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달짝지근한 감정이었고, 애증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따뜻한 온기의 이야기였다. 가끔 내가 힘들어 잠들 때면 무릎에 앉힌 채 내게 자신이 겪었던 세상의 아름다움과 즐거운 기억들을 얘기해주며 언젠가 내게 그 날의 풍경들에 같이 찾아가보자 말하는 네가 떠오른다. 나는 그 말에 기뻐했다. 네 기억에 내가 스며드는 것도, 내가 네게 조금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도 좋았다. 그때 느꼈나보다. 네가 내 빛이라고, 내가 나아가고 싶은 이유는 너와 같은 곳에 서서 네가 보던 것을 같이 보고싶어서라고. 그리고 언젠가 네가 그랬듯 내 무릎을 네게 내어주며 오늘의 감정을 설명해주고 싶었다. 분명 그랬다.
인형의 모습이었던 전투교관이 커지고 주변에 자신보다 강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지적받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그녀의 행동을 하나하나 교정한다. 언짢다기 보다는 막힌 길이 뚫린 기분에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공터에 서서 숨을 고를 겸 주변을 둘러보다 금발의 익숙한 뒷통수가 후다닥 어쩐지 도망친다는 느낌으로 수련장을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 답답이가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한 거지?'
저번 게이트 이후로 실력은 있지만 묘하게 짜증나는 답답이로 인식이 고정된 알렌을 떠올리다 고심하듯 한쪽 팔꿈치를 받치고 생각에 빠진 얼굴을 하며 눈을 깜박이다 출구를 바라본다. 방금전 잠시 스쳐지나간 풍경으로는 얘기를 해본적은 없지만 신장이 상대적으로 작아 기억에 남았던-오현이었나- 검은머리의 소년과 대화를 하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강산은 알렌의 말투에 더 토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사 특별반에 1세대 각성자의 자식도 있는 마당에 그런 쪽 인맥이 있는 학생도 없으리란 법도 없지...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는 건 몰랐겠지만...)
"이거는 사양 말고 그냥 받으라우."
알렌이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지만, 강산은 씩 웃을 뿐이었다. 알렌이 경단을 가져갈 때까지 손을 치우지 않고 들고 있을 생각이었다.
"너한테만 주는 거 아니다. 기회가 된다면 형 말고 다른 편입생들에게도 환영 선물을 주려고 생각 중이야. 이건 내 촉이지만, 아무래도 우리랑 함께하다보면 좋든 싫든 고생할 일이 많을 거 같아서."
웃고 있지만 진지한 말투였다. 특별히 아이템을 아까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 경단이 짝퉁이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정말인지 확실히는 모르지만....올해 초에 다윈주의자 놈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 중에 우리가 급우로 만날 수도 있었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더군. 그런 일이 또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으니까...그래서 주는 거야. 기왕 만난 거 오래오래 봤으면 하니까. 정 부담스러우면 안 받아도 되지만."
그리고 강산은 이미 강산의 몫도 충분히 꽁쳐둔 상태였다. 잠깐이지만 그 눈에 슬퍼하는 기색이 지나간 것 같았다.
한 두번도 아니고 똑같은 행동이 몇번씩 반복되니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을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을텐데 하물며 마츠시타 린은 나름 영성 200의 헌터들 중에서도 머리가 좋은 편이었다. 물론 머리가 좋음과 사람을 파악함은 다른 영역이라 하지만 대강 무언가의 패턴을 파악하고 분석한다는 공통점에서는 맥락을 같이 한다 그녀는 여기고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어.'
자신은 그를 해하는 행동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지금껏 동료로서 도움을 주고 받았을 텐데 어째서? 유난히 비즈니스 관계를 꺼리는 사람들이 있다지만 그런 느낌은 아니라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흐음? 눈아래가 붉어져 있사온데 그건 역시 너무 무리하셔셔 그런것이온지? 그리 말씀하시니 소녀도 알렌군의 주장대로 아무일 없는, 단순한 피로로 인한 일이라 받아들이겠사와요."
비비틀린 그녀의 속마음은 이 건을 순순히 넘기기 아깝다고 속삭였고 린은 역시나, 그녀의 표정과 같이 언제나 그러하듯 으레 마츠시타 린이라는 사람이 할법한 말을 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은근히 놀리며 넘어가는 척 했다.
"그렇다면 아무일도 없으니 알렌군의 심신이 괜찮다 여기고 물어보겠사와요. 지금 소녀에게 가벼운 고민이 있사온데 들어주실수 있사와요?"
"오늘 식사 당번은 알렌 씨네요." 둘이 아니라 한 명이네? 같은 생각을 잠깐 하지만.. 알렌의 요리실력을 모르니 어련히 잘하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알렌의 실력은 몰라도 미각상황으로는 저녁식사를 만드는 게 가능한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는 아직 모르지만. 지한이 부엌에 들어올 때까지는 적어도 뭘 만들지에 대해서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을지도 모릅니다.
"으음... 알렌 씨가 오늘의 당번이었나요?" 간단한 인사를 건네며 부엌을 이리저리 둘러봅니다. 뭐 아무것도 없는 걸 보면..... 좀 일찍 들어온 터라 시작하지 않은 걸로 생각하고는 메뉴가 뭐냐고 지한은 물어보려 합니다. 냉장고에 식료품도 있을 거고. 인벤토리에도 있을 테니. 그냥 부엌 상황만 보고 거실로 나가려고 생각하는 것이었을까요?
"나도 모두랑 말을 터본 건 아니긴 한데....알렌 형도 알다시피 학기 초부터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여태까지는 다들 단독 행동을 하는 성향이 강하기도 했고. 그래도 좋은 녀석들도 꽤 있어."
학우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듯 잠깐 말을 멈추고 생각하는 얼굴이, 좀 전보단 밝아진 기색이다.
"알렌 형님처럼 검 쓰는 학생들도 내가 알기로 두 명이 있으니까 한번 다가가보면 어때? 태호는 자세히 말하자면 긴데 밝고 재밌는 녀석이고, 태식이 형님도 잘은 모르겠지만 괜찮은 분이신 거 같더라. 편입생들 중에도 있던가? 그건 잘 모르겠군. 다른 사람들도 얼굴 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