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은 권유였지만, 저렇게 해서 같이 놀러나가는게 거의 일상이 된 만큼 솔직히 적잖이 놀랐다. 물론 가자고 무조건 따라와야만 한다는 것도 웃기는 노릇이고, 그야 내키지 않을 때도 있는법이겠다마는. 어쩐지 묘하게 슬쩍 텀을 두는 듯한 거리감에 내심으론 슬쩍 머쓱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특히 평소처럼 아이같은 반응이 아니라는 부분이 제일 신경쓰였다. 내가 뭔가 잘못한게 있던가?
"아니, 아저씨는 네 생각보단 인간관계가 좁지 않은데 말이다....."
요 최근 있었던 일들을 속으로 곰곰히 생각하면서도, 일단은 팔짱을 끼고 어이가 없다는듯 대답해주었다. 민망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럭저럭 친해진 녀석들은 꽤 있다. 유하 만큼 친근하게 구는건 아니지만, 나도 나름대로 상대에 맞춘 태도를 취할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다만, 그게 눈 앞의 여자애가 제일 친한 관계라는걸 부정할 이유가 되지 않을 뿐이다.
죽음은, 갑자기 찾아오는 사냥꾼이 아니니 처음부터 누구나가 알고 있다... 삶이란 죽음을 향한 여행... 하면 산다는 것은 바라면서 나아가는 것, 그를 이루어서만이 죽어서도 남으리라. 배웅하는 자에게 이야기가 남으리라. 허나 지금, 객인의 목숨이 다하였지만 이야기는 이 손에 남지 않았다...
나는 팔짱을 낀체 잠깐 시선을 옆으로 곁눈질 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건데, 지금 그녀의 태도가 뭔가 큰 이상이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그러냐. 그럼 내일 보자.' 정도로 마무리 하고 헤어지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반드시 같이 먹어야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거기까지 집착할 생각도 없다.
"흐음........"
유하를 한번 흘끔 보곤, 천장을 올려다보며 계속 생각한다. 그렇지만 어쩐지, 그런 머릿속 계산으론 깔끔하게 납득되지가 않는다. 이치에는 맞을지언정, 심정적으론 어딘가 걸리는 느낌이라고 할까. 특히나 지금 저 웃음은 아무리 봐도 평소에 내가 보던 그 웃음이 아니다. 저런 묘하게 짓궃거나 속내가 일치하지 않는듯한 검은 웃음을 짓는 녀석은 아니었다.
이성적으로 물러날까, 감성적으로 찔러볼까. 마치 장기판의 어려운 국면을 마주한 것처럼 잠깐 침음성을 흘리던 나는 언젠가 가끔 나이답게 행동해보라는 누군가의 조언에 따라보기로 했다.
서먹하게 군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좋은 의미의 발언이 아니다. 본인에게 그럴 의도가 없었다면, 나와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해명했을 것이다. 애초부터 꺅꺅 활기차고 밝은 애가 저런 애매한 반응을 하는 것부터 수상할 뿐더러..... 본인이 알고나 있는진 모르지만, 잘못 했냐는 질문엔 부정했으면서 서먹하다는 말엔 대답하지 않았다.
구체적인 이유까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현재 우리는 서먹한 상태인가보다.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는데 갑자기 그렇게 되다니, 사춘기 소녀의 감성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다만 어쨌거나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쪽도 나름 섭섭함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선 그녀가 나가려던 교실 문 한쪽을 손으로 짚어 쉽게 열지 못하도록 자세를 잡은 후 문 앞에 있는 그녀에게 살짝 얼굴을 기울이며 묻는다.
유하는 지금 이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상대방이 자신을 피하려 든다는 사실을, 그것을 시도하자마자 알아차렸다는 부분이 그랬다. 나가려는 문을 잡고 못 나가게 몸으로 막은 것도 그랬다. 어디서 보고 배웠는지 얼굴도 살짝 기울이는 것 또한 그랬다. 상황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자 유하는 메고있던 가방의 어깨끈을 만지작 거리다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서로간의 짧은 침묵속에서도 나는 계속 생각했다. 유하가 오늘 어땠더라? 예민한 날일 수도 있는 법이고, 그럴 때 귀찮게 굴면 그야 싫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찰나로 기억을 더듬어봐도, 다른 애들이랑은 웃고 잘만 놀았던 것 같다. 애초에, 그렇게 티 날 정도로 기분이 나쁜 상태였다면 이렇게 되기전에 내가 눈치챘을 것이다. 더더욱, 나는 그녀가 진심으로 화내는 것을 한두번 본적이 있다. 그 때와는 역시 여러모로 다르다.
그럼 대체....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뒤이어진 말에 나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눈이 크게 떠지고, 몇번 멍청하게 껌벅 거린다. 마치 환청이라도 들은 것 처럼.
