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는 예상치 못한 만남에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미소를 지었다. 베로니카가 이 자리에 없는 것은 조금 아쉽긴 하다만, 어쨌든 김태식 역시 반가운 얼굴이었다. 특별반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며, 한국에서 흔히들 말하는 '나잇값'이라는 것을 하고, 연장자다운 모습을 보이는 이였으니까 말이다. 그저 어른들이 다니기 싫은 직장에서 보이는 끔찍하리만치 사무적인 태도만 학습한 빈센트와는 다르게 말이다.
"좋은 날씨입니다. 마도를 방해하는 눈이나 비도 없고, 식생을 건조하게 만들어서 불이 잘 붙게 만들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세상이 정말로 아름답게 빛난다는 겁니다."
벌써 16년도 더 전에 영원히 이별한 부모님이기에 기억도 흐릿해서, 일부러 사진을 꺼내서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지만... 그런 부모님과의 기억 중에 기억나는 몇 안되는 것이 있다면, 부모님의 손을 잡고 산책을 나갔던 공원이었다. 그림자 진 것마저도, 진한 색이 아름답다고 느꼈던 그 때. 빈센트는 그 때의 기억에 취해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걷다가, '동거녀'라는 말에 입꼬리가 조금 내려갔다.
"의뢰를 나갔습니다. 무슨 의뢰인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편의 뒤통수에 칼을 꽂는 것으로 의뢰를 마무리하지는 않길 바라야죠."
빈센트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어릴 적에 보았던 불은 빈센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고, 지금도 그저 조절하고 있을 뿐 불에 대한 선호를 아예 버리지 못했고, 버릴 생각도 없었다. 누군가와 의뢰를 갔을 때, 빈센트는 게이트에서의 의뢰가 끝난 이후, 망념화를 각오하고 불비를 내려 넓은 면적이 불타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나갔다. 그랬다. 빈센트는 불이 좋았고, 너무도 좋았다. 그저, 불이 좋다고 너무 지르다가는 불이 태울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 아쉬울 뿐.
"많이 좋아졌습니다. 지난 번에는 피를 보자마자 눈이 돌아가더니만, 요즘은 피를 봐도 10초 정도는 제정신을 잡을 수 있을 정도더군요. 장족의 발전입니다."
"정신건강은 잘 챙기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그게 사회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랬다. 빈센트는 불타는 게 좋았고, 사람이 죽는 게 좋았고, 무언가 파괴되는 것이 좋았다. 그것이 재미있었고, 그것들을 보는 것이, 그 잔혹함 속에서 온 몸에 퍼지는 아드레날린을 만끽하는 것이 빈센트가 마음을 챙기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빈센트는 그 방법이 절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알기에, 아슬아슬한 타협을 지속하거나, 아니면 정신머리를 뜯어고치거나, 둘 중 하나를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렇다. 생각은 말이다.
"아예 그런 일이 안 일어나면 좋겠습니다만, 프리 핸드가 베로니카에게 걸어둔 주박이 너무 강해서 말입니다. 그녀의 정신이 아니라 저주가 문제더군요."
빈센트는 그렇게 말하면서, 상쾌하다는 말에 동의한다.
"부모님과 함께했던 기억들 중 하나가 이런 산책입니다. 그때는 행복했죠. 모든 게 잘 돌아갈 것이라 믿었고요." //9
"다윈주의자는 한번 신나게 두들겨팼고, 열망자는... 태울 거면 일단 본인들부터 화끈하게 태워서 잿더미만 남겼으면 좋겠고, 프리 핸드는 자신들이 했던 짓을 그대로 돌려받았으면 좋겠고..."
