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알던 것들의 의미가 하나씩 하나씩 바뀌어간다. 등교길, 하교길, 공부 시간, 간식 시간, 데오도란트... 졸업식의 의미도 바뀌었다. 이 학교에서 떠나간다는 해방의 의미에서, 이 소년과 함께 맞이하는 또다른 기념일이 되었다. 그것은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무심하고 무뚝뚝하던 그는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무심하지 않았다. 그는 너를 보면서 무엇을 그리고 있을까. 네가 그의 삶을 어떻게 꾸며주었을까.
"다른 건 못 먹겠다며. 우리 간식타임 어떡하냐."
이것은 처음에 많이 먹고 많이 크고 힘내야지! 하던 말에 너무 많이 먹어도 곤란하다고 대답했던 운동부 녀석이 하는 말이 맞다. 덕분에, 너만큼은 아니었지만 끼니 때 먹는 양이 눈에 띄게 줄었던 참이다. 현민은 네가 내미는 마카롱을 보다가, 반만 덥석 깨물어먹는다. 한 입에 다 삼킬 수 있을 만한 크기인데도 굳이 반만 먹는다,
"응, 영화. 외국 영화로..."
하던 현민은, 네가 좋아하는 걸 보겠다는 말에 눈을 깜빡이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뭐라도 보자. 뭐라도 볼만한 게 있겠지.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 같은 것도 좋고. 잠 잘 오게 잔잔한 걸로..."
하며, 그는 너를 따라 함초롬히 웃는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꽤 생동감있는 표정이 걸리게 되었다.
이미 네가 귀여운데 귀엽게 봐주고 말고 할게 없지- 랑은 네가 반입 먹고 남은 반쪽짜리 마카롱을 입에 쏙 넣었다. 톡 꺼낸 말은 시간을 흘러보내기 위해 하는 사소한 잡담처럼 쉽게도 나왔다. 그만큼 당연한 이야기라서, 굳이 숨을 쉬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이미 너로 스며들었기 때문이었다. 반만 남은 마카롱을 오물거리느라 볼이 움직인다.
"...반강제 다이어트?"
그러면서 마카롱을 반 입 깨물어 볼 안쪽으로 밀어넣는다. 다이어트라고 말한 것 치고는 네가 만들어준 간식들을 너무 맛있게 먹고 있는데다가, 이번에는 랑이 먼저 깨문 반쪽짜리 마카롱을 네게로 내민다. 랑이 말해놓고도 다이어트랑은 영 거리가 먼 것만 같아 개구지게 쿡쿡 웃어버린다. 다이어트라고 한들 너는 이미 운동도 하고 있고 식단도 제대로 챙기고 있으니, 하게 될 사람은 랑밖에 없는데- 매일 공부하면서 다람쥐가 볼주머니에 도토리 채우듯 간식을 까먹는 랑이 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다.
"응, 너 푹 자려면- 역사 다큐 볼까? 시험범위 안에 있는거로."
이러다간 쉬려고 보던 거였는데, 무슨 장면이 나올 때마다 랑이 한마디 두마디 툭툭 거들지도 모르겠다. 저거 어제 말해줬었던 부분이랑 관련있는 거야- 하고서 영화 시간이 또 다른 공부가 될 수도 있겠다. 물론 장난이어서, 랑은 금방 다시 말을 덧붙인다.
"잔잔해도, 로맨스는 집중 안 될 거 같아-"
옆에 네가 있을테니까, 이미 네가 랑이 살아가는 인생을 영화라고 할 때 로맨스 장르를 추가해줬기 때문이다.
랑이 : 나도 처음인걸. 랑이 : 그리고 마지막일거야. (방긋) 랑이 : (쓰담쓰담) 랑이 : 난 네가 좋아해주는 거 좋아- 랑이 : 빨개지는 것도 좋아하고, 랑이 : 부끄러워도 뽀뽀 많이 해주는 것도 좋아. 랑이 : 안아주는 것도 좋아하고, 네가 해주는 말도 다 좋아. 랑이 : (현민이 품에 쏙)
네 체중이 불어난다고 너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거나 하진 않겠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자연스레 그 사람의 건강에 대한 걱정도 따라오는 법이다. 네가 쿡쿡 웃어버리자, 현민도 웃는다.
"걱정 마. 혹시 필요하게 되면 내가 책임지고 다이어트 도와줄게. 너는 내 공부 도와주고, 나는 네 건강 챙겨주고."
