타거나 하는 등의 사례를 막고자하는 목적등으로 공지를 남겨놓을게요.
다음이라, 어느 다음?? 소금이 다른 남자와 다음 만남을 하게 될 때? 혹은 소금과 연호의 약속되지도 않은 다음 번 만남? 항상 상세한 설명을 하는 남자가 이럴 때는 무언가 더 붙이지 않고서 하하, 무심한 웃음을 흘리는 것이다. 어쨌든 이 남자는 남에게는 그렇지 않으면서 스스로에게는 가혹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겉으로 그럴듯하게 보일 수 있다면 우선 오케이다.> 그렇기에 비참하게도 그저 화사해 보이는 데에 또 성공하고 마는 것이다.
"주제가 뭘까요~? 궁금하네요~"
소금에게 받아든 팜플렛을 읽고서 알 듯 모를 듯한 눈빛이 그의 눈동자 안에서 맴돈다. 셔츠의 색은 물이고, 그리고 꽃은...? 염색하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자신의 머리색을 바로 떠올리지 못한다. 등잔 밑이 어둡듯이-그리고 단순하게도- 제 눈에 곧바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유적인 의미로 오해하려나. 소금의 언어는 플러팅으로 들렸을까. 어찌되었든 중요치 않다. 이 남자는 꽃의 의미에 대해 더이상 캐묻지 않고서 이미 감탄하며 팜플렛을 읽어보고 있지 않은가.
"제 차도 SUV 형이에요. 공간이 여유로운 점도 좋죠? 원색도 이렇게 보니 예쁘네요. 전 과감한 색은 겁이 나서 무던한 색으로 골랐거든요~"
시비가 붙는 걸 예방한다라, 이쪽의 남자는 도로에서 원색 차량을 대하든 모노톤 차량을 대하든 태도가 별반 차이가 없겠지만 모든 운전자들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처럼 화를 낼 것 같이 보이지 않는-소위 만만해보이는- 이들이나 여성들은 도로위에서 시비 걸리기 좋은 유형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소금 씨는, 그런 데에 신경을 쓰는 사람인가 보다. 연호는 결론내렸다. 신이 난 듯 자동차의 외형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내는 소금 앞에서, 연호는 놀라거나 꺼리는 기색 없이 고개를 자상하게 끄덕여 가며 이야기를 모두 받아주고 있었다. 분명 아이들을 대할 때도 똑같은 태도일 것이다.
"운전은 제가 하게 해 주세요. 표는 소금 씨가 준비해주신 거기도 하고.... 사실 그런 이해타산 없이도 그냥 제가 해 드리고 싶어요~"
연호는 소금을 태운 뒤 저는 운전석에 타 시동을 걸고 통풍 시트와 에어컨을 먼저 조작한다.
"저야말로, 잘 부탁해요."
정연호는 앞유리와 소금이 오랜 시간 교감을 나누도록 허락치 않는 남자다. 그는 여러가지를 말걸어 온다. 가령 날씨 얘기나 에어컨의 바람 방향이 거슬리진 않느냐는 이야기. 그리고 이런 것,
강 청의 오늘 풀 해시는 자캐는_나락으로_같이_떨어지는_쪽_끌어_올리는_쪽_끌어_내리는_쪽 (아, 이 녀석은 같이 떨어지는 쪽이다(확신))
자캐의_집에_있는_게임기_종류 "게임입니까... 별도의 게임 콘솔을 구매하지는 않습니다. 애초에 마지막으로 게임을 해본 게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네요."
자캐의_내적인_단점을_말해본다 의견 표출이 적극적이지 않은 점 그리고 지레짐작하는 점일까 물론 스스로 지레짐작하는 습관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스스로 여러 가지 가능성을 두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한 번 잘못 발들이면 끝간 데 없이 딥해지거든 그리고 양해도 설명도 없이 3년을 방치당한 이별은 심연 깊은 곳에서 증오가 되어 기어나왔다
생각해보면, 영월이 말한 것은 그냥 배려가 아닌 특별취급에 가깝게 느껴졌다. 다른 출연자들과 마찬가지인 상대인 영월에게만 행동을 달리 하라는 것이었으니까. 돌이켜보니 이 점을 정면으로 지적하여 자신도 발언 수위를 높였더라면 악편으로 인지도라도 폭발했을까. 그런 아쉬움이 뒤늦게 들었지만, 기회는 이미 지나간 뒤였거니와, 자신의 입장을 이미 밝힌 이상 다시 말을 꺼내는 것도 모양이 나빴기에, 성규는 머릿속을 비우고 식사에만 집중했다. 영월 역시 남기긴 했지만 수저를 내려놓은 걸로 보아 식사를 마친 듯 해, 성규는 냉수로 입가심을 한 뒤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입을 열었다.
