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네가 잘못된 곳에서 부주의하게 현실의 공간을 벗어났을 때, 너는 "백룸"에 도달하게 될 거야. 눅은내 나는 축축한 낡은 카펫과 낡아빠진 벽지들, 수없이 많은 낡은 형광등들이 내는 지직거리는 소음으로 가득차 있고, 그런 것들이 모여서 무작위로 만들어진 방들이 최소한 8억 평방 마일은 이어져 있는 곳에 갇혀버린 거지. 혹시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면 행운을 빌어. 그쯤 되면, 그건 이미 네가 거기 있다는 걸 진작에 알아차렸을 테니까.
"뒷방들"에 대한 괴담을 들어본 적이 있나 모르겠다. 인간이 지은 구조물들의 요소들을 무작위로 마구 뒤섞어 임의로 재배열한, 누구도 그 정확한 넓이를 알지 못하는 공간. 여러 가지의 레벨로 이루어져 있어, 그 테마도 제각각이라던가. 그것을 백룸의 정의로 삼는다면 바빌론 시티의 지하 역시도 백룸의 한 갈래라 할 만했다. 폐쇄된 구 지하철 노선을 포함한 지하철 노선들과 냉전 당시의 지하 시설들, 상업적 목적으로 무분별하게 확장된 지하층들, 상업적 목적으로 확장되었다가 버려진 지하층들, 설치의 의도가 짐작가지 않는 그것들을 잇는 통로들, 그리고 출처 불명의 지하 시설들이 뒤섞여 바빌론 시티의 또다른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 폐허도 폐허 나름이라 아직도 황량한 곳도 있었고, 버려진 지하상가 같은 곳에 꾸려진 판자촌 같은 것도 있었으며, 저 해커들이 모인 전자상가 쪽에 원래 찾아가려던 지인이 있었다. 그리고 상업적 용도로 쓰이던 호화로운 지하 홀 같은 공간은 미심쩍은 회사의 경영진이나 조직의 우두머리 같은 이들이 점거 혹은 구매하여 자신이 원하는 용도로 이용하고 있었다. 그런 것들이 뭉쳐 이루어진 바빌론 시티의 지하.
이전에도 여러 차례 이런저런 용무로 방문했기에 이 지하가 생소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익숙한 것도 아니었다. 이 여러 테마가 뒤섞인 지하의 구룡성채 같은 곳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찜찜했다. 그런 찜찜함을 더욱 가중시켜 주는 것은 마오의 존재였다. 지하의 북쪽. 아르카디아 영역권 내의 지하.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일반적으로 통보한다고 알려진 접선지점과는 영 떨어진 지점이 아닌가. 거기다가 그녀는 마오가 용왕의 부하라는 것도 잘 알았다. 더군다나 미네르바의 부엉이와의 랑데뷰 시도가 자신이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심지어 그것이 잘 진행되고 있다. 어쩌면 용왕이 나를 가지고 이상한 계략을 짜고 있기라도 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에는 충분한 조건이었다.
그래서 페로사는 마오의 천진난만한 배려에 자연스러운 미소를 가볍게 꾸며냈다. 스스로의 감정을 속이는 일에는 꽤 익숙했다. "아뇨, 초콜릿은 별로." 입안에 리몬첼로 사탕을 하나 까넣고, 오히려 "마오도 하나 어때요." 하면서 같은 사탕을 하나 꺼내어줄 정도로 말이다. 오늘의 예술작품이라는 명판이 걸려있는 진열대를 페로사는 '뭐 이런 게 있냐' 하는 눈으로 훑어보다가, 기억에 있는 얼굴을 발견하고 땡감 씹은 표정으로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쇼케이스에 든 내용물과 그 다음에 펼쳐진 방의 풍경의 갭이 그녀의 땡감 씹은 표정에 한 술을 더 떴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을 정말로 가관으로 만든 것은, 그것 차암 안타깝네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이었다. 분명히 그 음색도, 어조도, 음향학적인 분석으로도 그것이 절대로 같은 사람의 목소리일 수 없을 텐데,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낯익게 들리지 않는가. 전혀 다른 음색으로 뒤덮여있어 단숨에 머릿속에서 일치시키기는 어려웠지만, 이 기시감은 기시감이라기에 너무도 그 존재감이 뚜렷했다.
