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치? 아, 알았다 알았다- 분명 하룻치가 사귀고 있던 남자가 바람을 핀 거야. 그래서 때려준 거지? 혼내준 거지? 이건 좋은 폭력이야. 여자아이는 싸움하면 안되지만, 복수는 해도 된다구. 눈물나게 만들었으면 토혈로 돌려주는 것이 그래, 온나노코니까."
무슨 논리일까. 일반인들이 듣는다면 그렇지, 하면서도 기이하게 느낄 법한 말. 시이는 그런 말을 해놓고 자랑스럽다는 듯이 응응, 하고 자기 말에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에, 근데 데이트 신청이라니 나 보코보코한 얼굴의 상대와 데이트하는 취미는 없어. 지금은 그렇네에- 풍기위원과 문제아의 관계려나. 잠시 이야기 좀 해줘야겠습니다 인 거지. 그런 관계로, 잠시 동행해주셔야겠습니다."
잠시 장바구니에 꽂아뒀던 셀카봉을 다시 꺼내들었다.
"그래서 오늘 스키야키의 게스트를 초빙했습니다. 이름이이-"
쵸로쓰~ 미나미 스즈임당~ 만반잘부! 눈치 좋게 브이를 해보이는 스즈. 애칭은 뭐가 좋으려나. 아, 스즈라는 이름 좋은데에- 왠지 없애고 싶지 않은 이름. 그냥 스즈쨩으로 괜찮을지도.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다.
[ㅇㅇ : 만반잘부~] [ㅇㅇ : ㅁㅂㅈㅂ] [ㅇㅇ : ㅁㅂㅈㅂ] [ㅇㅇ : ㅎㅇ]
"그래, 스즈쨩! 오늘은 이렇게 꼬질꼬질한 고양이 스즈쨩을 주워서 잔뜩 나데나데하고 배도 불린 후에 방생해줄 계획이라구. 그럼 잠시 안녕, 식사시간에 또 봐☆"
방송은 잠시 종료. 그리고 잠시 걸어서 도착한 곳은 콘포토 Comfort 아파트. 지은 지 좀 되어보이는 2층이 고작인 아파트다. 목걸이로 만든 열쇠를 꽂아넣고 돌리면 아늑해보이는, 의외로 정돈이 잘 된 실내가 보인다. 밖은 벌써 해질녘이라, 장판 위에 시뻘겋게 해가 드리우고 있다.
"다녀왔습니다- 라고 해도, 아무도 없지만. 편하게 있어, 나 혼자 살거든. 그러니까 또 싸움하구 오면 언제든 신세져두 돼. 혼자서 사는 건 쫌 외로우니깐. 불법침입도 환영이야-"
" 풍기위원장하고는 사이 안 좋은 편인데~ 화장에 교복에 치마에.. 잔소리꾼이라니까. 유행에 민감한 JK라면 이 정도는 기본인데 말이지.. "
말로는 풍기위원장이라지만 풍기위원장의 느낌을 잘 알고있는 스즈는 전혀 그 쪽 계열 사람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고있었다. 이 쪽은 굳이 따지자면 전파계 쪽인 것 같았다. 스즈는 올라오는 채팅창을 보며 '응응. 만반잘부~' 하고 말하며 꺄르륵 하고 웃었다. 동시에 입술이 따가워 인상을 구겨버렸다. 분명 또 즐거운 일이 생길 것 같은 알지못할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아까 받은 스트레스가 차올라서 카메라가 꺼진 후엔 잠깐 동안 멍하다면 멍하고, 울적하다면 조금은 울적한 표정을 지었는지도 모르겠다.
" 실례함다- "
스즈는 짧고 단편적으로 인사했다. 아무도 없을 것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인사는 하는게 예의니까. 스즈는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정리하곤 안내를 받듯 따라서 안으로 얌전히 들어섰다.
