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네네. 오토하 쇼. 친구 이름도 아시네요? 벌써 소문이 그렇게 났어요? 부끄러워라!"
미즈미는 짐짓 부끄러운 척 몸을 배배 꼬았다. 그래봤자 저 창백한 피부는 달아오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미즈미는 몸이 차고 심장도 느리게 뛰인지라 쉽게 몸이 달아오르지 않았다. 미즈미는 물론 신이니 어찌저찌 잘 가장해보면 또 모르겠으나 그것까지 하나하나 신경썼다간 열의 잃은 미즈미는가사회를 등지고 자연에 은거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 일단 제가 갔을 때는 저 뿐이었어요. 참. 다들 사기 당하지 않는 멋진 현대인이네요. 가미즈미 마을에는 현명한 소비자뿐인가봐요. 와아!"
그야... 어떤 젊은이가 길거리에서 게르마늄 팔찌를 사겠냐. 미즈미는 축하한다는 듯 손을 들어 짝짝 박수를 친다. 좋댄다. 그러면서도 어렴풋이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은 미즈미의 입꼬리가 흐려진다. 으음... 뭐, 괜찮다. 인간미를 보여주는 것도 매력 어필 중 하나라고 들었다. 대체 그 인간미가 무엇인지 미즈미로서는 도통 모르겠다만 제 오랜 친우의 말에 따르면 실수를 하는 것이 인간미에 속한다 했다.
"네에? 진짜요? 그렇게 영악한 사람들이 아직도 살아간단 말이에요? 큰일이네요."
그동안 인세가 많이 깐깐해지고 지킬 것도 많다 생각중이었지만 악인들은 항상 존재하구나 싶다. 하긴 그런 사람들 때문에 제가 잘 태어났으니 어쩌면 감사해야할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와 달리 제 앞의 인간은 선량한 편인 것 같아 다행이다. 이렇게 사기 당했다고 신경도 써주고 남 피해 안 입도록 신경쓰는 것만 봐도 그랬다. 지금 제게 청룡 팔찌를 내미는 폼이 전의 그 사기꾼의 그것과 겹쳐보였지만... 뭐, 됐다. 인간들은 까다롭고 쿨-하지 못한 사람을 싫어했다. 대체 쿨하다는게 뭔지는 확실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그렇다.
"그러면 그 청룡 팔찌도 손에 차면 막 기운이 좋아지고 피도 깨끗해지며 머리도 맑아지나요-?"
청룡팔찌의 미는 미즈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청옥도 마찬가지였다. 물욕은 희미했다. 미추에 대한 판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무언가가 결여된 여자의 관심은 오로지 원초적인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식탐. 미즈미는 채 씹지 않은 경단을 느릿하게 목 너머로 넘기다 뭔가 이상한 걸 깨달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숨이 턱 막히는 게 과연 이게 사랑일까? 운명의 짝을 찾은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미즈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다. 평소처럼 반듯한 미소를 지으며 미즈미가 물었다.
넥타이를 맨 가미즈미 고등학교의 한 이름 없는 학생은 도서관 문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깨지 않을 정도로 주먹을 날카롭게 세워 캉, 캉 소리가 나도록 두드리기도 하고, 몸을 날려 어깨로 쿵 들이받기도 하고, 힘껏 달려 단단한 신발을 신은 발로 걷어차기도 했다. 그러니 청룡의 가호를 받기라도 한 것인지 매우 단단한 문은 학생의 요망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거 진짜야? 진짜냐고?!"
학생이 두드리고 있는 그 문엔 평범한 A4 용지가 붙어 있었다. 정말로 평범한 A4 용지이기만 했다면 좋았을 텐데, 학생은 잠시 문을 두드리는 것을 멈추고 눈을 부릅뜨고 종이에 적힌 글씨를 노려보다가 마른 눈을 손바닥으로 덮고 마침내 문 옆 벽에 기대 고개를 수그렸다. 그저 책을 좋아해서 점심시간에 제일 먼저 읽으러 온 모브일 뿐인데 이 시련을 제일 먼저 겪게 된 것은 참 가혹한 운명이다.
[도서관 책으로 고구마 구워 먹습니다 도서부원 한정이기에 손님은 받지 않아요 - 도서부 올림]
"아니, 미치겠네. 진짜 이렇게 돼?"
만우절 장난? 그렇다고 하기엔 커튼으로 가려지지 않는 도서부 창문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새까만 연기가 매우 리얼하다. 저 안에서 책이나 고구마나 도서부원 중 하나는 타고 있을 것 같잖냐, 학생이 그런 생각을 할 정도였다. 연막탄을 구해서 이번에 도서부가 아주 작정하고 만우절 장난을 기획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책장까지 동원해 막아 놓은 이 문이 심상치 않다. 그리고 모브 학생이 떠올리기를, 적어도 작년까지는 만우절이라고 한들 도서부에 아무 일도 없었다. 단지 도서관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보이는 장르별 추천 도서에서 로맨스 소설이 '판타지', 연애 기술서가 'SF'에 들어가 있는 등, 장르를 바꿔놓는 사소한 장난을 쳤을 뿐이었다. 내성이 생기지 않은 탓일까, 엄청난 스케일로 도서관을 장식하고 있는 만우절 장난은 모브 학생의 정신을 완전히 갉아먹었다.
