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민은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네가 말을 해주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 네가 거리를 두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순간 현민은 뒤늦게야 뒤늦게야 이제서야 알아버리고 들어버리고 만 것이다. 네가 그 이후로 지금껏 내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는 것을. 조그맣고 미약한 메아리, 손짓, 눈빛, 그에게 그저 네게 사랑에 빠질 이유로만 와닿았던 그 모든 것들로 네가 조금씩 말하고 있었던 것을. 네가 벽 너머에서 보내고 있던 조그만 생각들과 말들을.
너의... 구조신호를.
"네가 무서워하는 거, 이해해."
현민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네가 왜, 어떻게 그 무서움을 품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네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는 나도 알아. 나도 비슷한 걸 무서워했고 지금도 무서워하고 있으니까. 이유는 모르지만 네가 그러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네가 자신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이던가, 아니면 좋아하는 것을 무서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이해한다. 누군가를 좋아해주었는데 자신이 마음을 준 사람에게 최악의 형태로 배신당해본 적이 있어서 안다. 너보다야 얕고 너보다야 적은 상처지만 너와 똑같은 종류의 그런 상처다. 그래서 그런 상처를 입은 네게,
나는,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해 주려고 한다.
"괜찮아."
현민은 네 품에 머리를 한없이 파묻고, 너를 꼭 끌어안았다. 아플 정도로 꽉 끌어안지는 않았지만, 네가 충분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꼬옥 안았다. 너를 그렇게 그러안은 채로 그는 계속 말했다.
"무서워해도 괜찮아. 지금 당장 좋아해주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아."
네가 늪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다면, 내가 늪까지 들어가줄게. 돌이키기엔 너무 늦게 왔다. 너를 이렇게 부둥켜안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늪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조금은 겁난다. 조금은 슬프다. 그러나, 후회는 전혀 되지 않는다. 나는 다 괜찮아. 여기에 네가 있으니까. 늪에 있고 싶으면 늪에 있고, 다른 곳에 있고 싶으면 다른 곳에 가자. 우리 둘이 있으면 늪에서 머무를 수도 있고, 다른 곳으로 천천히 떠날 수도 있을 거야. 난 너와 함께 있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어.
"다 괜찮을 거야. 슬프게 만들어도 괜찮아. 그래도 결국 너랑 나랑 여기까지 왔잖아."
상실. 이해한다. 이 순간이 영원무궁할 수는 없다. 우리가 가는 길에 어쩌면 잠시 갈라져야 하는 갈림길도 있을 테고, 어쩌면 서로 한동안 떨어져야 할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몸이 멀어지는 순간도 마음이 멀어지는 순간도 찾아올지 모른다. 그 모든 순간을 넘어선다고 해도 종내에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끝이라는 것이 찾아올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그런 불가피한 엔딩이 찾아오더라도, 서로가 없어졌다는 사실보다 서로가 서로에게 있었다는 사실이 기쁘도록 서로를 사랑하면 된다. 무엇보다, 미래에 그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만으로 현재의 이 마음을 외면하기에는, 그게 너무도, 밝고, 뜨겁고, 눈부시지 않은가. 종말을 두려워하기엔 현재가 너무 따스하고 소중했다. 네가 현민에게 안겨준 현재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현민은 그런 현재를 너한테도 안겨주고자 했다.
이해. 들을 거라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기대도 하지 못했던 말이다. 내가 사랑스럽지 못하니까, 그만큼 힘들어도 견뎌낼 만큼 좋아하질 않으니까- 그래서 다들 떠나버린 거라고 생각하던 랑에게, 이해한다는 말은 큰 충격이었다. 네가 안겨주는 충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괜찮다. 랑의 한쪽 귀가 멀어버리고, 괜찮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세상의 소리가 반절 사라진 어린 아이에게 부모님이 제일 먼저 보였던 반응은 당황이었다. 일어나서 걸음을 떼니 몸의 감각도 이상해 휘청 넘어졌다. 부모님도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 아이가 괜찮다고 먼저 말하는 일이 없었다면- 지금 무언가 달랐을 지도 모른다. 랑은 너와 시선을 맞추지 못 했고, 무슨 말을 하지도 못 했고, 다만 움직였다. 랑을 꼭 끌어안아주는 너를 꼭 끌어안았다. 울음을 참는 건 자신있었지만, 지금은 참는게 전부였다. 너와 마주보기라도 하면, 줄곧 상냥히 바라봐주던 네 눈을 마주하면 참기 힘들 것 같았다.
"이해하면 안 되는데~."
구름처럼 구는 그 목소리다. 이해하지 말아달란 뜻이라기 보다는, 이해할 수 있으면 너도 비슷하게 아파야하는 거 아닐까. 아니, 너도 그런 적이 있어서 이해하는 걸지도 몰라. 사람들 모두 각자만의 상처를 안고 있다고, 그래서 함께 서로를 보듬고 살아간다고- 어디서 그런 말을 보았던 걸 떠올렸다. 너는 역시 과분하게 좋은 사람이고, 바보같이 착한 사람이고, 누구보다 용기 있는 사람이야. 네가 나한테 그렇게 말해준다는 건, 드디어 찾아온 행운이고 행복이라고 믿어도 될까?
