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 버리면 돌이킬 수 없다 만들어 버리면 돌이킬 수 없다 우리 인간들은 그런 생물이므로, 창작이라는 저주는 분명 곁에서 떠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걸로 됐다, 라고 까지도 나는 생각한거다
※ 본 스레는 17금 수위를 기준으로 합니다. ※ 수위가 과하다고 생각 될 시 1회 경고 후 시트가 즉각 내려질 수 있습니다. ※ AT필드(따돌림)를 절대적으로 금합니다. ※ 어두운 세계관이지만 밝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 서로 서로 인사합시다. ※ 아리송한 부분이 생기면 캡틴에게 질문합시다. 물지 않아요!
1. 본 스레는 놀기위해 오는 거다 공부는 필요 없다. 2. 일상 중 불편하게 느낄 것 같은 사항이 있다면 사전 조율한다. 3. 본인이 뭐가 아니라고 느껴지면 웹박으로 쏘거나 넌지시 그리고 확실하게 상대에게 전달한다.
만일 페로사가 그를 비난했다면, 프로스페로는 분명 소리 없이 절망했을 것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더럽히기 위함이 아니다. 무의식적인 기저에는 그러한 의도가 잠재되어있음이 분명하다, 표층으로 떠오른 것은 빌어먹을 희곡들이다. 선인은 치하받고, 악인은 벌을 받으며, 숲이 움직이고, 어미가 낳지 않은 아이가 왕을 죽이는 무수한 순간들. 그러니 내게 순수한 정의를 보여주시오. 나 같은 것은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할 순결성을 지닌 그것을 직접 두 눈으로 목도해야만 단념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음 편히 악해질 수 있겠다. 세상의 멸망을 빌 수 있겠다. 그런 후에는, 죽어도 좋다. 파란 하늘을 눈 시리게 담고, 원없이 광인의 웃음을 지으며 죽겠다. 내가 내뱉는 저주 따위에는 흠집도 나지 않을 하늘 아래서...
그리고 페로사는 그 정의가 될 수 없다. 당연하지만, 당신도 피와 살을 먹으며 자라났으니까. 그저 자신보다는 조금 더 인간 탈 쓰는 것에 익숙해 보일 뿐이다. 프로스페로의 시선에는 그러했다.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딸각거리는 소리를 반복해서 냈다. 딸각, 딸각, 딸각. 정확히 세 번 이후에 빛나는 식물에 시선 두었다. 빛나는 것은 식물이 아니라 전등이지만은 취한 이에게 그런 것 그다지 중요치 않다.
"...마약 탄 술만 아니면 돼, 바텐더 양반."
구불거리는 서명이 종이 위에 내려앉았다.
"난... 이런 말 하면 기분 나쁘려나... 아니, 상관없나... 신경쓸 것도 아니지. 당신하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목숨 걸고 하는 거라고. 여기서 뭐, 더... 위험 부담 진다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어."
역시 당신 앞에서 말을 너무 많이 했어. 잊어야 쓰겠다.
"그래도 마약은, 응.. 그 여자가 좋아하던 거라... 지금은 좀 멀리하고 싶으니까. 마약은 타지 마.."
맞아. 오늘은 매우매우 드라이한 날이야. 얼마나 드라이하냐면 장난 아니게 드라이한 날이라서 제습기가 필요없을 정도야. (?) 그래서 그런지 목이 좀 자주 마르더라구, 오, 캡틴도 일상 하기엔 조금 늦은걸까? 그럼 오늘은 일찍 잔다는 것? 뭐지? 자러간다 해놓고 자러가지 않고 심연에서 지켜본단 뜻인가? 오오 심상치 않은데? (??)
>>82 흑흑, 그럼 우리의 비밀친구(?) 이야기는 아무것도 아닌거구나. 흑흑. 빨간 슈퍼챗도 사실은 평범한 팬심에 지나지 않았구나. 흑흑. 제롬이와 캄파넬라를 만났으니 이제 이리스와 로테까지 만나서 제롬이와 로테의 예쁜 웨딩픽쳐를 그려주고 말거야. 흑흑, 그런 선물 받는다면 절대로 행복해지겠지. 평생 행복해져라, 커플녀석. (??)
브리엘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여전히 들고 있는 자료에 고정하고 있던 구리색 눈동자를 비스듬히 움직였다. 커피가 앞에 놓여졌지만 잔에 손을 대는 것보다 관자놀이를 느릿하게 문지르는 걸 먼저했다. 테이블 위에 이것저것 올려지는 걸 잠깐 바라볼 뿐, 브리엘은 무감한 태도를 고수한 채였다. 아스타로테가 그런 사람이듯, 브리엘도 그런 여자였다. 초콜렛 향을 머금은 커피가 사실은 쓴맛이 진해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커피일지라도 손을 대지 않고, 커피와 곁들일 쿠키와 초콜렛이 있더라도 자신이 즐기지 않는 이상 거들떠보지도 않는.
"커피에서 단향이 나는 건 싫어해서."
J가 입을 열기도 전에, 브리엘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건조하고 메마른, 냉정하기 짝이 없는 어조였고 J는 자기 앞에 놓여진 커피에 우유를 붓다가 쓴웃음을 잠깐 지어보였다. 눈과 눈 사이를 누르던 손을 내린 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던 브리엘은 아스타로테와 시선이 마주치자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비켜냈다. 약물로서의 관점과 상품으로서의 관점이라고? 몇장을 더 넘기면서 자료를 훑어보던 브리엘은 자료의 마지막 장을 읽어내려가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브리엘은 곧 그것을 J에게 건네줬고 그 부분을 읽은 J의 표정도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이건, 그렇게 좋지 못하네요." "결국에는 사람을 죽게 만드는 약물을 사용할 곳이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해? 약 한번에 사람 한명의 목숨이야. 보스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이게 상품화가 되지 말아야한다는 입장인데. 그래서, 이걸 만들어달라는 헛소리를 할 생각으로 부른건 아닐테지?"
요양원 '실버 불릿'은 과거 셰바에서 이름을 떨쳤던 잔재가 이제 재가 되어 사라지고 안식을 찾길 기다리는 장소로, 무슨 죄를 저질렀어도 늙고 돈만 많다면 철통같은 보안으로 목숨을 지켜주는 든든한 곳이다. 하르트만 디트리히도 실버 불릿의 일원이다. 그는 불과 13년 전만 해도 셰바에서 이름을 떨치던 노장 중 하나였다. 셰바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무기 로비스트 중 하나였고, 그로스만 패밀리의 위대한 명성을 떨쳐 그 요제프 그로스만에게 직접 그로스만이라는 성을 하사받은 사람 중 하나였으며, 도살자의 서커스의 큰 손중 하나기도 했다. 비록 13년 전 요제프 그로스만이 불의 마녀의 손에 죽게 된 이후, 그로스만 패밀리가 몰락했지만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목숨을 부지한 것이 어딘가? 현재는 요양원에 온 지 10년이 지났다. 그는 이곳에서 썩어가는 동안 늙는다는 일이 얼마나 즐겁지 않은지를 여기서 확실하게 느끼고는 했다. 곧 여든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르트만은 저기 헝클어진 머리와 목욕 가운 차림으로 복도를 질질 걸어다니거나, 흔들의자에 하염없이 앉아있는 늙은이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그는 이 나이까지 살면서 노인병이라고는 일절 모르고, 여전히 총을 쏠 수 있는 건강한 체질을 가진 사람이며, 과거의 야망이 이따금씩 고개를 내비치고, 지금은 그 야망이 그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불타오른다. 5년 전 유일하게 남아있는 그로스만의 핏줄이 그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안토니가 그가 제일 좋아하는 위스키를 들고, 요제프가 끼던 반지를 엄지에 끼고 찾아왔을 때, 그는 도살자의 서커스에 발을 처음 들였을 때 이후로 단 한 번도 느낄 수 없었던 희열과 열망을 다시금 느꼈다.
그는 요양원에 썩어있던 10년의 세월 동안 포기할까 하는 생각을 한 만큼이고 불타올랐다. 그는 은둔자였고, 야망을 펼칠 수 없었다. 세월의 흐름에 몸을 맡겨 늙어갈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가 몰락의 순간 수집품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 불타오르던 열망이 사그라들어 아마 저기 있는 늙은이들과 다를 바 없이 흔들의자에 앉아 붉은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정정했고, 패를 쥐고 있었으며, 그 혈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흔쾌히 그로스만의 핏줄을 돕기로 한 것이다. 다시금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고, 이 땅에서 나는 피비린내를 맘껏 맡고 싶었다. 그는 안락한 의자에 파묻혀 과거의 영광을 떠올렸다. 25년 전 죽은 아내의 얼굴도, 13년 전 죽은 아들의 이름도 가물가물하지만 그때의 순간만큼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는 도살자의 서커스에서 퓨리오사의 경기를 보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 그것이 자비를 갈구했지만 전광판에 뜨는 표식에 절망에 어린 표정을 지을 때 어찌나 즐거웠는지! 그뿐만이 아니다. 남은 시체로 경매를 할 때면 저것의 눈알을 내가 사겠다 외치던 눈알 수집가도 기억이 난다. 그리고 모든 경기가 끝나면, 외전 격 경기인 인형의 춤이 그렇게나 즐거웠다. 특히 서커스 단원을 모아놓고 조롱의 의미로 그 싸움을 보여주던 것이 끝내줬다. 그깟 짐승들과 달리 귀하디 귀한 옷과 보석으로 치장하며 무기로도 쓸 수 없던 과거의 병장기를 든 인형들이 전장에 있고, 관중석에 그 녀석들을 몰아두고 봤을 때 느꼈을 박탈감은 과연 어땠을까? 그는 잿빛 승냥이의 얼굴을 아직도 기억한다. 취향 독특한 녀석의 수집품으로 자라 눈 한쪽 공막이 검은색으로 물들여진 녀석은 기이한 옷을 입곤 했다. 나슬나슬하니 반투명해 속살이 비칠듯한 비단옷과 구릿빛 피부에 피가 튈 적이면 많은 고위 간부진이 환호했고, 마침내 죽일까 싶은 순간이 오면 짐승과 달리 앞다투어 무한한 자비를 요청할 때, 분노에 젖은 짐승들의 표정이 볼만했다.
그런 잿빛 승냥이와 달리 짐승들마저 눈을 찌푸리게 하는 건 다름 아닌 요제프의 애첩이었다. 단연 많은 수집품 중에서도 으뜸이라 손을 뻗고 싶은 것 중 하나였다. 그 또한 특혜로 손을 뻗긴 했지만 모종의 사고 이후로는 도통 손댈 수 없었으니 원. 애첩은 옷차림부터 파격적이었다. 다른 녀석들이 보석과 비단으로 휘감았다면 그것은 그로스만 패밀리와 다를 바 없이 정장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따금씩 달라붙는 옷을 입히면 눈길을 떼질 못했다. 그것에게 지금은 써봤자 우스갯거리나 될 무기를 쥐여주면, 말 그대로 날아다녔다. 사모를 쥐고 손, 발.. 마침내 수집품의 목을 정확하게 빗겨 꿰뚫을 때면 짐승들도 표정을 찡그렸다. 애첩은 처형자였고, 쓸모없는 인형을 본보기로 죽였다. 그 순간만큼은 짐승들도 언젠간 저렇게 될까 숨을 죽였다. 그는 나풀거리는 흰옷을 입고 요제프의 품에 돌아가는 애첩의 얼굴을 떠올렸다. 참 사랑스러웠지. 요제프의 허벅지에 고개를 뉘고 눈을 내리감는 모습이 전광판에 비치곤 했다. 커다란 손이 피에 젖어 번들거리는 애첩의 뺨을 문지를 때면, 그 뺨을 깨물어 보고 싶다 생각했다. 열감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복숭아 같았기 때문이다. 그 녀석의 이름이 뭐였더라? 에즈라? 크리스티나? 쉬에? 요루히메? 아랑? 늙어서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여하간 독특한 이름이긴 했다. 독특한 이름만치 독특한 직위를 가져 승냥이와 함께 기억에 남았다. 아, 찬란하던 나의 과거여.
"어르신."
수행원이 부르는 소리에 하르트만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르트만의 수행원이자 수집품인 연 지다. 그는 잿빛 머리카락에 키가 컸고, 튼튼한 몸으로 늙어빠진 여인들의 눈을 즐겁게 해줄 인상이다. 비록 몰락하기 이전에 도망 쳐버린 요제프의 애첩이나, 몰락 당시 처형자를 맡으라는 지시에 여럿을 죽이고 자결한 잿빛 승냥이만큼은 아니지만 무력도 나름 쓸만한 녀석이었다. 그는 그로스만 패밀리가 몰락할 당시 이 쓸만한 녀석을 도망치지 못하게 잡았다. 그리고 공포와 자비로 훈육한 결과 그는 하르트만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며 유일하게 남은 그로스만의 핏줄의 뒷받침을 한다. 그가 요양원 밖으로 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말을 대신 전해주고, 각종 자금의 연결줄을 대어 준다. 만약 수집품이 아니었다면 그의 성인 디트리히를 줬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직도 못 찾았나?" "예.." "한심한 녀석.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지!"
수집품은 쓸만하지만 문제라면 그의 손자, 그레이 디트리히다. 눈앞에서 아비가 총을 맞아 뒤진 게 원인인지, 녀석은 총을 무서워했고 온실 속 화초보다 더 유들유들하게 컸다. 명색이 무기 로비스트 집안의 녀석인 주제에 총보다 책을 더 사랑하고, 칼로 사람 대신 요리 재료를 썰었다. 사람이 총 맞고 죽을 수 있는 거지! 하르트만은 손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 셰바에서 바깥 놈을 흉내 내려는 것 같아 수치스러웠다. 그레이는 앤빌의 바텐더의 섬세한 미각을 존경한다고 했다. 자신도 그런 바텐더처럼 누군가의 입을 즐겁게 하고, 고민을 들어주며 어느 때는 조언을 하며 음식으로 위로하며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들었을 때 그는 저기 있는 늙은이들처럼 진이 쭉 빠져버렸다. 그런 물에 끓인 청경채 같은 놈을 어디에 쓰나 고민했고, 그는 그로스만의 유일한 핏줄에게 디트리히의 성을 빌려주며 그레이를 억지로 합류시켰다. 억지라고 해도 효과는 있었다. 괴롭다고 토로한다지만 그 피가 어디 안 갔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여놓고 괴롭다 토로해 봤자 조금만 더 물들면 그처럼 즐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녀석이 대뜸 도망을 쳤다. 사건의 발단은 발렌타인 데이 하루 전, 13일이다. 그레이는 하르트만이 좋아하던 럼 초콜릿을 가져왔다. 어디서 났느냐 묻자 한참을 다물고 있다 직접 만들었다지 뭔가! 그리고 다시금 장황한 꿈 얘기를 꺼내려 들길래 호통을 쳤다. 그리고 연락이 끊겨버렸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제 할아비를 그렇게 좋아해서 하루에 한 번 연락하던 녀석이 하루 정도 연락하지 않는 것을 이해했다. 그도 너무 심했나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지는 하르트만의 안색을 보더니 잔에 둥근 얼음을 넣고 위스키를 따랐다. 그는 잔이 채워지기가 무섭게 잔을 몇 번 흔들고 위스키를 쭉 들이켰다.
"어르신. 걱정하지 마시지요. 작은 도련님께서 시간이 필요하신 것일지도 모르니.. 곧 오실 겁니다. 그리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련님과 만난 사람을 수소문 끝에 찾아 로비에 데려오긴 했는데, 안으로 모실까요?" "그걸 왜 이제 말하지?" "경호원과 동행하지 않는다면 만나지를 않겠다 해서……." "찔리는 면이 있나 보군. 같이 데려와. 제까짓것들이 여기서 뭘 할 수 있을거라 생각 하지? 반항하면 팔다리 하나 정도 부러트려." "알겠습니다."
지가 로비로 내려가자 하르트만은 잔에 다시금 위스키를 따르고 다시금 들이켰다. 그레이가 없으면 안 된다. 그로스만의 후계자가 크게 다친 상황에서 사지 멀쩡한 그레이가 조직의 조율을 해야 적당한 자리에 앉고 심지를 굳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녀석이 대체 어디로 갔는지! 집에도 없고,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한다. 납치를 당했다면 언질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다. 하르트만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실버 불릿의 자랑인 붉은 하늘이 비치는 큰 유리창 너머를 바라봐도 그의 손주는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어르신, 도련님을 마지막으로 뵌 미네르바의 부엉이입니다."
지의 옆으로 작은 체구의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둘의 키는 비슷했고, 소개받은 사람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다리가 부러지지 않은 걸 보니 허락을 받고 냉큼 따라온 것 같다. 부엉이라고 불린 사람은 가면을 쓰고 헐렁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그 뒤로 내려갈수록 보라색이 되는 파란 머리카락을 요란하게 땋고, 검은 눈동자를 가진 동양인 여성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서있었다. 아마 저게 경호원일 것이다. 별것도 아닌 것을 경호원으로 뒀으면서 으스대는 꼴이란. 셰바도 이제 쇠락한 것 같았다.
"서로 간의 신뢰가 없지만 일방적인 예의는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죄송하지만 제 신상은 공개하지 않는 게 원칙이라서요." "머리가 날아가기 전까지 누구나 신비롭게 보이고 싶다고들 하지. 내가 늙었다고 해서 사격 실력이 어디 가지는 않았네." "Mist!"
그리운 울림이 들려 하르트만은 부엉이에게 시선을 꽂았다. 지가 총을 꺼내자 그리운 발음으로 다른 욕설도 뱉더니 가면을 덜컥 벗고 후드를 내렸다. 부엉이는 이상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어떤 색도 섞이지 않은 선명한 꿀 빛 금발, 짙은 푸른색 눈동자.. 그리고 흰 피부. 조금만 잘 먹고, 키만 컸더라면 완벽한 인상이었을 것이다. 그리운 발음을 듣고 나니 개인적인 흥미가 생겼다. 하르트만은 거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라 했나?" "…네." "내 손주를 마지막으로 본 게 너라던데." "잠깐, 잠깐만요."
부엉이는 손사래를 쳤다.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 얼굴에 가득했다.
"손주가 대체 누구죠?" "내 수행원이 설명했을 텐데?" "음, 그게.. 죄송하지만 대뜸 같이 동행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만 했거든요. 제가 만나는 손님도 많고.."
하르트만의 표정이 구겨졌다. 지는 자연스럽게 뒷짐을 졌다. 동양인 여성이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부엉이의 뒤로 숨었다. 부엉이는 괜찮다는 듯 어깨 위에 올라온 손등을 툭툭 손바닥으로 몇 번 눌러줬다. 저런 것을 경호원으로 두다니! 쓸만한 녀석이라도 붙여줘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르트만이 지를 쏘아봤다.
"지." "죄송합니다, 어르신." "네 손님이 아닌 내 손님이다. 무례를 저질렀다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알겠지."
지는 품에서 칼을 꺼내 협탁 위에 올려뒀다. 잠시간의 정적 이후로 자신의 손바닥에 칼을 강하게 내리꽂자 경호원이 눈을 크게 떴다. 지는 익숙한지 신음을 삼켰다. 잠깐 바라본 부엉이는 놀란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담이 강한 면도 마음에 들었다. 경호원도 이제 보니 눈만 크게 떴지 이 장면이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되는지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셰바 사람은 맞는 것 같았다. 하르트만은 얼음이 조금 녹은 위스키를 들이켰다.
"내 수행원이 무례를 저질렀군. 내 손주는 그레이 디트리히라 하고, 자네도 알 거라 믿네. 자네가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라고 하더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똑바로 설명해 주면 좋겠네." "아..! 그라우요? 잠시만요.."
부엉이는 머쓱한지 머리를 배배 꼬았다. 위스키 잔이 놓인 협탁은 지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피가 고였고, 흔들의자는 비싼 값을 하는지 삐걱대는 소리도 내지 않았다. 잠시간의 정적 뒤로 부엉이가 진술했다.
"별거 없었어요. 저랑 그라우는.. 좋은 친구거든요! 토니를 도와주는 동안 대금 지불은 걔가 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어디 보자. 요 며칠 전에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한테 고백하고 싶다고 하니까 초콜릿 만드는 걸 도와줬어요. 평소에도 자주 만들었거든요. 그때가 언제였지? 13일 아침이었나? 그라우는 럼 초콜릿을 만들었고, 저는 딸기 초콜릿을 만들었어요. 그 이후로는 몰라요. 서로 잠깐 커피나 한 잔 마시다가 헤어졌거든요." "내 손주가, 초콜릿을 만들었다고? 평소에도?" "네. 그러면 안 돼요? 맛있던데."
럼 초콜릿을 만든 건 그레이와 자신, 그리고 그의 수행원인 지만 아는 사실이다. 적어도 부엉이가 거짓 증언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와중에 초콜릿을 만들었다는 것이 기가 찼다. 하르트만은 더 파헤칠 것도 없겠다고 판단하다,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 얼굴을 어디서 아주 많이 본 기억이 있다. 요제프의 애첩과 함께 자주 봤기에 낯이 익는 상이었다. 둥근 두상, 오똑한 코, 높이 뜨인 속눈썹……. 그의 늙은 감이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해 보라 소리쳤다. 하르트만은 가지 말라는 듯 손을 들어 부엉이를 제지했다. 지가 잽싸게 손등의 칼을 뽑아 겨눴다.
"우리, 본 적이 있나?" "어……. 아뇨, 초면인데요?" "자네 부모가 셰바 사람인가?" "아뇨! 전 바깥에서 왔어요." "바깥?"
부엉이는 잠시 주변 눈치를 보다 실실 웃었다. 그리고 엄지와 검지를 붙여 원을 그리더니, 익숙하다는 듯 벌린 입가에 가져다 대곤 혀를 쭉 내밀었다. 선명한 혀가 넓적하게 펴졌다. 눈을 휘어 웃는 모습이 여우 같았다. "제가 부모를 잃었거든요! 할 줄 아는 거라곤 이거랑 자판 두들기는 재주뿐이라, 뭐.. 높으신 분들 대접하면서 밥 벌어먹고 살다가 스캔에 딱 휘말려서. 그 뒤는 아시죠? 팽 당하기 전에 튀어 쳐왔죠 뭐." "저런, 위대한 아리아인이 그러면 쓰나." "에이, 셰바로 오는 사람들이 다 그렇잖아요? 그래도 손주분은 안 건드렸으니 걱정 마세요." "가보게. 내 나중에 또 부를 일이 있으면 이번엔 상냥하게 연락하도록 하지. 수고 많았네." "옙! 어르신도 건강하십쇼! 가자, 자스민!" "가, 같이 가!"
축객령에 부엉이는 사지 멀쩡하다는 사실에 신이 난 듯 가면을 뒤집어쓰고 경박하게 양로원 복도를 뛰었다. 하르트만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아니겠지. 하고 한 번 중얼거리고는 얌전히 칼을 거두고 무릎꿇는 지를 내려다봤다. "…오늘 일은 자비롭게 넘어가도록 하지."
미카엘은 건물을 나서고 골목으로 들어서자 미행이 붙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꽤 귀찮은 양반이다. 하는 수없이 마오를 끌어안고 뺨을 쓸었다. 속으로 수십 번 성호를 그어대며 기도했다. 이건 바람이 아닙니다, 마오랑 저는 옷도 갈아입은 사이지만 일단 친한 친구입니다. 내가 얘랑 바람을 피우니 차라리 어제 먹던 초콜릿에 환각제가 들었다는 게 더 타당한 주장일 것 같습니다……. 가면을 슬쩍 들어올려 고개를 기울이자 미행도 전부 떨어져 나갔다. 어린 것들이 벌써부터 발랑 까졌다고 보고할 것이 뻔했다. 마오가 주변을 살피다 입술을 벙긋댔다.
"갔어, 부엉아." "아.. 죽겠네."
마오는 가발을 휙 잡아채 벗더니 물기를 터는 개처럼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미카엘도 가발을 벗으며 짙은 한숨을 쉬었다. 진이 쭉 빠졌다. 요양원의 구조도 알아냈고, 주요 전력에게도 피해를 입혔다.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신뢰를 주면서 의심에서도 벗어났다. 한꺼번에 많은 일을 해냈는데 이제 며칠 뒤면 그레이를 용궁에 바쳐야 한다. 셰바에서 보기 드문 온실 속 화초 같은 사람이지만 핏줄을 잘못 타고났으니, 따질 거면 곧 죽을 제 할아버지에게 따지면 되겠지. 미안한 감정은 이미 저 멀리 집어던진지 오래다. 마오는 컬러렌즈를 빼며 물었다.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었다.