"다 드셨으면 그만 일어날까요?"
애초에 미션의 구체적인 지시사항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그리고 짧은 데이트다. 요는 잘 맞는다면 모를까 잘 안 맞는 이와 굳이 주어진 이상의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다는 거겠지. 수락하시면 적당히 숙소까지 가서, 여성 숙소와 남성 숙소의 갈림길에서 헤어지면 되겠다. 사감이 어쨌든 이런 맥락에선 데이트 매너 챙기겠다고 바래다 주려 드는게 오히려 악수니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이런 저런 궁리를 정리하며, 성규는 잠자코 영월의 대답을 기다렸다.
>>835 글쎄? 영월이 측면으로 말하자면, 영월이는 매우 사무적으로 연락해서 협의를 요청했을거야. 그 시점까지만 해도 자기 목표가 우선이었고 동요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막상 기숙사에 오고, 직접 대면하니까 그제사 동요한거지. 그렇지만 영월이는 청이 때문에 망가진 건 아냐. 영월이는 처음부터 어그러지고 망가진 캐로 만들었으니까.
한성규의 오늘 풀 해시는 자캐가_할_수_없는_말은 (흠 쫌 막연한데) 내가 이 구역의 하렘마스터가 되겠다 음화화 (...) 자캐가_가장_싫어하는_호칭은 사람에 따라 다를 것 같은데 보편적으론 멸칭이나 외형적특징을 따서 부르는 별명을 안좋아하지 않을라나 자캐의_부위_별_키스_반응 (흠..... 연인 사이에 한해서 적어보자면) 이마, 볼, 코 등 연인 사이가 아니어도 친밀한 아이에게 뽀뽀할 수도 있는 부위 & 버드키스 : 좋아함! 구체적으로는 벌겋게 익어서 작동정지되거나 냅다 돌려줄 듯? 목, 허리, 허벅지 등 엄한 부위 + 딥키스: 매우매우매우매우매-우 싫어함. 이런 스킨십을 견뎌야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고 한다면 헤어짐을 택할듯.
"그 성격은 몇 살쯤부터 굳어졌어?" 한성규: 제 성격의 어디요?(갸웃) 카메라 의식하는 건 데뷔하고 나서 줄곧 그랬던 것 같고, 예의바르게 행동하려는 건 철들고 나서부터 그랬던 것 같고, 좋고 싫은 거 명확한 건 날 때부터 그랬던 것 같군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듣고 싶은 말은?" 한성규: 흠... 글쎄요, 하나하나 대자면 너무 다양하지 않습니까? 하나만 꼽는다면, 흠... 제가 그에게 도움이 된다는 요지의 말을 듣는게 기쁘겠죠. 어떤 경우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런 기쁨을 경계해야 할 때도 있지만요. 어려운 일입니다만.
2번째 미션의 시작이었다. 이번에는 남자쪽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을 고르는 것이었던가. 2번째 차례때 정말 여러모로 고민을 많이 했었던 순간을 떠올리며 은석은 숨을 약하게 내뱉었다.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고민하지 않고 콕 찌른 것처럼 보였을까? 아무튼 날씨가 더워지는만큼 좀 더 시원하게 입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은석은 옷장에서 푸른색 세로줄이 박혀있는 항냐색 민소매와 진한 남색인 얇은 긴 반지로 옷을 갈아입었다. 이어 리모컨을 이용해 에어컨을 껐고 주인없는 방에 냉기가 깊이 스며들도록 그는 오래 있지 않고 지갑과 핸드폰, 그리고 허리에 차는 검은색 크로스백 하나를 챙긴 후에 밖으로 나섰다.
채린과 만나기로 한 장소는 숙소 입구였다. 그렇게 멀리 가는 것이 아닌만큼 딱히 차를 빌리거나 하진 않았다. 요 앞 공원에 가는 것인데 차를 빌릴 이유가 뭐가 있을까? 하지만 이런 더운 날에 공원으로 바로 가는 것은 역시 땀에 흠뻑 젖기 딱 좋았다. 그렇기에 일부러 해가 쨍쨍한 오후 시간이 아니라 더위가 조금 가라앉을 오후 늦은 시간을 그는 골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더위가 식는 것도 아니었기에 크로스백에는 전 날 냉장고에 넣어서 미리 꽁꽁 얼려둔 물병 두 개를 넣어두었다. 이 정도면 그래도 더위에 어느 정도 맞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은석은 가만히 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약속 시간에 가까워지는 시간 무렵일까. 아니면 그 전보다 조금 이전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로지 시간의 행방은 은석만이 알 수 있었다.
