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글쎄,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말. 아까 그 사진을 보지 않았더라면 기쁘게 웃을 수 있었을 텐데. .. 문고리를 잡는 기척이 들렸을 때, 라임은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부스스한 머리카락. 아침에 감은, 뭉쳐있던 샴푸 냄새가 이불 근처에서 맴돈다. .. 마지막이라는 것처럼 안타깝게 구는 게 제일 싫다. 마지못해서는 아니고 어쩔 수 없이..도 아니고 아쉬워서..였다. .. 라임은 침대에서 내려와 냉장고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나 후줄근한 옷차림은 신경쓰지 않고서. .. 냉장고에서 시윤이 놓아둔 영양제를 꺼내어선 벽 쪽의 간이 테이블에 앉았다. .. 탁자 위에 영양제를 올려놓고선 시윤을 바라보며 탁자를 손바닥으로 톡톡 쳤다. 이리 와서 뚜껑을 열어라는 것처럼. .. 그리고 그가 선물한 상자를 열어 귀걸이를 바꿔 끼었다. 그를 처음 만난 날에는 빼두었던 귀걸이를 잃어버렸었는데. 이번에는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그 자리에 흰색 네잎클로버 귀걸이를,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서 끼는 것이다. .. 예쁜 선물상자. 이것도 조금 일찍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 결국 좋아하는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선을 그으려고 온 건 아닐 거 아냐. .. 라임은 무표정하게 시윤을 바라보며, 귀가 보이도록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 [예뻐?]
어쩐지 목에서 내뱉어지지 않는 그 한마디를 끌어올릴려는 순간. 그녀가 이불에서 벌떡 일어났다. 솔직히 말하자면, 엉망진창 놀랐다. 문고리를 쥔체로 뒤로 주저앉을 뻔 했다.
너무 깜짝 놀라서 뭐라 말도 못하고 굳어 있었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냉장고에서 내가 넣어둔 영양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톡톡,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에 간신히 멍한 정신이 깨는 기분이다.
나는 천천히 영양제에게, 그녀에게, 다가간다. 조심스럽게 올려진 병을 잡고선, 그녀의 안색을 살핀다. 뭐라고 해야할까, 홀리고 있는 기분이다.
"............."
그녀는 그러는 사이에 말 없이, 내가 선물해준 상자를 열어 귀걸이를 낀다. 얼굴은 무표정했다. 나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일단 당황하고는 있다만. 뽕, 하는 방의 분위기와는 전혀 안어울리는 뚜껑 열리는 소리가 퍼지고. 나는 열린 병을 조용히 그녀의 앞에다가 놓고, 자연스레 옆자리에 앉는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내가 선물해준 귀걸이를, 바라본다. 마치 대답해버리면 간신히 보게 된 그녀의 얼굴이 끝나버리는 것처럼, 바라본다.
머릿속에선 많은 말들이 오갔다.
그 이후로 어땠어, 방금전까진 왜 이불안에 들어가있던거야,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등등등....
그러나 나는 입을 벌려, 가장 솔직한 한마디만 하기로 했다.
"예쁘네."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진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선물해준걸 착용해준 것은 기뻤다. 지금은 길게 얘기하는 것보다 그냥, 그것으로 좋을 것 같아서. 귀걸이라는게 마치, 처음 만났던 날 네가 잃어버린 귀걸이를 찾아줬던걸로 시작하는 우리의 인연 같아서. 나는 그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라임은 그가 뚜껑을 열어준 영양제를 한모금 마셨다. 예쁘다는 말에 대한 대답 대신이었다. .. 영양제는 생각보다 입에 맞지 않았다. 제일 싫어하는 토마토 맛이 나. .. 결국 반도 못 마시고 얼굴을 찡그리며 영양제를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 라임은 시윤을 바라보며, 네트워크 화면을 띄워 메시지를 보냈다. ..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 그러면서 두 손을 들어 제 기다란 토끼 귀를 붙들고 앞뒤로 살랑살랑 흔들어 보인다. .. [둘이 잘 어울리던데] [여자친구가 너 이러고 있는 거 알면 화내겠다] .. 라임은 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환하게 웃어 보였다. [나한테 뭐 아쉬운 거라도 남았니?]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해. 나는 괜찮으니까.] ..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하고 무감정했다. 배신감에 속이 타들어가면서도, 애써 태연한 체를 하려고 속으로 가진 애를 꾹 꾹 눌러 담았다.
