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탁탁 꼬리가 바닥을 치는 소리가 방에 울린다. 평소 같으면 정신 사나우니까 멈추라고 말할 법도 하지만. 왠지 모를 긴장과 초조함을 느끼는건 마찬가지니까, 이해하기로 했다.
"일단은....사실, 처음의 너와 나 처럼. 응석을 부리는 아이와 그걸 받아주는 어른의 관계로 친해진 소녀가 있다."
정말 장절한 서두지만, 일단 이걸 말하지 않으면 시작이 안된다. 라임의 나이는 20세라 소녀로 칭함이 정확한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으나 사소한건 넘어가기로 했다.
"....너와 거리가 멀어졌을 때, 그 애와 둘이서 의뢰를 갔다가 조난을 당했다."
차가운 설산에서, 눈폭풍이 휘몰아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좁은 토끼굴에 들어갔다고 덧붙인다.
"그 비좁은 곳에서, 음......그 애가 조금, 적극적으로 달라붙어와서 말이다."
조금 적극적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될 것 이다. 그건 중요한 부분이 아니잖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떠올리면 이불을 발로 차고 싶어지는 기억을, 소중하다고 여기는 애 앞에서 말하는건 몹시 어려운 일이다.
"나도 호응하려고 했더니, 나에게 그런 것을 바란건 아니었다고. 나보고 연애하고 싶어서 잘 대해줬냐고 묻더라."
손으로 눈가를 짚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아니면, 담배를 한대 피우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속이 매우 초조하다. 그렇지만 그 모든 행위가 아마 나보다 더 속상할지도 모를, 입다물고 듣고 있는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함으로. 나는 침만을 꿀꺽 삼켜 답답한 속을 달래려 노력할 뿐이다. 이 다음은 정말 부끄러운 내용이다. 그러나, 이 것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반드시 오해와 실망이, 혹은 후회가 생길 것이다.
"아니라고 하려다가, 네가 떠올랐다. 아이와 어른의 관계로서 모른척 했다가, 일방적으로 거리를 두자고 절교를 당했던.....그 기분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때가 되어서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비참함이. 교실에서 홀로 터트린 울음이 떠올랐다. 어른스럽게 굴어서 맺은 결과물이 그거라면, 이젠 그냥 꼬마가 되어 위안이라도 받고 싶었다."
전혀 어른스러운 심정도, 행위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게 내 솔직한 감정이었다. 어른스럽게 굴어서 그토록 비참해지고 슬프다면, 그냥 아이라고 인정해서라도 소중한 인연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에게 고백했었어. 아이 같아도 되니까 사귀어달라고. 그리곤 그녀는 수락했다. 나보고 이후론 일절 어른스럽게 굴지 않고 아이처럼 대하면 사귀어준다고 얘기하더라........결국, 그 조건에는 내가 동의하지 못해서 무산되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서먹해진거다."
거기서 만약 '네' 라고 말했다면, 지금과는 정말 많은게 바뀌었겠지. 나는 어른스러움을 관두고 라임의 연인이 되어서, 예쁨을 받았겠지. 그랬다면 아마 유하의 화해 신청도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응석부릴 대상을 찾은 아이에게, 상처를 용서할 아량은 없었을테니까. 나는 지금의 길을 골랐다. 흑역사를 쌓으면서도, 아슬아슬하게 성인으로서의 나를 지키기를 골랐다. 그게 현재 이 순간이다.
나는 찬물을 한모금 더 마신다. 어느새 잔은 비어버렸다.
".....일단 말해두자면, 차분해진 지금. 고백했다는 방금의 말과 달리 그녀와 사귀겠다는 강력한 연애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 이건 상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때는 극한의 상황속에서, 나에게 실망했다는 그녀에게, 이미 소중한 관계를 잃어 패닉에 빠진 나는 어떠한 수단으로든 관계를 이어나가길 바래서 극단적인 수단을 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더 이상 울고 싶지 않을 정도로 몰려있었다. 그마저도 아슬아슬한 부분에서, 결국 스스로를 완전히 포기하지 못했지만."
이 얘기를 전부 들은 유하가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내 솔직한 심정은 그렇다. 나는 라임과 사귀어 남자친구가 되고 싶다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그랬다면, 이미 사귀었을 것이다. 유하와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부분에선 꽤나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변명할 수 없는, 해야하는 한마디 결론이 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얘기를 들었으면 짐작하듯이, 그녀를 좋아하거나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은 사실이다."