"괜찮다고 너무 많이 말하지마."
랑은 네 귓가에 조용히 속살거렸다.
"언제든 오늘처럼 말해줘. 나도 너 안아줄 수 있어-"
너보다는 분명 많이 서툴겠지만, 너보다는 못하겠지만 랑은 그러고 싶었다. 네가 준 것들을 두배로, 세배로, 몇 배가 되든 상관없으니 너에게도 한아름 안겨주고 싶었다.
"그래도, 응. 너랑 있어서 괜찮아."
입고 있는 옷, 평소에 하질 않던 화장, 친어머니의 손길이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랑이 거절해도 한사코 부담스러울 정도로 안겨준 선물. 이런 크리스마스 선물은 원치 않았고, 받아도 그리 기쁘지 않았다. 그래도 네가 예쁘다고 해줘서 괜찮았다. 하랑아, 하랑아- 끊임없이 불리다가도 네가 랑이라고 불러주면 숨을 쉬는 기분이 들었다.
"너도 괜찮을거야."
"나랑 같이 있잖아."
"있지, 꼭 말할게."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랑은 살며시 안고 있던 힘을 풀었다. 더이상 안지 않으려는게 아니라, 너와 마주볼 틈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화장이 아니라 눈물을 참다가 붉힌 눈가, 그럼에도 수줍고 설레는 마음에 뺨에 피운 분홍꽃, 너를 담아 까맣게 비치는- 네가 좋아한다고 말해준 새벽하늘빛 눈동자. 랑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웃었다.
"내 크리스마스 선물은 너야, 현민아."
작은 웃음소리는, 낯부끄러움으로 인한 것이었다. 말하고 싶어서 말했지만 그래도 오글거린달지- 간질거리는 기분에 소리내고 말았다.
랑이는 본인이 직접 하는게 아니면 안무서워해 균형감각이 떨어진다는 건 술취해서 넘어지는 줄도 모르고 넘어지는 거랑, 넘어지는 걸 알아도 몸의 균형을 잡아 바로 서지 못하는 거랑 비슷한 느낌...이라고 생각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현밍이 신뢰도가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 근데 자전거가 더 무섭구나........ 랑이가 큰소리를 싫어하기도 하고(경적소리) 속도가 더 빠르니 당연히 오토바이가 더 무서울 줄 알았다
귀가 아프다기보단 정말 놀라는 것뿐이니까 @@ 평범한 사람들이 신경 안쓰고 그냥 경적 소리 듣고 놀라잖아 랑이는 언제나 모든 소리에 귀기울이려고 노력하고 있다보니까 그런 커다란 소리(청력 문제와 상관없이 크게 나는 소리)가 갑자기 나면 남들보다 더 깜짝 놀라는 것뿐이야 경적 소리 안들린다면 더 상관없지~~
그러나 현민은 견뎌냈다. 견뎌내고, 그럼에도 너를 사랑했고, 너를 가슴에 심었고, 한가득 붉은 꽃을 피웠다. 이해하면 안 되는데- 하고 언제나처럼 몽실몽실하게 피어오르는 그 목소리에, 현민은 목이 메는 것을 있는 힘껏 눌러참았다. 눈시울이 뜨거웠다. 네 품안에 있지만 네 하늘같은 말간 눈동자가 보고 싶은데 이래서야 도무지 눈을 뜰 수가 없다. 그 대신에 현민은 한 팔을 들어서 네 뺨을 매만져보았다.
"언제고 말해줄게."
생각해보면 네가 현민에게 실어준 의미가 정말로 많았다. 너는 그에게 너를 자유롭게 해줄 너의 진짜 이름을 말해주었고, 네 시간을 그에게 주었고, 그의 시간을 받아주었다. 별 의미가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이 조금씩 모이고 모여 거대한 의미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다시 말해 지금 이 순간,
"네가 나랑 있는 게 괜찮다면 언제고 있어줄게."
너는 소년을 꼬옥 안아주기까지 해주었다.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이상의 일을 했다. 그리고 현민도 마침내 그것을 깨달았다.
"...기다릴 테니까, 서두르지 말고 느긋하게 와. 알았지."
그 보답으로 그는 새로운 약속을 네게 건네어왔다. 네게 행운이고, 행복이 되어주겠다는 약속을.
네가 팔의 힘을 살며시 풀자, 현민도 네 품에서 떨어져나왔다. 품에 끌어안긴 바람에 헝클어진 새까만 머리카락. 누가 칠해준 것도 아닌데 넘쳐흐른 감정의 색깔이 곱고 연연한 빨간색으로 들어있는 눈가. 너한테서 옮겨 칠해진 걸까 감색이 되어있는 뺨. 아까 현민이 묻혀달라고 말하고 있는 거잖아, 하던 툴툴대는 소리가 그 위로 겹쳐 보일런지도 모르겠다. 까만 눈동자는 마치 거울처럼 네 말간 모습을, 그가 좋아하는 네 하늘빛 눈동자를 고스란히 비추고 있었다. 그의 눈 안에 오직 너만이 있었다.