"그 할아버지 뭐야? 마오 엄청 이상한 느낌이었어." "..무슨 느낌?" "말하는 것도 그렇고, 혼내는 것도 그렇고. 따거랑 닮았어." "지배자들이 다 그렇지 뭐." "그런 거야?" "응." "그리고 아리아인이 뭐야?"
미카엘은 가면을 아예 내팽개치듯 벗고는, 컬러렌즈를 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겨울 색 눈동자가 드러났지만, 그 주변이 벌써 충혈돼 그렇게 예쁘지는 않았다. "인공눈물 있어?" 마오는 대답을 듣기 전 주머니에서 인공눈물을 꺼냈다. 미지근하지만 이 정도면 눈에 들어가도 이물감이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미카엘은 손바닥 위에 한 방울을 먼저 떨어트리고, 이내 눈에 능숙하게 인공눈물을 넣으며 답했다.
"죽으면 관짝 들어가는 건 전부 똑같은 사람들이 급 나누려고 만든 종족." "그럼 나쁜 거야?" "나쁜 말이긴 하지만 결과가 나쁘지는 않았어.."
평소보다 과한 양을 넣어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벌써 하나를 다 썼지만 눈이 한결 편했다. 허공을 올려다보며 눈을 몇 번 깜빡이던 미카엘은 비웃듯 한쪽 입술을 틀어 올렸다. 아리아인 취급을 받아 신뢰를 얻기 위해 렌즈에 가발까지 쓰고, 어머니가 가끔 쓰던 욕설을 다시금 뱉을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을까?
"여전히 아리아인을 언급하고 좋아하는 늙은이라면 답은 하나거든.. 아무리 그로스만의 노장이나 노괴라고 불려봤자네." "죽을 사람이라는 거지?" "잘 아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인데, 부엉아, 아까 그건 뭐야?" "뭐가?"
미카엘은 고개를 내렸다. 눈물 자국이 남자 소맷단으로 거칠게 벅벅 문질렀다. 마오는 미카엘이 했던 것처럼 따라 하듯 검지와 엄지를 붙였고, 미카엘은 그 모습을 보자 잽싸게 마오의 손목을 붙잡아 저지했다.
"……어.. 네가 배우면 안 되는 거." "따거도 이거 가끔 보여줬거든. 기깔나다고도 했어. 뭐야?" "나는.. 전혀 알고 싶지 않았어. 알고 싶지 않았.. 마오, 아무리 네가 존경하는 그 양반이 그랬다고 해도 너는 배우면 안 돼. 알겠지?" "응!! 알았어! 연 사형도 그 말을 하더라고.. 안 배울게!" "그래. 끝까지 모르자. 외숙부 상태는 어때?"
미카엘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마오는 미카엘의 속도 모르고 사랑스럽게 미소를 짓더니, 이내 복장을 박박 긁고 뒤집는 한 문장을 뱉었다.
"그러니까- 나쁜 말로! 존나 빡치셨어." "…왜?" "어제 투기장에서 상품끼리 싸움이 나서 8천만 벅이나 하는 상품이 죽었거든!
미카엘은 아까 흘린 인공눈물이 오늘 흘렸어야 할 눈물이었다 직감했다.
"그리고 연 사형이 무릎을 꿇었어!" "Jesus……."
유감스럽게도 미카엘에겐 그로스만을 뒤엎을 재주와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으나 세상은 미카엘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재주가 있었다.
"안 무거─" 여기서 잠깐 페로사는 당신의 몸을 쓱 훑어보았다. "─워." 애욕이라거나 하는 게 아니라, 당신의 마른 체격을 볼 때면 페로사가 늘 띄우곤 하던 그 걱정이 잔뜩 어린 시선으로. 아마 또 당신의 염려되는 저체중과 저조한 식생활에 또 생각이 닿은 모양이다. "항상 말하지만 넌 사람치곤 엄청 가벼운 편이야, 달링." 하며 당신을 쓰다듬는 손길에는 안타까운 기색이 있다.
"마음에 드냐니." 페로사는 손을 뻗어, 당신이 조금 더 가슴팍에 머리를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주었다. "새삼스러운 말을 하네." 당신이 그녀에게 있어서 마냥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이기를 바라는 염원은 어긋나거나 빗나가지 않은 모양이다. 이 키큰 여인은 어떤 거부감도 없이, 아이 같고자 하는 당신을 사랑해주기로 했기에. 아직 당신이 내어보이지 않은, 당신의 다른 모습들까지 모두 다.
"가만, 봐왔다니?" 그녀는 당신의 말에 눈을 깜빡이며 잠깐 뭘 봤다는 거야? 하고 회상에 잠겼다. 그리고 자신이 바에서 종종 자기가 좋아하는 주전부리들을 냠냠 집어먹는 모습을 꽤 많이 보여주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너..." 페로사는 푸후후 하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분명 첫만남은 한쪽의 머리통이 날아갈 뻔한 험악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걸까. 그날 이후로 앤빌에 드나들면서 당신은 얼마나 자신을 눈에 많이 담아온 걸까. 새삼 페로사는 자신이 이 광기의 도시 한가운데서 제일 정도가 심한 광기에 손을 대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정말이지, 내 어디가 좋아서─" 페로사는 눈웃음을 지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당신과 이 여인 사이에 붙이기에 그건 의미없는 군소리나 감탄사 비슷한 것이라는 걸 당신도 잘 알지 않는가. 그래서 당신은 그녀의 말문을 조용히 막았다. 그녀의 입을 손이나 다른 무언가로 틀어막을 필요도 없이, 효과적으로. 그녀가 입을 연 것은 당신이 그녀의 이마 위로 흘린 말이 끝나고도 조금 뒤였다.
"─날 좋아해줘서 고마워." 하고 페로사는 웃었다. 당신의 목 위로 따뜻하고 말랑한 게 꾸욱 와닿는 게 느껴졌다. 아직도 당신의 목에 멍이 남아 있으려나. 당신의 목에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 자신만이 남긴 자국이 남기를 바랐다. 감히 모든 것을 바라지는 못했지만, 가장 소중한 부분은 자신이 가지고, 자신이 채워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녀는 당신의 목에 얼굴을 기댔다.
>>161 엣 이미 묻었는데 (데엥) 다시 파내야겠다 (파바박)(의도치 않은 흙뿌리기) 별 건 아니고 앞서 다른 캐들한테도 했던 질문이지롱.
에만이, 그러니까 미네르바의 부엉이에게 어떤 정보를 셰바 내의 네트워크에 확신시켜 달라는 의뢰를 받았을 때. 에만이의 행동과 생각은 어떨지? 어떤 정보란 직접적으로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조직의 수장인 여자의 과거사가 더럽다느니 추하다느니 하는 조잡하고 악의적인 내용들이야. 이 의뢰를 받기 전에 바깥에서 비슷한 혹은 좀더 구체적인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걸 에만이는 알고 있었을 수도 있지.
정보 확산 정도야 에만이에게 가장 쉬운 일이지만,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걸 알았다는 가정 하에 아스타로테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보내지 않았을까 싶어. 아무래도 가장 첫 손님이었기도 하고 친구기도 한데.. 일단은 연락을 취해서 '이런 의뢰가 있었다. 덮는 것도 한순간인데 어떻게 해줄까?' 라고 했을 걸. 의뢰는 의뢰니까 수행하겠지만 최대한 위력이나 확산 속도를 늦추려 들 거고. 이건 에만이 모먼트고...🙄 한편으로는 미카엘의 시점에서 봐서 아스타로테가 과연 이걸 모를까? 싶기도 할 거야. 지금까지 봐온 아스는 유능하고 멋진 사람이니까 >;3
.oO(큰 그림 그리나. 세력 확장인가? 아니면 뭔가 다른 목표를 노리는 건가? 가만히 놔둘 성격이 아닌데?) 하고 생각하지 않을까..😳
여인은 브리엘의 냉정한 말에 아쉬운 듯이 중얼거렸으나. 그마저도 즐기는 듯한 표정이 말과 어울리지 않아 제법 볼 만한 부조화를 그려내었다. 자리만 아니었다면 벌써 한참을 키득대고도 남았겠지. J의 쓴웃음을 보곤 그리 신경쓰지 않는다는 의미의 미소를 지어보이기도 했으니.
브리엘과 J가 번갈아 마지막 장을 확인하는 동안. 시선이 마주치자마 재빠르게 다른 곳으로 돌려버리는 모습이 귀여워보인다고 하면 당장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나. 그래도 한 번은 말해보고 싶은데. 같은 이 자리에 하등 쓸모 없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여인은. 입 안에 담은 초콜릿을 느긋하게 녹여내고 혀로 뭉개어 다 녹은 잔해를 천천히 목구멍으로 흘려보내며. 그 위에 약간 식은 커피를 머금자 새로이 피어나는 향을 음미하면서.
되돌아 온 물음에 답을 한 건 커피를 두어 모금 더 넘긴 후였다.
"메스질 한 번에 사람 목숨 하나인 도시에서, 고작 약 하나가 더해질 뿐인 것을. 꽤나 인간적인 감상을 내놓는구나. 그래. 그런 사람이었지."
정확히 브리엘을 향한 여인이 짙고 선명한 조소를 만면에 피워내었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꽃 처럼. 깜빡. 눈짓 한 번으로 언제 그랬냐는 듯 그늘을 지운 여인은 소파에 등을 푹 묻고 다리를 슥 꼬았다. 의도적임이 분명한 행동에 긴 치마의 트임이 넒게 벌어져 새하얀 허벅지를 아슬아슬한 범위만큼 드러내었다. 그 위에 사뿐히 손을 올려 겹쳐 두고. 토도독. 하고 손짓을 한 여인이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엘. 너도 알다시피. 나는 일에 관해서는 헛소리를 하지 않는단다. 그러니 네가 예상한 말은 하지 않겠으나. 다른 말은 할 거야. 너희 카두세우스에게 그 약의 위탁 판매의 거래를 제안하는 것을."
이건 예상 못 했지. 라는 장난스러움이 얼굴 위 미소에 살짝 스쳐 지나갔다.
"물론 판매를 맡길 약은 안전한 쪽의 약이란다. 추가 가공된 쪽의 약은 어디까지나 그런 효능도 끌어낼 수 있다, 라는 실험의 결과물일 뿐. 그런 극적인 물건은 나도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지. 그럼에도 그것을 보여준 건 너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서 그랬단다. 앞서 말했듯이."
웃는 얼굴로 말을 잇던 여인이 대기 중이던 로노브를 향해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그러자 로노브가 소리 없이 움직여 테이블에 종이 한 장을 올려놓았다. 얄팍하고 반듯한 종이 한 장에 적힌 내용들은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1. 라 베르토는 달에 1회. 일정량의 DnD(몽중몽)을/를 카두세우스에 전달한다. 2. 카두세우스는 다음 보충일까지 DnD(몽중몽)을/를 판매해 정확한 수익을 창출한다. 2-1. 기간 내 전량 판매하지 못 하였다면 잔량의 대금은 카두세우스가 치르도록 하며 이후 잔량의 소유권은 카두세우스에게 있다. 2-2. 판매량과 매출의 확인을 위해 DnD(몽중몽)의 판매 장부를 매 월 라 베르토에게 제공한다. 3. 수익 배분은 6 : 4. 라 베르토 : 카두세우스로 한다. 4. 수익 배분의 비율만 지킨다면 약의 가격에 카두세우스의 임의 변동을 허한다. 4-1. 라 베르토가 요구하는 최저가 미만은 불허한다. 5. 약의 제조 및 출처는 고객에게 발설치 않고 함구하도록 한다. 5-2. 의도적 유출이 확인되었을 경우. 라 베르토 측에서 카두세우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계약서의 초안으로 보이는 내용이 담긴 종이를 내어놓은 뒤. 여인은 그것 역시 충분히 읽고 생각하라는 듯 새로운 초콜릿을 집어 입술 사이로 밀어넣었다.
쓱 훑는 시선에 시선을 살살 피한다. 걱정이 잔뜩 어린 시선에 괜히 시선을 피해도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요즘엔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조금만 무리해도 속이 받쳐주지 못해 게워내기 일쑤지만 요 며칠 전에는 커피 한 잔에 조각 케이크 반 조각을 먹는 것에 성공하지 않았던가. 고체를 제대로 삼킬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아랫입술을 비죽 내민다. "그래도 노력하고 있는걸." 달링이라는 애칭에는 괜히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이대로 가다간 자아와의 싸움이 밑도 끝도 없어진다.
머리를 기울이자 긴 머리카락이 한 타래 쏟아진다. 쏟아진 머리에 잠깐 시선이 머물렀다. 고작 5년 짧은 머리로 살았다고 벌써 이 상황이 익숙하지 않다. 거울도 제대로 못 보고 왔는데, 페로사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치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5년 전과 비슷한 모습이라면 내색하지 않지만 어딘가 언짢을지도 모르겠다. 그때와는 조금 다르게 보이고 싶으니까.
"알면서."
대신 에만은 작게 웃음 지었다. 당신이 바에서 종종 먹곤 했던 것을 이렇게 흘려보내니, 당신도 결국 작게 웃어버린다. 머리를 노리고 처음 만난 이후 며칠 바에 갔을 때. 당신이 주방에서 몰래 가져온 딸기를 입에 넣고 씹는 모습이 거대한 사자가 어린 동물을 딱딱 씹어먹는 느낌이 들어 두려웠지만, 어느 순간부터 당신이 이런 걸 꽤 좋아하는구나, 로 변모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직접 주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미친 도시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미친 짓이었다.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쏟고, 애정을 받고, 기대는 일. 아무렴 어떨까, 좋으면 그만이다.
당신의 좋은 점을 느릿하게 하나씩 짚어가면 밤이 가고 아침이 올지도 모른다. 당신의 의례적인 말버릇이 조용해지고, 따뜻한 이마의 온기에 웃었다. 순수한 모습이었다. 목 위로 따뜻하고 말랑한 감촉이 와닿자 눈이 잠시 둥글게 뜨이고 간지러운지 작게 키득거린다. "간지러워.." 하며 목을 타고 흐르는 웃음소리가 맑다. 이제 목의 멍은 흔적이 거의 남지 않았다. 희미한 자국 정도라서 멍이 생겼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얼굴을 기대자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려 당신의 머리를 한 번 느릿하게 쓰다듬고는, 잠시 안았다. "나야말로 좋아해 줘서 고마워.." 짧게 속삭인 뒤 고개를 내려 시선을 마주한다.
"정말..?"
초콜릿! 에만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렇게 보니, 초콜릿을 제법 좋아하는 것 같았다. 단 걸 먹으면 머리가 잘 돌아간다! 한 조각씩 맛본다면 좋을 것이다. 속에서 받쳐주지 않는다 해도 초콜릿은 녹아서 금세 사라지니 괜찮았다. 한두 개 정도는 괜찮다는 뜻이다. 설탕도 그렇다. 요즘엔 각설탕이 좋다.. 이러저러한 상념 뒤로 에만은 무릎 위에 앉아있는 걸 깨닫고 잠시 눈치를 보더니, 살살 내려오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아스타로테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비스듬히 다른 방향으로 피하듯이 구리색 눈동자를 비켜낸 브리엘이었으나, 자료를 바라보는 건 변함이 없었다. 마지막 장을 읽자마자 질문을 던졌으나 대답이 빠르게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해 브리엘은 재촉하거나 하지 않았다. 아스타로테가 브리엘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처럼 브리엘또한 아스타로테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상황을 자기 페이스로 이끌어놓고 즐기는 사람이라는 것.
"내 성격이 마음에 안드면 다른 거래처를 알아봐. 아스타로테."
브리엘은 아스타로테의 조소를 놓치지 않은 채, 손에 들고 있던 자료를 다른 손으로 툭, 하고 두드렸다가 웃음기 하나 없이 냉정하고 무감한 입가를 가리며 무덤덤한 목소리로 단조롭게 대꾸했다. 어쩌다가 자기가 이 중간에 끼게 됐는지에 대해 생각하던 J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커피를 마실 뿐이었다. 직접적으로 질문이 오지 않는다면 대답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물론 아스타로테에게서 나온 위탁판매라는 말과 반응이 궁금해서 그랬다는 말에 사레가 들렸는지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잠깐만요..지금 일부러 그랬다는 건가요? 카두세우스가 그렇게 우스워보였나?"
기침을 가다듬은 J는 싱글싱글 웃는 얼굴을 한 뒤에 커피잔을 세게 부서질 듯이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단단히 팔짱을 꼈다. 브리엘은 이어서 건네진 종이를 집어들면서 자료는 테이블에 내려둔다. 천천히 종이 한장에 적혀 있는 계약 내용을 읽다가 브리엘은 한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205 내면은 늘 힘든 법이니까..(뽀다담) 브브주는 지금 정말 잘 해주고 있답니다.. 셰바는 사람이 언제든 바뀔 수 있으니까 브리엘이 모종의 심경 변화를 겪거나 사건을 겪어서 바뀔 수도 있는 법이고, 브브주가 편한 방식으로도 변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꼬옥) 너무 무리하지만 말자구요 우리..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아니면 오는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좌우간 그녀가 로미의 가게를 재방문 하게 된것은 예상보다 늦은 때였다. 아무리 협력관계라 한들 느슨한 스케줄을 이유삼아 여유를 부리기엔 역시 그녀도 양심이라던가 이런저런 이유로 찔리는 부분이 많았으려나, 그것과는 조금 별개의 이야기지만 '과연 로미 카나운트라는 여성에게 사적인 취미가 있는가.' 라는 논제가 어쩐지 신경쓰였던 것일 수도 있다.
그 대화를 트기 위해선 가장 좋은 것이 디저트와 함께하는 티타임일진대... 솔직히 말하면 그것도 어디까지나 그녀의 생각에서 착안한 것이기에 잘 먹혀들지는 알수 없었다. 아무리 제 자신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학습해나가는 A.I.라고 한들, 평범한 인간과는 사뭇 다른 로미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저어... 로미씨...?"
물론 자유롭게 있어도 좋다는 허가를 받은만큼 남의 집인 것도 아니니 멀쩡하게 안부를 물을 수도 있었겠지만, 어떤 이유에선진 몰라도 항상 조심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자신이 가게 문을 열려 할때 갑자기 88mm 대공포가 딱밤을 때리러 이마로 날아온다던가 대 생체병기용 입자포 같은 것이 날아올 리는 없겠다만...
여인이 언급한 브리엘의 성격은 일과는 관계 없었다. 그러니 그것 때문에 카두세우스와 거래를 끊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이번 거래가 성사되지 않아도. 기존의 거래와는 별개의 문제였으니.
질문 몇 번 이후로 잠자코 듣고 있던 J가 연달아 기침을 하며 사레 들린 듯 하자 여인의 시선이 J를 힐끔였다. 여인의 대답이 불쾌했다는 듯. 커피잔을 요란스레 내려놓고 팔짱을 끼는 모습도 그저 눈길 한 번 스치는 것으로 끝이었다. 그 정도는 예상했을지. 뭘 그리 호들갑스럽게 반응하냐는 걸지. 그 의중은 두루뭉술한 채로. 계약서까지 본 브리엘의 말에 여인이 입을 열었다.
"이엘. 심부름 센터를 부를 일이었으면 굳이 너를 통해 카두세우스에 거래를 제안하진 않았겠지. 네 성격은 내 익히 잘 알지만. 공적인 자리에서는 갈무리 할 줄 알아야 하지 않으려니. 내가 기껏 예를 차려주건만."
잠깐이지만 여인의 말에 서늘한 날이 스윽 드러난 듯 싶었다. 웃는 얼굴은 여전했어도. 그것으로 잘 가려놓았을 뿐이라는 것처럼.
"J. 그대의 말에도 대답이란 걸 하자면. 카두세우스를 우습게 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란다.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고 값을 메기는 것은 결국 같은 바닥을 딛고 선 이들의 권리이니. 직접 만든 것에 대해 셰바의 약물 업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카두세우스의 평이 궁금할 법도 하지 않겠니."
그리 말한 여인이 어깨를 작게 으쓱이니 덩달아 흔들린 머리 장식이 차르랑 울렸다. 다음 말은 곧장 이어졌다.
"위탁 판매의 제안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란다. 직접 판매를 하기보다 먼저 거래를 트고 있던 카두세우스의 위상을 존중하기 위한 것이지. 상도덕. 이라고 하던가. 조건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야. 이 쪽이 제시한 최저가를 넘지 않으면서, 카두세우스에도 충분한 이득을 낼 만한 값어치로, 카두세우스가 인정한 상대에게 판매를 하면 된단다. 잔량에 대해서는 분량 만큼 최저가의 대금을 치러 주면 그 후에 추가금을 붙여서 팔든 어쩌든 일절 관계하지 않을 것이고. 세부 조건들은 판매 대금과 양을 맞춰보기 위한 최소한의 정보 제공과 서로의 선을 지키기 위한 장치이지."
천천히 커피잔을 들어 미지근히 식은 커피로 목을 축였다. 잔을 든 채로 여인은 조금 더 말했다.
"카두세우스도 어찌 되었든 약의 판매를 하는 조직이니. 그것이 매매로 바뀐다 한들 불이익은 없지 않겠니. 그저 가져다 주는 물건을 파는 것 만으로 수익의 4할이 카두세우스의 것이 되거늘. 효력이 도시에 퍼지는 순간. 수요는 충분히 생길 테니 수익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 그리고. 부작용이 거의 없긴 하지만 단발성으로 인명을 해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약 자체도 카두세우스의 방침에 어긋나진 않을 거라 생각한다만. 이러해도 정 내키지 않니."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업적 멘트들을 한 단락 가까이 나열한 후. 이해와 쉼의 시간을 위해 여인이 입을 다물었다. 시선은 브리엘에게 꽂고서.
"나도 노력해야겠는데." 페로사는 당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먹기 좋도록 만들어준 크림수프도 그렇게 많이 먹지 못했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물론 당신에게 요리를 억지로 먹으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당신이 요리를 먹기 싫다고 항의하는 게 아니라 요리를 먹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표현해주었기에 페로사는 안심했다. 이것이 당신이 내게서 본 것이라면. 이것이 당신이 바라고 있는 소박한 행복이라면. 알면서, 하는 당신의 말에 페로사는 행복에 겨운 탄식을 뱉었다. ─너는 언제부터 날 그렇게 눈에 담아왔니. 언제 너는 나한테 이렇게 소중한 아이가 되어버렸니.
"난 네 비밀을 존중해주려고 했을 뿐인데." 페로사는 뺨에 다시 한 번 더 입맞췄다. "내가 어쩌다 네 눈에 그렇게 깊이 들었니." 하고, 그녀는 당신의 손길과 당신의 품에 자신의 머리와 몸을 내맡겼다. 탄탄하고 강인한 몸이었지만, 그럼에도 당신의 손길에는 다소곳이 사랑스레 순종했다. 그녀는 당신에게 길들어가고 있었다. 작은 숨결, 눈빛, 손짓 하나하나에도 모두. 자신이 맹수임을 안다. 손에 피가 묻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진 죄인임을 안다. 그러나 당신의 앞에서는 한 명의 여자이고 싶었고, 한 명의 사람이고 싶었다. 기왕이면, 사랑이었으면 했다.
다만 이젠 페로사가 당신이 품었던 것과 같은 불안함을 머금을 차례였다. 그녀 역시도 당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초콜릿을 준비했지만 그게 당신의 마음에 들지는 확실치 않았던 것이다. 실패도 많이 하는 바람에 그렇게 많이 준비하지 못하기도 했고. ─그렇지만 불안하다고 안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애초에 그럴 거면 너를 사랑하기로 하지도 않았겠지. "그러면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라구. 그렇게 많이 준비하진 못했지만..." 페로사는 너를 품에서 놓아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로사의 체온으로 데워진 소파는 다시 앉아도 여전히 따뜻했다. 가죽 냄새에 섞여 희미하게 남아있는 그녀의 냄새.