" 혼자 산다고? 그건 좀 외로울 수 있겠다. 그래도 혼자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이이쟝~ 하고 싶은 대로 눈치 안보고 사는 거야! 친구들도 잔뜩 부르고~ "
스즈는 소파를 찾아 앉고는 언제든 찾아와도 된다는 말에 그으래~? 하고 말하며 조금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따라오길 잘했다. 벌써 재밌는 일이 생기려고 하잖아. 그 쯤에서 울리는 벨소리에 스즈는 '잠깐 실례' 하고 말했다.
" 여보세요~ 아, 응. 하룻치는? 괜찮아? 다행이네. 잘 달래줘. 그 쓰레기는 내가 만나면 또 패버릴테니까. 나? 나는 잠깐.. 음.. 으으음.. 아! 데이트! 데이트 중이야~ 그런게 있어. 학교에서 보자구~ "
전화를 끊은 스즈는 잠깐 방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혼자 사는 건 외로운 일이다. 잊혀지지 않았는지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남들과 거리가 멀어지면 그들이 뭘 하는지 알 수 없게된다. 멀어지고, 잊혀지고, 도태된다. 안돼. 그건 안돼.
" 그나저나, 이름이 어떻게돼? 나는 아까 말했지만 미나미 스즈. 스즈는 이거랑 같은 한자~ "
스즈는 그렇게 말하며 초커에 달린 방울을 톡 건드렸다. 귀걸이와 체인으로 연결된 초커. 딸랑- 하는 소리가 울리자 스즈는 문득 꼬질꼬질한 고양이라는 말이 생각나 또 푸흡 하고 웃어버렸다.
"사진? 물의 론! もち の ろん! 나 방송하거든- 채널 이름은 쾌락신이구, 만든 지는 반년 정도인데 구독자 수는 만 명 조금 넘어. 슈퍼챗이라던가 그럭저럭 들어오는데 방송 켜면 늘 봐주는 건 300명 남짓이려나- 이상하게도 이 이상 늘지 않아. 슈-르하지이. 앗, 말이 샜네. 그러니까아, 사진은 내 특기이자 생계라는 말씀."
그제야 생각난 듯이 스마트폰과 셀카봉을 꺼내어서 당고를 찰칵찰칵 찍어댄다. 심지어 한 입 먹은 당고까지. 그리곤 후미카를 한 번 쳐다보고, 스마트폰을 보고, 번갈아 보다가 바보같이 웃었다.
"미카쨩은 어때? 사진 말이야. 같이 찍지 않을래? 나, 보정이라던가두 잘하니까 굴욕적으로 찍힌 것두 인생샷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구. 물론 미카쨩은 귀여우니까 그럴 일 없지만. 마음에 안 든다면 스티커로 가려줄 수도 있구... 라인으로 보내줄게. 그러니까- 어때?"
후미카를 본다. 농담으로도 밉다 말할 수 없는 얼굴. 차분해보이는 인상,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한 뺨과 둥그레한 얼굴. 앙증맞게 생겼으나 무감하게 닫혀있는 입술이라던지. 귀엽지 않은 구석이 없다. 많은 오츄로들을 보았으나 역시 신의 얼굴이란 걸까, 극상이지.
하지만 저 눈이 어떤 생각을 할지 몰라서 시이는 불안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마음을 걸고 그게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하고.
싫어하지 않는단 말은 결국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말. 사랑받고 싶어. 관심을 받고 싶어. 쇼군이 나를 봐줬으면 좋겠어.
그 일념의 집합체는 만들어진대로 행동한다.
불안감을 지우고 해맑게 웃는 것이다. 아둔해 보이고, 뇌까지 말갛게 지운 여자처럼 보이도록, 사랑받기 위해 꾸민 얼굴로 생긋 웃어보인다.
나는 여전히 널 이해하는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우습다는 감상은 놀랄만큼 들지 않는다. 그들이 우스웠으면 나는 탐구 하지 않고 조롱했을 것이며, 그들이 가엾었으면 나는 몸을 낮추지 않았을 터였다. 나는 다만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열중할 뿐이다. 다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붙잡고 끙끙거리며 전전긍긍하는 데에도 내가 이 일을 놓지 않는데에는 너희 인간들에게 있다. 그리하야, 나는 너와 시선을 맞춘다. 너의 표정을 살핀다. 다소 어설픈 구석이 있었기에 나는 이 관계가 몇 차례 기워진 상태라는 것을 안다. 곧 찢어질 천을 붙들고 있는 것은 나고, 그 천을 열심히 봉합하는 것은 네 몫인 듯 싶다. 어느쪽이건 손 놓으면 엉망이 될테였지만 나는 이 천을 계속 붙잡고 싶었다. 내 욕심이 그랬다.