"아니, 별로 상관 없다니...우리가 그런 말 할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조금 단호함이 꺾인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한다. 스스로도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있을지 잘 모르겠다.
상대방을 똑바로 노려본 그대로 날카로운 말을 뱉는다. 사실 이런 말을 들어야 할 사람도 아니고, 상황도 아니지. 그저 유하의 묘한 생각에 희생되고 있을 뿐이고, 스스로도 그걸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속이 아파오는 것 같았지만 이미 관성을 가진 감정은 도저히 멈추기가 힘들다.
나는 이어지는 날카로운 말들에, 어느샌가 작게 입을 벌렸다. 그러나 벌려진 입에서는 곧장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스스로의 언변이 둔하다고 생각해본적은 없다만, 평소의 자신이 오만이었던 것 처럼 나는 그냥 멍청하게 서있었을 뿐이다.
그러게, 우리 관계란게 대체 뭘까. 이런 상황에서도 '그냥 친한 친구 사이' 로는 분류된다는 것은 다행일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그 한마디로 정리되는 것에 나는 격렬하게 납득할 수 없었다. 참 우스운 노릇이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냥 친한 친구 사이도 분명히 낮지 않은 분류일텐데도.
어쨌거나 드물게도, 나는 철저하게 패배했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보려고 해도, 이미 새하얗게 물든 사고속에선 아무런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저 말이 정론이라서가 아닌, 그저 내 언변의 부족함일 뿐이라고 마음속에서 필사적으로 우기는 것 뿐이었다.
"잠깐."
문에서 힘 없이 살짝 손을 떼어 물러나려다가, 다시금 애써 붙잡는다.
"그럼, 내일, 혹은 모레, 어쨌거나 조만간 금방 되돌아온다는 얘기지? 오늘이 그저, 그런 날일 뿐?"
스스로의 질문이지만, 묻고 나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조소를 터트린다. 그럴 리가 있겠냐, 멍청아. 모종의 사유로 의도적으로 자신을 피하는게 확실한 상대가 하루이틀만에 잘도 바뀌겠다. 떼쓰는 어린애냐 너는.
상대는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고, 유하는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제는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여, 상대방에게 더 이상 휘둘리지 않고, 원하는 모습으로 남은 고등학교 생활을 보낼 수 있을 예정이었다. 잠깐, 하고 자신을 막아세우는 말에 유하는 인상을 피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는건지.
" 음, 그건 모르겠는데... 그래도 윤윤 친구도 나 말고 있으니까~ 별로 관계 하나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
생글 생글 웃으며 나오는 답변에, 결국 나는 울컥하고 말았다. 어른의 체면이니 뭐니를 생각하면 그러지 않았겠지. 아이가 거리를 두고 싶어한다면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 진정한 어른일지도 모른다. 나도 안다. 그럴까도 생각했다. 그게 좋을지도 모른다. 저 녀석이 심성이 나쁜애가 아니란건 잘 아니까. 저렇게 구는 것엔, 무언가 이유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렇게 멋진체 체념할 수 없었다. 창문으로 가도 된다는 말에 이제는 문이 아니라 그녀의 어깨를 붙잡곤, 감정적으로 소리치는 것이다. 스스로가 봐도 꼴사나운 모습이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지금 받는 바보취급을 납득할 수 없었다. 겉멋든 애라던가, 정신병자라던가, 바보취급은 많이 당했지만 웃어넘길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래서는 안된다.
내 직감이, 여기서 넘어가면 안된다고 소리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예리한 직감이 아닌, 단순히 철없는 감성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거기에 따르기로 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졌다면 그렇다고 얘기를 해! 잘못한게 있다면 화라도 내던가! 적어도 그런 말에 '그래'하고 납득할 수 있겠냐!?"
그녀와 얼굴이 가까이한체로 나는 호소하듯 소리친다. 그녀와는 꽤 자주 만났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겠지. 어쩌면 전생의 기억을 되찾고 처음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정도로 분했던 것이다.
감정이 실린 목소리에 유하는 가볍게 소리를 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귀가 따가웠다. 대체 왜 저렇게 까지 하는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를 악 물고 이야기를 하려다 후, 하고 길게 숨을 빼는 것으로 진정시킨다. 지금 여기에서 부숴버릴 정도로, 가벼운 마음으로 만든 것은 아니니까. 필요하다면 그럴지 몰라도 지금은 충분히, 다른 방식으로도 넘어갈 수 있을 터였다.
" 윤윤이 딱히 잘못한건 없고~ 그냥 이 이상 붙어있으면 정말로 이야기 하기 싫은 거랑 보여주기 싫은 것도 전부 들통날까봐서 그래. 그러니까 아저씨가 이해해줘, 알았지? "
찡그린 열굴을 피고, 다시 가벼운 미소를 띈다. 조곤 조곤 경쾌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유를 설명한다. 이의가 생기지 않도록, 설마 이걸로도 부족해서 찾아오거나 하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