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보니 정말 별 건 없었다. 리더를 만나러 같다면 재밌는 일이 있을 거 같았는데. 드라이에 대한 언급에 납득한 것 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한 줄 알았는데 욕을 할 때 정말 빠르고 다양한 욕을 구상했다. 심지어 몇개는 어떤 맥락에서 나온건지 몰라서 알아들을 수도 없는 욕도 있었다. 마치 새로운 언어를 들은 기분이라고 할까. 그런 성격이면 얼마나 사람을 털었을지 예상이 갔다.
"그래요? 생각보다 별일은 없었네요. 린 씨는 심심했겠어요."
이번에 간 '인사'를 재미로 판단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로드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조금 짜증이 나기는 했지만 상대했던 오퍼도 유쾌해서 재미있었고, 부끄러워하는 렌의 반응이니 설표로 변했던 수호나 복장으로 인해 논란(?)이 있던 시우는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었다. 솔직히 어떤 상황이든 즐거웠다면 기억은 미화되는 법이다. 그래서 별 거 없던 린의 상황이 아쉬었다.
"그래도 다칠 일은 없었으니 다행이네요. 보스를 만나는 거라서 무서웠을 거 같은데 용케 따라가셨네요?"
"맞아요. 솔직히 이러면 안 되지만 리더가 '인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재밌을 거 같았거든요. 요즘에 디스포를 잘 잡지도 않아서 더 기대를 했던 거 같아요. 물론 매일 이렇게 싸우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요. 적당할 때? 이왕이면 평화롭게 해결 되는 게 제일 좋지만요."
디스포를 상대할 때는 상호작용이 거의 없으니 사람과 싸운건 새로운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일반 사람들이면 그런 상황을 싫어하겠지. 사실 이번엔 우리한테 유리한 상황이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던 거 같다. 우리가 위험한 상황이었다면 이럴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내 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얼음 오퍼였는데, 제법 강했어요. 얼음으로 방패도 만들고 창도 만드는데 일반적인 얼음의 강도는 아니었어요. 끝에 가선 아예 방을 얼리려고 해서 골치가 아팠어요. 자기가 알아서 끝내긴 했지만... 그래도 다들 많이 다치진 않았어요. 저도 조금 다치긴 했지만 지금은 다 나았으니까요. 그래도 얼음 때문에 추워서 린 씨랑 드라이 씨가 내려올 때 그렇게 안고 있던 거예요."
상황을 설명하며 추웠던 순간을 떠올렸는지 한숨을 쉬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쪽은 원소 계열 오퍼가 많았던 거 같다. 화염부터, 얼음까지. 이제는 사라져서 더 신경 쓸 것도 없는 클랜이지만.
먼저 공격하지 않았으면 잔뜩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 건 우리 쪽이었을지도. 물론 먼저 죽빵을 날린 건 자신이었지만 어쨌든! 굳이 때려죽일 생각은 없었으니까 계속 저항하면서 심한 부상까지 입힌 건 상대쪽의 실책이라고 해야 되는 게 아닐까 싶다. 뭐 결국 남은 사람이 좋을 대로 생각하는 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오, 그렇슴까? 어쩌면 그 클랜의 조커 역할이었을지도 모르겠슴다."
혹은 주 전력이라거나. 또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올라가면서 본 건 잿더미 뿐인지라. 뭔가 드라이가 그 곳에 그대로 있었다면 바로 또 잿더미가 하나 늘어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항, 그래서 다들 끌어안고 있었던 검까, 보기엔 마냥 귀여웠는데 그런 사연이!"
음음, 그냥 거기 있을 걸 그랬나? 다들 끌어안고 있던 모습을 떠올리면서 그녀는 그런 실없는 소릴 했다.
린의 말에 바로 웃었다. 여자도 그런 말을 했다. 여기는 전뇌도시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원망할 수 있는 상대가 다로 있지 않았다. 특히 클랜간의 일은 나가 나서지도 않으니까. 건들 사람을 잘 살피고 건들이는 게 나았을 텐데. 오늘 전해들었던 두 클랜의 후일담을 떠올렸다. 알려지진 않았다고 하지만 정말 모를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이 일이 어떻게 돌아올지 모르지만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든다.