빈센트는 그 때를 기억한다.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던 이를 죽였을 때. 그의 사정은 딱했지만, 그 딱한 사정만으로 그를 용서하기에는 그가 한 짓이 워낙에 컸기에, 빈센트는 그에게 자신이 남들에게 입힌 고통을 참회할 기회를 주었다.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고? 그렇다면 더 죽고 싶게 만들어줄 생각이었으니, 그의 온 몸에 불을 질러서 태워준 것이었다. 빈센트는 그 때를 생각하며, 파릇파릇한 잎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죠. 그리고... 그렇기에, 아이들은 부모가 사라지면 충격을 받죠. 그게 어떤 방식이던 간에, 아이들이 그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건 간에 말입니다."
자신의 부모님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빈센트는 자신이 정확히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흐릿했다. 흐릿한 기억의 유리 너머로 또렷하게 보이는 것은, 무서울 정도로 냉정하게,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외면만큼은 의연하게 받아들이던 기억이다.
"...아니, 좋은 날씨에 이야기가 너무 무거워졌군요. 죄송합니다. 다른 화제는 없습니까? 이 좋은 날씨에 걸맞는 것으로 말입니다."
"베로니카에게도 다윈주의자가 붙은 적이 있죠. 듣기로는 가담하지 않으면 절 죽여버리겠다고 했더군요."
그 때가 생각났다. 베로니카가 눈이 돌아가서 다윈주의자들을 전부 학살하고, 뒤늦게 도착한 가디언이 베로니카를 때려눕혀서 난폭한 전투가 민간인까지 얽힌 대학살로 번지는 것을 막았지. 빈센트는 그 때를 생각했다. 베로니카와 비슷한 암살자 계통이지만, 실력은 훨씬 후잡했던 암살자와 싸웠고, 결국은 이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웠다.
"절 죽이겠다 해놓고, 파이어볼 두 방이면 정리되는 약골들이랑 무방비로 노출된 마도사 하나 못 죽이는 사짜 암살자만 보냈었죠. 뭐 그래도, 저한테 가입 제의는 안 한게 고마울 따름입니다. 적어도 다윈주의자들은, 제가 다윈주의의 사악한 이념에 동조할 가능성을 엄청 낮게 친 것 아니겠습니까?"
빈센트는 그렇게 떠벌리면서, 가디언들에 대한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인다. 가디언, 정말로 무거운 이름이었고, 빈센트는 그 이름을 떠받들 자신이 없었다.
"우리 모두가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짊어질 수 있는 것만큼은 짊어지고, 감당할 수 있는 것만큼은 감당합니다. 하지만 가디언들의 등에 매인 짐은... 하하. 그들의 마음 속에 있을 무언가가 안 부서지는 게 신기하단 말입니다."
이런, 또 무거운 주제. 빈센트는 고개를 젓다가, 유령의 존재를 믿느냐는 말에 안경집에 들어가 있던 평범해보이는 안경을 꺼낸다. 물론, 평범하지는 않았다.
"물론이죠. 의념 시대의 개막 이후로, 기존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일어났고, 의념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나서는 귀신과 유령도 자연스레 과학적으로 인정받지 않았습니까. 어디 보자..."
빈센트는 안경을 쓰고, 나무 아래 보이는 것을 본다. 빈센트는 눈을 찡그리고, 그것의 정체를 본다.
"음.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아이가 한 명 서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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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를 알 수 없는 광물을 가공하여 만들어진 안경. 얼핏 보기에는 특별함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평범함으로 가득한 안경이지만 제작 과정에서 무언가를 잘못 가공하였는지 렌즈에는 비쳐야 할 것이 제대로 비치지 않고 보여선 안될 것이 보이는 등 특이한 능력이 부여되어 있다. 물론 그것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이 안경은 실체가 없는 것의 핵을 볼 수 있게 해주는 힘이 있는 듯 하다. ▶ 장인 아이템 ▶ 헛것이 보이나? - 실체 없는 적을 공격 시 발생하는 경감 패널티를 80% 감소시킨다. ▶ 아니 이게 왜 보여? - 도기 코인 40개를 지불하여 발동할 수 있다. 레벨에 맞는 랜덤한 게이트가 발생한다. ▶ 맙소사 조금 더 있음 내장도 보이겠군? - 약점 분석 기술의 랭크를 착용한 동안 한 랭크 올린다. 단 B 이상으로는 증가할 수 없다. ▶ 안경은 똑똑해보인다 - 영성이 15 증가한다. ◆ 제한 : 레벨 25 이상, 영성 관련 특성 보유, 매력 25 이상.