페로사는 문으로 척척척 다가가 덜컹, 하고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녀는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왜 모든 절차를 생략하고 자신을 만나고자 했는지 알게 됐다. 새하얀 바지에, 까만 구두, 어깨에 걸친 새하얀 재킷, 팔꿈치 바로 밑까지 둥둥 걷어올린 검은 셔츠와 까만색에 가까운 와인색 조끼 그리고 눈에 띄는 진홍색 넥타이 차림을 한 키 큰 여인은, 한 방 먹었다는 듯한 쓴웃음을 얼굴에 걸었다.
이건 조그만 팁인데, 요즘 유튜브는 동영상 아래의 그 동영상 진행률 표시줄 있잖아. 거기에 마우스를 올리면 하얀색 그래프가 나오는데, 그건 사람들이 어디서 가장 많이 동영상을 돌려봤냐를 표시해주는 그래프야. 그 하얀 그래프가 높게 분포해 있는 곳에 깜놀장면이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걸 잘 보면 깜놀장면을 피해갈 수 있어. 다만... 폰튜브에서도 되는지는 모르겠네 👀 가끔 점등되는 것도 귀여워... (쓰담다담)
속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마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다. 우아한 옷매무새와 달리 초콜릿을 찾아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태도는 시정잡배 느낌이 들기도 했다. 당신의 입장에서 마오를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부엉이와 용왕 간의 유착관계는 단순히 지하의 윗선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을 뿐, 서로 간의 영역을 침범하되 그 대가는 확실하게 치르는 관계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있는 것 같다.
"지인짜요?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마오는 눈치가 없다. 그것도 제법 많이, 이 도시에서 지나치게 말간 빛을 가진 미카엘의 존재와 함께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마오는 당신이 쇼케이스와 여타 공간에서 시시각각 불편한 표정을 고수할 때도 그저 "오늘 작품이 예쁘죠?" 따위의 말을 할 수 있었고, 부엉이를 부를 때도 친구를 대하듯 했으며, 하물며 당신이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에도 당신의 옆모습을 보며 슬쩍 리몬첼로 사탕의 포장을 까는 등 시종일관 천진난만한 태도를 고수했다. 다만 당신이 걸음을 내디뎠을 때, 마오는 "좋은 시간 보내세요." 라며 어딘가 기이할 정도로 상냥한 미소를 짓더니 문을 손수 닫아주고 대기실을 나서버렸다. 당신의 예민한 귀는 찰칵, 하고 잠기는 문 소리를 들었다. 이후 들리는 총성도. 이제 이 장소에는 당신과 부엉이뿐이다. 부엉이의 거처는 난색 샹들리에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인지 제법 어두운 편이었다. 명도가 낮은 갈색 목조로 된 기둥, 아이보리색 천장, 붉은 러그, 당구 세트, 의뢰인을 위한 푹신한 소파……. 부엉이의 거처는 동화 속 세계에 온 당신이라는 이름의 앨리스에게 이 장소는 명백한 현실이라고 일깨우는 것과도 같았다.
하지만 안의 구조 따위도, 동화 속 세계도 중요하지 않다. 그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부엉이의 의견은 달랐던 것인지, 테이블 위로 손깍지를 끼고, 그 위에 턱을 괴고, 헛것을 보는 듯 눈을 홉뜬 모습 그대로의 침묵은 당신이 쓴웃음을 지을 때까지 이어졌다. 이내 부엉이, 에만, 미카엘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그럴 리가 없지. 느릿하게 감긴 눈꺼풀만치 차분한 인사가 당신을 향했다.
"안녕, 페로사. 오늘 날씨가 좋지…?"
미카엘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를 지었다. 한 방 먹었다는 당신의 씁쓸한 미소와 다르게 어딘가 뿌듯한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미카엘은 손을 뻗어 소파를 가리켰다. 손님용 소파 앞 테이블에는 두다 만 체스가 있었다. 백색 체스 말이 열세에 놓인 상황이었고, 폰이 이리저리 널브러진 것을 보니 아마 체스 말의 주인은 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한 번 뒤엎으려 했던 것 같다.
