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에서 흐르는 피가 얼마나 떨어졌더라. 꽤 어질거리는 걸로 보아서 건강의 강화도 이젠 소용이 없을 것 같다. 망념이 목 끝까지 차올라 조금만 더 오른다면 의념각성자로써의 죽음이 느껴질 것 같아서 의념 없는 맨 몸으로 죽음에 가까운 감각을 느껴보고 있다. 언제나 망념이 끝가지 오르기 직전까지 온 상황에서 당신은 우리에게 힘든 티조차 내지 않았다. 단지 아이들을 끌어안고 내게 "다녀왔어."란 말을 하면 나는 말없이 고갤 끄덕이고, 당신을 끌어안았다. 헌터니까, 가족이 있으니까 안전하고 적당히 돈벌이가 되는 일만 해오던 나와는 달리 당신은 이런 일을 몇번이고 당연하다는 듯 견뎌오고 있었구나. 구역질이 난다. 생각과 본능의 점등이 빠르게 이뤄진다. 억지로 혀를 깨물어 느껴지는 고통에 눈을 뜬다. 아직은 죽을 수 없다. 적어도 진실의 일부분이라도, 아니면 그럴싸한 거짓말이라도 들어보고 싶은데. 쉽지가 않다.
〃 보고싶다. 〃. 그 말을 붙잡지 못한 정신 대신에 너에게 보낸다. 나는 살아있다. 죽은 너를 잊지 못하고, 다른 살아있는 모든 것을 버려가면서 너의 진실에 닿고 싶어한다. 분명 망가지고 있었고, 분명 안좋은 선택이었다. 그런데, 당신을 잊을 수가 없다. 이제 탈 것도 없는 재이기에. 잿불 속에 남은 미련에 타오른다. 이 불이 꺼지는 날이면, 바람에 흩날려 잊혀질 수 있을테니까.
"급우일텐데. 너는 그렇다치고, 지한은 기숙사 청소를 도와준 은혜가 있는 친구다. 신경쓰는게 당연하겠지? 네 의사가 굴러들어온 돌은 지한에게 관심도 주지 말고 관계도 되지 말라는 것이면 재고해보마."
하하. 화내는군. 화내. 나는 비교적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이성적 운운 하는거 치곤 아주 감정에 솔직한 녀석이군.
그럼 이렇게 말하면 어쩔거냐? 네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 지한을 편입생과 어울리지 못하게 할거냐? 아니면 일리가 있는 말인데도 화내면서 억지로 뭉갤거냐? 아니면 또 다시 대꾸는 하고 싶은데 부글부글 끓고 참을거냐?
일단 넌 첫번째는 못 고른다. 애초에 여기서 첫번째를 고를 놈이면 이후에 상종도 안할거다.
"물론, 나와 지한의 관계를 네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라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만. 내겐 입증된 것이 없으니까, 무시해도 좋겠지."
다시한번 어깨를 으쓱이며 짐짓 어쩔 수 없다는 말투로 상대의 말을 그대로 돌려준다.
물론 이렇게 말해도 이 녀석과 지한의 관계를 억측해서 뭔가 보복성으로 이상한 소문을 퍼트리거나, 지한이가 곤란해질만한 행동을 할 생각 같은건 조금도 없다. 기숙사 안내도 해준 은혜가 있다는건 거짓말이 아니니까. 따라서 나는 이 과정속에서 거짓말은 단 하나도 하지 않았다. 상대에 대한 비난도 하나도 하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틀린 말도 하나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러면서도 내 대부분의 말은 상대의 것을 돌려준 것이다.
하하. 열받아서 폭발하면 사과 정도는 해주마. 제 그릇의 좁음을 드러내는걸 구경하는 값어치라면 싼 값이다.
미안하다는 것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미안하다..라던가. 그런 걸 알고 있으면 괜찮은 일입니다. 그러다가 명진의 이야기를 듣자하니..
"키가 작으면서 당차고 착해보이고.. 귀여운 면이라~" 음 그거 특별반 급우 중에서는 라임 씨 정도일까요? 라는 농담을 해봅니다. 여학생 중에서 귀엽다. 정도는 유하와 라임이라고 판단하는 편인데. 그 중에서 명진이 유하를 잘 모를 것을 생각해서 라임을 말해보는 것이었습니다. 분명 저건 당황하라고 일부러 후후 웃으면서 긁는 것에 가까워보입니다.
"딱 들어맞는다.. 는 느낌?" 찬찬히 훑어보면 모든 이상형의 조건에 들어맞는다고 말합니다.
"농담이긴 하지만 매력적인 건 사실이지요?" 그러니까 특별반 급우들이 그런 면이 있다라는 느낌입니다. 진짜로 엮어주거나 그런 건 아니니 안심?
"다른 분들은 기류 같은 거 도는 게 있으려나요?" 같은 말을 하며 어디에서 우리 결혼했어요 같은 게이트에 특별반의 누구랑 누구가 들어갔었다는 말이 나오는 것 같기도 하네요. 라고 합니다. 알렌과 린이 들어갔던 그 게이트.. 다행인 점은 특별반의 누구인것 같다이지 누구인지 특정은 아니었다는 점?
"하하하. 그래도 서로 지한을 소중하게 여기는 부분은 공통점이 있는데 그래! 우린 생각보단 잘 지낼 여지가 있어보이는걸?"
오오, 참는다 참아. 그래 부글부글 참을 수 밖에 없지. 넌 현명한 선택을 하고 있는거다. 그럼 계속 참아라 나는 뒷짐을 진 체 싱글벙글 활짝 웃으며 잘 되었다는듯, 그 분노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는듯, 선한 얼굴로 얘기한다.
잘은 몰라도 지한이 어지간히 소중한가보구나 꼬마야. 이성적 운운 하던 놈이 약점을 훤히 드러내다니. 이거 꽤 재밌구만. 걱정하지 말거라. 아저씨는 이런거 퍼트릴 생각 없다. 애초에 너희 관계가 뭔지 아는 것도 없고. 그러니까 오로지 너 맥이는데에만 써주마. 불확실한 손패라도 쥐고 있는 이상은 유효하게 쓸 수 있는 법이다.
"그럼 상관은 안할 것이고, 무엇인지 정확하겐 모르겠다만, 부디 잘 되기를 빈다! 친구인 지한의 행복은 나도 바라는 것이니까. 무관계하지도 않고, 훈수도 아니니까, 응원함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음이 맞지? 이 정도는 굴러들어온 돌이라도 할 수 있어보이는군. 이야. 돌도 구르는 나름이다 정말로. 하하하 - !!"
시윤은 결국 크게 웃었다. 소년의 대인관계 약점을 찾아내, 마운트를 잡고 두드린다는 것은 어른스러운 행위가 아니었을텐데도 말이다. 거기에 윤시윤은 한가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자신 또한 완전히 같진 않아도, 그런식으로 지적 받기 시작하면 입을 다물어야 하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결국 그는 매우 유치하게도 누워서 힘차게 침뱉기를 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승리의 미주에 젖어있는 반쪽 짜리 어른에게는, 그것은 당장에는 눈치채기 어려운 일이었다.
꽤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드래고니안 하썬더. 오늘의 일정을 위해 며칠 전 구두와 원피스를 새로 샀고, 어재는 꼬리구멍을 만들고 입어보느라 한창 수선했다. 왜냐하면 오늘 같이 청담동의 카페거리를 걷기로 약속되어 있으니까! 약속 장소에는 하얀색에 자그만 꽃무늬가 귀여운 원피스 차림의 유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