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안 돼. 랑이 부리는 심술은 조그만 것이라서 네가 예쁘게 웃어주면 풀리고 말았고, 너의 목소리가 고운 말을 해주면 풀리고 말았다. 그래서 기습 공격 당했다고 부리던 심술이 온데간데 없이 흩어지고 말았다. 부으으. 다만 랑은 심술도 제대로 못 부린게 심통났다. 그러니까, 원래 계획대로- 너도 빨갛게 물들이고 말겠다고 생각한 대로 지체없이 움직이기로 했다.
"숙여줘-"
랑이 이렇게 마주보고 서서 너를 안을때면 너의 등허리께를 안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팔을 위로 향했다. 네 목덜미 뒤로 팔을 감으려고 했다. 너와 높이를 맞추기 위해서 랑도 발꿈치를 있는 힘껏 들었지만 그정도로는 역부족이라- 네가 높이를 맞춰주는 것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높이를 맞춰주고 나면 너를 꼭 끌어안은 채로 네가 했던 말을 들어준다. 너의 목에도 팬던트가 하나 걸린다. 여우 꼬리가 흔들거린다. 목걸이를 걸어주고 나서는 까치발을 들어가며 높게 너를 안은 목적을 달성하기야 했지만, 랑은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네 뺨에 꼭 입맞추나 싶었는데, 쪽 소리만 난다. 간지러운 숨결과 온기만 가까워졌다가 소리만 남기고 멀어진다. 그리고 네가 그랬듯, 아무일도 없단 듯 목걸이로 관심을 돌리는 것이다.
네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건 축구장 밖에서는 눈치가 낮아지는 현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당연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딱히 별 염려를 안 하고, 현민은 네가 요구하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네가 자신을 해꼬지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제쳐놓고라도, 네가 자신에게 뭔가 해로운 해꼬지를 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확실히 방금 멋대로 뺨에 입맞추어버린 건 순전히 현민의 멋대로 한 일이었기에, 네가 그것을 책망하거나 그 대가로 고약한 장난을 치더라도 당해주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고 현민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숙여줘- 하는 너의 지시는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다. 현민과 네 사이에는 적잖이 키 차이가 있고, 목걸이를 걸어주려면 확실히 현민이 너와 키를 맞추어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현민은 네가 해달라는 대로 눈높이가 맞을 때까지 무릎과 허리를 숙였다. 안아줘, 하는 네 말이 기억났기에, 현민은 팔로 네 허리를 얼싸안았다. 어깨는 네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그것을 목에 채워줘야 하니까. 폴라티의 목소매 위로 무언가 채워지더니, 목에 미약한 무게감이 걸린다. 현민은 자신의 가슴팍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여우 꼬리를 내려다보았다.
그게 가슴팍에서 흔들리는 순간에 현민의 가슴에 차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랑이라고 쓰인 이름표가 가슴에서 흔들리는 것 같았다. 어떤 만족감.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지 모를. 반려견들이 주인에게서 목걸이를 받을 때 이런 기분이 되는 걸까? 아니 그게 이것 같지는 않을 텐데.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행복하면 된 거 아닐까. 그 잠깐의 순간에 현민은 상념에 빠졌고, 그래서 네가 하려는 일에 완전히 무방비한 빈틈을 내어주고 말았다. 눈을 돌렸을 때는 어느샌가 랑이 속눈썹 갯수를 셀 수 있을 거리까지 다가온 뒤였다.
쪽.
하고 소리가 났는데, 소리만 났다. 눈을 감았던 현민은 실눈을 뜨고, 눈을 깜빡이며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그러다 개구지게 웃는 너를 보고 네가 무엇을 했는지 깨닫고 만다. 다시 현민의 눈이 깜빡인다. 그리고... 현민의 귓가에 서려 있던 붉은 물이 현민의 뺨으로 와락 쏟아진다. 그리고 낭패한 표정. 아 당했구나, 하고 현민은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곤 부루퉁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현민이 너를 놔주지 않는다.
현민은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팔에 조심스레 힘을 주었다. 네 허리를 품에 꼬옥 끌어안고는, 그대로 허리를 피며 번쩍 들어버렸다. 네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 너를 품에 안아든 채로, 그는 토라진 눈으로 널 쳐다봤다. 눈높이는, 방금 너와 현민이 맞춘 똑같은 그 눈높이. 그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