다만 그 웃음이 조금 꿍꿍이 있는 의뭉스러운 웃음인 건 짚고 넘어갈 여지가 있다. 이건 꼭 네가 현민의 공부를 도와주면서 문제를 어떻게 짜줘야 할까 고민할 때 짓는 그런 미소가 아닌가. 그러면서, 계약 내용이 슬그머니 바뀐다. 너를 한번 선생님에게서 감춰주는 대가로 너와 공부를 하게 됐는데, 한 번 도와준 것치곤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헸다. 그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의 마음에 너무 가까이 닿아버린 것은, 네가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자신도 너를 사랑해주고 있으니 별개 이야기로 두고 말이다.
"아니, 네가 계속 뭐라고 말하면 못 잘 것 같은데. 네 목소리 듣느라."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초콜릿 쿠키 하나를 자기 입에 집어넣고는 네 입가에도 내밀어주었다.
"나도 로맨스 영화는 별로야."
봐도 별 감흥을 못 느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부터 로맨스라는 장르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네가 그의 가슴팍에 떨어지기 전에는 저건 나와 먼, 아무 상관없는, 아무 부질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너와 가까워지고 나서는 네가 안겨주는 뿌듯한 감정 이상의 감흥을 자신에게 주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크린 속의 커플들의 상황을 보고 지금의 서로에게 대입해보는 재미 정도는 있을까.
"만화영화라도 볼까. 디즈니나 지브리 같은 거."
간식이라고 또 엄청 많이 준비해온 것은 아니고 딱 평범하게 2인분으로 준비해 온지라, 간식 도시락은 그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랑은 자신의 키에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높은 곳에 손이 안 닿거나, 같은 옷을 사도 길이가 남들보다 남는다거나 하는 일든 별로 큰 문제가 아니었다. 사다리를 타든 발받침대나 의자를 타고 올라가면 손이 닿고, 남아도는 길이는 접어버리거나 수선을 하면 된다. 랑이 이제서야 키에 대해 조금 불만을 품게 된 건 오롯이 너의 몫이었다. 생길지도 몰랐던 애인과 머리 크기 하나 넘도록 키 차이가 날 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뽀뽀하고 싶을 때 못 한다는게 불만이고, 쓰다듬지 못하는 것도 싫었다. 네가 곧잘 눈높이를 맞춰주고는 했지만 그래서야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네가 전혀 모르고 있을 때 쪽 입 맞추고 싶은데- 랑은 물끄러미 너를 바라본다. 앉아있을 때도 올려다보는 키차이, 네게 폭 안길 수 있는 건 좋았지만 멋대로 뽀뽀하고 싶단 욕심을 덜어낼 수가 없다.
"그건 안 되는데. 그럼 역사 다큐랑 로맨스는 패스-"
초콜릿 쿠키를 쏙 받아먹더니 네 손가락 끝에 장난치듯 쪽 입맞추었다. 입술로 네 손가락 끝부분을 물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 랑은 장난스런 웃음과 함께 아무짓도 안했단듯 쿠키를 오물거린다. 꼭 뽀뽀를 뺨이랑 입에만 해야한다는 규칙은 없으니까- 눈이라도 마주치면 한껏 장난기 어린 눈웃음을 보여줄 것이다.
난데없이 키를 요구하는 말에 현민은 시선을 옆으로 쏙 피했다. 그야, 키야 정신차려 보니 이렇게 크고 있었고, 형은 나보다 키가 크고, 아버지는 형보다 키가 큰 상당한 거인이라. ...그래서 현민은 눈을 피한 채로 눈꺼풀을 꿈뻑이다가 말했다.
"키는 자연히 크는 거라, 아마 더 자라겠지만.. 우리 엄마랑 아빠도 너랑 나보다 키 차이가 큰데 잘 지내시고,"
하다가, 품 안에 쏙 안겨있는 너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려 바라보고는 조금 생각하다가, 아까보다 조금 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네 정도 키면 나쁘지 않은데..."