"그래."
피곤한 유행이라는 말에 순순히 동감한다. 사실, 인간이 하는 행동 대부분은 피곤한 일들이었다. 인간들은 너무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것을 이루어 내야 하기에 스스로 피곤한 존재 아니던가. 내가 감히 사견을 얹어보건데, 적지 않은 수의 신들은 그러지 못했다. 특히 자연물에 대한 믿음과 공포가 사라지기 전까지 사라질 일 없는 나는 더더욱 그랬다. 애석하게도 삶에는 열정도 목표도 없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목표를 따라 온 곳이 가미즈미라 할 수 있겠다. 나는 희미하게 진실로 웃으며 속삭인다. "그렇지만 난 그렇게 피곤하게 사는 것도 괜찮아보이더라." 인간에게는 죽일 놈의 말일지 모르겠다.
본론으로 돌아와 나는 시니카를 마주보며 하트를 만들고 있었다. 어라, 서로를 바라보면서 하트를 만든다? 분위기가 이상하다? 썸을 타고 있다? 서로... 사랑을 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느낌이 좋았다. 보편적으로 말하는 사랑의 감정과는 결이 조금 다른 것 같지만 원래 사랑은 필설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라 그랬다. 나는 제 앞에서 하트를 만들고 눈을 이글거리는 시니카도 귀여웠고 장단을 맞춰주겠다는 대답도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어린 인간들 사이에서 이런 귀여운 주문을 외우고 있으니 나 마저도 어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줄줄 늘여놓았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조금 기쁜 것 같다.
"모에모에큥-! 와아-! 맛있어졌다-"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닌 주술인지는 몰라도 자주 해봐야할 것 같다. 내가 마구 박수치자 죽은 눈을 한 여종이 -어째서인지 시니카와는 눈 마주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나만을 바라보며 케찹을 뿌려주었다. 사랑해♡ 라고 접시에 써준 후에 오믈렛에는 귀여운 고양이를 그려준다. 이거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요즘 인간들은 진도가 빠르다더니 겨우 30분 만난 사람에게 사랑고백도 하는거냐? 나는 경우를 알 수 없고 혼란스러워 다급히 사랑해 캐찹을 계란으로 가렸다. 슬쩍 시니카의 눈치를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는 짓만 보면 난잡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도 일단 일부일처제를 채택하고 있으니까.
"...시니카, 나는 아무것도 안했어."
괜히 변명을 해본다. 역시 인기가 많으면 이런 문제가 생긴다.
#....일인칭의 단점 미즈미한테 츳쿠미를 못담............. 오너가 사과할게.... 그냥 개그성으로 봐줘.... 3인칭이였으면 '미즈미는 개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를 꼬오옥 추가했을텐데...
"맞아 맞아, 엄-청 외롭다구. 이런 해질녘에는 방송도 화면이 안 예쁘니 할 수가 없지. 그럼 완전히 혼자인 거야.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아. 그런 건 슬퍼."
슬픈 건 싫어. 매일 달콤한 것으로만 배를 채우고 싶어. 매일 쌍륙만 하며 즐겁게 살 수는 없는 거야?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때론, 어떤 역사적 사건은 신에게도 차별없이 닥쳐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스즈쨩이 와줘서 기뻐."
캐비넷을 달그락거리다가 꺼낸 것은 구급상자. 쓰지 않은 새 것의 연고들이 가득하다. 마치 지금을 위해 구비해두었다는 듯이, 언제고 베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베풀겠다는 듯이, 유통기한이 지난 새것의 연고들이 굴러다녔다.
시이는 그 중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것을 꺼내놓고, 솜에 소독약을 적신다. 알싸한 냄새가 금세 코를 찌른다.