그리고 그녀는 바를 향해서 난 창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쭈뼛거리는 기색이 가시지 않은 자세로, 그녀의 손에는 웬 캐러멜곽 같은 조그만 종이갑이 하나 들려 있었다. "─이거야." 그게 당신의 앞에 놓인다. 아, 그녀의 손에 들려 있어서 캐러멜곽처럼 보였지 당신이 집어들고 보니까 당신 손바닥보다 더 큰 정도의 종이갑이다.
열어보면, 저마다 예쁘게 장식된 모양을 하고 있는 봉봉 여섯 알이 유산지에 올려져 있다. "입맛에 맞을까 모르겠지만... 리큐르 봉봉이거든, 그거." 아, 참 지극히도 그녀다운 초콜릿이다.
브리엘은 아스타로테의 서늘하기 짝이 없는 말에, 긴장한 기색이나 움츠러드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달갑다는 것처럼 냉정하고 차갑지만 특유의 지치고 피곤해보이는 냉랭한 얼굴을 하고 바라보다가, 늘어트리듯이 눈가와 입가 한쪽을 내리며 애매하게 웃어보였다.
"아스타로테, 이 성질머리로 나는 이 베르셰바에서 살아남았어. 말하자면 나또한 이 성질머리를 가지고 당신을 고객으로 생각하고 예를 갖추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늘어트리는 것처럼 짓던 웃음이, 곧바로 조소에 가까운 헛웃음으로 바뀌었다. 브리엘은 잠깐 입을 다물었고 아스타로테의 말을 들은 J는 그 속내를 잘 알아차리기 힘든 표정으로 아스타로테를 봤지만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카두세우스의 위상을 존중하기 위함이라고? 상도덕? 브리엘보다 현저하게 다혈질에 가까운 J는 부글부글 끓고 있는 속을 가라앉히려는 듯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고 있었고 브리엘은 아스타로테의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소파 팔걸이에 손을 올렸고 곧 천천히 손가락을 구부려서 소파 팔걸이를 일정한 리듬으로 두드렸다.
"첫번째, 간단히 말하자면 카두세우스는 조직 내에서 제조한 물건 외의 다른 물건을 일임 받아서 판매하지 않아."
브리엘은 일정하게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손가락 두개를 펼쳐보이며 두번째, 하고 단조롭기 짝이 없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두번째, 카두세우스와 거래를 처음 하는 조직에게도 말하는 거지만 우리는 수익에 연연하지 않아. 수익에 연연했다면 이제껏 우리가 판매하는 약물은 그 정체성을 달리했겠지."
브리엘은 손가락 세개를 펼쳐보였다.
"세번째, 이렇게 멋대로 떠들어대기는 했지만 최종 결정자는 보스거든. 아쉽게도 이건 내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야."
펼쳤던 손가락들을 접고 양손가락 끝을 마주해서 삼각형을 만들어 무릎 위에 얹은 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스타로테를 향해 나른하게 내렸던 구리색 눈동자를 비스듬히 들어올려서 똑바로 응시했다.
"근데 우리 가게 마감 했는데~ 급한거면 이리와서 가위바위보 한 판 어때? 이기면 화장실 정도는 쓰게 해줄테니까아."
가게 안쪽은 쥬가 처음 들렀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 뒤엎어진 형상 그대로를 지키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대충 진열된 장물하며, 느긋하게 울리는 힙합 비트. 그리고 손님이 오든 강도가 들든 괘념치 않는 기색의 사장. 바로 그런 그녀 로미 카나운트는, 입구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서 마치 빨려 들어갈듯 눈 앞에서 만화를 펼쳐보고 있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페이지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으응~? 헤, 이게 누구야. 우리 가게 유일무이의 직원님 아니신가~"
늦었냐고 묻느냐면 확실히 때는 맞추지 못했을 것이다. 소속도 되지않고 자유로운 행동이 보장되지만 퇴근과 출근 시간은 지킬 것. 그것이 계약이었으니 말이다.
"무슨 일이야? 뭐 필요한거 있어~?"
그 얘기를 꺼낸 것도 로미 본인이었지만, 어쩐일인지 딱히 그것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 듯이 능청스레 돌아온 쥬를 대했다.
브리엘 TMI 주세요! 우리 브리엘... 시력은 몇 나오나요? :: 마이너스까지는 안떨어지는데, 교정렌즈나 안경에 도수가 없으면 멀리있는 게 흐리고 뿌옇게 보이는 정도의 시력.
밥면빵떡 순위 알려주세요! ::oO(그 무엇도 우선 순위가 되지 않는다. 브리엘은 그런 사람이다.)
직업을 바꾼다면... 어울릴 것 같은 직업이 있나요? :: 지금은 마약판매상인데, 아마 그대로 의사를 했어도 될 것 같고...쓰으으읍, 브리엘은 그것 외의 다른 직업을 할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아서. #shindanmaker #님캐TMI주세요 https://kr.shindanmaker.com/1084363
천천히 노력하면 좋아질 것이다. 먹지 못했던 것을 제대로 씹어삼키고, 가져보고 싶던 것을 가져보며, 보고 싶은 것을 눈에 담을 것이다. 그래, 소박한 행복을 가질 것이다. 누군가는 건물 밖으로 나가 잠깐 걷는 것조차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그 모든 일이 끝나기 전에. 미리 쥐어보고 싶었다. 에만은 따뜻한 손의 감촉에 머리를 가볍게 부볐다. 행복에 겨운 탄식에 부스스 웃는 모습이 짐짓 뿌듯해 보이기도 했다. 내가 이만큼 너를 좋아해. 오늘만큼은 이 사실에 당당해도 좋을 것 같았고, 자연스럽게 허리를 곧추세웠다.
"나를 존중해 준 것부터 시작하면 끝이 없을 텐데."
뺨에 닿는 감촉에 작게 웃었다. 맑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밀 빛 머리를 손가락으로 꼬아보기도 하고, 이내 엉킬세라 살살 쓸어낸다. 분명 체격은 이쪽이 더 작은데, 당신이 자신보다 더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머리에 뺨을 기대며 파묻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일지라도 내겐 이미 이렇게나 큰 존재가 되었다. 사랑스러운 한 명의 사람. 존중 받을 인격체, 내 미래에도 함께 해줄 사람.. 무한한 찬사를 속으로 머금었다.
일단, 에만은 초콜릿을 제법 좋아하는 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간단하게 입에 넣고 씹지 않아도 알아서 녹아 머리만 돌아갈 수 있다면 뭐든지 먹었다. 에너지 드링크가 그 첫번째고, 초콜릿과 각설탕이 그 뒤를 이었다. 종류는 무엇이든 상관 없었다. 좋아하는 것 중 단연 손에 꼽을 수 있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에게 받는다면 맛이 어떻든, 모양이 어떻든, 상태가 어떻든 괜찮았던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에 냉큼 소파에 앉았다. 당신의 품에 안겼던 것처럼 몸을 웅크리며 남은 체온과 희미한 향수 잔향을 만끽했다.
몇 번을 바르작 거렸을까. 페로사가 되돌아오자 얌전히 기다리던 아이가 부모를 발견한 듯이 말갛게 미소짓고, 이내 조그마한 종이갑에 눈을 동그랗게 뜬다. 막상 받아보니 손보다 더 컸기 때문에 신기한지 잠시 페로사의 손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보곤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와아.." 하고는 눈이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리며 빛났다. 조금 미안한 얘기지만, 수프를 대접 받았을 때보다 더. ..그야 수프에는 당근이 있었으니 가산점을 받지 못했던 것이 크다.
"리큐르 봉봉.. 정말이지.. 고마워. 나도 이제 어른이구나. 기뻐."
지금까지 잘만 마셔놓고 이젠 또 어른 타령이다. 에만은 작게 손을 들어 키득키득 웃는 입가를 가린다. 초콜릿에 시선을 꽂다 가리던 입가에 있던 손을 떼어 초콜릿 주위 허공을 손가락으로 빙 둘러본다. 어떤 것을 먼저 먹어볼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잠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입술을 벙긋거린 것이다.
그 길고 긴 문장들이 브리엘과 J에게 어떻게 와 닿았을 지는 감히 짐작키 어려우나. 여인의 입장에서는 진심이었다. 비록 표면 뿐일지라고 해도. 뭔가 일을 함에 있어 형식과 형태는 중요한 것이었으니. 두 사람의 안에서 그 말들이 어떤 식으로 해석 되었든 거래를 제안하는데 있어 필요한 형식상의 말들은 다 담았다고 할 수 있겠다. 결코 상대에게 손해가 아닌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진심도 함께.
그것이 올바르게 전해지지 못 한 것은 역시 여인의 평소 행실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여인은 잠자코 브리엘의 대답을 들었다. 커피잔을 내려놓고 다과에도 손을 대지 않은 채. 브리엘의 손가락 셋 펼쳐지고 그 손이 내려가 무릎 위로 얹어질 때까지. 콧소리 한 번 조차 내지 않았다. 브리엘의 말이 끝난 후, 시선을 살짝 내리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곧 다시 시선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첫번째는 그러한 룰이 있는 듯 하니 넘어가마. 두번째는 글쎄. 연연하지 않는다 한 것이지 거저 들어오는 수익을 거절할 이유 치곤 충분치 아니하구나. 조직이란 결국 사업인 것을. 그리고 세번째. 그래. 최종 결정자는 카두세우스의 수장이시니. 너희를 통해 이 건을 전달코자 하건만. 지금 반응을 보아하니 전달도 거절할 것 같구나. 그러니 한 가지 제안하마. 너희에게."
이번엔 손짓을 하자 새로운 종이 두 장이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종이 속 내용은 단순명료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과 공개한 정보들을 외부에 발설하지 말 것. 일종의 서약서였는데. 두 장의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하나는 보스에게 거래를 전달하지 않을 시, 이 자리에서 브리엘과 J의 입을 막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이 약에 대한 자료를 보스에게 전달할 시, 자료와 정보의 외부 유출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보스께 내 제안을 온전히 전달할 것이라면 이 서약서에 서명하고 자료와 계약 조건을 가져가면 되고. 너희의 판단으로 이 거래는 옳지 못 하다 여겨 전달조차 하지 않겠다면 이 쪽의 서약서에 서명하렴. 어느 쪽도, 거절은 받지 않는다는 점. 명심 하려무나."
펜도 하나 꺼내 친절히 서약서 옆에 놓아주며 원하는 대로 하라는 듯, 양 손을 들었다 내려놓았다. 브리엘과 J를 바라보는 여인의 얼굴엔 여점히 가는 웃음기가 걸려 있었다.
자기 캐를 캐붕내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건 모든 상판러가 하는 고민이지. 그런데 누가 그러더라구. 캐릭터가 캐붕나는 거 아닌가 하고 아리송하면 자신이 그 캐릭터를 정말 생동감있게 굴리고 있는 거라고. 캐릭터가 스스로 살아서 사고하고 움직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자기 캐릭터의 무브먼트가 좀 낯설게 보일 수도 있는 거라고.
......자화자찬을 하려 하는 건 아니지만 페로사도 좀 그렇습니다. 너 이렇게 귀여운 애 아니었잖아.
>>325 저지르고 수습해도 늦지 않는답니다. 천천히 즐기는 것이 일상 어장의 매력이니까, 일단 저지르고 후에 고민해도 좋지. 에만주가 감히 조언을 하자면, 컨디션 문제로도 사람은 쉽게 변하기도 하니까 일상 때는 그 당시 컨디션이 문제가 있다. 같은 점을 이용해도 되는 거고, 캐릭터가 이게 아닌 것 같은데~ 보다는 이런 면도 있구나. 를 보여줘도 괜찮다고 생각해. 글로 창작되는 존재라지만 일단 그 원전인 종족이 인간인 이상 변화는 다양한 법이고 그게 지금의 브리엘을 만들어서 되레 매력적이랍니다.😊 (쓰다듬에 삑삑뽁삑)
그러니까 다들 내글구려~ 내캐구려~ 이러지 않기야~ 사람은 유동적인 존재고 다들 잘 해주고 있다고!
"헤헤헤... 이야- 그걸 시키려고 직원을 고용한건데 도망가버렸으니 별 수 없잖아~ 그리고 어차피 여기까지 일부러 오는 녀석들은 날 귀찮게 하려고 오는 녀석들밖에 없는데 뭐하러 그래야 돼?"
걱정된다는 듯한 말투의 쥬와는 다르게 로미는 딱히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고 있었다. 보지 않은 사이에 딱히 줄지도, 더 하지도 않고 여전히 천연덕스럽다. 당장 죽어도 상관 없다는 식의 초탈인지, 아니면 전부 해치울 수 있다는 무모함인지는 몰라도, 쥬가 모르고 있는 곳에서는 이 메카니컬 상점의 설립 경위에 대해서 항상 괴상한 소문이 돌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마주한 것은 말 그대로 코 앞까지의 거리. 쥬는 거기까지 다가와 눈을 마주쳤다. 광기가 물밑에 깔려있는 옅은 분홍색을 한 인간변절자의 눈동자. 그 주인인 로미는 드물게도, 굳은 얼굴을 하고있었다. 이내 말 대신 손으로 쥬의 뺨을 덥썩 쥐어서는 더욱 가까이 끌어오려는 그녀. 로미는 그 눈으로 쥬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아니, 정확히는 쥬가 아니라 그 눈 자체를 살피는 것 같다. 마치 '작업물'을 살피듯이 샅샅히. 단 하나의 오점이라도 잡아내려는 듯한 시선이 쥬의 눈동자에 꽂힌다.
말도 없고 웃음도 없이, 한참을 그렇게나 있던 로미가 금방 푸스스 웃으면서 손을 놓는다.
"헤, 깜짝이야- 무슨 이상한 거라도 감염돼서 돌아온 줄 알았네. 사람 놀라게 하고있어!"
둥글게 만 손가락이 쥬의 이마로 올라가서. 따악! 별로 아프진 않다.
"난 네가 진작 도망쳤거나 벌써 붙잡혀서 해체당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게 여기 언랭커들의 삶이잖아. 쥐도새도 모르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거. 물론 넌 겉보기에는 완벽한 사람이지마안- 뭐, 만에하나라는게 있으니까!"
쥬가 단순한 사람이 아닌 것을 본능으로 직감한 자신처럼 말이다. 직감은 믿는 편이 아니지만 한 번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두 번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자신의 가게 뒷편에 있는 고물상이 그렇듯 뉴 베르셰바엔 괴이한 인종들이 많다.
말을 끝마친 뒤 무감하고 냉랭한 무표정으로 브리엘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종이들과 다과, 커피들을 바라보며 아스타로테가 입을 열때까지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무릎 위에 올려뒀던 한손을 올려서 뻐근한 눈가 사이를 누르듯이 문지르다, 관자놀이를 툭툭 가볍게 주먹을 쥔 채 두드리는 것은 예의 버릇과도 같았다. 머리가 아팠다. 라 베르토의 보스인 벨 아스타로테가 왜 이런 사업에 관련된 것을 내놓는 것인지, 굳이 왜 카두세우스의 제조 총괄인 J까지 불러다놓은 건지. 이런 이야기라면 J는 이 자리에 올 필요가 없었잖아? 저 여자는 대체 무슨 생각인건가.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조건들을 내세우면서 나한테 뭘 바라는건지.
"그런 건 내가 신경쓸 게 아니거든."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인지 아니면 상대를 향한 경계인지 모를 것 때문에 머리는 물론 속까지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메스꺼움이 올라와서 브리엘은 관자놀이를 두드리던 손을 내려서 입가를 감싸쥐려하며 말했을 것이다. 입가를 가린 채, 울렁거림을 참아내던 브리엘과 결국 재킷 안쪽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문 J는 아스타로테가 내민 종이 두개를 하나씩 집어들고 바라봤다. 거절은 받지 않겠다는 아스타로테의 말에 브리엘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려한다.
"나는 그 어떤 서약서에도 사인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거절은 받지 않아도 거절하지."
1. 요제프의 반지 > 안토니(를 죽이고 그 행세를 하는 볼프강)의 엄지에 자리한 반지. 그로스만 패밀리의 걸어다니는 인외마경, 요제프가 끼고 다니던 상징적인 반지로 그로스만 패밀리의 수장임을 증명할 수 있음
2. 수집품? 인형사의 춤? > 좋게 말하면 수집품, 나쁘게 말하면 다른 조직 보스 죽이고 데려온 후계자나 적당히 예쁜 애 데려오는 등, 전리품 취급. 모티브는 느와르의 범주를 조금 벗어난 비인륜적 영화나, 근대시대 문헌에서도 흔히 나오는 귀족 밑에서 소유물이 된 어린 시종. 화려하게 치장하고 누군가의 구경거리로 전락했다는 점에서 용왕의 돼지를 비롯한 프릭쇼의 개념에도 들어갈 수 있겠지만, 그와 다르게 상류층의 것이었으니 상류층의 특권을 누릴 수 있어 겉보기로는 대우가 좋고, 후원하는 아이처럼 보였으며, 본인들도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특권은 명분만 존재하고 웃음을 위해 인형사의 춤 같은 싸움판에 던져지거나, 약물에 절어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해 주어진 말만 고분고분 듣는 상황이거나, 아예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 가까웠음. 당시 평균 나이대는 [검열]. 에만 위키 용궁 단락의 모브 연 씨(연 위)와, 독백의 연 지가 수집품 출신. 마오도 어떻게 보면 수집품 출신인듯? 사실 마오는 투기장 출신이지만.🙄
3. 디트리히 > 볼프강은 현재 요제프 B. 디트리히라는 이름을 사용중인데, 현재 독백의 디트리히가 성씨를 빌려줘 위장신분을 가진 것이라 보면 됨. 독백의 하르트만 디트리히는 요제프의 최측근 중 하나였고, 무기 로비스트였음.
4. 그레이 디트리히 situplay>1596430074>396 여기에 나온 돼지 예정자. 짙은 피부, 회색 머리, 매력적인 눈물점을 가진 남성. 독백의 하르트만 디트리히의 손자. 13년 전 몰락 당시 아버지가 총에 맞고 돌아가신 뒤 총기에는 일절 손대지 않음. 소극적인 성격을 가졌으며 앤빌의 바텐더인 페로사의 미각을 존경하고, 본인도 쉐프나 쇼콜라티에거 되고 싶다는 등 여러모로 어디서 책 읽고 커피 마시는 걸 즐기며 남이 힘들면 기대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그러니까.. 셰바답지 않은 사람.. 인데 하르트만이 그로스만 패밀리에 억지로 밀어넣어서 사람 해치고 괴로워하다 딱 걸려서 내리막길 걷게 생겼음.
5. 아리아인 > 왜 김에만이 분장으로 채도 높인 금발벽안이 되고 독일어 욕설을 사용했는지, 김에만주가 생각하기로 천하의 후레부분.. 하르트만이 아리아인 같은 언급을 할 정도로 차별적이고, 선민사상에 물들어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부분. 나이도 마침..🙄 에만은 이걸 역이용해서 신뢰를 얻어내 추적망을 피하는 것과 전력의 분산(연 지의 손바닥에 자해를 하게끔 함)에 성공했다는 비하인드가 있음.
6. 마오는 왜 분장했는가 > 에만이 하는 거 보고 재밌겠다고 따라함. 그렇지만 그것 말고도 용궁 사람임을 숨긴 것도 있음. 덕분에 경계심을 푸는 것에 일조했지만..
7. 비하인드 에만이 분장한 것은 5번에서 설명했고. 현재 페로사 일상에서 주는 초콜릿은 그레이가 도와줬다는 설정. 본인이 자진해서 간 이유이자 목표는 요양원의 건물 구조를 알기 위해서, 전력 분산을 위해, 신뢰를 구축해 볼프강이 붙인 미행을 의 권한으로 없애기 위해, 마지막으로 그레이를 내가 모른다 했는데 사실 내 손에 있음 ㅋㅋ 하고 조롱하기 위함. 이 정도..?
문제는 용왕님이 지금 투기장 상품 죽어서 개빡친 상태라는 거지.. 모브동행 일상 하면 일단 첫단락부터 에만주가 도게자 박을 가능성이 높다 이말..
여인은 줄곧 보고 있었다. 반복적인 행동과 징후들을. 그것들은 평소에도 보이는 것들이었으나 오늘은 유난히 빈도가 잦았다. 어째서일까. 두통, 혹은 그 외의 통증이 있어서인가. 어찌 되었건 그것들로 인해 저러한 반응이 나오는 것이리라. 여인은 그리 판단했다. 브리엘의 대답과 행동을 보며.
"그래. 네가 신경 쓸 건 아니지. 이엘."
브리엘이 일어남과 동시에 여인이 중얼거렸다. 그 직후. 선명한 소리를 내며 문에 잠금이 걸렸다. 문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문고리를 돌리려 하면 돌아가지 않을 것이고 손 끝을 댄 것만으로 정전기가 짜릿하게 흐를 터였다. 여인은 그렇게 되기 전에 말했다.
"지금은 문에 손 대지 않는 편이 좋을 거란다. 그리고. 불은 붙이지 말아주련."
앞 문장은 브리엘에게. 뒤는 담배를 꺼내 문 J에게 였다. 창문 하나 없는 '밀실'에서 담배 연기를 맡는 건 싫었으니. 무력을 행사하는 일은 없길 바라며 여인이 서늘한 목소리를 내었다.
"브리엘. 아까도 말 했지 않니. 일 도중에 사적인 감정은 갈무리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나는 너의 개인적인 의견을 묻지 않았어. 카두세우스의 간부로서의 판단을 요구한 것이지. 네가 집단의 이름을 달고 있다면 그 이름의 무게 정도는 신경 써야 하지 않겠니. 음. 이런 흐름도 예상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라. 그래서 추가적인 동행을 요청한 것이기도 하다만."
힐끔. 그럴 줄 알았다는 시선이 브리엘을 스쳐갔다. 여인은 브리엘을 두고 J를 향해 말했다.
"내가 그러한 것을 내민 이유를 알 법도 하겠지만. 친히 설명을 해주지. 유별날 것도 없는 이유란다. 거기 적힌 대로, 이 약과 그것에 대한 정보를 가능한 외부에 새어나가게 하고 싶지 않을 뿐. 사업에 있어서 기밀 유지는 필수 아니겠니. J. 네 생각은 어떻니. 너 역시 그 서약서들이 사인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니."
평소라면 위태로운 브리엘을 그냥 둘 리가 없는 여인이 지금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 사뭇 어색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여인은 철저하게 일에 대해서만 말을 하고 관련되지 않은 말과 행동은 시야에서 배제하고 있었다. 웃고 있으나 웃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363 (흐려진 에만주) 이런 소재.. 몇 번이고 머리 싸쥐면서 울어버린 에만주.. 그레이는 어떻게 보면 페로사도 비슷하지만, 에만과 유달리 많이 비슷하지만. 총기를 꺼리는 것도, 소시민적인 모습도, 에만이 어릴 적에 사람을 해치고 괴로워했듯 쟤도 괴로워하고.. 에만은 핏줄 타고나기를 죄로 여겼어야 한다며 합리화 하지만, 글쎄..🤔
>>364 에만주의 빅-픽처야.😉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고.. 하르트만 씨가 곱게 가지는 않을 거라는 복선이기도 하지..(?) 용왕이 저번에도 말했듯 내가 날뛸 기회를 주지 말았어야 한다 했듯 직접 나설 테니까..🙄 용왕님 벌써부터 노인공경 말고 노인공격 할 생각에 신났대(?)
>>366 해석은 늘 즐거운 법이지! >:3 그래서.. 에만주는 수능 지문 해석해둔 걸 찾아서.. 읽는 취미가 있어..(몹쓸 tmi)
>>370 그건 고질병이 아니라 특징이라고 생각해. 예쁜 특징.. 페로사도 한때는 그런 사람들이 비탄의 도시에게 잡아먹혀가는 것을 가슴아파하던 때가 있었어. 아니 지금도 꽤 가슴아파할 거야. 이제 그렇게 페로사에게 가슴아픈 상실감을 안겨주게 될지도 모를 사람이 몇 남지 않았지만 말야. 에만이 사라진다면, 음- 그건 아마 상실감을 넘어선 무언가겠지.