숙소 문에 살며시 등을 기대고 있던 와중 발소리가 들리자 그는 살며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이내 보이는 여성의 모습에 그는 미소를 짓고 등을 문에서 떼어내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어서 와요. 채린 씨. 좋은 오후에요."
오늘 함께 미션을 수행해야 할 이를 바라보며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하며 그녀에게 인사를 전했다.
먼저 숟가락을 내려놓고 정리를 하고 있었으니, 성규가 식사를 마친 뒤에 그녀는 언제든 일어날 준비가 되어있었다. 천천히 물 한잔을 마시고 있다가 성규의 말이 나오자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 즈음 그녀도 생각은 들었다. 아마 여길 나가면 자리는 끝이겠거니 하고. 과연 그렇게 끝내는게 맞을까. 맞는 일일까. 고민은 짧았다. 그녀는 가방과 꽃다발을 챙겨 일어나 테이블에 놓인 계산서를 집어들었다. 마냥 느릿해보이는데 이럴 땐 재빠르다. 계산서를 팔랑팔랑 들고, 성규를 보며 말한다.
"계산은 제가 할 테니, 나가서 잠시만 시간을 내주세요. 길게 끌진 않을겁니다."
변함 없는 사무적인 태도가 대체 무슨 말을 할지 가늠조차 힘들지 않았을까. 성규를 향한 그녀의 얼굴은 자신의 말을 들어줄 테면 듣고, 아닐 테면 그러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다. 그런 다음 또각또각 걸어가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고, 이번엔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가서 성규를 기다리거나 혹은 이미 나와있을지 모르는 그를 마주했을 것이다.
장시간 지속된 공복 상태는 평상시보다 에너지를 더 빠르게 깎아 먹고 있었고, 더불어 상대와 반대되는 의견을 남에게 똑바로 전달하는 일에 소금은 아직 제대로 된 요령도 일가견도 없다시피 했으므로 소모되는 기력은 자연스레 배가 된다. 그냥 입을 다물고 그저 그렇구나. 받아들이면 쉬웠을 텐데, 그러기는 싫다는 다소 억지스런 이유로 그는 양날의 검 같은 소모전을 강행해 버렸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오기라도 했나. 조금 전 날아와 박혔던 조소(적어도 소금에게는 그렇게 보였다)로 인해 당신을 향한 심각치 않은 뒤끝 그리고 얄미움이 되살아나서, 뭐 그런 이유일까. 아니. 아니다. 그랬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시점에서 명분은 기존의 것과 완전히 다른 형태로 뒤바뀐다.
소금은 강 청의 얼굴에 떠오른 두 번째 웃음을 목격한 뒤로 한동안 대꾸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 자신의 의견이 저 사람의 귀엔 마냥 철없고 허랑하게 들려서 비웃나, 싶었는데 두 번째는 조금 달랐다. 그건 소금을 가소롭게 보는 게 아니었다. 허탈할 뿐이기에 그 속에 스며들어 있는 정확한 의중까지 뚜렷하게 헤아리긴 어려웠지만 지레짐작하기로는 차라리 미약한 수준의 염려를 포함한 거부에 가까워 보였다. 그마저도 손가락 위에서 녹아내리는 얼음 결정 마냥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감상 만큼은 첫 번째 이상이다. 전자의 미소가 총알이라면, 후자는 바위와 같았다. 두개골을 뚫고 들어와 거슬리는 감각을 주지는 않지만 그 자체로 누군가의 동작과 경로를 제한시킬 수 있는 거대한 장애물. 다시 말해 벽과 같은.
때문에 소금은 얌전히 청이 이끄는 대로 따라 걷기만 했다. 브랜드에 따라 포장이 제각기인 여러 가지 식품들은 알록달록 각양각색이라 미술관의 전시품과는 또 다르게 보는 재미가 있지만, 소금의 눈은 먹음직스러운 색채의 물질들을 향하지 않은 채 허공을 방황할 따름이다. 주로 발 끝에 머물러 있다가 가끔 상대의 장바구니에 담기는 재료를 본다. 만약 강 청이 도중에 일전의 알러지나 불호 재료에 대한 조사 같은 화제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면 고요함은 쇼핑이 마무리 될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이변은 계산대 앞에서 일어난다. 청이 먼저 바구니에 담은 것을 계산하게끔 앞세운 소금은 당신의 뒤에 서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제 차례가 돌아오면 바구니에 담긴 것을 하나하나 올린다. 예의 200ml 짜리 우유 3개 묶음 하나. 그리고, 대체 언제 담았는지 모를 500ml 생수 5병.