그녀는 영양제를 한모금 마시더니, 얼굴을 찡그리곤 내려놓았다. 입 맛에 안맞았던걸까. 아니면 이 콕콕 찌르는듯한 분위기에 영양제가 희생된걸까. 어느쪽인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다음번엔 당근맛으로 사오자고 스스로 기록해둔다.
라임은 나와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고, 꿋꿋히 메세지를 보내왔다. 그 것이 일종의 시위임을 눈치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아니 사실 처음부터 명백한 시위였다. 그녀는 나에게 무언가 불만이 있는 것이다.
".........."
나는 이래보여도 눈치 없는 인간이 아니다. 귀를 강조하며 살랑살랑 흔들고, 여자친구 운운 까지 들으면 사실,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 얼마전 유하랑 찍은 고양이 카페 사진인가. 그렇구나. 그걸 보고, 그녀는 내게 배신감에 시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설명하는걸 썩 좋아하진 않지만, 몹시 분노하고 있는 그녀를 위해서라도. 설명 끝에 어떻게 될진 모르겠다만, 적어도 오해는 해명해야겠다 싶었다.
"유하는 여자친구는 아니야. 물론, 그와 근접한 관계인건 맞지만. 좋아한다고 얘기하고,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는 애야."
일단 이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것은 명백한 진실이다. 라임과의 관계를 위해서 이 부분을 숨긴다면, 나는 그냥 여자들을 홀리고 싶어하는 바람둥이 일 뿐이다. 나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는 거짓말하지 않겠다.
"그 시작은 아이의 응석을 어른인 내가 받아주는걸로 시작했어. 그러나, 라임이 너도 알다시피. 나는 여자애랑 사귀는 것에만 집중하는 어린애는 아니지만, 상대를 그냥 아이로만 볼 수 있는 늙은이도 아니잖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확실해. 좋아하는 것도 확실해. 그렇지만, 연인으로서인지는 잘 몰라. 그러니까 유하는 아직 내 연인이 아니야."
나는 상대를 바라본다. 내 눈동자에 네가 비칠 수 있도록 올곧게 바라본다.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다면, 나는 근거를 댈 수 있어. 다행인지, 불행인진 모르겠지만. 그 근거가 누구인진, 라임이 너도 잘 알겠지."
아이의 응석을 어른인 내가 받아주어서, 서로가 꽤나 좋고 소중 해졌지만, 그 '좋음' 의 정의에 대해 서로 엇갈리고 어긋나서 애매해져버린 관계가 있다. 그래. 그것도, 매우 가까이에 있다. 내 눈 앞의 토끼소녀가 그러하니까. 나는 그러니까 그녀를 마주 바라보았다. 무표정함 뒤에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을 그녀를 바라본다.
"하고 싶은게 있냐고 물어본다면, 네게 미안하다고 하고 쓰다듬어주고 싶었어. 너는 그게 단순히 변덕으로 아이취급 받아본 것 뿐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상당히....소중하고, 기쁜 관계였거든. 그것은 뭐라고 해야할까, 나에게 있어선 마냥 애취급하는게 아니니까.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서투른 표현이니까. 서로가 민망한 짓을 해서 상처를 주었어도, 그 결과 서먹하게 끝났어도, 나는 네가 좋았어."
한숨을 한번 내쉰다.
"미움 받지 않기 위해 멋있게 포장할 수도, 말을 돌려 그냥 너를 달랠 수도 있었지만, 그건 내가 소중히 여긴 너와의 관계를 모욕하는 셈이었겠지.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했어. 내가 차분할 때, 흥분하지 않고 진심을 말했어."
더 멋지고 능숙한 말 같은건 있었을 것이다. 모른체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난 그러지 않았다. 난, 내가 소중히 여기는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패닉에 빠져서 자신과 타협했던 그 때와는 다르다. 나는, 진심을 전했다.
"그 때와는 반대로,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진 라임아, 네게 선택권을 맡겨줄게. 내게 화를 내고 싶다면 받아줄게. 다시는 아는척하지 말아달라고 하면, 그렇게 해줄게. 거기엔 원망도, 분노도 없어. 소문을 퍼트리지도 않을거야. 그냥, 다만. 단 한가지만 바랄게."
나는 활짝 웃었다.
"네가 무슨 선택을 하던. 나는 네가 언제 어디서든,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기분 좋은 일을 겪고, 미소지으면서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래."
이후 내가 그녀 곁에 있을 수 있을진, 솔직히 모른다. 내 예상으론, 그다지 높지도 않다. 그렇다면 다만, 부디, 행운의 네잎클로버가 늘 계속 그녀 곁에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