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건 그렇지 않건, 상황은 순식간에 변한다.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올 수 있는 일이다. 언제 깨어질지 모를 유리알 같은 이들이었다. 그녀도, 당신도.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언제 사라질지 모를 희미한 두 사람인데,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확실히 존재하기를 갈망한다. 살아숨쉬기를 갈망한다. 어쩌면 그것에 가장 위태로이 매달려있기 때문이 아닐까. 살고 싶었을 뿐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는 죄인이 되어있었고 괴물이 되어있었다. 그녀의 미소가 허전함을 훑어보는 당신의 눈이 그녀에 머물 때, 음울한 날씨가 자아내는 앰비언트에 빛바래인 푸른 눈이 당신을 마주보았다. 그 손을 꾹 거머쥐어온다.
그 조그만 움직임은, 그녀는 의도치 않았겠지만 당신에게 조그만 진실 하나를 깨우치게 했다. 나 때문이야? 하는 그 질문에, 그 반대야, 하는 대답이 되돌아온 것이다. 오히려 이 공허함과 쓸쓸함을 잊기 위해 내가 붙잡을 것은 너뿐이라는, 입으로 나오지 않고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되 손끝의 조그만 움직임만으로 당신에게 전해져온 대답이. 모두가 들어차기엔 비좁을 것만 같았으나 결국은 당신도 그 안으로 끌려들어와 버리고 만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녀는 애초에 당신을 아니 당신들을 모두 안아줄 각오가 되어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도 빠짐없이. 의심의 여지없이.
"비가 오는 날이면, 위험한 짓 하지 말고... 나를 찾아와." 뺨에 입을 맞추기 전에는 나직한 속삭임 한 마디가 덧붙여졌다. 내가 같이 있어줄게. 나와 같이 있어줘. 그 말이 무엇을 두드렸는지, 무엇을 깨어버렸는지 그녀는 알기나 할까. 아니 정말 알았던 걸까. 안다기보단- 윈터라는 이름을 자신의 마음에 담아준 사람은 사실 그 사람의 일부일 뿐이며, 그 사람은 하나이자 여럿이라고 명시된 문장으로 머릿속에 가지런히 정렬된 지식으로 안다기보단, 본능적으로 느낀 것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얼음으로 된 가시들이 거짓말처럼 사르륵 녹아내렸다는 것만큼은 느낄 수 있겠다. 충동적으로 전혀 다른 인격을 드러내버린 당신의 모습. 다 맡긴다더니, 정작 너는 어디 가니.
그러나 페로사는 당황하지 않았다. 당황하기는커녕 손끝 하나 흠칫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럴 겨를이 있는가도 모르겠다. 자신의 목덜미에 손을 걸어오며 어깨에 고개를 파묻는 당신이 와르르 쏟아내는 말에 당신을 내려다볼 뿐이다.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말.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말. 아니 애초에 단 한 번도 제대로 꺼내보지도 못했던 말. 그래서 자신도 단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줄 수 없었던 그 말... 남겨지고, 버려지고, 도망친 자신에게 그 말을 이제는 당신이 입에 담고 있다. 이제 도망치기엔 너무 늦었어.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아무래도 오늘 저녁 근무는 글러먹은 모양이다.
페로사는 당신에게 끌어안긴 반대쪽 팔을 들어서, 당신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여전히, 끔찍하게도 따뜻한 손이었다. "난 여기 있어." 페로사는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음울한 날씨가 자아내는 흐릿하고 탁한 앰비언트 한가운데에서도, 그녀의 새파란 눈은 빛을 잃지 않고 선명하게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올렸는데 내가 대답이 없다면 잠든 거라고 생각해줘. +.+ 오늘 저녁도 같이 보내서 행복했어. 앞으로도 계속 이럴 수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에만도 에만주도 정말 좋아해. 약기운도 병기운도 에만주 너무 괴롭히지 말고 얼른 지나가길 바랄게. 자게 되면 잘 자구 좋은 꿈 꿔.