레일을 따라 움직여 캐셔의 손을 거친 뒤 계산대의 끝으로 우르르 떨어진 물건들을 천천히 봉투에 주워 담은 후, 소금은 뒤꿈치를 구겨 신은 컨버스를 끌고 도로 강 청에게 다가왔다.
"호... 호기심, 이랑 동정심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셨죠. 소용 없다고... 당연히, 그것만으로는 모자랄 거예요. 하지만 어떤 행동의 동기는... 복합적인 경우가, 훨씬 많으니까요."
이윽고 고개를 든 소금은 당신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이제 돌아가요."
이상한 호승심. 어쩌면 차라리 오기에 가까운 감정이 묻어나는 한 마디를 두고 걸음을 옮긴다. 액체로 가득 찬 봉투가 출렁이는 감각이 손끝을 타고 전해진다.
시답잖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내밀하게 궁금해 할 리 없는 소리를 떠들어 대는 사람을 앞에 뒀음에도 저렇게나 평온하고 익숙한 반응 하며, 소금이 시트에 몸을 붙인 다음에도 줄곧 이어지는 친절은 급조한 게 아닌 오랫동안 지속된 습관이라는 티가 났다. 소금은 머릿속에 저장된 이미지를 뒤적여 연호의 신상이 간략히 적혀 있던 페이퍼의 내용을 꺼내 곱씹는다. 어린이를 대하는 직업이라서 이렇게나 안정적인 친절을 베풀 수 있는 걸까. 상대의 SUV 차량은 그 말대로 공간이 여유로워 승차감이 좋았으며 그런 이해타산 없이도 그냥 제가 해 드리고 싶어요, 라는 대사는 소금의 긴장을 적정선에서 풀어주기 알맞았다. 그린 듯 자상한 사람이다. 찰나의 배려로 판단했던 이미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때문에 여러가지 주제로 대화를 시도하는 연호의 목소리에 소금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어설프고 느렸지만 거의 전부를.
그러니까, 지금 막 날아온 이것을 제외하고.
"네?"
소금이 큰 어려움 없이 대답을 잘 할 수 있던 건 그동안 그가 건넨 질문이 대부분 무난하고 가볍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소금은 연호가 돌린 핸들을 따라서 결이 아예 달라진 듯 한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라 그저 눈만 깜빡였다.
"어... 그, 글쎄요. 저는, 그런... 아니, 생각 해 본 적... 없었어요."
그러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곱씹고 나니 그의 지목에 대한 이유를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러네, 정말 왜지?
"... ...제가, 연호 씨를... 이상형... 이라고 해서요?"
아닌가. 그럼 다음 추측으로 넘어가서.
"게임에서... 바보 같이 굴어서...? 이상해, 보였나요...?"
이건 데이트 상대 지목의 이유로는 썩 적절하지 않지만 적어도 소금에게는 매우 그럴듯한 이유로 생각됐다.
"자, 잘 모르겠어요... 이유가 있으셨나요...?"
당연히 나름대로 이유가 있으니 골랐겠지. 하지만 전혀 감이 오지 않는 상황에서 소금이 보일 수 있는 건 소심한 의문 뿐이었다.
성규는 자신이 무어라 대응할 틈을 주지 않고 계산대로 걸어가 계산을 마치는 영월을 바라보다, 이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는 영월이 말한대로 그의 말을 들을 시간을 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계산을 마친 영월이 문 밖으로 나오자, 성규는 지갑에서 자신이 먹은 연어 덮밥과 냉모밀 값의 현금을 꺼내 내밀었다. 그러고는 지금까지와 다름없이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먹은 음식값입니다. 제가 평소 하던 대로 하는 게 불필요한 배려여서 불쾌하시다니 언제 어디서 제 말이나 행동에 언쩒아하실지 모르겠고 피곤하네요. 길지 않든 어떻든, 그럴 시간에 방에 들어가 쉬고 싶습니다."
몰라, 악편? 필요하면 하라지. 어차피 자극적인 상황에 끼어 욕 좀 먹더라도 인지도 올리려고 나온 거잖아. 성규는 말을 마치고 담담한 표정으로 영월을 응시했다.