하여간 로미 카나운트라는 인물은 여전히 천연덕스러운 여자였다. 무언가 거대한 꿍꿍이를 세운 것 같으면서도 막상 상자의 뚜껑을 열어보면 별거 없는 것 같고, 그래서 닫으려던 찰나 그 어둠 속의 무언가와 눈을 마주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니 적당히 손님 맞을 준비도 하셨어야죠~ 청소란건 어느순간 미룰 때부터 가차없이 쌓인다구요~? 이래가지곤 귀찮게 굴러 온 사람마저 질겁하고 도망가겠어요~"
본래 순수한 광기는 신의 소유이기에 인간의 영역에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 하나, 그것을 인간의 몸에도 담을 수 있다면 딱 저런 모양새일 것이다. 아무렴, 누구보다 인간답게 설정되어있기에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자신조차 혼동이 올 정도라면 결코 평범한 인물은 아니란 것이겠지.
일단 장물은 정리가 끝났지만 중요한건 따로 있었다. 어차피 이곳의 청소가 당장 끝날성 싶지도 않았고, 다시 돌아올적엔 또 처음처럼 어지럽혀져있을 거란 예상이 잡혔기에 지금에서야 온 그만한 이유를 설명하는게 더 빠르지 않을까?
옅은 분홍색, 오묘하게 보석같이 빛나기에 더욱이 사람의것 같이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인간의 동공... 평소처럼 헤실거리던 표정은 간데없고 어딘가 굳은 표정을 하고 있기에 뭔가 문제가 있나 의아한 표정을 지으려던 때, 로미가 자신의 뺨을 덥석 쥐어 좀 더 끌어당겨서는 마치 보석을 감정하는 양, 작품의 위조를 확인하는 감정사마냥 뚫어져라 자신의 눈을 보자 당혹스러우면서도 약간은 부끄러운 감정이 느껴졌지만 차마 시선을 떼진 못했다.
물론 그 냉철한 감정(鑑定)은 금방 푸스스 흩어지는 감정(感情)으로 돌아와 손을 떼었지만 말이다.
"제가 물론 감기바이러스엔 걸리기도 하지만 허접한 해킹툴 같은 것에 감염되진 않는다구요~ 게다가 그런게 미래에서 온 로봇마냥 눈으로 나타날 리도 없구요~"
오히려 자신같은 치밀한 A.I.가 현존하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녀의 마인드맵은 인간의 뇌구조와 상당히 흡사한 알고리즘을 가지고 있었다. 대체 이것을 만든 존재가 누구인지, 존재한다면-혹은 존재했다면- 인간은 맞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 뒤에 둥글게 말린 로미의 손가락이 튕겨져 그 끝이 자신의 이마에 닿아 딱! 하는 소리가 나자 그녀도 잠깐 사색에서 깨어났을까? 아프다곤 할수 없었지만 괜시리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웃어보리는 그녀였다.
"음~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제가 인간이 아니기에 가능한 일아닐까요~?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도~"
물론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자신이 뉴 베르셰바에서 눈을 떴을 때엔 이미 그녀와 비슷한 것들이나 관계있는 것들은 자취를 감추었거나 전부 부서져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렇게 멀쩡히 존재한다는 것은 필시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조차 르메인의 술수라고 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겠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이곳의 존재가 아닌것 같았기에...
"설령 만에 하나라고 해도... 오히려 이런 생체병기를 제작한 사람이야말로 괴이한 인종이 아닐까요~? 마니악에도 정도가 있지만, 이건 그 차원을 넘어서는 개념인 걸요~"
아무렴... 자신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기이한 존재였으니까,
"음~ 역시 안되겠죠~? 그걸로 부족하다 싶으면 사장님을 달래드리기 위한 외부 산책 및 자율 코스도 있었는데~ 설마 그것까지 필요하신가요? 후후후후..."
어찌되었건 자신은 서포터 유닛이었다. 그만큼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는데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뿐더러,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도 거부감은 딱히 없었다. 그렇다고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도덕적으로 불가능한 부분은 지체없이 거절하겠지만,
>>378 예쁘게 봐줘서 고마워..8888....(눈물 퐁퐁) 페로사.. 지금은 무뎌지는 걸까..(후레캐해) 에만도 양가감정 때문에 그레이 씨를 마냥 모질게 대하지 못하고 있다구. 그렇지만 용왕님은 아니니까..🙄 상실감을 넘어선.. 우우 앞으로는 김에만 무통잠을 시키지 않겠습니다.. 만약 한다고 해도 서프라이즈 생일파티를 위해 몰래 숨어서 기다리겠어..<;3(안됨)
끝이 없을 텐데, 하는 말에 페로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당신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을 때 감았던 눈을 느른하게 반쯤 뜨고는, 길다란 속눈썹 아래에서 여전히 선명하게 빛나고 있는 푸르른 눈동자로 에만을 가만히 바라보았을 뿐이다. 도살자의 서커스의 등활지옥 한가운데서도 그 빛깔을 잃지 않은 푸르른 눈동자에는 선명한 경탄과, 그보다 더 선명한 애정이 함뿍 일렁이고 있었다. 영영 자신을 소유하게 된, 영영 자신의 것이 된 당신을 향해서. 당신이 머리카락에 뺨을 기대는 것을 그녀는 제지하지 않았다. 당신이 그것을 좀더 편히 즐길 수 있도록 고개를 조금 움직여주었을까.
봉봉 쉘을 만드는 것도, 안에 채워넣을 퓨레를 만드는 것도 모두 처음 해봐서 고생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초콜릿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거친 일을 해와서 피부가 거진 굳은살이 되다시피 한 손이라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오늘 당신에게 보여줄 손이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몰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그 중에서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겨우 여섯 개였다. 그러나 다니엘레가 이 정도면 OK라고 합격점을 준 물건이니,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한 간식으로 당신에게 선물하기엔 충분할 것이다.
상자를 열어보며 기뻐하는 당신의 모습을, 페로사는 바에 팔꿈치를 괴고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당신이 기억하는 그녀의 웃음은 항상 호탕하고 시원시원했는데, 당신을 바라볼 때면 그녀는 이제 조금 다른 웃음을 웃게 되었다. 누군가의 애인으로서 짓는, 그런 가늘고 야살스런 미소. 그러나 나도 이제 어른이구나- 하고 새삼스레 딴청을 피는 당신을 볼 때면 페로사의 얼굴에는 다시금 당신이 기억하는 그 웃음이 시원스레 피어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바에서 실컷 마셔놓고는 새삼." 하고 당신의 머리를 파바박 쓸어버렸다가, 다시 부드럽게 쓰다듬어내리며 당신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는 손길. 평소보다 더 긴 머리카락에, 페로사는 문득 웃는 것마저 잊고 당신의 긴 머리카락을 한번 곱게 쓸어본다. "역시 난 네 진짜 머리카락이 좋은 것 같아." 하고, 무심코 중얼거리면서.
"첫 입- 아 맞아. 나머지 건 네 좋을 대로 먹어도 되지만, 처음에는 이걸 먹어봐." 페로사는 맨 아랫줄의 왼쪽에 있는 것을 가리켜준다. 밀랍 낙인을 찍은 것 같은 모양의 봉봉이다. "생각해보니 참, 그때 생각나네- 네가 잭다니엘을 달라고 했을 때 좀 놀랐어, 넌 술은 드라이하거나 강하게 마시는 취향인 줄 알았거든. 드라이한 위스키도 있지만 잭다니엘은 달달한데 말야. 의외로 잘 넘어간다고 마시다가 홀랑 잠든 걸 백룸에서 재워줬던가, 아니면 믿을 만한 숙박업소를 알선받아서 널 재워주고 나왔었던가─ 언제였지? 네가 어디서 지내는지 나한테 말해주기 전이었던 것 같은데." 추억을 회상하던 페로사의 눈빛이 갑자기 짓궂어진다. "어라, 뭐야. 전에도 기회가 있었잖아?"
꺼내어 한입 깨물어보면, 다크 초콜릿으로 만든 쉘 너머에서 밀크 초콜릿과 섞여있는 녹진한 퓨레가 입 안으로 훅 녹아나온다. 스파이시한 풍미와 꿀, 바닐라, 사과와 함께 자연스레 어우러져 입안으로 훅 쏟아지는 알코올의 풍미를 넘겨보면, 입 안에 마치 솜씨좋은 제과점에서 나는 것 같은 기분좋은 빵이나 과자를 연상케 하는 복합적인 달콤한 향이 초콜릿의 기분좋은 씁쓸한 풍미와 함께 남는다. 그래서 그것이, 생각보다 높은 농도로 남아있는 알코올을 당신의 입안으로 아무 저항감 없이 흘러들어오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네가 위스키는 달콤한 걸 좋아하는 것 같길래, 이번엔 발렌타인 21년으로 봉봉을 만들어봤어." 페로사는 어느샌가 얼음을 담아둔 마티니 글라스를 올려두고 코블러 셰이커를 준비하고 있었다. "발렌타인 데이인 것도 있고 말야. 좀 어때?"
>>403 힝. 그건 아쉬운데...이렇게 해서 입을 막아야 하려나요. (버드키스 쪽쪽)(베시시) 예상하는 모습...?? 그것도 기대되는데요! 다음 일상에서 해야 할게 너무 많다 ㅎㅎㅎㅎㅎ 즐겁네요... (볼쪽) 원래 좋아하면 닮는댔어요(아무말) 으아아아아 아흐아요(바둥바둥)
>>406 ㅎㅎ 욕망의 항아리 제롬주 같으니. 안 되겠다 제롬주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못되게 굴어야겠어 ㅎㅎㅎ 일상 한번에 다 못 할 같으니 적당히 나눌거야. 먼저 나온 것부터 차근차근 하자. (부빗) 흐음, 그런 말도 있긴 하지만. 귀여우니 봐준다. (품에 쏙 넣음)(꼬옥) 슬슬 졸리지? 이제 자자. (토닥)
그레이가 도움을 준 초콜릿은 바크 초콜릿 말고도 한 입 크기의 작은 프랄린이다. 몰드에 굳혔다지만, 그 뒤의 아이싱 처리에서 미흡한 실력이 드러났기 때문인지 당신이 만든 초콜릿처럼 모양이 제대로 되어있지는 못했다. 그게 새삼 당신의 초콜릿을 보고 부끄러웠는지 반짝이는 눈 너머로 옅은 수줍음이 고개를 내민다. 시선을 올려 당신을 마주 봤을 때, 당신은 호탕한 미소가 아닌 가늘고 야살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그 미소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준비됐음을 알고 있어, 어딘가 벅차오름과 더불어 쑥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봄날 불어오는 바람 같던 얼굴에서 여름 쾌청함이 피어났을 때, 머리카락을 사수하지 못한 것은 작은 한이었다. "우왓."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낸 것이다.
가발에 정전기가 생겨 머리가 방방 떠버린 모습이 됐다. 다듬고 정리한다 한들 쉽게 가라앉지 않아 에만의 표정이 짐짓 뚱했다. 손을 들어 방방 뜬 머리를 눌러도 손바닥에 몇 가닥 붙어 늘어졌다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진짜 머리가 좋다는 당신의 중얼거림엔 잠시 빤히 쳐다보다, 가발 위에 손을 얹어본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이것보다 훨씬 길었는데." 하고 혼잣말을 하더니 이내 가발을 슥 벗었다. 가발에 매달린 리본을 가만히 쳐다보다 똑딱 핀을 풀어 제 머리에 엉성하게 매달아본다. "어때?" 부스스한 머리로 실실 웃는 모양새였다.
"응, 첫 입.. 이거?"
에만은 밀랍 낙인을 찍은 모양새의 봉봉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래, 이거. 먹을까 말까 고민하던 찰나 눈을 둥글게 뜨더니, 얼굴이 점점 발그레한 모양새로 달아오르는 것이다. 그때 기억이 안 나는데, 백룸에서 잠들었다고? 발그레한 모양새를 넘어 귀까지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로로!" 하고 저도 모르게 삐약 거리듯 페로사의 애칭을 뱉어버렸다. 나름의 성내기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어땠더라? 일단 취한 것은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안 난다. 잠들었다고는 하지만 그 이전에 뭘 했지? 기회가 있었다는 말에는 아예 얼굴을 덮어 가렸다.
"그, 그러지 마.. ㅂ, 부끄러워……."
잠깐 얼굴을 덮어 가리고는 상황을 돌리겠다는 듯 초콜릿을 조심스럽게 집어 든다. 이대로 휘말리면 몇 번이고 더 부끄러워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들어 올린 초콜릿은 좋은 냄새가 난다. 씁쓰름하고 향기로운 내음. 초콜릿은 향부터 기분이 좋아지는 마법이라도 걸린 것 같다. 한 입 깨물자 눅진한 느낌이 가장 먼저 와닿았다. 기분 좋은 풍미를 뒤로 기분 좋은 달달함이 혀를 감쌌다. 입술을 천천히 오물거리다 초콜릿이 죄 녹았을 때, 혀에 텁텁하게 닿는 느낌도 적었다. 목을 타고 넘어갈 때 싸르르 식도를 훑는 느낌이 이건 술이 들어갔거니를 단편적으로 알려준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다.
그런 자신의 놀라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페로사는 어느새 칵테일도 준비하는 듯싶다. 에만은 손에 3분의 1 정도 남은 다크초콜릿 조각을 입에 마저 넣는다. 쌉싸름한 맛이 깔끔하게 입을 정리했다. 잠깐 고민하던 에만은 눈을 느릿하게 깜빡, 하고는 허리를 쭉 앞으로 뻗었다. 잠시 이쪽으로 와달라는 듯 팔도 쭉 뻗고는 다가온다면 가볍게 입을 맞췄을 것이다. 잠깐의 버드키스 뒤로 뺨을 한 번 비비곤 떨어지며 입가를 손으로 가린다. 긴 속눈썹이 내리깔린 눈웃음만 선명했다.
"……정말 맛있어."
지금까지 발렌타인 데이라고 해서 먹어본 것이라곤 어디서나 흔히 구할 수 있는 판 초콜릿이나 이따금씩 맛보고는 하던 페레로-로쉐뿐이었으니.
"로로도 먹어볼래? 나는.. 네가 만들어준 초콜릿이 정말 맛있는 걸 같이 알아줬으면 좋겠는걸.."
피피가 여기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조그만 휴식과 술 몇 모금 정도다. 뭐, 애초에 그것을 찾아 여기에 온 게 아니었던가. 아마 바텐더도 이제 피피에게 더 이상 칩칩스레 굴지 않을 테고. 여기 말고도 다른 곳에서도 그런 것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것들이다. 기승전결 선명한 희곡인 줄 알았건만, 피피의 이야기는 어디를 헤메이고 있는가. 이 바텐더의 이야기는 어디에서 멈추어있는가. 이 비탄의 도시는 어떻게 되어가는 것인가. 눈 시리게 담을 파란 하늘은 어디 있을까.
페로사는 피피가 서명을 한 종이를 받아들었으나, 다만 마약 탄 술만 아니면 돼, 하는 피피의 뒤이어지는 절뚝이는 말씨에 잠시 그 손을 멈춘다. 그리곤 그 기괴하고 포름한 꽃과 피피를 한 번씩 돌아본다.
"마약은 아니고, 이 자체로는 별다른 의존성이나 중독성도 없지만 말야, 이건 신경계가 아닌 감각기관을 자극하는 것만으로 이상한 경험을 하게 만드는 물건이야."
그녀는 콜린즈 글라스를 하나 꺼내어 바 위에 툭 올려둔다.
"평범한 술에서는 할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될 텐데. 그래도 괜찮아?"
그 꽃 안에 든 것은 일종의 최면성 물질이었으나, 법이 규정해둔 마약의 범주를 우연히도 교묘히 빗겨가 마약으로 규정되지는 않은 물건이었다. 확실히 마약은 아니었고, 애초에 마약 같은 것을 오남용한다고 해서 제재할 법집행기관이 이 도시에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피피가 서명만 하고 서류를 내밀었다면 두말하지 않고 "포인터"를 만들어 대접했을 페로사였으나, 마약은 안 돼, 하는 피피의 말이 그녀에게 남아있는, 이 도시의 사람에겐 호화스럽고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걱정하는 마음이라는 녀석을 건드려버린 것이다.
"내 바에 앉은 내 손님은 누구도 다치게 할 수 없으니까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러면서도 그녀는 그 특이한 고집을 분명히 해두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앤빌에서 도저히 깨울 수도 없이 뻗어버린 손님은 그녀가 믿을 만한 운수조직을 불러 택시 태워 보내거나, 아니면 앤빌의 백룸에서 하루를 재워주곤 했다. 피피도 보통은 페로사의 등쌀에 잠이 깨어 쫓겨나다시피 앤빌을 나선 적이 대부분일 테지만, 때로는 앤빌의 백룸에서 머리맡에 붙은 포스트잇을 보고 잠이 깬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피피가 페로사에게 자신의 주소를 알려준 적이 있다면 거기에서 깼을지도 모르고.
자기야, 아른아른 거리면 먹는게 답이야. 몬스터.. 어떤맛이려나. 타자는 잘 치고 있나 나. 일단 되는데로 치는데 말이지. 일단은 사버려, 허니 좋다고, 허니. 술 마시면 이래서 문제라니까, 눈앞은 빙 도는데 타자는 신기하게 잘 치고 있어. 거봐, 지금도 이러잖아. 그렇지? 미치겠네. 그만합시다.. 몇 병 안 마시잖아요? 이건 9시 제한이 나쁜 거야. 들이키게 만들어서.. 아닌가..
좋네. 캡처는 예쁘게 해줘. 오리지널이면 적당할 거야. 천천히 마십시다. 맞아, 기분 좋으면 그만인 거야, 뭐든. 뭐든 좋지. (찡굿) 집 가고 있답니다. 사실 좀 아쉽다. 그래도 느긋느긋 돌아가니 답레는 늘 천천히 주시길 바라요. 나는 인내심이 깊어서 한다링고 두달이고 기다릴 수 있거든. 부담 갖지 ㄴ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던 브리엘은 아주 잠깐, 그저 아스타로테를 흘겨내듯 시선을 줬다가 그대로 돌려서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말했던 대로 내가 신경 쓸 일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아. 그냥 주어진 걸 행하면 그만인 것을.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춘 인간은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두통과 함께 메슥거림이 줄곧 이어지자, 여전히 한손으로 가리고 있던 입가를 마지막으로 세게 눌렀다. 그대로 손을 떼어내고 문으로 걸음을 옮기던 브리엘의 귓가에 잠금쇠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하, 하고 브리엘은 짧은 숨을 내쉬고 다시 들이마시며 문고리를 잡으려던 손을 잠시 허공에 멈췄다. 협박이 아니라, 겁박이라 이거지? 헛웃음, 아니 날카로운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메슥거림은 점점 심해지고 두통도 그 뒤를 따라 줄곧 이어져서 짜증스러운 기분이 전신을 집어삼키는 감각은 달갑지 않다.
<clr black black>빌어먹을 도시. 빌어먹을 베르셰바.</crl>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고 이 도시가 친절하지 않다는 것도 알았는데. 허공에 멈춘 손으로 얼굴을 감싸듯이 싸쥐며 브리엘은 다시 짧게 숨을 내뱉었다.
그 모든 상황을 바라보던 J는 아스타로테의 말에 시선을 흘끗 옮겨서 서약서를 바라본다. 큰일인데 이거. J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눈 앞의 여자가 협박을 넘어서 겁박하며 고압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J로서 브리엘의 의견을 무시하고 멋대로 서약서에 사인을 할 수는 없었다.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브리엘!"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결국 펜을 쥐었던 J는 문가에서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있는 브리엘의 행동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급하게 브리엘에게 다가서자마자 왼손목을 낚아채듯 쥐고 반대 손으로 어깨를 잡아당긴다. J에게 들렸던 펜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J에게 행동이 막힌 브리엘은 헛숨을 들이키며 J를 노려봤다.
"..이거, 놔.."
브리엘은 아스타로테의 말에도 문고리를 잡으려했다. J를 노려보던 브리엘의 구리색 눈동자가 아스타로테에게 닿았지만 말은 하지 않고 J의 손아귀에 잡혀있는 손목을 빼내려하고 있었다.
어때? 하는 말에 페로사는 우선 손을 뻗어서 당신의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어 정리해주었다. 조금 비딱하게 달린 리본은 그대로 둔다. 실실 웃는 당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그녀는 뭔가를 눌러참는 듯이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고는 놓았다. 도톰한 입술에 이빨자국이 남았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뭐라고 그럴듯한 미사여구를 갖다붙이고 싶은데... 내가 아는 말들 중에 뭘 써야 할지 모르겠네. 예쁘다는 말밖에 모르겠어." 머리를 길러도 그대로 있어도 너라서 다 예쁠 것 같아- 하고 중얼거리며 그녀는 마음속에 치솟은 욕심 대신에 당신의 머리를 한 번 더 쓸어보았다. 굳은살 배긴 거칠고 따뜻한 손이 당신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고 지나갔다. 이게 욕심이라는 걸까.
"부끄러워하긴. 저번에 용왕한테 선물해준 꼬냑을 걸고 아무 일도 없었어. 술 마시다 스르르 잠들었을 뿐인걸. 그리고 그때 넌 내 머릴 날릴 뻔한 손님이었고, 난 네 친구한테 머리가 날아갈 뻔한 바텐더였지." 페로사의 말은 얼굴을 가리며 몸둘 바를 몰라하는 당신을 안심시키려는 듯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손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부드럽게, 당신의 얼굴과 당신의 뺨 사이를 파고들며 당신의 뺨을 감싸쥐려 했다. 지금은 당신의 얼굴을 계속 보고 싶어하는 것처럼. 아니면, 손을 가리더라도 자신의 손으로 가려줬으면 한다는 것처럼. 손을 치우면 보이는 페로사의 눈웃음에서 그녀의 감정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니까, 조심해?" 짓궂은 말 한 마디가 빠지지 않고 당신의 귀로 따라들어왔다. 치솟은 욕심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페로사는 다시 칵테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초콜릿을 먹었으니 개운하게 입가심할 만한 게 좋을까? 아니면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줄까? 역시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주는 게-
하고 생각하다가, 당신이 내뻗는 손짓에 아무 생각 없이 당신에게 고개를 돌린 페로사는 곧 자신의 짓궂은 행동에 대한 적당한 대가를 치렀다. 쪽 하고 입술 위에 묻는 초콜릿과 위스키의 냄새, 그리고 당신의 냄새.
이 바에 있는 어떤 술도 그녀를 그렇게 취하게 만든 적은 없었다.
"...정말이지."
당신이 맛있다고 한 게 어느 쪽인지를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 쪽이건...
"글쎄- 만드는 과정에서 실패작을 꽤 많이 먹어서 말야, 그게 무슨 맛인지 꽤 잘 알고 있거든."
페로사는 당신에게로 허리를 기울인 채로, 당신이 선물해준 초콜릿을 다시 당신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는 조금 덜 참기로 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자신의 입술을 톡톡 쳐 보였다.
>>501 >>503 그 내글구려병... 나도 엄청 잘 알지... 그러니까 에만주가 한 말을 그대로 되돌려줄게. 글을 써준다는 것만으로 고맙고 멋진 일이니까 스스로의 글에 너무 풀죽거나 울지 마. 어떻게 써도 에만만큼 사랑스러운 캐릭터는 없으니까. (물론 모든 캐릭터가 멋지고 매력있지만 말야) 거기에 조금 덧붙이자면, 어깨에 힘을 빼고 자잘한 묘사를 덜어내는 것도 방법이야. 나도 조금씩 분량을 줄이(려고 하)고 있고. 울 필요는 없지만 울고 싶다면 울어도 괜찮아. (꼬옥)
여인은 앞서 브리엘의 상태를 눈여겨보았듯. 그 뒤에 이어지는 상황도 앉은 자리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J가 서약서를 보는 동안, 브리엘이 저 문을 그냥 잡으려 하는 것도 보고 있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그대로 잡았어도 가만히 있었겠지. J가 붙들어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만.
"...날이 아니었던 건지. 상대를 잘못 본 건지..."
브리엘과 J의 실랑이를 보며 여인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무리한 것을 요구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지 않나. 이 정도는 셰바가 아닌 바깥에서도 흔히 하는 과정일 터. 그저 그런가보다 납득하고 넘기면 될 과정인 것을. 왜 이리도 번거롭게 만드는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니. 어렴풋이 알 것 같아서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려 했다. 여인은.