"...!"
그때, 문 안에서 어느 학생이 문을 막고 있던 책장을 옆으로 밀어서 옮겼다. 바로 모브 학생이 문을 열고 들어가 도서부원으로 보이는 검은 포니테일 소년에게 항의하려고 하자...
"잠깐만, 도서관에 들어가려면 문제를 풀어야 해." "하? 문제...?" "스피드 퀴즈."
포니테일은 바로 품 안에 쥐고 있던 스케치북을 꺼낸 다음 모브 학생 앞에서 펼쳤다.
[ 吝嗇 ]
"이 글자는 뭐라고 읽을까요? 3...2..." "너무 빠르잖아! 린쇼쿠!" "그럼 다음 문제."
[ 薬缶 ]
"가정용품으로 익숙한 이름입니다. 뭐라고 읽을까요? 3...2..." "TV 프로그램에서 봤어! 주전자(야칸)—!" "쳇. 다음 문제." "쳇이라고 했어~!!"
[ 傅く ]
"아—! 이거 알아! 카시즈쿠, 소중히 기른다, 돌본다는 뜻의 고어다!" "이번에도 정답. 고전 문학 수업 열심히 들었구나?" "아니, 수업이 아니더라도 난 고전 문학이 정말 좋단 말이야. 「겐지모노가타리」의 「나의 목숨을 걸고 지킨다我は命を譲りてかしづきて」라는 예문은 유명하지." "모브 씨 그런 거까지 외우고 있어? 옛날 사람 같아." "고등학교까지 올라와서 1학년 때 볼펜도 제대로 못 쓰던 너한테 듣고 싶진 않은데..." "기억 안 나. 금방 잘 쓰게 되었잖아. 그보다 문지기인 나를 통과했으니 이제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어."
그 말과 함께 포니테일은 선선히 모브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문지기...? 뭐라는 건진 모르겠지만 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래,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아. 할 수 있다면 말이야."
안 쓰는 낡은 책장으로 문 앞에 작은 공간을 만들어 안이 보이지 않게 가려뒀기에, 모브는 당장 도서관의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포니테일은 모브가 들어가자 바로 책장을 밀어 또 다시 도서관과 문 밖의 시야와 그가 있는 공간을 분리했다. 문 쪽 책장에 귀를 대고 살며시 허리를 숙인 포니테일에게 도서관에 들어간 모브의 절규가 들리는 건 오래치 않았다.
"이, 이, 이, 이게 뭐야아?!?!?!"
큰 장난을 성공시킨 일원으로서의 자부심이 내비치는 포즈나, 곤란하게 만든 사람을 위한 한 점의 비웃음도 없이, 표백한 듯한 무표정으로 포니테일은 양손을 모아 합장했다. 그것은 출입자, 아니 침입자를 환영하기에는 적절치 못한 것이었지만, '희생자'를 위한 것으로는 아주 잘 어울렸다.
"어서 오세요... 만우절 도서부의 책장 미로에."
그 안, 도서관에는 쓰지 않던 예비 책장과 책을 담은 채로 통째로 옮겨 놓은 현 책장들이 이루는 좁은 미로가 한 개의 해답만을 간직한 채 촘촘히 미로를 이루고 있었다. 모브, 그는 소년인가 소녀인가. 청소년이여 달려라. 도서관에서 일어난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기 위해, 진실을 찾아 달려라———! 그보다, 못 찾으면 못나간다—!
(※도서관에서 뛰면 안 됩니다.)
. . .
"...라는 꿈을 꿨습니다만." "만우절 당일날만 책장을 모두 옮겨서 미로를 만들고 다음날엔 모두 정리해 둔다고? 그런 쓸데없는 짓 할 정도로 기력이 넘칠 리가 없잖아... 벌써 늙었는걸." "도서부장님은 아저씨." "조용히 해!"
그래서, 이번 도서부의 만우절은 도서부원들이 메이드복을 입고 메뉴판에 있는 장르를 주문하면 낯부끄러운 주문과 샤방샤방한 포즈로 추천도서를 서빙해 주는 메이드 책집을 열기로 한 모양이라고 합니다. 물론 뻥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홀라당 넘어가지 않았다는 것은 역시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이 마을에는 정말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 중에는 사기에 특히나 취약하다고 하는 나이 많은 어르신들도 존재했다. 물론 이미 사기에 당한 후고, 미즈미가 미처 보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는 애써 그녀가 처음 마주한 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자칫 잘못하면 정말로 큰 피해가 이미 왔다갔을 가능성도 크니까.
"아니요. 그런 효과의 팔찌는 이 세상에 없어요. 이건 그냥 단순한 장식이에요. 장식. 그러니까 선물용이나 기념품용으로 많이 사는 물건이에요."