네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에, 현민은 더 이상 무언가 네게 말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느꼈다. 너는 이미 이 소년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아들인 모양이니. 그래서 현민은, 발을 짚고 스르륵 매트리스를 떠밀어 몸을 끌어올렸다. 딱 네게 눈높이가 맞을 만큼.
그의 눈에 비친 네가 점점 가까워온다. 가까워올수록 그의 눈꺼풀이 닫혀간다. 가깝고 가까워서, 이제는 그의 잘 보이지 않는 속쌍꺼풀 아래 나 있는 속눈썹의 갯수를 셀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그것보다 네게 더 가까워져 왔다. 그리고, 네게 입을 맞춰왔다.
"고마워."
꿈꾸는 것처럼 현실성없는 길고도 짧은 시간이 지나간 이후에, 현민이 꺼낸 첫 마디였다. 그리고 다음 마디는 이거였다.
"......간식 가지러 갈까."
그리고 때아닌 크리스마스에 또 홍시가 현민의 얼굴에 와르르 쏟아지고 있는 모양이다. 오늘 겨울 내내, 내년 봄까지도, 어쩌면 앞으로 오래오래 꽤 지겹게 홍시농사 짓고 살아야 될지도 모르겠다.
너의 집에 처음 온 날, 돌아가던 길 전봇대 아래에서 네가 랑에게 해주었던 말이다. 방글방글, 구름같이 굴더니 지금은 봄해가 뜬것같이 화사하게도 웃고 있었다. 구름이 개었다면, 분명 네 덕분이다. 뺨에 닿은 손, 몇번이고 말해주는 목소리, 그리고 여전히 느껴지는 품 속의 온기까지.
랑이 너와 마주보기 위해서 힘을 풀었는데, 마주본 얼굴은 서로를 꼭 닮아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하며, 발간 눈가와 뺨, 서로를 비추고 있기 바쁜 눈동자까지. 없는 셈치고 살기에는, 서로 같은 마음을 품는다는게 무엇인지 랑은 지금 느껴버렸다. 이렇게 따뜻한 감정이 가슴 가득 차오르는데 표정을 찌푸릴 수가 없었다. 동그랗고 오밀조밀하게 랑의 얼굴을 채우고 있던 웃음이 사라지고 다른 표정이 생긴 건, 너와 눈높이가 맞았을 때였다. 이전 주제의 마지막 대화를 미루어 볼때, 자려고 했던게 아닌가- 그래서 너를 안아주고 있던건데- 눈높이가 맞아버린다. 랑은 눈을 깜빡거렸는데, 네가 눈높이를 맞춘 이유는 생각보다 금방 쉽게 알 수 있었다.
가까워지면서 눈을 감아오는 너를 바라본 순간, 연애고 사람이고 다 자기 좋을대로 살랑거린 랑이라고 한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 수 있었다. 기말고사 성적에 대고 그런 내기를 내건 이상 그래도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언제 해주면 되느냐고 물었을 때는 생각해보겠다더니! 이런저런 생각이 튀다가 눈을 꼭 감아버렸다. 열일곱의 겨울, 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에 첫뽀뽀였다. 랑은 그야말로 현실감각이 없었다. 그래서 네가 첫마디를 꺼내고, 두번째 마디를 꺼낼때도 조용히 얼굴만 새빨갛게-정말로 새빨갛게 올라있었다. 입고있던 옷의 색과 비교해도 다름없을 정도로- 물들여놓고 너를 보았다가, 다시금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눈을 뜨고 너를 보았다. 노려보고 있었다. 뭐가 간식 가지러 갈까야!
"너어, 첫뽀뽀 가져가놓고! 내가 주려고 했는데!"
선물을 주겠다고 했었다. 랑이 주겠다고. 그런데 지금은 네가 그냥 해버렸다. 이건 시험에 대한 선물로는 무효다! 랑은 조금 심술이 올라서는 네게 다가갔다. 네가 랑에게 다가올 때와 똑같았다. 네게 다가가면서 눈을 감더니, 콕. 부끄러워 새빨간 얼굴에, 하늘빛 눈동자를 곧게 뻗은 속눈썹 아래에 감추더니 쪽 대신 콕이다. 랑은 네 아랫입술을 이로 물어버렸다. 콕 물고서는 뒤로 물러나다 못해 아예 몸을 일으켜 세워 자리에 앉아버렸다.
"다음 시험에는 이런거 말고 다른 선물 줄래. 문제집 줘버릴거야."
심술부리던 랑의 눈에,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챙겨왔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보니 선물도 안 열어봤잖아.