차랑. 유리세공의 꽃잎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여인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걸음을 떼자 굽소리가 머리장식 소리와 섞였다. 또각. 또각.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가 브리엘과 J를 지나쳐 문고리를 잡았다. 그 사이 잠금도 전류도 풀렸는지. 문은 쉬이 열렸다. 단순히 문고리를 돌리기만 한 게 아닌 문을 활짝 열어 놓고서 여인은 브리엘을 돌아보았다. 언제나와 같은 미소를 지은 얼굴로. 말했다.
"동정 받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공사 구분은 해야 하지 않겠니. 브리엘. 적어도 일은 제대로 하는 사람인 줄 알았건만."
여인의 미소는 조소가 아닌 부드러운 미소였으나 혀끝에서 나오는 말은 그렇지 못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여인은 돌아서 걸어가 소파에 다시 앉았다. 처음보다는 늘어진, 느긋한 자세를 취하며 브리엘과 J를 향해서 한 손을 휙휙 흔들었다.
"가렴.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은 어리광쟁이들과 할 얘기는 없단다. 보내줄 때 가려무나."
>>531 묻지 마요? 묻지 말라고 하면 더 묻고싶은데. (키득키득) 그럼 안 묻는 대신 제 마음대로 장난쳐도 돼요? (품에 파묻고 도담도담) 간지러워... 초조해하는 아스주 귀여워~ 하지만 굳이 카운터 칠 필요 있나요? 이대로 당하는 모습도 귀여울 것 같은데. 아스주가 당하는 건 정말 가끔 있는 일이니, 저도 좀 즐겨야죠. (턱긁긁)
부스스한 머리만치 허물없는 미소를 지었다. 참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예쁘다는 말에 수줍어하기만 한다. 예쁜 걸까, 그렇다면 참 기쁜 일이다. 누군가에게 예쁨 받는다는 일은 쉽게 받을 수 없는 온정이기 때문이다. 할 일이 아주 많다. 식습관을 고치고, 잠을 제때 자서 피로를 풀고, 이젠 머리도 길러봐야겠다. 조금만 길어도 가위를 들어 사정없이 잘라내던 날은 이제 안녕이다. 따뜻한 손길이 가발이 아니라 진짜 머리카락과 두피에 닿아 기분이 좋았다.
"진짜 아무 일도 없었지..? 그러니까.. 그때는.."
머리를 날릴 뻔했던 날이 생생하다. 물론 친구는 죽었다. 셰바에서 흔한 목숨이었다고 합리화했으나 그 사실은 아무도 몰랐으면 한다. 부끄러운지 가린 손을 파고드는 커다란 손길이 머리에 닿았던 만큼 따스하다. 손가락을 빼꼼 벌리다 틈새로 잠깐 마주하고, 손을 내려 치맛단 위에 올렸다. 선명한 감정에 다시 귀 끝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취소, 달아올랐다. 눈을 홉뜨고 화끈하게 달아오른 얼굴이 답을 대신했다. 잇새로 치사해, 하고 작게 종알거렸다.
그래도 복수는 성공적이다. 입술은 도톰하니 말랑했고, 깃발을 뺏고 뺏기는 다툼 같은 실랑이에서 다시 승리했다는 뿌듯함이 곱게 접힌 눈에 가득했다. 어느 쪽이 맛있는지는 부러 말하지 않았다. 만약 꼬리가 있더라면 살랑살랑 흔들렸을 것이 뻔했다.
"많이 먹어봤다고 거절하는 거야..?" 하던 것도 잠시, 입에 넣기 좋은 크기의 초콜릿 하나를 손에 쥐여주자 잠시 초콜릿을 한 번, 페로사를 한 번 쳐다보다 천천히 입술의 끝을 당겨 올렸다. 초콜릿을 재미 없게 입에 넣어주려는 듯 들어 가져다 대려다, 부스스 웃었다.
"나는 분명.. 커다란 사자 같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까 커다란 여우야. 으응, 우리 누나 그런 모습도 싫지 않지마안.. 아침에 바 치울 여력이 없을 거라면서요, 언니."
장난은 쉽게 끝났다. 에만은 입술로 초콜릿을 물었다. 그리고 허리를 앞으로 곧게 숙였다. 방금 전 가볍게 버드키스를 하던 모습 그대로. 그리고 목을 끌어안기 전 눈만 휘어 웃었다.
574뒤늦게 꿈에서 깼을 때, 어둠이 먹구름 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khrrzOjAlc)
2022-02-19 (파란날) 01:45:17
"내 밑에서 일해볼래?"
며칠은 더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는데. 못 참겠다며 도망치며 병실을 빠져나온 당신이 뒤늦게서야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 무엇인지 밝혔다. 네발 달린 것이 아닌 것들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돈도 아닌, 일자리를. 그것도 무슨 일자리인지 밝히지도 않는 당신의 제안이 어이가 없어 당신을 보면. 당신은 전혀 의심할 수 없는 잔잔한 미소와 따스함이 섞인 두 눈으로 나를 건너다보고 있었다. 죽다가 살아나더니. 사람이 미치기라도 한 것일까. 어쨌거나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당신에게서 뭐든지 받아내야, 그동안 당신을 간호하며 날린 시간을 보상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었다. 어차피 돌아가 봐야 결국 그 시궁창 밖에 갈 곳이 없었고. 도망치는 것에 자신 있었으니. 그 일이라는 것이 위험하다 싶으면, 그때는 정말 당신의 지갑을 훔쳐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쓰레기통에 버려진 음식을 주워 먹고 앓을 일이 없어지고, 끔찍한 추위를 피하기 위해 공중전화박스에서 떨고 있을 필요가 없는, 언제든지 수도를 틀면 따뜻한 온수가 나오는 샤워실이 있는 집에서 살게 되며. 남의 목숨을 구한 대가로 내 삶이 구원받는 것에, 1년, 2년이 흐르며 마음속 품고 있던 의심을 천천히 거두게 되었을까. 당신이 하는 일이란 밖에서 들여온 물건을 필요한 이들에게 파는 것. 모든 것들이 처음 겪고, 하는 일이었지만. 마치 자신은 원래부터가 이런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듯. 어려움은 없었다.
당신의 뒤에는 항상 그림자처럼 자신이 따라붙었다. 당신의 옆자리, 차량의 조수석은 항상 자신의 자리였다. 당신이 화를 내면 같이 화를 냈으며. 당신이 웃으면 같이 웃었고, 당신이 울면 같이 울었다. 서류 하나 없었지만, 어느새 나는 당신을 가족 같다고 여기고 있었다. 아픔, 기쁨, 슬픔 모든 것을 당신과 같이 나누었으니 가족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처음 당신을 만났던 그때와 같이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 눈 위에 나란히 발자국을 남기며 걷다, 얼음에 미끄러지는 서로를 붙잡으면. 그 따뜻한 손길에 마치 보호받는 느낌이 드는 것이, 나쁘지 않았을까.
"무슨 일이 있었으면 했어?" 페로사는 빙글빙글 웃었다. 바텐더들은 종종 관심있는 사람이 있다면 백룸에서 더 친밀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더라만, 페로사는 일단 그래본 적도 그럴 만한 마음을 느낄 상대도 없었을뿐더러, 그때는 아직 확신이 없었다. 그저 창백한 네온사인이나, 레스토랑의 창백한 자외선 소독등에서 영문모를 기시감을 느끼고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으니까. 이젠 그 어떤 곳에서도 당신의 눈빛을 떠올리지 못한다. 눈을 감으면 당신이 보일 뿐이다.
스스로의 머리를 날리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결말이 이 도시에는 수도 없이 많이 준비되어 있다. 목숨을 대가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일상인 도시다. 우리의 죄는 그런 도시에서 감히 살아남으려, 살아가려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네 가면의 자리를 내가 대신했으면 해.. 지금 당장 그러지 않아도 좋아. 두 번 다시 가면을 쓰지 말라는 말도 아니야. 이게 내 삶이니까, 하고 돌이켜 생각할 때 네 가면보다 내가 먼저 떠올랐으면 하는 거야." 너도 눈을 감을 때 내 얼굴이 떠올랐으면 해. 위험한 일을 하고자 마음먹을 때, 나를 떠올리고 좀더 신중해졌으면 해. 네가 나 없이는 살지 못하게 되었으면 해. 네 부스스한 미소가, 눈빛이, 체온이 나를 차지하는 만큼이나.
기왕 미치는 거, 독을 먹으려면 접시까지 먹어야지.
"그래서 많이 참고 있거든." 입술 앞에까지 다가온 초콜릿이 부스스한 웃음과 함께 거두어질 때, 페로사가 그 푸르른 눈을 당신과 맞추며 건넨 중얼거림이었다. "날 무너뜨려보고 싶어?" 도톰한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당신의 뺨에서 잠깐 떼어낸 손이, 당신의 턱으로 미끄러져내렸다. 조금 몸을 기울이자 등 뒤에 걸쳐져 있던 끌색의 금발이 조금 소르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녀는 입을 조금 벌리고, 초콜릿을 마음껏 맛보았다. 이미 일부는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탐욕을 충족시킬 최소한의 만족감을 얻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렸다. 당신을 몇 번이나 깨물고, 맛보고, 그러고서야 페로사는 당신을 놓아주었다. 놓아줄 때에는 입술 위에 짧은 입맞춤이 한 번 더 덧대어졌다.
당신의 여인은 숨을 조금 고르고, 질문을 건넸다. "─다음 것도 먹어볼까? 아니면 한 잔 마실래?"
>>585 이이잉... 나도 어떤 제롬주라도 다 좋으니까 할 말이 없잖아잉.. (품 속에 포옥)(골골골) 으음. 나도 시간은 상관없는데. 이제 할 숙제가 시간을 좀 길게 잡아먹는단 말이지. 제롬주 요새 많이 피곤해 했으니까 너무 늦게까지 붙잡고 싶지 않기도 하고. (꼬옥) 지금은 조금 참구. 이따 오후부터 하자.
아무래도 페로사는 1회차 엔딩을 내고 느긋하게 엔딩 후 플레이를 하면서 수집요소나 모으고 있는 캐릭터다 보니 액션이라던가 어두운 거래라던가 하는 느와르분이 좀 부족한 느낌인데.. 빨리 독백 쓰는 데에 박차를 가해야겠네.
앤빌이라는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도 풀고 싶고. (썰로는 못 푸는 게 독백으로 풀어야 맛깔나는 거라서) 엄청 구하기 어려운 술이 앤빌에 들어왔는데 매물을 부당하게 가로채여서 다른 캐릭터에게 도움을 청해보는 것도 해보고 싶고. 진과장님이랑 옛날 이야기를 주워섬긴다거나도 해보고 싶은데 시간과 기력이 없네 젠장...
짓궂기는! 발그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 당시에는 이렇게나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발그레한 얼굴과 작게 앙 다물린 입술은 페로사가 원하는 것을 갈구하듯 속삭이자 천천히 휘어나갔을 뿐이다. 도피하기 위해 마련한 세상마저 당신이라면, 당신으로 인해 그 셰바라는 것조차 산산이 부서진다면..
"언제 내가.. 싫다고 한 적이나 있을까? 당신이 그렇게나 나를 채우고, 내가 당신으로 채워지길 바란다면 그렇게 해야지.."
다만 우리 서로의 몫인 거야. 내가 미치도록 매달린다 한들 당신이 내쳐서는 안 되는 거야. 당신은 욕심이 많아. 그 점을 정말 좋아해. 무색무취의 독에 중독된 우리는 그 끝이 무엇일지를 모르고 달려가겠지. 혹 모를 일이야. 심장만 멈추는 약이었기에 죽은 듯하다가 그 눈을 떠버린다면.* 미카엘은 시선을 맞췄다. 일렁이는 눈길을 뒤로 이전에 뱉었던 말을 마친다. "노력해 봐요." 라고.
"…잘 알면서."
참고 있는 당신을 내가 알고 있는 것도, 여러 의미로 무너뜨리기엔 손 대기 어려워 소중하게 품고 싶다는 것도. 턱으로 미끄러지는 손길에 긴 속눈썹을 내리 깐다. 제법 커다란 엄지를 가만히 바라보다 더 얘기하지 않고 목을 팔로 끌어안았다. 직접 만들었지만 정말 주게 생겼다며 부끄러움에 정신이 없어 괜찮다고만 느꼈지, 제대로 맛보지 못했던 초콜릿은 황홀할만치 달았다. 달기만 하였을까. 전부 녹아버린 뒤에도 몇 번이고 초콜릿 대용이 되었다. 아, 욕심 많은 사람. 흐느끼고, 깨물리며, 맛봄 당하고, 짧은 입맞춤이 여운처럼 남았을 때의 표정은 제법 볼만했다. 작게 벌어진 입술, 흐트러진 눈빛, 물기 어린 눈동자, 가느다랗게 떨리는 숨…… 전부 당신을 위해 준비되고 당신만의 것이었다. 여기서 손 뻗는다면 돌이킬 수 있을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저도 모르게 나왔던 말이다. 악에서 구할 수는 없으니 시험에나 들게 하지 않았으면 했던 것일까. 목을 끌어안던 팔이 스치듯 내려와 당신의 뺨에 닿고 눈가를 엄지로 훑었다. 파란 눈 속의 욕망은 과연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지 한참을 바라보다 말캉하고 도톰한 입술에 제 입술을 지긋이 눌렀다 떼며 말갛게 웃었다. 페로사가 자신을 가지고 싶어 참을 수 없다 고백했던 날처럼.
"더 먹었다가 자제할 수 없을 텐데.. 손님이라도 오면 어쩌려고. 마티니로 줘, 로로. 진을 조금 더 넣어주면 좋을 것 같아.."
"시작부터 제대로 꼬이는데." "괜찮아. 그 정도는 상정 내야." "다음 수는 어떡할거냐." "음. 조금 기다려볼까. 상대가..."
"움직일 때까지."
알게 모르게 뒤숭숭하던 일들이 하나 둘 해결되고. 라 베르토에는 언제나와 같은 일상이 돌아가게 되었다. 여인은 늘 그랬듯이 잡화점의 자리를 지키며 조직원들의 보고를 받고 라 베르토를 찾는 손님들을 맞이했다. 여인의 사생활에 무슨 일이 있었건 셰바는 셰바였다. 매일 같이 일어나는 일도. 그 속에 휘말리는 사람들의 드라마도.
그런 와중에 연락을 하나 받았다. 제롬으로부터 온 연락의 내용은 그의 집에 초대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앤빌에서도 그런 얘기를 했었더랬다. 나중에, 라고 했던. 어차피 계획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이에 기분 전환을 해도 나쁠 건 전혀 없었다. 여인은 그 연락에 흔쾌히 가겠다는 답을 하고 느긋한 고민을 했다. 팔걸이에 기대 턱을 괸 여인이 미소를 지을 때는, 뭔가 좋은 장난거리가 생겼다는 의미였다.
연락을 받고 수일 후. 제롬의 집 앞에 차 한대가 멈춰섰다. 선팅이 짙게 된 차에서 내린 사람은 토끼 가면을 쓴 금발 여성이었다. 차림이 다소... 눈에 띄는. 여성은 차에서 작은 캐리어를 내린 뒤 문을 닫았다. 운전석의 창문을 손등으로 툭툭, 두드리자 차는 지체 없이 떠났다. 저 멀리 가는 차의 뒷모습에 손을 살랑살랑 흔들 여성은 한 손에 캐리어를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제롬의 집 앞에 멈춰서 캐리어를 내려놓고 집 문을 똑똑똑똑똑 두드렸다.
곧이든, 시간이 좀 걸렸든, 문을 연 제롬이 보게 될 장면은 금발에 토끼 귀가 달린 가면을 쓴 여성이 캐리어의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 모습이었을 것이었다. 그것도 바니걸 복장에 망사 스타킹이라는 파격적인 의상을 한 여성이.
페로사는 문득 자신이 네 번째 로미오/줄리엣이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첫번째 로미오와 줄리엣은 셰익스피어의 손에서, 두번째 로미오는 언젠가 바를 찾아온 몬터규 성을 쓰는 친구로부터, 세번째 로미오는 앤빌의 손님들 가운데 갓 스무 살이 된 두 사람 중에서 당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 네 번째 차례는 자신이라고. 대본에 적힌 것은 "악인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한 문장뿐, 비극으로 끝맺을지 희극으로 끝맺을지 알 수 없는 무대 위에 발을 올린다. 용서받지 못한 채로라도 좋다. 구원받지 못한 채로라도 좋다. 당신과 함께 하는 이 낙원의 순간에는 닿을 수 있었으니까. 마지막에 일이 어긋나서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결말을 맞이하더라도, 그래도 서로 같이 손을 거머쥐고 마지막을 함께할 수 있다면 좋을 테다. 우리를 위한 베로나는 없더라도, 어쩌면 우리를 위한 만토바는 있을지 모른다.
"쉽지 않네." 감정과 감각에 흠뻑 젖어서 한가득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는 당신을 바라보며, 페로사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녀도 그렇게 별다른 몰골은 아니었다. 열기를 한가득 머금고 거칠어지는 것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는 숨결에 술기운이 담긴 것 같았다. 양 뺨은 벌겋게 달아 있었고, 두 눈은 당신이 몇 번인가 보았었던 익숙한 감정으로 이들거리고 있었다. 충분치 못하다는 듯. 더 당신을 맛보고 씹어삼켜도, 자신의 몸에 당신을 얼마나 새겨도 시원치 않겠다는 듯. 개인실의 공기마저 뭉근히 달아오르려는 것 같다. 한번 더 입맞춘 그녀의 입술은 뜨거웠고, 여전히 데킬라 향이 희미하게 났다. 다시 당신의 뺨을 쥐던 손에, 미세하게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무언가를 눌러참는 것처럼. 하아, 하고 달뜬 숨이 흘러나왔다.
"...다만 악이 우리를 갈라놓지 못하게 하소서." 입술을 몇 번 벙긋거리던 그녀는, 결국 조금 다른 기도문을 입에 올리고 말았다. 악을 저지르는 것, 악에게 노려지는 것, 그 어느 것에도 당신과 그녀를 구원해줄 수 있는 이는 없다는 것을 그녀 역시도 잘 알기 때문이다. 악에게 노려지지 않으려면 악을 저질러야만 하는, 그 어디에서도 구원받을 수 없는 도시. 주인도 왕도 없다. 사람들뿐, 당신과 그녀뿐이다. 페로사는 문득 자신의 한 쪽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피카레스크과의 문신이 그녀의 어깨에 남아 있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진 자를 사하여준 것과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주소서, 하는 기도문이, 당신이 읊었던 대목의 바로 이전 대목이 그녀의 어깨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탈출구는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잠깐 뒷방에 '재고 확인하러' 다녀오는 정도야 괜찮잖아?" 길은 멀고, 우린 계속 살아가야 하니까. 그 동안 우린 조금 즐기려는 것뿐이야.* 기억하고 있을까, 언젠가 주크박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그녀가 흥얼거리던 순간을. 그녀는 정말이지 그 노래를 좋아했다. "아니면 바텐더 출장 서비스를 이용해보는 건- 하하하, 조금 이상하게 들리네." 머쓱한 듯이 그녀는 씨익 웃었으나, 그 웃음에도 뭐라 말할 수 없는 어떤 색이 있었다. 당신이 묻힌 색이다. 그러나 이내 그 웃음에는 조금 다른 빛이 서렸다. 그 눈매를 조금 치뜨며, 마치 무언가 오랫동안 걱정하던 일을 해결한 사람의 표정이 되는 것이다.
"───" 그녀는 뭐라 말하려다, 왠지 뭐라고 더 말하면 갑자기 그 일이 없던 일이 될 거라는 근거없는 생각이라도 들었던 건지 입을 텁 다물었다. 그 대신에 눈웃음을 지으며, 당신의 한쪽 뺨에 쪽 하고 입맞추어 주는 것으로 대답을 갈음했다. "평소에 마시던 더티 마티니로 괜찮지?" 하고 그녀는 물어보았다. 그러다 킥킥 웃는다. "여섯 개 중에 하나는 마티니를 섞어서 만들었는데 괜히 그랬나."
[ (고급 아파트의 위치가 적힌 메시지) ] [ 내 집 주소. 여유가 되면, 한번 와볼래? ]
제롬은 단말기에 어색한 메시지를 적고는 눈을 감았다. 단 한번도, 자신의 집을 드러낸 적 없었다... 아, 피피를 제외하고. 그녀석은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찾아온 거니, 뭐. 아무튼, 그가 누군가를 집에 초대한다는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었던지라, 아스타로테가 오겠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내자 그의 고민은 더 깊어졌다. 자신은 아스타로테에게 더 이상 비밀을 숨기지 않겠다고 했지만, 정말 모든 것을 드러내도 되는 것일까.
…일단 그 생각은 나중에 하고, 전구부터 갈아야겠지. 어둠에 익은 눈으로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깨진 전구와, 못으로 고정되어 막힌 창문이 보인다. 어두컴컴한 집에 여인을 초대할 수는 없으니까. 여인의 얼굴도 잘 보지 못 할 테고. 그 이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죽은 듯 소파 위에 누워있던 그는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일어나, 문 앞으로 나섰다.
“...누구?”
문을 열자 보인 것은 아스타로테가 아니었다. 바니걸이라는 파격적인 복장을 한... 가면을 쓴 여인. 금발, 가면, 그리고 캐리어. 시기상 아스타로테가 가발과 가면을 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제롬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아니, 애초에 여인에게만 이 집주소를 알려주었을 텐데.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집을 알아낸 건가? 갑자기 시작된 불안에 초조해졌다. 제롬은 반사적으로, 허릿춤에 있던 권총으로 손을 가져갔다.
“시킨 게 없는데, 누가 보냈지?”
문을 연 틈 사이로 얼굴만 슬쩍 내민 제롬은 총의 손잡이에 손을 걸치고는 방아쇠 위에 손가락을 올려두었다. 여차하면 눈 앞의 여인을 쏠 생각이었다. 아스타로테가 아니라면, 말이다. 제롬은 잠시 숨을 가다듬으며 가면 쓴 여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682 페로사: ...어? (어안이벙벙) (아스타로테에 대한 이야기는 기회가 되면 본일상에서 나눠보고 싶은 소망이 있어) 페로사: ......아, 그럼 그때 괜찮은 해커를 찾았다는 이야기가... (페로사도 배틀리언 시절 라 베르토로 장기파견을 나간 적이 있거든) 페로사: 어쩌면 우리가 좀더 일찍 만날 수도 있었겠네. 페로사: 어, 응, 어? 페로사: ...정말이지, 욕심꾸러기. (쪽) (못 이기는 척 떠밀림) (그리고 백룸에 있는 아무리 봐도 페로사가 입을 치수는 아닌 다른 옷이 한 벌 더 있는데..)
항상 하는 말이지만, 답레는 느긋하게 써줘도 돼. (지퍼 앞섶 지익 열어줌) 굳이 지금 일상에서 하지 않아도 괜찮아. 자연스런 화제를 선호합니다..
페로사: 로테가 '괜찮다'고 하면 보통은 아주 뛰어나다는 뜻이니까. 페로사: 그렇지만 로테한테도 너는 못 줘. 페로사: 욕심? 나도 마음껏 부리고 있는걸.. 너도 당연히 부려야지. (다시 쪽) 페로사: 아. (얼감) 이건...... 서비스라더라...... 입을지 말지는 네 맘대로 해...
문을 약간만 열었더라도 그 밖에 선 여성의 복장이나 몸짓은 충분히 보이고도 남았을 터였다. 바니걸 의상 특유의 노출된 상반신이라던가. 착 달라붙은 망사 스타킹으로 인해 도드라지는 다리라던가. 그런 차림으로 상체를 살짝 숙이자 보이는 선명한 출렁임이라던가. 여성은 부끄러움도 없는지 문 틈으로 다 보이게끔 몸을 기울이고서 말했다.
"발신인은 비밀 보장의 원칙 때문에 알려 드릴 수 없답니다아. 하지만 수취인이 제롬 발렌타인 씨인 것 만은 확실하다고 해드릴 수 있겠네요오."
여성의 목소리는 제롬이 아는 여인의 목소리와 사뭇 달랐다. 한 톤 내지는 두 톤 정도 높고. 말꼬리를 늘어뜨리는. 그런 목소리나 말버릇은 제롬이 기억하는 여성에겐 없었을 테니까. 조금만 더 기울이거나 저 고정대 없는 옷이 아래로 늘어지면 보일지도 모르는 아슬아슬한 자세를 유지하던 여성은 가면 속에서 소리 없는 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돌연 몸을 삭 일으키곤 캐리어를 도르륵 굴려 뒤로 뺐다. 그대로 가버릴 듯이. 그러면서 흘리듯 말했다.