"눈 감아, 감고서 들어."
쓰라린 소독약이 눈두덩을 가볍게 두드린다. 눈꺼풀 위는 여전히 해질녘으로, 낮과 밤의 경계선으로 뜨겁게 빨갛다. 차갑고 쓰린 감촉, 그걸 달래듯이 이마를 문질러주는 따듯한 손. 새빨간 적막 위로 내려앉는 목소리.
"나, 가미즈미고교 1학년 C반인 아타마오카 시이. 머리가 이상한 여자애라고 외우면 편할 거야. 끔찍한 이름이지? 나도 딸이 있다면 분명 아타마오카 시이같은 이름을 붙여주겠지만 말야. 그래도 가끔은 스즈같은 예쁜 이름을 갖고 싶다구 생각해버려-"
플라스틱 선반에 연고가 부딪히는 달그락 소리. 쓰려서 움찔거리는 얼굴을 상냥하게 붙드는 따듯한 손, 그리고 어쩐지, 환청처럼. 베란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듯한 방울소리. 축제를 여는 북소리와도 같은 소리. 입술 너머로 느껴지는 떫은 에탄올의 향. 피가 말라붙은 입가를 닦아내는 손길.
>>779 괜찮아 우리에게는 왜놈이지만 일본에게는 애국신이니까 국민들도 좋아할 거야 미즈미는 어쩐지 사냥하는 뱀의 이미지가 정말 맞다고 생각해 사자가 얼룩말을 사냥할 때랑 뱀이 도마뱀을 사냥할 때랑 모션이 다르잖아 뱀은 좀 더 자기 몸을 출렁출렁하면서 온몸을 던진단 느낌 딱히 바라는 거 없는데도 고위 신 되고 싶어서 인간 몸을 하고 인간이랑 말 섞고 관용베풀어주는 거 너 출세에 진심이구만 어이<싶어져 하지만 그런 미즈미에게 출세 이외의 진심 사랑이 찾아오면 어떻게 될지도 궁금한걸 고위신 되는 건 모르겠고 얠 보면 가슴이 두근거려서 심장 토할 거 같아 소화안된 쥐가 날뛰는 거 같아 이 쥐새끼같으니... 한다던지(농담)
>>780 시이주가 캐해하는거 나보다 잘하는것 같다 그냥 오너권 넘길뻔 해버렸다 후 큰일이네; 그렇지 미즈미는 출미새니까 근데 딱히 출세해서 뭐 할 거 없는 것도 맞고 ㅋㅋㅋㄱㅋㅋㅋ 사랑은 나도 잘 모르겠다 애초에 사랑을 할까 가정 안하고 데려온 애라 그때그때 급하게 캐해해서 하려다가 캐붕나겠지 난 그걸 인간미라 부르겠어
"오랜 시간을 살면 그런 편인가요?" "저는 나이를 헛으로 먹었는가.." 물론 고 3이 오래 살았다기엔 그렇긴 하고.. 정말 오랫동안이라고 해도 청소년같은 분들도 있겠지만요? 라는 말을 하며 장난스럽게 말하는 토와입니다. 소원 팔찌를 사려 할 때 브로치와 같이 값을 치르자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요.같은 표정을 짓습니다.
"그럼 가벼운 사탕이라도 하나 사드릴게요" 배답을 받기는 했지만 그냥 보내기에는 애매했던 걸까... 싶어 토와는 저쪽에서 사탕 노점을 봤다면서 가리킵니다. 사쿠라마츠리인 만큼 벚꽃을 예쁘게 만드는 사탕노점도 있다. 스테디셀러는 동물이겠지만.. 벚꽃의 섬세함을 만들어내는 것도 있으니.. 맛보단 모양으로 먹는 걸까.
"아니면 사진을?" 한 장 찍어드릴까요. 라면서 카메라 가방을 들어올립니다. 폴라로이드 계열인 만큼 찍으면 바로 나오겠지.
주문한 것들이 포장이 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핸드폰을 바라본다. 리리는 잘 놀고 있는지 그새 몇장의 사진이 더 와있었고 잘 놀다오라고 답장하고선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 친구, 연인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무척이나 신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도 다음엔 리리랑 같이 놀러올까.