저기서 숨기면 찔리는게 있단 얘기지요!!! 의도적으로 숨겼는데 나중에 들키면 그 땐 무슨 말을 해도 설득할 수가 없지요!!!! 근데 라임이랑 유하가 남남도 아니고 안들킬리가 없잖아!!! 애초에 윤시윤씨는 그렇게 남을 속이는걸 매우 싫어하니까, 결국 윤시윤류 화법술 매우 솔직하게 빌기 밖에 없었어
이야기가 진행되어 가는 와중에 동공은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정신 사나운 꼬릿소리도 멈췄다. 조용한 방 안에 숨소리와 물이나 쥬스를 마시는 소리를 빼면 모든 이야기가 윤시윤의 것이었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이야기는 아닌가. 숨기고 싶어하고, 하필이면 정신적으로 위축된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며 꼭 해야 하는 이야기. 여러가지 가능한 수를 생각 해 봤었고, 개중에 심리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타인과의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는 예상 안에는 있었다. 그 과정이 예상과는 달라서 몸에 힘이 들어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상정 내의 이야기임을 감안하면, 그렇게까지 흥분할 이야기도 아니라고 생각은 하지만...
"상대방이 누구고 뭘 어떻게 얼마나 한건데? 그리고, 앞으로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
배신당했다는 얼굴로 인연을 장난으로 여긴 것은 너라며 쥬스를 얼굴에 끼얹을 수도 있었으며, 상처를 받았다고 울어버리는 수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이 이야기로 넘어 오는 우회선일 뿐이어서, 스스로도 잘 모르는 감정을 꾹 삼키고 상대방에게 본론으로 들어가길 권유했다.
왜 내가 큰 잘못(바람)을 저지른 남편이 아내에게 혼나는 듯한 처지가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몸과, 한치의 떨림 없이 서슬 퍼런 눈으로 따져오는 상대를 마주하면 그런 의문은 자연스럽게 본능적으로 들어가는 법이다. 남자 아이란 이토록 안타까운 생물이란 말인가.
"상대는......라임이다."
흘끔 하고 상대의 눈치를 살피며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곤 첫번째 질문에 대답한다. 본래 이런 예민하고 개인적인 문제의 상대를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정말 원치 않지만. 지금 이렇게 말해놓고선 '말할 수 없다' 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분위기다. 라임에게도 내가 유하를 좋아한다던가, 깊은 얘기는 했었으니까. 이해 해주겠지....제발 해줘.
"어떻게 하고 싶은진 화해...하러 갔을 때 복잡한 교환 끝에 어느정도 정해졌다. 라임이는 자기를 조금 가볍게 대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뭐,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엔, 그냥 뭐, 서로 장난치고 챙겨주는. 사이가 좋은. 그런 느낌이겠지. 적어도 난 그리 생각한다."
다음 대답은 비교적 수월하게 한다. 라임도 보건데 그 때의 기억을 꽤 부끄럽게 여기고 있으며, 나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되 너무 무거운 관계가 이어지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고 얘기했다. 그게 나에겐 결국 거리를 벌리자는 의미라고 생각했으나,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녀는 성격상 연달아 이어지는 무거운 고민을 견딜 수 없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건 꽤나 힘든 교환 끝에 서로의 도달점은 정해졌고, 연애라던가 무거운 이야기 없이 서로 꽤나 가볍고 친근하게 어울리는 관계.....가 될 것이다. 아마도. 라임이는 어쩐지 확신하기 어렵다.
"그리고.....뭘 어떻게 얼마 했냐는......음............"
식은땀 한줄기가 흐른다. 무엇이지, 내가 직접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말하기 힘든 것이냐. 눈 앞의 무시무시한 용에게 잡아먹힐 것 같은 분위기에 시선을 한번 흘끔 피했다가, 슬쩍 상대를 올려보며 조심스레 답한다.
"....상대쪽에서 기습적으로 한 싸늘한 입맞춤 한 번이랑. 사과하러 갔을 때, 절교할 뻔 했다가 극적으로 화해한 직후에 침대로 힘에 이끌려서 마주 누워 껴안은.......정도......이상한 짓은 안했다. 맹세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