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여러모로 공황에 빠져있던터라. 솔직히 이 쪽에서 실책이 좀 컸지."
한숨을 내쉬곤 조금 푸념한다. 보통은 내가 누군가에게 미안할 정도의 행동은 하지 않는다만. 당시에는 뭐, 이것저것 있었으니까. 돌이켜보면 죽고 싶어질 정도의 미숙한 행동 연발이었다. 음....역시 기회를 봐서 한번 사과를 하는편이 좋겠다. 상대도 꽤나 너무했다는게 감상이지만, 그게 내 쪽의 실수를 정당화할 이유는 되지 않으니까.
"그렇군. 지난번에 만질 때도 생각한거지만, 확실히 민감한 부위인가 보구나. 그러고보면 꼬리도 그랬던가."
하긴 떠올려보면 전에 노래방에서 뿔을 만질 때에도 굉장히 얌전하게 있었던 것 같다. 그 때에도 '생각보다 예민한 부위구나' 라고 속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럼 뿔에 장신구는 무리니까, 역시 리본이나 머리띠가 무난할까...하고 생각하다가.
"응. 보고 싶은데?"
그녀의 얼굴을 보며 어울리는 악세사시를 고민하다가, 당연한걸 물어봐오길래. 당연한걸 왜 묻냐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며 당연한 대답을 했다. 그야 보고 싶다고 말했으니까, 보고 싶지.
농담이라고 믿고 싶지만, 상대를 잘 알고 있는 나에게는 조금도 농담이 아니라는걸 알 수 있었다. 실은 그래서 더 무섭다. 신고했다면 이종족 성희롱법으로 처벌이라도 받았을까. 여태 스스로 아저씨라고 주장하던 소년의 성추행......우욱. 끝장이다. 그녀의 넓은 아량과 어른스러운 대처에 조금 진심으로 감사하기로 했다.
" 그럼 지금의 모습이 제일 귀엽다고 생각하는거야? 보여주고 싶다는 모습이란 의미니까 말이다. "
등을 얻어맞으면서도 문득 의아해져선 묻는다. 요컨데 지금의 모습이 상대에게 가장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란 소리니까. 유하는 양갈래 머리인 자신이 제일 귀엽다고 여기는 것인가? 꽤나 흥미로운 주제다.
"어차피 고급 아이템을 구매할 자본은 없으니까. 예쁘고 귀여운 것 위주로 고르면 되겠지. 그럼 그 쪽으로 가자."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내밀다가. 아. 하고는 짧게 뒤늦게 떠오른듯. 웃으며 덧붙이는 것이다.
"....너는 영리하니 아까의 얘기로 뭔가를 눈치채서 내심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건 전혀 신경쓰지 마라. 여자애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남자는 멋이 없으니까. 뭔가 실수를 했다면, 그건 내 잘못일 뿐이야."
좋아한다고 말해둔 여자애한테 자신의 일로 죄책감을 지게 하는 것은, 어른으로써도, 남자로써도 굉장히 꼴사나운 일이다. 그럴 바엔 스스로의 잘못이라고 솔직하게 시인하는 편이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팡팡 두드려지는 등에 나는 매우 솔직하게 대답했다. 절교 당한걸 용서도 해줘, 매우 진솔한 감상도 말해줘, 놀러가자고 권유도 해. 이 이상 잘할 수가 있는 것인가? 나는 내가 두렵다.
.....실은 농담이다. 애초에 뭘 해야 더 잘할 수 있는지 솔직히 흥미는 좀 많다.
"편견이라고 말하기엔, 실제로 효과가 있는 처세술이지. 외견은 중요한 판단 요소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더 다른 모습도 보고 싶어지네."
생각보다 계산속이 있어 조금은 놀랐지만, 사실 어느정도 예상하기도 했다. 양갈래 머리는 '귀엽다' '아이같다' 라는 인상을 부각하기에 꽤나 좋은 스타일임이 분명하니까. 아마 그녀와 어울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밝고 쾌활하고 귀여운 아이 정도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쩐지 나만이 아는 비밀 같아져서 왠지 기분이 좋아졌지만, 그건 부끄러우니 입다물고 있자.
청소년의 이성관계라는 것은 항상 남자애가 여자애의 복잡한 심경을 읽어내는 퀴즈쇼 같은 것이란 말인가? 남자아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길래 그런 몸과 마음이 떨리는 퀴즈쇼에 순수한 감정을 이유로 참가해야 된단 말인가. 정말이지 불합리한 사회적 관계다. 물론 싫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 관계가 끝나버리니까 이렇게 말해도 할 수 밖에 없다.
"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긴. 기쁘다고 얼굴에 써있는데. "
나는 빨라진 그녀의 보폭에 맞춰 발걸음을 좀 더 성큼 따라가면서, 시원스럽게 단언한다. 지금의 유하가 표정부터 말투부터 들떠있는것은 바보가 아니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화해했던 날에 그런 표정과 반응을 해놓곤 이제와서 숨기려고 들어봤자 말이다.
"...................."
일단 그녀 답지 않게 이 쪽의 사정을 염려하거나 깊게 관려하려는건 기쁘긴 했다만. 내가 한 짓.....내가 한 짓.....내가 한 짓......?