>>890 아린이가 은석이에게 그렇게 문자를 보낼 정도면 아마 뭔가 정말로 크게 힘들 것 같은 상황이니까 빠르게 진통제를 구한 후에 맞은편 방의 문을 두들긴 후에 안에 있는 아린이와 만난 후에 진통제를 전해주고 괜찮은지의 여부를 물어보고 그럴 것 같네요. 이건 솔로버전이고 만약 애인이 새로 생겼다고 한다면 걱정이야 되지만 현 애인에게 오해를 사는 것도 피하고 싶어서 진통제만 전달해주고 바로 빠르게 돌아갈 것 같고요. 그리고 현 애인에게도 이런이런 일이 있었다고 먼저 말을 해서 오해의 여지를 끊으려고 할 것 같네요. 만약 이해를 못해준다면.. 그건 이제 그때의 은석이가 알아서 하는 것으로.
>>890 #자캐는 한밤중에게 전애인에게 진통제를 부탁하는 문자를 받으면 어떻게 행동하는가
우와...(망치 꺼냄)(박치기) 프로그램에 참가 중인 지금 기준인걸까? 어쨌거나 고민하겠지. 왜 나일까... 이건 전체문자인가 나한테만 온건가... 이 시간에 진통제라면 급한거 같은데... 갖다줘야.. 아니 근데 누가 먼저 갔으면... 하고 핸드폰 들고 고민하다가 결국 진통제 들고 방문 두드리겠지 똑똑똑... 으아악 심장 터진다(?)
>>890 흠 현재 기준의 성규라면 왜 제작진 대신 다른 출연자도 아닌 자기한테 문자를 보냈는지 잠깐 갸웃 하겠지만 군말없이 스탭진한테 부탁해서 진통제 갖다달라고 한 다음에 문 앞에 놓고 노크한 뒤 방에 돌아갈 것 같네! 가져가는 소리가 들리면 다시 일 보고, 안 들리면 긴급상황같으니까 119 부르거나 스탭진한테 도움 요청하고!
계산을 하는 사이 나가는 발소리를 들었다. 과연 그가 그녀의 말을 들어줄까. 아닐까. 밖으로 나가보면 알 거라고 생각했으나, 막상 나가서 마주하니 실상은 달랐다. 그녀가 계산한 밥값을 현금으로 꺼내 내밀며 이 이상 시간을 내주는 것을 거절하는 성규를 보고 그녀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시간을 내어주기 싫다 하니, 이대로 보내는 것이 맞을까. 실수를 정정하지 않고 비틀린 오해로 남겨두는 것이 과연 옳을까. 굳이 말하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 라는 안일한 생각 사이로 날카롭게 꽂히는 환청이 있었다. 여전히 소름끼치도록 이기적이라던 그 차가운 목소리. 푹 꽂힌 말은 그녀의 심장을 얼렸다. 이성적으로 말할 수 있도록.
"그럼 짧게 끝내겠습니다."
그녀는 돈을 받지 않은 채 말하며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정중히 사죄의 행동을 취했다.
"근래 다소 불쾌한 일이 있어, 그로 인한 좋지 못한 사감을 내비쳐 불편하게 하여 죄송합니다. 제 부족한 사회성 탓에 의견을 표하는 것이 미흡하여 실례를 끼쳤습니다. 이제와서 하기에는 늦은 말이긴 하나, 약속 장소를 미리 잡아주신 점, 꽃을 준비해주신 점, 말하지 않은 부분을 배려해주신 점, 모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사과를 마치고 허리를 세운 그녀는 조금 어설프게 들고 있던 꽃다발이 떨어질라 조심히 고쳐 들었다. 한차례 성규를 올려다보고, 식사값을 든 그의 손을 조심스레 되돌려준다. 식사는 이전의 답례라며 말을 덧붙였다.
내민 돈을 받는 대신, 짧게 끝내겠다면서 하려던 말인 듯한 말을 꺼내놓는 영월을 보며, 성규는 피곤함을 넘어 슬슬 짜증이 나려 하는 것을 느끼며 긴장을 풀었더라면 구겨질 뻔한 미간을 평평하게 유지했다. 조금 전 자신이 무어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계산할 때나, 지금 더 대화하기 싫다고 했음에도 짧게 끝내겠다면서 기어이 할 말을 하는 점이나, 참 일방적이다 싶었다. 그러나 그걸 지적할 만큼의 기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성규는 영월이 사과를 마치자, 짤막하게 대답했다.
"사과는 됐습니다. 무슨 숙제도 아니고, 받고 싶지 않네요."