"보내신 분 말씀으론, 수취를 거부하시면 받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셨답니다아. 그러니 거부하시면 저어는 이만 돌아갈게요오."
아하하. 하고 소리만 낸 듯한 웃음이 가면 너머에서 나왔다. 여성이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귀가 묘하게 생동감 있게 움직였다. 방정 맞게 발을 동동거리자 구두가 딸깍거리며 소리를 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흔들리는 무언가가 있었고. 그건 제롬이 연 문 틈으로도 충분히 보였을 것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수취 거부 하실래요? 아니면 받으실래요?"
여성은 곧 다시 문 틈을 향해 불쑥 몸을 들이밀며 물었다. 좀 전보다 가깝게 다가와서 차림새가 더 자세히 보일 뿐만 아니라. 향수 내지는 그 비슷한 향도 어렴풋이 느껴질 만큼. 제롬에게는 그 향이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으나 그것의 정체를 확인할지 말지는 제롬에게 달려 있었다. 여성은 문 가까이 와 있었지만 상체만 기울이고 있어서 언제든 횡하니 가버릴 듯 보이기도 했으니. 고민은 길지 않은 편이 좋을 것이었다.
미카엘은 자그맣게 속삭였다. 쉬운 일 하나 없는 것이 재밌는 법이지, 그런 말이 스쳤지만 궤를 달리했다. 열기를 머금고 억누르는 모습을 마주하니 묘한 감정이 샘솟았다. 애달프게 욕망하고 있는데, 그 모습도 참 좋았고, 이렇게 뭉근한 공기 속에서도 더 나아가지 않고 참는, 차분한 듯 차분하지 않은 자신이 더 어른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어느 쪽이든 페로사를 좋아한다는 마음이 크고 일맥상통했기에 미카엘은 옅은 데킬라 향이 나는 뜨거운 입술에서 떨어지고는 경구를 읊으며 말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달뜬 숨에는 아예 짓궂은 의도를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눈이 호선을 그어냈다.
"신이 그 기도문을 들어주었대."
조금 다른 기도문의 답은 의뭉스럽다. 꼭 제가 신이라도 된 양 말했기 때문이다. 호선 그인 겨울 색 눈동자를 보니 제 이름으로 장난친 것이 분명했다. 어깨를 향하던 시선을 함께 하려다 그만둔다. 이미 한 번 보았기 때문에.
"정말이지.. 잠깐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
미카엘은 살살 웃음을 쳤다. 그 모습이 나는 다 알지요,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손을 올려 입가를 가리고 쿡쿡 웃는 모습이 옷차림 때문인지 짐짓 귀하게 자란 여염집 처녀 같았다. 죽기 위해서 태어났다지만 그 안에서도 살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있다는 듯. 출장 서비스에는 결국 소리 내 웃었다. 평소엔 힘이 없기에 탁하게 중얼거린다에 가깝다 해도 이 순간만큼은 낭랑했다. 페로사의 머쓱함을 날릴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리고 머쓱함 뒤로 표정을 보니 결국 속에만 담던 말을 툭 뱉어버렸다. "로로 정말 귀여워." 하고. 나이 차이는 9살이나 난다지만, 귀여움에 나이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물론, 조금 지나서 자격을 승인 받는다면 옆집으로 이사도 할 거야.. 동거하는 건 좋지만, 조금 신중해지고 싶었어."
그래도 그 이전도, 동거하는 순간도, 옆집으로 독립하는 순간도 전부 네 거니까 괜찮아. 미카엘은 뺨에 닿는 온기에 눈을 감고 사르르 웃었다. 행복함이 가득한 미소였다. 평소에 마시던 것이면 괜찮을까? 올리브랑 초콜릿의 조합이 괜찮을까?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는 것이 모험을 도전해 보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니..! 너무 좋아. 그러니까.. 마티니랑 초콜릿이랑.. 한 번에 둘 다 먹을 수 있는 거잖아!"
좀 진지했나? 그렇지만 보통 럼 초콜릿이면 재미없게 섞는 것 같던데, 좋은 조합 아닌가! 물론 먹어본 적은 없지만 자신이 알기로는 그랬기에. 그러니까- 제 앞의 사랑하는 사람은 천재가 분명하다. 맛있는 것에 맛있는 것을 더했으니까. 그러니 얌전히 기다렸다. 발을 작게 동동 구르기도 하면서.
자캐가_국가대표_운동선수_라면 > 상상도 못한 해시가..;; 진짜 뭐지..? 뭐지?? 뭘 해야 어울리지?(혼란)
자캐의_가장_오래된_기억은 > ..여름날에 아빠랑 아이스크림 각자 잘랑잘랑 사물고 온 기억..?🤔 매미 소리 짜증나서 잡으러 갔다 옆집 왕 씨 아주머니가 나가지 말라고 붙잡은 기억? 난데없이 윗집 박 씨 할머니네 김장에 끌려간 기억?(?) 이런 기억들 때문에 김에만 동양권 문화에도 친숙하대.. 북쪽 오기 전까진 동쪽 지역 고룡성채에서 자랐거든..
자캐의_목소리_톤 > 목떡 들어봤잖아! 사실 그건 평소에 힘 없는 목소리고..조금 더 톤이 높고 연약한 느낌이 없잖아 있다고 생각해.. 목떡주랑 다시 컨택을 넣어봐야 하나.. <:3
확실히 눈 둘 곳이 없는 복장이기는 했다. 정확히는, 어디에 둬도 곤란한 그런 복장. 저 복장을 생각하면 벨라가 보낸 것일까, 싶기도 하다. 여인은 저런 곤란한 복장으로 자신에게 장난을 치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롬의 긴장이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자신의 집에 대해서 편집증적인 증세를 보이곤 할 정도로 꽤나 민감했으니까.
"...내 이름 앞으로 온 물건인데 발신인은 말해줄 수 없다고?"
제롬의 미간이 좁아졌다. 머리가 살짝 아파온다. 저런 아슬아슬한 복장은 분명 여인의 장난이라 할 수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목소리나 어조가 달랐다. 목소리야 가면 안에 변조기를 달면 되고, 어조 또한 신경쓰면 여인에게 바꾸는 것이 어렵진 않겠지만... 만약 여인이 아니라면? 분명 자신의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분명했다. 고민하는 사이, 돌연 몸을 일으키고는 캐리어 굴러가는 소리를 낸 여성의 모습에 제롬은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여인이 변장한 모습인지, 여인이 보낸 사람인지, 아니면 그냥 운 나쁘게 타인이 자신에게 보낸 미인계인지. 신경써야 할 가능성이 너무나 많았다. 편집증적인 증세는 쉽게 나아지지 않는다. 그래도, 지금은 의심이 아닌 확인이 필요할 때이다.
"수취하지. 들어와."
여성이 몸을 불쑥 내밀자 그는 미약한 향기에 다시 한번 눈을 찌푸린다. 아는 향기인가? 아마도. 그는 그 향에 조금은 가능성을 더했다. 곧이어 허락이 떨어지고 제롬은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집 안은 어떤 빛도 들어오지 않는지 어두컴컴하여 잘 보이지 않았다. 오직 열린 문을 따라 들어오는 빛만이 신발장을 살짝 비추었다.
그후 문 옆에 서 말없이 여성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린 제롬은, 여성이 들어오자마자 문을 쾅 닫으려고 했다.
"잠깐 실례."
총은 이미 집어넣은 후였다. 그는 빠르게 여인의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잡아당기고는 그녀를 문 근처 벽 쪽으로 가볍게 밀쳐버렸다. 여성이 반응할 틈을 주지 않고 가면을 벗기고는 얼굴을 확인하려고도 시도하였을까. 만약 가면을 쓴 여성이 가만히 있었다면, 혹은 반응하지 못 했다면 거대한 그림자가 여성을 벽 쪽으로 몰아넣은 뒤 빤히 얼굴을 보고 있는, 어찌보면 살짝 무서운 광경이 되었겠지.
벨 아스타로테 확정 뽑기권💮 [SR] 눈사람의 마음- 벨 아스타로테 [R] 나팔꽃- 벨 아스타로테 [SR] 귀를 기울이며- 벨 아스타로테 [SR] 푸른 장미와 공주님- 벨 아스타로테 [SR] 그 아이는 이제 없어- 벨 아스타로테 [SSR] 가장 아름답게 지는 제비꽃- 벨 아스타로테 [SR] 여우비- 벨 아스타로테 [SSR] 건네준 보라색 장미- 벨 아스타로테 [SR] 쏟아지는 화살- 벨 아스타로테 [SR] 뭉게구름- 벨 아스타로테 #shindanmaker #10연을_돌려보자 https://kr.shindanmaker.com/902165
무언가를 많이 겪고 성장하고 익숙해지는 게 어른이라면 그녀는 뉴 베르셰바에서 어른이라 할 만했다. 다른 사람의 선의어린 제스쳐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어디까지 선을 긋고 어디까지 행동해야 하며 어느 선에서 행동을 멈추고 어느 선에서 입을 다물어야 하는지, 무엇을 보고 살아가야 하는지, 죄책감을 어떻게 외면할 것인지에 대해 그녀는 잘 알고 익숙했다. 어떻게 날리는 편치가 효과적이고 관절을 어떻게 비틀면 상대에게 최대의 고통 혹은 장애를 남겨줄 수 있으며 어디를 쏘면 상대를 효과적으로 즉사시킬 수 있는지도 잘 알았다.
그러나 누군가를 마음에 품고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녀는 아직 풋풋한 소녀였다. 조금 키가 크고, 조금 험상궂으며, 조금 근육질일 뿐, 당신이라는 사람 앞에서 그녀는 여인이 아니라 수줍은 소녀에 더 가까웠다. 표현은 어른의 것이었지만 재질은 아직 순진무구하고, 애정표현을 주저하지는 않지만 아직 어떻게, 어디까지 해야 할지 조금 낯설어하고 있는. 당신이 온전히 받아들여주고 부추기기까지 하기에 종종 마음껏 날것 그대로의 애정을 고스란히 쏟아내곤 하는.
"글쎄, 어떨 것 같아?" 하면서 당신의 턱을 거머쥐다가도, 뜬금없이 당신이 던진 귀여워- 하는 말에 눈웃음을 잃어버리고 눈이 땡그래지는 감정에 솔직한 순진한 얼굴이 셰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천진난만하다. "요 녀석이." 하고는 그녀는 당신에게 입막음 키스를 한 번 했다.
"거취에 대한 네 결정이 어떻건 널 존중해. 다만 네가 안전했으면 해." 그리고 페로사는 당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푸르른 눈이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나한테 네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는 다시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그녀는 이미 삶에서 느끼는 감정의 많은 부분을 당신으로 채웠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신용을 사기 위해 목숨을 그 사람의 손아귀에 쥐어주었을 때 그녀가 얼마나 분기탱천했던가? 안토니 디트리히는 아직도 퇴원하지 못했다던가.
탕아. 고향에서 쫓겨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갖은 발버둥을 친 탕아는 결국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초라한 피난처에 굴러떨어졌다. 그대로 두면 다시 어디론가 굴러떨어져 버렸을 그녀. 이젠 당신에게 굴러떨어졌다. 한 줌의 모험담을 안고서 말이다. 누군가를 마음속에 담아보고, 누군가를 향해 감정을 건네어주고, 누군가의 감정을 받아보고. 누군가가 따르는 술잔을 받아보고 하는 그런 모험들.
올리브 몇 알을 셰이커에 던져넣어 머들러로 빻고, 보드카- 별을 올려다보는 사자가 그려져 있는 보드카와 드라이 베르무트를 조금 부어넣고, 얼음 몇 개를 넣은 다음에 셰이커를 찰칵찰칵 흔든다. 마티니 글라스에 올려뒀던 얼음은 버리고, 스트레이너로 두 번 걸러서 따라낸 액체에 올리브 세 알을 꽂은 칵테일 픽을 담가준다. 먼지처럼 올리브 파편의 걸러지고 남은 자잘한 조각들이 뿌연 액체 속을 유영하고 있는, 당신이 그녀의 바에서 흔히 마시던 그 맛이다. 선명하나 쏘지 않는 알코올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칠게 성질을 부리는 듯한 베르무트의 향기, 그러나 그것을 정결하고 고고한 것이 아니라 추잡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눅진한 기름기와 감칠맛까지.
첫 모금을 마시고 보면, 어느 샌가 페로사가 바에 팔꿈치로 턱을 괴고 앉아 웃음을 띄고는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인다. 자신이 만들어준 칵테일이 맛있는지 어떤지 살피는 눈빛이 아니라, 조금은 놀리는 듯한, 조금은 기대하는 듯한, 장난스러우면서도 야살스러운 눈빛. 그녀는 화이트 초콜릿으로 껍데기를 입힌 봉봉을 손가락에 집어든 채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이 뭐라고 말하기를 기다리는 듯. 다음 번째의 모험이다. 오늘의 모험은 어디까지 가게 될까.
제롬이 고민하는 사이. 바니걸 여성은 어느 새 작게 흥얼거리기까지 하며 위로 쭉 뻗은 귀를 이리 흔들, 저리 흔들, 하고 있었다. 대답만 들으면 바로 행동할 것처럼 한시도 쉬지 않고 이리 저리 움직여대는 모습 또한 여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인은 언제나 필요한 행동을 필요한 만큼 하곤 했으니. 이 여성의 행동과 말은 여인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래보일 수 밖에 없었다.
"흐흥, 흥. 앗. 네에."
그러고 있다 보니 제롬의 대답에 행동이 한 박자 늦는 건 당연했다. 들어오라는 말이 들리고 흠칫한 여성은 서둘러 캐리어를 챙겨들고서 제롬이 열어주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배달이라면서 여성이 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냥 물건만 전해주고 가면 되는데? 그나마 빛이 들었던 현관에 문이 닫히는 순간, 제롬은 보지 못 할 웃음이 가면 속에서 피어올랐다.
"꺅."
들어와서 문이 닫히고 벽으로 밀쳐지기 까지 거의 순간이었지 않을까. 가볍게 밀었다고는 하나 여성의 가는 몸은 크게 흔들리며 벽에 등을 부딪혔다. 작은 비명도 나왔으나. 저항이나 반항은 없었다. 제롬이 틈을 주지 않아서 였을지. 아니면. 벗겨진 가면 너머에서 반짝인 보라색 눈동자는 이걸 모두 예상했을지.
가면이 벗겨지며 가장 크게 드러난 건 머리카락이었다. 황금빛 머리카락이 가면과 함께 벗겨지더니 그 아래로 어둠 속에서도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머리칼이 쏟아졌다. 그리고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가 이런, 이라고 중얼거렸다. 제롬이 그 목소리에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부드럽고 말랑한 감촉이 제롬의 입술을 덮었다. 잡히지 않은 팔이 제롬의 목을 감싸고 바니걸 차림의 몸이 제롬의 몸과 밀착했다.
어둠 속, 옷과 옷 스치는 소리 사이로 농밀한 소리가 섞여들었다. 언제 빼냈는지 모를 나머지 손과 팔로 제롬을 완전히 붙든 여성, 아니, 여인이 입술을 완전히 떼지 않은 채로 속삭였다.
"그렇게 경계한 것 치곤, 꽤 쉽게 당해버리는 걸. 제제. 내가 아니었으면 큰 일 났을 거야?"
키득키득. 익숙한 여인의 웃음소리가 어둠 속에 잘게 울렸다. 여전히 숨결이, 몸이, 닿아있는 채로.
역시 여인과는 한참 다른 사람이었다. 외모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행동거지가 그렇다. 여인은 언제나 우아한 행동만을 보였으니까. 자신이 여인의 모든 모습을 알지 못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허나 연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으니... 결국 확인해야만 했다. 여인에게 문을 열어준 것 또한 그렇다. 누가 되었든 간에 문을 열어준다면 반사적으로 들어오는게 보통이었으니까. 일단 안에 가둘 수 있다면, 나가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었으니.
"그럼, 얼굴 좀 볼까...?"
여인을 밑에 두고 천천히 가면을 벗긴 그는 흘러내린 금발의 가발에 잠시 당황한 눈치였다.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머리카락과 함께 색이 다른 보랏빛 눈빛이 자신을 응시하자, 당황했는지 말꼬리가 살짝 올라가져며 고개를 갸웃거렸을까. 익숙한 목소리가 이런, 하며 어둠 속에서 자신을 끌어안았다. 상황을 판단할 것도 없이, 제롬은 여인이 목을 감싸자마자 가면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여인의 허릿춤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과 더불어 바니걸로 드러나는 여인의 몸이, 그대로 느껴져, 그의 숨이 살짝 거칠어졌다.
옷과 옷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 부드러운 살덩이가 얽히는 소리. 적막한 방 안에서 야릇한 소리만이 조용히 울렸고, 그런 적막을 깬 것은 여인의 속삭임이었다.
"가녀린 사람이었으니까. 힘으로 제압할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당했다는 듯, 난처한 웃음을 뱉었다. 여인의 웃음과 섞여 숨결을 교환했다. 몸이 닿아있던 탓에 열기가 전달되어 그렇게 더운 날씨가 아님에도 실내는 더웠다. 아니, 내가 당황해서 더운 건가? 그럼에도 그는 여인의 허릿춤에 갔던 손을 뒷머리 쪽으로 가져가 여인의 얼굴을 끌어당긴다. 입술이 살짝 닿아있던 상태였지만 그가 행동함으로써 살짝이 아니게 되었을까. 그는 여인의 뒷머리를 놔주지 않고 진득한 키스를 이어갔다. 둘의 숨이 부족해져 어질해질 때까지, 키스는 계속되었다.
"푸하... 오랜만이야, 벨라."
불이 있었다면 볼 수 있었을까. 긴 시간동안 호흡을 참는 것 때문인지 밀착한 여인의 몸 때문인지 불그스름해진 얼굴과, 방금까지만 해도 격했던 입맞춤의 증거로 남아있는 여인과 남자의 입술 사이를 잇는 늘어진 실 등을. 어둠 속이라 잘 보지 못 했을지도 모른다.
마주 감싸오는 손과 허리에 둘러지는 팔의 몸짓으로 긴 설명은 필요 없겠구나 싶었다. 입술을 겹칠 때 저항하지 않고 되려 거칠어지는 숨은 여인은 자극시키기에 충분했고. 그렇기에 입맞춤은 더욱 진하고 끈적했을 터였다. 잠시 떼어진 입술 사이로 숨결이 오가는 것마저 안달날 만큼.
"이 도시에선, 보이는 대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내가 몇 번이나 가르쳐 줬잖아. 그걸 싹 까먹은 건 아니겠지. 아가."
숨 섞인 목소리는 깃털로 귀를 간지럽히듯 간지러웠다. 거기에 따라붙는 아가, 라는 호칭은 여인이 제롬에게 종종 쓰던 놀림거리 중 하나였다. 지금이야 품에 여인은 가둘 만큼 장성했지만. 아직 여인보다 작았을 시절이 있었으니.
장난스레 부르기 무섭게 머리를 감싸 당기는 손길을 따라 다시금 제롬과 입술을 겹쳤다. 제롬이 여인의 뒷머리에서 손을 떼지 않은 덕에 더 가까이 붙어 키스를 즐길 수 있었다. 머리는 제롬의 손에. 몸은 제롬의 팔에. 여인이야말로 아무 경계 없이 전신을 맡기고 키스에만 열중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다 못 해 눈도 뜨기 힘들 정도로 아찔해질 때까지.
겨우 두 입술이 떨어졌을 때. 여인 역시 잠에 취하기라도 한 듯 몽롱한 표정의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서 제롬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늘어진 실을 보곤 살짝 고개를 들어 가볍게 입맞춤을 하며 속삭였다.
"오랜만이야. 나의 제제.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후훗. 하는 짧은 웃음소리가 뒤를 잇고 여인의 고개가 제롬의 어깨에 툭 기대었다. 흐으. 아직 모자란 숨을 고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숨 고르기를 따라 오르락 내리락 하는 몸은 제롬의 팔과 품으로 온전히 느껴졌을 것이고. 이내 긴 숨을 내쉬며 나른히 풀어지는 것까지 그대로 전해졌다. 여인은 이제 제롬의 지탱이 없으면 주저앉을지도 모르는 상태로 제롬에게 기대 종알대었다.
"여기서 계속 하는 것도 스릴 넘쳐서 좋지만. 좀 더 편히 있고 싶어. 제제. 날 안으로 데려가 줄래..?"
어둠 속이라 평소보다 대범해진 건지. 어둠 속이러서 더 놀리고 싶어진 건지. 여인은 평소보다 간드러지고 간질이는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맞댄 몸을 살살 부비는 행동은 평소, 같았으려나. 얄팍한 옷 너머로 굴곡도 감촉도 선명히 느껴지게끔 하면서 귓가에 소곤거리기도 했다.
서로 닮고도 닮지 않았다. 그 부족한 면모를 서로 채워가고자 했다. 아무리 경험이 없다 한들 자신은 현실에서 어리다면 감정에서 미세하지만 조금 더 어른스러운 부류였고, 눈앞의 여성은 그 반대였다. 지금과 같은 관계에서는 순진하고 낯설어하는, 마치 아무도 밟지 않아 새하얀 눈밭 같은 사람. 그렇기 때문인지 불쑥 감정이 고개를 치밀고 나와 조금 더 짓궂게, 그 애정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부추기게끔 만들곤 한다. 비록 그 이후가 스스로를 원망하게끔 하는 재앙이라 한들.
"으음."
과연 어떨까? 생각하면 답은 한 가지지만 굳이 밖으로 내지 않았다. 반응을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워서 더 그랬다. 땡그래진 눈도 그렇고, 셰바 사람이 셰바답지 않은 표정도 짓고. 늘 새롭고 모든 면이 사소한 행복을 불러오는 당신. 입막음 키스에 눈을 나긋하게 내리감더니 피히히, 하고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두 번은 안 당할 거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친다. "로로를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고.." 하며 시선만으로 이루어진 말 없는 질문에 답한다. 이제 무섭다면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페로사 몬테까를로라는 사람이 너무 깊숙하게 채워져서, 이젠 응석을 부리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다. 아이처럼 바스스 미소 짓고 주조과정을 구경한다. 올리브가 으깨지는 광경도, 셰이커를 흔드는 모습도, 마티니 글라스에 담기는 뿌연 액체도. 잔을 잡는 방식은 늘 그렇듯 소지를 편 한 손으로 기다란 대를 쥐고, 다른 손으로 넓은 잔을 받치는 모양새다. 한 모금 목으로 넘기면 비강 너머로 난잡하고 눅진한 감칠맛이 혀를 감싼다. 진탕 휘젓는 맛을 뒤로 눈을 동그랗게 뜬다. 페로사의 미소를 마주하며, 눈을 굴린다. 야살스러운 눈빛의 너머로 새 초콜릿을 집어 든 손이 보였다. 어떻게 할까? 눈을 가늘고 길게 찢듯 웃었다.
"로로도 참.. 으응, 그렇네.. 새로운 모험이네.. 새 출발에 걸맞은 것 같기도 하고.."
잔을 내려놓고 턱을 괴며 속삭였다. "마티니랑 어울릴 것 같은데.. 자기, 초콜릿 주실 거죠..? 그러면 정말 기쁠 거야.."
간지러운 말 탓인지, 아니면 목소리 탓인지, 제롬의 몸이 약간이지만 떨려왔다. 여인에게 역시 그 떨림이 전해졌을까. 여인이 그를 놀리자 그는 투덜거리듯 입을 살짝 내밀며 여인을 내려보았다. 5년 전에야 여인의 품에 안길 정도로 작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젠 여인을 그의 품에 파묻을 수 있었음에도 여전히 아가라 부르는 것은, 필시 자신을 놀리는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여인이 아직도 자신을 남자로 보지 않는 것일까 싶어, 조금 심술이 났다. 하지만 아직은 장난을 칠 때가 아니기도 하여 참기로 했을까. 조금만 더, 나중에.
긴 긴 시간동안 이어진 입맞춤은 달콤하고도 어지러웠다. 그는 어둠 속에서 몽롱해진 여인의 얼굴을 보며 잠시 멍하니 있다, 방심하는 사이 한번 더 입술에서 느껴진 부드러운 감촉에 순간 뒤로 살짝 물러서며 입술을 매만졌다.