(로로주 뽀담뽀담) 스르르 잠든 걸까? •0• 로로주가 푹 잠들면 좋을 텐데! 나도 저녁을 같이 보낼 수 있어서 기뻤어. 앞으로도 계속 이럴 수 있을 거야. 나쁜 혐생 훠이훠이 물럿거라! >:3 나도 로로랑 로로주를 정말정말 좋아해!💓 열심히 낫고 있으니 걱정 말라구! 로로주도 푹 자구 좋은 꿈 꾸기를 바라. 답레는 오전~오후 중에 올리도록 할게. 아무래도 필사 하고나서 올려보는게 조금 더 말끔해질 것 같아서..🤔
"오, 뭐야. 이거 정리 싹 다 새로 했네요?" (엘리시온 바의 한켠에 마련된 무대. 한동안 커튼이 쳐진 채로 커튼에 쌓이는 먼지만 털어내는 정도로 잊혀져 있는 존재였는데, 오늘은 안쪽의 플로어까지 깨끗하게 닦여있을 뿐 아니라 새 음향장비를 설치해놓고 있다. 걸레가 담긴 양동이를 옮기던 지긋한 나이의 홀 매니저가 사람좋게 웃는다.) "이제 다시 여길 열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해서 말이지요. 쇼어라인의 젊은이들만큼 화려한 무대는 아니겠지만, 품격있는 바에는 품격있는 무대가 필요한 참이니까요." "괜찮게 들리는데요. 여기서 노래할 가수는 구하셨구요?" "섭외가 어렵진 않을 겁니다." "흐음." "하하, 말 안 해도 알겠군요. 한 곡 불러보시죠. 아직 개장 준비 중이라 손님도 없고, 테스트도 한번 해봐야 했던 참이니까요." (홀 매니저는 무대 조명을 키고는, 무대 한켠에 놓여있는 피아노 의자를 끌어당겨 거기 걸터앉는다.) "언젠가 마음에 드는 분이 생기면, 초대해서 한 곡 불러드리는 것도 좋겠군요." "하하, 이런 걸 걔가 좋아해줄지는 모르겠네요..." (페로사의 얼굴이 조금 빨개진다.) "오, 이미 있습니까?" "아차. 비, 비밀이에요 매니저. 내가 한잔 살 테니까." (페로사의 얼굴이 홍당무가 된다.) "하하하, 골든 브리즈 온더락으로 부탁드립니다."
나 때문일까, 당신이 이렇게 쓰게 웃는 것도, 공허한 것도, 쓸쓸한 것도. 모두 미카엘이라는 존재를 드러냈기 때문은 아닐까 두려웠다. 헤로인은 버림받는 것에 상처받고 남겨지는 자들에 의해 고통받아왔기에 생긴 부산물이었고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당신마저 자신을 내칠까 두려웠다. 괜히 드러냈나 보다. 차라리 약에 취하더라도 윈터를 데리고 왔으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미카엘의 일면도 보여주지 않았어야 하는데. 차라리 달고 보드라운 모습만 보여줬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겠지. 끝내 위태로운 정신이 이 모든 것이 환각이고, 죄책감과 욕망으로 비롯된 마지막 환상이라고 생각했을 때, 당신은 그 반대라는 대답을 일깨워준다. 여기서 헤로인은 현실을 마주하고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된다. 판단은 어렵지 않았다.
에만은 미카엘의 죽음을 기점으로 히어로의 쇠락을 위해 나타난 역할이고, 앨리스는 미카엘의 가장 친한 친구였으나 지금은 그 유산을 상속하여 일상을 대신 살아가는 역할이다. 미카엘은 지금껏 숨어 살았고, 죽은 존재였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 온정을 받는다 해도 그것은 자신의 역할이 아니었기에 온정도 받지 못했고, 위로받지도 못했다. 맡길 수 있는 사람도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윈터와 공유하는 것은 이 역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묵인에 가깝다. 뺨에 온기가 닿기 전에 속삭인 말로 모든 결심과 판단은 사실이 됐다.
지금 이 역할은 필요가 없다. 당신이라면 모두 맡기고 잠시 쉴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지금까지 여러 역할을 품어주었듯, 이 작은 역할들의 주인을 품어주며 지켜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당신 또한 잊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이었으니, 헤로인은 당신에게 미카엘을 맡기고, 미카엘은 당신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서로 외로운 존재이며, 당신이 공허를 견디지 못하고 떠나버리면 미카엘이 나온 의미가 없으니까. 당신이 날 바라는 만큼 나도 당신을 바라니까.
"……날 떠나지 마.."
자신의 말이 쏟아지고, 그로 인해 발생한 짧은 침묵에서 미카엘은 속삭였다. 당신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으며 작게 읊조린 말이 간절했다. 당신이 하고 싶었던 말이었음을 이 작은 존재가 알기나 할까? 꺼내지도 못 했던 말이었음을, 대신 발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다. 그저 버려지고 싶지 않았다. 애정에 배신 당하고 싶지 않았고, 당신과 함께하고 싶었다. 홀로 남겨지고, 배신 당하고, 이용당하다, 버려지며, 기어이 현실에서 도망 쳐버린 자신과 당신. 당신을 확실하게 잡아채는 말을 뒤로 눈물이 뚝 떨어지던 눈동자가 바르르 떨린다. 당신이 이 눈을 보지 못해 다행이다. 더 많은 것을 들켜버렸을 테니.