그 왜 몇 개월 이상 된 동영상이면 "가장 많이 다시 본 장면" 같은 거 표시해주잖아. 백룸 같은 점프스케어 계통 공포 영상은 대부분 깜놀파트에서 영상을 다시 돌려보니까. 물론 그런 원리라서 최근에 올라와서 데이터가 충분히 누적되지 않은 신상 영상에는 못 써먹지만... (스담담) 아니, 정말 예쁘게 굴긴. (쓰담다다다담)
그래도 나보다 겁은 없는 것 같은데~ 나는 돌려볼 겁까지는 없으니까.. <:3 깜놀은 정말 무서워.. 잔잔한 영상도 많은 것 같긴 해.(백그라운드로 듣고있는 백룸..) 으응..? 괜찮아! 로로주가 추천한다면, 나는 무섭더라도 그 부분을 열심히 건너뛰고 즐겁게 볼 수 있어. (쫍쪼)
정확히 알 만큼만 알고 있기에, 정확히 필요한 만큼만 눈치를 보고, 필요한 만큼만 발을 내딛는다. 천진난만하고 제멋대로인데도 잘 벼려져 있는 모습. 취미가 고약하고 성질머리가 변덕스러운 상사의 아래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직원들 중 하나다운 모습이다. 마오를 보며 느낀 감상이었다. 페로사는 이제 말도 뚜렷히 하지 못하는 '예술작품'에게서 고개를 홱 돌렸다. 계속 기억에 기분나쁘게 남을 만한 꼬락서니였지만, 계속 기억에 남겨둘 이유는 없다. 그래서 페로사는 닫힌 문 뒤로 들리는 총성도 묵살했다.
그리고 페로사는 취미가 고약하고 성질머리가 변덕스러운 상사가 한 명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다. 바로크-로코코 시대의 고풍스런 디테일이 조화롭게 남아있는 아늑한 조명의 클래식한 방 한가운데에, 너무도 낯익은 이가 너무도 낯선 태도를 하고 거기에 앉아 있다. 당신이, 네가.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방을 한번 휘 둘러보았다. -분명 그녀는 이 방을 처음 보는 것이었을 텐데, 이 방의 분위기며 꾸밈새 취향 등등이 참 낯익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페로사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새하얀 재킷을 한 손으로 휙 걷어서 옷걸이에 걸었다.
낯익은 이의 낯선 모습. 그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너는 윈터도, 미카엘도, 헤로인도 아닌 에만이다. 페로사는 네가 가리키는 소파에 순순히 앉는 것으로 주인의 환대에 응했다. 그리고 토끼 가면을 벗으려는 듯 가면에 손을 올렸으나- 이내 생각을 바꿨는지, 그냥 계속 가면을 쓰고 있기로 하고는 대신에 얼굴을 반쯤 가리는 가면 아래로 드러난 하관에 지극히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띄어보였다. 너는 에만으로도 분명히 그녀를 만난 적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너에게 함부로 우리 구면이지 같은 소리를 지껄일 생각은 없는 듯했다. 한방 먹이는 데에 성공한 것을 축하해주기에는 아직 자리의 공기가 무거우니까.
"조그만 프로젝트를 하나 하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도움을 구할 곳이 한 군데밖에 없어서." 서로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페로사는 꺼냈다.
사람의 일은 알다가도 모르는 법이다. 눈치라고는 쥐뿔도 없는 마오와의 첫 만남이 당신이 근무하는 장소에서 저 사람을 죽일까 말까 고민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으며 지하에서 내로라하는 조직원들이 슬슬 피하는 모습처럼, 당신의 기억에서 처음 만난 미카엘이 저격수의 위협을 받았던 상황이었고 지금은 어느 순간 스며들어 서로가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이 되었듯이. 어쩌면 저격수가 붙었던 이유가 지금 이 순간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지금 이야기할 것은 아니다. 미카엘도 지금은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아직 계획은 진행 중이고, 당신이라 해도 입을 열 수는 없었다.
그것이 에만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에만은 느릿느릿 감았던 눈을 뜬다. 친애를 표하는 고양이처럼 느긋한 모습으로 당신을 훑어본다.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보는 눈이 다시금 느릿하게 감기더니, 한 손을 들어 잠시 기다려달라는 듯 제스처를 취했다. 이내 에만은 손을 뻗어 근처의 목갑을 앞으로 끌어왔다. 느긋한 손길로 날렵한 가장자리 선을 따라 손가락을 힘없이 긋더니, 걸쇠를 딱 소리가 나게 풀고 열어젖혔다. 그리고 꺼낸 것은 은테의 둥근 안경이었다. 곱게 접힌 다리를 펴고 귓바퀴 위로 꽂는 일련의 과정이 지나고 나서야 에만은 입을 다시 열 수 있었다.
"괜찮네.. 나는 이런 의뢰인을 정말 좋아해.. 요즘엔.. 다들 민감한 시기인지.. 아니면 늙어서 들리지 않는 건지 소리를 높여대니 귀가 너무 아프거든.."
느릿한 어조는 상냥하지만 내용은 상냥하지 않았다. 당신은 지금 작고 말간 천사가 아닌 지하를 움직이는 부엉이를 마주하고 있다. 당신이 미카엘을 에만으로 대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미카엘이 그에 보답하는 것이었다. 에만은 당연하다는 듯 당신의 대답을 경청했다.