정석적이라면 정석적인 사과였지만, 받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재발 방지에 대한 내용이 없었거니와, 있었다고 해도 쓸데없는 배려라고 화를 내던 모습을 믿어야 할지 지금처럼 정중하게 사과하는 쪽을 믿어야 할지 정하기도 어려웠으니까. 영월이 일전의 쿠키에 대한 답례라며 밥값을 돌려주는 것을 거절하자, 성규는 군말 없이 지갑 안에 현금을 다시 넣었다. 비슷한 경험을 친구에게서 그냥 고된 일일 알바 한번 했다고 치고 정리하니 편했다는 말을 들은 게 생각났거니와, 무엇보다도 더 이상 실랑이 비슷한 것이라도 하는 건 사양이었다. 성규는 편히 쉬라는 인사에 묵례로 답하고, 영월이 돌아서자 자신도 뙤약볕 속으로 걸음을 떼었다.
마냥 철없고 허랑한 마음. 강청은 그것을 회의감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마냥 철없고 허랑한 마음 때문에 내면이 완전히 거덜나버린 자신의 내면을 짚어보자면, 또 누군가 자상한 사람이- 자신같이 망가진 사람에게 별 동기도 없이 선뜻 말을 붙여올 수 있을 정도로 자상한 사람이 어떤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씁쓸한 일이어서. 그래, 미각을 잃어버렸어도 그런 일을 씁쓸하게 여길 만한 감정적 말미 정도는 그에게 아직 남아있었다. 남아있다고 표현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호승심어린 상냥함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강청은 다 타버려 가볍게 힘만 주면 부스러질 삭정이같은 말이라도 쥐고 소금에게 말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역시... 순순히 '좋으실 대로 하시죠'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그 동기가 잘못된 결말을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아니까요. 가치있는 데에 투자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잘못된 결말. 그 표본이 지금 소금의 눈앞에 있었다. 삶의 목표도 보람도 잃어버리고, 삶의 주도권을 놓쳐버리고 마음이 죽어버린 채로 남겨진 몸뚱아리만을 가지고 물리적인 시간을 견뎌내고 있을 뿐인, 인간의 자격을 잃은 사람이. 그는 카드를 내밀어서, 리조또에 쓸 식재료까지 모두 계산한 강청은 소금이 우유 묶음과 생수 묶음을 컨베이어 위에 올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소금 씨처럼 상냥한 사람이면 더욱."
하고, 강청은 무거운 봉투를 가뜬히 거머쥐고 들어올렸다.
"돌아갑시다."
마트가 말 그대로 아파트 단지에 인접해 있는 상가 마트급으로 기숙사에 가까이 있었던지라, 돌아오는 길은 그럭저럭 같이 걸어서 돌아올 만했다.
>>956 멘탈이 강하다기보다는 은석이는 남의 눈치를 보면서 끙끙대다 손해볼바에는 내가 원하는 것은 당당하게 내 손으로 쟁취해서 이득을 보자라는 마인드일 뿐이랍니다. 물론 그것도 어느정도 지키는 선이 있긴 하지만.. 아무튼 그래서 전에 아린이에게도 정이나 그런 것에 기대지 않고 결국 아린이를 포기할 수 없다면 다시 처음부터 당당하게 시작해서 홀릴 거라고 선언한거기도 하고..
일단 관전자분의 웹박수 의견은 잘 받았습니다. 사실 이전에도 이 관련으로 이 이야기를 하려고 타이밍은 재려고 했는데 김에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일단 이 스레의 배경은 어디까지나 '연애프로그램'입니다. 연애를 하려고 나오는 곳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에 '전 연인'과 함께 나오고 '미련'을 부여해서 복잡하게 꼬이는 관계를 부여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연애에는 관심이 없다는 식의, 말 그대로 대체 여기에 왜 나왔냐? 라는 의구심이 드는 캐릭터들이 있던 것도 사실이며 묘사 등으로 나는 관심없다, 배려도 뭐도 아무 것도 필요없다, 난 연애할 생각은 없다. 대신 인지도를 쌓기 위해서, 연애를 안하는게 목표다 등등. 여러분들의 캐릭터의 서사를 뭘로 짜도 그건 여러분들의 자유라고 생각했고 그에 따른 행동도 자유로 두려고 했는데 관전자들의 의견들.. 더 직접적으로 말해서 강청, 영월, 그리고 이번에 시트를 내린 성규. 이 셋에 대한 말이 좀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이리 이름을 밝히는건 저도 지켜보다가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지나간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여기가 연애프로그램 촬영지라는 것은 어느정도 인지해주셨으면 합니다. 특히 강청과 영월 페어에게 그래도 청은 여지라도 주는데 영월이 쪽은 이번 일상이나 이전 것도 기본적으로 점점 심해진다는 말도 있었고요. 캐릭터성을 아예 뜯어고치라고 하진 않겠으나 최소한의 교류는 다들 하길 바랄게요. 만약 캐입으로 그렇게밖에 되지 않는다면 캐릭터성을 바꾸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어요. 이전부터 말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만큼 최소한 여러분들이 참여한 곳은 연애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인지해주세요.