"…정말?"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이 따뜻하다. 차갑기만 하던 인생에 따뜻한 것이 닿자 고통스럽지만, 당신의 손이었기에 버티는 듯싶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당신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빛을 잃지 않은 선명한 바다가, 하늘이 물기 어린 눈밭을 마주할 적, 미카엘은 천천히 당신을 마주하듯 하며 품에 고개를 기댔다.
"오늘은 아무 데도 가지 마.. 날 싫어하지 말아 줘."
이곳이 현실이라면, 나는 당신에게 기대도 될 거야. 실낱같은 희망을 찾았으니 도망치지 않아도 되겠지. 그렇게 된다면 나는 정말 행복할 거야. 이 도시에서 당신이라는 존재를 찾았으니까. 말을 꾹 삼켜내고 물끄러미, 그저 당신만 쳐다보며 애원하듯, 어린양을 부리듯 속삭였다.
그래, 당신 때문이 맞았다. 아니, 당신의 모습이 밉거나 꺼림칙해서가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당신이 그 자리에 너무 잘 들어맞았다. 낯선 곳에 버려져 안식처를 찾아헤매는 조그맣게 할딱이는 숨소리가 그녀에게 산들바람이었고, 강철 골조만을 남긴 채로 텅 비어있던 그녀의 황무지가 당신에겐 따뜻하고 포근한 피난처였다. 그게 두려웠다. 무언가를 다시 마음에 맞아들이는 것이 두려웠다. 무엇인가 불타버리고 뽑혀나가고 쓸려나간 황폐한 황무지에 또다시 무언가를 담아두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것을 담아둘 자신이 없었다. 계속 함께 있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런데도 더럭 욕심이 났고, 그 욕심이 무서웠다. 당신을 위해 불을 피울 수는 있겠지만, 당신이 어느 순간 꿈이었던 것처럼 사라지면 그 불길에 자신이 잡아먹힐 것 같아서. 아니, 그 불길이 어쩌면 당신을 다치게 할지도 몰라서.
그리도 가슴속에 잘 들어맞는 당신은 어느 날은 달빛처럼 선명했지만 어느 순간에는 안개처럼 여렸다. 어느 순간 바람이 휙 불면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훅 떠나가버릴 수 있다는 것처럼. 그녀는 남겨지고 버림받는 데에 익숙했다. 그러나 익숙하다는 말이 덜 고통스럽다는 말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가 하면 그녀 쪽의 사정도 결코 좋지는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자유로운 몸이 아니었고, 보름마다 특히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곳으로 꼭꼭 숨어들어가야만 했다. 보름이 다가오고 있었고, 보름이 다가옴에 따라 그녀는 조금씩 우울해지고 있었다. 이번의 보름은 특히나 우울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행복을 느껴서였다. 그 행복을 느낀 만큼 자신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저주가 가져올 단절이 더욱 뼈아프게 도드라져보였던 것이다. 계속 같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아는데, 보름달이 뜰 때마다 얼마간은 떨어져있어야 하는데, 아니 어쩌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꿈과도 같았던 그 함께 있는 순간이 정말로 한낱 꿈이었던 것처럼 아스라져 버릴 텐데. 이번의 상실은 확실히 그녀를 죽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날 떠나지 마, 하는 그 미약하고 가녀린 속삭임이, 그녀의 꿈 속에서 흐려져 있던 당신의 모습을 다시금 한 번 있는 힘껏 그녀의 가슴속에 쾅 하고 박아넣어버리고 말았으니까.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말.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말. 아니 애초에 단 한 번도 제대로 꺼내보지도 못했던 말.
그래. 그녀는 도망치기를 포기했다. 이제 그따위 것들은 아무짝에도 상관없어. 누군가에게 외롭다고 말할 수 있다면. 누군가 외롭다고 건네어오는 말을 받아안아줄 수 있다면. 같이 외로워할 수 있다면. 날 떠나지 마. 그녀 역시도 당신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미 당신이 그 말을 했으니, 그래서 그녀는 그 말을 조금 바꾸어서 돌려주었다.
"네가 날 싫어하지 않는다면, 네가 나를 떠나지 않는다면." 그녀는 당신에게로 천천히 몸을 돌려, 당신을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 "나도 그렇게 해줄게." 정말이야. 하고 속삭이듯 하는 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딱히 청력이 좋지 않더라도 들을 수 있었다. 창문 밖으로 빗소리만이 먹먹히 흐려져가는 204호실에서 들리는 것이라고는 서로의 말소리와, 서로의 심박음뿐이었으니까.
"정말로 날 싫어하지 않을 자신 있어?" 당신을 끌어안은 그녀의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당신을 아프게 할 목적이라거나 아플 정도로까지는 아니고, 그저 마치 무언가에 조금 겁먹고 있는 것처럼, 정말로 조금... 살며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