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제야 알 거 같아. 그 근본없는 방어기제! 텟쨩 여친 없었구나? 앗-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야말로 폭소. 시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웃다가 결국 의자의 중심이 흔들려 뒤로 넘어지고 만다. 빡, 하는 소리가 나며 시이가 시야에서 사라진다.
잠시 수습하는 시간을 갖고, 뒷통수를 문지르며 시이는 책상 위에 앉는다. 의자를 다시 세워놓진 않았다. 인성이 레전드다. 남의 연애 이력가지고 놀리니까 벌을 받는 거다.
"수수께끼는 모두 풀려버렸네에. 뭔가 사건이 있었을까 하구 생각했어. 중학교 때 실은 다른 학교에서 이지메를 당했다던가 하는? 그런 게 있다면 이유도 없이 설사약을 탄 초콜릿을 떠올릴 일이 없는 걸. 하지만 여친이 없었다니이... 그러면 모든 건 신포도 기법으로 설명되지."
여기서 잠깐, 신포도 기법이란? 점심시간, 자신은 도시락을 가디건 안에 숨기고 변소로 가는데 다들 옥상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 생각하는 것이다. '아, 나물반찬 바람에 날릴 거거든- 무조건 비 올거거든. 오늘 일기예보가 그랬다구. 바보들.' 이렇게, 일어나지 않는 불행을 피했다고 생각하는 회피기제의 일종이다.
"텟쨩..."
안쓰러운 목소리.
"괜찮아, 여친이 없어도. 앞으로 없어도 말야. 기운 내. 친구 많이 사귀면 되잖아? TRPG도 마구마구 하다보면 언젠가 커뮤력 한계돌파해서 여친까지 사귈지도 몰라. 우울해하지 마. 아무도 비웃지 않을테니까."
그리곤, 이제는 손에 닿는 테츠야의 머리를 마구마구 쓰다듬어주었다. 정수리부터 볼까지 위아래로 부들부들 쓱쓱, 소동물을 달래는 것처럼, 머리가 헝클어지는 것은 생각도 안 하고 쓰다듬었다.
아- 결혼하기 딱 좋은 날씨인데. 나는 원형으로 된 유리 탁자에 뺨을 묻고 맥없이 벽을 바라본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벽은 하얀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어서 오돌토돌 표면이 고르지 못한 편이었다. 뺨에서 느껴지는 냉기는 유리의 그것이며, 창문을 타고 넘어온 산들바람은 그보다 따뜻하다. 나는 누군가 오는 것이 느껴져 허리를 곤두세웠다. 뼘에 붙은 종이자락을 떼어냈다. 도통 알 수 없는 색목인色目人들의 언어가 내 눈을 어지럽힌다. 나는 기분이 나빠졌다.
선생이 들어왔나 싶어 나는 눈동자를 굴려 나무문쪽을 살핀다. 그러나 선생은 없고 웬 남자 인간이 서있지 않나. 나는 연필로 종이에 무언가 쓰는 시늉을 하며 그를 이래저래 칩떠보았다. 보아하니 나보다 선배인데다가 얌전하게 생겼다. "아, 아들이 참 성실하시네요-"의 인상이라고 해야할까. 하긴, 인간이면 뭘 하든 나보다 영어를 잘하겠지. 나는 선생이 올때까지 기다릴까 하다가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저기요- 들리시나요- 이쪽이요, 이쪽."
나는 손을 들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인사하지 않는 손으로 종이를 내보이며 그에게 묻는다.
"조금만 도와주실 수 있으실까요? 진짜 별 거 아닌데. 완전 쉬워요. 그냥 영단어 암기 시험인데."
조금 구겨져 있는 그 종이에는 미즈미의 이름과 학번만이 써져있을 터였다. 답 하나 적혀지지 않은 시험이라 아예 처음부터 보는가 싶지만 이름 위에 빨갛게 적혀있는 '?' 와 그보다 큼지막하게 쓰여진 '0점'을 본다면 그도 아니다.
긴교스쿠이도 경품 교환이 있었나? 옛날부터 있었던 놀이라지만 세대에 따라 조금씩 생기는 차이는 정확하게 알지 못해서, 유행에 빠릿빠릿하지 못한 신의 눈길이 뒤늦게 가판대 뒤의 인형들에 닿았다. 둘의 대화를 멀뚱멀뚱 관망하던 후미카는 천천히 다리를 펴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서야 무엇을 하나 보려 했는데, 때마침 시이가 턱하니 내민 물건을 살며시 받으면서 반사적으로 의문감을 표한다.
거북…?
"내가 대모신이기도 하다고 좀 전에 말했었니?"
둥글둥글한 데포르메의 귀여운 인간 캐릭터 인형을 보는 인간이 이런 기분이었나. 깜찍한 동족의 모양을 보려니 새삼스럽게 감상이 묘하다. 하지만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말랑말랑한 감촉이 나쁘지 않으니 이 정도면 마음에 드는 것도 같고, 무엇보다 같이 받은 선물인 셈이니 멀뚱히 인형을 바라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고맙구나. 나까지 챙겨주고 말이야."
분명히 고맙다는 뜻을 전했건만,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보니 감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시이가 후미카에게 조금 적응했다면 이것이 제법 정성들인 인사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받은 인형을 신력으로 미리 치워 보내거나 하지 않고, 품 안에 들어가도록 가볍게 안아 드는 것도 정성의 표현이었으니.
잔꾀를 부리는 아이에게는 장난 삼아 살살 딱콩을 해줘도 좋을 텐데, 불필요할 정도로 너그러운 풍어신은 그저 다 들어줄 생각인가 보다. 농담 삼아 맞받아치는 말이라도 하면 유쾌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겐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저 처음에 하고 싶었다던 뱃놀이를 할 수 있겠으니 괜찮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으니 말 다했다. 후미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가에 내려가서, 대여 비용과 주의사항 설명 등을 처리한 후 먼저 배 위에 올라섰다. 아직 앉지는 않고 선 채로 물결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이렇게 묻는다.
"유속은 느린 게 좋니, 빠른 게 좋니?"
노는 저을 필요 없다.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흐르게 될 테니, 이보다 편안하고 분위기 좋은 선유(船遊)가 어디에 더 있겠나.
"여친없는게 뭐 어때서. 애초에 여친만들려고 한 적도 없고! 굳이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모두가 너 처럼 연애에 목마른건 아니거든?"
여기에 더해서 괴롭힘은 당해본 적 없다는 말도 추가하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하면 뭔가 다른 말로 놀리며 부정할 것 같아 그만 말을 삼켰다.이제는 머리가 아파오는 듯 자신의 머리를 마치 머리를 감는 듯 매만지다가 안쓰러운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모습을 보니 그 매만지는 손이 빨라진다.
"거짓말 하지마! 네가 비웃고있잖아?!"
애초에 너도 남친 없잖아! 있으면 이러고 있을리가 없지! 라는 말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은 손에 멈췄다. 좋아, 쓰다듬는건 좋다고 치자. 그런데 왜 볼까지 그 손이 내려간단말인가. 이러다가 턱까지 만지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