꼭 안으면 가슴팍에 파묻혀 어깨에 기대어오는 그 순간이 퍽 좋았고, 네가 부르면 고개나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는 것도 퍽 좋아했다. 네가 170센티미터가 넘게 자라도 너는 물론 자신에게 예쁠 것이라는 것을 알고, 변함없이 자신을 사랑해줄 것이라는 것을 알며, 10센티미터가 안 되는 키 차이에서 나오는 순간들도 새로이 사랑하게 되겠지만, 지금의 너도 그만큼이나 사랑스럽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했다. 쪽, 하고 과자를 받아먹는 동작이라기보단 지극히 애정표현에 가까운 동작을 보고 현민은 너와 눈을 가만히 마주치고 있다가, 네가 장난스레 눈웃음을 짓자 작은 쿠키 하나를 집어들어 자기 입가에 가져가면서 네가 물었던 그 손가락 끝을 한 번 수줍게 물었다. ...자기가 해놓고도 부끄러웠는지 귓가가 달아오른다.
그마저도 너는 교복을 입는 날이 드물어서 명찰보다야 바람막이에 입맞추는 일이 더 많을 것 같았다. 삐죽거리며 입술을 내밀었다가 네 품 속에 안겨있는 그대로 머리를 톡 기댔다. 뺨과 머리카락을 맘껏 부빗거렸고 흐트러진다.
"싫어하지는 않아."
눈물자국을 남겼던 곳에서 입맞추는 소리가 난다. 소리만 낸 것 뿐이라 감촉은 없었다. 아까 고백한 것처럼 랑은 네게 사랑받는게 제일 큰 욕심이었다. 네게 마음껏 스킨쉽으로 애정표현하고 싶다는 건 그 다음가는 욕심이겠고, 그렇다면 랑은 제일 커다란 욕심을 부리는 것으로 다른 욕심은 참을 수 있었다. 말했듯 싫은 것은 아니다. 지금 이렇게 폭 파묻혀있는 것도 좋아하고, 내가 바랄 때마다 눈높이를 맞춰주는 네가 얼마나 귀여운지 너는 모르겠지만 랑은 매순간 느끼고 있다. -그래서 네가 말을 돌리게 가만두지 않았다. 랑이 입맞췄던 네 손가락 끝에 네 입술이 닿았는데, 실수나 우연이라기에는 네 귓가가 고의라고 자백하고 있다. 주제를 바꾸고 다른 말을 하는 너를 가만 바라보던 랑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가리켰다.
"여기 있잖아."
볼멘소리였다. 손가락 말고 나한테 뽀뽀해줘- 하는 뜻을 네가 못 알아들을 리도 없고, 랑도 귓가며 뺨이며 화끈 달아올랐다.
시선을 맞추어주는 것 이야기일 것이다. 시선을 맞춰서, 네게 입맞춰주는 것. 그가 자주 하는 일이었다. 물론 굳이 손짓으로 예고 같은 것 하지 않고 깜짝 뽀뽀 같은 것을 날리거나 쓰다듬어주려면 이렇게 현민과 머리높이가 비슷해질 수 있게 그와 나란히(혹은 그의 무릎 위에) 앉아있을 때라거나, 현민이 앉아있을 때 같은 제약이 따랐으니까. 명찰에 뽀뽀해버릴 수는 없다는 네 말에, 네가 무엇 때문에 키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챈 현민은 조금 시무룩해졌다.
"내 키를 줄일 수도 없고."
키가 줄어든다는 것은 다리길이가 짧아진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보폭이 좁아져 스프린트 속도가 줄어든다는 말이니까. 축구의 볼 경합 상황에서 다리가 길다는 것은 무시 못할 어드밴티지였다. 그러나 그가 시무룩해하는 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입에 쿠키 하나를 집어넣었다가 자신의 빨간 귀를 보더니 대뜸 네가 보여온 제스쳐 때문에, 귀에 피어났던 혈색이 뺨으로 와르르 쏟아진 까닭이다. 좋아한다. 행복하다. 그렇지만 아직 그게 쑥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병을 앓는 것 같았다. 아마 나는 죽을 때까지 너를 앓으려나 보다, 하고, 현민은 생각했다.
"그래, 이렇게."
가볍게 손짓만 해도 알아듣는데도 네가 키 탓을 하는 건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현민은 네 손짓에 반응해버리고 만다. 너를 달래어주는 것도 달래어주는 것이지만, 이런 스킨쉽을 그라고 싫어하거나 꺼려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너만큼은 좋아할 것이다.
다시 한 번, 질긴 입술이 따뜻하게 네 입술 위에 조심스레 와닿았다. 아즉 수줍고 아직 서툴지만, 그래도 그 온기는 진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