무조건 연애에만 목을 메달아라 ㅡ X 연애프로그램이고 연애에 대한 목적이 어느 정도는 있고 다른 이와 엮이니 적어도 기본적인 교류는 해라 ㅡ O
그게 주가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목적은 있게만 해주셨으면 하는 거예요. 그러니 너무 걱정말기. 이를테면 연애 프로그램에 나와서 난 누구에게도 관심없고 연애따위 알바 아님. 고로 너희들과도 교류 안하고 내 알바도 아니고 연애도 안함 이게 너무 심화되면 대체 왜 나왔냐? 라는 말밖엔 안 나오니까요. 그 얘기에요.
아앗 일어났더니 페어 시트가. 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조금 아쉽다. 일상 많이 기대했었는데~ 더 빨리 만나볼 걸 그랬네. 이럼 소금이 서사가 조금 애매한데 어쩔까 궁리 해봐야겠다. npc 두명 굴리게 되면 캡틴이 고생할까 좀 마음도 쓰이고 으음. 그것도 그렇고 >>962 >>966도 확인했어 앞으로도 특별히 주의하도록 할게. 다들 좋은 하루 보내!
아무데도? 청의 태클에도 방긋 웃어보이던 구월은 도망이 아니라는 이야기에 의아한 표정으로 청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한다. 분명 도망가고 싶은 얼굴이었던 것 같은데. 자처해 쇠철장 안에 들어가 숨을 쉬는 동물 같달지. 고개를 돌려 청이 싣은 짐을 살펴보니 아무래도 신선식품 관련인 거 같았다. 맛있는 걸 들고 어딜가려는 걸까. 구월은 잘못을 저지르는 개 마냥 청의 눈치를 살짝 보더니 주먹을 쥐었다. 살아있는게 들어있다면 퍼덕이지 않을까 상상하며.. 아이스박스 하나를 톡톡 두들겨보려던 참에 익숙한 신호음이 들려온다. 구월은 하던 동작을 멈추고 나른한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도련님."
타시죠. 청이 타도 된다는 말에 구월은 삐죽 웃는 얼굴로 냉큼 몸을 재빨리 움직이더니 달칵 소리를 낸다. 곧 운전석 문을 활짝 열고 다른 손으론 우아하게 안쪽을 손짓하며 청이 차에 타기까지 유치한 에스코트를 하려했다. 정장도 아니고, 마른 구월이 그래봤자 폼은 전혀 나지 않았지만 고개까지 숙인 게 신사적인척 하는 제리 같달까. 왜 이런 얄궂은 장난을 치는 건지는 아무도 모르나 그녀는 그가 장단에 맞춰주길 바라고 있다. 그래서 구월은 청이 차에 타 줄 때까지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결국 그가 운전석에 탔든 타지 않았든 이내 한소리를 들었든 타격없는 무해한 얼굴로 조수석에 쫄래쫄래 따라 탔을 것이다.
"도련님, 벨트 해드리겠습니다."
제 안전벨트 먼저 매지 않고 청의 안전벨트를 매어주는 시늉만 하며 진지한 얼굴로 그가 질색할만한 말을 뱉었다 결국 웃으며 자신의 안전벨트를 매려 주섬거렸다. 청 같이 경직된 사람이 곁에 있으면 말랑거리고 싶다. 도망치지 않는 도련님과 함께하는 도망, 몹시도 모순적인. 목적지는 구태여 묻지 않은 채 날씨는 화창하고 애꿎은 토스트를 버리지 않을 생각에 기분이 나아졌다.
은석과의 데이트날. 화장대 앞에 앉은 채린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웨이브졌던 머리를 생머리로 펴고 하얀원피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이 어딘가 어색해보인탓이었다. 뭐가 이상한걸까.. 곰곰히 생각해보다 문득 그 이유를 깨닫고야말았다. 연호가 아닌 다른사람과 데이트를 하기위해 꾸몄다는것이 그 이유였다. 불안간 씁쓸한 기분이 밀려온다. 데이트 상대로 나를 지목하지않은걸보니 마음정리를 했나보구나. 자신이 초래한 결과였지만 심장이 내려앉는것만같은걸보니 나는 연호를...
거기까지 생각이미치자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낸다. 이런 생각은 데이트 상대인 은석에게 예의가 아니다. 다른 이와 즐겁게 데이트를 하고있을 전애인을 생각하자니 자신도 즐기지못할 이유가 없다. 립스틱을 한번 더 덧칠한 채린은 늘상 짓고있던 상냥한 미소를 다시금 얼굴에 덮어씌운다. 은석이 주었던 텀블러를 손에 쥐고 숙소를 나선 채린은 얼마 지나지않아 숙소 문에 등을 기대고있던 은석을 발견하게된다.