절대 그런 것이 아니라는 듯 아키라는 황급하게 손을 휘저었다. 존재하지도 않는 효능을 그녀에게 소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잘못하면 이번엔 가격이 더 싸니까 이 팔찌를 사러 가겠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그것만은 막아야한다고 그는 판단했다. 죄송해요. 아버지. 어머니. 물론 팔면 우리 집에는 이득이지만 거짓말을 할 순 없었어요. 속으로 사죄를 하며 그는 괜히 당고 중 하나를 집어 입에 넣어 달콤함을 즐겼다.
"물 말인가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이어 아키라는 자리에서 일어난 후, 컵을 챙긴 후에 정수기에서 물을 가득 담았다. 지금 시기에 따뜻한 물을 주기보다는 시원한 물을 주는 게 좋겠다고 판단하며 그는 방금 막 받은 시원한 물을 미즈미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어요. 아무튼 사기에 대해서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김에 묻는 거지만, 요즘 2학년은 어떤 분위기인가요? 1학년은 뭔가 사랑에 대한 것이 상당히 유행하는 것 같던데 김에 2학년은 어떤지 묻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이전, 화단에서 만난 1학년 여학생을 떠올리며 2학년은 요즘 어떤 분위기인지 알고 싶었는지 아키라는 그녀에게 넌지시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원래는 안되는 일이지만 지금 테이블에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이걸 남기는건 우리 가게에서도 좋은 일은 아니다. 이걸 다시 팔 수는 없으니 고스란히 버려야하는 일이니까. 아마 점장님께 말씀 드려도 이해는 하실 것이다.
" 이렇게 포장해서 가져가시는건 냉장 보관하셔도 2~3일 내로 빠르게 드셔야 ... "
그래도 한여름은 아니니까 그것보단 조금 더 오래 가겠지만 괜히 탈나면 우리만 손해니까. 그렇게 주의사항을 말해주고 있으니 눈 앞의 소녀는 방송을 보고 있는 사람들과 말싸움을 하는지 조금 언성이 높아졌고 무언가 서러운 일이 있었는지 코를 훌쩍거리다가 이내 내 앞치마를 붙잡고 눈가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 저,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 ... "
이래서야 내가 울린것 같은 모양새잖아! 아까 쑥덕대던 그룹은 이쪽의 상황을 살피더니 또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쑥덕대고 있었다. 정말 내용은 하나도 안들리는데 어째서 무슨 얘기인지 이해가 되는걸까. 여기고 저기고 하나 같이 골치 아프단 생각을 하다가 갑작스럽게 핸드폰을 던지려는 제스처를 보고선 떨어지는 것을 받아내기 위해 움찔했다. 물론 결국 테이블 위에 얌전히 엎어졌지만.
" 여기서 이러는건 좀 곤란하겠네. 잠깐 따라와봐요. 짐은 여기 둬도 누가 안가져가니까. "
다른 알바생에게 여기 짐 좀 잘 봐달라고한 나는 소녀에게 직원휴게실을 가리키며 저기로 잠깐 가자고 얘기했다. 여기는 사람들 이목도 너무 쏠리는데다 주변 사람들이 불편해할 수도 있으니까. 다행히 사람이 엄청 많은 시간은 아니라서 내가 빠진다고 일이 밀리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히키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대답을 하자 렌은 그래도 조금 걱정했었는지 안도의 표정이 슬쩍 스쳤다 지나갔다. 렌은 히키와 발을 맞추어 걸으며 평소에 자주 가는 마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례라뇨. 사실 한 번 쯤은 집에 초대하고 싶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음, 집이 조금 외진 편이라서 볼거리 같은 것도 없긴 하지만요. 히키 선배에게는 도움 받은 것도 많아서….”
렌은 조금 말을 하면서도 민망한 듯 볼을 긁적였다. 렌에게 집은 소중한 공간이고, 그런 공간을 공개한다는 것은 히키가 렌에게 소중한 사람 중 한 명이라는 것이기도 했다. 아무리 멘토 시스템으로 맺어진 것이긴 했지만서도 이것저것 알려주고 챙겨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도 했고. 그래서 평소에도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사야하는 건 돼지고기, 쪽파 한 줌, 숙주 나물 한 봉지 정도면 될 것 같아요.”
렌이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 정육점이 안에 있는 마트였기 때문에 따로 정육점을 들를 필요성이 없어서 이 마트에 자주 오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고기가 신선하기도 했고.
“사실 선배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저야 집에서 자주 해먹기도 하지만 말이에요.”
마트에 들어서서 물건들을 바구니에 담고는 그렇게 말을 하며 빈 손으로 제 목덜미를 쓸듯 만졌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에게 요리를 해준다는 것이 민망하긴 한 모양이었다. 혼자 해 먹는 일은 많아도 남에게 대접하는 일은 흔치 않기 때문에 자신감이 없는 걸까. 살 물건이 많지는 않았기 때문에 바구니는 금방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