"사실, 가면을 쓴 모습을 봤을 때 오늘도 못 보는 건가 싶었는데... 보고 싶은 얼굴을 가면 속에 숨겨두다니, 못됐어."
후훗. 하는 웃음소리에 그는 가볍게 툴툴대고는 여인이 고개를 제 어깨에 기대자 조용히 받쳐주었다. 모자란 숨을 고르는 그 모습이, 제게 온전히 기댄 채로 힘을 빼고있는 그 모습이 어쩐지 야릇하게 느껴져 그는 제 이성을 붙잡아야만 했다. 어둠 속이라 그 곤란한 듯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점차 빨라지는 그 심장박동은, 맞닿아있는 둘의 몸을 통해, 얇은 천 너머로 느껴졌을까.
"...그렇게 말하면, 나, 진짜로 조절하기 어려운데."
귓가에 속삭이는 간드러진 목소리. 제롬은 여인이 제 귀를 혀로 간질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제 품에 안겨있는 여인의 온기와 굴곡이 옷 너머로 전해지는 탓에 안 그래도 약해진 자제력에, 그녀는 오히려 불을 붙였다. 짧은 소리와 함께 달콤한 숨이 여인의 입에서 나와 그의 귓속으로 파고들자 그는 더이상 참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살짝 떨구고 여인의 귀에 입을 가까이 가져간다.
"이건 네가 자초한 거야...알겠지?"
안으로 데려가달라는 말에 충실하게 그는 여인을 들어올렸다. 등을 받친 채로 다리 밑에 손을 넣어 안아올리는 자세로. 자제력을 잃은 그의 행동이 격했던 탓에 여인의 옷이 불안했지만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을까. 제롬은 여인을 안아든 채로 제 방을 향해 걸어가고는 여인을 침대 위로 눕혔다. 혼자서 넓은 침대를 쓰는지 꽤 큰 사이즈의 침대 위로 여인이 눕혀지고, 이내 그의 몸 역시 여인의 위로 허물어졌다.
"사랑해, 벨라."
방은 어둠으로 가득 차있었다. 빛줄기 하나 안 들어오는, 마치 영원히 지속되는 한밤중과 같은 방 안에서, 여인에게 으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는 살짝 제 얼굴을 움직여 여인의 입에 다시 한번 진하게 키스했다.
기왕 구원받지 못할 삶이라면, 적어도 행복하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마음껏 탐하고, 마음껏 탐욕의 대상이 되어도 좋다. 당신을 탐욕할... 그리고 당신에게 탐욕당해 줄 누군가가 이제는 있지 않은가. 이미 피할 수 없는 재앙이 우리의 삶에 도래했기에, 살아가는 동안에 즐기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마음껏 방탕하게 즐기기엔 그녀가 아직 누구도 발을 딛지 않은 뽀얀 눈밭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문제일지도 모르나, 생각해보면 이 비탄의 도시에서 이렇게 순수히 남아있는 마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것을 당신 마음대로 물들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손은 무수한 이들의 피로 절었더라도 가슴팍에 흔적을 남기는 것은 당신뿐이다.
소리 없이 건네진 질문과 나직이 되돌아온 대답. 페로사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코스터 위에 잔을 놓아주고, 페로사는 잔을 집어드는 당신의 손을 바라보면서 초콜릿을 꺼냈다. 저 눈웃음. 페로사는 초승달처럼 가늘게 눈웃음치는 당신을 마주보며 생각했다. 정말이지 너는 나를 미치게 만들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네 얼굴에 가면을 다시 씌워준 순간부터 나는 미쳐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페로사는 생각했다.
유혹하듯이 나직이 속삭이는 소리에, 그녀는 확언을 건네어주었다. "여기서 네 것 아닌 게 있었니?" 그 잔도, 이 초콜릿도,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도. 페로사는 그 하얀 트러플을 자신의 입술 사이에 끼우듯 물렸다. 그리고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당신에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좋을 대로 탐하라는 듯이.
깨물어보면, 쉽게 깨어지는 얄팍한 화이트 초콜릿의 껍질 너머로 그 뒤에 숨어있던 다크 초콜릿과 리큐르 퓨레가 당신의 입 안으로 엉망진창으로 쏟아진다. 달게 깔리는 화이트 초콜릿의 맛도 잠깐, 진의 향과 드라이 베르무트의 향이 다크 초콜릿의 강렬한 단맛과 한가득 얽혀서 당신과 그녀 사이를 잔뜩 질척하게 메워온다.
>>829 에만이 마카롱은 좋아하려나. 에만을 만나고 난 이후로부터 안 하던 짓을 하는 게 늘었어, 페로사는. 옷차림도 그렇고, 웨딩잡지도 그렇고, 요즘은 퇴근길에 평소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던 양과자점 같은 데에 종종 한 번씩 들러본다네. 얼어죽어도 오토바이였고, 픽업트럭은 그냥 사놓고 내버려두다가 필요할 때 타는 정도였지만 최근에는 픽업트럭을 OD모터스에 튜닝해달라고 맡겼다나...?
>>835 낭만은 오토바이지만, 이제 페로사가 슬슬 안전을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거지.. 차 소음을 줄이고 방탄유리를 장착하는 등 멋보다는 실용성(정숙성과 내구도) 위주의 개조려나. 머랭쿠키랑 폰던트 쥐구나. (메모) 그나저나 그러면 페로사가 에만한테 새 이름 줄 때쯤이면 앤빌의 바텐더가 정분이 났다고 동네방네 소문이 났겠는데 🤔🙄
보이지 않는다는 건 단순하게 시야가 제한된다는 디메리트 같지만. 인간의 오감이란 제법 용한 구석이 있어서. 하나가 제기능을 못 하면 다른 것들로 부족한 기능을 메꾸려 했다. 보이지 않는 만큼 감각을 예민하게 해 짧은 스침마저 느껴지게 하고. 들리지 않던 소리를 들리게 했다. 거기에 점차 어둠에 익은 눈이 어렴풋이 보여주는 윤곽이 더해지면. 어쩐지 평소보다 기분이 쉬이 들뜨게 되었다.
분명, 어둠은 그런 공간이 아니었음에도. 누군가와... 제롬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공간의 의미는 뒤집혔다.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이 차이는 같은데 무얼. 후후... 음. 결국 봐놓고는. 그래도 받지 않고 거절했으면 정말 못 볼 뻔 하긴 했지?"
제롬의 목소리에 답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어두운 방 안에 잔잔히 울렸다. 이렇게 맞닿아 있지 않았다면 필시 허공에 대고 얘기하는 느낌이었겠지. 가늘게 떨리는 몸이나 점점 빨라지는 심박 같은 것들이 이토록 생생히 느껴지지 않았다면. 허공에 던진 물음에 대답이 온다 한들 너무나 외로운 기분이 들었을 테다.
기타줄을 튕기듯 이성을 건드리는 여인의 말이 제롬 안의 무언가에 불을 붙였으리란 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고개 숙여 가까이 온 속삭임에 숨 반 소리 반 흘려버린 건 방심한 탓이었을까.
제롬이 여인을 안아들자 도와주듯 여인도 팔에 힘을 주어 제롬에게 안겼다. 허공에 뜬 발에서 구두가 달랑거리던 것도 잠시. 방으로 걸어가는 사이 벗겨져 어둠 속 어딘가로 굴러갔다. 여인은 모르는 어둠 속을 익숙하게 가로질러 간 제롬이 그 몸을 내려놓자 닿는 건 푹신한 침구였다. 제롬의 집에서 제롬의 침대 위에 눕혀졌다는 사실이 여인 안에도 불씨를 하나 탁 틔웠으나. 여인은 그 불을 다스릴 줄 알았다.
"제제..."
여인은 제롬의 말에 그저 그를 부르기만 하며 입술을 내주었다. 현관에서 그리 앙큼하게 굴 때는 언제이고. 침대에 뉘이니 순한 양이 따로 없었다. 두 팔로 제롬을 안기는 했으나 얌전히 안고만 있었으며. 키스도 리드하는 쪽보다 당하는 쪽에 가까웠다. 조금 전만 해도 숨을 빼았을 듯 탐했으면서. 지금은 몸이 약간 스치기만 해도 부끄러운 듯이 움찔거리며 꼬옥 붙드는 걸로 제롬의 행동이 더 나아가지 못 하게 했다. 진한 키스에 다시 숨이 차오를 쯤. 제롬의 아랫입술을 약하게 물어 자연스레 한 호흡 끊었다. 가늘게 숨을 몰아쉬며 말하는 목소리마저 약간 물기가 베어든 것이 아까 귓가에 속삭이던 그 목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오랜만이니까.. 이대로 있고 싶어. 제제한테 안겨있을래. 응..?"
어둠 속에서 여인의 손이 제롬의 옷을 가벼이 쥐고. 떨어진 입술 대신 맞닿은 볼이 살살 부비는 행동들이 제롬의 불씨를 조금은 진정시켜 주었을까. 애초에 여인이 틔운 불씨였긴 했지만.
이 미친 도시에서 확언을 듣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면, 적어도 목숨이나 다름없는 총을 타인에게 건네주는 순간까지 가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죽음을 목전에 두거나, 죽이기 전이나, 그에 비한 절박한 상황일 텐데. 그런 것도 아닌 온기로 이루어진 확언은 천운이었다. 그래서인지 더 탐욕하게 되었다. 욕망하고 간원한다.
"음, 셰프 소유의 신선한 토마토?" 실없는 농담을 건네고 기울인 고개로 다가간다. 가끔 페로사라는 사람은 미카엘을 미치게 만들었다. 아무리 기운도, 체력도 없어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새하얀 듯 새파란 겨울 색 눈동자에 드물지만 모닥불처럼 무언가 일렁이게끔 했다. 지금도 그랬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그 생각을 또 해버릴 정도였다.
처음 접문했을 때는 화이트 초콜릿의 단맛이 났다. 그 뒤로 너무나도 쉽게 깨졌다. 자제심도, 초콜릿도 산산이 부서진다. 한 손으로는 목을 끌어안았다. 다른 손으로는 바 위를 더듬어 잔을 찾고 한구석에 밀어 치웠다. 한 방울 정도 손가락 위로 찰랑여 흘렀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엉망진창으로 쏟아지는 퓨레와 눅진한 초콜릿 향이 가득했다. 그리고 직감했다. 마티니구나. 얽히는 숨 뒤로 쌉싸름함이 가득했다. 둔탁하고 질척한 소리가 귀를 채우고 먹먹하게 다가왔다. 불꽃놀이를 가까이에서 듣듯, 천둥 치는 소리를 가까이에서 들어버린 듯 귀가 먹먹하더니 이내 둘만 이 세상에 남은 것 같았다. 잠깐 숨을 고르고 다시 입 맞췄을 때, 달뜬 숨소리가 여리게 떨렸다. 가르릉 목에서 울리듯 막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목덜미에서 뺨으로 천천히 손가락이 그림을 그리듯 쓸린다. 엄지로 눈가를 쓸어주며 입술을 떼었을 때, 깨물리고 짧게 물려 짐짓 도톰해진 입술이 간절하게 속삭였다.
"아,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사랑한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이 도시에서 가장 소중하단 말도 진부해졌다. 그로스만도 내팽개칠 수 있을 정도로, 복수도 내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당신이 너무 커졌다. 벅차오르듯 가쁜 숨을 바르르 내쉬다 짐짓 풀린 눈으로 부스스 웃었다.
어쩌면 여인에게도 해당될지 모르는 말이지만, 집 안의 어둠은 제롬에게 있어 퍽 친숙한 것이다. 시야가 크게 제한되지 않은 것은 그 덕이었다. 하나 분위기 탓인지 아니면 어두워진 시야 탓인지, 오감이 예민해지는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었을까. 어두워진 시야만큼 여인의 촉감이나, 향기, 소리가 평소보다도 더 선명하게 느껴져서, 여인과 마찬가지로 그는 평소보다 더 들뜨고 말았다.
"몸은 달라. 지금은 벨라를 내려다볼 정도로. 사실 거절할까 했는데, 토끼가 뭔가 수상해서 확인했더니... 정답이었네."
잔잔한 목소리에 답하며 여인의 머리에 달린 토끼귀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린다. 아까는 정말 토끼귀처럼 움직였는데, 지금도 가능할까? 그런 생각이 잠시 스쳤다. 사실 지금은 그것보단 다른게 더 문제였지만. 예를 들자면, 아까는 시각적으로만 자극적이었던 여인의 복장이, 현재 다른 감각마저 자극하고 있다는 사실이라던가.
결국 그 복장에서 이어진 불씨는 여인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기름을 부은 듯, 제롬의 이성을 잡아먹을 정도로 커져버렸다. 침대 위로 여인을 눕힌 제롬은 여인이 마지막으로 뱉었던 숨소리를 기억했다. 당황했구나. 마음 속에서 짓궂음이 피어올라 키득,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벨라, 혀 내밀어."
여인은 침대 위에선 순한 양이 되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여인에게, 그는 강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얌전히 자신을 안고 있는 여인의 숨을 탐했다. 두 살덩이가 섞이며 야릇한 소리를 자아내었다. 여인은 조금 전과는 달리 순해졌으나, 그는 조금 더 탐욕적으로 여인의 입술을 탐했다. 간간히 입술과 하얀 이를 건드리며 자극적인 입맞춤은 오랫동안 이어졌고, 여인이 제롬의 몸을 꼬옥 붙들면 그만큼 그 시간은 길어졌을 것이다. 숨결의 열기 탓에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몽롱한 기분이 들 때 즈음, 그녀는 그의 입술을 살짝 깨물어 잠시 그를 멈추었다.
물기어린 목소리로 가늘게 속삭이는 그 모습이 자신이 아는 여인이 맞나 싶었다. 언제나 당당하고, 앙큼하게 사람을 유혹하는 여우 같은 사람. 하지만 제 밑에서 가는 목소리로 속삭이는 여인은 남성의 불씨를 진정시켜주진 못 했다. 오히려, 가학심을 불러일으켰으면 모를까.
"잠깐, 벨라. 여기는 내 집이잖아. 그치? 원하는게 있으면 부탁을 해야지."
살살 볼을 부비는 여인의 어깨를 잡아 자신에게서 떨어트려 놓으며, 그는 어둠 속에서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평소 저가 하고싶은 것을 하지 못 하도록 막은 여인에 대한 소소한 복수였다. 저에게 안기려던 여인을 침대에 다시 눕힌 채로, 그는 여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안기고 싶다면 내게 부탁해봐 벨라. 어서." 그는 여인의 어깨를 잡고 얼굴만을 귓가에 가까이 하더니 낮게 속삭이며, 동시에 여인의 귓바퀴를 이빨로 살짝 깨물었다.
여인이 주도권을 놓은 만큼. 제롬이 남은 주도권을 모두 휘어잡은 듯 했다. 그나마 상냥하던 조금 전과 달리 침대 위에서의 제롬은 여인을 몰아붙이듯 굴었다. 이끌리면 이끌리는 대로 끌어가며 깊숙히까지 파고들 기세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여인이 입술을 물어 멈추지 않았다면 가쁜 숨 소리 다음엔 여유를 잃은 교성 밖에 없었겠지.
그것도 싫지는 않지만. 모처럼이니까. 라고 여인은 생각했다.
일단은 살살 달래는 것으로 조금은 진정되길 바랐으나. 여인의 말과 행동은 오히려 제롬의 내면의 무언가를 깨운 듯 했다. 이런 걸 스위치가 눌렸다고 하던가. 꾹 밀어져 안은 팔마저 풀린 여인은 손을 입가로 모으고 안절부절하는 듯 굴었다. 실제로 몸이 달아 그런 것도 있긴 했으니.
"제제... ㅎ-"
제롬이 귓가에 속삭였을 땐 작게 숨을 들이켰다가, 귀를 무는 짜릿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버렸다. 참을 생각은 없었지만 어둠 속이라 감각이 예민해진 탓에 더 야릇한 소리가 난 건 의도가 아니었다. 여인은 당황 반 이성 반으로 몸을 가늘게 떨며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심히 손을 움직여 제롬의 어깨에 올리면서 말했다.
"왜 그러는 거야.. 아까 놀려서 그래? 가면 쓰고 나 아닌 척 해서...?"
떨림이 섞인 목소리는 소리만 듣자면 여러 감정이 느껴지게 했다. 불안. 무서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한 당황 혹은 당혹스러움. 흐윽. 하고 짧게 들이키는 숨소리가 말 속의 감정을 고조시켰다.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여인의 얼굴엔 평소 쉬이 볼 수 없는 불안해하는 표정이 그려져 있었다. 계속 물고 빨아 부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눈썹은 끝을 내리고 눈매는 둥글게 풀어진 채로.
"못 됐어. 정말... 부탁하면, 안아주는 거지? 제제가 그렇게 말 했어. 응? 그러니까."
중얼거리던 여인이 손을 움직였다. 제롬의 어깨에 그저 얹기만 했던 손을 들어 제롬을 향해 두 팔을 쭉 뻗었다. 팔을 뻗어 품을 열었지만 다리는 오므려 완전히 허락한 건 아니라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서. 살짝 달라진 음색으로 부탁을 했다.
"지금은 잠시도 떨어져 있기 싫으니까. 안아줘요. 안아주세요... 네?"
익숙한 어둠 속에서 익숙한 여인의 눈동자가 천천히 깜빡였다. 깜빡이며 제롬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네가 나처럼 엉망진창인 사람에게 욕망을 갖게 된 걸까. 종종은 두려워서 물어보지 못했다. 종종은... 당신의 마음에 반응하는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기에 바빠서 물어볼 수 없었다. 하지만 물어보지 않아도 별로 괜찮지 않을까 싶다. 지금 자신에게 너는 왜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물어봐도,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니까- 하고 대답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저 자신이 엉망진창인 부분과 당신이 엉망진창인 부분이 아주 우연히도 서로에게 들어맞는 모양이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해볼 뿐이다.
아니, 그 짐작마저도 필요없다. 더 이상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당신과의 시간을 온전히 즐기고 싶었다. 지금까지 알던 것들, 다른 신경쓸 것들, 이 순간과 상관없는 것들은 모두 내다버리고. 서로의 호흡이 어지럽게 뒤섞인다. 당신의 입술, 숨결, 뺨으로 미끄러져오는 손끝 하나까지 모두가 페로사라는 사람 위에 새겨져간다.
"미카엘." 채 고르지 못해 흔들리는 숨결로 간절하게 탄원하듯이, 그녀는 당신의 이름을 불렀다. "미카엘......"
한 번의 입맞춤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어서, 페로사는 다시금 한 번 더 탐욕스럽게 당신에게 입을 맞췄다. 떨리는 손끝이 당신의 목덜미를 애틋하게 쥐어온다. 한 번의 접문이 더 끝나고서 페로사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나는 내일도 너한테 의지하게 될 거야." 그리곤 당신의 뺨을 한 번 쓸어보았다. 당신의 뺨을 쓸던 손은 턱에서 멈췄고, 그녀는 당신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살며시 매만져보았다.
"입으로는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면서, 사실 머리로는 모든 게 끝장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수입에서 가능한 한 많은 몫을 떼서 달러화로 저금해두면서도 이게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나는 살아가는 게 아니라 천천히 죽어가게 될 거라고 각오했는데... 미카엘. 네가 그걸 다 망쳤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알코올 냄새와 초콜릿 향기가, 당신과 이 여인만이 그 안을 볼 수 있는 고해소 안을 천천히 메워나갔다. 당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단순히 정욕이나 애정, 사랑, 애착, 호의, 탐욕 같은 한 마디 말로는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그 모든 것을 뭉뚱그려놓은 것만 같은 무언가가 선명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인의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을 그는 가만히 눈에 담아두었다. 어둠속에서 눈이 익은지는 오래라, 여인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선명히 보였다. 평소와는 달리 여유 없는 모습. 과거 여인을 처음 만났을 때는 볼 수 없던 모습이다. 오직 자신을 만날 때만 보이는, 사랑스러운 모습. 그런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좋지만, 조금 더, 여인을 놀리고 싶었다.
가만히 두기에는 여인뿐만 아니라 제롬 역시 몸이 꽤나 달아있었기에.
"귀여운 목소리야... 벨라..."
가늘게 떠는게 숨소리에서 느껴진다. 필시 방금 자신이 주었던 자극 때문일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정복감 비슷한 감정에 입술이 굼실굼실 올라가며 웃음이 새어나왔다. 제 밑에 깔린 여인을 아는 사람들은 여인의 이런 야릇한 소리를 들어본 적 없겠지. 그런 생각이 들수록, 여인이 더욱 사랑스럽다. 그만 볼 수 있는 모습, 그만 들을 수 있는 소리, 여인은 지금, 그의 것이었다.
"...벨라가..."
야해서. 그는 불안해하는 여인의 모습을 즐기는지 잠시 뜸을 들이다 여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여인이 했던 것처럼 귓가에 숨결을 한번 더 불어넣는다. 여인 탓일까, 달은 몸 때문에 뜨거워진 숨결이 여인의 귀를 간질인다. 둥글게 풀어진 눈매를 손을 뻗어 살살 쓰다듬으며 여인의 목소리를 기다리다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희미하게 웃는다.
여인의 질문에 당연하지. 라는 대답이 들려오자 여인은 행동했다. 저를 향해 품을 열어주듯 두 팔을 쭉 뻗은 모습이었다. 남성은 피어오르는 미소를 꾹 참으며 여인을 향해 몸을 숙인다.
"잘했어 벨라. 착하지."
그의 몸이 여인의 위로 허물어지고, 그의 두 팔은 여인의 목 뒤로 집어넣으며 여인의 머리를 그의 넓은 품 안에 파묻듯 끌어안는다. 둘 사이에 체격 차이가 꽤 난다는 것을 실감하며, 남성은 뒷머리 쪽으로 손을 가져가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넓고, 의외로 투박한 손이 여인의 머리를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쓰다듬기 시작한다. 부드러운 머리카락 한올 한올이 손가락 사이를 스치는 소리가 조용히 방 안을 울린다.
차분히 여인을 쓰다듬으며 안고 있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벨라의 머리를 제 품에 파묻은 채, 여인을 살짝 내려다본다.
"그런데,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
그의 목소리가 방 안의 적막을 깬다. 두 사람의 가쁜 숨소리와 심장박동만 들리던 방 안은, 다시금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여인의 귓가를 간질인다.
"내가 언제까지 참아야 해?"
여인의 뒤를 받치고 있던 손은 어느샌가 움직인다. 목덜미에서 시작한 손길은 목선을 따라 척추가 튀어나온 부분을 현을 튕기듯 짓누르거나,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여인이 시선을 올려 남성의 눈을 바라보면, 내려다보는 익숙한 눈빛이 한순간 미약한 보랏빛으로 반짝였을지도 모른다.
>>898 현생 일이면 더더욱 미안해할 필요 없지. 어쩔 수 없이 우선해야 되는 일이니까. 항상 하는 일이지만 서두르지 말고 느긋하게 써와줘. 난 답레 텀이 길어지는 것에는 전혀 개의치 않으니까. 현생 관련이면 더더욱. (토닥토닥)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 일도 좋지 않은 기분도 빠르게 지나가길 바래.
분명 그런 시절도 있었다. 여인이 조금만 옆에 가까이 가도 제롬의 얼굴이 빨개지고 숨쉬듯 하는 스킨쉽에 경계를 올리던 시절이. 분명 있었는데. 지금 여인을 내려다보는 제롬을 보면 그 시절이 거짓말 같이 느껴졌다. 그랬던 제롬이 맞나 싶을 만큼.
명백히 우위를 점한 이의 태세였다. 지금의 제롬은. 평소라면 조금만 목소리를 떨어도 손을 떼거나 안색을 살폈을 텐데. 지금은 여인의 그런 반응 하나 하나를 즐기고 있음이 피부로 와닿았다. 그런 제롬의 공간 깊숙히 갇힌 여인은 그 손 위에서 놀아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 마저도 놀아주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 여인이었으니까.
제롬이 일부러 귓가에 대고 속삭일 때마다 여인의 가는 몸이 떨렸다. 살짝 문 입술 사이로 소리가 가늘게 새어나오는 것을 제롬은 들을 수 있었을 터였다. 여인의 목소리나 움직임은 제롬의 정복감을 더욱 키워주기에 적절했다. 아주 가는 솜털로 자극하듯이. 살살 건드려가며 더 깊게 끌어들였다.