"그렇네요. 주전력도 잃고 그 클랜의 리더가 그랬다면 그 클랜이 재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겠네요."
전뇌도시에서 이렇게 사라지는 클랜이 적진 않지만, 직접 손댄 클랜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한 것도 같았다.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건 지루하진 않아서 좋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기는 했다. 그러다 린의 반응에 배시시 웃었다.
생각이 많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게 행복에 도움이 되는지는 의문이다. 세상은 이미 생존을 위해 집중해야 하는 시대에 있다. 제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세상에서 다른 사람까지 일일히 챙기다니 어불성설이지.
"뭐 이번 일로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좋은 게 아니라는 것 정돈 알았슴다."
가벼운 느낌의 인사같이 이야기했던 게 결국은 클랜의 궤멸이라니. 좀 논리적 비약이 크지 않나 싶었다. 거기에다 굳이 죽일 필요까진 없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다 죽어 버렸고. 아 맞다. 그 리더는 살아남았으려나? 뭐, 살아남았어도 재기는 힘들 것 같지만. 그 정도라면 평생 동안 트라우마가 남아서 화약 냄새만 맡아도 기절하지 않을까 싶다고 생각하며, 로드가 배시시 웃는 것을 보았다.
"아~ 이걸 노린 건 아닌 데 말임다~"
그녀는 마찬가지로 웃으면서 양 팔을 벌렸다. 그 모습만 봐도 대충 뭘 원하는지는 알기 쉽겠지.
장난스럽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과걱한 인사, 어떻게 됐든 잊지 못하게 확실히 존재를 각인해준 거 같다. 물론 그걸 기억해줄 사람은 없겠지만. 그러고보니, 그 여자한테 자신을 소개를 하지 않았다. 이름을 듣지 못했는데 이것도 인사를 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기지만 이미 뱉은 말을 취소할 수 없으니 그냥 웃었다. 그러다, 순순히 팔을 벌리는 린을 보고 방긋 웃으며 린을 꼬옥 끌어안았다.
"안으니까 좋죠?"
윙크를 하곤 키득거렸다. 지금까지 포옹을 거절한 사람은 없었다. 로직 봄 특유의 말랑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사가 맞긴 하려나. 뭐, 결국 어떻게든 끼워맞추려고 한다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웃었다. 어쩌면 이건 당한 클랜들에게 인사를 하는 게 아니라, 다른 클랜들에게 건네는 인사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신생 클랜이란 건 계속해서 생기고 있으니까.
"음, 최곰다!"
하아아 기분 좋아라~ 그야말로 피로가 살살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 뭐...이조차도 논리적 비약이 있긴 하지만 뭐 어떠랴. 그만큼 기분이 좋다는 걸 표현하는 거니까. 그녀는 자신의 품에 쏙 들어온 로드를 끌어안은 채로 후후. 하고 기분 좋은 듯 웃음을 흘렸다. 쭉 이러고 있어도 좋겠지만, 그게 어렵다는 것 쯤은 알고 있었으므로.
"아무튼 오늘 고생 많았슴다."
뭔가 붕 떠 있는 듯한 클랜에서, 붕 떠 있는 듯한 사상으로 지낸다. 마치 꿈 같은 삶이려나. 그렇다면 잠에서 깨는 선택은 나쁜 게 될까.
"로드 양이 안아줘서 피로가 꽤 가신 것 같슴다. 뭐 이번엔 쌓일 피로가 있었는가 싶지만."
그냥 안아을 뿐인데 생각한 것 이상으로 반응이 좋은 린을 보며 조금 웃기기도 했지만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 이렇게 편안하게 대해주는 태도가 좋았다. 첫만남 때도 친절하게 대해준 린이기에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다. 앞으로도 쭉 이렇게 지내면 좋을 텐데. 가만히 안겨있다 린을 한번 더 꼭 끌어안고 웃으며 린을 놔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