"오, 커다란 것도 아니고 조그마한 프로젝트라.. 이런 고객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겠지.."
에만은 기운 없이 한 번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감정은 실려있지 않았다. "제대로 나서볼까." 이내 에만은 자리에서 느긋하게 일어나며 조그마한 몸을 움직였다. 느릿느릿 발걸음이 향한 곳은 당신의 맞은편 소파였다. 에만은 허리를 낮게 굽혔다. 손끝을 모은 뒤 입가를 가리듯 하자 안경 사이로 새하얀 눈동자가 동글동글 뜨였다. 평소처럼 마주치는 느낌이 들었는데도 웃지 않고 있었다.
"Ms. 몬테까를로.. 저는 당신에 대해서, 이 도시의 사람들에 대해서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으니.. 무엇에 조바심을 내는지도 알고, 어떤 방법이 이로울지도 알아요.."
에만의 시선이 소파를 중간에 둔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체스판을 향한다. 진 체스 말은 하얀색이다. 다시금 당신을 향한 시선이 느릿하게 궤적을 그었다.
"그렇지만 제가 당신의 계획에 도움이 된다면.. 이쪽에서 손해를 보게 될 텐데.. 당신은 대가로 무엇을 준비했을까요? 참고로 저는.. 부나 명예 따위는 바라지도 않아요. 그런 건 나한테 적을 더 만드는 꼴이잖아."
오늘 날씨도 더워서 녹초는 확정이야.😔 부디 중간에 더워서 깨는 일 없이 푹 잠들었길 바라. 개운하게 일어났으면 좋겠다! 요즘에 더우니까 일어나도 영 컨디션이 찝찝하잖아..😵💫 어제도 같이 있어줘서 정말 고마웠어! 오늘 하루도 힘내보자구!!! >;3 답레는 천천히 주고, 언제나 고마워.
솔직히 말해 섭섭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자신은 자신이 가장 숨기고 싶었던, 자신의 인생 전체를 망가뜨리고 있는 치부까지 너에게 내어주었는데 너는 네 정체를 이렇게 교묘하게 감추고 있었으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네가 미네르바의 부엉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런저런 정황증거도 희박했고, 미네르바의 부엉이에 대해 들은 소문들 중에 지금 여기 앉아있는 너와 일치하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지만- 왜인지, 자신이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있으니 너무도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너에게서 나는 냄새와 이 방에서 나는 냄새가 같았기에. 그날 내가 구했던 것은 단순히 길 잃은 꼬맹이가 아니라, 하얀 토끼였구나. 하고 덩치 큰 근육질 앨리스는 생각했다. 그녀가 느끼고 있는 섭섭함은 배신감이라고 불러주어도 될 정도로 그 덩치가 컸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앙심이나 앙금이라고 부르기에는 그 성질이 온순했다. 그야 길들여져 있으니까. 그러니 뒷감당이 네게 위험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가 너를 해치기야 하겠는가.
아니 오히려 지금 그녀가 섭섭해하고 있는 것이 너에게는 더욱 기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네가 애초에 미네르바의 부엉이라는 것을 알고 뭔가 떡고물이라도 떨어질까 너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너에게 친밀하게 다가온 시정잡배가 아니라, 그저 미네르바의 부엉이라는 이름 뒤에 있는 너를 우연히 마주쳤고, 우연히 순전하게도 그저 너를 너 자신으로 좋아하게 되었고 좋아해 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네가 손에 넣은 그것이 어림없는 짝퉁 같은 게 아니라, 이 도시에서 정말로 구하기 힘든 어느 순수하고 순전한 무언가라는 표시인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섭섭한 마음을 갖고도, 당신이 지금 맡고 있는 역할에 맞춰서 행동해주는 것이겠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말에도 페로사는 방금 전 옷걸이에 옷을 걸어둘 때, 옷의 안주머니에서 빼어낸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 봉투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너는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물이 무엇인지도 너는 이미 본 적이 있다. "안타깝게도, 조그마한 프로젝트다 보니 준비한 대가가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야. 꽤 중요한 거긴 하지만."
