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 지나고 4월이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이제 막 고3 이 된 아이들이 새로운 반에 대한 적응을 거의 다 마쳐갈 시기이다. 초중고를 거치면서 몇번이나 바뀌는 반이지만 언제나 새로운 1년의 시작은 어색하기만한 아이들은 여느때처럼 담임선생님이 오시는걸 기다리며 조회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각을 간신히 면한 아이들이 교실 문을 통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담임선생님이 앞문을 통해 들어오신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손에는 1개의 작은 상자가 들려있다는 것이다.
" 자자, 오늘은 자리를 바꿀꺼에요. "
학기가 시작하고선 번호 순으로 앉아있던 자리는 이제 선생님의 손에 의해 뒤바뀔 운명이었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다른 선생님들과는 다르게 지금 선생님의 손에 들려있는 상자는 많이 사용 됐는지 꽤나 낡아보였다. 그리고 중간쯤에 앉아서 창 밖을 바라보던 아현은 선생님의 말에 옆자리의 아이를 흘끗 바라보았다. 한달 정도 옆자리에 앉아있었지만 많이 친해지지 못한 반 친구였다.
" 남녀가 서로 한번씩 뽑아서, 같은 번호를 뽑는 사람끼리 옆자리에 앉는거야. "
선생님의 친절한 설명이 뒤따르고, 뽑는건 번호순으로 뽑기로 했다. 번호가 중간쯤에 위치한 아현은 자기 순서를 기다렸다가 상자 안에 손을 넣어서 숫자가 적혀있는 쪽지를 뽑았다.
" 저, 5번이요. "
뽑은 숫자를 말하고 다시 집어넣은 아현은 자리에 돌아가서 앉았다. 누가 자기 옆자리에 앉던 별로 신경 쓸 일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담임 선생님이 들어와 자리를 바꾼다고 하면 유난히 아쉬워하고 말아. 그래도 개학하고서 한달 남짓 옆자리에 앉아있었다고 짝과 정이 들어버렸나 봐. 자리는 바꿔도 짝은 안 바꾸면 안 되는지 물어보았다가, 당연하게도 거절당해서 히잉 거리는 소리 한 번 내고. 짝과 함께 또 같이 앉으면 좋겠다고 소곤소곤 선생님 몰래 떠드는데 무조건 남학생과 여학생이 한 쌍으로 짝이 된대. 번호순으로 앉아 짝이 된 친구는 여자아이라서 짝이 바뀔 수 밖에 없게 되었어. 단 씨는 가나다순으로 하면 앞에 세워져서, 자리뽑기하는 순서도 빨랐지.
‘5번이네.’
교실의 책상은 5열 5행, 맨 뒷자리라 자리는 마음에 들었어. 칠판에 그려진 자리배치도에 단사랑, 이름 세글자가 적혀. 이제 새로운 짝이 될 아이만 잘 걸리면 좋겠어. 기대하고 있거나, 같이 앉았으면 좋겠는 남자아이가 있지는 않지만 피했으면 하는 아이는 있거든. 옆집 살아서 언제나 마주치고 말고, 어릴 때는 같이 잘 놀았던 것만 같은데 갑자기 거리를 두기 시작한 그 아이. 언젠가부터 멀어지고 멀어져서 인사도 안 하게 된 사이. 고등학교 와서는 선도부하더니 맨날 부딪치게 됐고, 그래도 같은 반이 아니니까 흐리멍덩한 관계에 눈길주지 않고 지냈는데 같은 반이 됐지. 나 혼자만 친구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서, 둘 다 짝이 되면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렇게 거리를 뒀다는 건 미워하는 거일테니까. 그래서 그 아이만 아니면 누구든지 좋다고 생각하면서 주섬주섬 자리를 치워. 책상 서랍 안에 들어있는 것도 없어서 가방만 다시 챙겼을 뿐이지만.
“거짓말!”