즐겁게 키득거리다가 이내 폭소하는 그녀를 보고, 나는 어깨를 한번 늘어트렸다가 이내 으쓱하며 웃고 대꾸한다. 뭐, 편견이라면 편견일지도 모르겠다만. 남자애를 위해 여자애가 노력하는 것보다, 여자애를 위하 남자애가 노력하는게 어울리긴 해. 그런 의미에서 나는 문득 자연스럽게 연애의 기미가 보이던 재수없는 남자애 한명을 떠올리는 것이다. 너도 힘내길 바란다.
"부끄러우니까 과장스럽게 말하는게 무척 귀엽구나. 그렇게 말해주니 나도 기쁘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하유하 이해도가 너무 높아졌다는 감각은 있다. 그녀는 비꼬거나 태평한척 굴기 위해 과장된 말투를 쓰는 경우가 많지만, 지금과는 명백히 느낌이 다르다. 애초에 이전엔 이런 흐름에선 푸하하 웃곤 좀 더 바보취급하는 말투로 자신의 진심을 표현하지도 않았으니까. 따라서 나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애쓰면서도 진심은 전해오는 그녀에게, 솔직한 감상으로 돌려주기로 했다.
"...............다, 다음 기회에. 지금은 놀러 나왔으니, 그 목적에 충실하자고."
그녀가 저렇게 경악하는건 처음보다. 사실, 내가 이렇게 떨떠름하게 대답을 꺼려하는 것도 처음일 것이다. 어쨌거나 마냥 숨기기만 할 생각은 없음을 전해서 안심시키로 했다. 당연히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은 아니다. 기왕 놀러 나와서 갑자기 심각한 분위기로 빠지는 것이, 꼭 좋다고만은 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윤시윤의 필사적인 사과를 가만히 듣고 있는 도마뱀. 왜 별 말이 없었냐면 사실 그렇게 짜증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냥 웃으면서 아이고 우리 삐돌이 또 삐졌어요? 해도 악 그만해라! 하고 넘어갈 수준이었기에 상황이 묘하게 흘러간다, 싶은 감정이었다. 하지만 또 그 방향이 재미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은 주정할 수 없다.
" 딱히 뭐 원하는건 없는데. "
이 부분은 진심이어서 가만히 상대방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 그러면 나랑 뭘 하고 싶은건지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았더라도 그냥 머릿속에 떠올랐던 녀석 중에서 제일 말하기 싫은거 말해줘. "
당황해서 필사적으로 사과했지만, 화날 때의 버릇인 발과 꼬리를 탁탁 거리지 않는걸 보건데. 짜증은 났어도 엄청나게 짜증나진 않은 상태였고, 나는 멋지게 제발을 저려버린 셈이다. 나는 뒤 이은 요구에 조금 당황하며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본다. 뭘 하고 싶은건지 떠오른 것 중에서 제일 말하기 싶은거라니. 매우 악의적인 의도가 보인다.
".......진짜 듣고 싶은거냐? 그런걸? 정말로? 듣고 이상하게 생각 안할거지? 괜찮은거냐? 진짜?"
나는 손으로 입을 가린체로 시선을 흘끔 옆으로 돌리며 계속 묻는다. 말하라고 해서 말했는데, '우왓....좀 아니다....'같은 반응이 나오면, 아무리 나라도 쇼크다.
여기서 부끄럽다고 둘러대면 방금 진지하게 사과한게 새빨간 거짓말이 된다. 지금은 장난일지 몰라도, 그렇게 되면 인간적인 실망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내용인 것이다. 무엇보다 내 신조가 용납을 못한다. 결국 물러날 길은 없다. 그렇다면 배수의 진을 각오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말이야 그럴듯하지.
자폭해서 부끄러운 심정을 밝히는 입장인게 달라지진 않았기 때문에, 나는 매우 더듬거리며 털어놓았다.
"......지난번처럼 부끄러워하는 널 안아주는거. 그 때 생각 이상으로 귀엽고, 부드럽고, 따뜻했으니까. 묘하게 향기도 좋았고."
차라리 놀려라!! 아니, 부탁이니까 놀려줘!! 감탄하며 방긋방긋 웃는 그녀에게 나도 어색하게 웃으며 속으로 비명을 지른다. 놀리기라도 했으면 약속은 지켰으니 다시 뻔뻔하게 돌아가면 그만인데. 저러는 편이 더 부끄럽다. 아마 알면서 저러고 있는거겠지.
"엑, 음......."
예상치 못한 반응에 드물게 허를 찔린듯 당황한다. 놀리는건가? 아니, 아닌 것 같은데...... 시원스럽게 받아들이면 그제서야 미끼를 문 물고기를 낚듯 놀릴까? 그런 복잡한 계산들이 이리저리 머릿속에서 흩어지지만, 결국 내 대답은 명료했다.
"할래."
놀림 좀 당하는걸로 포옹할 수 있다면 오히려 매우 행복한 교환이다. 나는 그렇게 결론 지었다. 천천히 다가가선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작은 몸을 부드럽게 품으로 끌어 당긴다. 그리곤 그 때 처럼 천천히 등을 쓸어내리며, 조금 그 기분을 만끽하는 것이다. 나는 내 생각보다 사람과의 접촉을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