" 아 감사합니다. 꼭 많이 파시면 좋겠네요. "
건네받은 봉투 안에는 내가 산 것 이외에도 덤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더 들어있었다. 호시즈키당이 많은 사람들이 찾는 화과자점이 된 이유를 조금이나마 본 것 같아서 작게 미소짓는다. 답례라고 할만한건 없지만 별빛이 호시즈키당 매점을 조금은 더 많이 비추게 해준 나는 매점을 나와 걸어가는 요조라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 뭐하러 가는데요? 실례가 안된다면 따라가도 괜찮을까요~? "
축제 구경은 같이 즐기기로한 약속도 있었으니 나중에 해도 괜찮았다. 지금은 느릿하게 걸어가는 저 소녀의 뒤를 따라가는게 더 중요하다고 느껴졌다. 이유는 ... 그냥 재밌을것 같으니까?
필연적으로 왜곡이 발생하게 되는 글과 회화의 묘사와는 달리, 사진은 선명한 상을 보존하는 기록이다. 그 어떤 것보다도 현실의 생동을 훌륭하게 담아내는 기술. 사진을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되도록 카메라 화면을 벗어나 피해 있곤 하는 까닭은 그것이다. 조부의 지인이었으며, 어머니의 유년을 함께 보낸 친구, 아들의 학우로서 생애 한순간을 짧게 스쳐갔던 누군가. 그 어렴풋한 어린 날의 추억들. 풍어신은 자신이 남긴 순간들이 기억되지 않기를 바랐다. 세월에 녹아 자연스레 흐려질 한순간의 잔류라면 충분했다. 사진은 기시감을 줄 만치 서로 닮아 있었던, 언제라도 사라질 듯 희미했던 누군가가 그곳에 실재했었다는 사실의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그는 조금 머뭇한 채 생각에 잠긴다. 하지만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후미카는 멋쩍다는 뜻을 알아보기 쉬운 신호로 보내기라도 하듯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가볍게 꼬았다. 진갈색이던 머리결이 햇빛을 받아 노랗게 빛났다. 그만큼 날씨가 좋은 날이니 사진 찍기엔 제격이다.
"싫지 않지만 괜찮을지 모르겠구나. 나는 찍히는 것도 찍는 것도, 사진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단다. 좀 어색해서 말이야."
개인적인 이유를 제하고서도 사진이 어색하다는 것도 이유가 맞긴 했다. 엄숙하고 무표정한 사진이 유행이었던 시절을 지나, 일률적으로 웃는 낯에 브이 포즈를 정석으로 여겼던 시기가 한때는 있었더란다. 억지웃음 짓기에는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는 관계로 그 시기에 찍었던 사진들은 사진사를 참 난감하게 했던 경험이 있다. 그렇지만 요즘 정서가 어떤지 알아보는 셈이라 치면 나쁠 것도 없다. 잘 모르면 최신 유행은 모두 섭렵한 듯한 시이에게 물어보면 될 테다. 후미카는 졸래졸래 다가와 시이 옆에 붙어 섰다.
"대신 다른 사람 보여주지 말고 너만 가지고 있으렴."
물끄러미 위를 올려다 보며 후미카는 나른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순간만큼은 그도 참 순진해 보였다. 애타는 누군가의 마음은 끝끝내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했다.