아현이 자리 뽑는 순서가 되었을 때 5번만 아니어라 그렇게 빌었는데, 5번이 나와버려서 사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버려. 바로 자리에 앉으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떨어져서 자리에 앉았지만, 누가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고등학교 3학년, 마지막에 마지막에서야 같은 반에 짝이 될 수 있어. 졸업하면 옆집이어도 대학교가 다르고 과가 다르고 해서, 시간표도 다를테니까 마주칠 일도 없어지든 적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칠판에 나란히 적힌 이름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가 봐. 반 아이들은 아현이 선도부니까 짝 된 걸 싫어하는 줄 알겠지. 다른 아이들의 자리도 순서대로 정해지고, 이제 자리를 옮길 시간이야.
“….”
가방 챙겨서 새로운 자리로 오기는 했는데, 새로운 짝과의 인사는 뭘로 하면 좋을지 고민했던게 다 사라졌어. 자리에 앉아야 하는데 가만 멀뚱 서 있기만 해. 이 나란히 놓인 책상과 의자가 이제 너와 내 자리라니, 너도 나도 운이 지리리 없다고 생각하고 말아.
쪽지를 뽑아서 확인한 번호는 5번. 이미 5번의 주인이 있나 살펴보자 제일 걸리기 싫었던 이름이 써있었다. 단사랑, 아현의 어릴적 친구였지만 지금은 아현이 거리를 둬서 친구라곤 부를 수 없었다. 바로 옆집에 살고 부모님끼리도 친하지만 정작 두 사람은 친구가 아니었으니 상당히 아이러니했다. 사랑의 이름 옆에 쓰여지는 자신의 이름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쉰 아현은 번호표를 뽑는 시간이 지나고 자신의 자리인 창가 맨 뒷자리로 향했다.
" 뭘 그렇게 서있어. 앉아. "
의자를 당기고 앉았는데, 정작 사랑은 앉을 생각이 없는지 멀뚱히 서있기만 했다. 창가 자리에 앉고 싶어서 그런가 싶었던 아현은 잠시 사랑과 눈을 마주치고선 가방을 들어서 바로 옆자리로 옮겼다. 그리고선 다시 말없이 사랑을 바라본다. 사실 그에게도 이런 자리배치는 껄끄럽기 그지 없다.
" 얼른 자리에 앉아라. "
선생님의 말이 들려오고 아현은 사랑을 바라보던 시선을 전방으로 향한다. 그리고 여긴 맨 뒷자리라 사랑이는 앞이 안보일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흘끔 사랑이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 시선은 원래대로 칠판을 바라보고, 교과서를 꺼내서 수업 준비를 한다.
차마 자리에 앉지 못 하고 서 있으니, 아무렇지도 않단 듯이 자리에 앉는게 눈에 들어와. 싫어하는 아이랑 짝이 되는 건 대수로울 일이 아니라는 걸까? 가방에는 들어있는 것도 얼마 없는데 왜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 걸까. 언제나 누구에게나 잘 웃어주었는데 지금은 그러질 못 하고서 망설여. 어차피 이 자리에 앉아야만 하는데 왜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너 나 싫어하잖아.”
왜인지 아직도 모르겠어. 그러면서 우리 가족이랑은 잘 지내고, 잘못을 했으면 잘못을 했다고 알려주면 좋을텐데. 창가 자리에 앉았다가 그 옆자리로 옮기는 것까지도 서서 보고 있다가, 결국은 선생님의 한 마디가 떨어지고 나서 자리에 앉았어. 선생님에게 방글 웃으면서 아직 시작종 안 쳤다고 장난스레 말했고, 평소와 다를 것 없어보이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야. 가방을 내려놓고 책상 위에 엎드렸어. 1교시가 뭐였는지도 생각하기 싫고, 조례 내용이 무엇인지 하나도 귀에 안 들어와. 잠이나 자버리고, 점심 시간에 일어나서 밥이나 먹으러 가버릴까 봐. 오후에는 기분이 조금 나아질 지도 모르지. 오늘은 등교길에 선도에도 안 걸리고 잘 피해 등교했는데, 그때 오늘의 운을 다 써버렸던게 분명해. 염색, 피어싱, 치마 길이, 조끼 미착용, 옅게 발린 입술 색, 이게 다 걸렸어야 했는데 무사히 등교했다니 그럴만도 하지만.
“깨우지마. 아파.”
거짓말이지만, 아프다는 말이 진실이었던 적은 더 적었어. 핑계일 뿐이니까 깨우지 말라는 말만 잘 들어주면 좋겠다.