"하아. 제제.."
여인이 안아달라는 부탁을 하고서야 아이 달래듯이 안아주는 제롬이었다. 푹 하고 감싸오는 품에 여인은 가는 숨을 흘리며 파고들었다. 의도했든 어쨌든 다시 안기니 긴장이 풀리는 건 당연했다. 가볍게 팔을 둘러 안고만 있던 여인과 달리 제롬은 느릿하게 여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롬의 손은 거칠어도 손길은 부드러워서. 어둠 속의 편안함에 눈만 감으면 그대로 잠들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여인은 그럴 생각이 없었고. 제롬도 없는 듯 했으니.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느껴지지 않는 어두운 방 안에 문득 제롬의 목소리가 울렸다. 여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제롬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눈에 익은 캄캄함 속에서 제롬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들려온 그 질문이란 건 그렇게 놀랄 것도 아닌 것이었으나.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제롬의 손 때문에 반응은 제법 민감하게 나왔다.
흣. 하고 숨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여인의 손이 제롬의 옷을 쥐었다. 여인의 옷은 등이 훤히 파인 옷이었기에 제롬의 손은 맨살의 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게다가 시야가 어렴풋한 이 상황에 감각은 평소의 배로 민감했고. 그저 간지러움으로 지나갔을 손길조차도 마치 전신을 훑는 듯이 느껴지게 했다. 느끼는 만큼 나오는 소리와 행동이 제롬에겐 만족스러웠을까. 잠시 숨을 고른 여인은 자세를 추스르고 몸을 옆으로 빼는 척 하며 말했다.
"무얼 참는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이대로 있는게 좋지 않아? 나는 이대로도 좋아."
참는다는게 무얼 뜻하는 건지 여인이 정녕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모르는 척 했다. 순진하게.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이 굴며 제롬의 품을 벗어나 움직이려 했다. 이미 엉망이 된 옷을 괜히 한 손으로 끌어올려 시선이 가게 하면서. 몸을 일으키는 척 다리를 움직여 제롬에게 스치게 하면서.
"장난 그만 치고. 느긋하게 있자. 느긋하게..."
말은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듯이 하면서도. 연이은 행동들은 아닌 듯 굴어대니. 마치 제롬의 자제력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느껴졌을 지도 모르겠다.
흔들리는 숨결 뒤로 탄원한다. 탁하게 읊조린들, 숨이 꺼져가듯 작든, 혹은 무엇보다 농밀하든 천사는 들을 것이다. 듣고 답할 것이다. "여기 있어." 참 이상하다. 들을 때마다 고통스럽던 이름인데 당신이 한 글자씩 말할 때마다 그 상처가 녹게 된다. 밀랍이 녹아버리듯 어딘가에 굳겠지만 상처 있을 곳이 아닌 바닥으로 뚝 떨어진다. 탐욕스럽게 입을 맞추자 눈을 감았다. 목덜미의 온기가 떨린다. 입술을 떼자 이젠 머리까지 헝클어져 엉망이다.
"언제라도 의지해 줘. 이 도시에서 의지할 건 우리 둘뿐이잖아."
가는 숨 뒤로 온기를 느끼듯 손바닥에 고개를 맡긴다. 천천히 뺨을 비비고, 엄지로 입술을 만질 적 작게 벌어진 입술은 열감에 붉고 매끈하다. 자각하지 못하는 야릇함 묻어 나온다.
"로로, 페로사."
안타까운 내 사람. 어딜 가려고, 셰바에서 나고 자랐으면, 셰바에 발 들였으면 함께 해야지. 네 붉은 화장을 지운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널 몰라볼 줄 아니?* 네가 품은 푸른 하늘을 나도 꿈꾸나 우리는 그 꿈을 품고만 살아야 함을 알면서, 죽어가는 삶 말고 여기서 살아야지. 죄다 뺏고 손에 쥐어 푸른색 되찾을 순간까지. 그 소소한 행복 사이로.. 망쳐버렸다는 말이 나오자 환히 웃었다. 엄지가 매만졌던 입술이 판판하게 펴지며 기이한 호선을 그었다.
"원망이 아니라 구원이길 바라."
감정 어린 눈동자를 마주했다. 천천히 손을 들어 뺨 위에 손을 얹으려 했다. 양 뺨을 소중히 덮고 눈가를 쓸어주고 그 긴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얽힐 적에 눈마저 휜다.
"여기는 무섭고 추운 곳이지.. 푸른 하늘이 그리울 거야. 해변은 아름다운 곳이고, 가족의 웃음소리는 귀를 맴돌겠지.. 그렇지만 이미 우린 셰바 사람이고, 희망을 가지자 말해도 망해버렸다 한들 이곳의 다른 희망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지.."
망가뜨리기엔 우리는 너무 망가져있고, 손안에 쥐기엔 이미 바스러졌으나, 그 바스러진 잔해가 폐부를 얼리고 혈관을 타며 돌아다녀 끝끝내 올라서겠지.
"나랑 같이 있자. 새로 살아갈 기회를 가져보자. 셰바에서, 같이. 오로지 나와 너, 오롯이 너와 나."
정말이지 난 이런 말 할 때면 마음이 급해서 머릿속에서 정리가 잘 안 된다니까.. 에만주의 글, 항상 예뻐서 좋아해. 매번 답레 써주고 어울려줘서 고마워. 페로사도 에만주에게 좋은 앤캐가 됐으면 좋겠는데 에만주가 답레 쓰기 좋은 글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슬프다.. 88 내가 좀 더 노력해볼게.
아냐, 아냐. 페로사주 잘못 아니니까 노력하지 않아도 돼. 나야말로 늘 고맙고 페로사랑 이렇게 서사 쌓을 수 있어서 행복해. 내가 글 못쓰겠다 한 건 현생 사정 때문에 그래. 개인적인 일이 오늘 점심에 너무 크게 치고갔는데.. 그걸 풀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서 그런 거니까. 페로사주는 충분히 잘 써주고 매끄럽게 잇도록 도와주니까 미안해하거나 그럴 필요 없어. 다들 많이 좋아해. 내 맘 알지. 힘낼게.
"헤, 형편 좋은 소리 하고 있기는. 이 도시에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얼마나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죄다 사람 이하거나 이상인 녀석들 뿐이야."
비탄의 도시, 라는 것도 충분히 허울좋은 이명일테지. 살기 좋게 꾸려진 시궁창이 바로 현재의 뉴 베르셰바였다. 그리고 그런 곳으로 스스로 흘러들어오는 로미와 같은 군상도, 평범한 인간의 범주에 놓여있다고는 할 수 없을테다. 단지 그곳에 힘의 파편들이 묻혀있다는 이유로 말이다. 예를들면 눈 앞의, 잿빛색의 사람보다도 사람같은 기계인형처럼.
"~뭐어어. 난 그런거 조금도 신경 안쓰는 주의지만. 아무튼 방심하고 다니지 말라구우. 모처럼 직원으로 고용까지 해줬는데 나도 재미 좀 봐야하지 않겠어? 아, 그치만 산책은 됐어. 내가 무슨 개냐!"
로미가 키들거리면서 손에 들고있던 만화책을 거꾸로 엎어놓았다. 가게의 꼴부터가 어느정도 반증하고 있지만 물건을 퍽 함부로 다루는 여자다. 이 가게에서 주로 취급하는 품목. 무기라는 것은 정교하게 설계되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목표를 제거하기 위한, 말하자면 사용자의 신뢰가 가장 중요한 물건. 어떻게 이런 사람의 손에서 그런 '무기'가 탄생하는 것인지 전혀 모를 일이다. 뉴 베르셰바에서 어쩌면 그런 이해관계 따위는 하등 중요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 이렇게 된 거 사장 분위기 좀 내볼까나~ 니히히- 그렇지그렇지, 마침 유니폼도 준비해 뒀는데 그거 한 번 입어볼래~?"
난데모 메카니컬 상점의 사장이 손을 마주치며 방글 웃었다. 쥬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눈매가 휘었다.
>>963 페로사: 너보다 중요한 게 어딨다고. 페로사: (마주 꼬옥) (... 탄탄하면서도, 근육의 굴곡 하나까지 어떻게 자리잡으면 편안하게 안아줄 수 있는지 아는 것처럼 당신에게 익숙해져 있어 당신의 몸을 편안하게 받아들여주는 품이다. 따뜻하다. 옅은 시트러스 냄새와 데킬라 냄새. 그 사이로 희미하게 느껴지는 살냄새가, 당신이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리게 한다.) 페로사: 화이트 씨가 눈감아주겠다니 다행이네. (킥킥) 푹 쉬어. ■■■.
"꿈꾸긴 했지만, 바라지는 않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사람도. 누군가 내 나날들을 망쳐줄 사람도. 그렇지만 난 그걸 내심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외로움에는 색깔이 없다고 했던가. 붉은 빛으로 점철된 르메인 배틀리언에서의 생활을 박차고 나온 이후, 페로사가 도달한 호숫가는 색이 없었다. 모든 비바람과 폭풍이 지나가고, 모든 살이 있는 것이 떠나가고, 맑은 물만이 남아 그 어느 것도 살아있지 않은 채로 고요히 말라가던 침묵의 호수. 그 언저리에 가만히 앉은 채로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던 야수의 옆에, 언제부턴가 가면을 쓴 여우가 놀러오기 시작했다. 아무 색 없는 하얀 눈동자인 줄 알았는데, 하얀 만큼이나 파란 겨울의 빛깔을 그 눈에 띄고서.
"그게 다른 누구도 아닌 너인 게, 기뻐."
있었는지조차 쉽사리 눈치채지 못했던 그 색에서부터 모든 색이 번져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빛은 다양한 색을 머금을수록 하얀색에 가까워지는 법인데.
"너로 충분해."
희망. 통상적으로 통용되는 말갛고 정순하며 가슴이 벅차오르는 그것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때로는 음울하고 때로는 질척이며 때로는 구차하고 때로는 잔인하겠지. 이 비탄의 도시에 가장 어울리도록. 그러나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이 밀도높고 질척한 감정이야말로 당신과 그녀 사이의 감정의 벽을 허물어버리고, 서로를 이렇게까지 끈적한 상호예속의 사슬로 묶어버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네가 나로 충분한 것처럼."
그녀가 그렇게 확언할 수 있을 만큼, 당신은 그녀에게 많은 것을 심어주었다. 그녀의 안에 당신은 그만큼 선명한 발자국을 남겼다. 그녀의 가슴 가장 깊은 곳, 강철 늑골 안에 마련되어 있던 그 뽀얀 처녀지에는, 처녀지였던 곳에는 오로지 당신만이 담겨있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네가 내게 준 거잖아. 이 살아있다는 느낌."
어쩌면 저 밖으로- 당신과는 인연이 없을 땅으로 영영 떠나가 버렸을지도 모를 이 여인을, 당신은 당신에게 붙들어매어 놓는 데에 성공했다. 페로사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초콜릿 향과 마티니 향, 알코올향이 담긴 한숨을.
"더 원해...?"
페로사는 한숨을 나직이 쉬었다. 야릇한 윤기를 머금고 일렁이는 여우의 발간 입술을 바라보는 그녀의 푸르른 눈에 어린 빛에서, 탐욕이 도드라졌다.
음~ 오히려 저한텐 그쪽이 더 솔깃한 말인걸요~? 인간 이하만 있을줄 알았던 세상에 이상의 존재도 있다구요?"
비탄의 도시, 그저 잘 꾸몄을뿐인 시궁창, 사람 살 구실만 만들어낸 연옥, 신에게 버려진 지상낙원 등등... 뉴 베르셰바를 일컫는 수식어는 하나같이 부정적이었다.
물론 그런 개차반의 도시라고 해도 인간 이상의 존재가 있으니 그나마 도시와 사회의 체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겠지만... 무법도시가 그런 이명을 달고 있는 것은 결코 괜한 소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의문이 드는 것이다. 로미 카나운트... 딱 봐도 수상쩍어 보이는 여인, 난데모 메카니컬의 오너이자 마스터 엔지니어, 일단 표식상으론 건샵, 즉 무기(총포)상이었으나 외부의 압력을 대하는 태도는 안중에도 없다는 수준의 반응,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로미 스스로의 발언으로 보아선 당신을 쉽게 건드리지 못할 요소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것이 쥐치의 가시지느러미일지, 오리너구리의 독침발톱일지, 라텔의 악취샘일지는 현재의 그녀로서는 알수 없었지만... 저 마냥 곱상하게 보이는 분홍색 산호빛 동공 밑바닥엔 확실한 광기가 저며져있었다.
"글쎄요~ 반려견도 고개를 가로저을만큼 난장판인 건샵은 또 어떨까 싶네요~"
그녀가 로봇이라 할수 없는 제 1요소, 타인을 미묘하게 비꼬는 언행이 빙글거리는 얼굴표정에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보통의 로봇이라면 비꼬는 것을 상대의 의견에 대한 애매한 승낙이라 간주했을 것이다. 솔직히 이런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아 마음 한켠에 묻었지만... 처음 이곳을 왔을때는 폭격이라도 떨어진줄 알았다. 그렇기에 청소업체조차 고개를 가로저었던 걸까? 그도 그럴것이... 이곳에 널브러진건 무기이거나 그런 기능을 할수 있는 부속품들이었으니까, 그것에 대해 모른다면 조금만 건드려도 큰일날 것들이다. 생명적으로든, 금전적으로든...
"유니폼... 이요...?"
아, 그러고보니 분명 저번에 만났을때 로미로부터 사장과 사원의 분위기 정도는 가질수 있도록 유니폼을 준비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그녀였다. 가게의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지금의 낡은 옷은 잠시 개켜두고, 유니폼을 입으라 하니 일단은 입겠다만...
"사이즈는... 맞는건가요? 아니, 맞으면 더 의심스러운 거지만..."
와중에도 그걸 묻는건 또 조심스러웠다. 어쩌랴, 그녀는 한번도 누군가 앞에서 살을 드러낼만한 복장을 입어본적이 없었으며, 그렇기에 제 신체를 차지하고 있는 지방질의 비율이 사람의 기본수치를 아득히 넘어선다는 것에 누구보다 예민한 케이스였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이 도시에 파파라치가 존재해 제 신상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거나 그런걸 전해듣지 않은 이상은 로미가 알 턱이 없었다.
명백히 우위를 점한 태세라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과거엔 여인이 남성에게 줄곧 장난을 쳐왔고, 그때마다 남성은 여인의 손 위에서 놀아날 뿐이었다. 어쩌면, 꽤나 최근까지도.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다. 남성이 장난을 치면 여인이 제 손 위에서 놀아난다. 명백히 의도를 가진 손짓 하나하나에 반응하듯 떨리는 몸과 가늘게 새어나오는 소리는 중독성이 강해서, 그것을 보기 위해 남성은 다시금 여인에게 손장난을 쳤다.
문득 여인이 되려 자신을 자극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그럼에도 멈출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이전에 떠오른 생각을 묻어버렸다.
"귀여워.... 지금, 정말 귀여워."
느릿느릿한 말투로 속삭이는 말에는 손길에서도 그렇듯 여인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왔다. 긴장이 풀린 여인이 제 품에 안겨있는 모습에, 남성은 한번 더 자제심을 발휘해야 했다. 당장에라도 제 팔에 힘을 주어 여인의 몸을 제 품 안에 꽉 파묻어버리고 싶다. 너른 품에 파고들려고 하는 여인의 모습은 그녀가 평소 보이던 그 모습과는 너무나 차이가 큰 것이어서, 되려 그 차이가 더욱 귀여웠지. 설마, 이런 모습도 의도한 것일까?
곧이어 숨 들이키는 소리가 들리자 제롬은 제 손을 더욱 바삐 움직였다. 등이 훤히 파인 옷. 이런 옷을 입고 오다니. 부드러운 살결 위를 제 거친 손가락으로 훑어내리면서도, 남성은 여인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이려 한다.
"생각보다 더 파격적인 복장이라니, 파렴치해, 벨라."
목소리에는 짓궂은 장난기가 진하게 서려있었다. 여인을 놀리는 건지, 웃음 섞인 속삭임이었다. 물론 여인에겐 그 속삭임을 들을 여유가 있었는지는 그는 모를 일이다. 여인이 뱉는 소리와, 행동이, 제롬을 만족시킬 때마다 그는 여인의 반응을 더 갈구하듯 손을 놀렸으니까.
못 참겠다는 말에 여인은 모른 척 몸을 빼려고 했다. 정말로 모를리가 없을텐데. 여유를 되찾은 건지 순식간에 평소의 그 요망한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정말, 방심할 수 없다니까. 시선을 끄는 동작, 다리에서 느껴지는 망사 스타킹의 감촉. 남성은 순간, 여인이 자신을 미치게 만드려고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모르는 척, 자신을 유혹할 수가 있을까. 이대로도 좋다, 라. 정말 이대로도 좋아?
"착각하지 마, 벨라. 아까 말한 건 허락을 구한게 아니야. 경고한 거지."
남성은 여인을 향해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키득키득. 그저 이 상황이 재미있을 뿐이었다. 처음부터 여인은 이렇게 되도록 유도했던 거구나. 정말, 솔직하지 못 한 사람. 그렇기에 사랑스러운 사람.
느긋하게 있자는 여인의 뒷머리를 잡고는 확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여인이 품에서 벗어나려는 듯 했던 움직임은 순식간에 없던 일이 되었다. 거리가 충분히 좁혀지자 남성은 여인의 목덜미로 입가를 가져간다. 처음에 남겼던 자국은 사라졌지만, 라 베르토에 가기 전에 남겼던 자국은 아직 남아있었다. 제롬은 거의 사라져가는 자국을 혀로 지그시 누르더니, 이내 흐려져가는 자국 위에 새로운 자국을 덧씌운다. 남성이 마치 제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국을 새기고도 몇번 입질을 계속하던 그는, 확실히 새겨졌음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들어 여인을 바라본다.
"넌 가만히 있어. 움직이는 건 내가 할게."
여인이 원하는대로, 그는 움직여주기로 했다. 그는 한 손으로는 여인의 허리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제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러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가만히 있기 싫은지 흐트러진 숨결을 탐하듯 여인의 입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이미 몇번이고 입을 맞췄지만 부족했다. 조금만 더, 라는 생각으로 여인의 숨결을 탐한다.
어느샌가 셔츠의 단추를 모두 풀어버린 남성은 열기어린 눈으로 여인의 눈을 마주한다. 생긋 미소를 흘린 그는 "이 방 안에선 밤이 아주, 아주 길 거야." 라고 속삭이고는, 그대로 여인을 품에 안으려고 했다. 조금 다른 의미로, 말이다.
제롬은 여인의 반응을 즐기고 있음과 동시에 말과 행동 모두 애정이 담겨 있었다. 짖궂은 듯 하면서도 어느 행동도 아프게 느껴지지 않았으니. 어둠 속에 녹아들 듯이 엉기는 모든 것들이 애정이자 사랑, 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성을 단단히 쥐고 있음에도 이리 몽롱해질 수가 있었을까.
끊임 없는 자극과 간질한 속삭임에 기울일 정신 한 가닥 쯤은 여인에게 충분히 남아있었지만. 여인은 대답 대신 가쁜 숨을 내뱉고 저항 대신 제롬의 옷을 쥐거나 움찔거리는 것으로 반응을 대신했다. 그 편이 좀 더 제롬을 즐겁게 해줄 테고. 그 즐거움은 곧 여인에게도 공유될 것이었으니.
"응? 제제. 경고라니. 그게 무슨."
한 번 모르는 척을 했으면 끝까지 그리 굴어야 하는 법. 어설픈 기교는 안 하느니만 못 함을 여인은 잘 알았다. 그러나 시시하지 않게 굴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시선을 끌고 감촉을 주어 끌어당겼다. 실제로는 제롬의 손에 의해 여인이 다시 품에 갇혔지만.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제제에, 이러지 말구우. ㅇ-"
여인의 목덜미에 제롬이 닿기 직전까지 아이가 칭얼대는 듯한 목소리가 있었다. 있긴 했으나. 곧 음색이 바뀌었다. 뒤늦게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소리를 참는 것처럼 구는 행동이 기가 막힐 정도였다. 희미해져가던 자국 위에 새로운 자국이 남고 그 위를 몇 번 덧대는 동안. 제롬의 귓가로 참으면서 내는 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도 참, 그랬겠지.
고개를 들어 바라본 여인의 얼굴은 눈가부터 옅게 붉음이 번져 있고 눈가는 한층 촉촉해져 있었다. 입술을 다물지 못 한 채 가늘게 숨을 쉬며 제롬을 지그시 마주보았다. 말은 필요 없었다. 그대로 얌전히 제롬의 팔에 허리를 맡기고. 재차 탐해오는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이번엔 숨을 가져가는 만큼 여인도 숨결을 가져오며 어느새 두 팔로 제롬의 몸을 끌어안았다.
여인의 몸도 충분히 달아 있었으나 셔츠 안에 바할 바는 못 되었다. 그 열기를 옮으려는 듯 가는 두 팔로 휘감듯 끌어안고 다리로 허리를 휘감아 밀착시켰다. 옷 한 겹 지나갈 틈도 없게. 그래서 더 안달나게. 속삭여오는 제롬에게 마주 속삭였다.
"그 긴 밤을 전부 너로 채워 줘. 제제. 너 밖에 생각하지 못 하게 만들어 줘."
절대, 멈추지 말고. 라는 속삭임과 귓볼을 살짝 깨무는 행동은 시작의 신호나 다름 없었다. 그와 동시에 여인 역시 쥐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방은 그 날과 같으면서 달랐다. 장소와 분위기의 차이였을까. 별 것 아닌 듯한 사소한 차이도 피부로 민감하게 느껴져 같은 시간도 그 날과는 달랐다. 서로에게 조금 더 솔직해진 것도 한 몫 했다. 그 모든 요소 하나 하나가 모여 흐르는 시간을 더 농밀하게 빚어내었다. 깊게 더 깊게. 결국은 퓨즈가 끊기듯 의식의 끈마저 놓쳐버릴 때까지.
누구든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내심 바란다. 그게 인간 된 도리이자 어쩔 수 없는 마지막 동아줄이다. 의지할 사람 없는 도시에서 누가 갈망하지 않을까. 그마저도 욕망의 한 부분인데. 어떤 길을 걷든 선택은 주어지고, 우리는 강제되는 선택 속에서 그나마 차선을 선택할 뿐이다. 그게 누군가를 해치는 일이든, 고통받던 삶에 채찍질을 가해 박차하였든, 아니면 있느니만도 못한 가짜 도피처를 만들든. 인생이라는 영화 속 이야기가 끝났다 한들, 각광받던 대본은 높이 평가받는다. 그리고 새 막을 열기에 끝나지 않는다.
"나도 기뻐. 네가 내 곁에 있어서."
희게 보일만치 옅은 눈동자는 금빛 드물게 어린 속눈썹에 가려질 듯, 가는 호선을 그었다. 끝났다고 해도 끝난 게 아니다. 나랑 새 이야기를 쓰자. 당신이 이 비탄의 도시에 남았다고 해도 푸른 하늘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으니. 당신에겐 나만 있으면 되고, 나는 당신만 있으면 된다.
"정말?"
정말 나로 충분해? 속삭이듯 되묻는다. 확답을 얻고 싶었다. 몸소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 당신에게 답만 들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명령이 되고 확언이 될 것이다. 아무리 거짓말이라 한들 진실로 믿을 것이다. 희망이라는 것은 때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쥐여주는 칼만치 잔인하고 겉면의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 그래도 그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을 담고 묶을 수 있다. 고작 그 이름이 희망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들었다. "너무 당당한 거 아니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가는 미소가 말갛게 번져 오른다. 열감 올라 붉은 눈가와 발간 입술이 동시에 호선을 그었다.
"……약속한 거야."
이제 영원히 함께다. 떠나버리지 않기로 약속했다. 지옥 같을지라도 그 지옥을 낙원삼아 살 것이다. 혼자만의 망상이라도 좋다, 언젠가 깨질 꿈이라도 좋다. 꿈이 되기 이전 다 쥐어버리면 되는 일이다. 천사는 제법 욕심이 많았다. 비단 미래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단 숨을 뒤로 나온 질문마저 욕심의 범주에 들었다. 탐욕이 도드라지는 두 눈을 마주하고 입술을 달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