다만 봉투 안에 들어있는 것은 사본이고, 네가 이전에 읽었던 원본과는 달리 없어진 내용이 조금 있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너인 줄 알았으면 수고롭게 편집한 복사본 같은 걸 만들 필요도 없을 뻔했다. -그러나 기왕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대하기로 한 것이니. 페로사는 평이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이것은 며칠 뒤에 들어올 에누마 사와 관계된 정부 측 요원들의 명단이며, '정확히 어떤 일로 이 도시에 침투하는지는 모르나' 나를 포함한 일련의 목표물들을 갖고 있으며, 이것은 엄연히 정부의 직접적 간섭을 배제해 주기로 한 에누마 사가 우리를 속였다는 명확한 증거로 에누마 사에 유리하게 기울어져 있는 바빌론 시티의 균형을 조금씩 뒤흔들 중요한 단초라고 역설했다.
"누가 그랬던가. 모든 여행은 한 발짝부터 시작이라고. 당신에게 지불할 대가는, 당신이 첫 발짝을 내딛을 기회야." 페로사는 가면 아래로 느슨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소소한 덤이 두 가지 있긴 해. 하나는 당신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날이 당신에게서 조금 더 멀어지는 것이고, 남은 하나는- 좋은 술 한 병 정도?"
쓴웃음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았다. 당신은 그때 가장 숨기고 싶어 하던 치부를 드러냈고 보여주며 울음까지 터뜨렸는데 이 작은 여우는 맹랑하게 자신을 숨긴 꼴이지 않은가. 당신이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미카엘은 지금 바로 사과하지 않기로 했다. 첫째로 당신이 앉아있는 이 장소가 현실이고, 둘째로는 미카엘이 아닌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만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는 본인이 겪고 있는 양가적인 감정 때문이다. 미안하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살면서 이렇게 극단적인 감정에 휩싸이는 것은 두 번째다. 에만은 웃지 않기 위해 손끝을 모아 첨탑 모양으로 세우고, 벌린 엄지에 턱을 대며 입가를 가리기로 했다. 미안해야만 하는데, 당신이 꼬리를 치며 다가오는 쭉정이가 아니었기에 마음을 내어준 것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자꾸만 미소를 그리게 한다. 에만은 겨우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아냈다. 당신은 자신보다 더 순수하고, 순진하며, 말간 사람이다.
"……재밌네."
혼잣말을 한마디 던졌다. 그리고 침묵이 이어졌다. 에만의 눈이 잠시 깊어진다. 사적인 감정을 누르는 짧은 시간 동안 에만은 냉정하게 공적인 일로 만나는 페로사 몬테까를로에 대한 판단 또한 마쳤다. 만일 사적인 일을 끌어오며 따졌거나, 하물며 다른 의뢰인들이 쉽게 행하는 무례라도 저질렀더라면 에만도 보통 손님을 대하듯 했을 것이고, 심했더라면 축객령을 내리며 자신의 계획을 일방적으로 통보했을 것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그만큼 오만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당신에게 그런 행위를 보여주는 일이 없을뿐더러, 콧대를 누르고 예의 바르게 당신을 대하는 이유는 당신이 사적인 면을 제외하고도 공적인 면에서까지 제법 괜찮은 사람임을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강경하게 나서거나 빈정거릴 이유가 없다. 아무리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사람과 벽을 치는 성격을 가졌다 해도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에게 날카롭게 굴 사람은 아니었다.
에만은 봉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느긋하게 봉투 안의 내용물을 꺼내더니 소파에 완전히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한 손으로는 서류를 읽어보며 다른 손으로는 안경을 한 번 고쳐 썼다. 일련의 모습은 느렸고, 제법 도발적인 태도였지만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제법 재밌는 프로젝트네. 으음, 으응. 그래.. 이런 재밌는 걸 혼자서만 준비하니 진전이 없지요.. 그간 재미도 못 봤겠어요."
없어진 내용이 좀 보인다. 그렇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은 미카엘이 아닌 에만이고, 에만이라고 해서 모를 정보도 아니었다. 에만은 느긋하게 자료를 훑어보고 책상 위에 다시 올려두었다. 평이한 어조로 정보를 전해 듣는다. 눈을 느릿하게 감는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심호흡을 했다. 생각했던 계획을 조금 틀어야겠다.
"부족한데."
에만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지불할 대가가 너무나도 적다. 첫 발짝을 내딛는다 해도. 에만은 소소한 덤에 한쪽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렸다. 좋은 술과 오지 않기를 바라는 날이 멀어지는 것, 구미가 당기지만 부족했다. 에만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하나만 추가해요. Ms. 몬테까를로. 제가 바라는 건……. 으음, 당신이랑 조금 더 일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에만은 잠시 고민하다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변명하듯, 혹은 사심을 드러내듯.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를 어떻게 잃겠어요. 이렇게 재밌는 사람을 한 번만 보고 쫑낸다니. 나는 좀 아쉬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