" 알지알지~ 혼자인건 외롭지~ 나도 혼자있는 건 별로 안 좋아해. 그러니까 계속 친구들을 부르는거고 계속 같이 있는거고.. 그러다 잊혀지면, 도태되면 어떡해 "
남들이 나아가는동안 정체되어 있으면 도태된다. 남겨지고, 썩는다. 그리고 썩어사라져 잊혀진다. 그러지 않으려면 잊혀져선 안된다. 더 노력해야하고 남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더 많이 만나고 이야기하고 입지를 다져야한다. 그리고 같이 있는게 더 좋고, 더 즐겁기도 하고. 스즈는 자신이 와주어서 기쁘다는 말에 그런 말을 들으니 자신도 기쁘다며 웃었다. 이렇게 놀러와서 대접만 받아도 되는걸까 하는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 앗, 잠깐만, 화장이, "
소독해도 되려나. 스즈는 아무래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으로 시키는대로 고분고분 따랐다. 눈을 감고 고개를 들었다. 코를 찌르는 소독약의 냄새에 눈을 살짝 찡그렸다. 상처난 곳에 솜이 닿자마자 스즈는 읏- 하고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입술을 살짝 물었다. 물자마자 느껴지는 아련한 통증에 물었던 입술을 놓았고 양반다리를 틀고있는 허벅지를 달달달달 떨기 시작했다. 스흐으으으으읍- 하고 애정을 들이마시고 후우우우우- 하고 고통을 뱉었다. 따끔거리고 얼얼한 것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따가워.. 엄청 따가워.. 생각보다 아프네. 으으- "
손가락을 들어 반대쪽 눈에 살짝 맺힌 눈물을 훔친 스즈는 자신의 얼굴을 붙드는 손에 왜인지 모를 안심을 느꼈다. 그리고는 한 대 세게 맞은 입술. 여기도 색조화장을 한 것 마냥 빨갛게 되어선 데코레이션이라도 한 듯이 빨갛게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알콜이 닿을 때 스즈는 똑같이 들숨에 애정을 마시고 날숨에 고통을 뱉었다. 그래도 이렇게 아프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살아서 활동하고 있고 더 많이 노력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니까. 입술 사이로 느껴지는 떫은 맛이 지나가고 스즈는 들려오는 자기소개에 찡그렸던 눈을 떴다.
선배가 되어서 후배에게 케어를 받는다는 것은 그렇게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텐데. 스즈는 그런 생각이 스쳤어도 지금 당장은 상관없겠다 싶었는지도 모른다. 석양빛이 빨갛게 들어오는 창가와 조금은 가라앉은 공기, 살짝 떫은 알콜의 맛과 병원의 냄새와 같은 약냄새 그리고 후배임에도 어딘가 안정이 되는 느낌에 정말 그 때 이야기한 '꼬질꼬질한 고양이'처럼 쓰라려 움찔거리던 볼을 붙들어주던 손에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부볐다.
요조라의 걸음은 언제나처럼 느렸다. 오늘이라고 특별히 기운이 넘치거나 하지 않았으니, 손목에 건 작은 가방을 달랑달랑 흔들며 나아가는 걸음은 앞서 출발했더라도 따라잡기에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그 말은 곧 뒤늦게 매점을 나온 코세이에게 따라잡혀도 이상하지 않았다는 거다.
자박자박. 곱게 차려입은 유카타에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샌들이 일정한 보폭으로 걸음을 옮긴다. 저 앞의 무대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지, 노점 쪽의 사람이 줄어 요조라 혼자서도 걷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제법 한산해진 길가를 따라 걸으며 요조라는 뒤를 한번 힐끔거렸다.
"마음대로, 하세요..."
오지 말래도 올 것 같아서 그랬는지, 달리 말하기가 귀찮았던 건지, 의중을 알 수 없는 멍한 얼굴이 코세이를 힐끗 보고 앞으로 돌아갔다. 달리 말을 걸지 않았다면 그대로 앞만 보고 계속 걸었겠지.
그저 앞만 보고 걷는다기엔 요조라의 걸음은 일정하게 따라가는 것이 있었다. 바로 꽃잎이었다. 노점보다는 길가의 벚나무들 쪽으로 걸으며 지나치는 나무를 손으로 슥 훑거나 그대로 손을 들어 떨어지는 꽃잎들을 스치거나 했다. 그러다 제법 큰 나무가 나오면 멈춰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나무가 있는 쪽으로 좀 더 가까이 가서 고개를 들고 잠시 동안 물끄러미 관찰했다.
"어떻게... 하려나..."
어느 한 나무 앞에 선 요조라는 꽃잎 가득한 가지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개를 갸우뚱 했다가 다시 원래대로 하고, 생각에 빠졌는지 얼마간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