"어... 저는 아직도 얼떨떨합니다. 인성학 교관님이 저를 아주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봤고, 심리 검사지를 작성할 때는 떨어뜨리려면 떨어뜨리라는 생각으로 다 적었는데, 어떻게 통과가 되더군요."
아직도 신기하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빈센트는 인성학 교관에게 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아마도 친해진 다음에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빈센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가디언이 따라잡아야 할 목표라는 말에 어깨를 으쓱인다. 빈센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들의 힘과 기예를 따라잡을 수는 있어도, 인류를 향한 그들의 무조건에 가까운 헌신과 사랑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저는 말입니다."
빈센트는 그렇게 말하고, 유령을 바라본다. 아이처럼 생긴 유령은, 자신을 바라보는 두 헌터를 보더니 웃으면서 조르르 달려왔다. 빈센트에게는 분명한 형태로, 태식에게는 흐릿한 무언가로 보였을 유령은, 꺄르르 웃으면서 공 세 개를 꺼내서 저글링을 시작했다. 다른 이들이 보면, 허공에서 공이 왔다 갔다 하는 참으로 괴기한 광경이지만, 형태가 보이는 두 헌터에게는 어느정도 설명이 되는 광경이었다.
강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쪼그려앉은 그 자리 그대로 자세를 고쳐서 땅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버린다. 일광욕을 하려거든 이렇게 웅크릴 것이 아니라 팔다리를 펴고 누워 있어야 하지 않나 싶었긴 하지만, 뭐 어떤가. 라임이 손가락에 개미를 얹어 보여주며 "귀엽지?"하고 묻자 강산은 개미를 빤히 바라본다. 이 정도 거리에서 의념의 보조 없이도 잘 보이는 크기에, 몸 색이 잿빛인 것이...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아, 생각났다!
"오, 곰개미구나! 의념 시대 이전의 책에서 봤었지. 이 녀석들도 용케 오늘날까지 살아남았군."
귀여워한다기보단 반가워하는 거 같다. 라임이 재채기를 하자 강산은 "꽃가루 알레르기 조심."이라며 낄낄거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곰개미 몇 마리가 더 보인다. 강산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렇죠. 가끔씩은... 사랑이 아니라 종교적 광기로 느껴져서 부담스러울 때도 있습니다만."
'신의 이름으로 패악질을 부리는 광신도들은, 신자들 중에서 구원에 대한 확신이 가장 없는 이들이다.' 빈센트는 후견인을 따라 다녔던 교회에서, 종교 극단주의의 위험성을 설파하는 목사가 강변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이런 내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 신이 날 봐줄까? 그런 생각에, 다른 이들이라면 술과 마약을 잔뜩 마시고도 못할 미친 행동을 마구 해대고, 이 세상에 파멸을 가져온다고. 빈센트는 베로니카가 그런 부류가 아닐까 걱정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가끔씩은, 버려질까봐 두려워하면서도, 자신을 저의 명령과 욕구에 순응하는 수동적인 도구로 간주하는 이중적인 행동 때문에 불안해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빈센트는 그렇게 말한다. 결국 빈센트는, 무거운 분위기의 이야기를 억지로 가볍게 돌리려는 것을 포기하고, 기도하는 태식을 보더니 그가 알던 기도문을 다 외운다.
"메 바 칼라, 메 바 칼라..."
무려 부두 주술이었다. 빈센트는 기도문을 다 외우고는, 자신과 태식이 어느 새 산책로를 돌고 돌아 출발점에 왔다는 것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