그리고 사랑이가 너무 틱틱거리는 거 같으면 말해줘 🥹 수업시간에 사랑이 깨울지 말지는 마음대로 해도 돼 어떤 선생님이 깨우라고 했을 수도 있고 이동수업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깨우지 말라고 했으니까 정말 점심시간 됐을 때도 안 깨워도 상관없어 사랑이 친구들이 데리고 갈테니까 밥은 먹을거야
너 나 싫어하잖아, 라는 말이 소년에 귓가에 꽂힌다. 확실히 아현은 옛날과 다르게 지난 몇년간 사랑에게 그렇게 살가운 태도를 보인적이 없다. 중학교에 들어갈때부터 슬슬 멀어지기 시작한 사이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선 걷잡을 수 없이 멀어졌고, 한번은 부모님이 걱정된다고 물어보시기까지 했으니 그 사이를 짐작할만 하다. 하지만 적어도 아현은 사랑을 싫어한적은 없었기에 당황했지만 겉모습은 담담하기 그지 없었다.
" 나 너 안싫어해. "
마찬가지로 담담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한다. 곧 선생님의 잔소리가 들려오고 아현의 옆자리에 사랑이 앉는다. 자리에 앉자마자 엎드리는 사랑은 아프다고 깨우지 말라는 말만 남기고 조용해진다. 잠깐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년은 그냥 자신의 교과서만 펴놓은채 수업이 시작하기를 기다린다. 1교시, 2교시가 지나도 사랑은 깨어날 생각이 없고 아현도 깨울 생각은 없어보였다. 하지만 3교시가 시작되었고 선생님은 들어오자마자 사랑을 향해 일어나라고 불호령을 날렸다.
" 얘 아프대요. "
그러자 아현은 옆에서 선생님께 아프다고 말씀드렸고 평소 선도부장으로 선생님들에게도 꽤나 인망이 있는 그였기에 선생님은 잠시 아무 말 없으시다가 알았다는 말과 함께 수업을 시작하신다. 그리고 다시 3교시, 4교시가 지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 점심시간이야, 일어나. "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아현은 사랑의 어깨를 흔들어 깨우며 말했다. 안깨워도 사랑이의 친구들이 우르르 와서 깨우고 데려가겠지만 그냥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배려라고 생각한다.
너 나 싫어하잖아. 일곱 자 밖에 안 되는 말에는 5년간의 감정이 꾹꾹 눌러담겨 있었어. 그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단박에 나 너 안 싫어해, 여섯 자 밖에 안 되는 말로 부정당해. 싫어한다고 했으면 그렇게 아무 설명도 없이 멀어질 만큼 미웠구나, 그래서 이렇게 된 거구나.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을텐데,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다행이라고 웃고 싶어도 왜 그랬는지 모르게 되잖아.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니까 생각도 하지 않을래. 그냥, 그냥 잘래. 자버릴래.
“….”
그렇게 4교시까지 자버렸어. 많이도 잤는데 상쾌하단 기분은 안 들고, 오히려 싱숭생숭했어. 오늘 자리 바꾸고서 너와 짝이 됐다는게 충격적이었는지, 꿈에 우리가 나왔거든. 어릴 때 사이좋게 놀던 모습 말이야. 꿈에서 깨어나고 났더니 지금도 옆에 있는 건 너였고, 나는 기분이 너무 이상해서 아무 말 하지 않았어. 깨어나고 나서도 꿈인지 고민했을 지도 모르지.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키면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책상이야. 침대도, 내 방 책상도 아닌 학교 책상. 오늘 있었던 일은 꿈이 아니라고 알려주는 거지. 어깨를 흔들어 깨워준 네 손이 어색해. 오늘은 이상한 날이니까, 이상한 말 하나는 나도 해도 돼.
“나도 너 안 싫어해.”
자리에서 드르륵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나. 의자에서 일어나서 복도 쪽을 바라보면 3학년이 되면서 반이 나뉘었지만 같이 밥을 먹는 친구들이 이미 복도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어. 조금만 늦었으면 교실에 들어왔을지도 모르지. 사랑은 복도 쪽에 있는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눈웃음 지어주었어. 그리고 바로 교실을 나가려고 했지만 그러지 않고, 아현을 바라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