"은석씨 오래 기다리셨어요?"
제가 좀 늦었죠. 약속시간보다 좀 더 이른 시간이었지만 기다리고있었을 은석을 생각하니 미안한 감정이 드는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오래 기다렸냐는 그 물음에 은석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딱히 듣기 좋으라는 말은 아니었고 정말로 자신 역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자신에 이전에 커피를 담아서 줬었던 텀블러를 손에 쥐고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오늘 돌려주려는가보다 싶어 그는 그 텀블러를 가만히 바라보다 미소를 지었다.
"커피는 잘 드셨어요? 아. 텀블러 돌려주는 거라면 잘 가져갈게요.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이내 그는 자신이 하고 있던 크로스백을 열었고 그 안에서 전날, 냉장고에 넣어서 꽁꽁 얼려두었던 얼음물이 담겨있는 패트병을 내밀었다. 당연하지만 어느 정도는 녹여뒀기 때문에 얼음으로 인해 물을 마시지 못할 일은 없었다. 그저 커다란 얼음이 안에 들어있는 얼음물이 담겨있는 패트병을 그녀에게 내밀면서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낮에 나가기엔 더워서 조금 오후 늦은 시간으로 약속을 잡긴 했지만... 그렇다고 안 더운 것은 아니니까요. 혹시나 돌아다니다가 더우면 드세요. 안 드셔도 뺨이나 이런 곳에 대면 되게 시원할테고."
다 못 먹어도 방에 가져가서 먹으면 시원할 거라고 이야기를 하며 그는 살며시 앞장서듯, 허나 너무 멀어지지 않게 그녀와의 거리를 일정함을 유지하며 앞으로 걸어 공원으로 향했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제가 지목해서 놀라지 않았을까 걱정이네요. 너무 크게 생각하진 마요. 그다지 큰 의미를 담고 지목한 것은 아니기도 해서. 적어도 아직은."
그렇다면 그 이후는? 그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말하지 않으면서 그는 살풋 웃음소리를 내면서 다시 앞으로 천천히 걸으며 말 없이 그녀와 보폭을 맞추려 했다.
오른손으로 숫자 1과 2를 각각 표시한 후, 그는 웃음소리를 내며 텀블러를 받았고 얼음물 패트병을 주면서 생긴 공간에 집어넣었다. 딱 들어맞는 공간을 확인한 후, 그는 가볍게 안에 들어있는 자신이 먹을 물을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살며시 바깥쪽으로 꺼낸 후, 가방을 닫았다. 어쨌건 자신도 자신의 얼음물을 더우면 마셔야할테니까. 꼭 마시지 않더라도 열기가 뜨거울 때 뺨에 살짝 갖다대서 더위를 식힐 수도 있었고.
"그 다음이라. 글쎄요. 채린 씨에게 진심이 되면 아마 논스톱일 것 같은데. 쓸데없이 욕심만 많아서 저는 여기서 가지고자 하는 것을 만약 가질 수 있다면 욕심을 크게 낼 것 같거든요. 그게 다른 이건, 채린 씨건. 이런 이는 조금 부담스러우신가요?"
그녀의 말에 마찬가지로 장난끼를 살짝 담아 그는 웃음소리를 냈다. 이내 들려오는 그녀의 하늘에 대한 평에 그는 자연히 하늘을 바라봤다. 확실히 석양이 질 것 같은 저 하늘이 유난히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오랜지빛 노을로 물들게 될테고, 거기서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어두컴컴한 밤하늘이 되겠지. 허나 지금은 여름. 아무래도 온전히 어두워지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것이 조금 아쉽다는 듯, 그는 괜히 아쉬운 목소리를 냈다.
"구름이 없어서 별은 정말로 예쁘게 볼 것 같지만 혼자 보게 될 것 같아서 조금 아쉽네요. 밤에 별 보면서 산책하는 것도 되게 예쁜데. 그때까지 같이 있어달라고 하면... 있어줄래요? 오늘 하루는 채린 씨에게 올인할 거라서. 적어도 헤어지는 시간까진."
미션으로 지목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적당히 시간만 보내면서 떼우는 느낌으로 보낼 생각은 없었다. 그건 지목한 것이 아니라 지목받지 않았던 지난 미션때도 가졌던 마음가짐이었다. 어찌되었건 해야 하는 것이고 하는 거라면 정말로 유익하게 추억 하나는 남기고 싶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